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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5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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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해보는 성경 필사입니다. 막연하게 교리 수업만 받는 줄 알았다가 이렇게 필사도 해야 한다고 하여 끝까지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섭니다. 부디 끝까지 필사를 마무리하여 주님의 말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의 세례 성구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르 13, 36-37)
세례 성구에 대한 묵상
"깨어 있어라." 세상살이하면서도 자주 듣는 말입니다. 열심히 준비하였지만 한순간의 흔들림으로 그동안의 모든 게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 정도면 그만해도 된다 안일한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열심히 하다가도 분명 유혹이 오게 될 텐데 그때마다 나의 세례 성구를 기억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가겠습니다.
성 요셉 3월 19일
나의 주보 성인은 성인 요셉,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십니다. 성당에 처음 오게 된 시기가 가정을 이루고부터입니다. 아이의 유아 세례부터 시작하여 유초등부 미사 함께 참석하면서 저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가족을 통해 성당에 오게 되어서인지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시고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가정을 이끌어 주셨던 성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필사를 마치며
끝까지 다 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던 필사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조금 힘들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하루 중 일정 시간을 필사하며 보내게 되었습니다. 필사하며 막연하게만 알던 예수님의 삶을 마음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루에 은 시간이라도 필사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나의 나머지 인생이 새롭게 태어난 날이다.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을 본받고 나의 세례 성구를 늘 묵상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겠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르 13,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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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20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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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17420466#home )
<머리말>
영어와 중국어: 가장 어려운 조합 영어와 중국어의 조합은 가장 어려운 것이다. 중국어의 글자는 알파벳처럼 표음문자가 아니다. 각 글자는 표의문자나 상형문자로, 글자만으로는 발음을 알 수 없다. 각 단어와 글자는 성조를 가진 단음절이다. 어렸을 때 네 개의 성조를 배우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 배우기는 쉽지 않다. 싱가포르의 시장경제가 세계화되면서 영어를 주 언어로 구사하고 모어를 제2언어로 구사하는 사람들은 더 좋은 자리에 취업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국민들이 싱가포르에서 영어로 생활하는 데 전혀 지장없이 자신의 모어 실력도 더 수준 높게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두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로섬 게임이다. 한 언어를 더 많이 쓸수록 더 잘하게 되지만 덜 쓰는 언어의 구사능력은 퇴화하기 때문이다. 언어 재능은 IQ와 관계가 없다. 언어 능력은 지능과는 다른 뇌의 기능으로, 같은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천차만별이다.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언어 능력이 좋다. (p12)
집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가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이 교사의 능력이다. 우선 학생들에게 적절한 교재가 필요하고, 다른 과목에서 비슷한 실력을 보이지만 언어 수업에서 진도가 다른 학생들에게는 수업의 속도가 적절해야 한다. (p13)
이중언어 상용화에 적합한 싱가포르의 환경 싱가포르는 중국계 학생들이 이중언어 구사자가 되는 데 있어 매우 좋은 사회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영어를 말하는 환경과 중국어를 말하는 환경을 모두 갖추고 있다. 각 언어는 학교와 교과서, 신문사와 방송사, 영화와 도서관을 기반으로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집과 상점, 식당가, 그리고 각종 사회적 장소와 공공장소에서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과거에는극소수의 학생들만 영어로 공부하는 정부의 영어 학교에 다녔다. 그 학생들은 회사원이나 상점주인, 선생님이 됐고 의사나 영국 정부의 관료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중국어(표준중국어와 방언) 공동체가 크게 형성됐다. 그에 따라 영어와 중국어를 모두 배울 수 있는 중국어 기반의 사회적 풍토가 조성됐다. (p15)
주 언어는 하나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한 언어를 주 언어로 삼는다. 언어 능력이 뛰어나 몇 개 언어에 능통하더라도 주 언어는 하나이다. 제2언어를 배우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주 언어보다 낮은 수준일 수 밖에 없다. 가장 실력 있는 중국 출신의 중국어-영어 동시통역사도 중국어를 영어로 통역할 때보다 영어를 자신의 주 언어인 중국어로 통역할 때 더 잘한다. 영어를 모어로 하는 중국어-영어 통역사는 그 반대일 것이다. 젊은 싱가포르인들은 모두 영어가 주 언어이다. 주 언어는 지식을 습득하는 가장 좋은 언어이다. 중국어를 제2언어로 유창하게 구사하는 중국계 싱가포르인은 취업할 때 더 우대받는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은 사용하는 어휘가 제한적이더라도, 일하다가 필요하다면 더 공부하여 실력을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p18)
<추천사 (리루이환)>
리 전 총리는 자신의 언어 경험을 통해 싱가포르의 언어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꿰뚫어 봤다. 리전 총리는 이런 통찰력을 가지고 싱가포르의 언어정책을 연구하고 실행해 나가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말레이어를 국어로 지정한 것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역사적, 지리적 인접성 때문이었다.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한 것은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에서 쓰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면 영연방을 비롯한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해진다. 싱가포르 국내에서 영어를 사용하면 민족 간 장벽이 사라져 서로 동등하게 대우함으로써 민족 간 발생할 수 있는 언어 갈등을 예방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는 각 민족의 고유 언어를 존중한다. 중국계와 말레이계, 타밀계는 각자의 모어를 쓰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모어로 수업을 듣는다. 영어는 '생존의 도구'로서 각종 지식을 얻는 기능적 언어이다. 모어는 그 문화의 전통가치를 전달하는 문화적 언어이다. 싱가포르의 이중 언어 정책은 국가가 처한 환경의 산물이었다. 언어정책은 교육제도를 통해 실행된다. 싱가포르는 '영어+모어' 방식의 이중언어 정책을 펼쳤다. 리콴유 전 총리는 교육제도를 통해 실행한 이중언어 정책이 '해야만 했지만 가장 어려운 정책'이었다고 말했다. 수년 동안 힘들게 정치적 난관을 헤쳐 나가며 정책의 방향을 끊임없이 조정하고 다듬으면서 싱가포르의 이중언어 교육정책은 제1언어는 영어, 제2언어는 모어로 하는 정책으로 점차 진화했다. (p22)
33 36-7 41 47-8
중국어로 공부한 학생 vs 영어로 공부한 학생 식민치하의 싱가포르에서 나는 영어로 공부한 학생과 중국어로 공부한 학생의 차이점을 오랫동안 느낀 바 있다. 영어로 공부한 학생들은 졸업하면 모두 일자리를 얻었고 중국어로 공부한 학생들보다 넉넉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중국어로 배운 학생들보다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건 바로 자신감이었다. 문화적 박탈감 때문이었다. 전쟁 전 말레이반도에 있던 영어 학교 교육과정은 완전히 영어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주입했다. 학생들은 거기에 흡수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문화를 잃어버렸다. 영어로 배운 학생들과 중국어로 배운 학생들의 차이는 뚜렷했고, 이런 대조적인 상황은 평생 잊을 수 없게 됐다. (p52-53)
1956년 10월 중국어 학교 학생들은 배고픔과 경찰의 폭력 앞에 맞서며 부킷티마로드에 있던 중국인 학교에서 또다시 농성을 시작했다. 대립이 정점으로 치달았을 때 차이니스중고등학교 바로 옆 듀니언로드에 있던 말라야대학교의 쉼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이것보다 더 큰 대비는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영어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파티를 하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면서 중국어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는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나라가 큰 사건에 휘말려 있는데 이게 전부 게임으로 보이나?'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상황을 반드시 바꾸리라 다짐했다. 학생들이 전부 대학교 쉼터에 있던 학생들처럼 된다면 싱가포르는 실패할 것이다. (p57-58)
2장 이중언어 사회로 가는 험난한 길 (1959-1987) 싱가포르는 1986년 8월 9일 21번째 건국기념일을 기념하면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처음으로 행사 MC들이 무대에서 영어로 사회를 봤다. 그전까지 MC들은 중국어와 말레이어, 타밀어를 썼었다. 관객들도 영어로 함께 호흡했다. 1959년 인민행동당이 처음 집권한 이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우리의 이중언어 정책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전까지 싱가포르의 다른 민족은 수족관에서 한눈에 볼 수는 있지만 분리되어 있는 서로 다른 어항 같았다. 지금은 민족을 서로 잇는 공용어를 갖게 됐다. 사람들은 중국어든 말레이어든 타밀어든 자신의 모어를 할 줄 알면서도, 모두 영어로 그날 행사의 기쁨을 나눌 수 있게 됐다. 정말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싱가포르가 그렇게 될 때까지 보낸 27년의 세월은 정말 그 가치를 입증했다. (p61)
우리의 교육 목표는 분명했다. 교육은 교육 그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은 국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택지와 처해 있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평가해야만 했다. 어떤 정책이 우리 국민에게 최상의 복지를 선사할까? 우리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과제들을 완수하려면 어떤 사람들이 필요할까? 어떤 계획표가 현실적일까? 정치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나는 단순히 표를 받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명운을 걸어 오지 않았다. 정치를 시작한 것은 싱가포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였다.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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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학교 실험 민족의 장벽을 허물어 공통된 과정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학교 건물과 시설을 잘 활용하기 위해 1960년 우리는 통합학교 계획을 세웠다. 통합학교에서는 한 명의 교장과 통합 행정실이 다른 언어로 공부하는 두 개 이상 학교의 교사와 학생을 관리했다. 오전 수업은 영어로, 오후 수업은 중국어로 하는 식이었다. 학교에 따라 말레이어나 타밀어로도 수업이 진행됐다. 두 학교의 학생들은 조회 시간과 구내식당에서, 체육시간과 방과 후 수업 때 함께 모였다. 첫 번째 통합학교는 부킷판장 정부 중고등학교로, 1960년 개교했다. 1968년에는 전체 초·중·고등학교 중 약 17%가 통합학교가 됐다. 하지만 우리의 통합학교 실험은 뜻하는 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을 한 공간에 두면 영어로 말하는 학생들과 중국어로 말하는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언어를 익히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신들끼리만 놀았���. 1960년대 초에 몇 번 열었던 아네카 라감 라크얏이라는 무료 국민 콘서트가 생각났다. 그 콘서트는 각 민족의 문화 공연 행사였는데, 콘서트를 통해 문화 통합이 촉진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은 민족 고유의 전통과 방식,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를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교들도 마찬가지였다. 각 학교마다 역사와 전통, 문화가 있었고 그런 학교들은 정부 학교와의 통합을 거부했다. 심지어 정부 학교는 배우는 언어도 달랐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영어 학교와 통합학교 양쪽에서 모두 교직에 있었던 한 교사는 통합학교 학생들보다 영어 학교 학생들이 이중언어를 더 잘 습득하더라고 말했다. 영어 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들을 때나 대화할 때 공용어인 영어를 썼지만 통합학교 학생들은 자신의 모어만 썼기 때문이다. 그 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통합학교를 고집하기 보다는 영어 학교를 이중언어 학교로 전환하는 게 정답이라고 결심하게 됐다. 외적 환경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녀를 비영어 학교에 보내기를 원하는 학부모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점진적이고 꾸준하게 감소하고 있었다. 중국어 학교 학생 모집이 부진해지자 1978학년도 첫 학기에는 중국어 학교 30곳이 영어로 수업을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p70-72)
싱가포르의 독립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동거는 2년 만에 끝이났다. 1965년 8월 9일 우리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요구에 따라 말레이 연방을 탈퇴했다. 갑자기 찾아온 독립은 정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육지 하나 없는 섬에서 2백만 인구의 도시국가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정치적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언어정책 역시 수정해야 했다. 정치적 현실이 코앞에 놓여 있었다. 인구의 75%는 수많은 방언을 말하는 중국계였고, 14%는 말레이계, 8%는 인도계였다. 중국어를 싱가포르의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국계가 아닌 나머지 25%가 반대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에서 지리적으로 말레이어를 쓰는 곳에 놓여 있다. 백 년이 지나도 우리는 동남아시아 국가이다. 누구도 그런 현실을 바꿀 수 없다. 몇몇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싱가포르가 중국의 전초 기지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우리 사회 내에서는 끊임없이 불화가 일어났을 것이고 이웃나라들과 갈등만 발생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실패했을 것이다. 경제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싱가포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고작 700km2의 땅에 농사는 꿈도 못 꾼다. 무역과 제조업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투자자를 끌어들여 공장을 지으려면 투자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야 했다. 그게 바로 영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영어는 국제 외교의 언어이면서, 과학과 기술의 언어이자 금융과 무역의 언어였다. 싱가포르인들이 영어를 잘할수록 싱가포르의 경쟁력은 강화될 것이었다. 이처럼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영어가 싱가포르의 공용어가 되어야 했다. 영어는 싱가포르의 모든 민족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각기 다른 모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런던정경대와 캠브리지대학교를 다니면서 모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다. 모어는 문화에 대한 소속감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자존심을 부여했다. 따라서 모든 학생들이 영어와 모어를 둘 다 배우게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정책을 실현시키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 1950년대 좌익 세력과 국수주의자들이 이중언어 정책 때문에 중국어의 위상이 추락할 것이라 주장하면서 발생한 중국어 학교 학생들의 폭력사태는 그런 주장들이 얼마나 학생들의 혼란과 분열을 가중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 중대한 사례였다. 당시에는 모든 학교에서 영어를 제1언어로 가르치게 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영어가 자녀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학부모들이 가질 수 있도록 우리는 천천히 단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이해관계에 밝은 사람들이 이중언어 정책을 수용 하기 시작했다. (p72-74)
나는 싱가포르의 모든 민족은 자신들의 것을 지킬 자유가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아무도 자신의 모어를 배우고 가르칠 자유를 가로막을 수 없다. 하지만 영어를 배우지 않는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그 대가는 시장경제에서의 경쟁력이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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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하나의 주 언어로 설정된다. 두 아들은 캠브리지대학을 나왔고 딸은 의대를 졸업했다. 자녀들은 대학에 다닐 때와 일을 시작하고 나서 영어만 썼다. 그러자 바로 영어가 자녀들의 주 언어가 됐다. 딸은 학교에 다닐 때 중국어 일간지 「신추짓포」와 「난양 샹파우」에 중국어로 기고하기도 했다. 지금도 말은 잘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중국어 작문 실력을 많이 잃었다. 모든 사람은 효율적으로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서 듣고 읽을 때 쓰는 주 언어가 필요한데, 우리는 이중언어 정책을 시행한 지 20년 넘게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통합학교라든지 언어 노출 시간 측정과 같이 새로 도입된 정책들은 집에서 쓰는 언어가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와 연계되지 않고 분리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85% 가까이가 집에서 영어도 안 쓰고 표준중국어도 안 썼기 때문에 당시 학생 대부분에게 영어와 표준중국어는 사실상 외국어였다. (p85)
모어는 문화적 소속감을 준다 언어는 가치를 전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배우면 중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의 핵심을 흡수하게 된다. 충효 사상과 신의, 절제, 가족에 대한 강조, 권위에 대한 존중과 같은 유교적 가치는 국가 건설에 꼭 필요하며 훌륭한 자질을 가진 교양 있는 시민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문화적 소속감을 줄 것이다. 영어와 중국어를 전부 잘하는 것은 정말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충분히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독특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노력해야만 한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문화를 빼앗기고 사이비 서양인이 될 것이다. 우리만의 가치나 문화를 갖지 않고 무분별하게 미국인이나 영국인을 따라 하는 수준의 영어를 구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영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하되, 우리는 영국인이 아니고 영국인이 될 수도 없다는 걸 꼭 기억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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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인민행동당이 중국어 학교를 폐교시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싱가포르의 중국어 학교들은 그 존립이 위태위태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급부상하여 아시아에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게 되면서부터 불길한 조짐이 있었다. 부모들은 탁상공론하는 정치인들보다 자기 자녀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더 잘 알았다. 낡고 오래된 방식으로 중국어 수업만을 고집하던 학교들과 중국어로만 수업하던 난양대학교는 지정학적, 경제적 현실로 인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p94)
난양대학교는 25년 동안 운영됐다. 난양대학교는 1980년 문을 닫고 싱가포르대학교에 합병될 때까지 동남아시아에 있었던 유일 한 중국어 대학교였다. 탄락세는 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하지만 그는 지정학적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아시아를 지배하는 주요세력이었던 영국과 미국이 결코 중국계 친좌익 세력을 통해 중국계 젊은이들이 중국이라는 적대국의 영향을 받도록 두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학이 친중국 성향의 젊은 세대를 양성한다면 중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더 용이하게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중국계 교육이나 문화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대학의 이런 목표를 조용히 무산시키려 했을 것이다. 탄락세는 또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내 정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생 독립국 정부들은 중국발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계했다. 공산주의 운동은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확장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중국 성향의 사업가가 세운 대학은 초반부터 이런 의심을 받았다. 심지어 난양대학교는 말레이시아의 말레이 민족주의 정치인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부터는 중국계와 인도 국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연방정부는 자치적인 중국어 학교들을 장악하여 정부가 운영하는 말레이어 학교로 삼고자 했다. 말레이시아의 중국계를 대변하는 정당인 말레이시아화 교협회가 이에 반발했다. 정부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어 학교들은 살아남았지만 발전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정부는 중국어 학교를 폐지시켰다. 또한 자국민들이 자녀들을 난양대학교에 보내는 것을 우려 섞인 눈초리로 봤고, 이에 난양대학교 졸업생들의 취업 기회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p97-100)
1959년 나는 총리로서 난양대학교가 잘되기를 바라는 중국계 사람들의 열망을 정부가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난양대학교가 국가 결속력을 저해해서는 안 되며 국가가 통합될 수 있도록 이바지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난양대학교의 설립자들이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정부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한 충돌은 예견된 일이었다.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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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행동당 정부가 특수지워계획 과정을 시작한 것은 1980년 난양대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생긴 중국계 사회의 안타까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말들도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나는 국수주의적 감정에 영합하지 않았다. 특수지원계획학교는 중국어로 교육받은 싱가포르인들을 어르기 위한 정치적 유화 수단이 아니었다. 특수지원계획 과정을 시작한 것은 중국어 학교만이 갖는 고유한 가치와 장점이 있고, 그런 점들이 보존됐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내가 어렸을 적 중국어 학교 학생들을 만났을 때 그런 점을 처음 느꼈으며 성인이 되어서 더욱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세 자녀 모두 중국어 초등학교와 중국어 중학교를 보낸 것이다. 싱가포르의 교육 제도를 영어 중심으로 바꿔나가면서도, 그런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무언가 능동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결국 몽땅 사라져버리게 되리라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중국어 학교에서는 오래전부터 예의범절과 권위에 대한 존중 절제력과 문화적 뿌리에 대한 인식, 사회적 책임감과 같은 가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학생들은 교육과정의 일부로써 화장실 청소를 했다. 중국어 학교 학생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절제와 성실함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배웠다. 반면에 영어 학교 학생들은 절제의 중요성을 잘 몰랐다. 영어 학교 학생들은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도 떠들기 일쑤였다. 중국어 학교에서 배우는 가치들을 잘 지켜내 영어 학교에서도 이런 점들을 배우기 바랐다. (p144)
나는 1978년 8월 13일 건국기념일 기념식 연설에서 지난 3, 40년 동안 지켜봐 온 바 중국어로 교육받은 학생들과 영어로 교육받은 학생들의 차이점에 대해 5분으로 압축하여 말했다. 당시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도덕적 잣대와 목적의식이 반영되는 자신만의 철학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다. 싱가포르에 설립된 중국어 학교들은 초창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교과서로 수업을 했다. 이 교과서 대부분은 중국 황제와 황태후의 모자람과 외세의 지배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식을 가르쳤다. 이런 생각들이 현대 중국의 시초를 알리는 신해혁명을 유발했다. 이런 교육 시스템하의 학생과 교사들은 사회적, 정치적 의식이 있었으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자 했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공동체가 다른 어떤 것에 우선한다. 학생들은 매우 활기찼다. 소풍을 준비할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파업을 조직했다. 1950년대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폭탄을 설치해 사람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혁명 정신이 점화되어 국가의 통일과 단합에 대한 열망이 표출됐다. 20세기 초 싱가포르로 이주해 온 중국계 이민자들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그런 통합에 대한 열망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싱가포르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계 싱가포르의 젊은 세대들에게 중국의 역사와 철학 지식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수지원계획학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도 거의 그랬지만 문화적 뿌리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자신감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세상을 잘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아는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영어를 먼저 배웠기 때문에 중국어보다는 영어를 잘한다. 하지만 내 가치관과 사고방식, 외모는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이다. (p145-146)
중국어를 배운다고 해서 중국의 가치 체계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코 아니다. 하지만 도움은 될 것이다. 서양의 가치 체계는 개인과 개인 권리의 우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 윤리 체계에서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의무를 다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어린 세대부터 그런 가치관을 배운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특수지원계획학교는 이런 이유로 생긴 것이다.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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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특수지원계획학교를 둘러싼 잡음은 주기적으로 나왔다. 1999년 인민행동당의 샨무감 의원은 특수지원계획학교 시스��은 싱가포르의 다민족 정신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부총리였던 리셴룽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중국계 학생 상위 30% 중 30%만이 특수지원계획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부를 잘하는 중국계 학생 대다수는 일반 학교를 선택했다. 리셴룽은 세월이 흐르면서 각 민족 공동체는 서로 더 가까워졌지만 더 큰 차원에서 각 민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어 학교의 전통을 보존할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했다. "현재 새로운 상황에서 우리는 전쟁 후 다시 태어난 싱가포르가 겪은 역사적 환경에서 생겨난 것들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을 크게 부풀려 일을 진행시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이전 세대가 가지고 있던 좋은 것들을 변형된 방식으로 보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리셴룽은 특수지원계획학교를 통해 중국계 문화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계획은 다민족주의와 실력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며 소수 민족들을 안심시켰다. "중국계 문화 엘리트란 중국계 문화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작가나 예술가가 될 수도 있고 향우회나 민족 공동체의 지도자, 교육자, 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문화를 향유할 뿐만 아니라 문화를 발전시키고 다음 세대에 전수할 수 있을 정도로 문화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중국어로 교육받은 싱가포르인들이 이 사회에서 요직을 독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부는 결단코 그렇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재능과 민족 간 조화의 중요성을 생각해 본다면 실력주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민족과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가장 유능한 사람이 일자리를 얻고 능력과 기여도에 따라서만 승진할 수 있는 원칙 말입니다." (p15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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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언어 상황에서 인민행동당 정부가 당면한 문제점은 언어 집단 간 거주지의 분리였다. 영어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소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과는 섞이지 않았고 이는 방언을 쓰는 사람들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의 2장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개 언어를 한 울타리 안에서 사용하는 통합학교를 운영했다. 그리고 모든 학교에서 제2언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했다.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학교들은 영어를 제2언어로 가르쳤고, 영어 학교들은 중국어나 말레이어, 타밀어 중에서 선택과목으로 제2언어를 가르쳤다. 우리의 목표는 중국계 사람은 영어와 중국어를 할 수 있게 만들고, 말레이계 사람은 말레이어와 영어, 인도계 사람은 타밀어와 영어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라는 대로 나아지지 않았다. 15년이 지난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문제의 핵심은 방언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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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발표된 고켕쉬 보고서는 분수령이 됐다. 교육 시스템에 수준별 학급 편성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 보고서는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어떤 부모도 자신의 자녀가 열반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켕쉬 보고서는 이중언어 정책의 이정표라 불러야 마땅했다. 보고서는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와 가정에서 쓰는 언어가 달라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충돌이 언어 시험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저조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보고서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많은 싱가포르인들은 현재의 학교 시스템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와 표준중국어, 이렇게 두 언어로 수업을 듣고 있다. 이 학생들의 85%는 집에서 영어와 표준중국어 둘 다 사용하고 있지 않다. (…) 세상에 재앙이 일어나서 영국의 어린이들이 학교에서는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배우고 집에 와서는 영어를 쓰게 된다면 영국 교육 시스템은 싱가포르와 싱가포르의 교육부를 좀먹고 있는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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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나는 교육자들과 언론인, 학부모, 교사와 학생들이 참여하는 TV 공개 토론회를 두 차례 열어 해당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번은 영어로, 한 번은 중국어로 진행된 토론회에서 나는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게 표준중국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방언을 사용하면 학교에서 표준중국어와 영어를 배우는 데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표준중국어가 설 곳을 잃고 영어의 입지만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는 국민 정서상 공용어나 모어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정서적으로 공용어로 받아들일 만한 언어가 없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무기력하다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자신감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표준중국어는 정서적으로 모어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말레이어와 타밀어가 그럴 것이다. 표준중국어는 방언 집단들을 통합한다.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표준중국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5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대 문명의 후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한 민족에게 거대한 변화와 도전에 맞서고 극복해 낼 수 있는 자신감을 부여하는 깊고 강한 정신적인 힘이다. (p187)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중국어 말하기 캠페인에 반대하는 네 부류의 그룹들이 존재했다. 첫 번째 그룹은 나이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방언을 사용했다. 심적으로 방언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중국계 지식인들로, 중국어의 글자는 도외시하고 말하기만 강조하는 것은 중국어의 수준을 저하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세 번째 그룹은 영어로 교육받은 지식인들로, 표준중국어를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중국어는 사회적 지위가 낮고 경제적인 가치가 없는 언어였다. 네 번째 그룹은 마음이 편치 못한 비중국계 사람들로, 캠페인이 성공하면 자신들은 소외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장래에는 자신들도 표준중국어를 배우게 돼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방언이 계속해서 사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방언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는 비판일 뿐이며,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뿌리'는 싱가포르이다. 나에게 있어 '뿌리를 잊는 것'이란 전통과 언어를 모르는 것이지 방언을 모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p200-201)
전체적으로 봤을 때, 중국어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표준중국어 말하기 캠페인에 대해 두 가지의 다르면서도 상반되는 태도를 보였다. 한 가지 입장은 중국어가 영어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반대 입장의 사람들은 캠페인의 목적이 표준중국어 사용을 장려하여 영어 사용을 위축시키려는 것이라고 오해를 했다. 우리는 그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어는 다른 언어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영어는 이미 국제 무역과 외교의 언어이며, 싱가포르에 있어서는 생존과 발전의 언어였다. 우리는 중국어 때문에 영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영어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단지 캠페인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표준중국어는 덜 중요한 언어라고 조소하며, 표준중국어를 못 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어떤 지장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가 싱가포르인들에게 표준중국어 사용을 권장하는 것 자체에 분개했다. 내 답변은 이랬다. 자녀가 없다면 표준중국어를 배우지 마시라. 하지만 자녀가 있다면 자녀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재고하시라. (p202-203)
2009년 난양이공대학 언어학부의 응비친 박사는 한 언어학 포럼에서 방언을 부활시키는 것에 대한 희망을 은근히 내비쳤다. "아직도 싱가포르인들은 많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40년 전에는 더 많은 언어를 사용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더 이상 이런 언어들을 쓰지 않습니다. 언어 하나가 사라지는 데는 한 세대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많은 언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우리가 노력한다면 현존하는 언어를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어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봤을 때 이는 어리석은 주장이었다. 당시 내 수석보좌관이었던 치홍탓은 나를 대신하여 답했다. "언어를 하나만 쓰는 것은 다른 언어를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더 많은 언어를 배울수록 그 언어들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려워집니다. 언어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많은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50년 넘게 이중언어 교육 정책을 시행해 오면서 사람들 대부분이 영어와 표준중국어라는 두 개 언어를 하는 것도 매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방언 사용을 자제시킨 것입니다. 방언은 표준중국어와 영어를 배우는 데 지장을 줍니다. 지금 많은 싱가포르인들은 영어와 표준중국어를 둘 다 잘합니다. 난양이공대학을 비롯하여 어떤 싱가포르의 단체라도 방언 사용을 옹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어와 표준중국어의 위상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p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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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정책 중에서 모어 교육 정책만큼 조정과 검토를 많이 한 정책은 없다. 특히 중국어는 더욱 그렇다. 국가의 필요와 개인과 공동체의 염려 및 선호 사이의 역동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이런 조정과 검토를 피할 수 없었다. 1987년 모어 학교는 전부 사라졌고 싱가포르의 모든 학교는 영어로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교육 정책 중 언어 문제는 계속해서 조정될 것이다.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할 뿐 아니라 국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효과적인 방식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 정책에서도 인센티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적재적소에 인센티브를 마련하는 것 역시 최적의 균형점을 찾는 것만큼이나 큰 도전이다. 되돌아보면 이중언어 정책에 대한 내 철학에는 두 가지 이정표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70년대 중반에 알게 된 것으로, 사람들은 두 개 언어를 똑같이 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언어보다 더 빨리 생각하고 더 빨리 정보를 받아들이는 주언어를 하나만 가지고 있다. 이런 믿음은 싱가포르의 이중언어 정책에 지속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내 철학의 또 다른 이정표는 지능은 언어 능력과 관계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나는 한때 지능이 높은 사람이 언어를 더 잘 섭렵할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더 똑똑한 학생은 학업에서 뒤처지는 학생들보다 언어를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수년 동안 해왔었다. 그러다 신경과 전문의인 내 딸 웨이링이 그런 생각을 바꾸게 했다. 웨이링은 언어 능력과 지능은 뇌의 다른 부분이 관장하 기 때문에 서로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p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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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교육 정책의 조정 2000년 나는 학생들이 중국어를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특히 리셴룽 위원회의 보고서에서 중국어 'B' 교육과정 제안에 잇따른 논쟁들을 살펴봤다. 논쟁의 대부분은 핵심을 비켜났다. 내가 봤을 때 문제의 핵심은 중국어 교육과정의 쉽고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는 방식의 문제였다. 나는 교육부가 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칠 때 영어를 더 많이 사용하게 하기를 바랐다. 받아쓰기와 외워쓰기 같은 것을 강조하는 기존의 중국어 교수법에 익숙한 중국어 교사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중국어를 영어로 가르치기 꺼려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중국어 교사들은 중국계 학생들이 중국어를 배울 때 다른 언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내 중국어 선생님이었던 난양대학교 국립교육원의 고옝셍 박사는 자신의 주 언어인 중국어로 영어를 배웠다. 고옝셍은 누군가 전혀 접해 보지 않은 언어를 배울 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가정의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칠 때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p236)
나는 위원회의 위원들에게 중국어 교육의 대대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중국어를 적절한 속도와 적절한 수준으로 배울 수 있도록 시스템을 좀 더 유연하게 개선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중국어나 방언을 사용하는 가정보다 영어를 사용하는 가정의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글자 쓰기는 학생들이 전자기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쓰기 교육보다는 말하기, 듣기, 읽기 교육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내가 평생 동안 중국어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느낀 바였다.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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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이중언어 정책을 추진한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사실 이중언어 정책 때문에 표를 많이 깎아 먹었다. 자녀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이민을 간 가정들도 있었다. 반면에 중국계 사회에서는 중국어의 수준이 저하되고 있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았다. 후회되는 것은 중국어 교육에 맞춤형 방식을 좀 더 일찍 도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랬다면 다른 학업 능력에 지장을 주지 않고 학생의 언어 능력과 가정환경에 따라 적절한 수준과 교수법이 적용됐을 것이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공동체 일각에서는 앞으로도 중국계 사람들이 중국어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배울 수 있고, 그렇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나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언어학습은 민족의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재능과 환경의 산물이다. (p250)
싱가포르인들이 중국에서 인정받는 이유는 중국어와 영어를 둘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어만 할 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토 중국인만큼 중국어를 잘 한다고 해도 중국과 중국인들에게는 큰 메리트가 없다. 이미 인구가 13억 명이기 때문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인들은 영어권 세계에 대한 지식과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로 인해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싱가포르인들은 영어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미국, 유럽, 일본, 인도, 아세안 국가들의 시스템과 사람들, 문화와 친숙하고 잘 소통하고 있다.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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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닝성에서 온 왕지아닝이라는 관료는 [난타후판]이라는 중국 관료 연수과정의 학생 잡지에 기고하여 싱가포르는 '온전히 세계화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썼다. 싱가포르 정부의 개발 철학과 싱가포르인들의 사고방식, 생활양식 등에서 이런 점을 느낀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영어의 상용화로 인해 싱가포르인들은 세계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앞서 나가고 있다. 싱가포르를 추천하는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동서양 사고방식의 독특한 조화이다." 광시성에서 온 간윈이라는 관료는 싱가포르의 성공은 현대 서구의 민주주의가 동양의 전통 문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썼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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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중국이 아직 서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시기로, 장쩌민 주석은 만찬장에서 수시로 미국과 서구에 대한 내 관점을 물었다. 한 번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서양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죠? 말씀 좀 해주세요." 나는 "중국이 한 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서양은 중국을 두려워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저라면 서구에서 사람들이 오면 성공한 곳에는 데려가지 않을 겁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낙후된 곳에 데려가는 거죠. 그러면 주석님이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할 겁니다." 장쩌민 주석은 내 말대로 했다. (p264-265)
싱가포르인들은 예전에 비해 이중언어를 잘 구사하지만 중국인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중국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어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협상하는지를 아는 것 역시 중요하다. (p268)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얻은 교훈은 중국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절대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을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경쟁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쑤저우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우리는 중국인들과의 합작 프로젝트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꿨다. 지금 우리는 경영진단 쪽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우리와 일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각각의 프로젝트별로 협상을 진행한다. (p270)
나이든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대부분 중국어로만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중국계 문화 정체성이 매우 강하고 분명하다. 그러나 그다음 세대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좀 더 세계화됐고 싱가포르의 국제화된 환경과 맞물려 중국계로서의 문화 정체성은 약화됐다. 싱가포르의 말레이계나 인도계도 마찬가지이다. 싱가포르가 중국과 더 긴밀해지기 위해서는 영어와 중국어를 잘하는 이중언어 구사자만 양성할 것이 아니라 서구와 중국의 문화를 모두 깊이 이해하는 이중문화주의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p271)
중국계 싱가포르인들 중 일부는 싱가포르에 온 중국인 이민자들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민자들과 이민자들의 자녀가 일자리와 학업에서 싱가포르인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몇몇 싱가포르인들은 이민자들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학교 성적에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염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싱가포르의 출산율이 점점 저하되면서 우리의 인구와 인적자원을 늘리기 위해서는 이민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특히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의 출산율은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민족들 중 가장 낮다. 이민자들을 수용하지 않으면 수십 년 안에 싱가포르의 인구는 줄어들고 경기는 침체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쓸모없는 뒷방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p275)
8장 이중언어 정책의 여덟 가지 원칙
언어 정책 수립은 필수적이다 첫 번째 원칙은 언어 정책은 국가의 이익과 목표를 달성하고 국가를 관리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올바른 언어 정책은 바깥 세계와의 의사소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민족적으로 언어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된다. (p280-281)
언어 정책은 국가를 만든다 두 번째 원칙은 언어 정책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언어 정책은 정말 국가를 만들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 우리는 행정 언어로 영어를 선택함으로써 중국어 대신 말레이어를 선택했다든지 말레이어 대신 중국어를 선택했다면 겪었을 정치적 혼란을 면할 수 있었다. 언어 문제는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싱가포르는 모든 민족과 공동체를 동등하게 대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해 온 덕분에 민족 간의 불화를 잠재울 수 있었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우리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영어 구사능력은 국민들의 일자리를 안정화했다. (p282)
언어는 가치를 전달한다 세 번째 원칙은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중국어나 말레이어, 타밀어 중 자신의 모어를 제2언어로 배우게 한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각 민족이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문화유산에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다. (p283)
어릴 때 시작하라 네 번째 원칙은 내 경험에서 기인한다. 언어는 어릴 때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 언어 학습은 가능한 한 뇌가 가장 잘 받아들이고 기억력이 좋은 시기인 유아 때 시작하는 것이 좋다. 나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성인이 되어서야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중국어로 연설해야 했다. 고군분투해야 했다. 중국어로 연설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강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싱가포르에서 모든 어린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영어만이 아니라 제2언어도 함께 배우게 하는 것이다. 이중언어 교육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나라들은 별로 없다. (p284)
주 언어는 하나다 다섯 번째 원칙은 10년 넘게 교육 정책을 수립하고 조정하는 과정 끝에 1970년대 중반 깨닫게 된 사실로, 사람마다 주 언어는 하나라는 것이다. 1960년대에 비하면 나는 지금 중국어를 훨씬 더 잘 하게 되긴 했지만 확실히 내 주 언어는 영어이다. (…) 두 언어를 똑같은 수준으로 잘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중언어 구사자도 있고 3중언어 구사자도 있지만 가장 잘하는 언어는 하나다. 주 언어는 생각할 때 디폴트값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언어이다. 예외도 있긴 하겠지만 매우 드물다.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해 실책을 했던 적이 있다. 나는 학생들이 제2언어를 제1언어만큼 잘 하기를 요구했고 학생들이 잘 해내지 못하자 교사들의 탓을 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사람의 뇌는 한 언어만 배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이런 깨달음으로 우리의 교육 정책은 방향을 전환했다. 그중 하나는 대학에 입학할 때 모어 시험의 요건을 완화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모어 시험 점수를 대학진학시험 총점에 합산했었는데 현재는 모어 시험에서 최소한의 점수만 넘으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p285)
적합한 환경 조성 여섯 번째 원칙은 다섯 번째 원칙과 일맥상통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언어만 완전히 잘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2언어를 아주 잘하기를 기대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 어릴 때부터 언어를 배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교는 학생들이 기초 문법과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어휘를 충분히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 언어들을 더 배우면 된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어렸을 때 배우는 언어의 기본지식은 필요할 때 더 배울 수 있도록 평생 동안 남게 된다. (…) 또한 오늘날의 컴퓨터에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어 중국어 글자를 쓸 때 그 글자가 소리 나는 대로 로마자를 입력하면 된다. 중국어 글자를 일일이 다 쓸 줄 몰라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칠 때는 쓰기보다는 말하기, 듣기, 읽기를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한 언어는 적극적이고 즐겁게 가르쳐야 한다. 교육부의 관료들은 학교의 모어 수업시간의 커리큘럼을 개정하여 그런 부분을 반영했다. 모어 교육에 대한 수많은 조정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모어를 따분하지 않고 더 즐겁게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p286)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일곱 번째 원칙은 언어 습득 능력은 지능과 상관없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언어 교육은 수준별 맞춤형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방식의 교육과정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어려울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매우 쉬울 것이다. 모어를 배우는데 재능과 흥미가 있는 학생들에게는 더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 학생들은 주니어대학에 가서 중국어 선택과목 과정을 듣거나 중학교에서 일반 중국어와 함께 고급 중국어를 들을 수 있다. (p287)
언어 정책은 끝이 없다 내 마지막 원칙은 언어 정책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이중언어 정책은 수많은 조정 과정을 거쳐 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조정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와 흥미를 충족하기 위해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상당히 유연해졌지만 앞으로도 미세한 조율은 끊임없을 것이다. 언어 정책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그에 맞춰 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언어 정책은 국가의 이익과 목표를 달성하고 국가를 관리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첫 번째 원칙에 부합할 수 있다. (p288)
리콴유 , ' 리콴유가 전하는 이중언어 교육 이야기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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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 mo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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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amazon.com/Lincoln-Lawyer-Novel/dp/1455516341 )
경찰은 고발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검사장의 기소로 법정에 올라갈 때이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사건이란 들어갈 때는 사자 같고 나올 때는 어린 양 같다. 강간 미수나 가중폭행 같은 사건은 얼마든지 단순폭행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뜻이다. (p13)
나는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유치장 안에 들어가는 일은 늘 언짢았다. 철망이 너무 가늘어서일까? 형사법 변호사와 범죄자 변호사 사이의 구분선. 가끔은 철망 어느 쪽에 내가 서 있는지조차 모호할 때가 있다. 철망 안쪽에 있지 않은 것이 내게는 늘 천운에 불과했다. (p24)
28
그리고 나는 내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내가 해온 일이나 말에 꿇릴 것은 없다. 이건 내 직업이고 이 일은 이런 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개업한 지 15년, 이제는 아주 단순한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 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다. 나는 괴물을 다루고 질병을 고쳐주는 전문가이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내는 것뿐이다. 지키고 품어야 할 법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사자주의, 억제와 균형, 정의의 추구 같은 로스쿨 개념은,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조각상처럼 부식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곳엔 오직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무죄냐 유죄냐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유죄 아닌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건이란 싸구려 하청으로 지어진 건물과 같다. 귀퉁이를 잘라먹고 철근을 빼먹고 거짓말로 그 표면을 색칠해버린 빌딩. 따라서 내 일은 날림공사의 페인트를 벗겨 균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균열마다 손가락을 밀어 넣어 더 넓혀 놓아야 하고, 균열을 있는 대로 키워 건물을 무너뜨리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그 안에서 의뢰인이라도 빼내면 된다. 사람들은 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나는 다만 교활한 천사일 뿐이다. 나는 진짜 로드세인트이다. 그들은 나를 원하고 필요로 한다. 시스템이 나를 원하고 범죄자들도 나를 원한다. 나는 윤활유이다. 기어를 부드럽게 만들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지켜야 하는 윤활유이다. (p35-36)
"어, 그가 한 거래요?" 로라는 언제나 이런 식의 부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사실 피고가 범행을 저질렀느냐 아니냐는 사건의 전술에 비추어 별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증거이고 증인이며,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중화해낼 것이냐의 문제였다. 내 직업은 증거를 묻어버리고 그 위에 회색 물감을 타는 것이다. 회색이야말로 합리적 의속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p62)
"루이스, 자리에 앉게. 이건 경찰보고서일 뿐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네. 반드시 사실이어야 할 필요도 없어. 그냥 사실이라고 믿는 누군가의 견해일 뿐이니까. 지금은 사건을 대충 훑어보고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를 보자는 거야." (p100)
"만일 거짓말이라면 이건 내 평생 가장 쉬운 사건이 될 걸세. (...) 그러니 진정하라고, 루이스. 중요한 건 자네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야. 변호란 늘 기회를 노리는 게임이니까." (p102)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사자가 나서는 순간 사건은 기정사실이 되고 마니까요. 사건에 생명을 제공하는 셈이죠. 정보는 산소입니다. 그게 없으면 뉴스는 죽어버리죠. 제 말은 뉴스를 죽여 버리자는 겁니다." (p109)
"변호사에게 가장 끔찍한 의뢰인은 무고한 사람이라고 했어. 까딱 잘못해서 그가 감옥에 갈 경우 평생 괴로워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지. (...) 무고한 고객에게는 중간이 없다는 거야. 타협도, 협상도, 중도도 없어. 오직 한 번의 판결뿐이지. 점수판에 '무죄'라고 적어놓기라도 해야 할 거야. 무죄 말고 다른 선택은 없으니까 말이야."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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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완벽한 기억을 신뢰하지 않는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증인의 기억에서 약점을 끄집어내는 것이 내 직업이자 노하우가 아닌가. 누군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난 무턱대고 긴장부터 한다. 특히 피고 쪽이라면 더더욱. (p125)
"루이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간단하게 말해주지.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아나? 난 중화제야. 검사의 증거를 묽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거지. 증거와 증언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서 논점에서 제거해버리는 게 내 일이라고." (p150)
"언젠가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 사람은 자고로 인생을 다 살고 나면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 사회를 따뜻하게 해주는 장작이 되었는지, 아니면 반대로 그 장작을 빼앗았는지 반성하라는 말이겠지. 그래, 할러, 난 장작이오. 그래서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지. 문제는 당신네들 아닌가? 늘 장작을 빼앗을 궁리만 하니까 말이오." (p156)
나는 마치 물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내가 한 말이 모두 기포 속에 들어가 어디론가 흘러가버리고 있었다. 이렇게 말을 알아듣지 못하다니. 그리고 나는 뭔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치명적인것이 있었다. 테드 민튼이 초짜인지는 몰라도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다. 그런데 나라는 놈은 그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에, 여태껏 헛다리를 짚고 있었던 것이다. LA 카운티의 검사실은 로스 쿨에서도 알짜들만 빼온 집단이다. 그가 남부 캘리포니아를 언급했는데 그곳이 초일류 변호사들을 양산해내는 로스쿨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자의 경험이 일천할지는 몰라도 법지식까지 일천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해를 못하는 것은 이자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군." (p163)
나는 파일들을 옆으로 밀치고는, 안짱다리를 하고 앉은 채 한참동안이나 꼼짝하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속삭임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는 무죄라고 외치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지저스의 얼굴도 떠올랐다. 제발 믿어달라고 했건만 난 그에게 유죄를 인정하라고 다그치기만 했다. 내가 제공한 것은 법적 조언 이상이었다. 그에게는 돈도 없었고, 변호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돈이 없었기에 변호도 없고 기회도 박탈당한 것이었다. 그렇다. 난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유죄라는 단어를 인정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결정이고 그의 입이었다 해도, 지금 내 기분은 그 반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변호사의 권위를 앞세워 그의 목에 시스템의 칼을 대고 항복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p202)
203
나는 허리를 굽히고 무릎에 팔꿈치를 받치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2년 전에 찾아온 기적이었지만 난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기적처럼 찾아온 무고한 의뢰인을 알아보지도 잡아주지도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의뢰인들처럼 통째로 시스템의 밥으로 던져주고 만 꼴이었다. 이제 그의 무고는 잿빛으로 바래고 차갑게 굳어버렸으며, 대리석과 강철의 성벽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그리고 난 그 죄 의식을 품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p208)
209 218
"내가 제일 무서워한 게 뭔지 알아?" 내가 물었다. "뭔데?" "무고한 의뢰인을 못 알아보는 것. 그런 자가 나타났을 때 몰라볼지도 모른다는 거였어. 유죄나 무죄 얘기가 아니야. 말 그대로 무고를 말하는 거야. 무고한 의뢰인." 매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무서워해야 할 건 따로 있었어." "그게 뭐야?" "악마. 악 그 자체." (p274)
재판 경험이야 상대보다 월등히 많지만 그렇다고 본질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나는 기껏 법이라는 거대한 발톱 아래 서 있는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가 생애 최초로 중범재판을 맡은 초짜이기는 해도, 내가 가진 이점은 결국 거대 조직의 권력과 체계로 인해 십분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검사의 논고에는 전 사법체계의 힘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대항하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내 자신과 죄를 지은 의뢰인뿐이었다. (p288)
내 작전의 약점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p289)
352==
"난 할 일을 하는 거요, 형사." "하, 대단한 일이로군. 먹고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이 진실을 못 보게 막고, 세상의 진리를 망가뜨리는 일? 하나만 묻겠수다. 구더기하고 변호사의 차이를 아쇼?" "아니, 무슨 차이죠?" "하나는 똥벌레고 다른 하나는 돈벌레라는 거요." "좋은 농담이오, 형사." (p354)
- 마이클 코넬리 , '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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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3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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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amazon.com/Chip-War-Dominate-Critical-Technology/dp/1797147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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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의 글로벌 확장은 곧 발이 묶이고 말았다. 제품 라인 전체가 생산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거대 기업이 기술적 질식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기업은 모두 현실을 깨달았다. 모든 현대 전자 기기가 의존하고 있는 반도체는 외국인이 만들고 있고, 중국의 목숨이 반도체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미국은 여전히 실리콘 반도체를 꽉 틀어쥐고 있다. 비록 그 입지가 위험할 정도로 취약해져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을 가진 곳을 보유한 나라다. 오늘날 중국은 반도체 수입에 석유보다 많은 돈을 쓴다. 그 반도체는 스마트폰에서 냉장고까지, 중국 국내에서 소비되거나 해외로 수출되는 그야말로 모든 기기에 꽂혀 있다. 책상물림 전략가들은 중국이 "말라카 딜레마 Malacca Dilemma"에 빠져 있다고 보곤 했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주요 항해로인 말라카해협의 이름을 딴 그 이론에 따르면, 중국은 석유 및 다른 원자재 확보로 인해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베이징은 석유 수입 항로가 막히는 것보다 반도체 회로가 막히는 것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중국은 최고의 지적 자원과 수 십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자체 반도체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칩으로 자신들의 목을 조르는chip choke 미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p29)
중국의 반도체 독립이 성공한다면 세계 경제를 다시 만들고 군사력의 균형을 재설정하게 될 것이다. 강철과 알루미늄은 2차 세계대전의 승부를 갈랐다. 그 뒤를 이은 냉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핵무기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이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아마도 컴퓨터의 힘computing power(컴퓨터가 주어진 시간과 자원으로 얼마나 많은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느냐를 논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저자는 computing power라는 단어를 기술적 차원을 넘어 반도체를 개발, 생산, 유통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이라는 중의적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computing power의 기술적 의미가 중요할 때는 '연산력'으로, 그렇지 않을 때는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옮긴다.-옮긴이)에 의해 판가름 날 것이다. 베이징과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이제 안다. 머신러닝에서 미사일까지, 자율 주행 차량부터 군사용 드론까지 모든 고급 기술은 최첨단의 칩, 좀 더 격식 있게 말하자면 반도체나 집적회로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그 생산은 극소수의 기업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p30)
우리는 칩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도체는 현대 세계를 만들어 왔다. 여러 나라의 운명은 컴퓨터의 힘에 따라 좌우되어 왔다. 우리가 아는 세계화는 반도체 및 반도체로 만들어내는 전자 제품의 교역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군사 우위는 칩을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에 크게 빚지고 있다. 아시아는 실리콘을 발판 삼아 지난 20세기의 절반 동안 무섭게 부상할 수 있었다. 아시아 국가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칩을 찍어 내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조립하는 일에 특화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집적회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p30)
이러한 반도체 생산 절차 중 단 한 단계라도 삐끗하게 되면 세계를 향한 새로운 연산력의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시대와 함께 데이터를 새로운 석유로 비유하는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제약은 데이터가 부족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연산력 부족이 진짜 문제다. 반도체가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수는 유한하다. 반도체 생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며 끔찍할 정도로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다. 여러 나라에서 구입할 수 있는 석유와 달리 연산력의 생산과정에는 근본적으로 몇 개의 병목 지점이 존재한다. 장비, 화학물질, 소프트웨어 등의 요소가 단지 몇 개. 때로는 오직 하나의 회사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적은 수의 기업에 이렇게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경제 영역은 오직 반도체뿐이다. 대만에서 생산하는 칩은 매년 세계가 소비하는 새로운 연산력의 37퍼센트를 제공한다. 한국의 두 기업은 세계 메모리 칩의 44퍼센트를 생산한다.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머신 공급은 네덜란드 기업 ASML에 100퍼센트 의존하고 있는데, 그 장비가 없다면 최첨단 반도체의 제작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불가능해진다. 세계 석유 공급의 40 퍼센트를 점하고 있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마저 이 회사들과 비교해 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아 보일 지경이다. (p38-39)
벨연구소는 1948년 기자회견을 통해 과학자들이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전선이 연결된 게르마늄 덩어리가 왜 특별 발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뉴욕타임스>는 그 소식을 46면에 처박아 버렸다. <타임> 지는 그나마 좀 나아서 트랜지스터의 발명에 "작은 뇌 세포"라는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엄청나게 작은 크기의 트랜지스터가 수천, 수백만, 수십억 개씩 모여서 인간 두뇌가 수행하던 계산 업무를 대체하는 미래가 머지않아 닥쳐올 것이라는 점만큼은, 본인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하는 일이 없었던 쇼클리마저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p61)
여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연구원들은 새 동료가 혁명적인 발상을 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리콘 혹은 게르마늄 조각 하나 위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킬비는 자신의 발명에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대체로 "칩chip"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원형의 실리콘 웨이퍼에서 "잘라 낸chipped" 실리콘 조각에 집적회로가 구성되기 때문이었다. (p66)
노이스는 나사를 위해 칩 생산을 늘리면서 다른 고객들에게는 가격을 대폭 낮췄다. 1961년 12월 120달러에 팔리던 집적회로는 이듬해 10월 15달러까지 가격을 인하했다. 나사가 우주 비행사를 달에 보내는 데 집적회로를 사용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신뢰의 상징이나 다를 바 없었다. 페어차일드의 마이크로로직 칩은 더 이상 검증되지 않은 테크놀로지가 아니었다. 가장 가혹하고 험난한 환경, 바로 대기권 밖에서도 작동했으니 말이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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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물리학상은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쇼클리, 바딘, 브래튼에게 수여되었다. 잭 킬비는 훗날 최초의 집적회로 발명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밥 노이스가 62세로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아마 그도 킬비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발명은 결정적인 것이었지만 반도체 산업을 만들어 나가기에는 과학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이론물리학만큼이나 영리한 제조 기술이 있었기에 반도체가 확산될 수 있었다. MIT나 스탠퍼드 같은 대학은 반도체와 관련된 지식을 개발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지만, 그러한 대학을 나온 이들이 몇 년에 걸쳐 제조 공정을 뜯어고치고 개선해 오지 않았다면 대량 생산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벨연구소의 특허가 세계를 바꾸는 산업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 이론 뿐 아니라 엔지니어링과 직감에 힘입은 것이었다. (p85)
90, 1
하지만 페어차일드반도체는 여전히 동부 해안의 한 억만장자의 소유였다. 그 억만장자 투자자는 직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었지만 스톡옵션 지급만은 한사코 거절했다. 지분을 나눠 주는 발상을 일종의 "소름 돋는 사회주의"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직원들은 이 회사에 자신의 미래가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공동 창업자 중 한 사람인 노이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머잖아 모두가 탈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과학 발전과 새로운 제조 공정뿐 아니라 재정적으로 한 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무어의 법칙을 이끄는 근본 동력이었던 것이다. 페어차일드 직원 중 한 사람은 퇴사 설문지에 퇴사의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p92)
112, 4 121
상호 협력 관계가 늘 원활하게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1959년 미국전자산업협회Electronics Industries Association는 일본산 수입 가전 제품이 "국가 안보" 및 미국 가전 업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취지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일본이 전자 산업을 일으켜 세우게끔 하는 것은 미국의 냉전 전략의 일부였으므로, 1960년대 내내 워싱턴이 그 문제로 도쿄를 강하게 압박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관련 업계 매체라 할 수 있는 <일렉트로닉스>는 미국 회사 편을 들어줄 법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정책의 핵심이다. ... 만약 일본이 서구 및 유럽과 건강한 상업적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경제적 필요에 따라 다른 곳을 찾게 될 것이다." 즉 공산 중국이나 소련에 눈을 돌리게 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미국의 전략에 따라 일본은 더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이고 최신 사업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다. 훗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일본을 이렇게 바라보았다. “그런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할 리 없다." 미국은 일본이 더 발전된 기술을 개발하도록 허용하고 더 나아가 장려해야 했다. (p122)
칩 회사가 여성을 고용한 이유는 더 낮은 임금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여자는 남자보다 노동 조건 개선 요구가 심하지 않았다. 생산 관리자들은 남자에 비해 손이 작은 여자가 반도체 조립 및 완성된 반도체를 테스트하기에 유리하다고 믿고 있기도 했다. 1960년대, 플라스틱 기판에 실리콘 칩을 부착하는 과정은 이러했다. 칩이 올라가야 하는 위치를 노동자가 현미경으로 확인한다. 조립 노동자가 두 부품을 고정시키면 기계에서 열과 압력, 초음파 진동이 가해져 실리콘이 플라스틱 기판과 결합하게 된다. 칩에 전력을 공급하는 얇은 골드와이어 역시 손으로 붙여야 했다. 마지막으로 칩을 테스트하려면 일종의 미터기에 꽂아야 했는데 그 역시 손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칩의 수요가 하늘 높이 치솟음에 따라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사람 손의 수요 역시 급등했다. (p128)
반도체 공급망이 경제 성장과 정치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나라는 대만뿐이 아니었다. 1973년,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난 자리에서 싱가포르의 "실업을 일소하기 위해" 수출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의 협조 아래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내셔널세미컨덕터 National Semiconductors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에 조립 설비를 건설했다. 다른 칩 제조사도 그 뒤를 따랐다. 1970년대 말, 미국의 반도체 기업은 해외에서 수만 명을 고용했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에 있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칩 제조사들과 아시아의 독재자들, 그리고 많은 경우 아시아 반도체 조립 설비를 채우고 있던 화교 노동자들 사이에 새로운 국제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반도체는 아시아 지역에 있는 미국 동반국들의 경제와 정치를 재구성했다. 정치적 극단주의의 온상이었던 도시는 근면한 조립 라인 노동자들이 완전히 바꿔 놓았다. 실업 상태였거나 보조금에 의존하는 농부였던 이들이 행복하게도 보다 나은 월급을 받으며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초, 전자 산업은 싱가포르의 국민총생산GNP 중 7퍼센트, 제조업 일자리의 4분의 1을 담당했다. 전자 제품 생산을 놓고 보면 60퍼센트가 반도체 소자였고, 나머지도 반도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제품이었다.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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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는 컴퓨터 혁명이 사회와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연산력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 소프트웨어로 컴퓨터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은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었다.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엔지니어들은 그 미래의 규칙을 써 내려갈 수 있는 전문 지식, 네트워크, 그리고 스톡옵션까지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그들이 만들어 낼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산업 사회는 디지털 세계에 길을 내주고 있었고, 0과 1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실리콘 판에 저장되고 처리되었다.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이 밝아오는 중이었다. 카버 미드는 이렇게 선포했다. "우리 사회의 운명은 결정적인 기로에 서 있다. 점점 더 작은 면적에 점점 더 많은 부품을 담을 수 있는 마이크로 전자 기술이 그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업계 외부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막연하게 짐작만 할 뿐이었으나, 인텔의 지도자 그룹은 알고 있었다. 다방면에서 광범위하게 연산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근본적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1973년 고든 무어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몇 년 전 학교를 때려 부순 장발에 턱수염을 기른 꼬마들이 아니라, 우리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진정한 혁명가다." (p153-154)
1960년대 초였다면 펜타곤이 실리콘밸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10년 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반도체 산업은 평화를 이끌었다. 싱가포르에서 대만과 일본까지, 베트남을 제외한 아시아 전체를 늘어난 투자와 길고 단단해진 공급망을 통해 미국과 더욱 밀접하게 엮어 냈던 것이다. 미국이 제공하는 혁신을 기반으로 삼아 전 세계가 단단히 연결되고 있었다. 심지어 소련 같은 적국마저 미국의 반도체 및 반도체 생산 수단을 베끼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편 반도체 산업은 미군이 미래의 전쟁에서 싸우는 방법을 바꿀 새로운 무기 체계가 등장하는 촉매 역할을 해냈다. 미국의 힘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전 세계가 실리콘밸리의 성공에 의존하게 되었다. (p162-163)
170-1
제리 샌더스가 선언했다. 반도체는 "1980년대의 원유와 같은 것이며, 그 원유를 통제하는 자가 전자 산업을 통제하게 된다." 샌더스는 미국에서 가장 큰 칩 제조사 중 하나인 AMD의 CEO였으니, 그가 자기 회사의 주 제품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자기 이익의 차원에서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샌더스가 틀렸을까? 1980년대 내내 미국의 컴퓨터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해서 PC는 이제 개인의 가정이나 사무실에 놓일 만큼 저렴해지고 소형화되었다. 모든 사업 영역이 PC에 의존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런데 집적회로가 없다면 컴퓨터는 작동할 수 없다. 1980년대 기준으로 보더라도 비행기, 자동차, 캠코더, 전자레인지, 소니 워크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모든 미국인의 집과 자동차에 반도체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매일 수십 개의 칩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치 석유처럼 반도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데도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할 수 없단 말인가? 일본이 "반도체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되는 것을 미국이 걱정할 이유가 없단 말인가? (p194)
결국 모든 이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극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한때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이라고 조롱당하던 나라 일본이 이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미국 군사력의 사활이 걸린 미국의 산업 분야에도 도전하고 있었다. 미국은 공산권을 상대로 경제 봉쇄를 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대외 교역을 늘리는 것을 크게 개의치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분업은 미국 쪽에서 더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 경제는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도쿄의 첨단 제조업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마저 위협할 지경이었다. 앞서가는 일본의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TV나 카메라 산업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반도체에서도 벌어지는 것을 원치는 않으실 겁니다." 스포크는 국방부를 상대로 말했다. "반도체가 없다면 군사력의 미래는 오리무중입니다." (p199)
203-4 (214)
미국의 공급망 전략은 공산주의자를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지만, 1980년대에 이르자 그 전략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건 일본으로 드러났다. 일본의 무역량과 해외 투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이다. 아시아의 경제와 정치에서 도쿄가 차지하는 위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만약 일본이 반도체 산업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지배할 수 있다면, 그들이 미국의 지정학적 우위를 빼앗고자 할 때 무엇으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p220)
마이크론의 직원들에게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실리콘밸리라면 회사가 망해도 101번로를 따라 내려가서 다른 반도체 회사나 컴퓨터 제조사에 취직하면 그만이었다. 그에 비해 마이크론은 보이시에 있었다. 한 직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달리 할 일이 없었어요. D램을 만들지 못하면 게임 오버인 거죠." 다른 직원의 회상에 따르면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육체노동자의 근로 윤리, 공돌이 정신"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D램 시장 암흑기를 몇 번이나 거쳐 왔던 초기 직원 한 사람은 이렇게 회상한다. "메모리 칩은 잔인한, 잔인한 비즈니스입니다." (p231)
236, 7 239
그는 IBM의 컴퓨터 공장도 방문했는데, 사진을 찍어도 된다는 사실에 또 한 차례 놀랐다. "당신들 공장에는 비밀이 많이 있을 텐데요." 공장 안내를 해 주는 IBM 직원에게 이병철이 묻자, 그 직원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비밀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따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병철은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정확히 모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백만 달러 이상의 자본 확충이 필요한데 다 아직 제대로 될지 확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병철에게도 그것은 엄청난 도박이었다. 그는 몇 달을 고심했다. 실패하면 그가 이룬 비즈니스 제국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흔쾌히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정부는 반도체 산업에 4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의 은행은 정부 방침을 따라 더 많은 돈을 빌려줄 것이었다. 그러니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하이테크 기업은 차고에서 태어난 스타트업이 아니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었던 거대 재벌의 산물이었다. 1983년 2월, 신경이 곤두선 불면의 밤을 보내던 이병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삼성전자 사업부를 총괄하던 수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포했다. "삼성은 반도체를 만들 걸세." 삼성은 적어도 1억 달러를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선언과 함께 그는 회사의 미래를 건 반도체 도박을 시작했다. 이병철은 노련한 경영자였고, 한국 정부는 그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해 주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반도체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삼성의 도박은 성공으로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메모리 칩 분야에서 일본의 국제적 경쟁에 맞서는 최선의 방법은 한국에서 훨씬 더 저렴한 공급원을 찾아내는 동시에 미국의 연구개발 에너지를 이미 상품화된 범용 D램보다 더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발상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밥 노이스가 앤디 그로브에게 말했듯이. "한국인들과 함께하면" 그들이 일본 생산자들보다 더 저가로 판매할 테니, 일본이 "비용에 상관하지 않고 덤핑을 하는" 전략을 쓰더라도 세계 D램 시장을 독점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일본의 칩 제조사들은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고 노이스는 예측했다. 그리하여 인텔은 떠오르는 한국의 D램 생산자들을 환영했다. 인텔은 1980년대에 삼성과 함께 합작 투자에 합의한 여러 실리콘밸리 기업 중 하나다. 삼성이 제조한 칩을 인텔의 브랜드로 판매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도움을 받아 실리콘밸리를 향한 일본의 위협에 대응한 것이다. 더욱이 한국의 생산 비용과 임금은 일본에 비해 확연히 낮았다. 삼성 같은 한국 기업들의 제조 공정은 일본처럼 완벽에 가깝지도 극도로 효율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일본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 오는 일에는 문제가 없었다. 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 갈등 역시 한국 기업들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워싱턴은 일본이 미국 시장에 D램 칩을 저가로 풀어놓는 행위, 이른바 "덤핑"을 중단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결국 1986년 도쿄는 D램의 대미 수출량을 제한하며 낮은 가격에 팔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더 많은 D램을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미국이 일본과의 협상으로 한국에 이익을 주자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칩을 생산하는 것이 일본을 제외한 다른 누구여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것은 D램 시장만이 아니었다. 기술도 함께 제공했다. 실리콘밸리의 D램 생산은 거의 파탄 나 있었기에, 최고 수준의 기술을 한국에 전수하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이병철은 현금이 부족한 메모리 칩 스타트업인 마이크론에 64K D램용 설계 라이센스 계약을 제안했고, 그 과정에서 창업자인 위드 파킨슨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아이다호의 칩 제조사는 그 계약으로 얻을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 따져 본 후 기꺼이 삼성의 제안을 수용했다. 설령 그 과정에서 삼성이 마이크론의 생산 공정 중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우리가 했던 것이라면 삼성도 했다"라고 파킨슨은 떠올렸다. 그는 삼성이 제공했던 "결정적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돈을 받아 마이크론을 살려 놓아야 했던 것이다. 고든 무어 같은 반도체 산업 선도자들은 몇몇 반도체 회사가 절박한 상황에서 "가치 있는 기술을 쉽게 넘겨준다"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모리 칩을 만드는 대부분의 미국 기업이 파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D램 기술을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리콘밸리 회사들 대부분은 즐거운 마음으로 한국 기업과 협업했다. 한국이 세계 메모리 칩 시장의 선두 주자로 떠오르도록 도우면서 일본 경쟁자들의 공격을 무력화했던 것이다. 제리 샌더스가 한 설명을 빌리자면, 단순한 논리였다. "적의 적은 친구다." (p244-246)
"이것이 미래입니다" 앤디 그로브의 편집증, 제리 샌더스의 저돌적 투쟁, 잭 심플롯의 카우보이식 경쟁심이 없었다면 일본의 D램 맹공을 견뎌 내고 미국 반도체 산업이 되살아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쟁을 부추기는 남성 호르몬과 스톡옵션의 힘으로 굴러가는 실리콘밸리는 때로 교과서에서 묘사하는 메마른 경제학보다는 오히려 적자생존의 투쟁이 벌어지는 다윈주의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수많은 기업이 실패했고, 재산이 날아갔고, 수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인텔이나 마이크론 같은 회사가 극도로 경쟁적이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업계에서 살아남은 것은 물론 그들이 지닌 기술력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적합한 기술을 자본화하여 돈으로 만드는 능력 덕분이었다. (p247)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부활을 온전히 영웅적 기업가와 창조적 파괴의 공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 새로운 산업의 거인들이 부상하는 동안 새로운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칩 제조의 도약을 준비하고 처리 능력 processing power을 이용한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하고 있었다. 그러한 기술 발전 중 많은 부분이 정부와 협력 아래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의회나 백악관처럼 크고 무거운 손이 움직인 경우보다는 국방부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같은 작고 기민한 조직이 미래를 향한 큰 도박에 힘을 실어 줄 때가 많았다. 또 정부는 이러한 도박에 필요한 교육과 연구개발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p248)
253-4
이라크의 건물, 탱크, 공군 기지가 정밀 무기에 폭격당해 파괴되는 영상을 본 이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전쟁의 성격이 달라졌다. 진공관으로 작동하던 사이드와인더 sidewinder 공대공 미사일은 베트남전에서 표적을 대부분 놓치고 말았지만, 이제는 훨씬 강력한 반도체 기반의 유도 시스템을 장착하고 업그레이드 되었다. 걸프전의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은 베트남전보다 여섯 배 높은 정확도를 보였다. 페리가 펜타곤을 압박해 1970년대 후반부터 발전시킨 새로운 기술은 페리 자신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성과를 보였다. 최고의 장비라고 해 봐야 소련의 군산 복합체가 만든 것들로 무장하고 있었던 이라크 군대는 미국의 공격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첨단 기술이 답이다." 페리가 선언했다. "이 모든 일은 무기가 화력의 양이 아니라 정보에 기반해 작동하고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한 군사 분석가가 언론에서 한 말이다. "강철을 이긴 실리콘", <뉴 욕타임스>의 헤드라인 문구다. "컴퓨터 칩이 영웅의 자리에 오를 수도"라는 또 다른 헤드라인도 신문에 실렸다. 페이브웨이 폭탄과 토마호크 미사일의 폭발음은 바그다드만큼이나 모스크바에서도 강력하게 느껴졌다. 전쟁은 "기술 작전"이 되었다고 소련의 군사 분석가가 발표했다. "전파를 타고 벌이는 싸움"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걸프전의 결과는 이라크가 쉽게 무너질 것이라는 오르가코프의 예측 그대로였다. 소련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Dmitri Yazoy는 걸프전이 소련의 방공 능력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왔다고 인정했다.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Sergey Akhromeyer 원수는 장기전을 예측했지만 이라크가 순식간에 항복해 버리자 크게 당혹스러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폭탄이 이라크 하늘을 뚫고 스스로의 항로를 찾아 이라크의 건물 벽을 부수는 영상이 CNN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전쟁의 미래에 대한 오르가코프의 예측이 옳았다는 게 입증되었다. (p275-276)
278-9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PC 시대가 오는 것을 놓쳤다는 데 있다. 일본의 반도체 공룡 중 인텔이 메모리 칩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전환하고 PC 생태계의 지배자가 된 경로를 따라간 회사는 없었다. NEC 단 한 곳만 유의미한 시도를 했으나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가져갔을 뿐이다. 앤디 그로브와 인텔에게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서 돈을 버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였다. 반면에 일본의 D램 기업들은 이미 높은 시장 점유율을 누리고 있었고 금융 비용마저 낮았던 탓에,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무시했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늦었다. 결과적으로 PC 혁명의 혜택은 대부분 미국 기업에게 돌아갔다. 일본의 주식 시장이 폭락했을 때 그들의 반도체 지배력은 이미 잠식되고 있었다. 1993년부터 미국은 반도체를 다시 수출하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한국 기업이 일본을 제치고 D램의 최대 생산자 자리를 차지했다. 1980년대 말 90퍼센트에 달하던 일본의 시장 점유율은 1998년이 되자 20퍼센트까지 내려앉았다. (p280)
"현대의 군사력은 모두 경제적 혁신, 기술, 경제력에 따라 결정됩니다. 군사 기술은 컴퓨터에 기반을 두고 있소. 당신들은 컴퓨터에서 우리를 훨씬, 아주 멀리 앞서고 있고... 댁의 나라에서는 모든 아이가 다섯 살부터 컴퓨터를 갖고 놀지 않습니까." 이제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손쉽게 격퇴해 버린 미국의 새로운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을 본 소련의 군부와 KGB는 위기에 빠졌다. 자신들이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 인정하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만 것이다. 안보 분야 고위직들이 고르바초프를 겨냥해 맥빠지는 쿠데타를 벌였지만 사흘만에 진압 되었다. 통상적인 군사력만 보자면 그리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닌데, 한때 막강한 힘을 자랑했던 국가가 비참한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90년대 러시아 반도체 산업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몰락했다. 러시아의 반도체 생산 설비는 맥도날드의 해피밀 장난감에 들어갈 작은 칩을 만들고 있었다. 냉전은 끝났고 실리 콘밸리가 이겼다. (p283)
291-2
1976년 3월, 창은 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동료 임원진에게 던져 보았다. "연산력이 저렴해지고 있으니 지금까지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았던 수많은 기기를 위한 반도체 시장이 열릴 걸세." 그가 동료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렇게 전화기에서 자동차, 식기세척기까지 모든 제품에서 칩의 새로운 수요가 발생할 것이다. 창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은 반도체 생산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지 못하니, 반도체 제조에 특화된 전문 기업에 아웃소싱할 것이다. 게다가 기술이 발전하고 트랜지스터가 작아지면 제조 설비의 가격과 연구개발 비용도 상승할 수밖에 없다. 칩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업만이 가격 경쟁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p293)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경영진은 설득되지 않았다. 1976년 당시, 반도체를 설계하지만 자체 제조 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은 "팹리스tabless" 기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모리스 창은 그런 회사가 곧 나올 것이라 했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이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이미 충분한 돈을 잘 벌고 있었고, 그러니 존재하지도 않는 시장에 승부를 거는 건 너무 위험한 일로 보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조용히 폐기되었다. 창은 파운드리 foundry라는 개념을 절대 잊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때가 무르익을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반도체 설계에서 린 콘웨이와 카버 미드가 이룬 혁명이 칩 설계가 제조와 훨씬 더 쉽게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미드의 비유에 따르면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나눈 것은 인쇄술의 발명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었다. (p294)
반도체 산업에서 모리스 창의 파운드리 비즈니스 모델은 새로운 "저자", 즉 팹리스 칩 설계 기업이 나올 수 있도록 했다. 그로인해 모든 종류의 기기에 칩이 탑재되고 연산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게 한 이 디지털 시대의 인쇄 기술은 인쇄업의 독점과 맞물려 있었다. 반도체 제조의 경제학은 무자비한 합병을 불러왔던 것이다. 가장 많은 칩을 생산하는 기업은 이미 그만 한 강점을 누리고 있으며, 그 위에서 수율을 끌어 올리고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며 자본을 동원할 수 있다. TSMC의 사업은 1990년대 내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제조 공정은 쉼 없이 개선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구텐베르크가 되고자 했던 모리스 창의 계획은 그에게 훨씬 더 큰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에는 이 사실을 깨달은 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모리스 창과 TSMC 그리고 대만은 세계 최신 반도체 생산을 독점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p297-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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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의 공산정권은 소련과 같은 종류의 실수를 저질렀다. 단, 이번에는 훨씬 더 극단적인 형태로 그 실수를 반복했다. 1950년대 초 베이징은 반도체 소자를 과학 연구 우선순위로 확정지었다. 곧 그들은 베이징대학교를 비롯해 공산혁명 이전에 버클리, MIT, 하버드, 퍼듀 등의 대학교에서 연구했던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중국은 1960년에 최초의 반도체 연구 기관을 설립했다. 중국이 단순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첫 생산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1965년 중국 엔지니어들은 스스로 중국산 집적회로를 만들었다. 밥 노이스와 잭 킬비가 그 일을 해낸 지 5 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극단주의로 인해 해외 투자뿐 아니라 진지한 과학 연구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중국이 최초의 집적회로를 생산한 그해 마오쩌둥은 온 나라를 문화혁명의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문 지식은 특권의 원천이며 사회주의적 평등을 침해한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주장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 나라 교육 체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수많은 과학자와 전문가가 지정된 마을에 내려가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냥 살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마오 주석이 내린 "1968년 7월 21일 교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교육 기간을 줄이고, 교육을 혁명하고, 프롤레타리아 정치를 실행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 학생들은 실제적인 경험이 있는 노동자와 농민 중에서 선발해야 하며, 몇 년의 학습을 마치고 생산 현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p301)
마오쩌둥은 중국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면서 외국과의 기술적 연결도 끊어 버렸다. 중국 과학자 대부분은 그들의 연구와 인생을 파괴해 버린 주석을 향한 증오심을 품었다. 반도체 연구를 해야 할 사람들을 시골로 내려보내 농민으로 살게 하며 프롤레타리아 정치 사상을 학습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학을 전공하던 한 유망한 전문가는 시골로 보내져 거친 곡식과 삶은 양배추로 연명하며 때로 뱀을 잡아 구워 먹으면서, 마오가 부추긴 극단주의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가지고 있던 자그마한 반도체 인력이 들판으로 내몰려 돌아다니고 있을 때, 마오주의자들은 중국의 노동자들을 향해 "모든 인민은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었다. 마치 중국의 프롤레타리아라면 누구나 집에서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는 듯한 투였다.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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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중국에 반도체 산업을 이룩해 낼 수 있다면 그 장본인은 리처드 창이었다. 그는 연줄이나 외국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았다. 세계 수준의 생산 설비에 필요한 모든 지식이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설비를 만드는 게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그가 해 왔던 일이었다. 상하이에서 그걸 또 하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골드만삭스, 모토로라, 도시바 같은 국제투자자들로부터 끌어온 15억 달러를 밑천 삼아, 창은 2000 SMIC 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를 창업했다. 한 분석가는 SMIC의 창업 자본 중 절반이 미국 투자자로부터 나왔다고 보았다. 창은 그 돈으로 수백여 명의 외국인을 고용해 SMIC의 팹을 운영했는데, 그 중 적어도 400명은 대만 사람이었다. 창의 전략은 단순명료했다. 바로 TSMC가 한 대로 하는 것이었다. 대만에서 TSMC는 눈에 띄는 족족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고용했다. 특히 미국이나 다른 첨단 반도체 기업에서 일한 사람이 우선이었다. TSMC는 동원 가능한 최선의 장비를 갖추었다. 반도체 산업의 최고가 되기 위해 TSMC는 직원 교육에 혼신을 다했다. 그러면서 대만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세제 혜택 및 보조금을 누렸다.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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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기기가 컴퓨터 시장을 뒤흔들 것이라는 발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칼텍의 선지자였던 카버 미드가 이미 1970년대 초에 예견한 일이었다. 인텔 역시 PC가 컴퓨터의 최종 진화형이 아닐 것임은 알고 있었다. 인텔은 19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일련의 신제품을 개발하고 투자했다. 그 중에는 무려 20년을 앞서 나온 줌 Zoom 같은 화상 회의 시스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신제품 중 자리 잡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기술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텔의 핵심 사업인 PC용 칩 제조와 비교할 때 너무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새로운 기기와 분야는 인텔내에서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모바일 기기는 1990년대 초 앤디 그로브가 아직 CEO이던 시절부터 인텔 내에서 주기적으로 논의 대상이 되곤 했다. 1990년대 초 인텔의 산타클라라 본사에서 열린 회의, 윌 스워프 Will Swope라는 한 임원이 자신의 팜 파일럿Palm Pilot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런 기기들이 성장해서 PC를 대체할 겁니다." 하지만 PC용 프로세서를 만들어서 벌 수 있는 돈이 엄청났던 당시, 모바일 기기에 돈을 퍼붓는다는 것은 과격한 도박으로 보였다. 그래서 인텔은 모바일 비즈니스에 뛰어들지 않기로 했고, 오판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한때 앤디 그로브에게 조언을 건넸던 하버드 경영대학 교수의 눈으로 보자면, 인텔의 딜레마는 쉽게 진단 가능한 것이었다. 인텔 직원이라면 클레이턴 크리스텐슨과 그가 제시한 개념인 "혁신가의 딜레마"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텔은 사실상 돈을 찍어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PC용 프로세서 비즈니스에 너무 오래 안주해 있었다. 앤디 그로브가 인텔을 D램 제조 회사에서 프로세서 제조사로 탈바꿈시켰던 1980년대와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인텔은 돈을 피처럼 흘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회사 중 하나였다. 인텔이 새로운 제품을 물색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너무도 달콤했다는 것이다. 인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두 개의 성채인 PC와 서버용 칩에 틀어박혀, x86이라는 깊은 해자로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p334-335) 맥 컴퓨터에 인텔 칩을 도입하기로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잡스는 오텔리니를 찾아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애플이 신제품으로 컴퓨터와 핸드폰을 결합하려 하는데, 인텔이 그 목적의 칩을 만들어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모든 휴대전화에는 그에 맞는 운영 체제가 있고 휴대전화 네트워크와의 통신을 관리하는 반도체가 들어갔다. 하지만 애플은 새로운 전화기가 컴퓨터처럼 작동하기를 원했다. 그러자면 컴퓨터에 들어가는 것처럼 강력한 칩이 필요할 터였다. 오텔리니는 훗날 기자 알렉시스 마드리갈Ale Madrigal을 만난 자리에서 당시 벌어진 일을 털어놓았다. "애플은 정해진 가격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푼도 더 주려 하지 않았죠.... 그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들어오는 주문량을 더 늘리는 식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당시 예측했던 비용은 잘못됐고 소비된 칩의 물량도 모든 사람의 생각보다 100배나 더 늘어났습니다." 결국 인텔은 아이폰용 칩 공급 계약을 거절했다. 애플은 휴대전화에 들어갈 칩을 공급해 줄 다른 업체를 물색했다. 잡스는 암의 아키텍처에 주목했다. x86과 달리 모바일 기기에 최적화되어 있었고 전력을 효율적으로 소비했다. 초기 아이폰의 프로세서는 TSMC의 뒤를 이어 파운드리에 뛰어든 삼성이 제작했다. 아이폰이 틈새시장 상품이 될 것이라는 오텔리니의 예측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그 실패를 깨달았을 무렵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훗날 인텔은 스마트폰 산업에서 지분을 가져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스마트폰용 제품을 만드는 데 수십억 달러를 투입하고서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오텔리니와 인텔이 사태를 파악하기 전, 애플은 깊숙한 해자를 파고 거대한 이윤의 성채를 쌓아 버린 것이다. (p336)
세상에 이윤이 낮은 영역에서 ��품 만들기를 원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것은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단기간에 높은 이윤을 내는 일에만 매몰되어 있다 보니 장기적인 기술 우위를 확보하는 일은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사내 권력이 엔지니어에서 경영자로 넘어간 것 또한 이런 변화를 가속화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인텔의 CEO였던 오텔리니가 인정한 것처럼, 재무와 실적에 영향을 줄까 두려운 나머지 아이폰용 칩 공급 계약을 거절했다. 이윤율에만 집중하는 경향은 회사 내부에 깊숙이 퍼져 채용, 제품 개발 로드맵, 연구개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인텔의 경영자들은 트랜지스터가 아니라 재무재표를 갈고닦는 일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인텔에서 재정을 담당했던 한 임원이 이렇게 회고했다. "인텔에는 기술이 있었고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윤율이 떨어질 짓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죠. " (p338)
많은 이들은 그로브를 지나간 시대의 전형으로 취급했다. 그가 인텔을 만든 것은 한 세대도 더 된, 인터넷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로브가 만든 회사는 모바일 폰의 흐름을 놓쳤고 컴퓨터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제품을 생산하는 대신 x86 독점의 과실을 따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2010년대 초 인텔은 경쟁자보다 한발 앞서 더 작은 트랜지스터가 탑재된 칩을 발매하는 반도체 산업의 선두 주자였다. 고든 무어 시대 이래 꾸준히 같은 호흡을 유지하며 달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인텔과 TSMC나 삼성같은 경쟁자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p340)
"빨리 달리기"는 단 하나 있는 단점을 제외하고 나면 우아한 전략이었다. 몇몇 핵심 지표를 놓고 볼 때 미국은 빨리 달리는 나라가 아니었고, 입지를 잃어 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정부 안에서는 그의 분석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생산 시설 해외 이전에 대한 앤디 그로브의 우울한 예측은 점점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2007년, 국방부는 전직 펜타곤 장교였던 리처드 반 아타Richard Van Atta와 몇몇 동료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반도체 산업의 "세계화"가 군의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반 아타는 수십 년간 국방용 마이크로 전자 기술을 다룬 사람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성장과 몰락을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했다. 그의 보고서는 경계하며 과잉 대응하는 쪽이 아니었다. 다국적 공급망 덕분에 반도체 산업이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매끄럽게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펜타곤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민해야 하는 조직이었다. 반 아타의 보고서에 따르면 국방부가 첨단 칩을 얻기 위해서는 머지않아 외국에 의존할 것이라고 보았다. 너무나 많은 고도화된 제조 시설이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오만에 빠져 있던 단극 시대에서 이런 주장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워싱턴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관계를 알아볼 생각조차 없이 미국이 "더 빨리 달린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볼 때 미국의 우위가 늘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은 1980년대 내내 일본을 앞서지 못했고, 1990년대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역전했다. 리소그래피 분야에서 GCA는 니콘과 ASML을 능가할 수 없었다. 마이크론은 동아시아 경쟁 업체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D램 생산자였고, 다른 미국 D램 생산자들은 모두 파산해 버렸다. 2000년대 말까지도 인텔은 트랜지스터 소형화에서 삼성과 TSMC를 능가하는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격차가 줄어들었다. 인텔의 속도는 느려지고 있었지만, 아직 앞서갈 수 있는 건 처음부터 먼저 뛰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미국은 대부분의 반도체 설계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었지만 대만의 미디어텍 MediaTek은 다른 나라에서도 반도체 설계 회사가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반 아타가 볼 때 미국이 자신을 할 이유는 많지 않았고 안심할 근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2007년 그가 남긴 경고는 다음과 같았다.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선두 자리는 이후 10년간 심각하게 침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지 않았다. (p34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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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엔비디아는 고속 병렬 계산이 컴퓨터 그래픽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놓은 소프트웨어가 CUDA였다. 표준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그래픽과는 전혀 무관한 방향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GPU를 활용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엔비디아가 최고 성능의 그래픽 칩을 찍어 내고 있는 와중에 황은 CUDA라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2017년 한 회사의 추산에 따르면 그때 투입된 돈은 최소 100억 달러였는데, 이렇게 만든 프로그램은 그래픽 전문가뿐 아니라 엔비디아의 칩을 보유한 어떤 프로그래머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황이 CUDA를 무료로 공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프트웨어는 엔비디아 칩에서만 작동했다. 그래픽 업계 밖에서도 쓸 수 있는 칩을 만드는 것은 엔비디아에게 엄청나게 큰 새로운 시장을 열어 주었다. 계산화학 computational chemistry부터 기상 예측에 이르기까지 병렬 처리를 원하는 수요를 발굴해 낸 것이다. 그 무렵 황은 어렴풋하게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병렬 처리의 가장 큰 수요처가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Al이었다. (p362)
파운드리에서 TSMC의 경쟁 상대 중 비중 있는 존재는 삼성뿐이었다. 삼성의 파운드리 기술력은 TSMC와 어느 정도 견주어 볼 만한 수준이었지만, 생산력에서 TSMC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삼성의 사업 영역 중에는 반도체 설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로 떠올랐다. TSMC는 그저 수십여 고객들을 상대로 칩을 만들며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다른 목표가 없었지만, 삼성은 자체적으로 스마트폰과 소비자용 가전을 생산하고 있었으니 결국 고객 중 다수와 경쟁하고 있는 셈이었다. 경쟁사들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에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담긴 설계도를 보내면 그것이 결국 삼성 제품에 반영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TSMC와 글로벌 파운드리즈는 그런 이해관계 상충을 겪을 일이 없었다. (p372)
TSMC 같은 파운드리 업체가 부상하면서 가장 큰 혜택을 본 기업은 따로 있었다. 대부분은 그 회사를 반도체 설계 회사로 생각하지도 않는 곳, 바로 애플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애플은 언제나 하드웨어에 특화된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들이 만드는 기기에 탑재되는 실리콘 칩까지 통제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애플을 처음 창업했을 때부터 잡스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관계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1980년, 어깨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기르고 윗입술을 덮을 정도로 수염을 기르던 시절, 잡스는 한 강연에서 청중을 향해 질문했다. "소프트웨어란 무엇일까요?" 그는 스스로 답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소프트웨어가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거나, 아직 원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원하는 걸 하드웨어에 넣을 시간이 없었거나 하는 그런 것들 뿐입니다." (p377)
반도체 제작 역량이 대만과 한국에 쏠리면서 이들 칩 중 다수의 제작 역량 역시 두 나라에 집중되었다. 스마트폰의 전자두뇌라 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거의 대부분 대만과 한국에서 제조해 중국으로 보낸 다음 스마트폰의 플라스틱 케이스 속에 담겨 유리로 된 스크린을 덮는다. 애플 아이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는 오직 대만에서만 생산되고 있다. 오늘날 애플이 요구하는 제작 역량과 기술을 가진 회사는 TSMC뿐이다. 그러니 모든 아이폰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캘리포니아의 애플 설계. 중국에서 조립"은 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아이폰에서 가장 대체 불가능한 부품이 캘리포니아에서 설계되고 중국에서 조립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대만뿐이다. (p381)
2013년부터 ASML의 극자외선 장비 사업을 이끌고 있는 네덜란드인 프리츠 반 하우트에게 있어서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떤 개별 부품이 아니라 ASML의 공급망 유지 기술이었다. 반 하우트는 ASML이 그러한 비즈니스 관계망을 "마치 기계처럼" 갈고닦았다고 설명했다. 수천여 회사가 ASML의 정확한 요구 사항에 맞는 정교한 제품을 생산하고 납품하도록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 하우트의 추산에 따르면 극자외선 장비의 부품 중 ASML이 직접 만드는 것은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다른 회사의 제품을 구입했다. 이 덕분에 ASML은 세계에서 가장 정밀하게 가공된 제품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공급망 관리와 타 회사의 동향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ASML은 극자외선 장비의 핵심 부품에서는 단 하나의 회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 위험 관리를 위해 ASML은 부품 공급사의 공급사까지 샅샅이 찾아다녀야 했다. ASML은 몇몇 부품 공급사에게 투자하는 식으로 보상을 제공하기도 했다. 가령 2016년에는 자이스의 연구개발 과정에 10억 달러를 제공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ASML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출 수 있느냐에 달린 문제였다. "제대로 안 하면 댁의 회사를 인수해 버리겠소" ASML의 CEO인 피터 베닝크 Peter Wennink가 한 협력사에게 한 말이었다. 이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ASML은 여러 협력사를 합병한 바 있고, 심지어 그중에는 사이머도 들어 있었다. 사이머의 경영이 좀 더 개선되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내린 결론이었다.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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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이 극자외선 시대에 돌입하면서 인텔은 다시 한번 우위를 차지하는 듯했다. 앤디 그로브가 1990년대 초 최초의 2억 달러를 투입했을 때부터 인텔은 극자외선 기술의 출현에 핵심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제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 끝에 ASML이 그 기술을 현실화할 날이 다가왔고, 인텔에 상당한 몫의 지분이 생겼다. 하지만 인텔은 트랜지스터가 축소되는 이 새로운 시대를 기회로 삼기보다는 주도권을 낭비해 버렸고, 인공지능에 필요한 반도체 아키텍처의 거대한 변화를 놓쳤으며, 그 후 제조 공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무어의 법칙을 지켜 나가는 것도 실패했다. 지금도 인텔은 막대한 수익을 내는 회사로 남아 있다. 인텔은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첨단의 반도체를 만들어 내는 기업이다. 하지만 인텔의 미래는 앤디 그로브가 메모리 칩을 버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던 1980년대 이래 가장 불투명하다. 다가올 5년 동안 선두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만한 실탄이 남아 있지만 불발탄으로 끝나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단지 한 회사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반도체 제조 산업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인텔이 없다면 첨단 프로세서를 제조할 역량을 가진 미국 기업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오직 대만이나 한국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p400)
통합 모델에도 일부 장점이 있을 테니 인텔의 판단이 어느 정도 옳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합 모델에는 분명한 단점이 존재했다. 다양한 여러 회사의 칩을 제작하고 있던 TSMC는 인텔에 비해 매년 거의 세 배 많은 실리콘 웨이퍼를 찍어 내고 있었는데, 그 말은 제조 공정을 갈고닦을 기회가 그만큼 더 많다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인텔은 신생 반도체 설계 업체를 위협으로 보고 있었던 반면에 TSMC는 제조 서비스를 위한 잠재 고객으로 인식했다. TSMC의 기업 가치는 단 하나의 분야 즉 효율적인 반도체 제조에서 나왔기에 TSMC 경영진은 낮은 가격으로 더 많은 최신 반도체를 생산해 내는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텔 지도부는 반도체 설계와 반도체 제조 양쪽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둘 다 죽을 쑤고 말았다.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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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 그래픽 칩 설계 회사 엔비디아의 귀에 흥미로운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탠퍼드의 박사후과정 학생들이 엔비디아의 그래픽 처리 장치 GPU를 그래픽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GPU는 인텔이나 AMD의 표준 CPU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된다. CPU는 무한히 많은 용도로 사용 가능하지만 하나의 계산이 끝난 다음에야 다른 계산을 할 수 있다. 반면에 GPU는 많은 계산을 동시에 처리하도록 설계된다. 이러한 구조를 "병렬 처리 parallel processing"라 하는데, 병렬 처리가 컴퓨터 게임의 이미지 픽셀 처리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 곧 드러난 것이다. GPU는 AI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다. CPU가 알고리즘에 다수의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하나의 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GPU는 여러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 이미지를 학습한다면 CPU는 픽셀 하나하나를 처리하는 데 비해 GPU는 많은 픽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컴퓨터가 고양이를 알아볼 수 있도록 훈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놀랍게 단축되었다. 그 후 엔비디아는 인공지능에 미래를 걸었다. 창업 초기부터 엔비디아는 칩 제작의 큰 부분을 TSMC에 위탁했다. 대신에 차세대 GPU를 개발하고 엔비디아 칩을 활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CUDA를 개선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투자자들이 데이터센터에 힘을 실어주면서 더 많은 GPU가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엔비디아 역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반도체 회사로 떠올랐다.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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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조차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 5년여 시간 내내 그저 "일시적인" 제작 지연이라고 발표했을 뿐이다. 기술적 세부 사항은 비밀 유지 서약을 한 직원들 속에 묻혀 버렸다.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은 인텔의 문제가 극자외선 장비의 도입이 늦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여긴다." 인텔은 극자외선 장비를 개발하는 데 돈과 시간과 노력을 퍼부었지만, 정작 2020년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 중 절반은 TSMC에 설치되어 있다. 반면에 같은 시기 인텔은 겨우 극자외선 장비를 제조 공정에 도입하기 시작한 수준이다. 2020년대 말, 최첨단 프로세서를 제조할 수 있는 회사는 단 둘, TSMC와 삼성뿐이다. 여기서 미국의 근심이 커지고 있다. 두 나라 모두 같은 지역에 있고, 따라서 같은 이유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첨단 프로세서 생산은 모두 대만과 한국에서 이루어지며 전 세계의 반도체 수요가 두 나라에 달려 있는데, 이 두 나라는 최근 급부상한 미국의 전략적 경쟁자와 지척에 있��. 바로 좁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다. (p407)
시진핑의 첫 집권 이후 그를 다룬 기사에서 <뉴요커>는 그가 "중국이 반드시 진정한 정치 개혁을 감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지도자"라고 밝혔다. 분명한 사실은 단 하나, 시진핑이 정치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그의 진심은 꾹 다문 입술과 만들어 낸 미소 아래에 감춰져 있었다. 그 미소 뒤에는 정신을 갉아먹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그가 중국 공산당을 지배한 10년간 시진핑의 정치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었다. 가장 큰 위험은 디지털 세계라고 시진핑은 믿었다. 대다수 관측통들은 시진핑이 자신의 디지털 보안을 보장하는 데 있어서는 두려워할 게 별로 없다고 여겼다. 중국 지도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인터넷 통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수천여 명의 검열관을 고용해 인터넷의 잡담까지 감시하고 있다. 중국의 방화벽은 거대한 인터넷 세상에서 중국 인민이 접근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는데, 이는 서구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세계가 자유로운 곳이 되리라고 예상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결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시진핑은 인터넷이 민주적 가치를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서구인들의 믿음을 조롱할 수 있을 정도로 온라인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자국민들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웹사이트인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접속하지도 못하게 막아놓은 채, "인터넷은 세계를 지구촌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당당히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시진핑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글로벌 네트워크는 인터넷 초창기 이상주의자들이 꿈꾸었던 것과는 다른 유형이었다. 그는 중국 정부의 힘을 보여 주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국경 밖으로 나아가 국제적으로 인터넷 교류와 협력을 심화하고, '일대일로'의 건설에 열성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다른 곳에서 그가 한 말이다. 여기서 시진핑은 중국이 건설한 사회 기반 시설을 통해 세계를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밝히고 있는데, 그 기반 시설에는 도로나 교량뿐 아니라 통신 장비와 검열 장비까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디지털 세계에 재갈을 물리는 일을 중국보다 성공적으로 해낸 나라는 없다. 중국은 미국의 빅 테크 기업들마저 굴복시켰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접속 차단되었고 대신에 중국에서 자체 육성한 바이두와 텐센트로 대체되었는데, 이들 기업은 기술적으로 보면 미국 경쟁사에 바싹 따라붙고 있다.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중국 시장 진출을 허가받은 기업은 베이징의 검열에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중국 시장에 들어갔다. 중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인터넷을 지도자의 뜻에 영합하도록 만들었다. 외국의 인터넷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공산당이 요구하는 검열 규칙에 순응하거나 중국이라는 광대한 시장을 포기하거나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p41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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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만큼은 베이징에서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2014년, "빅 펀드"가 시작될 무렵 첨단 팹의 가격은 100억 달러를 호가했다. SMIC는 2010년대 내내 한 해 수익이 수십억 달러에 지나지 않아서 TSMC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민간 영역의 투자만으로는 TSMC의 투자 계획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터였다. 이런 도박을 하기 위해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출의 대부분이 지방 정부와 국영 은행의 불투명한 장막 뒤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중국이 반도체 보조금으로 얼마를 "투자"했는지 정확히 추산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수백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중국은 약점을 안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실리콘밸리와 관계를 형성하는 대신에 끊어 버려야 한다는 의지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한국, 네덜란드, 대만이 반도체 생산 공정의 중요 단계를 독점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반도체 산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덕분이다. 대만의 파운드리 산업은 미국의 팹리스 기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성장할 수 있었고, ASML의 첨단 리소그래피 장비는 샌디에이고에서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만들어 내는 전문적인 광원 생성 장비가 아니면 작동할 수 없는 것이었다. 종종 무역 분쟁이 발생하지만 이들 나라는 모두 유사한 이해관계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반도체 설계, 장비, 제조에서 서로 의존하는 것은 세계화된 생산의 효율을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할 합리적 대가로 볼 수 있었다. (p424)
만약 중국이 이 생태계에 참여해 더 큰 몫을 가져가고자 했다면 중국의 야망은 아주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이징의 목표는 미국과 그 우방이 만들어 낸 시스템 속에서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진핑은 "성채를 공격하라"고 외쳤고, 이것은 시장 점유율을 조금 더 끌어올리라는 말이 아니었다. 반도체 산업에 통합되는 게 아니라 반도체 산업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어쩌면 중국에도 세계 반도체 시장에 좀 더 깊숙이 통합되는 쪽을 선호한 경제 전략가나 반도체 산업 전문가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효율보다 안보를 중요시하는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상호 의존 관계를 위협으로 간주했다. '중국제조 2025' 계획은 경제적 상호 의존이 아닌 그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수입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요구였다. '중국제조 2025' 계획의 우선 목표는 중국에서 사용되는 외국산 반도체의 비중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역의 이동과 세계 경제를 탈바꿈시키려는 위협적인 경제관이었다. 페어차일드가 홍콩에 첫 설비를 차린 이후, 반도체는 세계화 경제에 일조하고 있었다. 반도체 공급망을 다시 만들겠다는 중국의 구상을 돈으로 환산해 보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다. 2017년, 시진핑이 다보스 포럼에 등장했던 그해, 중국은 2600억 달러어치의 반도체를 수입했는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수출액이나 독일의 자동차 수출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다. 중국이 반도체 수입에 쓰는 돈은 전 세계의 비행기 판매액보다 컸다. 세계 무역에서 반도체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제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p425)
중국의 반도체 구상이 실현된다면 실리콘밸리의 이익만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중국의 반도체 내수화 계획이 성공한다면 중국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수출 주도형 국가들은 더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2017년 현재 집적회로는 한국의 수출 총액 중 15퍼센트, 싱가포르의 수출 총액 중 17퍼센트, 말레이시아의 수출 총액 중 19퍼센트, 필리핀의 수출 총액 중 21퍼센트, 대만의 수출 총액 중에서는 3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제조 2025'는 이 모든 현실에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치밀하고 촘촘한 공급망과 무역 이동이 걸려 있었다. 전자 제품 공급망은 지난 50년간 아시아의 경제 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떠받쳐 왔던 것이다. 물론 '중국제조 2025'는 계획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가 세운 계획이라 해도 때로는 처참하게 실패한다. 첨단 반도체 제조라는 목표를 두고 중국이 거둔 성적은 인상적이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엄청난 정부 보조금, 국가 도움을 받아 수행되는 외국 산업 기밀 유출, 외국 기업을 마음대로 굴복시킬 수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비 시장 등, 중국은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바꿔 놓을 수 있는 막강한 무기를 두루 갖추었다. 세계의 무역 이동을 뒤바꾸는 이 엄청난 전환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중국이어야 할 터였다. 중국과 가까운 나라 중에는 베이징이 실제로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는 예측까지 나왔다. 대만의 테크 업계에서는 한때 대만이 지배하고 있던 고부가가치 전자 부품 산업을 중국 기업이 비집고 들어올지 모른다며, "붉은 공급망red supply chain"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반도체가 그다음이 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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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차이나를 분리해 버린 결정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소프트뱅크가 중국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아 암 중국 지사를 매각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암의 경영진은 매각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니케이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암의 임원중 한 사람이 말한 바에 따르면, "중국 군대나 중국의 감시기구를 위해 [시스템 온 칩] 반도체를 만들 때, 중국은 그런 과정이 중국 내에서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새로운 합작 회사는 그런걸 만들 수 있죠. 과거에는 우리가 할 수 없던 일입니다." 그의 설명이 계속됐다. "중국은 보안과 통제 가능성을 원합니다. 궁극적으로 중국은 자신들의 기술을 통제하고 싶어 하지요. ... 우리가 가져간 기술을 기반으로 그런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도 혜택을 볼 겁니다." 이 설명에 깔린 상업적 논리는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지만 국가 안보 차원에서 보자면 소름 끼치는 말이다. 소프트뱅크를 규제하는 일본 관료든, 암을 규제하는 영국 관료든, 암의 지식재산 중 상당 부분을 관할하는 미국의 관료든, 이 사안에 대해 더 파고들어 간 이는 아무도 없었다. (p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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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는 스스로를 열성적인 기업가로 여기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큰 기업 사이 합병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자오는 이렇게 밝혔다. "국가주의나 정치적 맥락이 아니라 사업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칭화유니그룹의 활동 내역을 비즈니스 논리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반도체 회사를 사겠다고 달려드는 중국 정부 소유의, 혹은 중국 정부가 자금을 대고 있는 "사모펀드" 회사들이 너무도 많았다. 해외 반도체 기업을 집어삼키려는 중국 정부의 활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시진핑이 "돌격 앞으로"를 외치지 않았던가. 자오와 칭화유니그룹, 그 밖에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투자" 회사들은 시진핑이 공개적으로 밝힌 방침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p447)
신문 제목을 보면 화웨이가 중국 정부의 스파이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화웨이를 처음부터 중국 안보 당국의 비호 아래 큰 회사로 단정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화웨이와 중국 정부가 관련된 부분은 문서로 잘 정리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떻게 화웨이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사업적 성공을 이룰 수 있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기술에 초점을 맞춘 또 다른 거대 기업인 한국의 삼성과 화웨이의 궤적을 비교해 보는 편이 화웨이의 성장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런은 삼성의 이병철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났지만 두 거물은 유사한 방식으로 사업을 굴렸다. 이병철이 건어물상이었던 삼성을 세계 최고의 프로세서와 메모리 칩을 만드는 테크 기업으로 키워 낸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정부 규제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값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 관계에 계속 공을 들였다. 둘째, 서구와 일본이 개척한 제품군을 특정해서 그것을 같은 품질에 낮은 가격으로 만들어 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셋째, 새로운 고객을 찾기 위해서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회사들과 경쟁하면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주저 없이 세계화를 선택했다. 이러한 전략을 실행함으로써 삼성은 한국의 전체 GDP 중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익을 달성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다. 중국 기업이 비슷한 전략을 실행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중국기업은 세계 시장에 비중을 덜 두는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중국은 수출 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인터넷 기업은 대부분의 돈을 규제와 검열로 보호받는 자국 시장 내에서 벌어들였다. 텐센트, 알리바바, 핀둬둬Pinduoduo (중국의 인터넷 쇼핑 회사), 메이투안Meituan (중국의 음식 배달 회사)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 시장을 제외하고 나면 초라한 회사가 될 정도였다. 해외로 발을 디딘 중국 테크 기업은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수난을 겪기 일쑤였다. 반면에 화웨이는 초창기부터 외국과의 경쟁을 받아들였다. 런정페이의 사업 모델은 알리바바나 텐센트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해외에서 선구적인 개념을 받아들여 가성비 좋은 버전을 만들어 냈고, 그것을 다시 세계 시장에 팔아서 다른 나라 경쟁사들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 시장 점유율을 가져왔다. 이 사업 모델은 삼성의 창업가를 부자로 만들어 주면서 삼성을 세계 기술 산업의 핵심으로 올려놓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주 최근까지 화웨이는 삼성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p45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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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 통신을 통한 연결과 연산력의 성능이 구세대 제품을 디지털 기기로 바꿔 놓은 경우를 보려면 일론 머스크Elon Musk의 자동차 회사 테슬라 Tesla 만큼 좋은 사례는 없다. 테슬라는 그 숭배자와 주가 상승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이있다. 테슬라 역시 반도체 설계 분야의 주요 회사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테슬라는 짐 켈러Jim Keller 같은 반도체 설계 분야의 스타를 고용해 자율 주행의 필요에 부합하는 특화된 반도체 설계를 맡겼다. 오늘날의 첨단 기술이 녹아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2014년 초부터 몇몇 분석가는 테슬라의 자동차가 "스마트폰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자체 반도체를 스스로 설계하고 있기에 테슬라는 종종 애플과 비교되곤 한다. 테슬라는 애플 제품과 마찬가지로 사용자 경험을 섬세하게 조율하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제품인 자동차에 고도의 컴퓨터 기술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융합시켰다. 이 모든 일은 자체 설계한 반도체 덕분이다. 1970년대부터 자동차에는 단순한 반도체가 도입되어 왔지만 전기차가 확산되면서 특화된 반도체의 필요성이 커졌다. 전력 공급을 관리하고 자율 주행 기능에 필요한 연산력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 자동차에 필요한 반도체 개수와 비용 역시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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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상쇄 전략 자동화된 드론 군단부터 사이버 공간과 전자기파 스펙트럼 속에서 펼쳐지는 보이지 않는 전투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미래는 연산력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미군은 이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선두 자리에 있지 못했다. 정교한 미사일과 모든 것을 감지하는 센서 덕분에 전 세계의 바다와 하늘에서 어느 누구도 미군에 필적할 수 없던 시절은 끝난 지 오래다. 1991년 걸프전 이후 전 세계의 국방부를 전율시켰던 충격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의 군대를 무력화했던 정밀 폭격은 세계 어느 군대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점은 베이징에 "심리적 핵 공격"과 다를 바 없는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걸프전 이후 30년이 흘렀다. 중국은 첨단 기술 무기 체계에 막대한 자금을 퍼부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인민을 동원한 군대, 기술력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군대에 대한 교조적 집착이 있었으나 그것을 버렸다. 미래의 싸움은 첨단 센서, 통신, 컴퓨터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지금 중국은 첨단 전투 부대가 필요로 하는 컴퓨팅 인프라를 개발하고 있다. (p469)
베이징의 목표는 단순히 미국과 맞먹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 정도가 아니었다. 미국의 우위를 "상쇄otset "할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기를 원했다. 1970년대 미국이 소련에 맞서기 위해 창안했던 "상쇄 전략"을 중국이 미국에 맞서 구사하고자 한 것이다. 중국은 미국에 비해 구조적으로 우위에 있는 무기류를 현장 배치했다. 중국의 정밀한 대함 미사일은 잠수함을 제외한 미국의 군함이 유사시 대만해협에 진입할 때 극도로 위험한 공격 수단이며, 미국의 해양력을 항구에 묶어 놓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새로운 방공 시스템air defense systems은 군사 분쟁 시 제공권을 장악하는 미국의 능력에 맞설 수 있다. 장거리 지상 공격용 미사일은 일본에서 괌까지 이어지는 미군 기지를 위협한다. 중국의 위성요격 무기는 미국의 통신과 GPS 네트워크를 작동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중국의 사이버전 역량이 아직 전장에서 확인된 적은 없으나, 중국은 미군 전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자 할 것이다. 전자기파 스펙트럼마저도 미래의 전장이다. 그곳에서 중국은 미국의 통신을 교란하고 감청 시스템을 속이면서 미군이 적군을 볼 수 없게 만들고 동맹과 소통하는 것도 차단하고자 할 것이다. (p470)
중국군이 이런 능력을 키워 나가게 된 것은 중국 군부 고위층이 품고 있던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앞으로의 전쟁이 단순히 "정보화 informationized"되는 차원을 넘어 "지능화 intelligentized" 할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을 무기 시스템에 적용한다는 뜻이 담긴 그다지 정제되지 않은 군사 용어다. 물론 연산력은 지난 50년 동안에도 군사력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군사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다루어야 하는 1과 0의 양은 수십 년 전과 비교하면 수백만 배 넘게 늘어났다. 게다가 오늘날 미국은 확실한 도전자와 맞닥뜨리고 있다는 점 또한 달랐다. 미사일 대 미사일의 숫자만 따지면 소련은 미국의 상대가 되었지만 소련의 컴퓨터는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중국은 양쪽 모두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운명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었다. 1과 0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국가가 결정적인 군사적 우위를 갖게 될 터였다. (p471)
군사용 인공지능이라는 말은 살인 로봇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군사 체계에서 머신러닝을 이용해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은 실로 광범위하다. 언제 어떤 기기를 수리해야 할지 AI를 통해 예상하고 미리 정비하는 예측 유지 보수Predictive maintenance는 이미 현장에서 비행기와 배를 수리하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다. 잠수함의 수중 음파 탐지, 인공위성이 보내는 영상 등을 AI로 식별하면 적의 위협을 더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다. 새로운 무기 체계는 보다 빨리 설계할 수 있다. 특히 움직이는 목표를 대상으로 하는 폭탄과 미사일의 정확도가 이전에 비해 향상될 것이다. 자동 운항 수단이 하늘과 수면 아래, 육상을 누비며 수색하고 적을 식별하여 파괴할 것이다. "인공지능 무기" 같은 말을 들으면 대단한 혁명적 변화가 벌어질 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수십 년 동안 발사 후 알아서 표적을 추적하는 자동유도 미사 일을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무기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스스로 움직이게 되면 무기가 요구하는 연산력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p472)
중국이 인공지능으로 강화된 무기 체계를 개발하고 배치하는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그 "경쟁"은 단일 기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이 대목에서 냉전의 군사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최초로 인공위성을 우주로 보낸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 올려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AI 시스템에 대해 중국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조지타운대학교의 벤 부캐넌Ben Buchanan은 AI를 제대로 다루려면, 데이터, 알고리즘, 연산력의 '세 기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중국은 그중 두 영역에서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고, 부족한 것은 오직 연산력뿐이다. (p472-473)
냉전의 승부는 미국 미사일의 유도 컴퓨터 주위를 도는 전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싸움은 전자기파 스펙트럼 속에서 결판이 날 수 있다. 전자 센서와 통신 장비에 온 세상의 군대가 더욱 의존할수록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적을 탐지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스펙트럼 공간에 접근하기 위한 싸움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전시에 전자기파 스펙트럼이 어떻게 작동할지 단지 얼핏 보았을 뿐이다. 가령 2007년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핵 시설을 공습했을 때,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레이더를 교란하거나 해킹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시리아의 방공 시스템을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다양한 레이더와 신호 교란기를 동원하고 있다. 또 러시아 정부는 보안을 고려하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일정이 있을 때 방문지의 GPS 신호를 차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DARPA는 GPS 신호나 인공위성에 의존하지 않는 대안 항법 체계를 연구 중이다. GPS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미국의 미사일이 목표물을 맞힐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다. (p478)
워싱턴과 반도체 업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세계화라는 꿀단지를 끌어안고 단물을 마셔 왔다. 언론과 학자들 역시 세계화를 진짜로 "글로벌"한 것처럼 전달해 왔다. 기술 확산은 막을 수 없고, 다른 나라의 기술 역량이 발전하면 미국에 이익이 되며, 설령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기술의 진보를 막을 수는 없다는 식이었다. "반도체 산업이 세계화된 세상에서 일방적인 행위는 점점 더 무의미한 것이 된다"라고 오바마 정권의 반도체 보고서는 주장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정책은 기술의 확산 속도를 지연시킬 수는 있으나 그 확산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 할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럴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세계화"가 아니라 "대만화"였다. 기술은 확산되지 않았다. 대체 불가능한 한 줌의 기업이 독점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살펴봐도 세계화의 불가피성이란 틀린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미국의 기술 정책은 그 흔한 상투적 어구에 인질로 잡혀 버리고 말았다. 미국은 제조, 리소그래피, 그 외 다른 영역에서 기술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우위를 헛되이 흘려보냈다. 경쟁의 주체는 기업이며 정부는 그저 평평한 운동장을 깔아 주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워싱턴이 빠져 있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경제학 교과서와 신문 칼럼에서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그런 주장은 특히 아시아의 반도체 산업에 정부가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미국의 관료들은 다른 나라가 반도체 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움켜쥐고 있는 현실을 그저 무시해 버렸고, 그러는 사이 미국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p490-491)
실리콘밸리 사람들 중 다수가 트럼프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인텔의 CEO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대통령 후보로 나온 트럼프에게 후원금을 약속했다는 이유로 심각한 역풍을 감수해야 했다. "그 후 백악관 보좌관으로 영입된 그는 결국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업계의 경영진은 트럼프의 국내 정책을 못 본 척하려 했지만 트럼프는 조변석개하는 사람이었고 동맹으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트위터로 관세 정책을 발표하는 이가 CEO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의 메시지는 트럼프 백악관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들과 너무도 상충되는 것이었다. 공개 석상에서 반도체 업계 CEO와 로비스트들은 새 정부가 중국을 설득하여 무역 협정에 순응하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석에서 그들은 그런 접근법이 통할 리 없다고 인정하면서 국가 보조를 받는 중국의 경쟁 기업이 실리콘밸리가 가지고 있는 시장을 빼앗을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중국 시장 판매에 대한 반도체 업계 전반의 의존도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인텔 같은 칩 제조사, 퀄컴 같은 팹리스 설계 업체, 혹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같은 장비 제조 업체 모두 마찬가지였다. 미국 반도체 기업의 어떤 경영자는 한 백악관 관료에게 이 상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전달했다. "우리의 근본 문제는 우리의 최대 고객이 우리의 최대 경쟁자라는 겁니다." (p496)
2018년 4월, 트럼프와 중국의 무역 갈등이 격화하면서 미국 정부는 ZTE가 형량 거래를 어겼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 관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한 보좌관의 전언에 따르면 트럼프의 상무부 장관인 윌버 로스Wilbur Ross는 이 사안을 "매우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 로스는 2017년에 타결된 ZTE의 형량 거래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상무부는 미국 기업과 ZTE의 거래에 새로운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이 결정은 "거의 아무도 모르게" 상무부 내에서 전달되었다. 이 규제가 회복된다면 ZTE는 미국산 반도체를 비롯한 다른 물품을 구입할 수 없게 되고, 미국이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ZTE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본인은 기술보다 무역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ZTE의 목을 졸라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시진핑과의 협상 카드로 바라보았다. 중국 지도자들이 그런 방향의 거래를 제안하자 트럼프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소식을 트위터로 알렸다. ZTE가 "중국에서 너무 많은 일자리 손실을 가져올" 것을 고려하여 ZTE를 살려둘 방법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곧 ZTE는 다시 한 번 벌금을 내고 미국의 부품 공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트럼프는 자신이 무역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워싱턴의 대중국 강경파는 재무부 장관인 스티븐 므누신steven Mnuchin 같은 관료에게 트럼프가 놀아났다고 생각했다. 므누신은 트럼프에게 베이징과 화해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촉구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ZTE 대소동을 통해 분명해진 사실이 하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테크 기업들 모두가 미국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한 관료의 표현처럼 그저 "우리가 경쟁하는 모든 것"의 "주춧돌" 정도가 아니었다. 그 자체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었다. (p498-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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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헨리 패럴Henry Farrell과 에이브러햄 뉴먼Abraham Newman 이라는 두 미국인 학자가 "무기화된 상호 의존weaponized interdependence" 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국제 정치와 경제 관계가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세계 각국이 전에 없이 얽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갈등이 해소되고 화합이 증진되기는커녕 상호 의존은 새로운 경쟁의 장을 열어 버리고 말았다. 여러 나라를 하나로 엮어 주는 네트워크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금융 분야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가 미국의 은행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무기로 삼아 이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들 학자가 볼 때 미국 정부가 무역과 자본 이동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세계화를 위협하며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불러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트럼프 정부는 같은 사실을 보며 다른 결론에 도달해, 반도체 공급망에서 미국이 가진 특별한 힘을 기꺼이 무기화하기로 했다.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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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의 기술 경쟁이 과열되면서 중국 정부가 "스푸트니크 모멘트sputnik moment"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흔히 제기되었다.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 후 미국은 경쟁자에게 뒤처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워싱턴이 과학과 기술에 돈을 쏟아붓게 된 일련의 사건들처럼, 이번에는 중국에서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미국이 화웨이 같은 기업을 대상으로 한 반도체 수출을 금지하면서 중국이 스푸트니크급 충격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중국의 기술 정책에 대한 가장 똑똑한 분석가 가운데 하나인 댄 왕Dan Wang은 미국의 규제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새로운 정책을 촉진함으로써, "기술 지배를 향한 베이징의 추구를 가속화"했다고 주장한다. 왕이 볼 때 미국의 새로운 수출 규제가 없었다면 '중���제조 2025'는 중국이 지금까지 해 왔던 산업 정책과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터였다. 정부가 상당한 액수의 헛돈만 쓰고 끝났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의 압력 덕분에 중국 정부는 중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그보다 훨씬 큰 지원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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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정부와 대부분의 언론은 반도체 부족을 공급망의 문제로 해석했다. 백악관은 250쪽에 달하는 연구 용역을 통해 반도체에 초점을 맞춘 공급망 취약성을 다루었다. 하지만 반도체 부족이 발생하게 된 주된 원인은 반도체 공급망 때문이 아니었다. 가령 말레이시아의 코로나 락다운으로 인해 반도체 패키징 공정에 타격이 왔던 것처럼. 공급 측면의 혼란이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021년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칩을 생산하고 있었다. 반도체 시장조사 기관인 IC 인사이트IC Insights에 따르면 2021년 출고된 반도체는 총 1조1000억 개를 넘겼고, 이는 2020년 대비 13퍼센트 증가한 것이다. 반도체 부족의 주요 원인은 공급 측면보다 수요 증가를 살펴보아야 할 일이었다. 새로운 PC, 5G 스마트폰,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등, 결국에는 우리가 연산력을 엄청나게 사용하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는 전 세계 정치인들이 반도체 공급망의 딜레마를 잘못 진단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도체 업계가 코로나와 그로 인한 락다운에 잘못 대처했고, 그래서 생산이 지연되었다는 식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반도체 업계만큼 큰 탈 없이 코로나 기간을 통과한 업계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특히 자동차용 반도체에서 도드라진 문제는 자동차 회사들 스스로가 겁에 질려 내린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코로나 초기 반도체 주문을 너무 일찌감치 취소해 버린 그들은 적시공급생산방식 just-in-time을 택하고 있던 터라 보유 재고가 충분치 않았고 주문 실수를 무마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자동차 산업은 코로나 기간 동안 수 천억 달러가 넘는 매출 손실을 겪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가 공급망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재고해 볼 이유가 충분했다. 반면에 반도체 산업은 풍년을 맞았다.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 전제했을 때,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0이라고 할 수는 없을 엄청난 지진이 발생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2020년대 초부터 벌어진 코로나 충격에 비할 만한 일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 와중에도 반도체 생산은 2020년과 2021년 확연히 상승했다. 이는 다국가적 공급망이 망가진 상태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공급망은 잘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p53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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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은 최근 <포어페어스>를 통해 대만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대만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해 주는 '실리콘 방패'이며 국제 공급망을 교란하려는 독재 정권의 공격적 시도에 맞설 수 있게 해 준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현 상황을 대단히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아닐 수 없다.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으로 하여금 대만의 방위를 보다 진지하게 고려하게 만드는 요소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반도체 생산이 대만에 집중되는 것은 세계 경제에 위험 요소가 되고 있으며, "실리콘 방패"가 중국을 막지 못한다면 그 위험은 현실이 될 것이다. 2021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대만인이 중국과 대만 사이의 전쟁 가능성이 낮다(45퍼센트) 혹은 불가능하다(17퍼센트)고 보고 있었다. 전쟁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가 지난 50년 이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p553-554)
연산력을 만들어 내는 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한 과제다. 이는 실리콘밸리의 성공이 단지 과학이나 엔지니어링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시장을 만났을 때에만 발전 가능하다. 반도체의 역사는 반도체 판매, 마케팅, 공급망 관리, 원가 절감의 역사이기도 하다. 실리콘밸리는 사업가들이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도 없었다. 밥 노이스는 MIT에서 공부한 물리학자였지만 사업가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때까지 존재하지도 않았던 제품을 만들고 시장까지 개척해 냈던 것이다. 고든 무어가 그 유명한 1965년 기고문에서 썼던 표현을 빌리자면 페어차일드반도체는 "집적회로에 더 많은 부품을 우겨넣는" 능력을 지닌 회사였지만, 그것은 그 회사가 보유한 물리학자나 화학자들뿐 아니라, 반도체 제조의 효율을 추구하며 몰아붙이는 찰리 스포크 같은 이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도체 팹은 노조 없이 운영되었고 대신에 직원에게 스톡 옵션을 제공함으로써 생산성을 거침없이 끌어올릴 수 있었다. 오늘날 트랜지스터의 개당 가격은 1958년과 비교해 볼 때 100만분의 1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하다. 안타깝게도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한 페어차일드 직원이 퇴사 설문조사에 남긴 말에서 우리는 그런 발전이 가능했던 이유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나는 ・・・ 부자가・・・ 되고 ・・・ 싶다." (p559-560)
무어의 법칙의 종말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오늘날 반도체 산업에 들어오는 돈의 액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이다. AI 알고리즘에 특화된 칩을 설계하는 스타트업들은 지난 몇 년간 수십억 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모두가 차세대 엔비디아가 되는 꿈을 품고 있는 것이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페이스북, 알리바바, 그 외 많은 빅테크 기업은 이제 엄청난 돈을 들여 반도체를 자체 설계하고 있다. 혁신을 이루려는 시도가 부족하다는 증거는 단연컨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어의 법칙을 옹호하는 최고의 주장은 이렇다. 무어의 법칙은 특화된 목적의 칩이 나오면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개별 기업이 칩을 설계하고 있는데, 이는 인텔이 "범용 목적"의 연산력을 제공하기 위한 칩을 만들고 있었고 다른 회사는 그 칩의 성능 향상에 기대야만 했던 지난 반세기의 경향과 분명히 다른 것이다. 닐 톰슨Neil Thompson과 스벤야 스파누스svenja Spanuth라는 MIT의 두 연구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는 "범용 목적 컴퓨터 기술의 끝"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의 컴퓨터 사용이 "강력한 전용 칩에서 작동하는 '추월차선' 애플리케이션과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범용 목적 칩을 사용하는 '일반 차선' 애플리케이션"의 두 가지 종류로 양분될 것이라 보고 있다. (p563)
또 서로 다른 종류의 칩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는 하나의 기기에 단일한 프로세서 칩이 탑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여러 개의 프로세서가 들어간다. 어떤 칩은 전반적인 용도로 사용되지만, 카메라 같은 특수 목적을 위해 최적화된 프로세서도 존재한다. 새로운 반도체 패키징 공정이 출현하면서 칩을 보다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일이 가능해졌고, 전자 기기를 만드는 회사들은 기기에서 요구되는 연산에 따라 혹은 비용에 맞춰 특정 칩을 넣거나 빼는 일 또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대형 칩 제조사들은 그들이 만든 칩이 어떤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어디에 쓰일지 이전보다 훨씬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러니 고든 무어가 처음 예상했던 바로 그 방식 그대로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도달했느냐 여부는 우리가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칩 하나에 올라가는 트랜지스터 수가 말 그대로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나는지 여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대신에 우리는 하나의 칩에 담길 수 있는 연산력이 늘어나고 있는지, 그러면서 비용 효율성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한계에 도달했을까? 수백억 달러의 연구비를 쓰는 수천여 엔지니어들은 여전히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다. (p565)
<'마법'의 기술,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그려 보려면_노정태>
21세기, 우리 인류는 어쩌다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까? 너 나 할 것 없이 손에 쥐고 다닐 만큼 첨단 반도체가 흔한 세상에 살게 된 건 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 나무에서 내려와 사바나 평원에 선 유인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끝없이 전쟁을 해 왔다. 그 모든 전쟁은 결국 단 하나의 실력으로 판가름 났다. 누가 상대보다 더 빨리, 더 강하게, 더 정확하게 무언가를 던져서 목표를 맞출 수 있는가다.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규칙이다. 상대보다 나은 투척 능력을 가진 자는 적이 다가오기 전에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 날카로운 이빨도 강한 근육도 없는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들보다 큰 거의 모든 대평 포유류를 멸종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돌과 창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p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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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만의 TSMC가 필요하다. 네덜란드 기업 ASML의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가 없으면 TSMC는 애플의 최신 칩을 만들 수 없다. ASML은 미국의 사이머, 독일의 트럼프와 자이스의 핵심 부품에 의존한다. 이토록 촘촘하고 정교한 글로벌 공급사슬 덕분에 우리는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 기술을 영위하며 살 수 있다. 반도체 국수주의는 위험천만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발상이다. 대한민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 외 수많은 반도체 기업 또한 글로벌 공급사슬의 일부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죽창가'를 부르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고 해서 '소재, 부품, 장비 독립'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러한 시도가 무망하다는 것은 기술 수준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낮았던 1970년대, 마오쩌둥의 권력욕이 빚어낸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이 이미 처참한 실패로 증명한 바 있다. 우리는 미국이 우리 반도체 산업을 '빼앗아' 갈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우리가 잘못된 산업, 외교, 안보 정책 등으로 인해 스스로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망가뜨리고, 그렇게 생긴 시장의 빈틈을 일본, 미국, 대만, 중국 등 경쟁국이 가져갈 가능성을 우려해야 한다. <칩 워>가 다양한 각도로 촘촘하게 서술하고 있는 반도체 산업의 역사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식이 한 걸음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578)
- 크리스 밀러 , ' 칩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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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3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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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amazon.de/Musik-kommt-aus-Stille-Gespr%C3%A4che/dp/3894879491 )
[1부 마르틴 마이어와 나눈 대화들]
근본적인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고. 자네에게 음악은 무엇을 의미하나? 본질적으로 음악이란 뭐지? -처음엔 고요가 있어. 음악은 고요에서 나와. 여러 가지 소리와 구조로 빚어진 참으로 다양한 진행의 기적이 일어나지. 그런 다음 다시 고요가 찾아와. 결국 고요가 음악의 전제조건인 거야. 하지만 그런 걸 넘어서 나한테 음악은 훨씬 더 많은 걸 의미해. 음악은 내 인생이니까. 음악은 그 어떤 경우에도 단순히 물질적 관점으로 축소될 수 없어. 비록 이런 시도가 되풀이되었고 계속될지���도 말이야. 음악은 아주 본질적으로 정신의 문제, 정신적인 것의 문제야. (p11)
자네가 음악을 만들어낼 때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어떤 모색들이 (연주에) 효력을 발휘하나? -난 아주 주의 깊게 경청하려 해. 이는 내가 울려내는 음들을 제3의 귀로 추적하는 문제야. 이 제3의 귀가 잘 계발되었을수록 더 나은 음악가이기도 하지. 나는 이 '재능'을 이미 대학시절에 계발했고, 스승들은 내적으로 귀 기울이도록 지도해주셨어. 따라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큰 소리로 노래하는 건 위험해, 혹은 몹시 해로워. 그렇게 해도 잘 들을 수 있다고들 생각하지만, 착각이야. 피아노가 노래해야 돼,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p12)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도 시간 속에서 형체가 빚어지는 예술이야,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 펼쳐지지. 아울러 자주 높은 수준의 추상성을 보여주면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비대상적인 예술이기도 하고. 그건 해석연주가에게도 어마어마한 도전인데. -음악은 게다가ᅳ문학과 달리 대부분 다성적이기까지 해, 그레고리안 성가라든가 그와 유사한 모노디를 논외로 하면, 그리고 특히 피아노를 보면, 음악은 거의 다성적이지. 여러 성부가 연주되거든. 흡사 연극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대사를 동시에 말하고 연기하듯 말일세. 무대에서 그런 일은 사실상 없지. 그렇기 때문에 음악에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돼. 바흐 음악에서는 어차피 그렇고. 이를테면 4성 푸가가 그렇지. 여기서 모든 성부는 대등하거든. (p13)
미술이나 문학에서는 상당히 다른 양상일 테지. -맞아. 음악은 그 점에서 꽤나 외톨이야. 거꾸로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시대 또한 대단찮은 재능의 작곡가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돼. 하지만 구조원리에 관해 아울러 왜 내가 이 시대를 그토록 사랑하는가에 대한 설명 삼아-한마디 하겠네. 빈 고전주의는 소나타 형식으로 된 하나의 '언어'야.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 거기에다가 으뜸음, 딸림음, 버금딸림음, 가온음 등등. 다르게 말하면, 우린 때마다 우리가 있는 위치가 어딘지 안다는거지. 오늘날 동시대의 음악과 관련해서는 진공상태에 있는 느낌을 받곤 해. (p14)
모든 건 대비와 적절한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소름이 예외상황인걸 테니. -음악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드라마야. 그런 만큼 감정성이라는 문제에서도 복합적인 무늬의 진행굴곡을 보여주지. 예를 들어 한 친구가 와서 내게 말하는 거야,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25번 변주곡을 연주해주게. 나는 그에게 말해. "자네가 원한다면. 하지만 자네는 뭔가를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어. 물론 25번 변주곡은 절대적으로 경이로운 무엇이긴 해. 하지만 그걸 맥락에서 분리해도 될까?" 결정적인 건, 이 변주가 놓인 위치야. 이 변주는 연주회에서 한 시간 안팎의 '앞선 진행 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다르게 말하면 이래. 그런 정점은 선행하는 전제들을 발판으로 하는 거야. 이 정점은 차곡차곡 구축되어야 하는 거고. 1초 내에 '소환'될 수 없어. 모름지기 그러지도 않아야 할 테고. (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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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들과 음악사적 발전에 관해 한 번 더 이야기해볼까. 정신의 객관화였던 바흐로부터 자기자신의 표현 방식 및 등장 방식의 주관화인 베토벤까지. 즉 이런 뜻이기도 하겠네, 종교적이며 신학적으로 기초된 질서 및 신 안에서의 좌표로부터 인간이 일군 체험의 공간으로, 이건 자네에게 뭘 의미하나? -바흐에서 내게 가장 심금을 울리는 건 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경건성이야. 그 어떤 자아중심성과도 동떨어진 완벽한 자아부재 말일세. 바흐는 신앙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이지. 신과 자기 교구를 위해 작곡했어. 이는 동시에 그의 의무이기도 했고, 바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어. 그렇지만 그는 후세라든가 길이 남을 역사적 명성을 염두에 두고 작곡하지 않았어. 그는 단지 자기 의무를 행한 거야. 2주에 한 번씩 일요일마다 새 칸타타를 마련해놓는 일을 한 거지. 그런 헌신의 자세는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혹은 중세의 거대한 성당들을 떠오르게 만들어. 누가 이들 성당의 건축가들을 아나? 이들 성당의 석공들과 조각가들을? 하이든과 모차르트만 해도, 베토벤은 더더군다나, 자기 자신 및 자기 소명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양상이 달랐어. 이들에서는 주관성을 드러내보이는 변화가 시작되지. 이 변화는 물론 여러 가지 획기적인 사회적 변화와도 궤를 함께하는 거고. (p31)
젊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가 무엇보다도 바흐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쇼팽이나, 슈만, 리스트와 함께하는 '질풍노도' 시기를 상당히 의식적으로 건너뛰었다. 이는 이례적인 편이었지 않나? -난 언제나 바흐가 해방감을 준다고 느꼈어. 그의 엄격함이란 건 곳곳에서 착시로 밝혀져. 바흐는 지시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템포 지시는 거의 없고, 다이내믹 관련 명령도, 프레이징도 아티큘레이션도 없어-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아주 흥미로워. 바흐 안에서 그리고 바흐를 통하여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거든! 내 스승 조지 말콤은 이 자유에 날개를 달아주었지. 과장해서 말 해본다면 이래, 바흐의 푸가는 열 가지 다양한 템포로 연주할 수 있고 그 결과물은 대부분 감명 깊어. 자네가 쇼팽을 언급하니 말인데, 쇼팽이 허용하는 자유는 훨씬 덜해. 쇼팽이 낭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 무슨 착각인가! 사소하기 그지없는 과장만으로도 촌스러움으로 추락해버릴 수 있다고. 바흐를 연주할 때면 난 물 만난 고기가 된 기분이었어. 지금도 그래. (p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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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음이 울리기도 전에 이미 난 연주회를 하고 있는 거야. 음악은 고요로부터, 평온으로부터 나와야 해.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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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자네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야. 현재 나는 베토벤을 모차르트보다 더 앞에 세워. 베토벤이 실존적인 것에 더 닿아 있기 때문이지. 그가 쓴 위대한 작품들에서 나는 바흐에서와 유사하게 형이상학적인 것, 우주적인 것을 느껴. 후기 소나타들, <디아벨리 변주곡>, 현악 사중주들, <장엄 미사>, 이들 작품에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 광활한 지평이 열려. (p43)
안드라스 쉬프, 마르틴 마이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들과 그 해석] (p44)
-나아가, 얕은 수로 청중을 기만하려 드는 것 또한 그릇된 일일 걸세. 오히려 청중은 대개 아주 예민하고 교양 있어.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연주 기획은) 모든 청중이 아는 얼마 안 되는 레퍼토리를 기준 삼아선 안 돼. 훌륭한 청자를 기준으로 해야지.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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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는 베토벤보다 훨씬 투명하게 작곡해. 다른 한편, 슈베르트 소리의 형상은 매우 예민해 상처받기 쉬운 모습을 하고 있어. 그 면에서 모차르트 소리의 형상과 닮았고, 기묘한 건, 내가 생각하기엔 베토벤의 작품들은 망가뜨리기가 훨씬 어렵다는 거야. 형식이 작품을 어차피 결합해주니까. 반면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와해되거나 긴장을 잃어버릴 수 있어.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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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제를 위해 피아니스트에게는 어떤 자질이 요구되지? -피아니스트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본인의 소리도 아주 잘 들을 수 있어야 해. 소리에 대한 강한 감각을 소유하거나 발달시켜야만 하고, 필요할 경우엔 현악기나 관악기와도 아니 심지어 인간의 음성과도 잘 어우러질 수 있는 피아노 소리를 찾아야 해. 그리고 가곡, 가곡 작업 또한 성악가와 피아니스트 사이의 동등한 파트너십에 기반하고 있지. 여기서도 우리는 실내악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네. 예전의 관행들을 기억해보자고. 당시에 피아니스트는 자주 피아노 뚜껑을 닫고 혹은 반쯤만 열어놓고 연주했어. “너무 큰 소리는 금물!"이 슬로건이었지. 그러나 자기 직업을 정말로 이해하는 피아니스트에게라면, 활짝 열어놓은 피아노는―예술적 형상화에 있어 결정적인-다양하고 풍성한 소리와 색조를 그에게 제공해줄 거야. 하지만 그가 예민하게 '레기스터'를 쓸 줄 모른다면, 음향과 터치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그러면 그는 피아노 뚜껑이 설령 완전히 덮인 채여도 심히 시끄럽고 우악스러운 소리를 낼 거야. (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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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원칙 혹은 그렇게 부를 만한 건 뭐가 있을까? -아휴, 그건 어떤 사람이 피아노에 앉아 있는 자세에서부터 벌써 시작해.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자세를 가졌어. 들어보기도 전에 벌써 보여. 그래서는 절대로 좋은 음이 나올 수가 없어. 모든 게 지나치게 뻣뻣해. 또는 어떤 사람이 호흡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지. 그런데 그건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는 거거든. 나는 학생들에게 연주에 앞서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해. 학생들은 쭈뼛쭈뼛하지.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그들은 느끼는 거야. 호흡을 하는 것, 프레이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구나 하고. 그러면 그게 피아노로 옮겨져 기술적인 것과 기계적인 사안들은 절대로 주안점이 아니야. 비록 등한히 할 것은 아니라 해도.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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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누가 봐도 분명 가지런하고 정돈된 사람이지. -그래, 그러길 바라. 그건 내면의 안뜰과 관계되거든. 하지만 연주여행 도중에 내가 전혀 혹은 거의 개입할 수 없는 '주변'에서 아주 많은 일이 벌어져. 쇼-효과 이야기를 해볼까. 오늘날 모든 건 멀티미디어를 통해 시각화되어야만 하지. 결과는 아우라의 상실이야. 예전엔 무대로 난 문이 열리고 루빈슈타인이나 리흐테르가 홀 안으로 걸어 들어올 때면 공간에 아우라가 감돌았어. 무슨 수를 쓴 것도 아닌데 세상이 달라지곤 했어. 한번 봐봐, 예전에 오이스트라흐가, 메뉴인이나 하이페츠가 바이올린을 턱 아래 갖다 대고 그저 '거기' 서서는 즉시 환상적으로 연주하던 모습을. 그건 스네이크 차밍을 방불케 하는 오늘날의 관행들과는 뭔가 다른 거였다고. 또는 지휘자들을 볼까. 맙소사! 나의 위대한 모범인 오토 클렘페러는 아무것도 안 '했어'. 그의 위엄과 존재감은 표피적인 것들이 필요치 않은 왕과도 같았지. 오늘날 많은 젊은 지휘자들이 처음 몇 마디부터 벌써 천장에 닿을 지경으로 풀쩍 뛰어. 왜지?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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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에서 '계급의 적'이었던 거네. -그래. 그래서 노스탤지어는 위험한 면이 없지 않아. 반대로 위에서 말한 헝가리인의 엉성함은 위트의 문화를 허락했지. 좀 과장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 우리는 이 시기를 위트 덕분에 살아낼 수 있었다고. 헝가리인은 아주 유머 넘치는 민족이기도 하거든. 항상 멋진 위트를 선보일 준비가 되어 있었어. 하지만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정치적 위트를 이야기하는지 엄청 주의해야 했지. (p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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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말콤, 오토 클램페러 바흐의 브란덴부��크 협주곡 EMI 녹음 (p140)
도흐나니가 당시에도 여전히 대단한 영웅이었다고?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카도사의 말은 겸손의 기록인 거야... 도흐나니는 굉장했고, 음악원의 전설이었으니까. 카도사는 항상 커다란 전체를 가르쳤어. 세부사항으로 들어가지 않았지. 학생들은 한 시간 수업에 여러 작품을 준비해 와야 했어. 이 수업은 정확히 한 시간이었어, 1분도 길거나 짧지 않았네. 이렇게 집중도 대단한 수업에서 모든 것을 다루었지. 카도사는 말수가 적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아주 미적 품위가 있고, 명석했어. 예를 들어서 쇼팽을 연주할 때는 “이 부분을 그렇게 감상적으로 연주하지 마라”라고 말했지. 또는 "좀 더 명확하게, 좀 더 아티큘레이션 선명하게" 또는 "좀 더 레가토로" 베토벤 소나타들에서는 연결부와 요약부가 중요했어. "기계적으로 하지 말게나. 그렇게 공격적으로 하지 말게. 표현력 있게, 다감하게 연주하게.” 이와 병행해서 쿠르탁과의 교습도 이루어졌어. 1969년에 쿠르탁이 조교를 그만두자, 페렌츠 라도스가 후임이 되었어. 우리는 쿠르탁과는 실내악을, 라도스와는 피아노를 공부했네. 라도스는 쿠르탁만큼이나 요구 수준이 높은 철저한 사람이었고, 거기에다 피아노의 테크닉 측면에도 아주 중점을 두었어. 그는 피아노에 앉은 내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했네. 맞는 지적이기도 했고, 자세는 소리, 음정, 그리고 다른 것들에 있어 결정적이야. 제대로 앉는 것은 중요해. 많은 젊은 피아니스트가 잘못된 자세로 앉고, 너무 많이 움직여. 훌륭한 피아노 연주 또는 바이올린 연주는 미적으로도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해. 호로비츠를 보게! 루빈스타인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도. 리흐테르는 예외에 속하는 편이었지. 글렌 굴드는 나쁜 예시야. 굴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도 이따금 큰 소리로 노래하는 나쁜 습관이 있었고 지금도 있어. 그러느라 본래의 것은 아예 못 들어! 통제력을 놓치는 거라고. (p143-144)
150
안드라스 쉬프 차이콥스키 콩쿠르 리스트 연습곡 <경쾌함> (p166)
170
쿠르탁 <한국 칸타타> (p172)
(182)
버르토크의 아들 페테르가 쓴 <나의 아버지> (p190)
안드라스 쉬프 모차르트 소나타 데카 녹음 (p193)
안드라스 쉬프, 조지 말콤이 지휘하는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와 런던에서 녹음한 세 개의 바흐 협주곡 (p195)
안드라스 쉬프, 안탈 도라티 슈만 협주곡 쇼팽 협주곡 녹음 (p197)
안드라스 쉬프, 게오르그 솔티 도흐나니 <동요를 주제로 한 변주곡> 녹음 (p197)
(199)
안드라스 쉬프,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ECM 녹음 (p206)
어느덧 자네도 가르치는 일을 해. 이 일을 오랫동안 거부하더니 시작하게 된 동기는 뭔가? -열아홉 살의 나이로 가르치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네. 정확히 말해 대학에서 실내악을 가르치는 거였지.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어. 이제 난 알아, 내가 스스로 터득한 것을 전해주고자 한다는 걸. 거기에다 오늘날 음악하는 방식과 양상에 대한 내 불만도 있고. 그래서 나누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이들을 육성하고자 하는 걸세. 참고로 이것은 매너에서 이미 시작돼. 에티켓 말이야! 매너 있게 행동하는 법을 아는가 모르는 가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야.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전 세계에게 말하기까지 해. 유감스럽게도 피아노 콩쿠르 산업은 스포츠와 같은 방식을 부추기고 있어. 그것은 음악과는 별 상관이 없다네. (212)
자네는 종교적 인간인가? -답하기 어렵군. 어쨌든 무신론자는 아니야. 불가지론자에 가까워. 신을 믿는다고 주장할 순 없어. 나의 종교, 나의 종교성을 체험하는 건 예술에서야. 예술은 나에게 무언가 더 높은 것에 대한, 정신에 대한, 영혼에 대한 증거야. 죽음 후의 삶? 누가 알겠나? 그건 배제할 수도 없고, 그 반대 역시 증명할 수도 없어. 세상에 있는 모든 생각이 나중에 융해되어서 무로 화한다고는 믿지 못하겠군. 모든 음, 모든 생각에는 계속되는 삶이 깃들어 있어. 아마 우주에서 아닐지. 하지만 한 가지는 꼭 강조하고자 해. 나는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와 교조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 원죄론은 터무니없어. 물론 누구나 살면서 오류를 범하고 죄를 지었다고 느끼기도 해, 오류를 시정하려 시도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벌에 대한 공포? 경악스러워. 고해와 그 뒤에 따르는 사함은 이를 너무 간단히 처리해. 용서할 수는 있지. 하지만 어떤 일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절대로 잊히지 않아. (p213)
214
[2부 에세이들]
235 238
리처드 타루스킨의 탁월한 에세이 <진정성과 고음악> (p239)
템포, 다이내믹, 프레이징, 아우트라인 및 꾸밈음과 같은 해석의 여러 관점에 대해 자필악보는 극히 미미한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당시에는 모든 디테일을 표기로 확정해두는 걸 필수적이라고 보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좋은 취향을 가진 음악가들은 무슨 말이 없이도 양식과 성격을 이해했기에 연주하는 이들은 기보의 틈이 나오면 자신의 음악적 이해와 취향에 따라 채워넣었다. 바흐 자신은 그 어떤 작품도 같은 방식으로 두 번을 연주한 적이 없다고 한다. 가령 <반음계적 환상곡>과 <프랑스 모음곡>의 무수한 버전이 이를 증거한다. 이 영광스럽던 시대는 오늘날 우리에게서 한참 멀어졌고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그 시대의 관행과 조건을 복제할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러려고 시도할 수도 없다. 아니 그러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필멸의 존재인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건 오로지 우리가 가진 본능과 상상력에 대한 믿음뿐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이는, 위협적으로 검지를 들어올리며 "너 그건 하면 안돼!" 하고 경고하는 음악적 경찰국가의 법 앞에 굽히는 것보다는 더 유용하고 생산적으로 보인다. 피아니스트는 저주스런 평결의 노예로 추락해버려서는 안 되며 음악의 매체이자 재창조자로 기능해야 마땅하다, 말하자면 제2의 작곡가로서. 바흐의 텍스트는 신성불가침이지만 한편으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고 모종의 결정을 스스로 내릴 자유를 부여한다. 체르니&Co.의 판본들은 우리에게 이 자유를 박탈하므로 아무 쓸모가 없다. 이 판본들은 편찬자의 개인적 해석을 전달하며, 이는 다만 상상 가능한 모든 해석 중 하나를 재현할 뿐이다. 인쇄된 상상력은 다른 연주자들에게 터무니없이 아무 생각 없는 로봇의 옷을 억지로 입히며, 이 로봇 곁에서 고유의 상상력은 무용지물이 된다. (p2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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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해석은 개별 음만이 아니라, 개개의 음악적 '음절' 또는 '단어'뿐 아니라, 전체 '문장들'과 단락들까지 완벽한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p250)
252 256-7
내게 바흐의 음악은 그저 흑백인 게 아니라 오색찬란히 영롱하게 빛난다. 내 상상 속에서 저마다의 조성은 하나의 다른 색상에 대응된다. 각기 24개의 프렐류드와 푸가가 들어 있는 <평균율 클라비어> 두 권은 그런 공상에 적합하다. 상상해보자. 처음에는 C장조로 눈처럼 새하얀 무구함 ('하얀' 건반들만). 마지막에는 6단조, 죽음의 조성. 첫 권의 b단조 푸가를 b단조 미사의 키리에와 비교해 보자. 그건 칠흑처럼 새카만 음악이다. 이들 양극단 사이에 중간색조들이 자리한다. 맨 먼저 노랑, 오렌지 그리고 황갈색(C단조에서 d단조까지), 그러고 나면 파랑(E플랫장조부터 e단조까지), 녹색(F장조부터 g단조까지), 핑크와 빨강(A플랫장조부터 a단조까지), 두 개의 갈색(B플랫장조에서 b플랫단조까지) 그리고 회색(B장조). 두말할 나위 없이 이는 매우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해석을 우습고 유치하다고 볼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의미하는 바가 일련의 음표와 음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나의 이 작은 공상이라는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p258)
바흐는 백과사전적 포부를 가진 작곡가였다.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의 어떤 장르를 갖고 작업하건 그는 경지를 이루었다. 이 경지에 필적한다는 것-혹은 심지어 뛰어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리라. 삶의 여건이 달랐더라면, 그리고 그가 드레스덴의 궁정 작곡가가 되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또한 두말의 나위 없이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가 되었을 것이다. 1731년 이 백과전서적 인물은 <클라비어 연습곡Clavier-Übung>이라는 웅대한 시도에 착수했다. 상이한 여러 양식으로, 그리고 다양한 건반악기를 위해 쓰인 모음곡집이다. 제1부 (1731)에는 6개의 파르티타가 들어 있다. 바로크 춤곡 모음집의 예술을 지극한 완성의 경지로 제시한다. 2부(1735)에서는 <이탈리아 협주곡>이 <프랑스 서곡> b단조 옆에 놓여 있다(한 번도 독일 바깥에 나가 본 바 없던 작곡가치곤 놀라운 일이다). 3부는 오르간곡들의 모음으로 프렐류드와 E플랫장조 푸가, 네 개의 듀엣곡, 여러 곡의 코랄전주곡이 들어 있다. 마지막인 4부에서 바흐는 찬란한 정점으로 마치고자 했다. 그리하여 변주곡들은 그에게 하나의 진정한 도전이 되었다. 어쩌면 그는 이 형식에 대해 모종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의 유명한 동시대인 중 다수가 이 형식에서 대단한 사례를 일구었고 그 대가로 많은 인정을 얻었다. 바흐는 쉽게 얻는 성공에 관심 둔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통상 외면적인 효과를 노려온 변주곡들을 그때까지 없던 예술적 정신적-내적 경지로 이끌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던 것이다. (p261)
바흐는 연주자에게 각각의 단계를 반복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한다. 연주자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완벽한 대칭도 비율도 파괴된 모양새가 될 것이다. 위대한 음악이 너무 긴 법이란 없다. 기껏해야 인내심이 충분히 오래 못 가는 청자가 있을 뿐. (p26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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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지의 여운이 귓전에 울리는 동안 우리는 잠시 조용히 멈춰있다. 그리고 여기서 바흐는 아리아를 처음 그대로 반복한다. 그렇지만 이제 이 아리아를 지난 70분의 사건들로 인해 다른 귀로 듣게 된다.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원은 완성되었고, 처음과 시작은 합쳐졌다. 귀향의 순간 깊은 감사를 느낀다. 포르켈의 이야기에서 카이저링크 백작이 골드베르크에게 자신의 변주곡 중 하나를 연주해달라고 할 때, 우리는 그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작품에서 부분과 조각을 분리해 연주하려들지 않으리라. 그건 신성모독으로 간주되리라. 바흐가 이 작품을 하나의 기념비적 전체로서 작곡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가 꿈을 아무리 대담하게 꿀 때가 있었더라도 그는 이 작품이 온전하게 전곡 연주되리라고 상상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150년 동안 이들 변주곡은 사실상 잊힌 처지였다. 음악가들은 이 작품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연주하지 않았으며, 청중 앞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에테아 호프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에서 카펠마이스터 크라이슬러가 이 작품을 연주한다. 속물적 청자들로선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그들은 도망가 버리거나 깊은 잠에 빠진다. 오늘날 우리는 반대편 극단을 체험하고 있다. 작품은 굉장하게 대중적이 되었고 자주 연주된다. 우리가 우리의 '여행'에서 보았듯, 바흐는 이 곡을 2단 손건반의 쳄발로용으로 썼다. 이 곡을 현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건 몹쓸 죄라는 견해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두자. 그들에게 그 반대를 설득시키는 건, 채식주의자를 육식하게 만들려는 것과 똑같이 부질없는 짓이다. 많은 사람들은 피아노 소리를 쳄발로 소리보다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는 75분짜리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는 걸 잊지 않아야겠다. 솔직한 심정으로, 당신이라면 그렇게 오래 쳄발로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겠는가? 이 길이는 모든 반복이 존중되어야만 함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이렇게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구조에서 방법은 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반복을 다 연주하든가 하나도 안 하든가. 첫 번째 해결책을 선호할 수 있다. 음악의 복잡성을 감안하면, 청중은 이를 통하여 더 나은 이해를 위한 제2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그리고 해석자 입장에서는 더 잘할 기회를). 물론 반복은 절대로 기계적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다양성은 장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상이한 아티큘레이션, 프레이징, 다이내믹을 주도면밀히 사용함으로써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반복은 연주하고 어떤 반복은 생략하는 것, 그건 물론 납득할 수 없다. 피아니스트들은 이 작품을 음표 하나 안 바꾸고 연주할 수 있다. 다만 '교통상황'의 문제를, 즉 건반이 2단이 아니다 보니 빈번히 발생하는 양손충돌 문제를 해결해야 할 따름이다. (p273-274)
어떤 음악가든 이 황홀한 작품을 기꺼이 연주하고 싶어 한다는 건 이해가 가는 일 아닌가? 이 작품의 깊은 인간성과 영성, 낙관주의, 지성의 힘은 이 '혼란의 시대'에 우리에게 바로 와닿게 말을 걸어온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거듭 되풀이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여행 가운데 하나다. (p275)
위대한 작품들은 이 작품의 해석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우리는 이 작품들의 신비를 발견하고자, 이 작품들의 둘도 없는 전언을 전달하고자 평생을 노력한다. 이 상상의 목표에 완전히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을지라도 수많은 공연을 통하여 수년 전에만 해도 알지 못했던 경험과 지식을 얻는다. 구조를, 연관 맥락을 갈수록 잘 이해하게 되며, 더 광대한 지평을 보게 된다. 이 말은 2003년 바젤의 연주회 실황을 담은 내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에 적용되며, 노이마르크트의 히스토리셔 라이트슈타델 -황홀한 음향을 지닌 ���주 아름답고 작은 홀에서 가진 연주회에서 녹음된 파르티타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p276)
하이든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E플랫장조 Hob.XVI/52 (p281)
(282)
하이든 유머의 가장 중요한 특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기대와 의외성의, 관습적인 것과 비관습적인 것의, 대칭과 비대칭의 맞세움이라고. 여기에 더하여 특이한 음향효과, 정적상태 및 시간과의 유희 그리고 대담한 다이내믹적 대비도 있다. 유머는 물론 하이든의 위대한 예술에 있어 단지 일부일 뿐이다. 어떤 장르에서나, 어떤 분야에서나 그는 흠 없이 걸출한 바를 이루었다. 그의 수공 기술자적 기량은 유례가 없다. 그는 단 하나의 조그마한 원자를 갖고서 악장 전체를, 심지어 여러 악장짜리 형상을 짓는다. 그의 취향은 기품 있고, 그의 비율 감각은 틀림없다.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에서는 기이한 극적 위력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교회음악, 후기 미사곡들 및 <구원자의 마지막 일곱 말씀>은 대가스럽고 뭉클하며 깊은 감동을 준다. 현악 사중주, 교향곡,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신세계의 발견자다. 우리는 그를 더 잘 이해해야 하며 그와 더 잘 아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주 위대한 작곡가들 가운데 그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과소평가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p283)
287 288
E플랫장조 오중주 KV452에서 모차르트는 피아노와 관악기의 어우러짐이 빚는 마법음향을 찾아냈다. 열광한 그는 1784년 4월 10일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저 자신은 이것을 여태 살면서 제가 작곡한 것 중 최고라 여깁니다." 1784년의 피아노 협주곡 여섯 작품(KV449, 450, 451, 453,456,459)은 천재적인 관악기 파트 음향을 통하여 색다른 차원을 획득한다. 2년 뒤 1786년, <피가로>에서 모차르트는 몇 걸음 더 나아간다. (p292)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는 음악의 구약,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들은 신약이라는 한스 폰 뷜로의 유명한 메타포는 핵심을 관통한다. 그 말은 전적으로 맞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48개의 프렐류드와 푸가는 이들의 완결성과 엄정함 때문에 우리 안에 성서적 연상을 깨운다. 그리고 베토벤 소나타들은 어떤가? 내게 이 곡들은 우람한 대산맥처럼 우뚝 권좌에 솟아 있다, 장대한 히말라야 산맥과도 같이. 이 산들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산, 막강한 산, 크지 않은 산 할 것 없이 하나의 논리적 통일체, 하나의 포괄적 전체를 이룬다. 한계를 모르는 모험적 등반가에게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더 큰 도전이란 없으리라. 이 도전은 우리 피아니스트들이 베토벤 소나타를 익히고 무대에서 전곡 연주를 하고자 할 때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도전과 유사하다. 이때 요체는 스포츠적 기량 수행이 전혀 아니다. 순전히 물리적인 난관과 강인한 지구력은 의심의 여지없이 과소평가할 일은 아님에도 말이다. 요체는 지적이고 감정적이고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과제다. (p295)
열다섯 번의 전곡 연주회(이 연주는 곧 계속된다)를 가졌던 사람으로서 이 장대한 음악여정의 체험을 소략하게나마 정리해볼까 한다. 베토벤의 발달을 개괄하게 해주는 두 개의 작품 그룹이 있다. 현악 사중주와 피아노 소나타다. 두 가닥의 붉은 실을 따라가듯 이 작품들을 따라가면 그의 작곡의 전기와 본질 전체가 정연하게 추적된다. Op.2와 Op.111 소나타들 사이에서, 내지는 Op.18과 Op.135 사중주들 사이에서, 우리는 유례없는 발달사를 인식하게 되면서 외경심을 느낀다. 진정한 진화를. 베토벤은 신동이 아니었다. 조숙한 천재가 아니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에 비해 길었던 생애에서 그는 새로운 작품마다 매번 미답지를 정복하기 위해 글자 그대로 힘겹게 싸워 쟁취해야만 했다. 피아노 소나타라는 장르에서 그는 그야말로 끝없는 다채로움으로 우리를 아연하게 한다. 이보다 더 다종하고 다양할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다. 반면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는 놀라우리만치 균질한 느낌을 준다. 베토벤식의 다양한 성격변종은 해석 문제들을 정복하기가 어려운 여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각각의 소나타는 고유의 얼굴을, 혼동할 수 없는 고유의 성격을 지녔다. 물론 공통된 속성과 면모도 있다. 하지만 차이들이 훨씬 중요하다. 각각의 소나타에서 독보적이고 유일무이하고 특수한 것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연주공연의 본래적 과제다. 연주공연이 유의미한 것이기 위해서 말이다. (p296)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애니 피셔, 루돌프 제르킨 (p297-298)
25년 동안 (1978~2003) 나는 주로 바흐와 하이든,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작품에 몰두했다. 그것은 베토벤을 위한 준비에 아주 좋은 배움이었다.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의 소나타들에 대한 나의 체계적 작업이 시작되었다. 작품의 대략 절반은 이미 내 레퍼토리를 구성하고 있었고 여타의 절반은 이제 차근차근 새로 작업을 통해 습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년 나는 혼자서 조용히 소나타 두세 곡을 새로 익혔다. 마지막으로 <발트슈타인 소나타> 그리고 Op.110과 Op.111을 익혔다. 10년이 지난 2003년이 되자 준비를 마친 상태가 되었다. 나는 소나타 전곡을 철저히 습득했고 무대에서 연주했다. '원숙하다 할 만한' 나이에 들어선 자로서 나는, 이제는 전곡 사이클 공연을 계획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이 장대한 프로젝트는 다양한 문제의 면밀한 해결을,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요한다. 어떤 방식으로 나는 이 걸작들을 형상화할 것인가, 대관절 왜 나는 이런 시도에 뛰어드는가? 아주 많은 피아니스트가 이 소나타들을 연주했고 녹음했다. 이렇게 많은 마당에 세상은 또 하나를 더 필요로 하는가? 남다른, 본질적인 기여를 할 능력이 내게 있는가? 이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질문들이다. 정직하고 자기비판적으로 답해야 할 질문들이다. 이 음악은 한없이 위대하며 초시간적이고 영원히 현재적이어서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을 허락한다. 아니 심지어 요구하고 영감을 준다. 신학자들이 성서에 대해 끝도 없이 논쟁하듯, 베토벤 소나타들은 거듭하여 새로운 독해방식과 해석단초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답은 그러므로 분명하다, "그렇다." 베토벤을 빌려 말하면, "그래야만 한다!" (p299-300)
우선은 물론 전곡 사이클 공연이 허락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내 구상대로 프로젝트를 실현하도록 나를 초대해준 많은 연주회 주최자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고 싶다. 이 '여행'의 경험은, 덜 알려진 소나타들이 이들의 유명한 형제자매들 그늘에 부당하게 가려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청중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 온 이 곡들은 흥미롭게도, 덜 알려진 곡들과 바로 연이어져 연주될 때면 한층 더 감명 깊게 작용한다. 청중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바라건대 청중은 저렴한 여흥 때문에 연주회에 앉아 있는 게 아니요, 배움의 과정과 공동의 체험을 위한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이상적 청중은―포커스는 그들을 향한 것이다-전체 사이클 투어를 해석자와 동행하는 이들이다. 우연히 인근에 머물던 참이어서 연주회 시작 5분 전에 재빨리 입장권을 구입한 사람은 베토벤을 듣고 반추하기에 이상적인 영혼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베토벤은 청중에게 해석자에게와 별 차이 없이 많은 걸 요구한다. (p301)
많은 베토벤 소나타들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들과 유사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슈베르트는 자기보다 연배가 많은 이 거장을 추장했다. 아류스럽게 모방하려 들지는 않으면서. 베토벤은 그에게 모범이었고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소나타의 절반을 뵈젠도르퍼로 다른 절반은 스타인웨이로 연주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작품을 어떤 피아노로 연주한 건지는 비밀로 하겠다. (p303-305)
"전통은 날림공사다."(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대들 극장인이 그대들의 전통이라 부르는 것, 그것은 그대들의 안일함이며 날림공사다")라고 구스타프 말러는 말했다. 전통이 비록 중요하고 값진 정보들을 전승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인용은 진실의 알맹이를 담고 있다. 음악가는, 그림을 복원하는 사람과 유사하게, 묵은 때와 굳어버린 먼지 부스러기들을 긁어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나쁜 관습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어떤 작품을 그 창조자의 의도에 최대한 근접하게끔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산의 정상에 도달한 등반가는 아무리 기진맥진한 상태여도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진다. 그는 어차피 무진장한 산덩이 전체를 오를 수는 없다. 그는 단지 계속해서 그리고 더 높이 오를 뿐이다. 더 높이 도달할수록 그는 더욱더 광활하게, 점점 더 멀리 있는 지평선을 내다보게 된다. 이 체험이 있어서 인생은 살아갈 만한 것이다. (p306)
308 310-1
베토벤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알고 있었나요? -네, 그건 상당히 확실해요. 바흐의 음악이 당시의 빈에 거의 안 알려져 있었고 거의 연주되지 않았음에도요. 베토벤은-모차르트도 그랬듯-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친밀한 교유범위에 속했어요. 이 남작이 소장한 장서들은 유명한데 여기엔 바흐와 헨델의 자필악보들과 간행된 여러 판본이 다수 보관되어 있었거든요. 바흐가 '주제와 변주'라는 형식으로 쓴 곡은 몇 안 돼요.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게 <30개 변주가 있는 아리아>지요. 베토벤은 언제나 이 장르의 대가였어요. 무엇보다도 요제프 하이든에게서 배웠기 때문에요. 소나타에서의 변주 악장들 그리고 다양한 변주 사이클은 그의 즉흥기교에 대한 빛나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디아벨리 변주곡>으로 그는 획기적 진보를 이루었어요. 그에게 모범이 되어준 건 바흐였고, 그에게 도전이 되어준 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어요. 디아벨리의 왈츠와 바흐의 아리아 사이는 광년의 거리처럼 멀지요. 그러나 그들의 구조는 동일해요. 16마디씩으로 된 두 부분이 있고, 두 부분 모두 반복이 있고 4분의 3박자입니다. 바흐의 작품은 3이라는 숫자와 많은 관련이 있어요. 30개 변주가 있고, 세 번째마다 한 번씩 카논이 나오지요. 그렇게 하여 우리는 각각 3곡씩을 가진 10개의 단락을 갖게 됩니다. (p313)
316
베토벤의 자필(흔적)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것들은 내적인 안정과 조화를 발산하며 깨끗하고 수정한 데가 거의 없다. 어떤 것들은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친 흔적을 담고 있다. 그의 필체는 극도로 표현력있고 살아 있다. J. S. 바흐를 생각하게 된다. 선들의 물결침과 굽이침은 이 선들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할지를 우리에게 암시해준다(언제나 굽이치는 물결이지, 기하학적인 선인 법은 없다). 이 사중주의 자필악보 판본은 모든 베토벤 전문가와 숭배자에게 진정한 보물창고다. 그가 얼마나 힘차고 결연하게 펜을 놀리는지. 그의 악센트 기호들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크레센도-데크레센도 기호들은 얼마나 격정적인지, 길다란 이음줄들은 얼마나 길고 동경에 차 있는지. 베토벤은 스타카토를 점으로 적는 법이 결코 없이 언제나 에너제틱한 줄로 적는다는 것은 다음에서 또렷이 알아볼 수 있다. (p318)
음악비평계는 지극히 몇 안 되는 녹음들 갖고 엄청나게 열광해 있었다.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는 건 뭐든 무조건적으로 상찬하고 환호했다. 이전에 딜레탕티즘과 야바위는 경멸의 개념이었는데 이제는 미덕으로 변해 있었다. (p321)
(323)
훌륭한 악보판본은 중요하다. 자필악보는 없어선 안 된다. 자필악보야말로 원전출처이며, 이 출처를 통해서만 우리는 작품의 창조자를 정말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 이 팩시밀리본이 바로 그런 경우다. (p326)
332
하지만 멘델스존의 이름이 언급될 때면 왜 그토록 많은 거절과 거부, 냉대 반응을 확인하게 되는 걸까? 여기서 문제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건가? ��� 가지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예술은 근심과 고통 가득한 경험을 바탕으로만 태어날 수 있다는 그릇된 가정을 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대한 예시는 충분히 있다. 모차르트는 이른 나이에 비극적인 상황에서 죽었고, 매독으로 고통 받던 슈베르트는 그보다도 더 일찍 죽음을 맞았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고, 슈만은 우울증에 그리고 마침내는 정신착란에 빠졌으며, 버르토크는 미국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사했다. 그런 운명들은 우리 '순진한 보통사람들' 사이에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비극은 위대성의 전제조건이라고 믿게 만든다. 반면 멘델스존은 애처롭거나 딱하게 여길 수 없다. 그는 재능, 성공, 유복한 가정환경, 행운 때문에 기껏해야 시기심을 깨운다. (p336)
337-8
우리의 음악적 현재에 계시다면 당신은 별로 편안해하지 않으실 것 같군요. 연주회 방문객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막강하게 상승했지만, 그와 비례해 유감스럽게도 청중의 수준과 일반 교양도 손상을 입었거든요. 오늘날의 평균치 청자는 자기가 듣는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해요. 새로운 곡들에 대한 지식도 없고요. 뛰어난 공연, 평균 수준의 공연, 형편없는 공연을 구분할 줄도 모릅니다. 이 청자는 어쩌면 연주회가 있고 나서 이틀 후 지역신문에서 이른바 '전문가'의 견해를 읽고 이 견해를 자기 것으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공연비평들은 몇 안 되는 예외를 제하면 심각히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고요. (p341)
342-3
이 모든 작품들이 보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순진하고도 뭣 모르게 낙천적인 게 될 겁니다. 오늘까지도 당신의 작품 전체의 상당부분은 말하자면 알려지지 않은 채예요.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독일적인 것의 세계에, 그 언어와 포에지 Poesie와 문학에 제집처럼 익숙하지 않으면 당신의 음악은 그 음악�� 사정거리 면에서 거의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런 정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당신 본인의 저술들에서 알게 됩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작가 장 파울의 작품들은 독일 바깥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고 번역도 거의 안 되었지요. 에테아 호프만은 더 유명하긴 하지만, 국제적으로 아주 인지도 높은 작가들 축에는 마찬가지로 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일어를 할 줄 모르는 슈만-해석자들은 심각히 불리해요. 이건 아주 아까운 사태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작품들은 그 어떤 다른 작품들과도 비할 수 없이 특출한, 깊은 사유가 반영된 공연을 요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작품과 작곡가에 대하여 그릇된 상이 전달됩니다. 얼마나 많은 선입견과 오판단이 형편없는 해석 때문이던가요! (p346-347)
이 지점에서 나는 피아니스트 버르토크를 고찰하고 싶다. 그 어떤 피아노 연주자도-그의 이전에도 이후에도-내게 그처럼 대단하게 깊은 인상을 남기거나 영향을 미친 이는 없다. 애석하게도 나는 너무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그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심지어 녹음 기록들에서도 숨을 멎게 한다. 다행히도 그는 녹음을 많이 남긴 편이고, 이 녹음들은 진정한 버르토크-양식을 최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 그가 피아노를 타악기처럼 다루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그리고 자주 반복된 클리셰다. 이는 맞지 않으며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의 연주를 한 번만 귀 기울여 들어보라! 그의 리듬은 바위처럼 단단하다. 하지만 피아노를 결코 때리는 법이 없는 경이로운 타건과 짝을 이루고 있다. 어떤 순간에도 추함으로 변질되는 법이 없는 연주다. 그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서정적이게 그리고 다감하게 연주할 줄을 안다. 감상성의 낌새라고는 추호도 없이. 아주 독특하면서 특히 강조할만한 것은 그의 루바토 연주와 파를란도 연주다. 그는 음악이 말하게 둔다. 이런 의미에서 피아니스트 버르토크는 19세기의 자녀다. (p356)
359-360
쿠르탁은 설명했고, 분석했고, 노래했다. 그리고 끔찍한 에스토니아 피아노로 너무나 매혹적으로 아름답게 연주했다. 마치 이 피아노가 세상 최고의 피아노이기라도 한 듯. (p364)
Work in progress 그렇게 나는 이어지는 9년을 더 그의 제자로 있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온갖 다양한 악기편성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작품들을 익혔다. 작업은 완결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work in progress'였다. 그는 엄청나게 요구 수준이 높았다.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브람스 G장조 소나타 Op.78의 도입부를 충분히 멋지게 연주할 수 없었다. 그는 제스처를 써가며 설명했고 이 도입부를 거듭해서 노래했다. 몇 시간이고, 때로 그가 한 음, 한 프레이즈에 만족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 그는 너무나 행복해했다! 우리는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더 잘, 더 멋지게 연주하고자 했다. 그에게 약간의 기쁨이 되어주고자. (p366)
쿠르탁에게 음악은 직업이 아니었다. 그에게 음악은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삶 자체보다 더 중요했다. 그것을 위해 그가 활활 타올라야만 하는 하나의 특혜였다. 이 불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차라리 뭔가 다른 걸 하는 게 좋겠다. 이 긴 학업의 시절 우리는, 우리의 스승이 현재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이라는 걸 사실상 몰랐다. 당시 그는 그의 작품들 중 단지 몇 개만 완성한 상태였고, 이 곡들은 간헐적으로만 무대에서 연주되었을 뿐이었다.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었으나. 겸손한 그답다. 오늘날 쿠르탁 앞에서 그의 작품을 연주할 경우, 그는 각각의 음이 어떤 소리가 나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분명한 상을 밝힌다. 이것은 살아 있는 작곡가들에서는 드문 경우다. 내가 훨씬 나중에 성악가 루시 쉘튼과 쿠르탁의 <피터 보르네미사의 격언>을 연주했을 때ᅳ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며 일찍이 내가 보았던 중 가장 어려운 작품 연주회가 끝난 후 그는 내게 함축적으로 말했다. “자네가 언젠가 음들의 나머지 절반도 해내게 되면, 우린 더 얘기를 나눠볼 수 있을 걸세." 나는 부지런히 이 작품을 작업했다. (p367)
368
<페렌츠 라도스의 80세 생일을 맞이하여> 그의 비범한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식인으로 칭하는 건 틀린 일일 테다. 그에게서는 정신과 이성과 감정이 이상적 균형을 이루면서 그리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비율로 어우러져 있다. 정신의 인도로, 좋은 취향 덕분에, 그는 싸구려 감상성의 덫에 빠져 더듬거리는 법이 결코 없다. 피아노 연주가 볼품없이 물리적인 무리행위가 되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 혹은 자의적 행동이 되는 법이 결코 없다. 연주하기의 의미와 목적은 해석적인 구상을 최대한 잘 실행하는 것 그리고 음악적 판타지를 소리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라도스의 판타지는 얼마나 끝 모를 왕성함이었던가! 동급의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문화적 교양을 바탕으로 한 손 기술의 기량은 얼마나 대단했던가! 그리고 그는 이 모든 퀄리티를 환상적으로 전달하고 전수할 줄 안다. 하지만 고집불통이라거나 김빠진 식은 아니다. 그의 유머, 그의 재치, 그의 흉내 낼 수 없는 메피스토적 웃음 또한 마찬가지로 그의 교수법의 중요한 요소다. (p370)
371
알베르트 시몬 하이든 교향곡 G장조 Hob.I:88(373)
<애니 피셔> 무대 위의 그녀는 연출된 포즈를 취하는 디바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예술의 사원에서 섬기는, 제식적 희생을 거행하는 여사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었다, 우리에게 감명을 준 것은 그녀의 수수함과 담백함이었다. 잘 고른 그녀의 드레스들은 세련된 우아함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나는 그녀가 무대에 같은 드레스를 두 번 입고 나온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깃털처럼 사뿐한 발걸음으로 피아노로 가서는, 친절한 박수를 보내는 열광한 청중에게 가벼운 미소와 겸허한 인사로 진심 어린 환영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런 다음엔 기적이 일어났으니, 우리는 변용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라는 해석자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의 영혼이 나타났다. 영혼들은 이 경이로운 여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청중은 음악을, 말하자면 들이마셨고 사람들-이 시절 순탄치 못한 운명을 겪어내야 했던-은 감사와 사랑으로 충만해진 듯했다. 당시에 나는 피아노 연주회가 얼마나 경이로울 수 있는가를 느꼈고, 이 점에 있어 그녀의 연주회는 35년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 이런 마법을 대부분의 다른 피아니스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수록 더욱 씁쓸했고, 심지어는 충격이기도 했다. (p376)
베토벤의 작품들은 애니 피셔의 생애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녀는 위대한 모범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빚어졌고, 영감을 받았다. 특히 그녀의 스승인 에르뇌(에른스트 폰) 도흐나니로부터. 그리고 벨러 버트로크의 근원적으로 힘찬 피아노 연주로부터. 그녀의 남편은 외젠 달베르를 가장 중요한 베토벤 해석자로 보았고, 애니는 달베르를 토트의 묘사를 통해서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들 곁에서 그녀는 독자적인 연주 스타일을 발달시킬 수 있었고, 그녀 고유의 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맥락에서 그녀의 여성적 본질은 과소평가할 게 아닌 요인으로 작동했다. 베토벤이 지닌 표현의지는 극적이며, 그런 동시에 다감하면서도 감상적이지 않고, 서정적이다. 이런 표현의지를 지닌 프로메테우스적 인물에게, 그러니까 어쩌면 작곡가들 중에 '가장 남성적일지' 모를 이에게 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가? 애니는 천재적 본능으로 이상적인 중심 잡기에 성공했다. 필요한 경우 그녀는 악기에서 어마어마한 울림을 끌어낼 수 있었다. 누구를 강압적으로 혹은 심지어 호통치며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는 법이 결코 없는 울림이었다. 이 울림은 가장 깊숙한 내면의 힘으로부터 퍼 올린 것처럼 들렸다. 동시에 그녀에게는 커다란 감수성과 영혼 충만한 연주 능력도 있었고, 이런 연주는 베토벤의 시정을 새롭게 조명해주었다. 그녀가 Op.13 <비창>의 첫 화음들을 타건할 때면, 그 화음들은 순식간에 이미 전체 사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우람했고, 우렁찼다. 하지만 조야한 법은 절대 없었다. 그런가하면 이 여인은 F샵장조 소나타 Op.78을 심금을 울리는 애틋함과 탄력을 담아 연주했다. 베토벤의 소리는 엄청나게 다면적이다. 작품마다, 심지어는 한 소나타의 개별 악장마다 해석자는 무수한 성격과 음색계조를 폭넓고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애니는 이 미로 속에서 길을 참으로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청자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 바로 그거야! 저래야만 해, 저건 다르게는 연주될 수 없어.” 그녀는 이 걸작들을 생애 내내 연주했다. 하지만 커리어의 최정상에서야 비로소, 1970년대 중반에, 그녀는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두 번의 연주회로-오후에는 청년들을 위해 그리고 저녁에는 '어른들'을 위해-32곡 소나타 전곡 사이클을 공연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훙가로톤사 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LP녹음들 또한 이 시절의 것이다. (p379-380)
애니 예술의 본질적 공통점을 찾으려 시도한다면, 이 공통점은 아마도 본능과 지성의 결합에 있지 싶다. 문헌학은 그녀에겐 생소했다. 그녀로선 자신이 어떤 악보 에디션을 갖고 연주하든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레오 바이너에게서 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바이너는 잘 알려졌듯 부다페스트에서 실내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수였다. 그는 거의 모든 훌륭한 음악가를 가르친 바 있다). “아니." 그녀는 말했다. “도흐나니가 그걸 내게 금했지. 그가 말하길, 바이너는 너무 머리를 쥐어짜고 골몰한다는 거야." 실제로 그녀는 디테일에 사로잡힌 분석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잘고 세세한 것들에 빠져 전체를 놓치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반대자들은-유감스럽게도 그런 사람들은 많았다 -이 시원함을 칠칠치 못함으로 보았다. 이 베크메서들은 딱할 따름이다. 더구나 그들이, 훌륭한 피아노 연주는 뭐니뭐니해도 민첩한 빠르기와 거친 박력과 정확성을 통해 돋보이는 거라는 견해를 갖고 있으니, 그들은 테크닉과 메커닉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는, 약동하는 판타지를 지녔으며 이를 연주로 옮겨놓을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다. 소리 만들기, 음색의 팔레트, 타건 방식, 이들 모두는 '테크닉'의 범위에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애니는 비범했다. 그녀 이전에 알프레드 코르토나 에드빈 피셔가 그랬듯, 피아노와 하나로 어우러져 자라나는 그녀의 모습은 켄타우로스 형상을 연상케 했다. 이 맥락에서 피아노 톤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마디 할까 한다. 우리는헝가리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흉측하고 난폭하고 타악기스러운 피아노 연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반면 애니의 소리는 이런 이데올로기에 대각을 이루고 있었고, 심지어 아름다운 것 이상이었다. 그녀는 악기를 갖고 그저 노래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말할 줄도 알았다. 그녀의 톤은 다채로웠고, 매 곡마다, 매 작곡가마다 달랐다. 그리고 언제나 미적이었으며, 흉하거나 희화하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그녀는 릴케가 말한 의미에서 그녀 '자신의 죽음'을 실현했다. 라디오가 중계해주는 바흐의 <요한 수난곡> 연주회를 듣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 아름다운 죽음. (p385-386)
안드라스 쉬프, 조지 말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에 있는 작곡가의 발터-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한 녹음 (p389)
<산도르 베그>
산도르 베그 베토벤의 c단조 소나타 Op.30/2의 스케르초나 바흐의 d단조 파르티타의 지그 (p392)
그의 연주와 소통의 비밀은 무엇이었던가? 그건 배울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완벽히 자연스럽고 장식 없게 연주하고 지휘했다. 이는 어쩌면 그의 태생과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베그는 트란실바니아의 콜로즈바르 출신이었는데, 이곳은 토속적 문화의 뿌리가 유독 깊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독특하게 채색된 헝가리어를 한다. 언어 이야기가 나왔으니 부연하면, 베그는 음악을 말하게 만들 줄 알았다. (p396)
산도르 베그, 파블로 카잘스, 벨라 바르토크 (p397)
<루돌프 제르킨>
루돌프 제르킨의 해석으로 들은 막스 레거의 <바흐 주제에 의한 변주곡> (p399)
음악가 루돌프 제르킨을 한 단어로 특징짓는다면, 나라면 '반듯함'을 고르겠다. 거의 모든 해석자들이 그들은 작곡가의 충실한 하인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극소수만이 그들이 설파하는 바대로 한다. 제르킨은 그 소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작품 충실성에 사로잡힌 자. 그의 장서에는 자필원고와 초판본이 가득했다. 그의 연구 정신에는 원전이 곁에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p400)
<왜 우리는 자필악보를 필요로 하는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추념하며>
이 질문은 디지털과 인터넷의 시대인 오늘날 특히나 시의적절하다. 냉소주의자들은 경솔하게 이 질문을 끝난 얘기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자필악보란 낡은 종이일 뿐 아니냐는 것이다. 이들은 해독하기가 극도로 어렵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과 도서관에 갈 물건이라는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가치가 없다는, 아니 심지어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걸작들의 무수한 원전 텍스트 판본들, 최고의 음악학자들에 의하여 면밀히 작업된 에디션들이 연주자와 음악학자에게 충분히 탄탄한 바탕이 되어준다고 말하면서. 정말 그러한가? 아니면 학술적 에디션들에는 실은 뭔가가 빠져 있는 건 아닌가? 물론 회의론자들을 설득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잘해���자 그들의 보잘것없는 옹색함을 유감스러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 견지를 고집하시라 하고 우리는 이 복합적인 질문에 생산적이고도 논리적으로 접근해보자. 오스트리아의 훌륭한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는 당시 자필원고 수집가 중 가장 중요한 한 인물이었다. 그의 유명한 컬렉션은 세계문학과 음악사의 귀중한 원고들 1000여 편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영구적으로 이정표이자 척도로 남아 있다. 더 나은 조언자는 상상키 어렵다. "자필원고의 세계는 직접 볼 수 있거나 감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오로지 상상을 통해서만 느껴볼 수 있는 것이며, 교양을 통해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세계를 향하여 이해의 의지를 그리고 외경심 품기라는 흔치 않은 재능을 바치는 이들만을 확대한다." 이 구절을 츠바이크는 1923년에 「자필원고의 세계」라는 논고에 적고 있다. 훗날의 어느 에세이 (「자필 원고의 의미와 아름다움」, 1935)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적어 내려간다. "그러니까 이 신비에 찬 제국에 누구나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해를 열어주는 열쇠가 그에게 쥐여져 있어야만 한다. 영혼의 위력이 그를 움직여야만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상에 존재하는 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힘이자 가장 막강한 힘이. 다시 말해 외경심이. 자필원고를 이해하면서 사랑하기 위해서, 이것들을 경탄하기 위해서, 이것들에 의해 자극받고 충격적으로 동요되기 위해서, 우리는 맨 먼저 그 원고 속에 자기 인생의 모습을 새겨놓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시인, 음악가, 정신과 행위의 다른 영웅들을 이미 일종의 종교적 감정을 품고 느낄 때, 그러고 나서라 야만 그들 손에서 나온 글자의 자취들은 우리에게 그 의미와 아름 다움을 계시해줄 수 있다.”라고 썼다. (p402-403)
디지털화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로 환영할 일이다. 참으로 소중한 컬렉션들, 가령 (한때 프로이센 문화재단이던) 베를린 주립도서관,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라이프치히 바흐 아카이브,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본 베토벤하우스의 컬렉션은 그들의 보물을 인터넷에 제공하고 있어 전문가든 애호가든 누구나 만나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마디 보태자면, 인터넷은 경이로운 발명이지만 수단일 뿐 목표는 아니다. 탁월한 디지털 대체물이라 해도 자필 필적이나 희귀 초판본의 신비를 적절히 재현할 수 없다. 인터넷 사용은 어디까지나 실질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마법은 없는 일일 뿐이다. 우리는 <마태 수난곡>이나 <평균율 클라비어>의 자필악보를 모니터 상에서 보는 것을 자명한 일로 받아들이며, 그럴 때는 감흥도 없다. 추호의 감흥도 없다. '성스러운' 전율 같은 건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절품들 음악에서든 문학에서든 조형예술에서든을 심원한 영혼으로 체험한다는 건 함께 참여하며 전율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겸허와 외경심과 감사를 느낀다는 것을 뜻 한다. 우리의 문화적 유산, '어제의 세계'가 테크놀로지의 냉기로 얼어붙거나 멸종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p412-413)
<음악 콩쿠르>
음악적 성취의 판정은 객관적-사실적 및 주관적 - 개인적 평가 기준들로 구성된다. 이는 스포츠에서라고 다르지 않다. 객관적 요인들은 측정 가능하다. 가장 빨리 달리는 자가, 가장 높이 뛰는 자가, 가장 멀리 던지는 자가 승자다. 음악은-다행히도-스포츠가 아니다. 음악도 쉽게 측정 가능하리라. 누가 가장 크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치는가, 누가 실수 없이 끝까지 잘 마치는가. 이런 것들이 베크메서들에게 평가 기준일 테다. 힘들이지 않고 정확히 알아볼 수 있고 메모장에 빨간펜으로 표시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곡예와 무오류성은 예술에서 최고로 찬탄할 만한 덕목에는 거의 들지 않는다. 독자적 가치로서 우리의 영혼에 울림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해석 기술의 다른 요소들, 즉 주관적 요소들을 평가하는 것은 월등히 어렵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로는 인토네이션, 소리의 퀄리티, 리듬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미 생각들이 갈라진다. 즉 심사위원마다 이 변수들을 다르게 해석한다. 전문가들의 평가들은 사실 통일성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작품의 파악, 템포 선택, 곡의 분위기와 성격, 이런 개념들에서 견해들은 서로 너무나 멀리 갈라져서 일반적인 가치나 평가 기준을 운운한다는 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공정한 절차과정을 대체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선입견과 개인적 취향이 지배적이다. 해석자와 그들의 해석을 평가한다는 것이 그 정도로 애매모호하고 주관적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콩쿠르를 개최하는가? 콩쿠르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이는 정당한 질문이며, 용감한 "아니오."로 대답될 수 있다. 음악에는, 아니 예술에는 적수라는 게 없다. 음악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에 '맞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연주회는 청중을 위한 행사다. 청중을 위해서 음악 작품이 연주된다. 피아노 리사이틀의 해석자는 주최측과의 협의하에 들려줄 작품들을 선택한다. 자신이 뭘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은지는 아마도 해석자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콩쿠르의 프로그램은 대체로 음악사 레퍼토리 전체를 두서없이 종횡무진한다. 참가자는 독주로, 실내악 연주로,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든 가능한 장르와 양식 면에서 자신을 선보여야만 한다. 이는 콘셉트를 이루는 아이디어로서는 멋지고 좋지만 결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다. (p418-419)
좋은 음악가는 좋은 와인과 유사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우수해진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그의 마지막 연주회를 1976년에 가졌다. 90세에 가까운 나이였다. 미예치슬라브 호르초프스키는 99세의 고령으로 1991년에 마지막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이 두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시간과 기력을 평생토록 최선으로 안배했고, 그들의 예술은 풍성한 경험을 통해 부단히 발전할 수 있었다. 루빈슈타인도 호르초프스키도 피아노 콩쿠르 승자였던 적은 없다. 음악 경연에 맞서는 투쟁은 <돈키호테>에서 풍차에 맞서는 투쟁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이는 부질없는 시도다. 음악 경연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니. 우리의 음악문화 안에 너무나 강고히 자리를 잡았다. 한 콩쿠르에서 다음 콩쿠르로, 이 심사위원단에서 저 심사위원단으로 다니기 바쁜 큰 무리의 교육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한다. 더 높은 지식을 얻고자 해서가 혹은 더 나은 연주를 원해서가 아니라 거장으로부터 얻는 다음 콩쿠르를 위한 추천장이 필요해서다. 이는 음악 및 예술과는 하등의 관련도 없다. 예술과 스포츠의 획일화라는 이런 시스템을 그냥 비판만 하는 걸로는 족하지 않다. 그럴 게 아니라 젊은 인재들의 발굴과 후원을 위한 더 나은 대안들을 찾아내야 한다. 나의 생각은 국제적 포럼 같은 쪽으로 흐르는데, 여기서는 전공자와 전문가와 애호가로 구성된 초대받은 청중 앞에서 재능 있는 해석자들이 자유로이 고른 짤막한 연주프로그램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 이런 플랫폼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으리라. (p423)
<독일 연극계는 어찌된 일인가?>
426-7 428
여기에 뭐 덧붙일 말은 없다. 갖은 유형의 해석자들 -연출자, 드라마투르그, 지휘자, 악기연주자ᅳ은 재창조자이다. 다시 말해 창조적 활동을 하는 창의적 작가들과 작곡가들에 봉사하여 재창조하는 예술가들인 거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옛 걸작들에 새로이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것은 내적 필연성이며 칭찬받을 만한 노력이다. 하지만 이때 해석자는 열의에 찬 나머지 도를 넘지는 말아야 한다. 그는 언제나 작품의 틀을 지키며 작품의 매개변수들을 인식하고 존중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은 몇몇 연극인들이 주장하듯 전적으로 주관적인 과정인 게 전혀 아니다. 사무엘 베케트에게 동의할 수 있으며 그가 옳다. 저자와 텍스트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 그리고 고유하고 독특한 요소로서 연출자와 배우들보다 월등히 중요하다. (p429)
430-1
<연주회장을 찾는 이들을 위한 십계명>
공연장에서의 생생한 연주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다. 동일한 연주회를 최고의 품질로 녹음한 CD조차도 그 체험을 복제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시각적 관점 그리고 공동 체험의 감정이 빠져 있는 것이다. 연주회 방문객은 모두 제각기 재창조 과정의 적극적 파트너로서 함께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예민한 연주자는 객석에 있는 청중의 집중도를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어 있다. 이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진동이 그의 연주에 영향을 미친다. 고요가 모든 음악의 알파이고 오메가이기에, 다시 말해 시작이자 끝이기에, 음악은 절대적 제스처로 명한다. 청자 또한 고요히 처신해줄 것을. (p436-437
<앙코르>
443-4
청중은 사건 현장의 수동적 일부가 아니라 매우 능동적인 일부다. 청중은 해석자에게 최고의 연주를 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가 하면 엄청나게 거슬릴 수도 있다. 공개 연주회들은-스튜디오 녹음과는 반대로- 일회적이며 반복 불가능하다. 음악가와 청자 사이의 활력적인 접촉을 동력으로 한다. 다른 사람들과 훌륭한 음악을 함께 나누는 것은 나의 내적인 욕구다. 이 욕구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연주되는 것을 주의깊게 수용하며 이에 예민한 감수성으로 반응하는 청자 공동체 또한 있어야 한다. 앙코르도 이런 대화의 결과다. 언급했듯-페렌치크가 옳았 다-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많이 연주하지 않는 게 낫다. 몇몇 피아니스트는 자기 연주회의 공식 프로그램을 마치고서 다시 무대로 나와서는 곧장 이어서 앙코르 여섯 곡을 연주한다. 누가 그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무엇으로써 이런 성공을 누릴 자격을 얻은 것인가? (p444)
베토벤은 평생토록 바흐에 몰두했고 푸가 작곡의 기법과 씨름했다. 그 찬란한 예 하나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에 나오는 '얼마간 자유로운 con alcune licenze'이라는 부제가 붙은 푸가다. 모범이 될 만한 푸가 '그 어떤 자유도 없이'senza alcune licenze'가 어떤 모습이어야만 하는지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서 가장 잘 확인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앙코르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에 나오는 프렐류드와 푸가 b단조를 연주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소나타는 어떠한가? 벤델 크레치마르 교수는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파우스투스 박사』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왜 베토벤이 소나타 Op.111의 아리에타 다음에 더 이상의 악장들을 작곡하지 않았는지를. 이 악장으로써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라는 장르에게 작별을 고한다. "다 이루었다. Consummatum est.” 더 이상의 악장들이나 앙코르는 여기에 맞지 않으며 완전히 불필요한 잉여다. 오직 고요만이 남는다. (p446)
<역자 후기>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강연이나 마스터클래스, 인터뷰 영상 등을 본 이들은 알 것이다. 그는 느릿느릿, 또박또박 말한다. 거기 쓰인 영어나 독일어 모두 그의 모국어가 아니다. 그렇지만 짐작건대 그것이 이 느림의 이유는 아니다. 말의 느림은, 알찬 내용과 확신 묻어나는 톤을 볼 때, 그가 어디까지나 필요해서 고른 속도인 동시에 찬찬한 성품을 담는 그릇이 아닐까 짐작한다. 쉬프의 언어가 담긴 이 책을 읽고 우리말로 옮겨놓는 과정이 어느 순간 보니 느릿느릿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그가 말하는 걸 듣고 받아 적기라도 하듯. 물리적으로 오래 걸렸다는 소리일 뿐 아니라 천천히 읽게 만드는 글이었음을 불현듯 알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통 긴 문장은 가독성도 전달력도 떨어지므로 읽기 좋은 호홉으로 끊어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짧은 문장만 계속된다면 그 또한 읽기에 숨이 찬다. 어떤 문장을 즐기기도 전에 끊임없이 새로운 문장이 밀고 들어오는 듯해서 가끔씩 문장을 이어 붙여 늘이고 싶어진다. 쉬프의 문장이 그랬다. 간결하고 명료하면서도 읽는 동안 미묘하게 힘이 들었다. 대신 그가 말하는 속도로 천천히 읽으면 그 문장들은 적절한 길이로 다가왔다. 담백하고도 무게감이 잘 전해졌다. 독일어 원문을 대할 때의 느낌이 번역문에서 동일하리란 법은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께서 쉬프의 음성을 상상하며 이왕이면 천천히 읽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447)
- 안드라시 쉬프 - ' 음악은 고요로부터, 마르틴 마이어와 나눈 대화, 그리고 에세이들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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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4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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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amazon.com/One-Here-Gets-Out-Alive/dp/0446602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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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가 자신의 에세이집 『잔혹연극론Le Théâtre et son Double』에서 설명한 대립에 관한 이론은 짐과 그룹에게 주목할 만한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 담긴 가장 설득력 있는 에세이에서 아르토는 전염병과 연극적 행위의 유사성을 도출했다. 그는 극적인 행동은 흑사병이 인류를 정화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표가 뭐냐고?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자각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일깨우려 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죽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니까." 짐은 이윽고 관객을 무의식에서 끌어내 뒤흔들고자 숱한 밤에 수없이 "깨어나세요!"를 외쳤다. 난 아직도 내가 처음 갔던 도어스 콘서트를 기억한다. 열세 살 영혼 깊숙이 두려워하며 나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누군가, 아마도 그가 상처를 입을 것이다. 또는 내가, 아니면 우리 모두일 수도 있다. 그는 <Five to One (5대 1)>에서 "아무도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다"고 노래했다. 그런 두려움에 -<The End(끝)> 같은 노래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끔찍한 공포에 직면하면 내면의 무언가가 바뀌게 된다. 한계에 직면하면 영원불변한 것도 흔들린다. 그 콘서트는 내 인생을 바꾸었다. 나는 이보다 더 나아지거나 더 진실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생각이다. 난 아직도 1967년 그날 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게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었다는 건 안다. 짐 모리슨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p15)
음악이 끝났을 때 거기엔 고요함과 평온함, 생명과 연결되었다는, 그리고 존재를 확인했다는 감정이 남아 있었다. 도어스는 우리에게 지옥을 보여 주며 천국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죽음을 일깨우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우리는 공포와 맞닥뜨리며 그들과 기쁨을 한껏 누렸다. 그들은 우리의 절망감과 비애감을 확인시킴으로써 우리를 자유로 이끌었다. 또는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p18)
짐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삶을 긍정하라"는 충고에서 위안과 격려를 얻었다. 나는 그토록 많은 이가 주장한 것처럼 짐이 죽음을 향한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한적이 없고, 지금도 그가 삶과 죽음을 선택한 방식을 판단하기 어렵다. 짐은 오래 사는 것보다 극단을 택함으로써 니체가 말한 것처럼 거부하지 않고 과감히 자신을 창조하는 "부정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 짐은 또한 다음과 같은 니체의 글을 읽으며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더없이 생소하고 어려운 문제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최고 유형의 희생 속에서도 자신의 강건함에 기뻐하는 삶을 향한 의지를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 부르며, 비극 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다리로 생각했다. 공포와 연민을 없애기 위해서도, 거기서 세차게 쏟아져 나오는 위험한 영향에서 스스로를 씻어 내기 위해서도 아닌, 모든 공포와 연민을 넘어 생성이라는 영원한 기쁨 자체이기 위해서다. 이것은 삶을 향한 짐의 끝없는 갈망이었고, 그는 죽음에 대한 동경 따위가 아니라 이 때문에 죽었다. (p20)
니체, 반 고흐Vincent van Gogh, 랭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포 Edgar Allan Poe, 블레이크, 아르토, 콕토Jean Cocteau, 니진스키 Vaslav Nijinsky,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딜런 토머스Dylan Thomas, 브렌던 비언 Brendan Behan, 잭 케루악Jack Kerouac, 이 미치광이, 불운한 자, 작가, 시인, 화가들, 무슨 일이 있어도 권위에 완강히 저항하고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기를 주장한 예술가들은 인생이란 참고 살아가기엔 너무 혹독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짐이 가장 열렬하게 동일시한 혈통이었으며 그가 추구한 기준이었다.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쓰거나 그리거나 노래하는 걸 넘어, 환영과 어떠한 저항 속에서도 그 환영을 보는 용기를 갖는 것을 의미했다. 어려움을 겪고 나면 더 강해진다. 그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대단하고 놀라운 사람이며, 자질이 없다면 꾸며 낼 수 없다. (p21)
시인이 된다는 건 시를 쓰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운명의 여신이 골라 준 비극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을 품격과 고결함으로 채우려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짐이 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 모리슨과 도어스의 이야기는 신화의 영역이 되었다. 짐의 짧고 비극적인 삶은 우리의 영웅들과 젊은 신들, 그리고 부활이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오르페우스처럼 영원한 젊음이며, 디오니소스처럼 부활하기 위해 죽는다. 그리고 아도니스 살해, 미트라의 제물, 안티노오스의 뜻하지 않은 죽음처럼, 그는 자신의 관객들이 만들어 놓은 신화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짐이 파리로 간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 자신이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한 신화에 더 이상 부응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짐 모리슨은 신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짐 모리슨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 (p23)
(38) (40)
시인이 된다는 건 시를 쓰는 것보다 더 많은 걸 필요로 했다. 홀륭한 품격과 더 큰 슬픔까지 동반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헌신, 매일 아침 몰아치는 열기 속에서 깨어나 이것이 죽음이 아니면 절대 소멸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이 고통이 특별한 보상을 가져다줄 거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윌리스 스티븐스 Wallace Stevens는 "시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사제다"라고 말했다. 셸리 Percy Bysshe Shelley는 "시인들은 세계의 공인되지 않은 입법자들이다"라고 썼다. "이해할 수 없는 영감의 해설자들, 미래가 현재에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의 거울들이다." 랭보는 폴 드므니 Paul Demeny에게 쓴 편지에서 이를 가장 잘 표현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무한하며 체계화된 혼란을 통해 환영을 보는 사람이 됩니다. 온갖 형태의 사랑, 괴로움, 광기에서 그는 스스로를 탐색하여 내면의 모든 독을 고갈시키고 그 정수를 간직합니다. 가장 위대한 신념과 초인적인 힘이 필요하게 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거기서 그는 모든 사람 사이에서 위대한 병자, 위대한 저주받은 자, 그리고 최고의 학자가 됩니다! 미지에 도달했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들어본 적도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것들을 지나 황홀한 환각에 무너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인은 불을 훔친 도둑이다.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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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O. 브라운의 프로이트식 역사 해석 [죽음에 맞선 삶] (p79)
딜런 토마스의 이야기 [추종자들The Followers] (p96)
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되었던 건 절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귓속에서 울리며 내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음악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실제로 음악이 제 마음속에 먼저 떠오른 후에 멜로디와 사운드에 달라붙는 노랫말을 썼던 것 같아요. 그걸 들을 수 있었는데, 음악적으로 적어 내려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노력해서 거기 넣을 가사를 얻는 게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죠. 그래서 많은 경우 저는 가사만으로 끝내곤 했는데 멜로디는 기억할 수도 없어요."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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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도어스는 자신들만의 세계 안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노래는 우주와 같고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그건 마치 축제 음악처럼 들립니다. 곡이 끝나면 침묵의 순간이 옵니다. 새로운 무언가가 방으로 들어온 거죠.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제게 이상적으로 어울렸다는 걸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활시위가 22년간 뒤로 당겨지다 갑자기 놓인 듯한 느낌이죠. 저는 첫째로 미국인입니다. 둘째로 캘리포니아 사람, 세 번째로는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항상 권위에 저항한다는 생각에 매혹되어 왔습니다. 당신이 권위와 손잡으면 당신 자신이 권위가 됩니다. 저는 기존 체제에서 벗어나 거나 뒤집어엎는다는 생각을 좋아합니다. 저는 저항, 무질서, 혼돈, 특히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활동에 관한 것이면 무엇에든 관심이 있습니다.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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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도어스는 자신들의 음악과 공연에 있어 의미심장한 침묵이라 할 만한 요소를 세련되게 다듬고 익혔다. 때로 그들은 노래 중간에 침묵의 순간을 드리우거나 짐이 이와 비슷하게 음절 사이를 멈추곤 했다. 전설적인 LSD 제조자이자 샌프란시스코 록 밴드들의 친구인 오슬리는 도어스에게 침묵이 자신을 미치게 만든다고 했다. 이따금 어떤 관객들은 웃었다. 버클리에서 한번 그 일이 있었을 때 짐은 화가 나서 말했다. "너희들이 공연에서 웃으면 그건 실제로 너희 자신을 비웃는 거야." 나중에 그는 설명했다. "제가 정말 마음을 여는 건 무대 위에 있을 때뿐이에요. 공연이라는 가면이 저를 그렇게 만들고, 거기서 저를 숨긴 후에야 자신을 내보일 수 있어요. 무대에 나와 노래 몇 곡을 하고 떠나는, 그런 공연 이상의 것을 보기 때문이죠. 저는 모든 걸 아주 개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극장에 있는 모든 이가 어느 정도 공통된 입장에 있지 않으면 제가 정말 완벽하게 해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가끔씩 저는 그냥 노래를 멈추고는 긴 침묵이 흐르게 하고, 모두가 하나가 되기 전에 보이지 않는 온갖 적대감과 불안과 긴장이 빠져나가게 합니다." (p215)
"짐......." "네. 엄마......." 그가 신음하듯 말했다. "예전처럼 추수 감사절 저녁 먹으러 집에 오렴. 앤디하고 앤이-" "음, 그때 꽤 바쁠 거 같은데요." 짐이 말했다. "시간좀 내 다오, 짐, 응?" 결국 짐은 곧 공연을 하러 워싱턴에 갈지도 모르니 어머니가 거기로 오면 되겠다고 말했다. "하나만 더, 짐, 엄마 부탁 좀 들어줄래? 네 아버지가 어떤지 알잖니. 집에 오기 전에 머리 좀 자를래?" 짐은 작별 인사를 하고는 방 안에 서서 조용히 듣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 돌아섰다. "어머니하고 다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p219)
짐과 도어스의 다른 멤버들은 자신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의 인터뷰는 차라리 대학의 자유 토론처럼 들렸다. 그들이 뉴욕에서 돌아온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스위크』 기자와 가졌던 인터뷰가 좋은 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레이가 짐의 말을 인용하여 말했다. “그리고 모르는 것들이 있죠.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그리고 그 사이에 문들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예요." 나중에 이 말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건 탐구입니다." 짐이 말했다. "하나하나 문을 열어 가는 거죠. 아직까지 일관된 철학이나 정치관은 없어요. 지금 우리에게 감각적인 것과 악은 매력적인 이미지지만 언젠가는 벗어던질 뱀가죽 같은 거라 생각해요. 우리의 작품, 우리의 공연은 변신을 위한 분투입니다. 지금 당장 저는 삶의 어두운 면, 사악한 것, 달의 이면, 밤 시간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음악에서는 우리가 추구하고 노력하고 더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역으로 뚫고 나가려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마치 연금술적 관념에서 정화 의식과 같아요. 우선 당신은 태곳적 불행한 세계로 돌아가 무질서와 혼돈의 시기를 거쳐야 합니다. 그로부터 원소들을 정화하고 삶의 새로운 씨앗을 찾아내 모든 생명과 모든 물질과 인격을 변형하고 마침내, 바라건대 당신이 나타나 그 모든 이원론과 대립물을 결합하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선과 악이 아니라 통합되고 순수한 것을 이야기하게 되죠. 공연에서 보는 것과 같은 우리의 음악과 특성은 아마도 갓 발생한 초기의 순결한 요소가 담긴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 여전히 있을 겁니다. 최근 우리가 직접 나타났을 때 함께 하나 되기가 시작됐어요." 그리고 그는 이제껏 나온 것 중 최고의 슬로건을 내놓았다. "우리를 선정적인 정치인들로 생각해 주세요." (p226-227)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을 때 대부분의 그룹은, 브로드스키는 말한다. "자기들끼리 장난치고 농담을 하고 서로 끝장을 내려합니다. 도어스는 절대 그러지 않았어요.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행동에 진지했습니다. 그리고 넷 중 짐이 가장 진지했죠." (p233)
'제임스 딘James Dean이 죽고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의 배가 나온 후 두드러진 남성 섹스 심볼은 정말 없었다." 최신 유행에 정통한 「빌리지 보이스』의 필자 하워드 스미스Howard Smith는 이렇게 썼다. "밥 딜런은 지적인 연인에 가까웠고, 비틀스는 진정 섹시하다기보다는 항상 너무 귀여웠다. 이제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등장했다. 내 예감이 맞는다면 그는 오래도록 대중의 리비도를 움켜줄 최고의 거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243)
공연에서 공동체 의식은 절정에 이르렀다. "아시다시피, "레이가 말한다. "시베리아의 주술사가 무아지경에 빠질 준비가 되면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딸랑이를 흔들고 호각을 불며 그를 배웅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어떤 악기든 연주를 합니다. 쿵쿵, 쿵쿵,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지속되죠. 그런 의식은 몇 시간이고 이어집니다. 도어스가 공연에서 펼치는 연주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무대가 그 정도로 오래 가지는 않지만 약물 체험 덕분에 우리가 훨씬 더 빨리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우린 그러한 상태의 징후들을 잘 알았기에 그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수 있었죠. 짐은 마치 전기 주술사와 같았고 우리는 그의 뒤에서 북을 울려 대는 전기 주술사의 밴드였습니다. 가끔씩 그는 자신이 그 상태에 빠져들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지만 밴드의 음악이 계속해서 쿵쿵 울리면 점차 거기에 몰입하죠. 정말이지, 저는 오르간으로 그에게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었어요. 존은 드럼 소리로 할 수 있었고요. 이따금 움찔하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제가 코드를 치면 그가 씰룩였습니다. 그러면 그는 다시 떠납니다. 때로 그 녀석은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놀라웠어요. 그러면 관객들도 그걸 느끼는 거죠!"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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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현판에 쓰인 걸 읽기라도 하듯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았다. "그가 음악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들어 봐. '도어스의 음악은 분노의 음악이다. 가식이 아니다. 그들의 음악은 진실의 비밀을 탐구한다. 기교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내용 면에서는 전위적이다. 그들의 음악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한 광기, 타락과 꿈을 이야기하지만, 상대적으로 관습적인 음악 언어로 그것들을 말한다. 그것이 그들 음악의 힘이요 아름다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도어스의 음악은 사이키델릭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적이다. 신랄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비통하다. 그건 록음악을 넘어 종교 의식(초자연적 의식), 성적인 퇴마 의식이다. 도어스는 대중문화의 마법사들이다. 모리슨은 천사다. 모든 걸 없애버리는 죽음의 천사." (p253-254)
(270)
이제 한창 물이 오른 열광적인 10대 소녀들은 검은 머리의 백인 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모리슨을 신과 다름없는 인물로 받아들였다. 1968년 여름 『크로대디 Crawdaddy』의 필자 크리스 와인트라우브Kris Weintraub는 짐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다. '그는 마이크로 다가가 오른손으로 윗부분을, 왼손 손가락 끝으로 스탠드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세상은 바로 그때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 그와 같은 다른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평범한 말로는 미남이라고도 못한다. 그를 신으로 바라보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고 해도 좋다. 그는 그리스도니까.' 좀 더 냉정한 다른 필자는 같은 잡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상징적 죽음 이후 모든 사람이 미친 듯이 축제를 벌이는 동안, 모리슨은 사운드트랙에서 발작적으로 노래한다. "이제 다 끝났어, 그대여! 전쟁은 끝났어!" 영화가 필모어 이스트에서 상영되었을 때, 반전의 좌절감으로 충만해 있던 젊은 관객들은 대혼란 상태에 빠졌다. "전쟁이 끝났다!" 통로에서 10대 소녀들이 외쳤다. "도어스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냈다!" 도어스의 짧은 수난극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짐과 친구들이 다시 한 번 해낸 것이다.'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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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이 되는 자신의 관객들에게 환영받는 반항아이며 환상 속 섹스 파트너이자 도마뱀 왕, 즉 로맨틱한 미치광이였다. 그리고 미국의 중산층에게는 음란하고 오만한 공공의 위협이었다. 그것이 그의 종말론적 측면이었다. 친구들과 있는 사적인 자리에서 짐은 진정 수줍어하는 태도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더해 본래의 순수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도 인정했듯 극단적인 것에 매혹되었다. "최고점과 최저점은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중간에 있는 모든 지점은 글쎄요, 어느 쪽도 아니죠. 저는 모든 걸 해 볼 수 있는 자유를 원해요. 적어도 한 번은 모든 걸 경험해 보는 거죠." 그는 극도로 예의 바르고 공손하며 심지어 박식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천박하거나 그가 좋아했던 것처럼 '원초적'인 사람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짐 모리슨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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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다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있죠. 저는 몇몇 소규모 폭동을 자극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몇 번 하고 나서 그게 정말 웃기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죠. 이내 모두가 뛰어오르고 조금이라도 뛰어 돌아다니지 않으면 사람들이 성공을 거둔 콘서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무 쓸데없는 짓이기에 웃기는 일인 거예요. 저는 그냥 콘서트를 하고 모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놔두어서 모두가 그 에너지를 거리로 가지고 나가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중은 도어스의 콘서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폭동과 초월성이다. 그게 아니면 그들은 적어도 도마뱀 왕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을 짓을 하는 걸 봐야 했다. 짐은 마리화나에 잔뜩 취해 무대 밖으로 떨어졌고 (술에 잔뜩 취해 잊어버린 시구 대신 괴성을 질렀다), 약에 취해 앰프를 짊어지다 무대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도어스는 어느 누구도 본적이 없는 기괴한 쇼를 보여 주었다.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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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있는 동안 짐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통통하게 살이 찐 말솜씨 좋고 사교적인 프레드 미로Fred Myrow였다. 그는 스물 여덟 살에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의 조수이자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작곡가였다. 데이비드 앤더를은 프레드를 특별히 짐에게 소개하기 위해 플라자 호텔로 데려갔다. 짐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왼손으로 옮기고, 그들은 형식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짐은 즉시 모의라도 하듯 프레드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는 아방가르드 클래식 음악계에서 전도유망한 작곡가인 프레드 미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 왔다. 그러나 짐은 프레드가 그 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프레드는 비틀스를 들었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시대에 뒤져 있다고 판단했으며, 더 대중적인 음악을 하고 싶어 했다. 짐은 다른 방향에서 오고 있었지만 그들의 바람은 거의 일치했다. 즉 두 사람 다 의미 있는 변화를 원했다. "내가 1년 안에 창조적으로 발전할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면" 짐은 프레드를 만나자마자 말했다. "난 향수를 자아내는 것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될 거야." 연예계의 아티스트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다음 날 그런 깊은 생각을 한다는 게 드문 일이라는 걸 알고 있던 프레드는 이 표현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사라져 간다는 것은 짐이 두렵게 생각한 운명이었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그토록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아버지와 대립함으로써 사회적 균형을 잡아야 했던 혁명적인 인물로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상반되었지만 그들은 같은 종류의 야망과 충동을 지니고 있었다. 짐은 반드시 혁명을 이끌고 싶어 한 건 아니었지만, 혁명이 일어나려 하면 거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자신의 몇몇 노래가 환영 속에서 떠올랐다고 주장했지만, 그 환영의 반항적이고 종말론적인 속성을 모르지 않았다. 짐의 팬들과 록을 좋아하는 대중이 그를 당시 일고 있던 정치·사회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기자,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남몰래 우쭐했다. (p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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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8월 첫 주에는 젊은 극작가 하비 퍼 Harvey Perr가 쓴 도어스에 대한 긴 평론이 『로스앤젤레스 프리 프레스』에 실렸다. 곧 하비는 짐과 침구가 되었고, 이 기사는 도어스의 모든 악보를 모은 도어스 전집 The Doors Complete』에 실리게 된다. '내가 도어스에 감탄하는 것이 [그가 쓴] 그들의 노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 노래들 중 몇 곡은 확실히 취약하지만, 나는 그들이 보여 주는 단순함의 수준이 별 볼 일 없는 아티스트들이 의식적으로 단순함을 피하는 수준보다 현저하게 인상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그룹이 진심으로 시적 극치에 도달했다면, 그들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호사를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 중 어느 하나 또는 다른 걸 하는 이들은 극히 적다. 그건 모리슨의 시와 같다. 대부분은 혁명적인 1960년대의 휘트먼이라 할 수 있는 진짜 시인의 작품이지만, 어떤 건 민망할 정도로 미숙하다. 예술적 극단에서 다른 쪽 극단으로 치닫는 걸 죄악이라 할 순 없다. 이는 결국 인간적 결함이며, 인간다움이 없다면 예술도 없다. 그러나 또다시, 진정으로 내가 도어스에 감탄한 것은 절대 그들의 음악이 아니며, 모두가 그 자체로 낯설고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시 또는 음악적 기교나 카리스마도, 앨범들이나 아쿠아리우스 콘서트도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내가 그들에게서 받은 분위기다. 난 그들이 자신들과 우리를, 록 음악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화와 연극과 혁명의 영역으로 옮겨 가는 그런 세계로 끌어들이���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 고요한 순간들에 무대 위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리슨을 만나면, 노먼 메일러 Norman Mailer의 「사슴 공원 The Deer Park」이 상연되는 곳에서, 리빙 시어터의 모든 공연에서, 컴퍼니 시어터 The Company Theatre의 「제임스 조이스 메모리얼 리퀴드 시어터 James Joyce Memorial Liquid Theatre」개막식에서 그를 만나면, 그는 살아가는 데 별 관계가 없는 게 아니라 관련이 있는 예술에 격렬하게 열중한 채 늘 적절한 장소와 적절한 시간에 있다. 그런 사람은 시를 쓸 필요가 없지만 만약 시를 쓴다면, 그가 시를 쓸 때 사람들은 더 가까이 들여다 보고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짐 모리슨과 도어스의 경우 그런 수고를 할 가치가 있다. 그들이 아무리 록 평론가들을 불쾌하게 하고 즐겁게 하거나 짜릿한 전율을 주기까지 했어도, 그들은 예술에 다가갔다. 그들의 예술이 측정되어야 하는 기준은 더욱 노련하고 심오하다.' (p3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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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많은 불신을 불러일으킨 한 가지 요인은 시간이었다. 빌은 짐이 죽고 엿새 후, 장례식 이틀 후에야 매체에 전말을 알렸다. "저는 짐 모리슨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막 파리에서 돌아왔습니다." 시든스는 준비한 - 로스앤젤레스의 홍보 회사에서 배포한-성명서를 통해 말했다. "짐은 몇 안 되는 친한 친구만 참석한 가운데 간소한 의식으로 매장되었습니다. 그의 죽음과 장례식에 관한 첫 소식은 비밀로 했습니다. 그를 가까이 알고 한 인간으로서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재니스 조플린과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다른 록 스타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펼쳐진 온갖 악평과 떠들썩한 분위기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짐은 자연적인 원인으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3월부터 자신의 아내 패멀라와 함께 파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의사의 진찰을 받았고, 사망일인 토요일에도 그 문제를 호소했습��다." 그 후 여러 날 동안 시든스는 더 이상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불신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요인은 시든스가 시신을 본 적이 없다는 사 실이다. 그가 짐과 패멀라의 아파트에서 본 건 봉인된 관과 한 의사의 서명이 된 사망진단서였다. 경찰에 알리지도 않았고, 현장에 의사가 있지도 않았다. 사체 부검도 없었다. 그가보고 들은 건짐이 죽었다는 패멀라의 말이 전부였다. 왜 부검을 하지 않았을까? "그저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우린 짐을 그대로 두고 싶었습니다. 그는 평화롭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의사는 누구였을까? 시든스는 몰랐고 패멀라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명은 위조되거나 돈으로 살 수도 있다. 어쨌든 이것이 짐 모리슨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이야기다.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들은 더 기이하고, 어쩌면 더 그럴듯하다. (p522-523)
음모론을 믿지 않는 다른 이들은 짐이 틀림없이 즐겼던 마약인 코카인을 과다 복용했을 거라 믿는다. 비록 이 마약은 다량으로 하더라도 헤로인보다는 훨씬 덜 치명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또 다른 이들은 짐이 '자연적인 원인'으로 사망했지만 그가 죽었을 때 패멀라는 거기 없었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그녀는 주말 동안 백작과 함께 떠나서 월요일에야 돌아와 짐이 죽은 걸 발견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발표가 늦어진 이유가 설명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살인 이야기만 아니라면 그가 뭔가를 과다 복용했든 심장 마비가 왔든 또는 - 처음부터 많은 이가 추측했던 것처럼 - 그냥 술을 마시다 죽었든 그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결론은 여전히 '자살'로 해석된다. 어찌 됐든 짐은 자기 학대로 죽었으며, 말하자면 자신의 머릿속에 간직하던 권총의 구경을 어떻게 결정할지를 알아내는 일만이 문제였을 뿐이다. 진실은 짐 모리슨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짐이었다. 그의 육신은 낡았고, 그의 영혼은 지쳐 있었다. 반면 이 중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짐 모리슨이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건 보이는 것처럼 억지스러운 이야긴 아니다.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고 기꺼이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짐이었다. 그가 공적인 삶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죽음을 꾸몄다는 건 그의 예측할 수 없는 성격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는 자신보다 커져 만회할 수 없게 된 이미지에 신물이 났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신뢰성을 추구했으나, 그 시도는 문화 영웅으로서의 매력으로 좌절되었을 뿐이다. 그는 노래하기를 즐겼고 도어스의 재능을 진정 사랑했지만, 스타의 자리가 가져오는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어쩌면 그는 7월 3일과 4일 주말에 글을 쓰는 평온함과 익명의 자유를 찾아 시야에서 사리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p527-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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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짐은 죽었을지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추종자들이 그 죽음을 필사적으로 완전히 거부하는 영웅적 인물이 아니라 저항, 소외, 탐구와 같은,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 주제의 살아 있는 상징이 되었다. 내가 만나 본 '세대 차'를 대표하는 이들 중 짐은 완전히 솔직했던 유일한 사람이다. 세대 차를 가진 이들은 부모들의 가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시간 또는 공간의 변동을 모르는 건 다른 이야기다). 그는 부모님의 사고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죽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정했다. (p542)
이러한 이미지보다 더, 생활 방식보다 더 그의 불멸성을 견고하게 해 준 건 도어스의 음악이었다. (p543)
사람들은 짐의 시를 읽거나 듣는 것 이상을 했다. 그들은 거기에 따라 살아갔다. 1960년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후 10년마다 계속해서. (p544)
내가 짐의 사망 소식에 왜 그리 충격을 받았는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다른 많은 이가 그랬던 것과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음악이 내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p545)
시인 블레이크는 말했다. "과잉의 길을 걷다 보면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 짐 모리슨은 그걸 이해하고 있었고, 과도했다. 그들은 시인이었기에 모두 지혜에 도달했을 수도, 하늘이 내린 바보들이었기에 거기에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건 하나고 같은 것이다. (p546)
이 전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짐 자신이 시인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그와 나눈 우정과 형제애의 기반이었다. 또한 저자들은 짐이 로큰롤계의 많은 아티스트처럼 돈을 좇는 물질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짐은 그 경험과 실행을 사랑했다. 그는 물질의 속성이 불만족스러운 기쁨이라는 고귀한 가치로, 실체가 변화하기를 바랐다. (p547)
나는 짐의 시를 런던에서 처음 봤다. 번쩍이는 메스칼린 같은 빛으로 가득한 숙취 속에서 난 그의 벨그라비아 아파트 커피 테이블 위에 그가 쓴 『새로운 창조물들』 원고가 놓여 있는 걸 봤고, 내가 읽은 것에 흥분했다. 난 짐의 세대에서 그보다 더 훌륭한 시인을 알지 못한다. 시인 중 그와 같은 유명인이나 연예인은 거의 없었고(아마 1920~1930년대 러시아의 마야콥스키Vladimir Mayakovsky 정도), 누구도 그토록 짧고 강렬한 삶을 살지 않았다. 누구나 도어스의 음악을 들어 봤고 널리 알려진 전설을 알고 있지만, 짐은 록 스타였기에 자신의 시가 읽힐 수 있을지 민감해했다. 그는 자신의 시를 사려 깊고 신중하게 지켰으며, 그 시들에 남몰래 공을 들였다. (p548)
- 제리 홉킨스, 대니 슈거맨, '짐 모리슨 라이트 마이 파이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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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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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amazon.com/Sergei-Rachmaninoff-Critical-Rebecca-Mitchell/dp/1789145767 )
1943년 라흐마니노프의 사망 직후에 칼럼니스트 레너드 리블링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이 알았던 러시아의 비극을 결코 넘어서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는 깊은 우수가 자리하고 있었고, 이는 그의 얼굴, 특히 두 눈에 잘 드러났다."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시대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자, "감미로운 낭만주의의 과거와 단단한 현대의 리얼리즘 사이"를 잇는 드문 연결 고리였다. (p11)
동료 작곡가이자 동포였던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라흐마니노프를 "6피트 반(약 198센티미터)짜리 우거지상"이라고 불렀다. 아닌 게 아니라,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에 이주한 직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미소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근엄하고 엄숙한 얼굴 일색이다. 그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말쑥하게 차려입고 손에는 모자를 든 채 분주히 움직이면서도 자신이 속한 시대와는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사진들에 나타난 우수에 가득 찬 그의 표정은 서로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똑같다.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낯설어진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 된 것만 같다. 낡은 작곡 방식을 떨칠 수도 없고, 새로운 작곡 방식을 습득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음악 양식을 느껴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였지만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임을 알고 있다. 나비부인은 남편을 위해 순순히 개종하였지만, 나는 내가 믿어오던 음악의 신들을 냉큼 버리고 새로운 신들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 내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러시아에 닥친 재앙과도 같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음악이, 그리고 모든 음악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정신적으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늘 느껴왔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명을 향한 끊임없는 순종이었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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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훤칠하고 근엄하며, 몸가짐은 귀족적이고, 콘서트 무대에서는 냉정한 위엄을 발산한다. 저 강철 같은 손가���과 탄탄한 이두박근을 보면 거대한 불협화음을 앞세운 모더니스트의 음악을 기대하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섬세하고 커다란 감정,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노래하는 음색이 들려온다.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은 마음속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마케팅 전략은 퍽 효과적이었다. 1942년 발간된 <타임>지에 따르면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활동한 동안 누적으로 250만 달러 넘는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의 음악은 콘서트 프로그램과 음악원 담장 안, 그리고 시중에 발매된 음반에 단골처럼 등장하고 있고, 이는 곧 가슴이 미어질 듯 감정적인 그의 음악 양식이 관객에게 호소하는 능력을 여전히 갖추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비록 20세기 중반에 음악적 '현대성'을 표방한 대표 주자들은 반음계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선율이 전면에 부각되며 화음이 복잡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혐오하였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그의 팬들은 정신없이 변화하고 있는 세계 속에 던져진 자신들의 고생과 비애, 실패를 메아리처럼 표현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8)
라흐마니노프는 철학적 토론에 직접 가담하길 꺼렸지만 철학적 논의가 그의 창조적 소산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 또한 사실이다. 1919년 인터뷰에서 그는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음악의 세계에서 가장 지엄한 지배자는 바로 선율이다. 선율이 곧 음악이며, 선율은 또한 모든 음악의 필요불가결한 토대이다. 완벽하게 배태된 선율 속에는 그것에 고유한 자연스러운 화성과 그 화성의 발전 양식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는 은 시대 작가들이 쓴 수많은 텍스트에 음악을 붙였으며, 러시아정교회 음악이 부흥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빌라 세나르에 보존된 그의 서재에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러시아 종교 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를 포함하여 은 시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이들이 남긴 문헌의 러시아어 번역판이 간직되어 있다. (p20)
라흐마니노프를 그가 속한 시대의 맥락 안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발히 활동했던 시대와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로 표상되는 미적 견지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은 혁신과 실험을 가치있는 것으로 보는(아울러 대중적 인기를 수상쩍게 여기는) 현상을 "모더니스트 담론"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라흐마니노프를 '진보' 혹은 '보수'의 프레임에 가두는 일은 그의 생애 내내 음악적 가치를 갑론을박하는 데 적용한 가치 기준을 그대로 빌려 쓰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음악을 근본적으로 현대적인 것이되 반드시 모더니스트적이지는 않다고 규정한다. "모더니즘"을 "현대화의 객체뿐만 아니라 주체가 되기 위한 현대 남녀의 모든 시도"로 이해한 문화사학자 마셜 버먼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주장을 펼쳤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모험과 권력, 기쁨과 성장,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변화를 약속하는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가 아는 모든 것, 우리의 모든 정체성을 파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다. ...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말처럼 "단단한 것들이 모두 녹아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우주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p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현대의 끊임없는 영고성쇠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심지어 현대의 어떤 측면들은 적극적으로 껴안으며 융성하였다. 동시에 그가 창조한 가공의 러시아성에 뿌리박은 자아는 그의 음악을 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라흐마니노프는 "언제나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분투했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현대의 산물이었다. (p22)
"새로운 종류의 음악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음악의 작곡가들은 느끼기보다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 한스 폰 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 음악을 '환희하게' 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묵상하고 주장하고 분석하고 사고하고 계산하고 곱씹을 뿐, 절대 환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정신에 입각해 곡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당대의 정신은 음악에서 표현을 요구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작곡가들로서는 사고는 가능하되 느낄 순 없는 음악을 엮어내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대가 요구하는 표현은 사실과 문자의 장인인 작가와 극작가에게 맡겨두고 영혼의 권역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것에 관한 나의 견해를 물은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경우도 현대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현대음악은 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리는 음악입니다. 고사병에 걸린 채로 태어나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p23-24)
라흐마니노프의 젊은 시절 행보는 당대 문화계의 움직임과 발맞추었고 현대성에 의해 초래된 격동과 긴밀히 조응했다. 1917년 이후 그는 두 차례의 소외를 경험해야 했다. 한 번은 자신의 조국을 등져야 했던 정치적 망명이었고, 또 다른 한 번은 전문 음악가 동아리 내에서 세를 굳히던 현대주의자들의 '미래파' 담론에서의 배제였다. 마음속 깊이 현대적이었던 그는 현대주의자들이 표방하는 미학을 삼갔으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속한 시대의 모순을 표상하는 화신이 되었다. (p25)
"스승님께서는 리듬이 없고 문법과 구두점이 빠진 연주를 결단코 허용하지 않으셨다. 그것만으로도 가장 거대한 예술적 건물을 지어 올릴 수 있는 커다란 음악적 토대가 되어주었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제자가 어릴 때부터 “테크닉뿐만 아니라 해석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곤 했다.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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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의 근엄하고 엄격한 몸가짐과 표정은 무대 위에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음악 예술에 헌신하는 자세-즈베레프의 문하에서 기숙하며 배양한 것이다-를 앞세운 그는 모든 공연에 진지하게 임했고, 불필요한 제스처나 극적 몸동작을 삼갔다. 훗날 라흐마니노프는 스스로 "85퍼센트는 음악가이고 고작 15퍼센트만 인간"이라고 했는데, 그런 자세가 이미 음악원 시절부터 체화되어 있었던 셈이다. (p67)
지극히 유명세를 치른 음악인 만큼 많은 이가 작곡가에게 음악 외적인 작곡 동기는 없었는지 묻곤 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시종일관 부정적인 뜻을 밝혔고, 1910년에는 "나의 유일한 동기는 -얼마간이라도 돈을 벌어야 했던 다급한 필요를 제외하면- 그저 아름답고 예술적인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싶다는 욕구뿐이었다"라고 확실히 매조졌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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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자신은 이렇게 받아들였다. "이 교향곡은 사람들이 쓰고 이해하는 의미대로 퇴폐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고, 다만 확실히 약간 '새롭긴' 하다." 글라주노프의 지휘가 수준 이하였던 때문도 있었겠으나, 그로서는 곡이 새로워 초연이 실패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초연으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흐른 1915년에 그는 마리에타 샤기냔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스스로 음악가라 칭하고 음악 속에 담긴 불편함을 직시하길 꺼리지 않는 이들에게는 혁신가의 월계관을 씌워줘야 마땅하겠지. 그런 이들은 선진적이며 독창적이라 불리겠지만, [나의] 혁신은 태내에서 목 졸리고 말았어." 샤기냔의 결론은 이랬다.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이라는] 질병을 앓게 된 건 교향곡 초연의 실패나 그에 따른 실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병에 빠진 이유는 음악가로서의 미래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즉, 더 이상 혁신가로서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훗날 라흐마니노프가 '현대주의자들'의 음악적 실험을 적대시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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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움직임을 뒷받침한 인물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이는 아마도 러시아 사상가 겸 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일 것이다. 예술이 이루는 기적에 관한 솔로비요프의 생각은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성육신과 예수가 산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 변용같은 기독교적 관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인간의 예술적 창조성은 아름다움의 현현을 통해 물질세계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영화한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그는 음악이 아름다움의 가장 "직접적이거나 마법적인" 표현이라면서, 음악이라는 예술 형태 속에서 "우리는 가장 깊은 내부적 상태가 사물의 진정한 본질 그리고 내세와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연의 존재'와) 연결되는 것을 경험한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음악만이 가진 신비로운 힘에 대한 의견은 러시아에서 발간되던 문학·철학·미술 잡지에 자주 등장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음악가 콘스탄틴 에이게스는 솔로비요프의 사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음악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관객에게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고까지 했다. 20세기 초반을 살던 솔로비요프의 추종자들에게 예술가-그리고 특히 작곡가-는 저들의 예술을 통해 물질적 세계를 영화하는 기적을 수행하는 이들로 비춰졌다. (p130-131)
러시아 상징주의 미술의 초기 사례인 미하일 브루벨의 <앉아 있는 악마>(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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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는 사회와 정치판이 극적으로 요동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1905년 2월 3일에 발표된 결의안에는 모스크바의 여러 음악가와 함께 그의 이름도 포함되었다. “오로지 자유로운 예술만이 삶에 진실한 예술이며, 오로지 자유로운 창작 행위만이 기쁨을 줄 수 있다." 우리 음악가들은 우리의 예술가 동무들이 발표한 이 멋진 문장에 전적으로 찬동하는 바이다. 만일 예술이 진실로 강력해지고 진정으로 거룩해지며 정녕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요구에 응답하고자 한다면 예술가 내면의 자기 인식과 인간 사회의 기본적 요구 말고는 예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인생의 손발이 묶인 경우라면 예술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도 없고 발언과 언론의 자유도 없는 국가라면, 그리하여 사람들이 생동하는 예술적 사업에 투신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 존재하는 국가라면, 예술의 소산 역시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유 예술가'라는 칭호 역시 쓰디쓴 농담처럼 들리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유 예술가가 아니라 러시아의 모든 국민과 마찬가지로 권리라고는 없는, 현대의 부자연스러운 사회적·법적 환경의 희생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여건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오로지 하나뿐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그 길은 러시아가 근본적인 개혁의 길로 나아갈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올 것이다." (p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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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감은 내면에서 일어나야 한다. 내면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면 외부에서 그 어떤 자극이 주어져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술가 내면에 창조적 능력의 거룩한 불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장 훌륭한 시, 가장 위대한 그림, 가장 숭고한 자연이 아무리 법석을 떨어도 아무런 쓸 만한 결과를 낳지 못한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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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 들어서는 소규모 피아노곡을 쓰는 일만의 어려움에 대해 아래와 같이 털어놓았다. "피아노를 위한 소품을 쓸 때는 장황하게 흐르지 않고 간결하게 응축해내야만 하는 주제 악상에 따라 곡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협주곡과 교향곡을 작곡할 때는 곡이 술술 써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까지 작곡한 모든 소품은 세심하게 살피고 근면히 노력한 산물입니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을 하되 간결하고 알기 쉽게, 그리고 에두르지 않고 말하는 건 창조적 예술가가 당면한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복잡해지기보다 단순해지기가 더 어렵다는 걸 예술가는 오랜 경험 끝에 깨닫게 됩니다." (p192)
철학적 언어를 동원해 자신의 미적 가치 체계를 설명하는 일을 꺼린 라흐마니노프였지만, 그의 작곡 양식이 아폴로적 균형 감각의 지배를 받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음악의 긴장을 끌어올리는 데에 대조와 부조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음악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 부조화는 아름다움을 강조하지만, 인정사정없이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부단한 불협화음은 결코 예술이 아니며 절대 예술이 될 수도 없다" 하고 단언했다. (p193)
"내 유일한 영감은 -다소간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는 별도로 하고- 뭔가 아름답고 예술적인 것을 창조하고 싶은 욕망 뿐이었다. 전주곡이란 그 본질상 절대음악이며, 아무리 작곡가의 팔을 비틀어도 전주곡을 교향시나 음악적 인상주의용 작품으로 탈바꿈시킬 순 없는 법이다 ... 절대음악은 듣는 이들이 어떤 분위기를 느끼도록 유도하거나 암시할 순 있다. 그러나 절대음악의 주요 기능은 음악의 아름다움과 그 형태의 다양함을 통해 듣는 이에게 지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바흐의 전주곡에서 작곡가가 느꼈던 분위기를 발견하려 애쓴다면 정작 음악에 담긴 가장 두드러진 아름다움은 놓치는 꼴이 되고 말 터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음악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존재이자 음악의 목적은 음악 그 자체이다. 음악의 의미는 구체적 삶속에서 사람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바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했던 모스크바의 음악 철학자 콘스탄틴 예이게스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p194)
이제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스타일이 된 음악의 일면들은 음악 외적 요소와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고르지 않은 박자는 정교회 성가 선율을 떠오르게 하고, 종소리를 모방한 소리도 자주 들려온다. <죽음의 섬> 이후로 라흐마니노프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진노의 날' 모티프 역시 여러 대목에서 식별된다. 이처럼 여러 작품을 통해 공통으로 되풀이되는 음악적 단서들은 물리적 현실이나 특정한 경험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1906년 모스크바의 문예지 <황금 양모> 창간호에 나온 "예술은 상징적이다. 예술은 이미 그 안에 상징-유한한 것에 무한한 영원을 담은 것-을 품고 있다"라는 문장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온당할 것이다. (p195)
라흐마니노프의 인기 비결은 아름다운 선율과 풍성한 화음을 그만의 방법으로 배합한 음악에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 경험한 바를 긍정받는 감정의 분출을 경험했다. 집시들이 부르는 노래, 오페레타, 그리고 문화 엘리트층이 멸시하는 '대중적'인 여흥과 마찬가지로 라흐마니노프가 쓴 음악은 듣는 즉시 감정이 움직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은 그저 '비관적이고 우울하고 어두운'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런 음악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처지로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에 호소했다. M. L. 첼리시체바의 회고대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 (p197)
라흐마니노프의 열혈 팬이자 친구요, 뮤즈였던 마리예타 샤기냔. "나는 모든 게 무섭소. 생쥐, 쥐, 딱정벌레, 황소, 도둑이 무섭고, 강풍이 불 때마다 굴뚝이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도 무섭소.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것도 무섭고, 어두운 것도 무섭고, 기타 등등 무서운 것이 한둘이 아니오. 나는 퀴퀴한 다락을 좋아하지 않소. 다락에는 집의 정령이 기거하는 것 같소(그대는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지 않소!). 그렇지 않다면 낮에 집에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을 텐데 말이요." 샤기냔은 라흐마니노프에게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조성 음악을 내팽개친 모더니스트들을 보고 내린 철학적 결론에 경악했으며, 반대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서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빼앗는 현대의 힘에 맞서 개인의 영역을 지켜낼 저지선을 발견했다. 철학에 대해 논한 장황한 글에서 샤기냔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단지 음악적 상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음악의 덮개를 벗겨 그 아래 숨은 상징을 찾아낸다"고 썼는데, 이는 음악(그리고 더 넓게는 예술 전반)을 초월적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로 여기는 은 시대에 널리 유행한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샤기냔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서 "스스로의 예술성을 고수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음악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 고투하는 인간 자체를 들었다." 그녀는 "비단 예술(특히 회화와 음악)만이 아니라 사회와 일상생활 역시 리듬을 잃고 있다면서, 그런 만큼 리듬이 뚜렷한 음악에 헌신한 라흐마니노프의 자세를 더욱 무겁게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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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콘스탄틴 발몬트 <불타는 건물들>, <우리가 태양처럼 되게 하소서>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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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감동적이고 불안정한 어조로 그는 이렇게 물었다. "친애하는 '레', 죽음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죽음이 두렵습니까? ... 예전의 나는 도둑, 강도, 전염병 등 모든 게 조금씩 두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이런 것들은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허나 죽음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삶이 끝난 이후의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그저 썩어 사라지는 편이, 존재하길 멈추는 편이 좋을 텐데요. 하지만 무덤에 묻히고 난 뒤에도 끝이 아니라면 그건 무섭습니다. 내가 겁이 나는 이유는 불확실성이라는 미지수 때문입니다!" ' 이렇게 걱정하는 그에게 샤기냔은 기독교 신앙이 해답을 줄 수 있다고 안심시키려고 하자(참고로 샤기냔은 훗날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운동가가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불멸하기를 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못쓰게 되고 늙어진 다음에는 스스로가 지긋지긋해집니다. 물론 나는 늙지 않았는데도 벌써 내가 지긋지긋하지만요. 그렇지만 만약 죽음 뒤에도 뭔가가 있다면 그건 정말 무섭습니다." (p226-227)
로베르트 슈테를 <크렘린 상공의 불꽃놀이>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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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상대하는 연주자 가운데 라흐마니노프만큼 연주 매너나 해석 면에서 의도적인 노림수를 두지 않는 이도 없을 것이다. 단순하고 명쾌하며 때로는 유장한 해석의 기조에는 그 어떤 종류의 불필요한 장식이나 사족도 제거되어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씨는 낭만적이고 매끈한 색채를 입힌 연주를 경원시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연주는 낭만파 시대의 화려한 캔버스보다는 조각품과 유사하다." (p261)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1929년 데카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암피코 피아노 롤 녹음을 발매한 적이 있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2번> 음반.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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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제는 어깨를 누르는 짐의 무게를 느낍니다. 젊은 시절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그 짐이 이제는 그 무엇보다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 짐이란 바로 내게 조국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 젊은 시절 몸부림치며 모든 슬픔을 삼켰던 그곳, 그리고 마침내 성공을 손에 쥔 그곳을 나는 떠나야만 했습니다. 내 앞에는 온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 모두 열려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성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곳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 조국, 러시아입니다." (p280)
1934년 4월 10일 빌라 세나르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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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발행되던 러시아어 잡지 <뉴 러시안 워드>지에 게재된 요세프 야세르의 리뷰는 라흐마니노프의 이목을 끌었다. 야세르는 라흐마니노프의 이전 작품에도 자주 등장해온 '진노의 날' 모티프가 문득문득 나타난다고 썼다. 야세르와 만난 자리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보통 음악가들은 첫 두세 소절만 아는 [그건 라흐마니노프도 마찬가지였다] ... 이 유명한 중세 시대의 선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죽음을 상징하는 이 성가 선율에 평생토록 흥미를 보여온 라흐마니노프가 정작 그에 관련한 지식은 이전 낭만주의 작곡가들 (베를리오즈, 리스트, 생상스, 차이콥스키, 무소륵스키)의 용례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 퍽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야세르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라흐마니노프가 내린 결론은 더욱 놀랍다. "그처럼 ���주 활용되는 성가 선율이, 게다가 한때 러시아정교회 성가집에 수록된 적도 있는 성가 선율이, 특징적이어서 쉽게 기억되는 레퀴엠 선율이 필요한 작곡가들 사이에서 그저 무언의 전통처럼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이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있음 직하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하나의 관습이지만-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머뭇거리며 "그래요, 관습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 하지만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는 이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라흐마니노프와 논의를 주고받은 야세르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선 '진노의 날' 선율은 라흐마니노프에게 깊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특히 그의 만년을 괴롭히던 생각들에 대한 오랫동안의 해답 같은 존재였다. 둘째,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진노의 날' 선율 속에서 모종의 음악 외적 요소- 어쩌면 저 세상으로부터의 '호출' 같은-를 느끼는 심리가 있는 것 같았고, 심지어 이러한 무의식적인 감각을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만 국한시키길 꺼리는 것 같아 보였다." (p296-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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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는 내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게서 연주회를 앗아가면 나는 시들고 말 겁니다. 통증이 있어도 연주할 때는 사라집니다. 종종 얼굴과 머리 왼쪽의 신경통이 스물네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연주회 전에는 마술처럼 없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요통 때문에 아주 고생했습니다.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 앉은 상태에서 막이 올랐고, 연주를 할 때는 조금도 통증이 없었어요. 하지만 연주가 끝나니 일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막을 내린 다음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아뇨, 연주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일을 멈추면 시들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안 됩니다. ... 무대위에서 죽기를 바랄 수밖에요."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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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는 현대 기술을 사랑했고, 색소폰 같은 현대 악기들을 탐구했다. 또한 여러 망명지를 겪은 것처럼 제정 러시아 말기의 시국도 경험하였다. 다시 말해, 사상과 혁신이 난무하는 격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살아내야 할 여건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같은 이유로 라흐마니노프는 잃어버린 나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의 음악과 정신은 1914년 부활절의 크렘린궁전을 담은 로베르트 슈테를의 그림, 즉 라흐마니노프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옛 러시아'의 이상화된 박제이자 그의 벽에 걸린 뮤즈를 동경했다. 라흐마니노프 개인에게 보이는 이러한 모순은 현대성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셜 버먼은 현대 세계에 관한 글을 맺으며 이렇게 주장했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이 서로 얽히는 소용돌이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가 속한 세계와 자신 스스로가 영속적인 해체, 갱신, 곤란, 비통, 모호함, 모순을 겪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주의자라는 것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떻게든 익숙함과 편안함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소용돌이의 리듬을 자신의 리듬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울러 소용돌이의 격정적이고 위험한 급류가 허락하는 현실과 아름다움과 자유의 형태들을 찾아 헤매는 흐름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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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베카 미첼 , ' 라흐마니노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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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5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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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x.com/LithiumResearch/status/1425856308511653897?s=20 )
우리는 재생 가능 자원으로 만든 에너지를 저장해 놓고 자동차와 휴대용 전자 기기들을 작동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변화의 출발점에 서 있다. 언젠가는 이런 녹색 에너지가 당신이 매일 사용하는 소비재를 운반하는 화물선의 연료가 될 것이고, 휴가철이면 탄소발자국 걱정 없이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떠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직은 현실이 되지 않은 일이지만, 아마라의 법칙Amara's Law'에 따르면 우리는 특정 기술의 영향력을 단기적으로는 과대평가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p12)
중국 자동차 산업은 중국식 자본주의의 전형이라 할 만한 경로를 따라 발전해 왔다. 먼저 공산당이 거시경제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특정산업 분야를 발전시켜야 할 전략적 필요성을 인식한다. 지식 이전이 필요하다면 강제성과 인센티브를 섞은 법률을 마련한다. 노하우를 확보하게 되면 보조금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시장의 주요 참가자 중 너무 많은 수가 국가 소유거나, 경영자들의 정치적 관계, 또는 정부의 자금 지원으로 공산당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특정기업을 국가가 장려하는 산업에 참여시키는 결정은 단순히 경제적 계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계 어디에서든 거대 기업들은 내부 수익률뿐 아니라 기회비용과 기회이익까지 따져서 새 프로젝트를 평가한다. 하지만 아메리칸드림과 달리 중국몽은 시진핑이 지적했듯이 공동의 것이고, 국유기업의 경영자들은 투자를 결정할 때 자국의 꿈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중국 정부의 비전에 맞춰 빠르게 움직이며 국가경제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경제 발전에 대한 이런 하향식 접근법은 자연스레 과잉 설비와 시장의 거품으로 이어지고 종종 상품 품질 저하를 부르기도 한다. 중국의 전기자동차와 배터리, 리튬 산업도 이런 문제들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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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수요가 증가하는 인접 영역, 또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 방향을 과감히 트는 능력은 중국 기업가들의 특징이다. 서구의 경영대학원에서는 기업의 규모가 크든 작든 전문화와 핵심 역량에 대한 투자를 강조한다. 중국식 접근법은 더 실용적이다. 모든 것을 아예 바닥부터 새로 배워야 하고 초기 생산품의 품질이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수요가 있는 시장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큰 배터리 물질 생산 업체 중 하나인 넝파삼삼이 있다. 2006년만 해도 이 회사의 매출 중 93퍼센트가 의류 판매에서 나왔다. 녕파삼삼이 처음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자본을 축적한 분야는 남성복, 특히 신사복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녕파삼삼은 매출의 75퍼센트를 배터리 물질에서 만들어냈다. (p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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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신장성 당서기였던 왕언마오포가 남긴 말이 그곳의 자연을 가장 잘 요약해 줄 것이다. "신장의 땅 위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많은 지역은 그저 불모지다. 하지만 그 아래는 무한히 공급되는 보물이 매장되어 있다." 실제로 신장에는 석유가 풍부할 뿐 아니라 비철금속과 각종 귀금속이 묻혀 있고 리튬도 있다. (p62)
중국은 화석연료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이미 확고히 자리 잡은 강국들과 패권을 다투기에는 너무 늦게 무대에 등장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생산하고, 이로써 전기 모빌리티로의 전환에 박차를 가하는 데서 중국은 엄청난 기회를 포착했다. 바로 중국인들이 '신에너지 경제New Energy Economy'라 부르는 새로운 영역이다. 중국은 줄곧 익숙하게 여겨온 높은 GDP 성장률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특히 중국처럼 거대한 개발도상국은 피하기 어려운 시장의 구조적 취약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신에너지 경제의 기회를 잡는다면, 기업과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성장에 목마른 나라에 절박하게 필요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또 다른 이점도 있다. 시민들이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계속 만족하게 하려면 중국 정부는 경제성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환경오염에도 대처해 공해를 없애야 한다. 중국처럼 고도로 산업화한 나라에서는 모순되는 목표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기자동차 생산부터 배터리 물질 거래까지, 공해를 유발하지 않는 신에너지 경제에 집중하면 두 가지 목표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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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미늄 산업의 '좋은 시절'은 대부분 자원에 대한 중국의 갈망과 알루미늄 수입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밖의 알루미늄 생산 업체들은 중국이 만들어 내는 수요가 종국에는 설비 과잉을 없애주리라 헛되이 기대하며 오랜 기간 손해를 감수했다. 하지만 희망이 사라지자 생산량을 줄여야만 했다. 그렇지만 중국은 알루미늄 가격이나 경기 흐름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생산량을 늘려갔다. 성장을 이어가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중국의 공급망 독립 그리고 중국 자동차 산업을 위한 핵심 자원의 비용 절감이었기 때문이다. 주주 가치의 최대화는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p95)
오늘날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투자자이자 극우 세력에 악몽과도 같은 존재인 조지 소로스는 시장에 관한 재귀성 이론reflexity theory을 주장했다. 즉 개인은 시장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기에 항상 자신의 시각이 편향되고 완전하지 않다고 추정해야 하며, 이러한 편향은 부정적이든 낙관적이든 시장에 영향을 미쳐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지'와 '조작'이 상호 작용한 결과라는 이론이다. 이때 인지는 대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고, 조작은 마음대로 대상을 해석하고 바꾸는 행위다. 이를 주식시장에 적용해 보면, 주가가 요동치는 것은 기업의 실적 같은 인지의 요소뿐 아니라, 투자자의 편견 같은 조작의 요소가 함께 맞물리기 때문이다. 이때 인지와 조작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다가, 어느 극한에 이르러서야 균형을 이룬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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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 구매에 작용하는 변수로는 화석연료 가격 대비 전기가격, 1회 충전 시 주행거리, 충전소에 대한 접근성, 배터리의 안정성과 충전 시간 등이 있다. 전기자동차 시장의 전문가들은 자주 빠뜨리곤 하지만 심리적인 부분도 소비자들의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시장을 완전히 바꿀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려면, 전기자동차를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못하면 일반 대중이 널리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되기 직전에 틈새시장 상품으로 그칠 위험이 있다. (p98)
오스트레일리아가 중국의 변화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적절한 위상을 찾아가면서 중국이 의도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자원들을 제공해온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2018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체 수출액 중 철광석이 차지한 비율은 무려 15퍼센트에 달했다. 리튬이 이른 시일 안에 비슷한 규모로 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그림에서는 수익의 규모뿐 아니라 전략적 관계 설정도 중요하다. 가까운 미래에 중국은 내연기관의 단계적 퇴출을 이어가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산 리튬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스트레일리아는 중국과의 협상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점하게 된다. (p100)
일본을 겨냥한 중국의 희토류 금수 조치는 법률적 관점에서도 복잡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가장 큰 희토류 생산 업체인 찰코Chalco와 베이팡희토, 샤먼텅스텐, 민메탈스는 모두 국유기업으로, 일반적인 시장 상황에서도 희토류의 생산과 수출에 관해 할당량을 규제받는다. 오스트레일리아가 계속해서 리튬 채굴량을 늘리고 중국은 그 반대로 한다면, 오스트레일리아가 미래의 무역 분쟁에서 흥미로운 영향력을 발휘하리라는 전망도 일리가 있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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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은 서구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중국과 경쟁할 뜻이 있는지다. 그들은 이미 각자 구축해 온 개발 모델을 고수할까, 아니면 중국의 방식을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모방하려 할까. 혹시 두 가지 접근법을 어떻게든 혼합하지 않을까. 배터리 공급망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터리 공급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계 전체를 들여다보며 던지는 질문이다. 무역 전쟁은 서구가 중국의 독주라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백악관의 무역 고문을 맡았던 피터 나바로 Peter Navarro는 보조금을 중국의 '7대 죄악' 중 하나로 꼽았고, 두 나라의 무역 관계를 정상화하기 전에 이 문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하기 위해 매우 애썼던 WTO도 압박수단으로 활용되었다. WTO에 속한 미국, EU, 일본의 통상 부처 장관들은 중국 정부가 더 투명하게 경제를 관리하도록 여러 ���례 설득하려 했다. 보조금 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자국 기업들을 위해 더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한국은 압력을 행사하는 무리 에 끼지 않았다. 기적에 가까운 한국의 경제성장은 대부분 정부가 선택하고 지원한 특정 시장에서 수출 중심 산업을 키운 결과였다. 즉 최소한 과거에는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p121-122)
사람들은 보통 배터리 공급망의 맥락에서 테슬라를 생각한다. 테슬라는 혁신적 기업이고 애플이 스마트폰 분야에서 해온 일을 전기자동차 분야에서 하고 있다. 이 회사의 상품은 멋지고 고급스러우며 몹시 미국적이라 여겨진다. 테슬라는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배터리를 만들지 않는다. 전기자동차의 핵심 요소인 배터리는 테슬라의 상품이 아니다. 미국 네바다에 있는 기가팩토리gigafactory에서는 사실 일본 기업인 파나소닉이 셀을 생산한다. 그리고 셀의 핵심 요소로 배터리 기능을 크게 좌우하고 리튬이 들어가는 양극재는 또 다른 일본 기업인 스미토모금속광산에서 만든다. 양극재의 핵심은 생산 과정에서 리튬 화합물이 주입되는 결정구조다. 충전하는 동안 리튬 이온은 결정구조를 벗어나고, 완전히 방전되면 결정구조로 돌아온다. 셀이 충전되고 방전될 때마다 이 과정이 되풀이된다. 양극재의 결정구조는 나노 수준에서 리튬 이온의 탈출과 복귀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해야 한다. 셀과 배터리의 차이를 이해하고 두 용어를 올바르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테슬라의 전기자동차가 동력을 얻는 원천인 배터리는 모듈로 연결된 개별 셀들로 구성된다. 이 셀들은 원통형이어서 텔레비전 리모컨에 넣는 건전지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기화학적 특성이 월등하다. 약 7000개의 셀이 모듈로 연결되어 이들을 관리하는 시스템과 함께 배터리를 구성한다. (p123-124)
EU는 배터리에 특이한 관점을 취해왔다. EU의 정책 결정자들은 배터리가 곧 수많은 상품 중 하나로 확인될 것이며, 따라서 유럽의 오래된 가치 지향적 선진 경제가 관심을 둘 만��� 지점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또한 EU는 서서히 진행되는 설비 과잉을 우려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아마 타당한 걱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영토 내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는 쪽으로 무게를 기울였을지 모를 몇 가지 중요한 반론을 듣지 않았다. 먼저 자동차 생산 업체들은 핵심 부품을 적기에 조달받는 방식을 장려해 왔고, 공급망을 수요지와 가까운 지역에 구축하는 것을 선호해 관련 업체들을 모아두고 일하는 데 익숙했다. 실제로 스위스, 헝가리, 체코에는 독일의 대형 자동차 생산 업체, 즉 BMW,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폭스바겐에 납품할 부품을 만드는 전문 업체가 수없이 들어섰고, 대부분 성공을 거뒀다. 처음부터 배터리 공장을 원하지 않은 EU였지만, 여전히 혁신을 선도하고 싶어 했다. 산업계와 학계의 자연스러운 시너지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려면 연구 시설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생산 시설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또한 교내 연구를 기반으로 스타트업을 만드는 학교들은 지역 산업계에서 고객을 찾아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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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말 그대로 바위투성이고 황량하지만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아름다움이 있다. 해가 지기 직전에는 땅과 하늘이 강렬한 색채로 가득차 다른 행성의 표면에 서 있는 듯하다. 이 불친절한 땅은 소금 평원에서 번성하는 법을 배운, 역시 익숙지 않은 색채를 자랑하는 새의 고향이기도 하다. 분홍색 홍학은 카로티노이드carotenoid'가 풍부한 조류와 동물플랑크톤을 수면 아래서 능숙하게 찾아내 먹는다. 이 장의 주인공은 홍학과 마찬가지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사람이다. 논쟁적인 동시에 숨은 실력자이며 한때는 사망한 칠레 독재자의 사위였으나 자신을 이 나라의 기득권층 중 한 명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주가조작으로 시작해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에 등장하는 조직들을 떠올리게 하는 복잡한 역외 체계를 만들고 선거운동에 자금을 지원해 정치 지형에 영향을 미치는 등 온갖 스캔들과 혐의로 얼룩진 그는 칠레가 리튬 산업에서 거둔 성공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폰세 레로우의 날렵한 체형과 감정을 숨기지 않는 생생한 표정은 그가 오랫동안 칠레 재계와 정계에서 맡아온 노련한 수완가 역할과 잘 어울린다. 그는 수십 년간 칠레 리튬 산업에 영향력을 발휘해 왔고 그의 인생은 이 나라의 정지적, 경제적 역사와 긴밀히 얽혀 있다. (p144)
폰세 레로우는 리튬 업계에서 가장 큰 생산 업체 중 하나인 SQM의 경영에 오랫동안 관여했을 뿐 아니라 민영화 후에는 이 기업의 최대주주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칠레는 민영화의 파도에 휩쓸렸다. 국유기업을 소수의 주주, 주로 회사의 노동자들이나 직원 연금 기금이 소유하는 민간기업으로 바꾼다는 구상이었다.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러시아에서 진행된 과정과 유사했고, 동부 유럽 국가들이 겪은 일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었다. 기업의 소유권을 탈취하려는 개인이나 조직이 지분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적정가격보다 저렴하게 주식을 팔도록 다른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판매를 강요했다. 소련이 붕괴할 때 러시아에서는 주요 국유기업의 주식과 바꿀 수 있는 교환권을 포기한 노동자들에게 보드카 몇 병을 안기거나, 극심한 인플레이션 속에 곧 휴지조각이 될 현금 몇 푼을 쥐여주는 사례가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더 많이 노출된 상태였던 칠레인들은 주식의 진정한 가치를 러시아인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었지만, 민영화를 통해 선택된 일부가 막대한 부를 획득하는 메커니즘만큼은 유사하게 작동했다. 폰세 레로우는 역외에 구축한 조직의 네트워크를 통해 SQM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다. 가령 그가 조세 회피처에 등록한 기업들은 폭포처럼 이어진다. 정확한 소유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게 한 회사가 다른 회사를 소유하고, 대출과 외부 투자자들을 활용해 적은 자본으로도 광범위한 통제권을 휘두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회사들을 최종적으로 소유한 것으로 지목되는 실체는 보통 신탁이다.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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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너무 커지면 비교 대상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리튬 생산 업체인 웰스미네랄스 Wealth Minerals의 CEO 팀 맥커천Tim McCutcheon이 "칠레는 본질적으로 '리튬의 사우디아라비아'"라고 했을 때 모든 투자자가 흥분했을 것이다. 숫자는 종종 잘 만든 캐치프레이즈가 주는 흥분을 빼앗아가지만, 보통 객관적 경제 상황을 더 잘 전달한다. 칠레 땅에 있는 리튬을 모두 파내 판매한다 해도 사우디아라비아가 3년간 수출한 석유의 가치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칠레가 리튬의 사우디아라비아일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가 될 수는 없다. 비슷하게 리튬이 칠레를 더 부유한 국가로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리튬만으로 이 나라가 부유해질 수는 없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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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지막 조건을 주목할 만하다. 리튬 추출을 중심으로 일련의 산업들을 구축하면서 가치 사슬의 위쪽으로 올라가려는 칠레의 야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심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핵심 논쟁은 천연자원에 관한 악명 높은 저주와 관련이 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은 천연자원이 희귀한 나라들과 비교해 경제성장이 뒤처지고 민주주의 발전이 더디며 개발의 성과도 좋지 못하다는 역설이다. 콩고나 앙골라 같은 나라가 자주 예로 언급된다. 칠레와 비교하기에는 석유자원이 풍부해 경제적으로는 앞의 두 나라보다 훨씬 부유하지만, 역시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나이지리아가 더 적절할 수 있겠다. 나이지리아는 꾸준히 세계 10대 석유 수출국으로 꼽히지만, 정작 자국민은 자동차에 수입산 휘발유를 넣는다. 나이지리아 안에 단순히 석유를 추출하는 것 이상의 기술적으로 발전된 산업이 없기 때문이다. 연료 가격이 저렴할수록 시민들의 생활비와 자국 내 각종 산업의 운영비가 줄어들기 때문에 나이지리아 경제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가가치를 더해 더 비싼 상품을 수출할 기회도 살리지 못하고 있다.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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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튬 삼각지대에 속한 또 다른 나라인 아르헨티나는 리튬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묻혀 있는데, 그 양이 1700만 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칠레보다 두 배가량 많은 것인데, 2019년 기준 리튬 생산량은 칠레의 약 3분의 1 정도였고 중국 내 생산량보다도 적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는 칠레와 유사하게 염수에서 리튬을 추출하는 시설 두 곳만 운영 중이다. 리튬 생산 업체 리벤트 Livent와 오로코브레orocobre가 각각 관리하는 옴브레무에르토 Hombre Muerto 염원과 올라로스Olaroz염원의 시설들이다. (USGS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칠레의 리튬 생산량은 2만6000톤, 아르헨티나의 리튬 생산량은 6200톤으로, 차이가 더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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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 아르헨티나 리튬 산업에는 딱히 나쁘게 작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페르난데스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리튬 기업들을 만나 그들을 변함없이 지원하겠다고 안심시켰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리튬 수출은 이 나라의 부채를 상환하는 데 필요한 현금, 특히 달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통화통제는 중요한 문제다. 기업들이 달러로 대금을 받으면 아르헨티나 법에 따라 바로 페소로 교환해야 한다. 이때는 암시장환율보다 훨씬 낮은 공식 환율이 적용된다. 하지만 리튬 기업들이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계약한 납품 업체들과 고용인들은 제품과 서비스 비용에 실시간으로 바뀌는 암시장 환율을 적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시약이나 기계 같은 물품을 외국에서 들여오려면 페소를 달러로 바꿔야 하는데, 공식 환율을 따르면 페소를 사는 가격과 페소를 파는 가격의 차이가 크다. 따라서 기업은 수출할 때는 달러를 페소로 바꾸면서, 수입할 때는 페소를 달러로 바꾸면서 손해를 본다. 달러를 그냥 은행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이상적 상황과는 차이가 크다. 하지만 이렇게 개별 기업에는 불리한 상황이 아르헨티나 화폐에는 유리하게 작용해서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p193)
몇 주가 지나 거리의 긴장감이 가라앉았을 즈음 모랄레스가 망명 후 처음으로 응한 인터뷰가 공개되었다. 그는 리튬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전적으로 확신했다. 모랄레스는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쿠데타였다. 산업화된 국가들은 경쟁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미국 대신 중국의 지원을 받아 리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한 이후 워싱턴의 용서를 받지 못했고, 그 와중에 볼리비아는 자원의 규모를 앞세워 리튬 가격을 주도하는 국가로 성장 중이었다고 설명을 이어 갔다. (p205)
하지만 볼리비아만큼 '리튬은 새로운 석유'라는 발상이 국민감정이나 국가 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리튬을 이용해 볼리비아를 풍요롭게 한다는 꿈은 모랄레스가 대통령에 취임한 2006년부터 시작되어 이 정권을 정의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볼리비아인들에게 리튬은 자국의 GDP를 끌어올리는 수단 이상이었다. 볼리비아는 천연자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모랄레스는 이를 극복하려 했다. 랭커스터대학교 명예교수인 리처드 M. 오티Richard M. Auty는 1993년 발표한 중요한 저서 《광물 경제의 지속적 발전Sustaining Development in Mineral Economies》에서 천연자원에서 비롯된 단점이 장점보다 많은 나라들을 묘사하기 위해 '자원의 저주 resource curse'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대표적인 예로 볼리비아를 들었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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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ery 리튬은 분쟁 광물 conflict mineral이 아니다. 세계 어디에도 리튬 채굴에서 나온 수익으로 무장 단체를 지원하는 곳은 없다. 재래식 채굴이나 아동노동이 이뤄지지도 않는다. 매장층의 위치와 복잡한 채굴 방식 때문에 이런 상황이 변할 것 같지도 않다. 다만 배터리에 사용되는 금속 중 두 번째로 중요한 코발트는 좀 다르다. 시장에 공급되는 코발트의 약 60퍼센트가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중앙아프리카 국가 콩고에서 나온다. 콩고는 삶의 질, 사업 환경, 문해력, 1인당 GDP 등에 관한 국제 지표에서 보통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가장 부패한 나라 순위에서는 정상을 차지한다. 이 나라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겪었던 내전은 연루된 국가와 비국가 세력의 수, 피해자의 수 때문에 '아프리카대전 Great African War'으로 불리곤 한다. 이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게릴라 세력이 활동하는 등 콩고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콩고의 면적은 대략 서유럽 크기지만 인구는 독일과 비슷하다. 오랫동안 계속된 갈등과 질병으로 콩고인의 중위 연령은 18세 전후를 오간다. 이 나라의 수도인 킨샤사Kinshasa는 완전히 서쪽에 치우쳐 있고 중부는 빽빽한 숲으로 덮여 있다. 르완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부는 몇십년간 치열함의 차이만 있었을 뿐 계속 게릴라전의 무대가 되어왔다. 콩고에는 사용할 수 있는 도로가 거의 없어 인구 대부분이 배나 비행기로 이동한다. 밀림, 늪, 강과 같은 자연적 장애물이 존재할 뿐 아니라 기반시설도 부족해 나라를 하나로 묶기가 쉽지 않고 동부 전역에서는 수도에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이러한 환경은 콩고 정치계에 팽배한 지역 배타주의 regional particularism로 이어졌다. 연장선에서 현재 콩고 대통령인 펠릭스 치세케디Félix Tshisekedi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콩고의 26개 주 중 그를 지지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보편적이다. 콩고 정치계의 거물들과 전임 대통령들은 보통 지방에 굳건한 권력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p233-234)
삽하나들고 광산으로 향하는 사람들 콩고가 수출하는 코발트의 25퍼센트는 재래식 채굴로 생산된다. 재래식 채굴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삽, 끌, 곡괭이 같은 가장 기본적인 도구만 이용하며 보통 건강과 안전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의 통계에는 속임수가 많지만, 다양한 비정부기구가 제공하는 데이터에 따르면 코발트 채굴 지역에서만 100개 이상의 재래식 광산이 운영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재래식 광산을 방문하면 보호장비를 갖추지 않은 일꾼들이 50미터 길이의 폭이 좁은 지하터널로 들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콩고에서는 법적으로 16세부터 노동할 수 있으므로, 광부 대부분이 무척 젊다. 지하 깊은 곳의 열기는 견딜 수 없을 정도고, 매일 들이마시는 먼지의 양은 호흡기에 다양한 문제를 유발하는 '경금속 폐 질환hard metallung disease'으로 이어질 수 있는 수준이다. 이 모든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콩고의 광산들에서 인권침해를 조사해 온 대부분의 비정부기구는 재래식 채굴의 완전 금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고정소득을 만들다른 기회가 없는 나라에서 너무 많은 이가 생계를 재래식 광산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탕가에서만 적게는 7만 명, 많게는 12만 명이 재래식 광산에 종사한다는 추정치도 있다. 물론 콩고의 다른 지역에도 같은 방식으로 주석이나 금, 콜탄collan을 생산하는 광산이 많다. (p237)
국제법은 기업이나 개인뿐 아니라 국가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법과 다르다. 다만 해당 내용을 국내법에 통합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각 국가에 맡긴다는 점에서 일종의 지침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OECD의 '지속 가능한 광물 공급망을 위한 기업 실사 지침Due Diligence Guidance for Responsible Mineral Supply Chains'도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비슷한 내용의 법으로, 아마 미국 정부 차원에서 분쟁 광물을 공급받은 기업에 상당한 재정적 불이익을 안길 수 있는 유일한 규제는 도드-프랭크법Dodd Frank Act 일 것이다. 이 법은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 속에서 파생 시장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물론 분쟁 광물에 관한 내용�� 곁가지에 가깝지만, 이 ���의 전체 목적에 부합한다. 그리고 곁가지치고 무척 강력하다. 미국의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모든 기업은 콩고나 인접 국가에서 생산된 분쟁 광물을 활용할 시 자신들이 지급한 대금이 현지 무장단체의 자금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실사를 벌여 밝혀내야 한다. (p240)
다행히도 분쟁 광물을 둘러싼 쟁점이 점점 알려지고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재정적 위험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평판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애플이나 BMW 같은 기업은 무형의 브랜드 가치가 회사 전체의 가치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세계적인 컨설팅 기업 인터브랜드Interbrand는 BMW의 브랜드 가치를 410억 달러로 평가했다. 이 자동차 생산 업체는 콩고산코발트와 거리를 두는 대신, 오스트레일리아와 모로코의 광산에서 코발트를 직접확보하려 한다. 안전한 동시에 영리한 전략으로, 이제 BMW는 "우리는 콩고에서 벌어지는 아동노동이나 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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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증가한 재생에너지 설비용량 중 절반 가까이가 중국의 몫이다. 하지만 중국의 에너지 소비욕을 자극하는 것은 세계 최대의 인구뿐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나라의 거대한 산업 기반이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중국이 더 친환경적이지만 동시에 더 산업화된 나라, 예를 들어 독일과 같은 수준에 이르려면 매우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중국 내 배터리 생산량과 석탄발전량을 동시에 고려하면, 킬로미터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전기자동차가 전통적인 내연기관차보다 더 환경을 오염시킨다고는 할 수 없어도 동등한 수준이라고는 주장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환경도 바뀌고 있다. 2012년 미국에서 평범한 전기자동차가 연비가 뛰어난 내연기관차보다 이산화탄소를 덜 배출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020년 들어 거의 모든 지역이 그렇게 바뀌었다. 즉 당신이 선택한 전기자동차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어떻게 달라질지 결정한다. 다만 온실가스 배출량이라는 기준으로 살펴보면 환멸이 느껴질 정도로 그 차이가 작을 수 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 테슬라의 신형 전기자동차를 탄다면 가장 연비가 좋은 내연기관차를 탈 때와 비교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60퍼센트나 줄어들 것이다. (p254)
자동차 엔진을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원흉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실수일 수 있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상대적으로 높아도 사람들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 하지만 함께 배기관을 빠져나오는 미세먼지나 이산화질소는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미세먼지는 코와 폐의 자연 방어막을 쉽사리 통과한다. 기후변화는 본질적으로 세계적 현상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온실가스의 배출 총량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개인 건강의 차원에서는 당신 주위에 전기자동차가 많은지, 많지 않은지가 실제로 무척 중요하다. 이산화질소는 하루 이상 공기 중에 머무르지 않지만, 멀리 이동하지도 않는다. 가장 작은 입자도 처음 배출된 곳에서 겨우 몇 미터밖에 퍼지지 않는다. 이러한 미세먼지는 휘발유나 디젤로 덮인 금속들을 혈액으로 운반해 암을 유발하고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킨다. 이산화질소와 미세먼지 농도가 기준치보다 훨씬 높은 지역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폐활량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따라서 전기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이 온난화를 멈추는 데 도움이 될지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해도 당신과 당신의 아이가 숨 쉬는 공기의 질을 높여줄 것은 분명하다. (p255-256)
광업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질적으로 물리력을 동원해야만 자연의 보물들을 문명의 건설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은 광업과 화학 산업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고 지니는 모든 물건은 땅에서 파낸 원소들을 재료 삼아 다양한 방식의 화학 처리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것이다. 배터리 생산과정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도 다를 건 없다. 중요한 것은 정보와 감독이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리고 환경보호의 측면에서 해악이 덜한 쪽을 택하기 위해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또한 독립적인 관리, 감독과 그 결정에 힘을 실어줄 수단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이러한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전반적으로 제대로 된 정보 없이 실체가 거의 없는 친환경 구호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반대쪽 끝에서는 환경 운동가들이 대안도 없이 상업적 활동을 막아서며 전진한다. 현재의 체계는 대부분 이렇게 서로 반대쪽을 향하는 힘으로 가득하다. 이윤만을 좇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근본주의적 환경 운동가들과 충돌하는 와중에, 균형에 도달하지 못한 채 산업을 예의주시하게 하는 정도의 결말에 이른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제한하기 위해 중도를 찾는 괴짜나 이단아, 기업가들도 있다. 화학 처리까지는 거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채굴만은 멈추려 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주제는 바로 지하자원 채굴을 도시 광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p263)
제인 제이컵스Jane Jacobs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s>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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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섬의 개척자, JX금속 일본은 다른 금속들을 재활용하는 데 성공한 반면, 리튬이나 코발트의 재활용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전기 모빌리티로의 전환을 공식화한 일본은 2050년부터 자국 내 자동차 생산 업체에서 전기자동차만을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의존하면서 배터리만으로 가동되는 전기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이 더는 확대되지 않고 있다. 일본인들은 중국이나 EU, 미국의 소비자들보다 완전한 전기자동차의 구매를 꺼리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현금을 대체하는 간편 결제 시장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은 제일 먼저 현금 대신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나라 중 하나지만, 현재 이 나라의 간편 결제 비율은 영국이나 한국, 폴란드 보다 낮다. 도요타나 혼다 같은 일본의 주요 자동차 생산 업체는 오랫동안 리튬 이온 배터리로의 전환을 꺼렸다. 예외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도요타의 프리우스는 2019년 생산된 일부 모델에 니켈 메탈 하이브리드 배터리를 사용했다. 지난 10년간 전기자동차 시장에서 점유율이 급감한 배터리다. (p271)
배터리의 내구성을 논하는 전문가들은 '주기cycl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주기는 다소 까다로운 개념인데, 배터리를 원래 용량만큼 완전히 사용해 방전되면 한 번의 충전 주기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리튬 이온 배터리의 용량은 일정하지 않고 사용할수록 줄어든다. 전기자동차와 일부 고급 전자기기는 배터리가 초기 용량의 75퍼센트에서 80퍼센트는 되어야 계속 쓸 수 있다. 용량이 이보다 줄어들면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 주기의 개념으로 돌아가 보자. 오늘 배터리 용량의 70퍼센트를 사용하고 밤새 완전히 충전한 뒤 다음 날 저녁까지 30퍼센트를 더 사용한다면 한 번의 주기가 끝난 것이다. 중간에 충전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바로 이렇게 계산한 '주기 수명cycle life'이 대개 배터리 성능의 핵심으 로 언급되곤 한다. (p273)
이처럼 일련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재활용 과정에 또 다른 이점을 제공한다. 재활용 과정이 자동화되고 간소화될수록 비용은 줄어든다. 그리고 비용이 줄어들수록 재활용이 보편화된다. 재활용 비용을 낮추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배터리의 형태와 크기가 각양각색이라는 사실이다. 컴퓨터나 태블릿, 스마트시계의 무수히 많은 모델에 맞춰 배터리의 형태가 달라지는 전자기기는 논외로 하더라도, 전기자동차 배터리 또한 다양한 모델이 있다. 전기자동차는 아주 커다란 물건이니 배터리의 형태와 크기만이라도 표준화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상대적으로 젊은 산업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자 각축전을 벌이는 탓에, 전기자동차 생산 업체들은 자신들의 모델에 가장 잘 맞는 형태의 배터리를 개발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제품 간 표준화는 주로 성숙한 시장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p276)
하지만 애플이 만든 데이지는 자사 제품만 속속들이 알고 재활용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배터리가 들어가는 제품의 생산 업체에 재활용 의무를 지운 중국 법이 합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배터리에 표준화된 일련번호를 붙이는 것도 무척 유용하다. 미래의 로봇들이 자신들의 불완전한 '시각'에만 의존하는 대신 일련번호를 해독해 관련 정보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78)
반면 거린메이 같은 회사도 있다. 거린메이는 재활용 업계의 거물이다. 이 회사는 매년 약 400만 톤의 폐기물을 처리한다. 플라스틱부터 메인보드까지 모든 것을 재활용하는 거린메이에서 배터리 재활용은 다양한 사업 분야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총알을 위한 완벽한 금속'으로 알려진 텅스텐 같은 희소금속과 다양한 최첨단 전략산업에 활용되는 희토류도 회수한다. 거린메이의 수집망은 3000킬로미터에 걸쳐 있는 중국의 11개 성을 아우른다. 이 회사는 남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에 투자함으로써 육로와 해로를 통해 아시아를 아프리카, 유럽과 연결하고, 자국의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도 한몫했다. 재활용 산업은 대단히 화려하게 포장되는 분야가 아니어서 거린메이 같은 회사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이 회사는 약 30만 톤의 폐배터리를 처리할 수 있다. 2020년 중국에서 폐기된 리튬 이온 배터리의 양이 약 50만 톤인데, 하나의 기업에서 소화하기에는 상당한 양이다. 비교를 위해 예를 들면, 유럽에서 가장 큰 재활용 업체라도 폐배터리를 1만 톤도 처리하지 못한다. 게다가 관련 시설을 이미 갖췄거나, 확보하기 위해 투자하고 있다고 공개한 유럽 업체들은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북아메리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업체들이 입맛을 다시며 유럽과 미국의 재활용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이유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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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는 곧 힘이다. 전기자동차 생산 업체는 동력전달장치의 성능을 더 개선하기 위한 연구개발 목적으로 데이터가 필요하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배터리 성능을 실시간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를 배터리 관리 시스템battery management system이라 한다. 배터리의 뇌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적어도 양극재만큼은 하드웨어적 측면에서 성능이 극한에 달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배터리 관리 시스템을 최적화하면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정도로 성능을 쥐어짤 수 있다. 그러려면 더 많은 데이터를 활용해야 한다. 전기자동차 생산 업체들이 자신들의 제품을 모니터링하는 이유 중 하나다. 오늘날 이론적으로 이용자의 지리상 위치와 운전 행태에 관한 데이터까지 공유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생활 침해 가능성에 관한 논의 또한 벌어지고 있다. 전기자동차 생산 업체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귀중한 데이터를 중고 배터리를 판매하는 온라인 플랫폼뿐 아니라 정부와도 기꺼이 공유할 것이다. 어쨌든 풍부한 데이터는 빠르게 성장하는 이 산업에서 경쟁 우위를 제공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내부자들은 자동차 업계의 로비가 입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일부 국가에서 배터리 재활용과 재사용을 위한 모니터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라고 증언했다. 리튬 이온 배터리의 재활용을 둘러싼 미래 환경은 결국 입법, 폐배터리의 확보 가능성, 국가 간 운송의 타당성, 시장 구조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폐배터리를 땅속에 묻는 대신 다른 어딘가에서 다시 활용할 기술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편익을 최대화하면서 환경까지 보호하기 위해 이 기술을 어떻게, 또 얼마나 사용할지는 온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p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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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재, 음극재, 전해질의 하모니 전기비행기와 전기화물선의 성능 개량이 날개를 달고 전기자동차가 주행거리를 둘러싼 불안을 완전히 씻어내려면 결국 '리튬 이온의 화학 반응'이라는 틀 자체를 넘어서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리튬 이온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리튬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해야 더 뛰어난 배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먼저 배터리가 폐쇄시스템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폐쇄 시스템에서 한 가지 요소를 바꿀 때는 이 변화가 다른 요소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 변화가 발전을 의미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상식인 듯하지만, 배터리의 개별 요소들이 발전해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때마다 놀랄 만큼 자주 잊히는 규칙이다. 더 좋은 양극재가 있다고? 훌륭해! 하지만 새로운 양극재가 기존의 전해질과 함께 더 나은 성능을 보여줄지는 미지수다. 크게 보면 배터리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핵심 요소가 양극재, 음극재, 전해질 세 가지밖에 없다. 에너지 밀도, 전력, 충전 속도, 안전성 등 배터리 성능을 향상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더 좋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물론 이 분야는 경쟁이 아주 치열해서 기업들은 배터리를 조금이나마 더 발전시키기 위해 다른 주변적 요소들까지 개선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돌파구는 저 세가지 요소에서만 나올 것이다. (p307)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고등학교 수준의 기초 화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금속은 전자를 내보내려 열심이고 비금속은 전자를 받아들이려 한다는 사실 정도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관찰��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게 한 원소가 전자들을 내주고 다른 원소가 그 전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전자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전자가 움직이는 것이 곧 전기다. 이제 전기의 실체를 알았다. 더 나아가 전자를 잃고 얻는 과정을 이온화 ionization라 한다. 원자가 같은 수의 전자(-)와 양성자(+)를 가지고 있으면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다. 하지만 배터리 안에 금속과 비금속을 함께 넣으면 (전자의 이동이 발생하므로) 이온화가 일어난다. 금속은 전자들을 잃고 비금속은 전자들을 얻는다. 균형을 잃고 전자가 양성자보다 더 많아지거나 적어진 원자들을 이온이라고 한다. 그래서 리튬 이온 배터리라는 명칭이 적절한 것이다. 이온에는 음이온과 양이온이 있다. 음이온은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보다 전자가 많은 원자고, 양이온은 중성인 상태보다 전자가 적은 원자다. 전자들은 언제나 음전하를 가지므로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인 원자에 전자를 더하면 해당 원자가 음이온으로 변한다. 따라서 강력한 배터리를 만들려면 주기율표의 어떤 원소(금속)들이 전자를 기쁘게 내주는지 그리고 어떤 원소(비금속)들이 전자를 기꺼이 받아들이는지 찾아보고, 두 종류의 원소를 어떻게 조합할 때 가장 뛰어난 성능을 발휘할지 고민해야 한다. 순수하게 이론적인 활동이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화학과 물리의 기본 법칙을 적용하는 것만으로 배터리가 어느 정도의 성능을 보여줄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왜 리튬을 배터리에 사용하는지, 왜 미래의 배터리에 더 많은 리튬을 넣으려 하는지, 왜 기업들과 연구자들이 다른 금속 대신 황이나 소듐에 기반을 둔 배터리를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지 설명해주므로, 대단히 실용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어쨌든 주기율표에는 선택 할 수 있는 금속이 상당히 많다. (p308-309)
에너지 밀도를 높여라 충전 한 번에 노트북을 며칠씩 사용할 수 있게 하려면, 전기자동차가 더 멀리 이동할 수 있게 하려면, 전기비행기가 런던에서 바르셀로나까지 날아갈 수 있게 하려면 에너지 밀도가 높은 배터리가 필요하다. 이것이 배터리 연구의 성배다. 에너지 밀도는 배터리의 질량이나 부피 대비 저장된 에너지의 양으로 표현된다. 에너지 밀도는 높이고 무게는 줄이려면 주기율표에서 가장 위에 있는 몇 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 원자질량이 가벼운 금속과 비금속 원소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배터리 내부를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할 이온들도 필요하므로 선택이 더욱 제한된다. 마지막으로 어떤 원소는 질량에너지 밀도가 높더라도 부피 에너지 밀도는 낮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무게보다 공간에 더 제약이 많은 자동차에 들어갈 배터리라면 부피 에너지 밀도를 살펴야 한다. 자동차에는 어느 정도 표준화된 크기가 있고, 누구나 배터리가 승객과 짐을 위한 내부 공간을 되도록 덜 차지하길 바랄 것이다. 반대로 비행기에서는 질량에너지 밀도가 부피 에너지 밀도보다 중요하다. 배터리가 가벼워야 이륙, 비행, 착륙의 모든 과정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주기율표에 있는 원소들은 질량에너지 밀도와 부피 에너지 밀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이상적인 배터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무척 어렵다. 모든 목적에 맞는 규격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용도와 성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전기자동차나 전기비행기에 잘 맞는 배터리 물질을 개발해야만 사업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 추운 우주에서 작동하는 인공위성에 동력을 공급 하는데 가장 탁월한 배터리 물질을 만들 수도 있다. (p3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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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밀도를 다룰 때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첫 번째는 에너지 밀도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왜 '와트시'일까. 가장 쉬운 이해는 자동차에 비유하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힘과 시간의 곱이다. 이때 '와트'는 힘의 단위고, '시'는 힘이 작용한 시간의 단위다. 자동차 한 대가 일정한 거리, 예를 들어 100킬로미터를 이동한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속력을 내는지에 따라, 바꿔 말하면 얼마나 많은 힘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1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결정된다. 배터리의 경우에는 거리를 시간으로, 속력을 힘으로 바꿔 생각하면 한다. 에너지 밀도가 킬로그램당 100와트시인 1킬로그램짜리 셀을 전력 소비량이 100와트인 냉장고와 연결하면, 셀의 에너지로 냉장고에 한 시간 동안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셀의 무게가 2킬로그램이라면 냉장고를 두 시간 동안 가동할 수 있다. 에너지 효율이 더 높거나 더 나쁜 냉장고라면, 예를 들어 전력 소비량이 200와트인 냉장고라면 1킬로그램짜리 셀로는 전력을 30분밖에 공급할 수 없다. (p315)
두 번째는 배터리 세계에서는 항상 셀 하나나 배터리 하나 단위로 에너지 밀도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전기자동차에 전력을 공급하는 배터리는 수천 개의 셀로 구성된다. 일반적인 에너지 밀도는 개별 셀 수준에서 단위질량당, 또는 단위부피당 에너지를 측정한 것이므로 배터리 수준에서 측정되는 것보다 항상 더 크다. 배터리는 상당한 무게와 부피를 더하는 각종 연결 장치와 전선, 감지기, 냉각 기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선과 감지기 같은 요소에는 에너지가 저장되지 않으므로 배터리 성능에는 이바지하지 못하고 무게와 부피만 늘릴 뿐이다. 바꿔 말해 저장하는 에너지의 양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무게와 부피여서 에너지 밀도를 떨어뜨린다. 셀 수준의 에너지 밀도와 배터리 수준의 에너지 밀도를 비교해 볼 예로, 앞서 언급했던 테슬라의 모델 3를 살펴보자. 이 전기자동차의 배터리를 구성하는 각 셀의 에너지 밀도는 킬로그램당 약 260킬로와트시고, 전체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는 킬로그램당 약 160와트시로, 킬로그램당 100와트시의 차이가 난다. (p316)
셀에서 배터리로 가면서 에너지 밀도는 감소하지만, 킬로와트시당 달러로 측정되는 가격은 높아진다. 1킬로와트시는 1000와트시와 같다.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 통상적인 표현대로 에너지 밀도를 와트시로 표현했다. 배터리 가격 또한 수천 와트시당 달러, 또는 킬로와트시당 달러로 이야기된다. 셀에서 배터리로 가면서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논리적이다. 배터리 가격을 책정할 때는 그 구성 요소들, 즉 앞서 언급했던 연결장치, 전선, 감지기 등의 가격을 반영해야 한다. 반면 셀 수준에서는 셀자체만 있을 뿐이다. 배터리 가격은 생산 업체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배터리에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했는지, 이 화학물질의 재료가 무엇인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양극재에 코발트와 니켈처럼 비싼 물질을 많이 사용할수록 가격이 올라가고, 인산철처럼 저렴한 물질을 사용할수록 가격이 내려간다. 배터리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면, 우리가 오랫동안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가격을 (배터리 수준에서) 킬로와트시당 100달러 이하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리튬을 이용한 일부 양극재(가령 LFP)에서는 이런 목표가 달성되었으나, 니켈을 이용한 양극재의 경우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내는 배터리의 가격이 킬로와트시당 150달러 근처에 머물러 있다. 킬로와트시당 100달러라는 목표는 무척 중요하다. 이러한 가격대를 유지해야만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차에 비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p317)
-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 ' 배터리 전쟁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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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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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ww.amazon.com/Piano-Shop-Left-Bank-Discovering/dp/0375758623 )
고객이 되려면 기존 고객을 찾아야 한다는 묘한 관행은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도 힘들었다. 이제 나는 이 어수룩해 보이는 가게가 간판에서 말하는 가게, 다시 말해 피아노 부품가게 이상이라고 믿고 있었다. 젊은 남자의 음모를 꾸미는 듯한 분위기에 감염되어 내 호기심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마치 나도 모르는 새에 지하마약거래에 말려든 느낌이었다. 또는 수수께끼의 인물들, 암호로 된 지침, 불확실한 보답 등이 등장하는 모호한 탐구에 나선 것 같기도 했다. (p21)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친구 부탁이었거든요." 뤼크는 말을 끊더니 사과하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사실 잘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피아노죠." 그의 말로 볼 때 잘 만든다는 것은 피아노가 전부인 이 사람에게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다른 요소들은 무엇일까? 디자인? 재료, 마감, 평판? 무엇 때문에 어떤 피아노는 훌륭하고, 어떤 피아노는 잘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것일까? 그 답은 물리적인 속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분명했다. 마치 피아노에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 나름의 기질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뤼크의 태도 때문에 나는 피아노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p27-28)
"네, 아주 아릅답죠. 가장 오래된 건 1837년에 만든 거예요." 뤼크는 온화와 경멸이 섞인 표정으로 피아노들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가 아니라 박물관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죠. 저것들은 이 악기 역사의 한 부분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죽은 거죠.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살아 있는 피아노예요."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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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크는 피아노를 음악이라는 예술을 올려놓고 숭배할 제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러나 이 악기를 이용하고 이것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하는 진지한 음악가들에게는 깊은 존경심을 품었다. 노골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누군가가 소유는 했지만 친 적은 거의 없는 피아노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 텔레비전이나 전축처럼 피아노를 가족의 거처에 불가결한 물건으로 여기던 부르주아적 감수성의 흔적인 셈이었다. 뤼크는 이것을 비극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광택은 여전한데 친 적은 거의 없는 피아노가 오면 큰 기쁨을 느꼈다. "이제 가구로 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 수 있겠네요." 뤼크는 웃음을 머금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왠지 그가 고아원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맡은 아이가 누군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그 아이들에게 감상과는 거리가 먼 희망을 품는 듯했다. (p37)
뤼크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 그보다 더 역겨운 것으로, 자신의 음악적 허세를 과시하려고 이 위대한 악기를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피아노가 그의 공방으로 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자주 보는 모양이었다. 곧 알게 되었지만 그는 재능 있는 피아노 조율사로도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지식이 그 수준이라면 큰 살롱 끝에 메르세데스를 주차시켜 놓은 것 하고 뭐가 달라!" 뤼크는 욕을 퍼부었다. "오늘은 적어도 사백 제곱미터는 될 것 같은 아파트에 있는 스타인웨이 콘서트 그랜드를 조율하고 왔어요. 하지만 내 맹세하는데, 그 피아노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쳤을 거예요. 주인 말이 아침에 일어나 그걸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대요. 그래서 마치 호로비츠라도 당장 들어와 연주할 것처럼 덮개를 열어놓은 채로 놔두고 있더군요. 차라리 스위스 은행통장이나 주식증서를 들여다보고 있지!" 그의 이런 경멸에는 일종의 서글픔이 뒤따랐다. 그것은 연주되지 못한 채 서 있어야 하는 운명을 지닌 피아노를 향한 것이었다. "훌륭한 좌담가를 독방에 가두어놓은 꼴이지 뭐예요." 뤼크는 한번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피아노가 설사 새것처럼 유지되고 기술적으로도 정비가 이루어진다 해도, 일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p38)
뤼크는 피아노를 얻은 방식을 이야기할 때는 늘 모호한 표현을 썼다. 절대 '샀다'거나 '거래했다'거나 '경매에서 낙찰받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는 피아노가 '나한테 왔다'거나 '도착했다'고 말했다. 마치 문간에 천사가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하면 당연히 그가 하는 거래의 비밀이 유지되었다. 실제로 악기의 출처를 감추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표현을 쓰는 이유의 일부일 뿐이었다. 피아노의 '도착'을 언급하는 방식은 사실 그가 느끼는 감정과 일치했다. 피아노는 한동안 그와 함께 살러 온, 떠날 때까지 그가 보살펴야 할 영혼이었다. (p41)
그 자그마한 크기와 세세한 부품의 아름다운 배치를 보자 마음속에서 한 단어가 꿈틀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그럼에도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당돌. 나는 이 피아노가 당돌해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데렐라 같은 피아노였다. 못된 윗사람들에게 들볶이다가 결국 승리를 거두는 패배자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이런 논리를 따르자 베흐슈타인은 매력 없이 오만해 보이기만 했다. 베흐슈타인은 초대를 받아 현관으로 무도장에 들어온 피아노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 작은 피아노가 어쩐지 좋고, 따라서 내 가족에게 맞는다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뤼크는 내게서 서서히 깨어나는 욕망을 이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일까? (p45)
나는 피아노 의자에 앉으며 뤼크에게 웃음을 지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홀렸다고 해도 좋았다. 갑자기 이 위대하고 비실용적인 거대한 물건이 내가 너무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영토로 들어가는 관문이 된 것이다. 아직 건반에 손을 대기도 전에 뭔가가 '그래, 이거야!' 하고 말했다. 물론 뤼크를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 피아노를 사랑하고 싶어한다는 것, 내 삶에 음악을 다시 불러 들이고 싶어한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나는 음계를 몇 개 쳐보았다. 그러다 화음 몇 개를 이어가보았고, 마지막으로 좀더 자신감을 가지고 아르페지오를 몇 개 쳤다. 음들이 울려 퍼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전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슈팅글의 액션은 훌륭하고 깔끔했다. 그러나 건반을 움직이는 데 약간 힘이 들어갔다. 스타인웨이가 자랑하는 비단결 같은 느낌, 다른 유명한 제품의 벨벳 같은 촉감은 전혀 없었다. 그래, 이 피아노를 치는 것은 신체를 열심히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거의 운동선수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 결과 만들어진 음색은 아주 달콤하고 풍만했다. 강건함과 섬세함이 묘하고 놀랍게 결합되어 있었다. (p46)
"어떤 피아노를 살까 고민할 때 피아노에 우리 자신의 많은 부분을 투사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당연히 그렇게 되죠. 그게 피아노의 아름다움 아닌가요. 이건 벽장에 넣어둘 수 있는 플루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가 아니거든요. 우리는 피아노와 함께 살고, 피아노도 우리와 함께 살죠. 이건 덩치도 커서 무시해버릴 수가 없어요. 마치 가족의 한 사람처럼 말이에요. 따라서 딱 맞는 것이어야 해요!" (p48)
마침내 우리 둘만 있게 되었군. 마치 할리우드의 거창하고 낭만적인 장면을 흉내내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피아노를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이 가장 강했다. 나는 천천히, 꼼꼼히, 느긋하게 피아노를 살피는 호사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바라던 것을 얻는 과정에서 잠재적인 재난을 피해 살아남은 것이 기뻤다. 이제 나는 긴장을 풀고, 뤼크가 말한 대로, 내 인생에 도착한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 피아노를 구한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나를 찾아온 느낌 이었다.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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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방에 습관적으로 들르는 것이 어린 시절 이후 자라난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매력을 느꼈다. 첫 기억은 희미하지만 강렬하게 채색되어 있다. 현실-다른 것과는 완전히 달라 보이던 반짝거리는 커다란 가구-과 상상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낯선 거인 앞에 앉은 사람이 그냥 손가락을 아래위로 움직이기만 해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일까? 피아노는 어떤 파악할 수 없는 과정에 따라 음악을 발산해내는 거대하고 놀라운 물체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이 검고 흰 띠를 누르는 것이, 심지어 주먹으로 두드리는 것조차도 엄청난 만족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예상치 못한 밝은 소리였다. 때로는 놀랄 정도로 큰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어른들이 거대한 동시에 품위가 있는 하나의 기구, 유일한 기능은 소리를 내는 것뿐인 기구를 고안해 냈다는 것이 내게는 상상하기 힘든 일로 여겨졌다.파리에서 중고 피아노를 사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원을 완성한 셈이다. (p64-65)
우리 동네는 파리 좌안의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분위기는 여러 면에서 파리의 다른 지역들만큼 뜨겁지 않다. 센 강은 도시를 대체로 비슷하게 북과 남으로 반반씩 나누어놓는다. 강을 따라 동에서 서로 흘러가다보면 남쪽 반은 왼쪽에 있어 좌안이라고 부른다. 도시의 이 지역은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상업지구보다는 주거지역의 좁은 거리, 수많은 공원, 파리 대학의 도시 캠퍼스 몇 개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지금은 그 많은 부분이 고급스럽게 변했고 학생들의 가난은 푸치니의 <라보엠>만큼이나 먼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 지역에서는 예술가와 장인, 기능공과 숙련 노동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 카페나 플라타너스가 들어선 가로수 길은 파리의 다른 많은 지역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이면도로와 접한 안마당들은 다른 데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비밀을 감추고 있다. (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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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랑이 줄무늬 그랜드를 잃은 것을 보상하려고 짐짓 열을 내는 게 분명했다. 뤼크는 방을 둘러보았다. 업라이트와 그랜드, 당당한 피아노와 덜 알려진 상표들을 훑어보더니, 이윽고 나를 보았다. "가끔은...." 뤼크는 거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어깨를 으쓱했다. "..... 그냥 크기가 맞는 걸 가질 수밖에 없어요." (p83)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없다면 음악이 아니란다." 펨버튼 선생님은 대답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미 그런 정서는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발표회날 밤에 펨버튼 선생님 제자들의 몸을 전기처럼 훑고 지나가는 일종의 통제된 히스테리는 어쩌면 그 가운데 한두 명에게는 쓸모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경험을 쌓는 셈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전문 음악가가 될 생각이 없는 우리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너무 비싼 대가였다. 왜 그냥 우리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연주하면 안 되는가? 부모는 당연히 자신의 돈이 값지게 쓰이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며, 음악가 생활을 향한 자신의 희망과 갈망이 아주 쉽게 자식에게 투사된다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음악은 함께 나누는 멋진 것이 될 수도 있다. 연주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단둘이만. 그렇다고해서 음악을, 그리고 그 작곡가를 깊은 곳에서부터 알아가는 순수한 기쁨을 위해 혼자서 연주한다는 생각을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 (p86)
"이제 사드 카하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초기 곡을 들어보겠습니다." 펨버튼 선생님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선생님이 말하는 이름과 �� 이름을 간신히 연결할 수 있었다. 내 다리는 흔들흔들 친구의 부모 형제들 사이에 난 좁은 통로로 나를 실어갔다. 나는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묘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건반을 아무렇게나 두들겨대면 사람들이 내가 어려운 곡을 연주한 것으로 여기고 넘어 가줄까? 하지만 내가 진짜로 쳐야 할 곡은 달의 뒷면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곡이 어떻게 진행되더라? 나는 자문했다. 그건 둘째치고, 시작은 어떻게 하더라? 내 얼굴은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줄로만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은 주먹으로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못한 채로 몇 초가 지나가자 펨버튼 선생님이 옆쪽에 서 있다가 다가와서, 피아노 의자의 높이를 조절한다는 핑계로 청중에게 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가린 다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귀에 대고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단조로 시작하잖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펨버튼 선생님을 보았다. 펨버튼 선생님은 피아노가 제대로 조율되어 있는지 확인하듯이 손을 건반에 올려놓더니 그 화음을 살짝 쳤다. 그 음들을 듣는 순간 마법이 풀렸다. 내가 아는 곡이야! 나는 혼자 생각했다. 내 눈이 반짝거리자 펨버튼 선생님의 손이 등을 세게 두드렸다. 펨버튼 선생님이 물러나자 나는 건반이 적이라도 되는 양 공격하여, 실수 하나 없이 곡을 그대로 끝까지 연주해버렸다. 이 말은 그냥 악보에 있는 음표들을 다쳤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해석은커녕 프레이징도 다 무시해버렸다. 아마 평소 속도의 두 배로 쳐버렸을 것이다. 끝내고 나자 유달리 까다롭기는 하지만 아무런 의미 없는 곡예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서커스의 동물이 느꼈을 법한 감정이 몰려왔다. 이런 터무니없는 행사를 가지고 그렇게 법석을 떠는 게 너무 놀라웠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 실망감도 컸다. (p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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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순한 움직임에서 얼마나 놀라운 결과가 생기는지. 우리의 손가락과 손과 팔이 어떤 미묘한 힘과 합쳐져 건반에 집중되면 온갖 종류의 소리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피아노의 비밀스러운 내부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 구조를 더 알고 싶었다. 실용적인 측면 때문이 아니라 그 미학 때문에. 나는 이 큰 기계가 어떻게 간단한 움직임을 그렇게 섬세하게 수용하여, 셀로니어스 몽크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발레를 추는 듯한 손에 만개한 목소리를 부여하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뒷방에 가끔 흩어져 있는 기계조각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뤼크의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피아노가 소리를 내는 방식의 기본사항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p106)
피아노의 진동하는 현은 혼자서는 약하고 울림이 없는 소리를 낸다. 따라서 현의 진동을 증폭시킬 수단을 찾아야 한다. 그 해결책은 현의 에너지를 울림판이라고 부르는 크고 얇은 나무판에 옮기는 것이다. 울림판은 표면이 진동하면서 소리를 증폭한다. 결과적으로 거대한 막이 브리지를 통해 현에 닿아 있는 셈이다. 브리지란 울림판 위에 붙어 있는 길고 가는 나무돌기로, 그 위쪽 끝이 현과 밀착하여 그 움직임을 밑의 막에 전달한다. 이 대목에서 섬세한 목공작업이 요구된다. 여기에서는 나무에 대한 감각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나무가 노래를 불러 악기가 생명을 얻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무의 질을 느끼는 이런 감각이 피아노 제조의 선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스트라디바리나 과르네리 같은 위대한 현악기 제작자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나무는 소리에 말 그대로 몸을 떨며, 그 소리를 섬유조직을 통해 전달한다. (p110) 110
피아노를 연주할 때, 특히 큰 소리로 연주할 때는 목재 구조 전체가 현이 내는 소리와 공명하며 진동하고 울린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때 손을 올려놓으면 피아노가 마치 생물 같다는 느낌이 든다. (p111)
따라서 피아노 제조자나 복원자는 한편으로는 능숙한 목수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구조공학자가 되어, 육중한 강철 프레임으로 보강한 목조 캐비닛에 가장 훌륭한 시계만큼이나 복잡한 기계장치를 맞추어 넣는다. 실제로 내가 만난 어떤 음악사가는 이 기계장치가 시계만큼 복잡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 가지 큰 차이라면 시계는 두드리지 않는다는 거죠." 이런 섬세함과 단단하므 기교와 힘의 결합 때문에 피아노가 독특한 것이며, 제조나 수리 기술을 한 사람이 다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p114)
나는 우정이 천천히 전개되는 것을 즐겼다. 가게에서 피아노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묵약 같은 게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끔 나오기는 했지만, 뤼크와 나는 서로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거의 묻지 않았다. 이것은 관심 부족이라기보다는 존중으로 이해되었다. 새로운 관계에서 급하게 많은 사실을 토해내고 금세 친밀성을 기대하는 데 익숙한 미국인이라면 놀랄 수도 있는 방식이었다. 어쨌든 그 공방에서는 움직이는 속도가 달랐으며, 나는 여러 가지에 충분한 시간을 주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p116)
나는 기억할 수 없는 옛날부터 피아노와 마주칠 때마다 피아노의 건반을 보호하는 긴 나무판인 뚜껑을 들어올렸다. 호텔 로비건, 레스토랑이건, 학교건, 극장이건 상관없었다. 그때마다 왠지 금지된 일을 하는 듯한, 아슬아슬하면서도 감질나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낯선 사람의 책꽃이에서 책을 꺼내 펼쳐보는 것이 내밀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행동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p117)
"치지 마!" 그들은 바 뒤나 호텔의 프런트데스크에서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 피아노는 여기 연주자들만 치는 거야!" 그 말은 개인적인 모욕으로 들렸다. 나 나름으로 음악의 관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무참하게 훼손하는 말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나도 연주자였다. 나도 몇 년 동안 레슨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나도 피아노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얼른 닫고 중얼중얼 사과를 했지만, 그렇게 야단을 맞았다고 해서 다음에 손을 안 댄 적은 없었다. 그것은 나 나름의 무정부주의였으며, 나는 고집 빼면 시체인 아이였다. (p119)
"새러는 피아니스트 오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어, 너도 나처럼 피아노를 칠 때는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구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문을 다 닫으마." 여자는 마치 내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을 바로 들여다보고, '이 소년이 원하는 것'이라는 제목 밑에 나와 있는 구체적인 지침을 읽고 그대로 따르는 것 같았다. 여자는 몸을 돌려 나가다가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 피아노 좋지?" " 네. 좋아요." 나는 말없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 가족조차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즉시 이해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차를 타러 나가는 길에 나는 여동생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두꺼운 안경을 쓴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아, 킬리언 선생님 말이구나. 우리 사이에선 늙은 코카콜라 병으로 통해." 여동행은 잠깐 장님 시늉을 했다. "음악하고 합창을 가르쳐. 사실은 아주 좋은 선생님이야." "그래, 그런 것 같아." (p123-124)
세월이 흐른 뒤 내 삶에서 피아노의 중요성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킬리언 선생님 같은 사람을 만나는 상상을 했다. 나에게 음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로부터 음악을 끌어낼 수 있는 직관력 있는 교사. 그러나 성인으로서 연주를 즐기려면, 그런 사람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대신, 내가 직접 찾아 나서서 나의 요구와 기대를 분명히 밝혀야 함을 알았다. (p128)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면서 피아노의 캐비닛을 통해 자신이 만든 음악의 진동을 느낄 수 있도록 건반을 아주 세게 두드려댔다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1818년 발군의 영국 피아노 제조업자인 브로드우드는 베토벤에게 최신기술을 모두 망라한 그랜드 피아노 한 대를 제공했다. 캐비닛과 프레임은 더 단단해졌고, 현은 3줄로 묶었으며, 액션의 반응속도도 향상되었다. 베토벤은 이 피아노 역시 격렬한 연주로 망가뜨렸지만(그 시대 사람은 "끊어진 현들이 폭풍우를 맞은 가시덤불처럼 엉켜 있었다"고 전한다). 1827년에 죽을 때까지 애착을 가졌다. 베토벤은 귀가 멀면서 그의 시대 사람들이 작곡하던 것과는 전혀 닮지 않은 음악을 상상했다. 이 시기에 나온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는 피아노의 힘과 표현력의 극한을 드러낸 것으로 지금도 강한 인상을 준다. 베토벤의 소나타 32곡 가운데 가장 긴 <함머클라비어>는 일반적으로 그의 건반곡 가운데 가장 어렵고 또 가장 멀리 내다본 곡으로 인정받는다. 기술적인 면이나 시적인 면에서 뛰어난 이 작품의 푸가 피날레는 오늘날에도 청자를 놀라게 한다. 베토벤도 이것을 예측하여 악보 출판사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당신은 지금부터 50년 뒤에도 피아니스트들을 바쁘게 만들 소나타를 갖게 되었소!" 어떤 의미에서 베토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악기를 위해 작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세대를 넘기지 않고 그런 악기가 탄생한다. 피아노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p132-133)
쇼팽의 음악은 다른 어느 작곡가의 음악보다도 피아노의 핵심에 놓인 역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어떻게 타악기가 노래를 부르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진지한 피아니스트들이 직면하는 기본적인 문제다. 피아노의 기계 같은 정확성을 이용해 음의 연속적인 흐름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가 음악이라고 부르는 매혹적인 그물을 던지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는 반직관적인 일이다. 흐름이라는 착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일련의 음을 서로 겹치게 하고, 손가락을 교묘하게 놀리고, 페달을 이용하고, 음의 농담을 활용하는 특정한 기법을 배우고 소화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쇼팽의 작품을 살아나게 하는 노래하는 선율을 전개하는 데 중요하다. 쇼팽의 음악은 건반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살던 시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p136)
오스카 와일드가 19세기 말에 한 말을 들어보면 상류사회에 피아노가 널리 퍼진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감 있게 타자기를 치는 소리가 누이나 가까운 친척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보다 덜 짜증스럽다." (p138)
악기로서는 독특한 경우지만, 피아노는 가구이기도 했다. 이 점이 피아노를 시장에 파는 데 핵심요소였다. (p138)
피아노의 유행은 185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생산증가, 부의 팽창, 지불방식의 변화가 그 기반이 되었다. 피아노는 소비자 다수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소수의 사치품 가운데 하나로, 할부로 구입할 수 있는 거의 첫 번째 제품이었다. 갑자기 모두가 피아노를 갖게 되었다. 생산과 매출의 증가는 극적이었다. 1850년에 전 세계에서 1년에 약 5만 대가 생산되었다. 1910년에 그 숫자는 50만 대를 넘어섰으며, 그 가운데 35만 대가 미국에서 생산되었다. 이때가 피아노의 절정기였다. 모든 품위 있는 가정만이 아니라, 모든 학교, 술집, 클럽, 교회, 기선, 카페, 서부의 도로변 여관에서도 피아노를 볼 수 있었다. 손가락의 교묘한 움직임을 커다란 소리로 능숙하게 번역해낸다는 점에서 피아노는 시대기술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또 피아노의 성공적인 판매방식은 이후 모든 소비재 판매의 모범이 되었다. 1889년 에펠탑이 세워졌을 때 꼭대기의 작은 방으로 끌어올린 첫 번째 물건이 피아노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곳에 갖추어진 작은 플레옐 업라이트는 이 미래주의적 구조물이 공학과 예술을 융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했다.
단순성을 선호하는 경향은 20세기 초에 등장했다. 모더니즘 정신이 싹트면서, 연주회용 피아노가 순수하고, 장식이 없고, 빛나는 검은색이어야 한다는 관행, 내부의 빛나는 것을 비추는 완벽한 거울 구실을 해야 한다는 관행이 나타났다. 검정, 색깔이 아닌 색, 늘 빛과 움직임을 비추는 우아한 박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더니, 계속 표준으로 남았다. 이보다 더 엄격한 관행-거의 예외가 없다-은 흑백의 건반 색깔이다. 두 종류의 건반 사이에는 늘 이런 극명한 대조가 있었지만, 18세기에는 그것이 뒤바뀌는 일도 많았다. 다시 말해 원음이 검은색이고 사이음이 흰색인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현재의 배치는 19세기 초 이후에 널리 퍼졌다. 시각적인 대비는 필요하지만, 건반이 예를 들어 파랑과 노랑, 또는 빨강과 검정으로 구성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캐비닛이 정교한 예쁜 수제 피아노에서도 건반의 흑백은 건드리지 않는다. (p145-146)
전자와 금속합금, 컴퓨터 칩과 최첨단 합성수지. 이 모든 것이 피아노 디자인에 새롭게 적용되었지만 원래의 설계를 현저하게 개선한 것은 아니다. 피아노는 피아노일 따름이다. 그것은 그 바탕이 되었던 관념의 완벽한 표현물로, 문화적으로 보자면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도 할 수 있다. 피아노는 기계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우리 문화의 한 가지 경향(타자기나 컴퓨터 자판을 생각해보라)이 온음계에 기초한 구체적인 음악관념과 결합하는 방식을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위대한 천재성은 단순히 기계적인 것을 음악의 영역으로 번역했다는 데 있다. (p147-148)
이제 피아노가 생기자-내가 가져본 첫 피아노였다-나는 그 책임감 때문에 어찔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것은 집이나 새 차를 사는 것과 같은 중요한 결정이었으며,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내 인생을 바꾸고 음악을 재발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중단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환상은 품지 않았다. 규칙적인 연습을 그만둔지 이미 20년이 지났다. 내가 과거에 바흐의 2성 인벤션이나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제 슈팅겔은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었고, 그건반은 내가 옆을 지날 때마다 손짓을 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음계와 화성 진행만 쳐보았다. 말 잘 듣던 학생답게 오래전에 늘 연습하던 것의 윤곽이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아주 좋아하던 곡 가운데 몇 곡은 온전하게 기억이 났다. 슈베르트의 왈츠는 금세 생각이 났다. 다른 곡의 몇 악구도 떠올랐다. 그러나 내 속에 남아 있는 단편만 재생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좌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교사가 없으면 진전도 없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해 보였다. (p150)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렸을 때 익혔던 기본적인 접근방법을 바꾸고 싶었다는 점이다. 펨버튼 선생님이 보여주었던 점잖은 압제의 형태에서 벗어나 교사와 솔직하게 대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피아니스트의 길로 나아간다는, 아니 그 이전에 발표회를 한 번이라도 열거라는 기대 따위는 아예 없었다.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재능이 발견되어 꽃을 피울 거라는 희망 같은 것도 없었다. 지금의 목표는 전보다 더 분명하고, 또 개인적이었다. 내가 음악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더 심화시키고, 세상에 대한 내 느낌을 확장할 수 있는 곡을 선택해볼 생각이었다. 그런 자유는 한껏 누릴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책임감을 느꼈다. 건반에서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레슨의 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린아이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았다. 내가 규율을 선택한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야 했다. (p151)
154-5
우리는 두 작품에 실린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버르토크가 먼저였다. 어떤 곡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쉬웠다. 그러나 안나는 더 복잡한 곡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쉬운 곡들의 화성구조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쉬운 곡이라 해도 그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게는 새로운 일이었다. 내가 힘겨워하면 안나는 내 공책에 "인내심을 가져요!" 하고 적곤 했다. 그녀는 곡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음표만 치는 것은 공허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기술 자체를 목표로 삼는 일은 그녀의 접근방법과 거리가 멀었다. 안나는 내 귀를 틔우는 데 많은 시간을 ��았다. 그녀는 내 귀가 매우 예민하다고 말했다. 안나는 화음을 연주하면서 선율을 노래하게 했고 그 반대로도 해보게 했다. 간단한 곡에서도 계속 미묘한 화음과 불협화음에 귀를 기울이도록 가르쳤다. 일종의 음악체조도 했다. 화성 진행을 하면서 다음 화음의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 속도는 더 빨라졌다. 처음에는 피가 마를 듯했지만, 묘한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전처럼 흐름을 손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포착할 수 있는 개념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피아노는 그 개념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있었다. (p156)
나는 안나에게 처음 레슨을 받을 때부터 예기치 못했던 만족감과 일종의 쾌락을 경험했다. 맨 처음에 연습한 몇 곡의 아주 단순한 음형변화-전조, 예상치 못한 화음-에서도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쉬운 것이기는 했지만 내 귀와 정신으로 곡의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단순히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더 싶은 수준의 이해, 그와 더불어 더 깊은 수준의 아름다움에 이르는 것. (p156-157)
나는 스스로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언젠가 베토벤의 소나타를 치겠다든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칠 때까지 해보겠다든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곡에 도전하여 거기에서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것으로 충분했다. 뭔가를 이룬다는 것은 초점을 빗나간 문제였다. 이것이 어렸을 때와 다른 점이었다. (p158)
어느 날 베흐슈타인의 악보대에 올려놓았던 악보를 챙기는데 안나가 음악에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작은 선물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선과 궁술>을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제 좀 아시게 된 것 같지만, 중요한 건 태도예요." 나는 그날 저녁 흥분하여 그 책을 읽으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안나의 가르침 몇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책은 단순히 신체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이 보이는 부담스러운 동작-이 경 우에는 궁술-을 익히는 문제의 핵심에 명상을 집어넣었다. 이 책은 집중을 강조했으며, 배우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모든 새로운 기술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그 나름으로 깨달음과 만족을 준다. 당면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 정신적 규율은 심미적인 쾌락만큼이나 중요하다.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고, 엄격하게 위계적인 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자신의 기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방심하지 않으면서도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긴장을 푼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마라!" 스승은 제자에게 외친다. "긴장을 느끼는 것은 네가 진정으로 거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아주 단순하다!" (p159)
안나가 음악을 대하는 방식에는 이런 태도가 체현되어 있었다. 안나는 의욕을 자극하면서도 현실적인 태도로 내적인 집중력을 이용 해 우리가 ���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부분을 체득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브람스나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보고 그것이 왜 걸작인지 알아야만 해요. 그래야 그 걸작 가운데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솜씨로 해석할 기회가 생길 때 감사할 수 있죠. 이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해요, 안 그래요? 완벽 같은 것은 없어요." (p160)
163, 4 168 172
길을 건너자 열린 창문으로 그랜드 피아노에 앉은 젊은 여자의 옆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33개 변주곡의 중반을 넘어섰으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팔이 주기적으로 악보대로 올라가 악보를 넘겼다. 여자의 연주는 기술적으로 뛰어났으며, 다양한 악절에 투영해 내는 음색의 깊이는 숨을 앗아갈 듯했다. 나는 흥분해서 지나가던 사람이라도 붙잡고 한번 들어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봐요, 이것 좀 들어보세요! 이건 엄청난 베토벤 연주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사람들은 급한 걸음으로 지나갔고, 자동차들은 서고 가기를 반복했다. 파리 사람들이 조롱하듯 항공모함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유람선이 근처의 마리 다리 밑을 시끄럽게 지나갔다. 유람선에 달린 클리그 등 때문에 나무와 건물이 판지로 만든 영화세트처럼 바뀌었다. 강렬한 빛이 희미해지자 눈에 보이지 않던 악보 담당자가 창문으로 걸어 왔다. 밝은 빨간색 스웨터를 입은 나이 든 여자였다. 여자는 경첩이 달린 창문을 밀어 닫더니 걸쇠까지 단단히 걸고, 도시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커튼까지 드리웠다. '이런!'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음악은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멀리서 딸랑거리는 소리일 뿐이었다.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시정이나 활기를 느낄 수 없었다. 창문을 닫기까지 그 훌륭한 변주곡을 다섯, 아니, 어쩌면 여섯 곡쯤 들은 듯했는데,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성싶었다. 이런 계시와 같은 사건은 드물었다. 나는 미리 계획할 수 없는 이런 특별한 기쁨을 고맙게 생각했다. 파리는 가끔 행인에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속에 감춘 풍요로운 지층을 하나 드러내 보이곤 했다. (p173)
나는 밖에서 흘러드는 이웃의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정말 특별한 것- 예를 들어 베를리오즈의 솔로-이 들릴 때는 들려오는 소리 쪽으로 완전히 관심을 돌렸다. 가끔 그런식으로 하던 일이 중단되었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중단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달콤했다. 계시처럼 나타나는 작은 음악을 듣는 기쁨에 치러야 하는 얼마 안 되는 대가일 뿐이었다. 가끔 비 오는 날이면 창문이 평소처럼 자주 열리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던 것이 사라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각각의 음악 뒤에 놓인 영감을 은밀히 공유해왔던 것이다. 소리로 이루어진 이 간접적인 세계는 나에게 매우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이 보지도 못한 음악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나만이 아는 유대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드링 습기를 피해 창문을 닫자 내가 누릴 자격이 있는 어떤 것을 거두어들였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p176-177)
장 폴은 자신의 귀의 특이한 민감성에 가장 좋은 해독제는 노래라고 말했다. 피아노는 모든 음 사이에 아주 분명한 음정이 있는 특정한 소리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노래는 무한히 다양하게 음이 변하여 하나의 높이에서 다른 높이로 갑자기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장 폴은 피아노가 특정한 88개 음 높이로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매우 괴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목소리나 현악기는 이와 달리 무한한 변화가 가능하다. "결국 나는 두 가지 다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아노는 분명하고, 정확하고, 완벽하죠. 좁은 의미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노래는 꿈을 꾸게 해줍니다." (p182)
"나중에야 반주자가 된 덕분에 노래의 세계로 들어가 피아노의 압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피아노가 노래를 하게 하려고 노력하지요. 하지만 그건 지는 싸움입니다. 피아노를 어떻게 보든, 어차피 타악기를 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목소리는 무한히 유연하지요. 나는 실제로 피아노를 칠 때와 노래를 할 때 뇌가 각각 다른 영역에 집중한다고 믿습니다." 장 폴은 모든 진지한 피아니스트가 직면하는 기본적인 문제를 묘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피아노의 지나치게 정확한 음을 넘어서서 멜로디라는 시를 불러내는 것. 다른 대부분의 악기와는 달리 피아노의 주어진 소리는 직접 그 높이를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바이올리니스트, 트럼펫 연주자, 플루티스트는 모두 자기 악기의 높이를 반음, 4분의 1음, 8분의 1음씩 밀어 올릴 수 있다.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누를 때 나오는 소리의 정확함에 속박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그것을 올리거나 내릴 수 없다. 그냥 그대로다. 정신이 피아노의 구분된 음들로부터 하나의 연속체를 구축하여 음악이 흐르는 듯한 착각을 만들려면 특정한 기법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 기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레가토인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는 '함께 묶여 있다'는 뜻으로 앞에 누른 건반을 놓기 전에 다른 건반을 눌러 소리가 겹쳐서 연결되어 들리게 하는 기술이다. "여기에서는 멜로디가 빗방울이 아니라 하나의 강이야!" 펨버튼 선생님은 내가 레가토 프레이징을 익히려고 안간힘을 쓸 때 그렇게 말하곤 했다. (p183-184)
대중에게 반주자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음악적으로나 지적으로 적어도 공연의 반은 책임을 진다. "내가 확실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제대로 될 때는 반주자나 성악가나 다양한 요소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대와 소통이 융합되는 훌륭한 대화와 마찬가지지요. 마치 함께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이 숨이지요." (p185)
조율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기본적인 사항을 생각해보자. 피아노에는 현이 200개 이상 있다. 그 각각을 특정한 음 높이로 조율해야 한다. 각각의 높이는 또 다른 현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 그래야 저음역부터 고음역에 이르기까지 전 범위의 음에서 규칙적인 음정이 나올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순수한 물리학적 문제다. 뤼크의 표현을 빌리면 기계적인 것이다. 진동하는 현의 규칙성은 현의 모든 물리적 속성을 알면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그것을 다 안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다). 모두 출발점은 똑같다. 중앙의 C 위의 A는 거의 언제나 초당 440헤르츠-하나의 현이 특정한 음을 내기 위해 진동하는 횟수다-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모든 옥타브와 5도를 완벽한 간격으로 유지하면서 피아노를 조율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도를 완벽하게 맞춘다면 건반 전체를 가로질러 5도로 진행할 경우 뒤에 가서는 같은 음이라 하더라도 출발점의 음보다 상당히 높아진다. 피아노는 현의 고정된 음 높이에 묶여 있기 때문에, 조율사는 조율을 할 때 이런 물리적 원칙을 고려해야 한다. (p191-192)
초기 건반음악에서 작곡가들은 주요 음정이 정확하게 들리는 한정된 숫자의 조를 활용했다. 다른 조들은 피했다. 그런 경우에는 주요 음정에 내재하는 불협화가 더 쉽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음악이 복잡하게 진화하면서 작곡가들은 조를 자유롭게 바꾸고 건반의 반음계를 활용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자 그런 한계가 근본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그러나 한계를 극복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해결책은 음정 일부를 '조율', 다시 말해 약간 왜곡하여, 일부는 협화음이지만 일부는 약간 불협화음으로 들리게, 그러나 어떤 조에서도 너무 불협화음으로 들리지는 않게 하는 것이었다. (p192)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건반악기의 전 음역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아니지만, 좀더 균형 잡힌 조율을 가장 열렬히 옹호했던 사람으로 꼽힌다. 프렐루드와 푸가로 이루어진 종합 작품집인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그 자체로 걸작이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 조율이 이루어진 건반악기로 다양한 스타일, 조, 음역을 연주하는 음악 가운데 초기의 가장 유명한 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결국 조율사들은 옥타브를 12개의 똑같은 반음으로 나누어, 음향적 불일치를 그들 각각에게 똑같이 분배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른바 '등분 조율'이 현재 조율의 표준이 되어 있다. 이렇게 약간의 왜곡을 할 필요와 더불어 다른 고려사항도 있다. 사람의 귀는 높은 음을 실제 주파수보다 약간 낮게 듣는다. 이 점까지 생각하면 조율사가 연장을 집어들 때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앞에 두고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점 때문에 피아노는 음정이 건반 전체에 걸쳐 균일한 것이 아니라 위쪽 음역으로 가면서 점차 넓어지도록 조율되어야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조율이 항상 근사치라는 것이다. 조율은 두 가지 개념, 기계적으로 정확한 것과 음악적으로 매력적인 것, 경험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다. 조율사가 이루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균형이다. 이론적인 음의 거슬리는 소리와 귀가 듣는 데 익숙한 기분 좋은 소리 사이의 평균이다. (p193)
복잡하고 불규칙한 상황에서 오는 기술적인 까다로움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을 묶은 장력이 서로 다른 두 대의 피아노-제조업자마다 현을 프레임에 연결하는 방식도 보통은 약간씩 다르다-를 똑같은 방식으로 조율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개별적인 피아노의 다른 여러 가지 고유한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이 상대적으로 뻣뻣하면 특정한 화음구조가 약간 달라지며, 조율을 할 때는 이 점도 고려해야 한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늘 인간적인 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피아노가 아이들이 쾅쾅 두드려대고 부모는 가끔 연주하는 튼튼한 업라이트인가? 아니면 주요한 공적 연주회를 위해 준비해놓은 콘서트 그랜드인가? 고객이 정기적으로 피아노 조율을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가끔 뒤늦게 조율을 하는 사람인가? 이런 점들을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변수들이 방정식에 들어와 좋은 조율사가 훌륭한 조율이라는 평형상태를 이루는 방식을 결정한다. 피아노가 평소에 쓰이는 방식을 고려하여 얼마나 오래 조율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점도 이 방정식의 일부다. 이런 다양한 방식에 대한 뤼크의 설명은 역시 그의 말답게 포괄적이며 단정적이지 않다. "피아노를 조율하는 것은 요리와 비슷하지요. 저마다 자신의 요리법이 있거든요." (p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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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의 높이를 맞추는 것은 전체적인 조율의 첫 단계일 뿐이다. 피아노에 독특한 음색, 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조음이라는 섬세한 기술이다. 조음은 피아노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기술이다. 무엇이 듣기 좋은 목소리냐 하는 것은 피아노의 전 음역에 걸쳐 음 높이가 정확한가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주관적이다. 목소리는 환경에 따라서 변한다. 가정용으로 조음된 피아노는 콘서트홀의 무대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나온다. 따라서 균형을 정확하게 잡으려면 기술자의 솜씨와 경험의 무게가 더욱더 요구된다. 어떤 조율사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모두 조음을 위한 우리 나름의 요령을 갖고 있지요. 그걸 보여주는 건 벌거벗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조음을 할 때는 누가 옆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동료들은요." (p198)
나는 뤼크에게 좋은 조율사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속으로는 그가 특별한 조율사와 평범한 조율사를 가르는 까다로운 기술과 놀라운 방법의 목록을 나열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다가 그의 답을 듣고 놀랐는데, 돌이켜보면 사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의 답이 이론과 실천의 많은 부분을 관통해 조율세계의 핵심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조율사는 고객이 곧바로 다시 부를 필요가 없는 사람이죠."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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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놀란 눈으로 그가 손에 쥔 나뭇조각을 바라보자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쪽 끝에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멍은 그것이 피아노의 조율이 고정되었던 육중한 나무의 일부임을 보여주었다. "내가 식인종이나 되는 것처럼 보지 마세요. 나는 그저 얼어 죽지 않으려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세상을 죽은 피아노로부터 구하려는 것이기도 하고요." 피아노에 일종의 생명을 부여하는 이 사람도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고, 확실한 죽음이었다. 도저히 수리할 수 없는 피아노가 생기는 일은 그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자주 일어났다. 그런 피아노는 거의 언제나 좋은 피아노와 한 묶음으로 왔으며, 뤼크는 그 전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뤼크는 어떻게해도 다시 연주가 가능하도록 만들 수 없는 피아노일 경우 해체해서 쓸모 있는 부품은 챙겨두고 나머지는 땔감으로 만들어 난로 옆에 단정하게 쌓아두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수리할 수 없는 피아노를 태우는 뤼크의 관행을 알고 있는 듯했다. 뤼크는 그것을 땔감이라고 불렀다. 뤼크는 엄청난 파이프 시설이 천창으로 뻗어 올라가는, 괴상해 보이는 난로로 걸어갔다. 그는 차가운 금속뚜껑에 손을 올리더니 사람들을 돌아보며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내 몸도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남겨주어야 하니까요." (p211-212)
"미안해요." 여주인은 흐느끼며 말했다. "남편이 나를 위해 그 곡을 연주하곤 했거든요." 음악과 기억. 이 둘이 결합되었을 때보다 가슴을 강하게 누르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따라서 이 거추장스러운 소유물을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었다 해도, 사랑하던 피아노, 친구나 가족과 연결되어 있던 피아노와 헤어지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파리와 뉴욕의 피아노상 몇 명도 비슷하게 달콤쌉싸름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늘 특정한 제조사, 모델, 도장의 중고 피아노를 찾는 고객이 있다는 것이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피난민, 이민자, 전쟁의 피해자- 이들은 온 세상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종종 그 세상에 살던 사랑하는 사람마저 빼앗긴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물질적 환경이 나아졌을 때 본능적으로 자신의 집의 중심을 차지했던 피아노와 똑같은 것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일이 그들의 뜻대로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p216)
"피아노는 아주 사적인 거죠." 그 피아노상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기억하는 것, 예를 들어 깔깔한 음색이라든가, 고음부의 가벼움이라든가, 약간 달라붙은 페달 같은 것은 우주에서 오직 단 한 대의 피아노만 갖고 있는 특징이죠. 또 전문적인 복원작업을 거치면 다 고쳐지는 특징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피아노에 꿈을 투자한다. 지나가다 내키면 건드려본다. 그 위에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아 집안의 성전으로 꾸며놓는다. 이런 피아노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사실 대체할 수가 없다. 거기 포함되어 있는 우리 삶의 흐름의 한 부분을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피아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닳거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파괴당한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새로 좋은 악기를 들이면 음악의 영역으로 통하는 문이 다시 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이 나무와 금속으로 만든 커다란 덩어리가 발휘하는 특별한 연상의 힘은 그 개별적인 피아노 한 대만 갖고 있는 것이다. (p217)
나는 이 장소가 뤼크의 공방만큼이나 그 나름으로 은밀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과거에 빠져 헤매는 일 없이 과거를 끌어안고 있는 듯 보였다. 오래되기는 했지만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나는 한 친구가 이곳의 '안쓰러운 건물'을 가리키며 먼지투성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이곳이 결코 안쓰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쇠락하기는 했지만, 낡은 저택에서 예상할 수 있는 초라하면서도 고상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겉모습을 볼 때 있는 돈은 다 음악 교육에 써온 것 같았다. 여러 연령층의 학생들이 악기를 들고 음악에 관해 재잘거리면서 서둘러 층계를 오르내리자 아연 건물에 활력이 가득 찼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정원에서 올려다보았거나 물결 형태의 유리창을 통해 내려다보았다면, 자신이 알았던 세계보다 훨씬 빨리 돌아가는 지금 세계의 소음과 속도로부터 물러나 앉은 이 고립된 장소를 보고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227)
학교 어디를 가나 발견되는 피아노도 마찬가지였다. 피아노가 매우 다양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드니 씨는 그것을 장점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어떤 학교에는 스타인웨이나 야마하 한 가지 피아노밖에 없지만, 스콜라 칸토룸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피아니스트는 보통 바이올리니스트나 플루티스트와는 달리 자기 악기를 연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피아니스트로 살아 가는 데는 적응이 불가피한 요소지요." 설사 어떤 면에서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악기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플레옐의 액션이나 쉼멜의 음색을 느껴보는 것은 피아니스트가 듣고 연주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적어도 기법 그 자체를 발전시키는 것만큼 중요하다. 건반으로 음악을 해석한다는 개념 자체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p230)
261-2 267
나이가 들어 피아노 세계에 다시 입문하게 되자 자기 규율의 관행에 관해 서서히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이 분야에서 인정받는 두 거장의 방법을 눈으로 보면서 더욱더 분명해졌다. 안나에게 레슨을 받는 처음 몇 달 동안 나는 선생을 얻었다는 소박한 기쁨을 다시 발견했다. 이 세상에는 건반을 진정으로 독학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작곡과 즉흥연주를 제외하면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주어진 구조물-악보-과 그 해석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창조성을 묘하게 섞는 것이다. 모든 음표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시작일 뿐이다. 진짜 연주는 작곡가의 의도에 자신의 자아를 투명하게 보태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 이런 분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겸손해지는 경험일 뿐 아니라 묘하게 흥분을 자아내는 경험이기도 했다. 음악이 무한히 완벽을 향해 날아가도록 밀어주는 일은 오직 선생만이 해줄 수 있다. (p268-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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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교에서는 틀린 음을 치지 않게 하려고 준비를 너무 강조하지요. 하지만 얄궂게도 준비를 하면 긴장을 하게 되어 잘못 치는 일이 더 많아집니다. 물론 자연스러운 동작이 더 큰 모험이기는 하지요." 페터도 인정했다. "그러나 인생은 모험이고, 음악도 인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음악 역시 모험이어야 합니다!" (p272)
"똑같다고? 똑같다고? 이게 비디오 기계처럼 빨리 감기를 해버리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라나도스가 반복을 하라고 했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음악적으로 의미가 있는 이유 말이에요. 반복부는 결코 '똑같은 게' 아니에요. 어디, 악보를 좀 볼까요?" (p276)
"아무도 음을 틀리게 치지 않는 마법의 피아노가 있다면 나도 좀 봤으면 좋겠군요! 사실 모든 음을 정확하게 치는 게 핵심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음악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거예요. 사람 대신 그런 일을 해줄 피아노를 찾아주세요. 그럼 나도 마법을 믿을 테니까."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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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별한 순간은 두 피아니스트, 곧 선생과 학생을 다른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간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공유, 이런 마음의 만남을 공모Complicité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음악의 변경을 함께 탐험하는 두 피아니스트에게 즉시 생겨나는 특별한 유대를 완벽하게 표착한다. 실내악을 대화, 끊임없이 주고받고 목소리들이 합쳐졌다 갈라지는 대화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것은 완전한 동시성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댄서 둘이 같은 동작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어떤 놀라운 화학작용에 힘입어 두 피아니스트 사이에 완벽한 일칙가 이루어진 것이다. (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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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올리는 건반뚜껑을 열더니 나더러 건반 앞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뭐든지 쳐보십시오. 그저 건반을 느끼고 음색을 들어보라는 뜻이니까요." 순간 그가 조금 전에 한 말이 기억났다. 아무리 재능 있는 연주자라 하더라도 건반을 살피는 눈만 보면 그가 피아노에 어떻게 접근할지 알 수 있다던 이야기 말이다. 그의 말이 옳다면 그는 이미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망설이는지 파악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두 가지 극단적으로 모순되는 충동 때문에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달아나고 싶기도 했고 치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p31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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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엇이 피아노에서 가장 중요하냐고 물었다. 파지올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연주할 때 나는 소리죠. 아주 간단한 겁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이상에 봉사하는 거지요. 따라서 피아노를 만들기 전에 어떤 소리를 내고 싶은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파지올리는 찬란하고, 명료하고, 일관된 소리를 원했다. 큰 음량에서도 왜곡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소리여야 했다. 공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듣는 소리는 바탕음과 더 높은 주파수에서 공명하는 모든 배음의 조합이다. 그 균형을 올바르게 잡는 것이 피아노 제작기술의 핵심이다. 어떤 음을 치면 우리 모두 기본음의 몇 배 높은 배음을 듣는다. 이것은 기본음보다 더 작게 울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미묘한 음들을 의식하지 않지만, 이 음들이야말로 피아노에 특징적인 소리를 부여하는 중요한 구성요소다. 나는 파지올리에게 그 많은 배음을 들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오랜 세월 소리를 들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도록 귀를 훈련시켜왔다고 대답했다. 그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은 그 균형을 올바르게 잡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왜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느끼는 것도 아닌 차이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하는 게 올바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원칙과는 별도로, 피아노가 내는 음질을 놓고 판단을 내릴 때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듣지 못하는 아주 많은 소리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 소리들이 파지올리가 파지올리처럼 들리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지요. 위대한 와인의 모든 미묘한 맛을 다 맛볼 수 있는 와인 전문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뭐 훌륭한 와인을 평가하려고 그 모든 것을 알 필요까지야 없겠지만요. 하지만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그렇게 하지요." (p318-319)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실력이 시원치 않다는 둥 핑계를 댔다. "아, 베토벤이나 쇼팽은 잊어버려요." 뤼크가 말했다. "그냥 음계나 몇 개 쳐보세요. 중요한 건 액션을 느끼고 소리를 들어보는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안심이 되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치든 심판하지도 않고 내쫓지도 않을 친구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플레옐이 갑자기 고요한 바다의 섬이 되었다. (p329)
330
노인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연주했다. 내가 녹음으로 들어 아는 곡이었다. 테크닉에 관한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워낙 자신만만하고, 또 워낙 흠이 없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테크닉은 사라지고 음악만 앞으로 나왔다. 마틸드, 뤼크, 나 모두 피아노 캐비닛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덮개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해머가 현을 두드리는 모든 동작을 볼 수 있었다. 나무를 통해 깊은 울림이 퍼져나와 우리 몸으로 들어왔다. (p333)
노인은 연주를 하자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 머뭇머뭇 걸음을 내딛던 구부정한 몸이 정력적인 운동선수의 몸으로 바뀌어, 무한히 긴박한 느낌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그는 피아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아노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의 손과 발은 강력하면서도 복잡한 힘으로 건반과 페달을 두드리고 쳐댔다. 피아노도 변했다. 이제 섬세한 선은 사라졌다. 입을 다문 물체에서 느껴지는 묘하게 예의바른 느낌도 사라졌다. 지금 하는 일이 이 피아노가 하려던 일이었다. 템포는 무척 빨랐다. 프레스토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터치는 자신만만하고 규칙적이었다. 광기로 치닫지도, 처지지도 않았다. 특히 반복부에서 음색, 음량, 음질을 대비시켜, 똑같은 악절이 완전히 새롭게 들리게 했다. 돈꾸밈음은 예상치 못했지만 느닷없지는 않았다. 아주 높은 ���에서 크고 아름다운 잎이 땅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듯했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분명했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들 때문에 하강의 춤처럼 느껴졌다. 그는 음악이라는 무한히 섬세하고, 재치 있고, 집요한 대화의 일부가 되었다. 음악은 시작할 때처럼 갑자기 끝이났다. 그는 마지막 화음을 누른 채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화음이 공방의 빛이 가득한 냉기 속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보았다. (p334)
우리가 느낀 기쁨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마틸드는 심지어 장갑을 낀 손으로 박수를 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는 다시 피아노를 돌아보더니 횡재를 한 뤼크를 축하했다. 나는 그것이 그 나름의 겸손의 표현임을 깨달았다. 관심을 자신의 연주에서 다른 데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그 소나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더 연주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가장 진실한 경의는 그가 인도하는 대로 악기 이야기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나머지는 소음일 뿐이었다.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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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어느 날 오후에 혼자 집에 있게 되었다. 나는 그 조용한 시간을 이용해 슈팅글을 쳤다.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그런 시간이었다. 내 두 손은 건반 위에서 독자적인 동력을 가진 듯 움직였다. 소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순수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규칙적으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 주에 받았던 레슨은 까다로웠지만 만족스러웠다. 내가 연습하던 모차르트의 아다지오는 새삼 심오하게 들렸다. 갑자기 그 복잡한 음들이 내 손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재미 삼아 슈팅글의 덮개를 열었다. 소리의 울림이 파도를 이루어 내게 돌아왔다. 캐비닛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전율이 그렇게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했다. 건반을 누르고, 소리를 들어라 세련되지 못한 연주였음에도 다채로운 소리와 미묘한 음색이 다시 나를 압도했다. 단지 악보, 음악이 적힌 종이의 놀랍고 추상적인 체계를 보는 것만으로 내 손이 모차르트의 영감을 살려낸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맞는 건반을 누르는 것뿐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이 능란한 기계는 내가 작곡가의 생각을 끌어안고 그것을 손의 운동으로부터 음악의 무한궤도로 번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마지막 화음들이 허공에 머물다 서서히 물러나는 동안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가 소유하기는 했지만 결코 정복하지는 못한, 언제 보아도 낯설어 보이는 악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음악이 중요했다.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였다. 그러나 나는 내 피아노로 어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얼마나 깊은 만족을 주는 일인지 다시 깨달았다.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그 만족은 무한했고, 그것이 내 삶에 주는 영향은 깊디깊었다. 나는 방 건너편에서 피아노를 바라보면서, 그 모퉁이가 텅 비었을 때를 기억해보려 했다. 전생의 일 같았다. (p342-343)
- 사드 카하트 , '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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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9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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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amazon.com/Country-Old-Men-Cormac-McCarthy/dp/0375406778 )
예이츠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내다보는 창인지 나는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시각,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있으니 이 모든 소동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덕분에 나는 평생 생각도 못해 본 일을 겪고 말았다. 저기 어딘가에는 살아 있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다. 다시는 그 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진짜라는 것을, 나는 그가 한 일을 보았다. 한때 나는 그 자의 눈앞에서 걸어 다녔다.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두 번 다시는 내 운명을 걸고 그 자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다. 그랬길 바라지만. 누구라도 감히 그러고 싶지는 않으리라. 내가 언제나 알았듯이 이 일을 하려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니 말이다. 그것이 언제나 진실이었다. 영광 따위는 바랄 수도 없지만 그렇게 목숨을 걸어야 한다. 당신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그들도 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알아차린다. 어쩌면 당신은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모험에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p12-13)
가방 안에는 100달러짜리 지폐가 가득했다. 10,000달러 소인이 찍힌 묶음 띠지로 고정된 돈 다발이었다. 모두 합해서 얼마나 되는지 감이 오진 않았지만, 그에게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히 앉아서 돈 다발을 바라보다가 뚜껑을 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생 전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매일매일이, 새벽부터 밤까지의 매일매일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이 가방 안의 40파운드 짜리 종이 더미에 담겨 있었다.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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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형수 감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말이다. 놀랄 일이다. 적어도 일부는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몇 년간 매일 보던 사람을 어느 날 복도로 데리고 나와 죽음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 일. (p74-75)
선령한 주민들을 다스리는 데는 힘쓸 일이 거의 없다. 정말 거의 없다. 그리고 나쁜 인간들을 다스리기가 아예 불가능하다. 아니면 다스릴 수 있었다는 얘기를 내가 들어본 적이 없거나. (p76)
벌써부터 그는 자신의 인생이 다시는 안전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다만 그런 것이 자신에게 익숙했던 삶인지가 궁금했다. 과연 그랬던가?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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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젊은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어려운 일을 겪지 않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단지 기대만큼 빨리 성장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p178)
부모들이 자식들을 키우지 않으려 했다. 우리는 그 문제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했다. 다음 세대가 자라나 어른이 되고 아이들을 키우려들지 않을 때는 누가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p179)
전쟁에 대해서도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결국 전쟁영웅이 되었지만 분대원을 모두 잃었다. 그때 일로 훈장을 받았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훈장을 받았다. 이런 일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알 필요도 없다.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 내가 알던 몇몇 병사들은 돌아와서 제대군인 원호법에 따라 오스틴의 학교에 갔는데 거기서 말 못할 일을 많이 겪었다. 흔히들 그들을 백인 떨거지니 뭐니 하는 말로 불렀고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싫어했다. 이 나라에서 두 세대는 긴 시간이다. 초창기 개척민 이야기도 많이들 한다. 사람들에게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살해당해서 머릿가죽이 벗겨지고 물고기처럼 창자가 갈리는 지독한 일을 당하면 흥분하기 십상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60년대는 그들 중 일부를 정신차리게 했다. 아니 그랬기를 바란다. 얼마 전에는 여기 신문에서 몇몇 교사들이 30년대에 전국의 여러 학교에 보낸 설문지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설문지 문항은 학교 교육에서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교사들이 발견한 설문지는 답안이 채워져서 전국 각지에서 돌아온 것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로 거론된 것은 수업 중 떠들기나 복도에서 뛰어다니기 같은 문제였다. 껌을 씹거나 숙제를 베끼는 일도. 뭐 그런 따위였다. 교사들은 답이 비어 있는 설문지를 찾아서 그것을 무수하게 복사해 똑같은 학교에 다시 보냈다. 40년 후에 말이다. 그리고 이제 답지들이 도착했다. 강간, 방화, 살인, 마약, 자살.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세상이 점점 망해가고 있다고 오래 전부터 말하곤 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내가 나이가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징후다. 하지만 강간하고 살인하는 일을 껌 씹는 일과 구별 할 수 없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4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아마도 다음 40년 동안은 난데없이 아주 괴상한 것이 등장할지 모른다. 너무 늦은 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p216-217)
1, 2년 전에 나와 로레타는 코퍼스크리스티의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 나는 누군가의 부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그녀는 내게 줄곧 우익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개 평범한 이들이다. 흔히 하는 말로 먼지처럼 평범한 이들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나를 별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가 그들을 험담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속한 세계에서 그 말은 최고의 칭찬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이 나라가 나아가는 방향이 싫다고 말했다. 자기 손녀가 낙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이 나라가 가는 방향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을 보니 부인의 손녀는 틀림없이 낙태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낙태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부인을 영원히 잠들게 할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말하자 대화가 끝나고 말았다. (p218)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친구를 잃었다. 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아니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모든 사람이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건 아니라는 사실. (p237)
당신이 악마라면, 그리고 인간을 굴복 시킬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면, 결국 마약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p239)
"총싸움이 벌어지면 무장을 하겠니, 그냥 법을 지키겠니?" (p242)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냐. 네가 그곳에 가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요점이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너의 생각. 아니 누구의 생각이든.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없어. 내가 말하려는 게 이거야. 너의 발자국은 영원히 남아. 그걸 없앨 수는 없지. 단 하나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아직 이해 못하는 것 같으니 한 마디 더 하마. 너는 어제 몇 시에 일어났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어제야. 다른 건 중요치 않아.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너의 인생이 되지. 그밖엔 아무것도 없어. 너는 도망가서 이름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할지 몰라. 다시 시작하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천장을 바라보며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하고 묻게 돼." (p249-250)
아버지는 언제나 최선의 길을 선택하고 진실을 숨김 없이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누구인지 결정할 필요가 없는 것 만큼 마음 편한 일은 없다고 하셨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곧바로 이야기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해서 자기 잘못을 껴안고 가야 한다.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꽤 간단하게 들리는 말이다. 나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오히려 생각해 볼 이유가 더 많은 셈이다. 아버지는 말씀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한 말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는 두 번씩 말씀을 하실 만큼 인내심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귀를 기울여들었다. 나는 아마도 젊은 시절에 벌써 아버지의 말씀에서 벗어났을 것이지만 다시 그 길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그 말을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고 정말로 그렇게 했다.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다. 단순해야 한다.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늦게 된다. 그것을 이해할 때는 벌써 늦은 것이다. (p272)
"당신은 지금 동전에 책임을 미루고 있어요. 하지만 모든 걸 결정하는 것은 당신이에요." "뒷면이 나올 수도 있었지." "동전은 결정권이 없어요.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견해는 달라. 내가 여기 온 것도 동전 던지기와 같은 거야. 목적지가 같으면 거기에 가는 길도 같아. 언제나 쉽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분명히 그래." (p282)
"나에겐 결정권이 없어.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p283)
"당신은 지금 내 마음을 약하게 하려고 하지만 나는 절대 거기에 굴복하지 않아.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지. 특별 대우는 없어. 동전 던지기도 마찬가지야. 이 경우엔 별 의미도 없었지. 사람들은 대개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이제 당신은 똑똑히 알게 된 거야. 당신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내 말 알아듣겠어? 내가 당신 인생에 끼어들었을 때 이미 당신 인생은 끝난 셈이었어.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어. 지금은 끝이야. 당신은 꼭 이대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겠지. 그래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른 길은 없어. 이 길뿐이야. 당신은 그저 내가 말을 바꾸기 바라고 있을 뿐이야." (p283-284)
"나이가 들면 자기가 행복해지고 싶은 만큼 행복한 법이야.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지만, 결국 예전에 행복했던 만큼 행복한 거야. 아니면 그만큼 불행하든가. 이걸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 (p289)
아저씨는 내가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다고 말했다. 그런 것은 노년의 특징이라고도 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고집 말이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부 맞는 말은 아니다. 나는 노년에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말에 동의했고 그는 그 중 한 가지를 안다고 했다. 내가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빙그레 웃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나는 그건 꽤 차가운 말이라고 했다. 그는 사실 자체보다 더 차가운 말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p307)
내가 깊이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줄곧 내 마음 속에 있던 일이 또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내 문제와 아주 무관한 일은 아닌데다 인생에서 무슨 일을 했건 그 일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정말로 너무 일찍 죽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p308)
나는 부관들에게 고칠 수 있는 일은 고치고 나머지는 그냥 놔두라고 한 번 이상 말했다. 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건 단지 짜증거리에 불과하다. (p310)
나도 그래요.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무슨 일을 했건 금방 떠났어야 옳았어요. 그런 식의 전쟁은 듣도 보도 못한 거였소. 히피 두어 명을 흠씬 두들겨 팬 적도 있지요. 아들에게 침을 뱉고 아들을 베이비킬러라고 불렀어요. 무사히 돌아온 많은 젊은이들도 아직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요. 그들 뒤에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점은 이 나라는 조각조각 갈라져 있었다는 거죠. 지금도 그렇지만 말요. 물론 히피들 잘못은 아니었소. 그곳에 간 젊은이들 잘못도 아니었소. 기껏해야 열여덟, 열아홉 살 먹은 애들이었잖소. 노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그가 많이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눈이 늙어 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흔히들 베트남이 이 나라를 굴복시켰다고 합니다. 나는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아요. 그 전부터 이미 글러먹은 나라였소. 베트남은 거기에 결정타를 먹인 셈이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쥐어주지 않고서 거길 점령하라고 했던거요. 총도 없이 그들을 보냈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사태가 더 나빠지지 않았겠소. 그런 식으로 전쟁을 하는 법은 없어요. 하느님 없이 전쟁을 하는 법은 없어요. 다음 전쟁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모르겠어요. 짐작도 못하겠소. ( p323)
324-5 329
나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돈에 팔린 존재이다. 단지 마약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알지 못할 만큼 엄청난 부가 쌓이고 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나라를 살 수 있을 만한 돈. 아니 벌써 온 나라를 사고 말았는지도. 이 나라도 살 수 있을까? 설마,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은 우리를 같이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과 한 침대에 밀어넣을게다. 그것은 법 집행의 문제도 아니다. 언제는 그랬는가. 마약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어 나자마자 아무 이유도 없이 약에 취한 적은 없다. 수백만 명이 말이다. 내가 무슨 대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내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 얼마 전에 나는 젊고 예쁜 한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녀는 단지 기자처럼 굴고 싶어했다.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보안관님의 담당 군에서 범죄가 그렇게 만연하게 되었을까요? 정당한 질문처럼 들렸다. 꽤 정당한 질문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례를 용납하게 될 때 모든 게 시작됩니다. 더 이상 존칭과 경어를 듣지 못하는 순간 눈앞에 종말이 보이는 거지요. 나는 계속 말 했다. 이런 풍조는 모든 계층에 스며들었어요.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지요? 모든 계층이요? 그러다 보면 마침내 상업 윤리가 무너지고 사람을 죽여 차에 집어넣고 사막에 버려 두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때는 모든 게 너무 늦게 됩니다. (p333-334)
또 한 가지는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줄곧 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를 보는 노인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언제나 의문이 생긴다. 예전에는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보안관이 된 50년대에는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인들은 별로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은 실성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런 점이 나를 괴롭혔다. 그들은 마치 잠에서 방금 깨어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p335)
<옮긴이의 말>
이 소설을 휘감고 있는 분위기는 묵시록적이다. 스릴러의 외관을 취하고 있는데도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라는 느낌은 거기서 나온다. 소설 첫머리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인이 벌어지고 마지막까지 살인 행각이 이어지며 피 냄새가 가시지 않지만, 평범한 스릴러에서 느낄 수 없는 텁텁한 긴장감이 전편에 서려 있다. 그 긴장감은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생사를 건 대결에서만 나오지는 않는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맞히는 추리적 요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우리는 범인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것은 장식적 수사를 억제한 냉담한 문장, '그리고(and) 문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하고~하고'의 연속, 서술과 설명이 배제된 묘사 일변도의 장면 제시, 감정이 응고된 건조한 대화로 사정없이 끌고 가는 플롯 전개의 속도감에서 나온다. (p340)
- 코맥 매카시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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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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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74816178 )
<만남> 또 바르트의 독서론을 이해한다: "사랑의 기쁨은 한 권의 책과 만나는 기쁨이다. 그 책을 읽는 독서의 기쁨이다. 사랑하는 한 권의 책이 없었다면,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부호가 없었다면, 나는 내 욕망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내 안에 있었지만 있는 줄 몰랐던, 사교계 안에서 그토록 착았지만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내 욕망의 장소를 만날 수 있었을까. 고독의 흔적들이 욕망의 기쁨으로 울리는 내 육체의 초인종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p17)
"슈베르트를 들으면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왜 눈물이 흐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슈베르트> (p21)
<나의 얼굴> 거울을 본다. 나의 얼굴을 본다. 네가 그토록 수없이, 때로는 너무 가까이, 때로는 어쩐지 먼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나의 얼굴. 이 얼굴은 이미 나의 얼굴이 아니다. 나의 얼굴은 양피지다, 팔림프세스트다. 먼저 써진 텍스트였던 나의 얼굴. 그러나 너를 만난 후 그 위에 덧써진 너의 흔적들. 그래, 지긋한 시선으로 네가 나를 볼 때마다, 나는 네가 내 얼굴에 문장들을 쓴다고 생각했었다. 내 얼굴은 이제 네가 시선으로 쓴 문장들로 가득한 텍스트다. 그 텍스트 위에 나는 또 무엇을 쓸까. (p25)
<꿈> 꿈에서 깨어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나는 그 아픔을 기쁨으로 포옹한다. 그 아픔이 있을 때, 당신이 꿈의 무덤 속에서 있을 때, 나는 또 그 부재의 땅으로 내려가 지나가는 당신을 빈 정거장처럼 만날 수 있으니까. (p33)
<통점> 나 또한 그렇다. 나도 추억의 통점이 내 몸속에 더 깊이 못 박히기를 바란다. 그 통점은 나의 장기가 되어 내 안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이니까. 그 통정이 사라지면 그 사람도 영원히 나와 상관없는 부재의 존재가 되고 말 테니까. (p39)
<잔인한 침묵> "당신의 침묵 앞에서 나는 서서히 미쳐가고 있어요" 이별 뒤에는 말들이 사라진다. 말들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침묵의 진공이 된다('저 우주의 진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실어증 환자가 된다. 나는 말을 잃는다.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저런 일들,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나서 말하는 일 이 너무 힘들어진다. 어느 때는 억지로 말을 하다가 그만 구토를 느끼기도 한다. 야누스의 구토 그건 말하기가 너무 역겹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또 너무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침묵은 내 안에 말들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온통 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들의 총합이다. 소리가 되지 못하는 말들, 침묵의 형벌에 처해진 말들, 저주받은 말들,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들, 이 말들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구토뿐이다. (p40)
<포옹> 때로 나는 나를 껴안는다. 꼭 껴안는다. 너를 껴안듯이. (p49)
<눈물> 사랑은 두 번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고 있을 때와 사랑이 끝났을 때, 그 사람 앞에서 흐르는 눈물과 그 사람의 부재 앞에서 흐르는 눈물. 그 사람 앞에서 울 때, 그 눈물은 기호다. 그 눈물 안에는 포즈가 있다: "보세요 난 지금 이렇게 울고 있잖아요. 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나빠요...... " 사랑의 눈물은 갈 곳이 있다. 흘러서 그 사람에게로 도착하고 그러면 멈춘다. 그 사람이 같이 울어주거나 나를 안아주니까: "미안해요 나를 용서해요 이제 다시 아프게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눈물은 당신이 떠난 뒤에도 흐른다. 이때 눈물은 느닷없이 흐른다. 니체가 말하는 '때 없음(das Unzeitgemaesse)' 의 사건처럼. 이 눈물에는 기호도 포즈도 없다. 보여줄 사람도, 보아줄 사람도 없으므로 도착할 곳이 없다. 그래서 부재의 눈물은 멈출 수가 없다. 흐르고 또 흐르기만 하다가 결국, 하회의 물길처럼,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고인다. 눈물을 흘릴수록 나는 비워지는게 아니라 자꾸만 차올라서 마침내 눈물의 수조가 된다("대동강은 언제나 마를까, 이렇게 나날이 눈물이 더하니......"). 눈물은 더 흐르고 수조는 넘치고 나는 목이 되어 넘쳐서 흐르는 눈물의 물길을 정처 없이 떠내려간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그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곳으로......... (p51-52)
<분노> 그러나 나를 다시 찾아도 나의 슬픔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석고상처럼, 화석처럼,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은 나의 슬픔을 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슬픔 곁을 지나쳐간다. 마치 파도들이 암초를 지나가도 암초는 남듯이. 그리하여 시간이 증명하는 건 시간이 아니다. 그건 슬픔이다. 사토리는 슬픔이다. (p53-54)
<미련> 그리하여 나는 깨닫는다, 사라진 그 사람을 여전히 간직하는 건 나의 육체뿐이라는 걸. 시간에 의해서 순간순간 낡아 가면서도 그러나 육체는 앞으로만 가는 시간을 거꾸로 걸아간다는 걸. 과거로, 그 사람이 있었던 시간으로, 그 사람이 있었던 공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아무리 설득해도 나의 육체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듣지 않고 울기만 하는 고집 센 아이처럼...... (p53) 사랑이 끝나면 약속은 사라지는가? 실현과 헤어지면 약속도 끝나는가? 아니다. 그래도 약속은 남는다. 그 사람은 떠났어도, 실현은 불가능해도, 나는 약속을 간직한다(어느 때는 혼자 약속하고 그때 거기로 가서 빈 의자와 마주 앉았다 돌아오기도 한다. 돌아오면서 나는 스스로를 비웃는다. 이 바보야, 라고). 내가 약속을 버리지 못하는 건 애착이나 욕망 때문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이다. 약속마저 버리면 그 사람도 완전히 타인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텅빈 약속을 껴안고 사는 건 너무 절망적이다. 그 약속의 공허를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날아간 연 끈처럼 남아 있는 실현이 버리고간 약속의 실을 실현의 대체물과 연결한다. 그것이 희망이다. 그 사람이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는,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실현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잠시 연기되었을 뿐이라는 희망. (p59-60)
<비참함> "나는 운다" 어느 날 아침, 깨어나서 나는 운다. 아이처럼 훌쩍인다. 눈물이 흐르지만 왜인지 모른다.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지나가지만 왜인지 모른다. 아도르노: "슈베르트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 그러나 왜 눈물이 흐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내가 아는 건 가엾음뿐이다. 나는 내가 가엾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자고 깨어나고 일하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일들이 모두 가엾다. 이럴 때는 심지어 지금 네가 나의 베개 옆에 있어도 가엾음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너의 포근한 숨소리를 들어도, 너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가엾어서, 그냥 사는 일이 가엾기만 해서.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말했던 걸까:"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은 ���람으로 태어나는 일이다." (p69)
<사라짐> 이별 뒤에는 긴 피곤함이 있다. 나는 그 피곤함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 피곤함에게 나를 맡겨버린다. 그러면서 나는 사라져간다. 피곤함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흩어지고 녹아들면서, 마치 푸른 담배 연기가 대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듯이. (p77) 이후 나는 딱딱해졌다. 가정이, 학교가, 사회가 나를 딱딱하라고 가르쳤고, 나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나는 딱딱함이 싫었다. 무거움이 싫었다.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고 녹아버리고 싶었고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다. 그때 당신이 뗏목처럼 떠내려왔고, 나는 그 뗏목을 타고 사라질 수 있었다. 당신의 가슴속으로, 목소리 속으로, 냄새 속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건 사라질 수 있음이라는 걸 나는 당신에게서 배웠다. 그러나 당신은 떠나고, 이별의 곤비함만이 남았다. 당신은 부재해도 당신이 가르쳐준 사라져감의 행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별의 곤비함 속으로 사라져간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끝없이 사라져간다. 나는 당신에게로 사라 져가는 걸까. 당신에게로 도착하려는 걸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재회는 없다는 걸, 당신은 도착지가 아니라는 걸. 그런데도 사라짐은 멈추지 않는다. 이별의 사라짐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이별의 사라짐은 도착 없는 사라짐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당신마저 초과한다. 부재의 불가능성마저 초과한다. 그 어떤 불가능성도, 경계도 이 사라짐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사라짐만이 목적인 사라짐. 이 사라짐은 어디로 가는 걸까, 유년으로 가는 걸까, 내가 다녀온 어디인지도 모른 어느 곳으로 가는 걸까. 그런데 거기는 어디일까. (p78-80)
<허전함> 사랑과는 이별을 해도 이별과는 이별할 수 없는 걸까? 칼 하인츠 보러: "이별은 존재의 원풍경이다. 우리는 이별과 더불어 태어나서 이별과 더불어 살아간다." (p86)
<추억> 그 사람이 떠나면 추억이 남는다. 나는 그 추억을 꼭 붙든다. 추억이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워서. 추억이 떠나면 나는 그 사람을 잊고 그 사람도 완전히 나를 떠나고 말까 봐. 나는 망각의 두려움과 맞서서 추억에 매달린다. 하루 종일을 추억으로 지새운다. 하지만 부재의 추억은 얼마나 허망하고 괴로운 것인지. 안개를 움켜쥐는 것처럼 그 사람의 부재만을 확인시키는 추억들. 나는 차츰 추억에 지친다. 추억이 싫어지고 미워진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이지 추억이 아니야, 라고 격렬하게 항의한다. 그런데 나의 항의에 추억도 항의하는 걸까. 추억은 물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집요하게 내게 매달린다. 그런데 왜일까? 왜 추억은 물러가지 않는 걸까? 내가 그 사람에 매달리는 것처럼, 왜 추억도 나를 떠나려 하지 않는 걸까? 그건 혹시, 나는 이별의 주체가 되어 상상한다. 추억이 그 사람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 추억하면 추억 속에 늘 있던 그 사람의 얼굴). 추억이 물러가지 않는 건 그 사람이 부재 속에서 나에게 매달리고 있기 때문인 건 아닐까. 그래, 그 사람은 떠났지만 아직 나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추억을 나처럼 떠나지 못하는 거야. 내가 추억을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추억이 나를 떠나지 못하는 거야. 아니라면 왜 이렇게 추억이 집요할 수 있겠어? 그러자 나는 갑자기 온몸이 아파 오기 시작한다. 세상에 어떻게 내가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내가 그 사람을 내게서 쫓아버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는 중얼거리면서 추억을 다시 꼭 붙든다. 추억 속으로 뛰어든다. 그 사람에게 온 마음으로 용서를 빌면서...... (p101-102)
<돌아오는 말들> 사랑이 끝나면 당신은 떠나도 말들은 돌아온다. 당신이 내게 했던 다정한 말들: 보고 싶어요, 언제 오나요?, 날 많이 생각하나요? 사랑해요... 그 말들은 나를 괴롭게 한다. 그 말들은 당신의 부재만을 확인시키니까. 그 말들은 유효기간이 끝났으니까. 그 말들 뒤에서 당신은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이제 당신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또 하나의 말들이 돌아온다. 그건 내가 당신에게 했던 사랑의 말들이다. 당신이 온몸을 열고 들어주어서, 당신의 몸속으로 들어가 저장된 나의 말들. 당신은 떠나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도 내 사랑의 말들은 지금도 당신의 몸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의 말들이 내 몸 안에 들어 있듯이. 그리하여 너무 외로울 때,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도 갈 곳이 어디에도 없을 때, 나는 나의 말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당신의 육체 안에서 지금도 여전히 당신의 온기, 냄새, 촉감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내 사랑의 말들을. 나는 그 말들을 꼭 껴안는다. 그 말들을 만지고 냄새 맡고 느낀다. 그리고 어느 사이 달아오른 몸으로, 당신이 곁에 있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너무 귀여워요, 너무 멋있어요.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p107-108)
<결핍> 그러나 또 하나의 부재가 ���다. 당신을 여전히 욕망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여전히 애착하기 때문에 나에게 존재하는 부재. 이 부재는 당신의 없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주관적이며 상상적인 부재이다. 나의 욕망과 애착이 만들어놓은, 그러나 채울 수 없으므로 반드시 채워져야하는 결핍 (Desiderat)으로 존재하는 부재. 그러므로 당신이 떠났다는 객관적 사실은 이 결핍의 부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름 아닌 그 결핍이 내가 당신에게 애착하는 상상의 부재를 만들어내니까. 마찬가지로 여전히 당신이 내 곁에 있다 해도 당신은 나에게 부재하지 않고 그냥 없음일 수 있다. 내가 더는 당신을 욕망하지 않으면, 당신은 나에게 결핍으로 부재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있지만 그러나 없음이니까. (p110) 없음은 있음의 반대말이 아니다. 없음은 있음과 무관함이다. 거리에서 스치는 사람들, 영화 속에서 출몰하는 얼굴들, 광고 속의 여자들, 신문 안의 정치가들 그들은 내게 있지만 그러나 없다. 보고 보이지만 그러나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다만 덧없고 무의미한 익명의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보는 것만을 본다'라는 베냐민의 말은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만을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 앞에 있지만, 나를 보지도 않고, 또 내가 보지도 않는 것들은 내게 있으면서도 사실은 없다. 그것들은 내게 부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내게 없음일 뿐이다. (p111)
<황홀경> "우리는 지극한 적막 속에 앉아 있었다" 슬픔의 끝에는 황홀경이 있다. 당신의 부재가 지극한 기쁨으로 타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동안의 모든 슬픔과 외로움과 애태움과 아픔이 빛나는 이 순간의 땔감들이었던 것처럼. 이별의 주체는 고행의 나무꾼이다. 이 찬란한 빛의 순간을 밝히는 땔감들을 구하려고 부재의 고통스러운 숲속을 헤매야 하는 고행의 나무꾼. 하데스로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처럼 나는 하강한다.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다 치르며 부재의 바닥에 도착한다. 그리고 거기서 한 놀라운 영역을 만난다. 침묵과 적요의 영역. 모든 허구의 언어들이 정지된 자리에서 사랑의 언어들이 생성되는 영역,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시끄러움이 정지되고 생의 기쁨들이 솟아오르는 영역, 거기에서 나는 깨닫는다. 당신은 나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는 걸, 당신은 먼저 이곳으로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슬픔의 끝에는 부재가 부재의 끝에는 실재가 있는 걸까. 그래서 어머니를 잃어버린 긴 애도의 끝에서 바르트도 말했던 걸까 "바쇼의 긴 여행기. 그중에서 카시노의 절을 방문한 바쇼가 한 선사와 만나는 장면: '우리는 오랫동안 지극한 적막 속에 함께 앉아 있었다." 지극한 적막: 그건 타오르는 적막이다. 지금 뜨겁게 타오르 는 당신의 부재처럼............... (p115-116)
<거식증> 카프카의 '단식 광대'도 슬픔에 빠졌던 게 아닐까. 그도 큰 사랑을 잃고 입맛을 잃어버린 이별의 주체가 아니었을까. 사랑의 슬픔으로 매일매일을 굶다가 서커스단으로 들어와서 광대가 되었던 건 아닐까. 단식 광대는 철창 우리 안에 앉아서 굶는 걸 공연한다. 잠도 자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면서 굶기의 기술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건 굶기의 기술이 아니다. 그건 슬픔이다. 일체의 음식이 부재하는 굶기의 철창 안에 앉아서 그는 음식의 거부가 아니라 저 입안의 부재 속으로, 사랑의 슬픔 속으로 떠내려간다. 텅빈 입안의 공허, 부재의 슬픔, 그 끝까지 부표처럼 표류한다. (p126)
<사진> "나는 당신의 앨범이에요" 산다는 건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건, 매 순간 우리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 우리 자신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존재하는 단 한 번의 우리와 매순간 이별하면서 매 순간 다음 순간의 우리로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 (p139) 사랑은 이 본질적 허무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난 것일 아닐까. 이 본질적 허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만 했던 건 아닐까. 매 순간 떠나야 하는, 이별해야 하는, 덧없이 사라져야만 하는 나를 떠나지 못하도록, 사라지지 못하도록 꼭 붙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했던 건 아닐까. 덧없이 사라지는 나를 남겨주고 싶은, 저장하고 싶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어서 그 사람 안에 간직하고 싶은, 그런 누군가를 우리는 애타게 그리워하고 찾았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때 그 누군가가 축복처럼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닐까. 돌아보면 당신도 그렇게 나에게 왔다. 와서 빛났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나에게 다 주면서 찬란하게 빛났다. 오이포리(Euphorie)처럼,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촛불처럼, 몰락하는 것들의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던 당신의 순간들...... 그 순간들 앞에서 얼마나 자주 나는 '안돼, 사라지면 안 돼!'라고 안타깝게 외쳐야만 했었는지. 덧없이 사라지는 당신을 멈추게 하려고, 그 빛나는 순간들을 꼭 붙들기 위해서, 애타는 사진가가 되어 사랑의 셔터를 누르곤했었는지. .....그리고 당신은 지나갔다. 이제 그 아름다운 당신은, 그 빛나는 순간들의 당신은 당신것이 아니다. 그 아름다운 당신을 당신은 이미 지나갔으니까. 그 빛나는 당신은, 당신의 순간들은 모두가 나의 것이다. 지나가면서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들을 다 나에게 주었으니까. 사랑하는 아내 오키프의 모든 것을 찍으려 했던 스티글리츠처럼 나는 당신의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랑의 셔터를 눌렀으니까. 그리하여 당신은 떠나갔어도 나에게 주었던 당신의 순간들은 나에게 남아 있다. 당신은 떠나버린 그 아름다운 당신(들)은 모두 내 안에 사진으로 남아있다. (p142) 바르트에게 사진은 '어두운 방(camera obscura)'이 아니다. 사진은 '밝은 방(camera lucida)'이다. 살아 있는 것이 이미지로 고정되는 죽음의 방, 그러나 빛으로 찬란한 방. 사라진 순간들이 '그때 거기에 있었음'의 빛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방. 그때 거기에서 사라진 당신의 순간들이 지금 여기에서 기적처럼, 부활처럼, 당신의 빛나는 모습들로 다시 태어나는 방. 당신이 남긴 부재의 공간도 밝은 방이다. 당신이 없는, 당신의 순간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떠난 당신이 매번 수없이 다시 태어나 내게로 돌아오는 방...... 어떻게 내가 그 부재의 방을 떠날 수가 있단 말인가? (p143)
<고백> "미안해요, 그사이에 몇 번 다른 사람을 만났어요" 이별하는 시간은 얼마나 잔인한지...... 그건 그 시간이 연애가 끝나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그 시간이 갑자기 내가 신부라도 된 것처럼, 내가 당신의 고해성사를 치러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잠깐 머뭇거리지만, 이윽고 오랜 부담을 털어버리는 사람처럼, 당신은 단호하고도 자명한 목소리로 내게 고백한다: "미안해요. 그사이에 몇 번 다른 사람을 만났어요." 나는 놀란다. 하지만 너무 많이 놀라지는 않는다. 그냥 입술을 조금 세게 물거나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묵묵히 당신의 고백을 승인한다. 그런 줄 알았다는 것처럼, 짐작이 맞았다는 것처럼, 이미 선고를 받고 집행의 통보를 기다려온 사형수처럼 오히려 침착하게. 잔인한 건 당신의 고백이 아니다. 잔인한 건 나의 침착함이다. 이 침착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이 침착함을 어디서 배운 걸까? (p151)
그러나 또 하나의 순간이 있다. 길고도 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사랑의 순간이 있다. 그건 만남이 아니라 만남 뒤의 순간, 이별의 순간이다. 부재는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순간이 갇혀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 안에서 나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p158)
<사진> "당신의 사진이 없어서 얼머나 다행인지요...." 내게는 당신의 사진이 없다. 나는 왜 당신의 사진을 갖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건 당신과의 이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이 무슨 필요람? 나는 보고 싶으면 당신을 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그깟 거짓 이미지가 무슨 소용이람? 만질 수도 안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는 그런 당신의 이미지가 무슨 소용이람............... 당신은 내게 사진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때 거기에 그랬음'으로만 존재하는 애인이다. 사진이 아닌 당신은, 이별 후의 당신은 나에게 타인일 뿐이다. 그 후의 당신이 없다. 당신은 그때 죽은 걸까. 나는 당신의 장례를 치른 걸까. 시오랑은 말한다: "경쾌한 슬픔도 있다. 어젯밤 나는 나의 전생에 대한 장례식에 다녀왔다." 이별도 장례식인지 모른다. 그때 나는 이미 당신의 장례를 치렀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후 당신은 내게 죽은 사람인지 모른다. 당신은 나에게 죽은 사람일까. 더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일까. 당신에게는 내게 고통을 가할 자격이 없는 걸까. 그러나 사진이 있다. 찍지 않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당신의 포트레이트가 있다. 그 초상 사진 안에서 당신은 '그때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그리하여 부재의 공간은 사진의 공간이다. 외부와 차단된, 지금의 당신과 무관한 프레임 공간, 그것이 내게는 부재의 공간이다. 그텅 빈 공간 안에서 당신은 나만의 당신이다. 그때 거기에서 그렇게 당신이 나만의 애인이었듯이.. (p159-160)
<착한 마음> 사랑은 결국 끝나고 만다. 그 끝남의 운명은 아무리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라도 배신과 패배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별이란 무엇일까. 이별은 이중적이다. 이별은 사랑이 패배와 배신으로 건너가는 분기점이다. 그러나 이별은 동시에 사랑이 그 운명으로부터 구원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때 이별의 주체는 태어난다. (p163)
<배신> 미움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원한이 되고 원한은 복수의 음모가 되는 걸까. 나도 다른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건 당신이 미워서가 아니라는 걸. 오히려 당신을 미워하는 내가 미워서라는 걸. 그 미움을 멈출 수가 없는 내가 두려웠다는 걸. 그래서 또 다른 사랑이 필요했다는 걸. 당신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따뜻함이, 다정함이 필요했었다는 걸. 그 따뜻함과 다정함에 기대어서만 당신에 대한 사랑을 지킬 수 있었다는 걸....... (p166)
<일> 당신이 떠나면, 나는 내가 제일 잘 숨는 곳으로 도피한다. 그건 일이다. 나는 일들을 부탁하고 모아서 그 안으로 파묻힌다. 낮이고 밤이고 일을 한다. 사이도 없이 일을 하면서 지쳐 간다. 지치면 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 일들을 집어 치운다: 이건 일이 아니야. 이건 노동일 뿐이야. 일과 노동은 다르다. 노동에는 없는 것이 일에는 있다. 그건 '사이'다. 일과 일 도중에 늘 존재하는 사이들.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얼마나 자주 나는 고개를 들어 뜻 없이 창밖을 바라보는가. 그러면 언뜻언뜻 지나가는 사이들. 그 사이에 당신이 있고 약속이 있고 만남이 있다. 자주 묻던 당신: 날 많이 생각하나요? 나의 대답: 당신은 사이사이 지나가요................ 당신이 없으면 사이도 없다. 사이가 없으면 일도 없다. 그저 교환을 위한 노동만이 있을 뿐. (p176) 카네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그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기념비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것이 나의 글쓰기가 죽음과 맞서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 <합스테이드에서의 기록들> (p177)
<사랑과 죽음> 사랑이 끝나면 죽음만이 남는다는 것. 죽음에게 내던져진 다는 것. 그래서 네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건 당연하다. 나는 너의 새로운 사랑을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 이외의 그 누구도 나는 새로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죽음에게 내던져진다. 봉헌된다. 나는 그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죽음의 제단에 제물로 바침을 당해도 저항하지 않는 사람, 그는 사랑이 끝난 사람, 사랑을 새로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p180)
<환> "그래도 나는 별이 되고 싶지는 않아. 밤새워 눈을 뜨고 아름다운 지상을 내려다보고 싶지 않아. 난 차라리 지상으로 내려와 그대의 품속에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어. 꿈을 꾸고 싶어...." 존 키츠 <정다운 별> (p182)
<꿈> "제발 꿈속으로 찾아와주세요" 그래서 나는 깨달았어요. 당신은 꿈속으로 올 수가 없다는 걸. 당신은 이미 내 곁에 있다는 걸. 부재 속에서 나는 당신과 더는 분리될 수 없도록 밀착되어 있다는 걸, 용해되어 있다는 걸...... 이 부재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우리가 꿈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건 그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우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얼굴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람의 얼굴을 자꾸만 새로운 얼굴로 불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어진 뒤에 돌아와서 다시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려 해도 그토록 다시 보고 싶은 그 얼굴은 붙잡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프루스트는 말한다: "우리가 그 사람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게 되는 건 사랑이 끝났을 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만 자책하게 된다. 그 사람의 얼굴이 다시 생각나지 않는 건, 내가 그 사람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p193-194)
<비극> 이 비극을 우리는 끈질기게 살아간다. 사랑이 이미 끝났다는 걸 알면서 사랑을 멈추지도 보내지도 못한다. 그렇게 사랑은 두 번의 비극이다. (p197)
<호기심> 다 이루지 못하고 끝난 사랑은 끝나지 못한다. 나는 이별을 받아들여도 사랑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랑의 호기심은 여전히 결핍으로 아파하고 허기로 배고파한다. 그 배고픔으로 나는 깨닫는다. 나는 당신을 모두 알지 못했다. 아니 전혀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므로 당신은 나에게 부재했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당신이 내 곁에 있기나 했었던가요?"라고 당신은 내게 실재한 적이 없었다. 당신은 늘 내게 호기심과 결핍 그리고 갈망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당신은 반쯤만 실재하는, 아니 차라리 부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결핍의 주체였고 당신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그 결핍의 공간은, 집요해지기만 하는 호기심으로, 더 알 것이 증폭되는 당신의 존재 때문에, 채워지기는커녕 나날이 넓어지기만 했었다. 당신은 내게 다가오면서 다가올수록 멀어졌다. 내게 알려지면서 점점 미지의 사람이었고, 또렷해질수록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p202) 호기심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허기로 고통받는다. 당신은 처음부터 부재였다. 그 부재가 나를 불타게 했었다. 배고프게 했었다. 왜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되는 걸까? (p203)
<목소리> 낡음은 들어 있지 않은 것, 새로움만이 안에, 울림 속에 들어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의 목소리라는 걸 나는 알아요. 모든 소리가, 음악마저도 그저 부재의 울림이고 흔적일 뿐이라는 걸 나는 알아요. 그렇지만 사랑의 목소리에는 부재가 없다는 걸 나는 알아요. 오로지 현존만이, 시간마저도 가볍게 뛰어넘는 현존만이, 부재의 사슬을 끊어버린 현존만이, 충만한 부재 속의 현존만이 사랑의 목소리라는 걸 나는 알아요, 그 누가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고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어요. (p214-215)
<세상의 모든 풍경> "나는 지금도 사방을 두리번거려요" 이별은 왜 왔을까. 우리는 왜 헤어져야 했을까. 헤어짐의 이유는 많다. 하지만 뒤늦게 알게 되는 이유들은 이미 이유가 아니다. 이유에도 이유가 있다. 그 이유 때문에 일어나게 될 불행한 사건을 막아주고 멈추게 할 수 있는 힘을 아직 갖고 있을 때에만 그 이유들에게 이유가 있다. 이제는 알아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는 아픔의 웅덩이에 삽질만 더하는 그런 이유들은 이유의 자격이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이유들이 무슨 존재의 이유를 지닐까. 아아, 만일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미리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하지만 그게 또 무슨 소용인가. 사랑에 '만일......'은 없다.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만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당신이 그걸 내게 알려주었더라면...... 그러면 아마도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그토록 야속해하지는 않았을 텐데, 의심하지는 않았을 텐데, 실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떠나야 한다고 결심하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만일......'은 사랑의 언어가 아니다. 그건 사랑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말, 사랑의 부재 안에서만 존재하는 헛말일 뿐이다. 이미 항소할 수 없는 판결이 내려졌을 때, 과녁에 박힌 화살이 되고 말았을 때 비로소 얼굴을 보여주는 진실의 운명처럼, 늘 지각할 수밖에 없는, 헛짚을 수밖에 없는, 다시는 취소할 수가 없는, 이미 엎어지고 저질러지고 만, 곪을 때는 모르다가 마침내 터져서 지울 수 없는 고통의 흉터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고 만져지는 종기와 같은 것일 뿐이다. 결정적인 것은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이다. 이것이 사랑과 이별의 시간 형식이다. 지금이라도 멀리 여행을 떠날까요? 지금이라도 멀리 도망갈까요?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까요?라고 애타게 물어봐야, 미안해요. 너무 늦었어요. 라고 고개를 흔드는 당신은 되돌릴 수 없는 시곗바���이다. 냉정하게 저 갈 길만을 가는 그토록 가혹하고도 잔인한 선언. 지금은 안 돼요.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프루스트가 뼈아픈 후회의 마음으로 수도 없이 되뇌는 말: "그리하여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p217-219)
<낮은 신발> 그리고 부재. 단어도 물건도 없는 온전한 텅 빔. 그 부재 안에서 나는 여전히 항의한다. 부재는 여섯 번째 봉인이다. 그 봉인을 떼면 텅 빔뿐이지만 단어가 사라지고 물건이 사라져도 사랑의 법칙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부재를 통해서 말한다. 이 사랑의 부재 안에서 당신의 부재는 절망과 체념이 아니라 신뢰와 확신의 징표다. 아니라면 당신이 사라진 부재 속에서, 사랑의 법칙이 부재하는 부재의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p233)
<최후의 만찬> "나는 당신이 필요했어. 당신이 없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았어. 그래서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당신이 있는 곳으로 당신 곁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어. 그런데 이렇게 당신을 다시 보니까 웬일인지 다른 생각이 들어. 지금은 당신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 당신 없이도 그냥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왼손잡이 여인> (p247-248)
하지만 나는 알리스처럼 울지 않는다. 브루노처럼 고백하지도 않는다. 당신처럼 시를 쓰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박재상의 부인처럼 꼼짝도 안 하고 돌이 되어 당신의 부재 속에 앉아 있다. 당신이 떠나간 그 순수의 품속에 대신 앉아 있다. 그러면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다. 회가 된 당신을 먹으면서 나는 이미 비순수가 되었으니까, 내가 아닌 당신이 되어버렸으니까. 순수는 비순수가 되어도 비순수는 다시 순수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것이 사랑이고 이별이니까. (p249-250)
- 김진영 , ' 이별의 푸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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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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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8961471633 )
제1부 들뢰즈의 존재론
그런데 여기에 정말 중요한 사실 하나가 부과된다. 그것은 존재는 그가 어떤 경우를 통해서 이야기되든 반드시 유일하고 같은 단 하나의 의미로만 이야기된다는 사실이다. 들뢰즈는 말한다. 존재는 존재 그 자신을 통해서 이야기되든, 존재자들을 통해서 이야기 되든 유일하고 같은 단 하나의 의미로만 이야기 된다. 그리고 들뢰즈에게서 '존재=신=생명=잠재적인것=.....'의 등식이 성립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말은 이제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신은 신 자신을 통해서 이야기되든, 양태들을 통해서 이야기되든 유일하고 같은 단 하나의 의미로만 이야기된다(스피노자-들뢰즈의 경우). 생명은 생명 그 자신을 통해서 이야기되든, 생명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되든 유일하고 같은 단 하나의 의미로만 이야기 된다(베르그손-들뢰즈의 경우). 잠재적인것은 잠재적인 것 자신을 통해서 이야기되든, 현실적인 것들을 통해서 이야기되든 유일하고 같은 단 하나의 의미로만 이야기된다(들뢰즈의 경우). (p17)
27
31 32 33
35
40-1
44-5, 6,
들뢰즈에게 있어서 우리가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산다는 말, 또는 내재적인 삶을 산다는 말은 평면을 이런저런 영토로 분할하는 깊게 패인 줄(보편성)과 전쟁을 벌여서 그 줄에 포획되었던 우리의 삶을 해방시키는 일,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서로 다른 줄들을 무한히 생산하는 진정한 전쟁 기계가 되도록 하는 일을 말한다. (...) 즉, 인간은 그 자체가 반시대적 전쟁기계다. (p47)
47----==== 49-50 -------
54
즉, 미분의 존재론적 의미가 잠재적 차원 속에 들어가기요, 적분의 존재론적 의미가 현실적 차원 속에 들어가기인 것이다. (p67) 67== *68-73 (74) 74-5 77===미분, 78====적분 (79) 81-2 105, 106-7
제2부 들뢰즈와 베이컨의 만남
즉 들뢰즈에게 있어서 사유란 존재에 대하여 무언가 일관되고 안정적인 평면을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 아래 철학, 과학, 예술은 우리가 하는 사유의 세 형식을 이룬다. (p115) 114-115------======
따라서 이로부터 예술의 정의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예술은 곧 감각의 구현이다. 즉 감각-줄을 그음으로써 감각을 발생시키고, 이렇게 발생한 감각에 질료를 입힌 예술 작품을 창조함으로써 감각을 구현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요, 예술이 하는 일인 것이다. 예술가는 이렇게 감각을 구현한 예술 작품을 창조함으로써, 또는 창조된 예술 작품을 통해 감각의 평면을 건설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계를 구현 또는 복원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사유되기 이전의 세계, 그 자체로서의 세계는 카오스 세계다. 그런데 바로 이 카오스 세계를 철학자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예술가 또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감각의 평면을 건설함으로써 일관되고 안정적인 세계로 구현 또는 복원한다. 사유가 건드리게 되는 카오스 세계의 그 무한함을 가능한 한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들뢰즈가 생각하는 예술의 목적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것은 무한한 카오스 세계를 유한한 예술 작품 속에 그 모습 그대로 담는 것, 말하자면 예술 작품을 통해 무한한 카오스 세계를 구현 또는 복원하는 것이다. (p120-121) 117=, 119=, 120= 121-122-------
(123) 124-5===
한편 철학은 예술이 건설하고 창조한 것을 그 모습 그대로 개념화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들뢰즈의 예술론 또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철학자 들뢰즈가 예술을 그 모습 그대로 개념화할 경우, 이렇게 들뢰즈에 의해서 개념을 통해 언어적으로 옮겨진 예술이란 곧 들뢰즈의 예술에 관한 생각, 즉 들뢰즈 고유의 예술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이 예술론에 따르면 예를 들어 예술 작품은 존재 또는 무한한 카오스 세계가 유한한 질료 속에서 구현된 것을 말한다. 혹은 존재 또는 무한한 카오스 세계에 대한 예술적 주체의 선험적이고 비재현적인 감각이 유한한 질료 속에 집약된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들뢰즈의 예술론에 따르면 예술가가 하는 일 또는 예술가의 과업은 바로 이와 같은 선험적이고 비재현적인 감각의 구현이 된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 행위를 통해 생산해야 하는 실질적 결과물인 예술 작품이 바로 이 선험적이고 비재현적인 감각의 집약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예술론에 따르면 화가의 과업은 선험적이고 비재현적인 감각 그리기가 된다. 당연히 음악가의 과업은 이와 같은 감각 들리게 하기가 될 것이며, 요리사의 과업 또한 이와 같은 감각 맛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감각 그리기, 들리게 하기, 맛내기는 그 자체가 매 순간 감각의 평면을 살기, 감각의 평면을 건설하기가 될 것이다. (p127) 127---
베이컨의 그림은 형상Figure, 윤곽contour, 아플라aplat의 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131)=== 132-4
한편 베이커은 아플라를 가리켜서 특별히 골격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 같은 언급은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베이컨의 그림과 들뢰즈의 존재론 사이에 존재하는 동형 관계와 관련해서 함축하는 바가 매우 크다. 왜냐하면 베이컨의 그림에서 아플라가 골격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존재가 모든 존재자의 토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결국 아플라가 존재론적으로 볼 때 존재에 대응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베이컨의 그림에서 아플라가 특별히 단일 색조로 처리된 점 또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갈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존재가 일의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존재에 대응하는 아플라 역시 어떤 식으로든 일의적 특징(여기에서는 단일 색조의 특징)을 가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p141-142) *131-142====
145 (148) *149-151
먼저 첫 번째로, 우리는 베이컨의 그림과 들뢰즈의 존재론 사이에 존재하는 동형 관계에 근거해서 화가 베이컨의 과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우선 들뢰즈에 따르면 존재론은 카오스 세계를 그 모습 그대로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언어적으로 사유와 소통이 가능한 세계로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술인 회화 또한 카오스 세계를 그 모습 그대로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유한한 질료를 입혀서 구현해야 한다. 이처럼 들뢰즈와 베이컨을 거론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존재론과 회화가 서로 동형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회화의 과업이 힘(존재론이 언어적으로 구원한 카오스 세계의 힘)을 그리는 일이라고 전혀 주저함 없이 단언할 수 있다. "예술에서는, 또 음악과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는 형태를 재생산하거나 발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힘을 포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 어떤 예술도 구상적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클레의 유명한 공식 '가시적인 것을 제히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이지 않은 것을] 가시적이게 한다.'가 의미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회화의 과업은 가시적이지 않은 힘을 가시적이게 하는 시도와 같은 것으로 정의된다. 마찬가지로 음악 또한 들리지 않는 힘을 들리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152) 152------ 154-155
베이컨의 그림은 들뢰즈 존재론의 또 다른 표현이다. (p156) 156=== 160, 161
(162) 164 (1)165-6 (2)167-8 (3)170-2
(175) 176 177-180 181-3-----
베이컨의 삼면화는 세 형상의 매개가 배제된 종합을 표현함으로써 들뢰즈 존재론의 운동과 관련된 매개가 배제된 종합, 즉 존재의 생산 운동, 용해 운동, 긍정 운동의 매개가 배제된 종합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p193) *188-191==, 193=== (194) 195-7
"(....) 추락은 수준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긴장은 추락 속에서 체험된다. (...) 어떤 감각이든, 감각이 지닌 강도상의 실재성은 상승의 실재성이 아니라 다소간 '크기'를 가진 깊이를 향해서 내려가는 하강의 실재성이다. (...) 추락은 감각 속에서 가장 살아 있는 것이고, 감각은 추락 속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서 체험된다. 이런 이유로 강도상의 추락은 공간적 하강뿐 아니라 상승과도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강도상의 추락은 팽창, 확장 또는 흩어짐과 일치할 수 있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위축 또는 수축과도 일치할 수 있다. 강도상의 추락은 감소와 일치할 수 있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증가와도 일치할 수 있다. 요컨대 전개되는 모든 것은 추락이다(실제로 감소를 통한 전개가 있다.) 추락은 정확하게 말해 능동적 리듬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제 각 그림에서 무엇이 추락에 해당하는지 (감각을 통해서) 결정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각 그림마다 달라지는 능동적 리듬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림에 나타나는 [능동적 리듬과] 대립할 수 있는 성격은 수동적 리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베이컨의 삼면화에는 일종의 법칙과도 같은 등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선적인것=능동적인 것=하강하는 것' 이라는 등식이다. (p199-200) 199-200----
들뢰즈의 존재론을 이야기할 때 이미 보았듯이 들뢰즈에게 있어서 생산 역능인 존재는 그 자체가 운동이기도 하다. 즉 존재는 일의적으로 종합하는 세 운동, 또는 세 운동이 일의적으로 종합된 단 하나의 운동이다. 그런데 방금 확인했듯이 삼면화는 존재의 세 운동의 일의적인 종합을 표현한다. 즉 삼면화가 일의적으로 종합하는 세 운동, 또는 세 운동이 일의적으로 종합된 하나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삼면화는 일의적인 운동으로서의 존재를 그 모습 그대로 구현한 그림이 된다. 요컨대 '삼면화=구현된 일의적 존재'인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삼면화의 원칙이 존재의 일의적인 종합을 가리키는 분리적인 종합, 즉 최대한의 분리와 최대한의 합치인 것은 이 때문이다. "빛 또는 색의 합치가 즉각적으로 자신 위에서 형상들과 아플라 사이의 관계 [종합 관계]를 취한다면, 또한 이로부터 형상들이 빛과 색 속에서 최대한의 분리에 도달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삼면화의 원칙이다. 즉 형상들의 최대한의 나눔을 겨냥한 빛과 색의 최대한의 합치. (...) 세 그림은 분리되어 있지만 더 이상 고립되어 있지 않다. [삼면화에서] 한 그림의 틀 또는 둘레는 더 이상 각 그림의 제한적인 합치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세 그림의 분배적인 합치를 가리킨다." (p201-202) 201-2---
하지만 베이컨이 감각을 구현했다고 할 때의 감각은 결코 재현적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객체를 대상으로 얻는 인식으로서의 경험이 아니다. 베이컨이 구현한 감각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현실적 경험 이전 차원의 감각, 선경험적 또는 선험적 차원의 감각이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수준에서의 감각, 선이성적, 선합리적 감각인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그리고 감각을 구현한 베이컨은 재현화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재현화는 결코 감각을 구현한 그림이 아니며, 따라서 회화의 과업에 전혀 미치지 못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p207)
(208) *209-11
따라서 화가의 그리기는 화폭 속에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화가는 그리기 이저부터 이미 화폭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가의 그리기는 구상적 이미지, 판에 박힌 개연성들로부터 나오는 일, 즉 화폭으로부터 나오는 일이다. 그리고 이때 화폭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화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자유로운 손에 의한 표시들이다. 물론 자유로운 손에 의한 표시들은 때로는 그리기에 도달하지만 때로는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화가에게 있어서는 오직 자유로운 손에 의한 표시들이 구상적이미지들로부터 빠져나와 시각적 총체에 주입됨으로써 회화적 형상을 구성하는 그리기의 기회 말고 다른 기회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화가는 이처럼 자유로운 손에 의한 표시들을 통해 그리기에 도달할 때 마침내 참된 닮음을 생산한다. 즉 구상적 닮음이 아닌 진정한 닮음, 실재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구상이요 재현인 형상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p214)
"닮도록 만들어라. 하지만 우발적인 방법, 닮지 않은 방법을 통해 그리 만들어라." (p215)
따라서 베이컨과 들뢰즈는 그리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결과적으로 그리기 행위는 언제나 이-전avant-coup[선회화적 개연성들의 총체]과 이-후apres-coup[자유로운 손에 의한 표시들이 개연성의 총체 속에 주입되어서 시각적 형상을 만듦] 사이에서 들쭉날쭉 어긋나며 끊임없이 요동친다. 즉 그리기의 히스테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 회화가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모든 것이 화폭 위에 있다. 화가 자신마저도 화폭 위에 있다. 그 결과로 화가의 작업은 어긋나게 된다. 그의 작업은 오로지 나중에만, 이-후에만, 즉 손에 의한 작업 다음에만 올 수 있다. 그리고 이 손에 의한 작업으로부터 형상이 시야로 솟아오르게 될 것이다." (p216) 212, 214----, 215-6===
217 (1)221 (2)225 (3)229
들뢰즈에게 있어서 그리기는 어쨌든 닮음을 생산해야만 한다. (p230)
그림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선과 색이라는 점에서 화가에게 있어서 다이어그램은 무엇보다도 선의 순간과 색의 순간이 혼재하는 장이다. 이때 다이어그램의 혼돈 속에서 선은 추상적이라는 한계를 가지며, 색은 지속성과 명료함을 결여하는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화가가 사실의 가능성의 장인 다이어그램으로부터 사실을 창조해내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선을 구체적인 선으로 만드는 일과 색에 지속성과 명료함을 부여하는 일을 동시에 해야만 한다. 화가가 어떤 방식을 동원하든, 다이어그램에서 선이 구체적으로 되고 색이 지속적 ���료함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사실, 즉 형상이 창조되는 것이다. (p231) 230==
회화는 결국 아날로그 예술이고, 회화가 생산하는 닮음은 아날로그적 닮음이며, 회화는 변조의 방식을 통해 아날로그적 닮음을 생산한다. 그리고 회화가 변조를 통해 아날로그적 닮음을 생산한다고 할 때, 변조의 장은 특별히 다이어그램을 말한다. (...) 즉 베이컨이 변조를 통해 아날로그적 닮음을 생산한다고 할 때, 이 변조는 구체적으로 채색주의에 근거한 변조다. 요컨대 베이컨에게 있어서는 아날로그적 닮음의 생산체계가 채색주의인 것이다. (p234-235) *231-5, 234-5=== 236-8----
*242-4
방금 우리는 채색주의가 눈으로 만지는 공간을 부추긴다고 했다. 사실 채색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눈으로 만지는 공간, 눈의 만지는 기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잔에게서 그런 것처럼 고흐와 고갱에게서, 또 베이컨에게서 눈으로 만지는 공간, 눈의 만지는 기능이 공통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이들 모두가 채색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채색주의자들은 색들이 이루는 가변적인 관계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화가를 말한다. 색들이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즉 색들이 색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색상 관계는 그 관계를 이루는 색들에 따라서 변하는 팽창과 수축의 가변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색들 사이의 이질성과 긴장감이 매번 변하는 팽창과 수축의두 리듬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변적인 관계에 그림의 모든 것이 의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세잔에게서 보이는 배경의 동질성과 형태의 특이함, 고흐와 고갱에게서 보이는 아플라의 활기를 띤 단일 톤과 신체에 용적을 주는 혼합 톤, 베이컨에게서 보이는 아플라, 형상, 윤곽 사이의 색의 풍요로운 소통까지 모두가 다 이 가변적인 관계에 의해서 설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에 따르면 채색주의자들의 공식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색을 색의 순수 내적 관계(색으로 표현된 두 리듬)에 이를 때까지 밀고 가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형태, 배경, 빛, 그림자, 밝음과 진함....)을 갖게 되리라. 이것이 바로 채색주의, 즉 색의 순수 변조 체계가 가리키는 의미다. 그리고 이때 색들의 가변적인 관계는 자신의 가변성을 따라가면서, 특히 자기 고유의 팽창과 수축의 두 리듬을 따라가면서 그로부터 보는 눈이 아닌, 만지는 눈을 이끌어낸다. 즉 이집트 예술 이래로 눈이 포기해야 했던, 눈의 촉각적 기능을 눈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p245-246) 245, 6====
그렇다면 베이컨은 어떤가? 세잔의 채색주의와 마찬가지로 베이컨의 채색주의 역시 눈으로 만지는 공간, 눈의 만지는 기능을 창조한다. 그런데 베이컨에게 있어서 채색주의는 가깝게는 다이어그램을 변조하기 위한 것이고, 보다 멀게는 다이어그램의 변조를 통해 형상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눈의 만지는 기능이 창조되는 것은 바로 이 형상이 창조될 때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흐름을 도식화할 수 있다. '채색주의가 다이어그램을 변조함->다이어그램의 변조를 통해 형상이 창조됨과 동시에 눈의 만지는 기능이 창조됨.' 결국 다이어그램은 우리가 베이컨의 형상 창조를 살펴볼 때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처럼, 베이컨의 눈의 만지는 기능 창조를 살펴볼 때도 여전히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앞에서 서양의 회화사를 이야기했으니 베이컨의 다이어그램을 서양의 회화사적 맥락 속에서 생각해보자. 서양의 회화사적 맥락 속에서 볼 때 베이컨의 다이어그램은 앞에서 매긴 번호를 기준으로 하면 2번과 3번, 즉 고전적 재현 예술의 시각-촉지적 공간과 비잔틴 예술의 순수한 시각적 공간을 망쳐놓고 휘젓는 기능을 한다. 왜냐하면 다이어그램 자체가 말 그대로 화폭 위에 손의 능력을 부과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언제나 시각이 우위를 점하는 공간을 망치고 휘젓도록 운명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다이어그램은 고전적 재현 예술의 시각-촉지적 공간, 비잔틴 예술의 순수한 시각적 공간을 밑에서부터 망쳐놓고 휘저으면서 형상을 창조한다. 그리고 이때 세잔에게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으로 만지는 공간, 눈의 만지는 기능이 창조된다. 즉 시각-촉지적 공간 또는 순수한 시각적 공간 속의 구상을 무너뜨리는 다이어그램으로부터 형상이 창조될 때, 또는 사실의 가능성으로부터 사실이 발생할 때, 바로 이 형상의 창조 또는 사실의 발생에 동반되어 눈으로 만지는 공간, 눈의 만지는 기능이 창조되는 것이다. (p247-248) 247-8===
결국 다이어그램의 개입과 작용은 한 형태에서 다른 한 형태로 나아가는 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동이란 부동의 한 형태 A에서 또 다른 부동의 한 형태 B로 변화의 운동이 전혀 없이 단지 시선의 이동만을 통해 옮겨 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이어그램의 개입과 작용은 구상적 형태 A로부터 출발해서 '색과 선의 독창적이고도 가변적인 관계를' 따라가면서 우발적 형태 B, 즉 아날로그적 닮음을 이루는 형상을 '점진적으로 단숨에' 창조해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이어그램은 결코 이동의 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변조의 장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변조의 장으로서 작용하는 다이어그램은 '눈의 촉각적 기능'을 창조하게 된다. 왜냐하면 색과 선의 긴장과 이질성 속에서 색과 선의 독창적이고도 가변적인 관계를 따라가며 형태 A에서 점진적으로 단숨에 형태 B에 도달하는 다이어그램의 점들은 그 자체로 촉각성을 유지하며 근접해가는 시각의 점들, 즉 눈으로 만지면서 근접해가는 점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베이컨은 눈으로 만지는 공간, 눈의 만지는 기능을 창조해 낸다. 말하자면 현대의 이집트 예술인이 되는 것이다. (p249) 249===
- 박정태, '철학자 들뢰즈, 화가 베이컨을 말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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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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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intelligenthq.com/interview-wit-paul-mason-author-of-post-capitalism-a-guide-to-our-future/ )
<머리말: 포스트자본주의 프로젝트의 시작>
정보는 과거의 어떤 기술과도 다르다. 이제부터 설명하겠지만 자발적 성격을 가진 정보는 시장을 와해시키고, 사적 소유를 파괴하고, 노동과 임금의 관계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 배경이다. 만약 나의 주장이 옳다면, 좌파들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20세기 내내 잘못 알고 있었던 셈이다. 전통적인 좌파의 목표는 시장 메커니즘이 외부의 힘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다. 여기서 외부의 힘이란 투표소 또는 바리케이드에서 노동계급이 발휘하는 힘이다. 국가는 그 힘을 증폭시키는 지렛대 역할을 하며, 빈번하게 발생하는 경제공황이 그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붕괴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좌파의 계획이었다. 시장은 좌파의 꿈을 좌절시켰다. 집단주의와 연대가 사라진 자리를 개인주의가 차지했다. 수적으로 크게 증가한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은 외견상으로는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산계급인 부르주아와 대비되는 무산계급 여기서 무산이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노동력을 팔아 생활한다는 뜻이다: 옮긴이)였지만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단일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그 25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경험했다면, 그리고 당신이 자본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 역사를 하나의 트라우마로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25년 동안 기술이 새로운 경로를 창출했다. 전통적인 좌파 중에 아직 남아 있는 세력과 그들의 영향을 받는 다른 모든 세력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경로를 받아들이거나, 소멸되거나. (p14)
<1부>
45 48
공황을 예방했다는 측면에서 양적 완화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다시 병에 걸리게 만든 것과 같다. 값싼 자금 때문에 발생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또다시 값싼 자금을 이용했으니 말이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해석은 당신이 생각하는 화폐의 개념에 따라 달라진다. 명목화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앙이 닥칠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명목화폐를 비난하는 책은 은행을 비난하는 책만큼이나 많다. 실물 재화는 한정돼 있는데 돈이 무한정 풀린다면 명목화폐 시스템 자체가 언젠가는 19세기 텍사스공화국이 갔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으며, 2008년 금융위기는 앞으로 닥쳐올 대지진을 예고하는 가벼운 전율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명목화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종말론과 비슷한 결론으로 흐른다. (p52)
대중적인 경제학에서 화폐는 교환을 편리하게 해주는 수단일 뿐이며, 옛날 사람들이 감자 한 무더기와 너구리 가죽을 교환하는 비율이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발명된 것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보여준 것처럼, 초기 인류사회가 물물교환을 이용했으며 그 때문에 화폐가 발명됐다는 증거는 없다. 초기 인류는 화폐보다 더 강력한 '신용'이라는 수단을 이용했다. (p53)
화폐는 정부가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화폐는 정부가 만들었다. 화폐는 정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화폐는 정부가 '지불하겠다는 약속'이다. 화폐의 가치는 금속 자체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정부의 영속성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결정한다. 만약 사람들이 텍사스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다면 텍사스공화국의 명목화폐는 문제없이 통용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19세기의 정착민들조차도 텍사스공화국이 오래가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텍사스공화국이 미합중국에 합병되리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 순간 텍사스달러의 가치는 회복됐다. 이런 이치를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의 진짜 문제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제길, 우리가 가진 실물재화에 비해 너무 많은 화폐를 발행했잖아!"가 아니다. 아직 많은 사람이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진짜 문제는 "제길, 사람들이 우리 화폐를 신뢰하지 않잖아"다. 현재의 화폐 시스템은 화폐를 발행하는 정부의 신뢰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리고 현 시대의 세계경제에서 신뢰도는 정부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부채 · 지불 메커니즘· 비공식 환율 · 유로존과 같은 화폐연합, 그리고 각국 정부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험 들듯이 쌓아둔 막대한 양의 외화로 이뤄진 중층적인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다. 명목화폐의 진짜 문제는 이 중층적인 시스템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현재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명목화폐가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결합하면 호황과 불황의 순환이 자동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감독도 받지 않는 명목화폐는 세계경제를 장기침체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다. 경제 안정을 위협하는 다른 요인들을 고려할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p54-55)
지금 설명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은 단 하나, 금융화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금융화가 계속되면 금융 시스템 안의 돈은 가상의 화폐로 변해가고, 점점 많은 금융기관이 단기대출에 의존한다. 그러나 어떤 정치인도, 어떤 규제기관도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배짱은 없었다. 그들은 망가진 시스템을 다시 조립하고 12조 달러라는 돈을 무리하게 투입해서 시스템이 다시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행위는 거품이 쌓였다가 붕괴하는 일이 또다시 반복될(경제가 성장할 경우) 가능성을 높인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은 모든 경제대국의 쇠퇴는 금융업으로 화려하게 전환하면서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17세기에 무역업으로 제국을 건설했던 네덜란드의 몰락을 분석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주의 국가가 발전하다가 금융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이 끝났다는 표식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가을이다." (p61)
사실 금융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침투한 지금, 우리는 기계에 종속되어 9시부터 5시까지 규칙적으로 노동하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이자를 지불하는 노예로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노동을 통해 자본가에게 이윤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돈을 빌림으로써 금융업계 종사자들에게 이윤을 안겨준다. 정부보조금에 의지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불가피하게 단기자금 대출의 세계에 들어와 신용으로 생활용품을 구입한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자동차공장 노동자보다 이런 여성에게서 더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 금융화는 신자유주의의 영구적인 속성이다. 명목화폐와 마찬가지로 금융화는 붕괴로 귀결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는 금융화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p62)
국가 간 불균형은 항상 두 가지의 분명한 위험을 내포한다. 첫째, 서구 국가들에서 지나친 신용팽창이 일어나 금융 시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둘째, 더 넓은 범위에서 세계의 모든 잠재적 위험과 불안정성이 국가들 사이의 부채와 환율에 관한 합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합의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 이런 위험은 지금도 존재한다. 만약 미국이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어느 시점에 달러화가 붕괴할 것이다. 아니, 달러화가 붕괴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기만해도 달러화는 붕괴한다. 그럼에도 중국과 미국의 상호의존, 그리고 독일과 나머지 유로존 국가들의 상호의존 덕분에 그 방아쇠가 당겨지는 일은 결코 없을 듯하다. 2008년 이후 생겨난 모든 변화는 무역 흑자국들이 미국 금융의 붕괴에 맞서 일종의 보험으로서 외환보유고를 축적하는 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p65)
그렇다면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네트워크 덕분에 절약한 비용이나 우리가 얻은 수익 또는 이윤은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2013년 OECD의 경제학자들은 전통적인 시장경제학으로는 네트워크의 가치를 계산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인터넷이 시장거래와 가치에 끼치는 영향은 대단히 광범위하다. 비시장거래에 인터넷이 끼는 영향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비시장거래를 무시했다. 비시장거래는 원래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커피전문점에서 줄을 서 있던 고객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미소처럼 무의미한 사건이 비시장거래다. 네트워크 효과로 발생하는 비시장거래의 가치를 양적으로 환산하면 금전적 가치는 시장거래보다 낮다. 또 그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나눠가지는 이익으로 간주된다. 30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네트워크 기술은 경제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시장을 넘어서는 협력과 생산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2008년 9월 15일, 노키아와 모토로라는 리먼브러더스 본부 건물 맞은편에 있는 스타벅스 건물의 무료 와이파이 표지판을 언급하면서, 그 표지판이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는 사실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논평은 미래의 시장이 현재의 시장에게 보내는 의미심장한 신호를 전달하고 있었다. 정보경제는 시장경제와 양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시장의 절대적인 힘에 지배되고 규제받는 경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동요하고, 붕괴하고, 좀비 상태에 빠진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5년 동안 창출된 모든 통화, 금융의 모든 속도와 동력은 자본주의, 이를테면 시장과 사적 소유와 교환에 근거한 시스템이 신기술에 의해 생성되는 '가치'를 포착하지 못할 가능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정보재는 시장 메커니즘과 근본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p71-72)
금융화는 철회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형 은행과 그들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에게서 권력을 회수해서 아웃소싱한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본국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선진국 내에서도 고임금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렇게만 된다면 금융의 복잡성이 감소하고 임금은 상승하며, GDP에서 금융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다. 우리도 빚에 덜 의존하게 된다. 세계의 엘리트들 중에서도 현명한 사람들은 이것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명목화폐를 안정화하고, 금융화를 철회하고, 국가 간 불균형을 종식시켜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정치적 장애물이 만만치 않다. 첫째, 부유층은 임금상승과 금융규제에 반대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반대다. 둘째, 이 해법을 채택할 경우 국가들 사이에서도 승패가 갈린다. 독일의 엘리트들은 그리스와 에스파냐를 부채 식민지로 만들어 이익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엘리트들은 14억 명의 저임금 노동력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얻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라도 탈출구를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려면 각국의 상환 불가능한 정부부채가 탕감돼야 한다. 각국의 가계부채와 기업부채 역시 대대적으로 탕감해야 한다. (p73-74)
OECD의 보고서는 글로벌 경제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서방 국가들은 침체를 면치 못하고, 신흥국들은 성장세가 둔화하고, 여러 나라에서 정부가 파산할 것으로 내다본다.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하나 이상의 나라가 세계화 체제를 벗어나 보호주의를 채택하고, 부채를 축소하고, 환율을 조작할 가능성이 높다. 또는 외교적·군사적 충돌에서 비롯된 탈세계화 사태가 세계 경제로 확산되어 똑같은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OECD 보고서의 교훈은 체제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지식을 습득한 세대이자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대는 극심한 불평등과 저성장�� 미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화에서 이탈하려는 혼잡한 경주도, 수십 년간 불평등의 심화와 함께 진행된 경기침체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경제 모델이 필요하다. 또한 새로운 모델을 설계하는 일에는 유토피아적 사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1930년대 중반 케인스가 거둔 탁월한 성과는 위기가 시스템의 어떤 문제를 드러냈는가를 이해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낡은 모델의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실행 가능한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 주류경제학은 기존 모델의 비효율성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우리에게는 현재의 위기를 자본주의의 총체적 운명이라는 청사진 안에 위치시키는 이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이론을 정립하려면 주류경제학과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모두 넘어서야 한다. 그 단초는 1938년 러시아의 어느 감방에서 발견된다. (p77-78)
81
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Nikolai Kondratieff 콘드라티예프를 처형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의 진짜 죄는 자본주의에 관해 용납할 수 없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콘드라티예프는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으며 무너지는 대신 적응하고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료를 분석해서 2편의 논문을 썼다. 단기적 경기순환 외에도 50년을 주기로 장기순환 패턴이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50년이라는 주기는 자본주의 내부의 구조적 변화라든가 큰 전쟁과 일치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위기와 부활의 순간들은 혼돈의 증거가 아니라 질서의 증거였다. 콘드라티예프는 경제학의 역사에 긴 파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사람이었다. (p82)
84
유진 슬러츠키Eugen Slutsky 슬러츠키는 임의의 통계에 이동평균을 적용하면 현실경제와 비슷한 파도 모양 곡선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무작위로 추출한 복권번호에서 파도 패턴을 생성한 후 그것을 영국의 성장률 그래프에 겹쳐놓았다. 파도 패턴을 성장률 그래프에 맞춰 축소하자 두 곡선의 모양은 놀랍도록 비슷해졌다. 이것은 통계에서 '율러츠키 효과Yule-Slutsky Effect'로 알려진 현상이다. 지금 율슬러츠키 효과라는 용어는 통계를 조금만 손질하면 결과를 위조할 수 있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하지만 원래 슬러츠키는 정반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진짜로 모든 현상에서 (경제현상뿐 아니라 자연현상에서도) 파도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p97)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체사레 마르체티Cesare Marchetti의 연구 역시 장기순환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마르체티는 에너지 소비와 인프라 건설에 관한 역사적 통계를 분석한 뒤 1986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경제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매우 뚜렷한 순환 또는 맥박의 유형이 발견됐다. 주기는 약 55년이었다." 마르체티는 그 패턴이 파도의 모양이라거나 경제 분야에 국한된 현상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는 그 패턴을 사회적 행동의 장기적인 '맥박'이라고 부른다. 경제 영역에서의 불분명한 신호들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하면 매우 선명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p100)
슘페터의 후계자로 잘 알려진 베네수엘라 출신의 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즈는 기술결정론을 근거로 각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정보기술, 바이오기술, 친환경 에너지를 지원하라고 권고한다. 그는 2020년경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면서 다시 '황금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약속한다. 페레즈는 장기파동 이론을 세련되게 다듬어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을 만들었다. 페레즈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기술-경제 패러다임techno-economic paradigm'이다. 경기순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혁신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혁신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페레즈의 주장에 따르면 "혁명이 확산되려면 안내자 역할을 하는 새로운 상식new common sense "이 형성돼야 하며, "새로운 논리logic of the new" 가 확고하게 세워지고 일단의 기술들과 기업 관행들이 교체돼야 한다. (p103)
115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의 《금융자본론Finance Capital》은 이후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좌파들의 모든 논쟁에 참조할 지점을 제공했다. 힐퍼딩은 자본주의의 변이가 어떤 규모로 진행되는가를 이해했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리고 그가 말한 새로운 구조의 영속적인 특징들 가운데 다수는 마르크스가 이윤율 저하에 대한 자본의 반작용으로 열거했던 것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수출, 과잉 노동력을 식민지의 백인 정착지로 보내는 이민 촉진 정책, 주식시장을 통한 이윤 획득, 기업가 정신에서 지대추구형 투자로의 전환. 20세기에는 기업의 이윤을 재분배하고 자본을 조달하면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던 금융 시스템이 이제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한다. 위기에 대한 반작용들은 새롭고 더 안정적인 시스템의 일부가 됐다. (p124)
125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3년에 출간한 책인 <자본의 축적The Accumulation of Capital》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1) 열강들이 벌이는 식민지 쟁탈전의 경제적 동기를 밝힌다. 2) 자본주의의 미래가 어둡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룩셈부르크는 '과소소비론'이라는 현대적 이론을 최초로 개발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가 했던 계산을 다시 수행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영구적인 과잉생산 상태라는 사실을 증명했다(적어도 그녀 자신은 납득시켰다).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너무 적다는 문제는 자본주의를 영원히 괴롭힌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래야 원자재와 시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정복하고 방어하면서 잉여자본을 흡수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군사적 비용이 발생한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끊임없는 식민지 개척은 낭비 또는 사치재 소비와 비슷하며, 과잉 자본을 처리하는 매커니즘이다. 위기에 취약한 체제의 유일한 밸브는 식민지 확장이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지구 전체가 식민화하고 자본주의를 채택하면 체제가 붕괴되리라고 예측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자본주의는 자기 힘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경제체제를 토양으로 삼아 양분을 획득해야만 한다. 자본주의는 보편적인 것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 본질상 자본주의는 생산의 보편적 형태가 될 수 없으므로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p128-129)
131 138 141 149
4차 파동이 시작될 무렵에는 외부세계의 상당 부분이 폐쇄된 영역이었다. 냉전 시기에 세계 GDP의 약 20퍼센트는 시장 외부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1989년에 갑자기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새로운 노동력이 공급되자 파동은 연장됐다. 또 서구 국가들은 그전까지 접근할 수 없었던 중립국에서도 시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됐다. 다시 말하자면 1917년과 1989년 사이에 자본주의는 복잡한 적응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으며, 1989년 이후에야 그 잠재력이 폭발했다. 노동력과 시장이 확대되고, 기업은 자유를 획득하고, 경제의 규모는 전례 없이 커졌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국면의 왜곡 phase-distortion'이라는 나의 주장은 1989년의 상황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 설명된다. 물론 그것이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장기순환의 패턴은 이미 깨졌다. 4차 장기순환은 예상보다 길어지고, 왜곡되고,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요인들에 의해 망가졌다. 그 요인들은 바로 노동운동의 패배와 후퇴, 정보 기술의 눈부신 발달, 그리고 장기간 공짜로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초강 대국의 성립이다. (p154)
169, 170
신자유주의자들의 목표는 달랐다. 그들은 '원자화atomization'를 목표로 삼았다. 오늘날 젊은 세대의 눈에는 신자유주의의 결과만 보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협상력 파괴가 신자유주의의 핵심 목표라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협상력 파괴는 다른 모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는 자유시장이 아니다. 긴축재정도 아니고, 화폐의 건전성도 아니고, 민영화와 생산기지 이전도 아���다. 세계화도 핵심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신자유주의가 중요시하는 목표의 부산물 또는 무기일 따름이다. 그 목표는 조직된 노동자들을 방정식에서 빼버리는 것이다. (p175)
182 (182, 183) 190-1 193
<2부>
205, 208
정보재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1990년 미국인 경제학자 폴 로머Paul Romer가 현대 경제학의 핵심 가정들 중 하나를 반박하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 과정에서 정보자본주의라는 화두가 주류경제학에 편입됐다. 그간 경제학자들은 한 나라의 성장속도를 예측하는 모델을 찾기 위해 저축, 생산성, 인구 증가 같은 다양한 요소를 활용했다. 그들은 기술의 변화가 이 모든 요소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경제성장의 속도를 예측하는 데서 기술은 '외생적' 변수라고 가정했다. 기술은 모델의 외부에 위치하며 그들이 만들려는 방정식과는 무관한 변수였다. 그때 로머가 <내생적 기술 변화Endogenous Technological Change>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경제학계의 판도를 바꿨다." 그의 논증에 따르면 혁신은 시장의 여러 힘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혁신을 경제성장의 우연적이거나 외생적인 요소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혁신을 고유한(내생적인) 요소로 보고 성장이론에 혁신이라는 개념을 포함시켜야 한다. 혁신의 효과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로머는 자본주의 일반에 적용되는 깔끔한 공식 하나를 완성했을 뿐 아니라, 정보자본주의의 특징 하나를 발견했다. 그 특징은 혁명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쉬운 용어를 써서 기술의 변화를 "여러 가지 원자재를 혼합하기 위한 지시문이 개선되는 것"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그는 사물과 정보를 별개로 취급하고 있다. 그가 말한 '지시문'이 곧 정보를 뜻하기 때문이다. 로머의 이론에서 정보는 물질세계 또는 디지털 세계 안에서 뭔가를 만들기 위한 청사진 또는 조리법과 같은 개념이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전제를 도출한다. "원자재를 혼합하기 위한 지시문은 다른 경제적 재화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보상품은 지금까지 생산된 다른 모든 물질적 상품과 다르다. 그리고 정보상품을 위주로 하는 경제는 실제 물건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와 다르게 움직인다. 로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련의 새로운 지시문을 만드는 비용을 한 번 부담하고 나면 그 지시문을 몇 번이고 다시 사용해도 추가 비용이 없다. 새로운 지시문을 개발하거나 기존의 지시문을 개선하는 일은 고정비용을 지불하는 것과 같다." (p209-210)
그러니 1997년에 미국 언론인 케빈 켈리Kevin Kelly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역설은 컴퓨터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것이다. 자립형 컴퓨터들은 이제 임무를 완수했다. 컴퓨터는 우리 생활의 속도를 높여줬다. 그게 전부다. 반면 최근에 출시되고 있는 유망한 기술들은 컴퓨터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한다. 앞으로는 컴퓨터 활용법보다 연결이 더 중요하다." (p221)
7년 전 로머가 새로운 속성으로 간주했던 것을 켈리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바라봤다. 정보기술은 데이터와 물질상품의 가격을 하락시키고, 데이터와 상품 생산의 한계비용을 0에 가까워지게 만든다. 하지만 켈리는 무제한 공급과 가격 하락에는 무한한 수요라는 평형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술과 지식은 가격이 하락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수요를 늘린다. (...)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제약하는 유일한 요인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사실상 한계가 없다는 뜻이 다." 켈리가 제시한 해결책은 가격이 하락하는 속도보다 빨리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이다. 기업은 가격 하락을 방어하려고 애쓰는 대신, 가격은 시간이 지나면 떨어지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1과 0사이에서 사업을 해야 한다. 켈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비자들이 웹사이트와 상호작용하면서 기부하는 공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혼돈의 가장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가야 한다". 1990년대 후반이 되자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은, 혁신이 기술의 가격 하락 효과를 상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켈리는 만약 그 메커니즘이 실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때 닷컴 버블이 붕괴했다. 2000년 4월부터 나스닥 지수가 폭락하자 유선모뎀을 쓰면서 부유해진 세대의 견해도 바뀌었다. 사이버 인권옹호 활동을 하다가 재산의 95퍼센트를 잃어버린 활동가 존 페리 발로John Perry Barlow는 그 사태에서 냉정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닷컴 버블은 19세기와 20세기의 경제 개념들을 그런 경제가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서 활용하려는 노력이었고, 인터넷은 그 개념들을 거부했다. 이번 사태는 인터넷 본연의 힘에 의해 밀려난 이질적인 힘의 습격이다." 켈리는 앞으로 논쟁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했다. “장기적으로는 닷컴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p225-226)
2006년 당시 예일대학교 법학과 교수였던 요차이 벤클러Yochai Benkler는 네트워크 경제를 "주요 선진국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생산 양식"으로 정의했다. 원래 벤클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스Creative Common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오픈 소스 운동의 법률적 틀을 만드는 작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네트워크의 부 The Wealth of Networks> 라는 책에서 지식재산권을 훼손하고 공유 모델과 관리자 없는 생산을 확산시키고 있는 경제적 힘들에 관해 설명했다. 첫째, 벤클러에 따르면 컴퓨터를 사용하는 비용이 저렴해지고 통신 네트워크가 보편화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정보재의 생산수단을 획득했다. 사람들은 블로그를 운영하고, 영화를 제작해서 배포하고, 자기만의 전자책을 출판한다. 어떤 경우에는 기성 출판사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저자가 수백만의 열성 독자를 확보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인류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이제는 사회적 상호 작용을 하는 개인들에 의해 이뤄질 수 있다. 개인들은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시장 참여자로서 행동하기보다 인간으로서, 사회적 존재로서 행동한다. 벤클러의 논지에 따르면 이것은 비시장 메커니즘의 부상으로 이어진다. 비시장 메커니즘이란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 협업 형식으로 일하는 개인들의 탈집중화한 행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새로운 유형의 P2P경제가 성립되며, 그 안에서 화폐는 존재하지 않거나 가치의 주요한 척도가 못 된다. 가장 좋은 사례는 위키피디아다. (p226-227)
위키피디아는 리눅스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측면에서 급진적이다. 첫째, 생산된 상품이 공공성을 지닌다. 위키피디아의 내용은 누구나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소유하거나 강탈하거나 착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둘째, 생산과정에서 협업이 이뤄진다. 본부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가 위키피디아 각 페이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위키피디아 직원들은 내용 작성과 편집의 기준을 세우고 유지하며, 저작권과 경영상의 위계질서에 의해 위키피디아라는 플랫폼이 손상되지 않도록 관리한다. 벤클러는 이런 생산양식을 '공유지 기반 동료생산commons-based peer production'이라고 정의한다. 이 개념은 주류경제학이 확신하는 가정에 또 하나의 도전장을 내민다.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상호 신뢰와 책임에 기초해서 친구를 사귀고, 관계를 맺고, 감정적·심리적 요구를 채우려는 인간 고유의 욕구가 경제생활로 흘러들어온 것일 따름이다. 시장 또는 기업 없이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 순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시작했다. (p230)
236, 240, 1, 3 246 251
하지만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재화인 정보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 정보는 풍부하다. 결핍에서 풍요로의 전환은 인류역사의 중대한 발전이며 자본주의의 4차 장기순환의 위대한 성과다. 하지만 이 전환이 경제이론에 강력한 도전장을 던진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우리는 가격결정 메커니즘이 경제생활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확고한 원칙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가격결정 메커니즘이 사라지는 것에 관한 이론이 필요하다.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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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카를 멩거 Carl Menger는 스미스와 리카도를 공격한 유명한 저서에서 한계효용론의 심리적 동기를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스미스와 리카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추상적인 인간의 행복, 막연한 것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들 미래의 일들에 집착했다. 현재의 타당하고 구체적인 관심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멩거가 생각한 경제학의 목표는 자본주의가 동시대에 만들어내는 현실을 연구하고, "그것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의도와 반대로 불가피하게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혁신에 관한 편파적이고 감정적인 견해에 맞서 자본주의의 현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한계효용론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데 집착하고 미래의 사건들에 적대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변화하지도 않고 변이를 일으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자본주의를 이해하기에는 좋은 모델이다. 불행히도 그런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p282)
현재의 경제생활에는 희소한 재화와 풍부한 재화가 모두 존재한다. 우리의 행동은 예의 '쾌락이냐 고통이냐'라는 선택들의 혼합물이다. 선택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며, 거기에 공유와 협력이라는 개념은 없다. 한계효용론자들의 눈에 공유와 협력은 사보타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보경제에서는 효용의 대부분이 정보를 통해 제공되고 물질상품은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정보경제가 꽃을 활짝 피우면 한계효용론자들이 말했던 가격결정 메커니즘은 무너진다. 한계효용론은 오직 가격으로만 이뤄진 이론이기 때문에 가격이 0인 상품들, 경제적 영토의 공유, 비시장조직, 소유할 수 없는 상품으로 이뤄진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노동가치설로는 이런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노동 가치설은 자기 자신의 소멸을 예측하고 조정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 노동가치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과 생산성 자체의 충돌을 예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처음 틀을 잡았던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자동화로 필요노동이 크게 감소하면 노동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노동을 소량만 투입해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용한 상품은 결국 무료가 되고, 공유되고, 나아가 공적 소유가 된다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p284)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단, 자본의 이동이 가능해야 했다. 어느 한 분야에서 기술혁신으로 비용이 낮아지면 자본은 임금이 더 높고, 이윤이 더 높고, 생산요소의 비용이 더 높은 분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비용이 0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자본주의는 이런 방식의 자기복제를 계속할 수가 없다. 이 단순한 모델은 생산비용 0인 사회의 경제는 곧 에너지와 원자재에 집중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에너지와 원자재는 여전히 희소성이 지배하는 ���역이다. (p297)
따라서 로봇의 도입에 내재하는 진짜 위험은 대량실업을 능가한다. 250년 동안 과거의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를 때마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던 자본주의의 능력이 고갈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애물이 남아 있다. 바로 지식재산권이다. 자본은 정보 주도 경제의 외부효과를 포착하기 위해 새로운 영역에서도 자신의 소유권을 강화해야 한다. 자본은 우리의 사진, 우리의 재생 목록, 우리가 공식적으로 출판한 논문은 물론이고 우리가 그 논문을 쓰기 위해 조사했던 내용까지도 소유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기술은 그런 횡포에 저항할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소유권 강화는 장기간 유지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할 현실은 활짝 피어난 정보자본주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허우적거리는 정보자본주의다. 우리가 경험해야 할 제3의 산업혁명은 지금 멈춰 있다. 정책이 부실해서, 투자전략이 나빠서, 금융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증상과 질병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협동적 법률 표준을 도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역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정보에 기반하는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가 될 수 없다. 상품의 가격을 0으로 만들고 지식재산권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노동가치설의 유용성은 이 점을 설명해준다는 데 있다. 노동가치설 덕분에 우리는 OECD 경제학자들이 하지 못한 방법으로 시장 생산과 비시장생산에 똑같은 방정식을 적용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노동가치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성취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줌으로써 전환의 과정을 설계하는 작업을 도와준다. 우리의 목표는 공짜기계, 가격이 0인 상품, 최소한의 필요노동시간으로 이뤄진 세상이다. 다음 질문. 그런 세상을 현실로 만들 사람은 누구인가? (p302-303)
1980년, 프랑스의 지식인 앙드레 고르는 "노동계급은 사망했다"고 선언했다. 노동자 계급은 사회적 집단으로서 영구적으로 분할되고 문화를 박탈당했으며, 사회 진보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의 역할은 끝났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했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 세계의 노동계급은 2배로 늘어났다.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과 세계화가 진행되고 과거 공산권이었던 나라들이 세계시장에 합류하면서 임금 노동자 수가 30억을 넘어섰다. 노동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도 달라졌다. 약 150년 동안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는 주로 선진국에 사는 백인 남성 육체노동자를 의미했다. 지난 30년 동안 그 단어는 남반구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피부색이 다양하고 여성이 다수인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 가�� 측면에서는 고르의 주장이 맞았다. 그 30년 동안 노동조합 조직률은 줄곧 하락했다. 선진국에서는 노동의 협상력이 쇠퇴하고 GDP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했다. 이것은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지적한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노동자들이 총생산에서 자신의 몫을 지켜내지 못한 탓에 불평등이 심화한 것이다. 물질적 측면에서 노동자들이 불리해진 것이 전부가 아니다.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졌다. (p306-307)
자연 현상이나 변증법 논리에서처럼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은 대개 '지양sublation'의 순간이다. '지양'이란 뭔가가 순간적으로 파괴되는 동시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개념이다. 노동계급은 사망한 것이 아니라 '지양'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앞으로 노동계급은 아주 다른 형태로 바뀌어서 마치 다른 집단처럼 느껴질 것이다. 역사의 주체였던 노동계급은 세계적이고 다양화한 집단으로 대체되고, 그들의 전쟁터는 노동을 포함하는 사회의 모든 영역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방식은 연대가 아니라 '비영속성impermanence'이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을 처음 발견한 지식인들은 그들을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허무주의자로 오해했다. 나는 2012년에 출간된 <혁명을 리트윗하라 Why It's Kicking Off Everywhere》에서 정반대 주장을 펼친 바 있다. 2011년에 시작된 새로운 투쟁의 물결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도 싸움에 나선다는 증거다. 그들은 공통의 기술결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거리로 나선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부분의 좌파들이 듣기 싫어할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노동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의 판단은 틀렸다. 프롤레타리아는 인류사회가 탄생시킨 집단들 가운데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역사의 주체에 가장 가까운 집단이었다. 하지만 지난 200년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 속에서도 살아남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p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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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가 성립된 것일까? 노동자들은 3차 장기순환 기간에 그들의 전략이었던 저항의 이데올로기를 버렸다.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은 명목상으로는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됐다. 대다수 산업 분야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경영진의 한쪽 팔이 됐다. 바로 여기서부터 오늘날 선진국 노동자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들이 시작된다. 복지제도, 건강보험, 무상교육, 공공주택, 법으로 명문화된 노동자의 집단적 권리. 4차 장기순환의 상승기 동안 자본주의는 이전 세대에게는 꿈에서나 가능했을 수준의 물질적 혜택을 제공했다. (p339)
노동자 생활의 질적 변화를 이해하려는 사회학자들도 맨 먼저 공간에 초점을 맞췄다. 배리 월먼Barry Wellman은 노동자들이 집단에 기초한 공동체에서 물리적 네트워크로, 다시 물리적 네트워크에서 디지털 네트워크로 옮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종적으로 '네트워크 개인주의networked individualism'라는 결과가 나타난다고 보고, 그것이 노동 유연성의 확대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런던정경대학교 교수인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하이테크 노동자들의 새로운 특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노동이 소외와 외견상의 순응에 후한 보상을 하고 기술보다 적응력을, 충성도보다 네트워크 형성 능력을 높게 평가할 경우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가 탄생한다. 새로운 노동자는 일에서는 물론이고 삶에서도 단기적인 사고를 하고, 노동에서는 물론이고 투쟁에서도 위계질서와 조직에 헌신하지 않는다. 세넷과 웰먼은 이런 네트워크형 생활에 적응한 사람들이 현실에서나 온라인에서나 복수의 인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음은 세넷의 글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는 인격과 경험의 충돌을 낳았다. 뒤죽박죽이 된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을 장기적인 이야기 속에 녹여내기가 어려워진다." (p356-357)
케인스주의 시대의 노동자에게는 단 하나의 인격이 있었다. 한 사람의 노동자는 일터에서나 동네 술집에서나 사교 클럽에서나 축구 경기장에서나 일관된 모습이었다. 오늘날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은 더 복잡한 현실을 창조한다. 그는 일터에서, 그리고 복수의 분절된 하위문화와 온라인 공간에서 평행한 복수의 삶을 살아간다. 이런 변화를 기록하기는 쉽다. 문제는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인류의 능력에 이런 변화가 끼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2012년에 출간한 《선언 Declaration》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게중심은 더 이상 공장에 있지 않다. 무게중심은 공장 담벼락 바깥으로 이동했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장이 됐다. (...) 이런 변화와 함께 자본가와 노동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 오늘날의 착취는 교환(대등한 교환이든 불평등한 교환이든)이 아니라 부채라는 수단으로 이뤄진다. (p357-358)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단층선 faultline 이 네트워크와 위계질서의 불일치라는 견해에 따르면 중국이야말로 그 단층선 바로 위에 서있는 나라다. 지금 중국 노동자들은 디지털 공간의 반항아이면서 아날로그 공간에서는 노예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반항아들이라는 현상의 중심이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운동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의 주체가 마련됐다는 증거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옷만 바꿔 입은 것과 다르다. 새로운 역사의 주체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인류다. 그리고 이것은 고르의 세대가 간직하고 있었던 비관주의에 대한 해독제다. 고르의 결론에 따르면 '진짜' 노동계급이 죽음으로써 반자본주의 운동을 선두에서 이끌던 세력이 사라졌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제 그것을 유토피아로서 염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유토피아는 좋은 이상이지만 실현될 수도 있고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의 사회에는 그런 가치를 구현할 주도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p360)
네트워크로 연결된 새로운 세대는 자신이 제3의 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산업혁명이 왜 정지된 상태인지도 깨달아가는 중이다. 신용제도가 붕괴된 상태에서 자동화가 진척되고 첨단기술의 발달로 일자리가 감소하면 자본주의는 유지될 수가 없다. 경제는 이미 네트워크 생활양식과 네트워크 의식을 생산하고 또 재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위계와 모순된다. 급진적인 경제 변화를 향한 욕구는 분명히 있다.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그런 변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 인가? (p362)
<3부>
알렉산더 보그다노프Alexander Bogdanov <붉은 별> (p368)
'사회주의의 계산'이 경제학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19171년에서 1921년까지의 상승기였다. 191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결말이 좋지 못했던 '사회화' 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당시 소련의 초창기 전시경제는 '공산주의의 한 형태'라고 칭송받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 내에 잠시 존재했던 바바리아 소비에트공화국에서는 모든 화폐를 즉시 폐기하는 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계획경제는 더 이상 사고실험이 아니었다. 계획경제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가진 체제가 됐고,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환상이 섞여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1920년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사회주의 연방에서의 경제 계산 Economic Calculation in the Socialist Commonwealth》을 발간 했다. 미제스의 주장에 따르면 시장은 계산하는 기계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선택을 하며 정해진 가격으로 물건을 사거나 판다. 그러면 시장은 사람들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판정한다. 시간이 흐르면 이런 과정을 거쳐 희소한 자원이 가장 합리적으로 분배된다.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계획경제를 도입하는 순간 계산기는 고장이 난다. "경제적 계산이 없으면 경제도 없다. 따라서 경제적 계산이 도무지 불가능한 사회주의 국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가 존재할 수 없다. " 화폐를 아예 없애려는 극좌파의 계획에 대한 미제스의 답은 화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 메커니즘을 뒤엎고 계획경제를 시행하면서 화폐를 계속 사용할 경우 화폐의 가격결정 능력은 억제 된다. 하지만 화폐를 폐지하면 수요와 공급의 양을 측정할 잣대가 없어지므로 분배는 감정과 추측에 의존하게 된다. 미제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공유경제에서 어떤 변화를 도입하는 일은 성공 여부를 예측할 수도 없고 나중에 성공으로 판명되는 것도 아니다.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찾아가는 것과도 같다. " (p378)
미제스는 현실 계획경제의 결정적 약점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국가는 시장만큼 빠르게 계산을 해낼 수가 없다. 둘째, 정부는 혁신에 보상을 해줄 수 없다. 셋째, 금융제도가 없으면 주요 산업 부문에 자본을 분배하는 과정이 우연에 의존하게 된다. 미제스의 예측에 따르면 계획의 결과는 혼돈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조잡한 상품의 과잉생산이 발생한다. 적정 가격에 대한 '기억'이 한동안은 남아 있기 때문에 얼마간은 체제가 유지되겠지만, 그 기억이 희미해지고 나면 혼란에 빠져 붕괴할 것이다. 소련 경제의 성공과 실패는 미제스의 예측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래서 그의 책은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우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교과서가 됐다. 하지만 출간 당시에는 그 책의 영향력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p379)
하지만 미제스가 지적한 대로, 노동가치설이 옳다면 계산문제는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 재화를 분배하고, 소유권을 결정하고, 혁신을 이룬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문제는 모두 체제 안에서 노동가치설에 기반해 해결할 수 있다. 노동가치설에서는 모든 것을 똑같은 잣대로 측정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제스는 사회주의는 실현 가능한 체제이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알아보기 쉬운 가치의 단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화폐도 교환도 존재하지 않는 경제체제에서 경기순환을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치의 단위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노동밖에 없다. 하지만 미제스는 1920년대 빈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던 이유 때문에 노동가치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란 기술 수준이 서로 다를 때라든가 천연자원의 시장가치를 측정할 때는 노동가치설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반론들은 둘 다 쉽게 넘어설 수 있다. 사실 이 두 가지 반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숙련노동을 복수의 미숙련노동으로 간주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원자재에 포함된 노동의 가치는 그 원자재를 생산하고 운송하는 데 들어간 노동의 가치라고 했다. 계산에 관한 미제스의 이론에는 또 하나의 귀중한 통찰이 담겨있다. 시장경제에서 수요와 공급을 매개하는 진정한 주체는 기업들간의 거래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금융 시스템은 자본에 가격을 매긴다. 이것은 현명한 통찰로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포스트자본주의 경제를 현실로 만들기를 원하는 우리에게는 상품을 분배하기 위해 시장보다 나은 뭔가가 필요할 뿐 아니라 자본을 분배하기 위해서도 금융보다 나은 뭔가가 필요하다. (p38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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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무엇이 긴급한 일이며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그리고 때로는 그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한다. 만약 앞으로 50년 동안 외부 충격이 우리를 덮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도 된다. 전환은 완만하게 이뤄지고, 정부는 규제를 통해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그러나 앞으로 언제든 거대한 외부 충격이 닥친다면 우리는 모종의 조치들을 신속하게, 집중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실행해야 한다. (p407)
진짜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재의 시장 매커니즘으로 기후변화를 중단시킬 수 있다고 믿는 정치인과 경제학자들이다. 그들은 시장이 기후행동의 한계를 설정해야 하며, 시장을 개조해서 인류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개조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2014년 1월 영국의 직업 외교관이며 전직 기후변화 특별대사였던 존 애시튼John Ashton은 상위 1퍼센트를 향해 진실을 털어놓았다. "시장에만 맡겨두면 한 세대 안에 에너지 시스템을 재구성하고 경제를 전환시키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p414)
2000년이 되자 느낌이 달라졌다. '역사의 종언까지는 아닐지라도 신자유주의 질서를 만든 세대에게는 역사가 마치 통제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금융위기는 통화 팽창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고, 군사적 위협은 무인기 폭격으로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힘을 잃은 노동운동은 정치의 독자적인 변수가 되지 못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의 머릿속에는 세상에 대처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심리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언제나 선택지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때로는 강경한 방법을 써야 할 수도 있었다. 해결책은 항상 있고, 대개의 경우 그 해결책은 시장이었다. 그러나 원래 외부의 충격들은 경각심을 일깨우는 신호다. 기후 변화는 우리에게 시장을 통해 탄소 목표치를 맞출지, 아니면 시장을 벗어난 경로를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할지를 선택하게 해주지 않는다. 기후변화는 시장경제를 질서 있게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갑자기 위기가 닥쳐 엉망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인구 고령화는 세계의 금융시장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이 있고, 일부 국가들은 지불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민과 사회적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2010년 그리스에서 일어났던 사태는 그저 몇몇 안 좋은 기��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나라들에게 인구 증가, 권력의 부패, 불균형 성장, 기후변화의 충격이 한꺼번에 닥칠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토지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천만 단위로 생겨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민이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p43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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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경제적 변화에 대해 투명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가장 강력한 측면들 중 하나는 그 체제가 만들어낸 명시적인 규칙들이었다. 그와 반대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한 25년 동안 세계경제는 암묵적인 규칙에 의해 운영되거나 유로존처럼 번번이 깨지는 규칙에 의존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자본주의를 성립시킨 힘이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에 있다고 주장했다. 금융, 기계, 노동보다 금융, 기계, 노동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가 더 중요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포스트자본주의에 어울리는 '새로운 정신'을 탄생시키려면 우리는 외부효과가 형성되고 분배되는 지점에 주목하고 그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네트워크의 상호작용들이 만들어내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계산으로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 사회적 혜택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 혜택은 어디에 꼭 필요할까? (p451)
독점은 억제하거나 사회화한다 가격이 0에 가까운 지점까지 하락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 독점을 형성하는 것은 포스트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자본주의의 주요 방어기제다. 체제 전환을 촉진하려면 이 방어기제를 억제해야 한다. 가능한 분야에서는 독점을 불법화하고 가격 고정을 금지하는 규칙을 엄격하게 집행해야 한다. 지난 25년 동안 공공부문은 부문별로 분할해서 외주화하라는 압력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애플과 구글 같은 독점기업들이 쪼개질 차례다. 독점을 깨는 것이 비효율을 초래하는 분야. 예컨대 항공기 제작이나 수자원 관리 분야에는 100년 전 루돌프 힐퍼딩이 제시했던 해법을 적용하면 된다. 바로 공적 소유다. (p463)
하지만 포스트자본주의로의 긴 이행기 동안 정교한 금융 시스템은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신용 창조가 가능하려면 신용이 시장 부문의 성장에 기여하고, 돈을 빌리는 주체들이 이자와 함께 대출을 상환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비시장 부문이 시장 부문보다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면 은행의 내적 논리 자체가 무너진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복잡한 경제를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금융 시스템이 마치 복수의 수요자를 실시간 결제기관처럼 움직이기를 원한다면,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통화를 공급하고 신용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이른바 '긍정화폐 positive money' (현재 은행들은 지급준비율 제도fractional reserve banking에 의거해 예금주들의 돈 중 일부를 지불준비금으로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해준다. 이 과정에서 신용이 창조되는데, 긍정화폐 운동은 여기에 반대한다. 이들은 시중 은행의 신용 창출 권한을 박탈하고, 화폐 발행은 정부가 중앙은행을 통해서만 하도록 하자고 주장한다.(p470)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안정적인 국가자본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수의 재화가 무료로 공급되며 투자에 대한 이윤은 화폐와 비화폐 형태의 혼합으로 돌아오는 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려 한다. 수십 년이 지나고 이 과정이 종료될 무렵이면 화폐와 신용은 경제에서 훨씬 작은 역할을 수행하겠지만, 현재 은행과 금융시장이 제공하는 회계·청산·자원 동원resource mobilization 기능은 다른 형태의 제도로 존속해야 한다. 이것은 포스트자본주의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다.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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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보편적 기본소득은 영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쓰레기 일자리"에 대한 항생제다. 쓰레기 일자리란 자본주의가 지난 25년간 줄기차게 만들어낸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노동자를 하찮게 취급하는 이런 일자리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포스트자본주의 프로젝트의 첫 단계를 위한 과도적 조치일 뿐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인류에게 필요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노동시간이 최소로 줄어들면 경제에서 시장 부문에 과세기반이 너무 작아져서 기본소득을 지급할 여력이 없어질 것이다. 임금은 시간이 갈수록 사회적인 성격을 띠거나(협력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의 형태) 아예 사라진다. 따라서 포스트자본주의적인 방편으로서의 기본소득은 인류역사의 모든 복지제도 가운데 그것이 0에 가까워져야 성공으로 평가될 최초의 제도다. (p47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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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최종적인 결과가 무엇인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방금 언급한 것의 정반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막다른 골목을 어떻게 탈출할까가 문제다. 구체적인 문제는 과거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통계에 실패의 경험을 어떻게 기록해서 우리의 걸음을 추적하고, 문제점을 개선하고, 경제 전체에 그 교훈을 전파할까다. 네트워크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네트워크는 기억과 활동을 기계의 각기 다른 두 영역에서 진행한다. 기억하기에 편리한 것은 위계질서다. 따라서 어떻게 교훈을 저장하고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결정적인 문제다. 해법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커피숍부터 정부기관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행동을 녹화하고 저장하는 기능을 추가하는 것처럼. 창조적 파괴를 사랑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억이라는 기능을 기꺼이 없애버렸다. 토니 블레어가 '소파'에서 했던 의사결정(영국 언론들은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소파 대화'에 능하다고 평가했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유롭게 참모들과 토론하면서 그들을 설득해나간다는 뜻 : 옮긴이)도 그렇고, 오래된 기업의 구조를 개혁하는 작업에서도 문서로 증거를 남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우리가 하려는 일은 인간의 활동 중에 최대한 많은 부분을 움직여서, 지구에 사는 인류 전체의 풍요롭고 복잡한 삶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이 줄어들고 자유시간이 늘어나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구분은 훨씬 흐릿해진다. (p481)
이게 진짜로 가능한가요? 하지만 날마다 인류의 상당수가 이보다 훨씬 거대한 변화에 참여하고 있다. 그 변화의 동력은 바로 피임약이다. 지금 우리는 피임약이라는 기술을 통해 남성의 생물학적 권력을 한 번에, 비가역적으로 무효화할 수 있다. 그것은 큰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사람들이 영향력 있는 여성들을 비하하는 댓글을 남기고 게이머게이트 GamerGate (본래 여왕벌이 죽으면 성적 재생산이 가능해지는 일개미를 가리키는 말이다. 2013년 미국에서 어느 여성 게임 개발자에 대한 성적인 폭로와 비난이 확산되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SNS에 '#게이머게이트'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전파했던 사건이 있었다. 옮긴이) 같은 괴짜 집단들이 여성들의 정신적 피해를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을 향한 전진은 이미 시작됐다. 4만 년 동안 지속된 성적 억압의 체제가 우리 눈앞에서 해체되기 시작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200년 동안 이어진 경제체제를 폐지하자고 하면 비현실적인 공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가능성의 순간에 서 있다. 자유시장을 넘어서고, 탄소경제를 넘어서고, 강제된 노동을 넘어서는 통제된 전환의 가능성이 보인다. 정부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정부의 힘은 시간이 갈수록 축소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회가 정부의 역할을 결정할 것이다. 나는 정부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정부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 모두 활용 가능한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계획안은 무정부주의자의 입장에서 모델링할 수도 있고, 정부의 역할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도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보수주의자들도 나름의 포스트자본주의 모델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행운을 빈다. (p482)
- 폴 메이슨 , ' 포스트 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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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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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The title page of the first edition in 1914 of Dubliners, https://en.wikipedia.org/wiki/Dubliners ) 차들이 더블린을 향해 나스 거리의 바퀴자국을 따라 총알처럼 고르게 질주해 들어왔다. 인치코의 고갯마루에서 구경꾼들은 차들이 결승점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빈곤과 무기력에 찌든 이 경주로로 유럽 대륙은 부와 산업의 결정체를 쏜살같이 몰고 들어왔다. 벌떼같이 모인 사람들은 억압��는 것도 고마운지 때때로 환호성까지 질러 댔다. 그러나 사람들이 응원하는 대상은 파란 차들, 즉 우방 프랑스에서 온 차들이었다. (p52) 따스한 회색빛 8월 저녁이 이미 도시에 깔려 있었고 포근하고 따스한 공기가 여름의 기억이 되어 거리에 맴돌았다. 일요일의 휴식을 위해 셔터를 내린 거리는 옷차림 밝은 군중으로 붐볐다. 불빛 받은 진주처럼 가로등들이 높은 기둥 꼭대기에서 그 아래 살아 움직이는 직물 위를 비추고, 그 직물은 모양과 색깔을 끊임없이 바꾸면서 변함없이 이어지는 소곤거림 소리를 따스한 회색빛 저녁 공기 속으로 올려 보냈다. (p62) 걸음을 뗄 때마다 초라하고 비예술적인 자신의 생활 터전에서 점점 멀어져 런던에 점점 가까워져 갔다. 한 줄기 빛이 마음의 지평 위에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서른 둘, 아직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기질적으로는 이제 막 성숙의 절정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운문으로 표현하고 싶은 상이한 기분과 인상이 너무나 많았다. 마음속으로 그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영혼이 시인의 영혼인지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우수가 자기 기질의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그건 반복되는 신념과 체념과 단순한 환희에 의해 빛이 바랜 우수였다. 만일 그것을 한 권의 시집으로 표현해 낼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줄 터였다. 결코 인기를 끌지는 못하리라는 것, 그쯤이야 알고 있었다. 대중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질이 비슷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야 호소력이 있을 터인데. (p96) 111-112==== 146 부인은 더피 씨에게 왜 평소 소신을 글로 밝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더피 씨는 은근히 시답잖다는 투로 그러면 뭐하겠느냐고 되물었다. 단 육십 초도 진득하니 생각을 이어 가지 못하는 자들과 미사여구 남발을 경쟁하기 위해서? 도덕은 경찰에게, 예술은 흥행주에게 맡겨 버린 둔해 빠진 중산층의 비판이나 감수하기 위해서? (p149) 156 158----==== (159) "신사숙녀 여러분. 우리 사이에는 새 세대, 즉 새 사상과 새 원칙에 자극을 받는 세대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진지하고 새 사상에 대해 열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열성은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조차도 제가 믿기로는 대체로 순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의적이고, 이런 구절을 써도 좋다면, 사상에 시달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이 새 세대가 아무리 교육, 아니 교육의 할아버지를 받았다 하더라도, 전 시대의 자산인 인간애, 환대, 다정다감 등의 특질은 결여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그 모든 유명 가수들 이름을 오늘 밤 듣고 있자니, 고백하거니와, 우리는 그보다 편협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시대는, 과장 없이 말해서, 관대한 시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불러도 다시 오지 않을 이름이 되었다면, 우리는 하다못해 이런 모음을 통해서라도 여전히 긍지와 애정을 가지고 그 시대를 이야기하고 세상 사람들이 기꺼이 그 명성을 영원히 기리고 싶어 하는, 이제는 가고 없는 그 위대한 이름들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라는 소망이라도 품어 봅시다." (p288) <작품 해설> 이 책은 저마다 다른 주제와 소재, 그리고 문체와 서술 기법들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 단편들에는 다양한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책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이스의 궁극적인 초점은 서로 동떨어진 개개인의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그러한 사람들의 거주지인 더블린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325) 그러나 조이스는 자연주의적 수법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라는 사조가 인생을 있는 그대로 담는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는 일정 정도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을 문학이라는 예술 장르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전형적인 삶의 단편만을 담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시대 삶의 모습을 최대한 담으려는 조이스는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상 현실의 많은 부분들이 배제되거나 생략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풍부한 함축적 의미를 심어 놓는 상징주의는 이런 차원에서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조이스는 여기서 한 단게 더 나아가는 방법을 착안해 냈다. 즉 어떤 사물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 안에 내재해 있는 특수한 성질이나 본질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듯이 강렬한 인상을 통해 드러나게끔 하는 것이다. (p340) <더블린 사람들>을 형식과 구조의 측면에서 상호 관련성 없이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들의 부조화적인 묶음으로 봐서는 곤란할 것이다. 조이스는 그가 양보하지 않은 사항들을 견지하려고 애쓴 이유가 그것이 바로 "책을 단단히 응집시키는 사항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이야기들이 마비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타락의 냄새를 풍기는 비속의 문체라는 공통된 표현법에 의해 응집되도록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던 것이다. 이는 3인칭 화법으로 넘어간 이야기들에서도 자유 간접 화법, 즉 표면적으로는 전지적 관점의 객관적 서술로 보이는 문장의 이면에 작중인물의 관점이 은근히 배어 있는 화법을 통해서 작중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직접 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처리한 시점의 폭넓은 사용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이런 견지에서 전체 이야기들의 구조를 꼼꼼하게 비교, 분석해 보면 놀랍게도 그것들 사이에 내용상 서로 관련을 이루는 일정한 패턴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p343) [네 양상의 구조 도표] (p345) - 제임스 조이스 , ' 더블린 사람들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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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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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nytimes.com/2013/03/17/magazine/the-inscrutable-brilliance-of-anne-carson.html ) 형용사란 무엇인가? 명사는 세상을 이름 짓는다. 동사는 이름을 움직이게 한다. 형용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다. 형용사(adjective, 그리스어로는 epitheton)는 그 자체가 '위에 놓인', '덧붙여진', '부가된', '수입된', '이질적인'이라는 형용적 의미이다. 형용사는 그저 부가물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다시 잘 보라. 이 수입된 작은 메커니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특정성 속에서 제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형용사는 존재의 걸쇠다. (p8) (9) 16 게리온은 멍청이라는 말에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정의가 실현되면 세상은 무너진다. 그는 자신의 작은 빨강 그림자 위에 서서 이제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정문이 앞에 솟아 있었다. 어쩌면- 게리온은 앞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마음속 불길을 헤치고 지도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나아갔다. 학교 복도의 지도 대신 빨갛게 달아오른 깊은 여백이 놓여 있었다. 게리온은 온통 분노에 휩싸였다. 여백에 불이 붙었고 모조리 타버렸다. 게리온은 달렸다. (p33) 꿀맛 같은 단잠. 게리온은 어렸을 때 잠자는 걸 좋아했는데 잠에서 깨는 건 더 좋아했다. 그는 잠옷 바람으로 밖으로 달려 나가곤 했다. 거센 아침 바람이 하늘을 향해 생명의 화살을 날려 보냈고 각각의 화살은 각각의 세상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파랬다. 각각each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로 날아와 바람 속에 흩어졌다. 게리온에게 늘 그게 문제였다. 각각 같은 단어를 똑바로 응시하면 그 단어는 한 글자 한 글자 해체되어 사라져버렸다. 그 의미를 위한 공간은 남아 있었지만 비어 있었다. 글자들은 근처 나뭇가지나 가구에 걸려 있었다. '각각'이 무슨 뜻이에요? (p35) 넌 어때, 게리온, 네가 제일 좋아하는 무기는 뭐야? 우리cage. 게리온이 무릎을 껴안고 대답했다. 우리? 그의 형이 말했다. 이 멍청이 우리는 무기가 아냐. 무기가 되려면 뭔가를 해야 해. 적을 파괴해야 한다고. (p46-47) 다른 인간과 대립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들이 명확해진다. (p62) 가끔 여행은 필연이다. '정신이 홀로 은밀히 지배한다 육체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열네 살이면 본능적으로 아는 진실이고 열여섯 살에 머리에 지옥이 들어 있을 때도 기억할 수 있다. (p68) 그의 날개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날개들은 그의 어깨에서 아무 생각 없는 작고 빨간 동물들처럼 서로 상처를 주었다. 게리온은 지하실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찾아내 부목처럼 등에 대고 날개를 단단히 묶었다.  (p78) 하지만 그 방에 도착한 게리온은 돌연 견고해진 밤 속에 우뚝 멈춰 섰다. 난 누구지? (p85) 현실은 하나의 소리다, 그러니 주파수를 맞추고 열심히 들어야지 소리만 질러대선 안 된다. (p91) 그 사진이 널 심란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네가 사진이 ���지 이해를 못하는 거야. 사진은 심란한 거야. 게리온이 말했다. 사진은 지각적 관계들을 갖고 장난치는 거지. 바로 그거야. 하지만 그걸 알려주는 게 카메라만은 아니지. 별들은 어떨까? 우리가 보는 별은 실제로 거기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글쎄, 실제로 있는 별도 있겠지 하지만 만 년 전에 타서 없어진 별도 있어. 난 그 말 안 믿어. 어떻게 안 믿을 수 있어, 다 알려진 사실인데. 하지만 난 그 별을 보는데. 넌 추억을 보는 거야. 우리 전에 이런 얘기 한 적이 있나? (p101-102) (104) 그는 창문을 쾅 닫았다. 아래층 거실에선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커튼은 드리워지고, 의자들은 잠들어 있었다. 커다란 침묵의 덩어리들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p110) 게리온의 삶은 혀와 맛 사이에 갇힌 무감각의 시간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역 도서관에서 정부 서류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형광등에서 지이이잉 소리가 나고 돌의 바다처럼 추운 지하실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서류에는 쓸쓸한 엄격함이 있었다. 조용히 대열을 이룬 키 큰 모습이 잊힌 전쟁의 용사들 같았다. 사서가 서류를 찾는 분홍색 쪽지를 들고 철제 계단을 쿵쿵거리며 내려올 때마다, 게리온은 서류 더미 사이로 사라지곤 했다. 각 대열 끝에 있는 작은 스위치가 그 위의 형광등 트랙을 살아나게 했다. (p113) 새벽 세 시에 분노가 빨강 바보를 때려 깨웠고 그는 숨을 쉬려고 애썼다. 고개를 들 때마다 단단한 검은 해변을 때리는 수초 조각처럼 분노가 그를 때렸다. 게리온은 벌떡 일어났다. 시트가 축축했다. 그는 전등을 켰다. 서랍장위 전기 시계의 초침을 바라보았다. 작고 건조한 초침 소리가 그의 신경을 빗질하듯 지나갔다. 그는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침실 문이 열쇠구멍처럼 검은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뇌가 고장 난 슬라이드 영사기처럼 경련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문간을 집을 밤을 세상을 그리고 세상 저편 어딘가에서 헤라클레스가 웃으며 술을 마시며 차에 타는 것을 보았고 게리온의 전신은 절규의 아치를 이루었다-절규는 그 관습, 인간의 그릇된 사랑의 관습을 향한 것이었다. (p119) 시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그는 시간이 자신의 주위로 떼 지어 모여드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 크고 육중한 덩어리들이 버뮤다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빽빽하게 너무 빽빽하게 들어찬 것을 볼 수 있었다. 폐가 오그라들었다. 시간의 공포가 덤벼들었다. 시간이 게리온을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짓눌렀다. 그는 바깥을 보려고 작고 차갑고 검은 시선을 보내는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창밖으로 물어뜯긴 달이 눈의 고원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광대한 검정과 은빛의 무세계가 공중에 매달린 인간들의 파편을 지나 불가해하게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서 그는 시간의 무심함이 자신의 머리통 위에서 포효하는 걸 느꼈다. 하나의 생각이 머리통 가장자리에서 반짝거리다가 날개 뒤 운하로 휙 떨어져 사라졌다. 한 남자가 시간을 통과한다. 작살처럼, 일단 던져지면 도착하리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게리온은 웅웅대는 차갑고 단단한 이중유리에 이마를 대고 잠이 들었다. (p128-129) 세계가 없는 사람은 없다. (p131) 시뇨르! 뭔가 단단한 것이 그의 등에 부딪혔다. 게리온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도 한복판에서 그의 커다란 코트 주위로 사람들의 물결이 사방으로 흐르는 가운데 갑자기 멈춰 섰던 것이다. 게리온은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삶은 하나의 경이로운 모험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군중의 희비극 속으로 들어갔다. (p135) 153 봉합선 아래로 고통이 흐른다. 돌연한 공포가 새벽 세 시에 게리온을 덮쳤다. 그는 호텔방 창가에 서 있었다. 창 아래 텅 빈 거리는 그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다. 길가를 따라 주차된 차들은 스스로의 그림자 속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건물들은 거리 반대쪽으로 몸을 젖히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달은 져버렸다. 하늘도 닫혔다. 밤이 세상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 잠든 포장도로 아래 어딘가에서는 거대하고 단단한 지구가 움직이고 있으리라 피스톤이 쿵쿵거리고, 용암이 선반 모양을 한 지층에서 지층으로 쏟아지고, 증거와 시간이 흔적으로 목화되어가고 있으리라. 한 인간을 두고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p159-160) 호기심을 느껴본 적 있어요? 게리온이 물었다. 여자의 눈썹이 두 마리 곤충처럼 움찔거렸다. 멸종 위기종인가요? 아뇨 수족관에 갇혀서 떠다니는 흰돌고래를 말한 거예요. 아뇨-왜요? 그 고래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거기서 떠다니며, 밤새도록. 아무 생각 안 해요. 그건 불가능해요. 왜요? 살아 있으면서 아무 생각도 안 할 순 없어요. 그야 그렇지만 고래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게 왜 달라야 하죠? 왜 같아야 하죠? 하지만 난 고래의 눈을 보고 그들이 생각하는 걸 알 수 있어요. 말도 안 돼요. 당신이 보는 건 당신 자신이에요-죄의식을 느끼는 거죠. 죄의식? 내가 왜 고래에게 죄의식을 느끼죠? 그들이 수족관에 있는 건 내 탓이 아닌데. 바로 그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왜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고-누구의 수족관에 갇혀 있는 거죠? 게리온은 몹시 화가 났다. (p169-170) 223 골목길을 지나 모퉁이를 도니 거기에 있다. 벽 속의 화산. 저거 보여? 앙카시가 말한다. 아름답다. 헤라클레스가 속삭이듯 말한다. 그는 남자들을 보고 있다. 불 말하는 거야. 앙카시가 말한다. 헤라클레스가 어둠 속에서 히죽 웃는다. 앙카시는 불을 바라본다. 우린 경이로운 존재야, 게리온은 생각한다. 우린 불의 이웃이야. 서로 팔을 맞대고, 얼굴엔 불멸을 담고, 밤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시간이 돌진하고 있다. (p244) <앤 카슨, 고전을 다루는 포스트모던 작가_민승남> 어릴 적 앤 카슨은 은행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빈번히 이사를 다녀야했고 그러다 보니 친구들을 사귀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런 외로움은 그녀에게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지만, 그 덕에 고등학교 시절 처음 그리스 고전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 세계에 더 강하게 매료될 수 있었다. 앤 카슨은 고대 그리스어를 처음 접한 순간 그것이 최고의 언어임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으며, 이후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렇게 그녀는 30년 넘게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고전학자로 살아오면서 고전의 세계에서 그야말로 완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저자가 고전에서 문학적 영감과 소재를 얻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하지만 앤 카슨은 고전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시인이며 그것도 매우 실험적인 글을 쓰는 작가이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지루함이고 지루함을 피하는 것이 인생의 과업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창작은 늘 파격적이고 독창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빨강의 자서전>(1998)에 등장하는 빨강 날개를 가진 어린 소년 게리온은 앤 카슨의 작가적 초상이라 할 수 있다. (p250) 어린 게리온은 아직 글을 모른다. 하지만 조숙한 소년은 어느 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차이를 깨닫게 되고, 오직 내적인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신념으로 그것들을 모두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즉, 자서전을 쓰기로 한 것이다. 글을 모르는데 어떻게 자서전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은 관습의 틀에 갇힌 수동적인 우려이다. 게리온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빨강'을 토마토로 형상화하고, 어머니 지갑에서 꺼낸 10달러짜리 지폐를 잘게 찢어 머리카락 삼아 토마토에 붙인다. 그렇게 탄생한 조형물의 형태를 한 '자서전'은 글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다른 그 어떤 자서전보다 생생하고 강렬하다. 그리고 게리온의 이런 순수하고 거침없는 자서전 작법은 장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열정과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작가 앤 카슨의 창작 스타일과 일맥상통한다. (p251)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아내와 아들을 죽인 죄를 씻기 위해 12가지 과업을 수행하는데, 그중 열 번째 과업이 에리테이아(빨강 섬)에 사는 괴물 게리온을 죽이고 그의 소떼를 훔쳐오는 것이다. 앤 카슨은 캐나다의 문예지 <브릭 매거 진》과의 인터뷰에서 게리온의 괴물에 매료되어 그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모두 거의 항상 자신이 괴물이라고 느끼니까요." 농담이나 비꼬는 말이 아닌 진지한 단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괴물'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비정상적이고 괴이하기만 한 무엇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다. 몰개성의 잿빛 바다에서 빨강으로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 <빨강의 자서전>에서 그것은 빨강 날개로 상징된다. 이 작품에서 저자는 괴물 게리온을 현대의 캐나다로 데려온다. 게리온은 신화에서처럼 세 개의 머리와 세 개의 몸이 한데 붙은 무시무시한 형상이 아니라 겉보기엔 평범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깨에 조그만 빨강 날개가 달려 있다. 그 빨강 날개가 그의 괴물성을 나타내는 육체적 표식이라면, 극단적인 비사회성과 동성애적 성향은 괴물성의 정신적 발현이다. 그는 세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며, 우연히 만난 소년 헤라클레스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소년 게리온은 사람들에게 그 괴물성을 드러낼 용기가 없어서 빨강 날개를 꼭꼭 감추고 살아가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빨강 날개가 특별함과 영웅성의 상징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소년의 삶은 빨강 날개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하고, 그 빨강 날개로 하늘 높이 당당히 날아오르기 위한 험난하지만 숭고한 여정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영웅의 삶이다. 앤 카슨은 이 작품을 '로맨스 romance'라고 칭하는데, 로맨스는 중세 유럽의 기사 모험담을 다룬 문학 장르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도 영웅 이야기인 셈이다. (p252-253) - 앤 카슨 , ' 빨강의 자서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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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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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1451439 ) 웹 3.0은 플랫폼 기업들이 과도하게 독점하고 있는 데이터와 이익을 다시 사용자에게 돌려주려는 시도이다. 플랫폼에 종속된 정보의 주권을 탈중앙화를 통해 사용자에게 돌려주고, 단순히 읽고 쓰는 기능이 전부였던 웹 2.0에 소유 기능까지 부여한 것이다. (p18) 28-9 (36) (그림출처 : 웹3.0 사용설명서, 백훈종) 그토록 많은 노력과 에너지와 시간을 '신뢰 없는 분산화 합의 메커니즘Trustless Distributed Consensus Mechanism'을 만드는 데 썼는데도 불구하고 블록체인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실상 모든 클라이언트는 단 두 회사가 보내는 아웃풋을, 어떠한 추가적인 검증 절차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p37) 39 초창기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웹 3.0 프로토콜은 발전 속도가 느리다. NFT가 재판매될 때마다 원작자에게 돌아가는 수수료도 이더리움의 NFT 발행 표준인 ERC-721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픈시가 자체적으로 로열티를 설정하는 기능을 만들어서 제공하고 있다. NFT가 재판매될 때마다 창작자에게 자동으로 수수료가 주어지는 '웹 3.0스러운 기능에 사람들은 열광하지만, 해당 데이터가 블록체인에 있지 않고 오픈시가 제공하는 API에 있다는 게 함정이다. (p44) 50 웹 2.0 플랫폼이 축적된 사용자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한 고도의 알고리즘을 이용해 소비자에게 맞춤 콘텐츠·맞춤 상품·맞춤 광고를 보여주고 있지만, 현대 소비자는 자기 스스로 선택하기를 원한다. 웹 3.0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하는 것이다. 지금 인터넷의 문제가 소수 플랫폼 기업에 집중된 데이터 권력과 불공평한 이익 배분에 있다면, 풍선효과로 반대편에서는 데이터 권력을 사용자에게 분산하고 플랫폼 같은 중개자 없이 사용자끼리 직접 서비스와 이용료를 주고받는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p51) 블록체인으로 구동되는 웹3.0이 플랫폼 서비스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자생적 질서'로 작동되는 부분이다. 자유시장경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매우 유사한 PoW작업증명' 합의 알고리즘은 별도의 팀이나 경영진이 나서서 네트워크를 운영해주지 않아도 사용자의 자발적인 참여만으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p52) 우리에게 필요한 웹 3.0은 특정 집단의 인위적인 조종과 간섭이 끼어들 수 있는 영역을 최대한 배제하고 참여자 간에 형성된 자생적 질서를 제일의 가치로 여기는 프로토콜이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처럼 '총 발행량은 2,100만 개이고 4년마다 새로 채굴되는 양이 반으로 줄어든다' 같은 사전에 정한 규칙이 존재할 뿐, 누구도 전체적인 시스템을 계획하거나 통제하지 않아야 한다. (p53) 인터넷은 어느 특정 개인이나 기업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발전시켜 탄생한 공공재이다. 마치 수도나 전기처럼 말이다. 우리 집 주방 싱크대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이유는 우리 발밑에 수도관과 펌프와 하수처리장 같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인프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와이파이만 연결하면 어디서든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인프라가 조성된 것이다. (p96) TCP/IP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방된 프로토콜 표준이어서 누구나 표준안을 얻을 수 있고 누구나 표준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둘째, 컴퓨터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또는 네트워크망의 종류와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다. 셋째, 인터넷 주소를 유일하게 보장하여 인터넷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쉽게 통신할 수 있다. 이러한 강점 덕에 유닉스 운영체제 컴퓨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컴퓨터에서 TCP/IP를 통신 프로토콜로 이용했다. 이때부터 민간에서 인터넷 기술을 구현한 다양한 상업적 제품을 개발했고, 인터넷을 이용한 산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p103) 이렇게 등장한 웹 1.0의 특징적 기능은 하이퍼링크와 북마크라고 할 수 있다. 콘텐츠는 텍스트와 약간의 이미지가 주된 형태였고, 음악이나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 사용은 극도로 제한���어 있었다. 최종 사용자와 웹페이지 제작자 사이의 의사소통도 빠져 있었다. 주요 기능인 HTML을 사용한 이메일 전송이 전부다시피 한 정적인 형태로 웹사이트가 운영되었다. 웹사이트에서는 운영자가 보여주는 것 외에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고, 동적인 데이터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없었다. 컴퓨터가 아직 느렸고 하드디스크의 저장 공간도 충분치 않았 으며 네트워크의 대역폭도 작았으므로 동영상이나 플래시같이 현란한 웹사이트는 리소스 낭비로 여겨졌다. 웹 1.0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웹은 인쇄물의 대체재나 보완재 정도로 생각되었고, 웹사이트는 브로슈어 형태를 넘지 못했다. 2. 사용자가 할 수 있는 활동은 화면에 나타나는 정보를 읽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3. 콘텐츠는 대부분 텍스트와 하이퍼링크로 이루어져 있었다. 4. 웹사이트에 나타나는 정보는 운영자가 소유한 것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p111-112) 인트라넷은 일단 내부 임직원을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특성 때문에 사용자 관점에서 UI나 서비스 플로를 고민하지 않아 쓰기 불편했고, 폐쇄적인 특성 탓에 정보의 양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자가 증식하는 인터넷보다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터넷의 미래를 위시하며 우후죽순 등장했던 기업형 인트라넷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는 은행, 증권, 대기업, 정부, 지자체, 학교, 공공기관, 군대 등 사내망이 꼭 필요한 조직에서만 주로 쓰고 있다. 기업형 인트라넷의 유행과 몰락은 한 기술의 성공 여부가 개방과 참여 그리고 공유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p125) 웹 2.0이란, 개방성 서비스 구조를 기반으로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핵심 가치를 창출하는 인터넷 서비스를 말한다. '정보 개방을 통해 인터넷 사용자 간의 정보 공유와 참여를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정보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움직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에 대해 다양한 추가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웹 2.0이라는 개념은 여러 사람이 제공하는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하여 서비스를 생산해낼 수 있는 플랫폼, 그리고 사용자 중심의 커뮤니티가 주축이 되는 동적인 공간으로 발전했다. (p126)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웹 2.0은 각종 기술의 발전에서 비롯했다기보다는 웹 환경에 대한 인식 변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웹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가 웹 2.0 으로 이어진 것이지, 기술 발전이 웹 2.0을 만든 것은 아니다. (p127) 파괴적 혁신 이론 주창자이자 최고 권위자인 클레이턴 크리스텐센은 이러한 혁신에 대해 '하나의 기능을 제외하고는 다 별로인, 그러나 그 하나의 기능이 굉장히 중요해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p136) 초창기 PC가 그랬듯, 블록체인도 한 분야에서는 월등하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서 뒤처지는 열등한 데이터베이스이다. 다른 데이터베이스보다 느리고, 훨씬 더 많은 저장 공간과 연산이 필요하고, 심지어 고객 지원도 없다. 그런데도 블록체인은 다른 것에 비해 한 가지 기능 면에서 혁신적으로 다르다. 바로 어떠한 개인도, 혹은 작은 소수 집단도 블록체인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잘 전달되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를 '탈중앙화'라는 단어로 표현하곤 한다. 블록체인의 탈중앙화가 과거 PC가 저렴했던 한 가지 특성과 비슷한 이유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나 정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은 대부분 그들이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고 컨트롤한다는 사실에서 온다.  (p137) 물론 이 모든 회사의 성공 방정식에는 복합적인 요소가 들어 있지만, 그들이 가진 권력의 핵심이 데이터베이스 운영에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누가 데이터베이스를 읽고 쓸 수 있는지, 어느 정보까지 접근 가능한지는 오로지 해당 회사만 결정할 수 있다. 만약 웹상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에 접근하는 데 대기업의 허가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대기업이 인터넷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도록 놔둘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비트코인 백서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말 그대로 어떻게 '무허가'를 실현할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점이다.  (p139) <21세기 권력> 제임스 볼 웹 3.0이 제대로 작동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합의된 하나의 프로토콜이다. 마치 웹 1.0이 TCP/IP 프로토콜이라는 업계 표준이 만들어진 후 개인과 기업의 참여가 활발해지고 인터넷 생태계가 넓어진 것처럼, 웹 3.0도 참여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기술이 발전하려면 합의된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웹 3.0의 존재 이유가 웹 2.0에서 플랫폼 기업들에 과도하게 집중된 데이터 주권을 다시 사용자에게 돌려주는 것이고, 그 주인공이 블록체인 기술이라면 웹 3.0 생태계의 발전을 위해 과연 어떤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이 세계의 표준 프로토콜인지가 가장 먼저 결정되어야 한다. (p144)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점은 블록체인 자체가 인터넷의 탈중앙화를 가능케 하는 기술이라는 오해이다. 사실 블록체인은 탈중앙화된 의사결정 구조를 지닌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는 그저 거래내역을 기록하는 원장이다.  또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웹 3.0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암호화폐가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이다. (...) 앞서 말했듯이 블록체인은 단순히 거래정보를 기록한 원장에 불과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 원장에 적힌 거래정보를 정부등 중앙기관의 보증 없이도 믿을 수 있는지, 누구도 절대 위변조할 수 없는지, 도둑맞거나 탈취당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다. 바로 이를 위해서 암호화폐가 꼭 필요하다. (p145) 166 리포트는 이런 수치를 제시한 이유로 비트코인을 '본원통화 M0', 이더리움을 '구글'에 비교했다고 밝혔다. 비트코인이 현존하는 암호화폐 중 가장 우월한 형태의 '돈'이라면 이더리움은 가장 발달한 '가상 컴퓨팅 플랫폼'이라고 상정한 것이다. (p169) '바퀴의 발명'은 한 번 발명되고 나면 결코 다시 발명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비트코인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인류 역사상 디지털 재화에 희소성을 부여하는 문제, 그리고 제3자의 존재가 완전히 배제된 개인 간 금융거래를 가능케 하는 문제는 한 번도 해결된 적이 없었다. 비트코인이 해결한 위 두 가지 문제들은 단순한 인터넷 기술의 발전 수준이 아니다. 인터넷 세상에서 희소성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퍼즐을 최초로 풀어낸 역사적인 발견이라 할 수 있다. (p173) (사진 출처 :  '웹3.0 사용설명서', 백훈종) 1980년대 초반에 컴퓨터 과학자들은 분산 데이터베이스에 내재된 일종의 트릴레마'를 확인했다. 최근에는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이 이 트릴레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블록체인 트릴레마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분산형 데이터베이스는 한 번에 세 가지 보장보안성, 탈중앙성, 확장성 중 두 가지만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p178) 186-7 (사진 출처 :  '웹3.0 사용설명서', 백훈종) 이더리움은 탈중앙화와 확장성을 다 잡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단점이다. 오히려 솔라나와 카르다노가 더 늦게 시작했지만 중앙집권화되었기 때문에 느린 TPS 문제는 더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아무리 이더리움의 미래가 기대된다고 해도 당장 사용자들은 수수료 싸고 빠른 쪽으로 이동하고 말 것이다. 반면 비트코인은 오직 탈중앙화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가치 저장 수단이 될 수 있고, 그 덕에 더 많은 사용자가 모여들어 기술로 확장성 문제를 해결하는 레이어2, 레이어3 등이 지속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 (p191-192) 193-4 195 일부 토큰 투자자는 그저 더 많은 기능과 사용성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이런 '덜 탈중앙화된 토큰을 선호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투자자들이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암호화폐 생태계는 앞서 소개한 '멀티체인 세상'으로 발전할 것이다. 반면 웹 3.0 세상의 애플리케이션들이 각자 별도의 블록체인과 토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기본 레이어 블록체인 위에서 해당 블록체인의 토큰을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이라면 다수의 블록체인이 필요하지 않다. 한 개 혹은 아주 소수의 블록체인이 전체 암호화폐 생태계를 떠받치는 기본 레이어의 역할을 하는 '승자독식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지면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사업가는 당연히 가장 튼튼하고 보안성이 뛰어난 블록체인 위에 자신이 만든 서비스를 올리고 싶어질 것이다. 블록체인 네트워크 중 가장 탈중앙화되어 있으며 영원불변성을 지닌 것은 비트코인 네트워크이므로, 승자독식 구조의 웹 3.0 생태계에서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비트코인이다. (p197) 웹 2.0에서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 넷플릭스 등의 성공은 인터넷이라는 기본 레이어를 훨씬 가치 있고 중요한 공간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었다. 이와 비슷하게 웹 3.0에서도 특정 암호화폐들을 비롯해 그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성공 사례들은 이를 떠받치는 기본 레이어의 사용성을 증가시키고, 사람들의 소유 욕구를 높인다. 마치 입지 좋은 곳에 위치한 부동산의 인기가 높아지듯이 말이다. 이 구조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용자, 또는 투자자가 실제로 기본 레이어의 일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웹 2.0에서 투자자는 인터넷 자체를 소유할 수는 없으므로 개별적인 애플리케이션의 성공 여부를 예견해서 주식 등을 통해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했다. 그러나 웹 3.0에서는 어떤 애플리케이션이 성공할 것인가를 예측할 필요가 없다. 기본 레이어를 소유하기만 하면 그것과 그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혁신(예: 구글, 아마존 등)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은 결국 시장이 요구하는 방향대로 진화할 것이다.  (p198-199) 202 (206) 207 211 그중에서도 비트코인 네트워크 레이어3의 핵심 기능은 바로 검열 저항성이다. 비트코인이 현존하는 암호화폐 중 가장 탈중앙화된 블록체인으로서 정부나 기업들의 검열과 규제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라이트닝 네트워크도 별도의 운영 기관 없이 완전히 노드들의 자발적인 참여로만 유지되고 운영되기 때문에 특정 그룹의 입맛에 따라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개발된 앱들은 정부나 기업의 검열과 규제를 효과적으로 회피할 수 있게 된다. (p213) 단순히 비트코인을 화폐로 사용하기 때문에 검열 저항성이 높은 것이 아니다. 네트워크 자체가 특정 그룹의 지배하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자기 입맛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아직 실용적인 서비스가 나온 단계는 아니지만 라이트닝 네트워크 위에 이와 같은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면, 기존 웹 2.0 생태계에 미칠 여파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p214) <돈의 인터넷Internet of Money> 안드레아스 안토노풀로스 비트코인은 자산이나 화폐이기 이전에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기술이며, 그 위에 화폐가 지닌 가치 전달 기능과 금과 같은 안전자산이 지닌 가치 저장 기능까지 있다고 이해하는 게 맞다. (p218) 220 웹 3.0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세계이다. 참여자 개인의 주권, 즉 시민권Citizenship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인다. 정부기관이나 서비스 개발사가 사용자를 위해 귀찮은 과정을 모두 대신해주는 곳은 웹 2.0 세상이다. 어느 세상에 더 발을 깊이 들이고 살지는 개인의 가치판단에 따라 정하면 된다. 다만 웹 3.0을 이용하려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에서는 '코드가 곧 법'이라는 독특한 룰이 존재한다. 카카오톡은 회사에서 직접 데이터를 독점하고 사용자 반응을 살피며 끊임없이 앱을 업데이트해주는 서비스이다. 불편한 부분을 빨리빨리 개선해주니 편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그 안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블록체인은 참여자간의 합의에 따라 네트워크가 유지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업데이트를 자주 할 수 없다. 문제가 발생해도 빨리빨리 해결되지 않는 것은 불편하지만 그 대신 내 주관을 지키며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다. 따라서 웹 3.0 세계의 기본적인 문화는 '직접 조사하라DYOR: Do Your Own Research'이다. 사용자에게 높은 자기 책임이 요구되는 것이다.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는 코드에 문제가 있더라도 쉽게 업데이트하기 어려우므로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다양한 각도에서 고민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 오픈소스 프로토콜이라서 모든 코드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기도 하다. 개발 언어를 모르더라도 커뮤니티에서 코딩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등 본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사전에 알아볼 수 있다. (p223) 웹 3.0의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보수적으로 발전해야만 한다. 코드가 곧 법이기 때문에 밥 먹듯이 코드를 갈아 엎어서는 곤란하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한 코드여야 하고, 그것을 바꾸기가 매우 어려워야 한다. 법학에 적용되는 '법은 최소한이다'라는 기본 사상이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탈중앙성과 분산된 권력을 제일 가치로 삼고 보수적인 속도로 발전하는 프로토콜 가운데 으뜸은 단연 비트코인이다. 물론 비슷한 속성을 지닌 다른 것이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비트코인이 지닌 네트워크 효과와 승자독식 메커니즘 때문에 제2, 제3 프로토콜의 존재가치는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웹 3.0의 주역이 되리라 예상하는 이유이다. (p224) 약간 돌아가고 있지만 웹 3.0 세계는 곧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비트코인, 라이트닝 네트워크, 탭루트Taproot, 타로를 미리 공부해놓기를 추천한다. '나'라는 개인의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이와 정보를 교류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을 남보다 먼저 맞이하게 될 것이다. (p225) (사진 출처 :   '웹3.0 사용설명서', 백훈종) 비트코인 레이어3의 진화 임퍼비어�� AIImpervious AI는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이용해 P2P 인터넷을 구현한다는 목표를 가진 미국의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는 2021년 말 비트코인 라이트닝 네트워크의 프로그래밍 레이어 역할을 하는 API를 출시해 라이트닝 네트워크에 P2P 통신 및 데이터 전송 기능을 추가하여 유명해졌다. 즉, 원래는 'A가 B에게 비트코인 몇 개를 보냈다'는 정도의 정보만 이동하던 라이트닝 네트워크에 다른 형태의 데이터도 이동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 한 가지는 여러 사람이 문서를 공동으로 작성하고 편집할 수 있는 라이브 독스Live Docs 기능이다. 구글에서 제공하는 구글 독스Google Docs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구글 독스에서 작성한 문서는 구글의 서버에 저장되지만 라이브 독스에서 작성한 문서는 어디에도 저장되지 않는다. 오직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 람들끼리만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통해 직접 데이터를 주고받기 때문에 중앙 서버에 저장할 필요가 없다. 특정 기업에 나의 신상정보, 문서 접근권한, 문서 내용 데이터를 모조리 맡기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과 함께 문서를 작성하고 편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p226-227) 탈중앙 블록체인 지갑이 미국 정부가 내린 조치 때문에, 또는 특정 기업에서 마음대로 차단할 수 있다면 과연 탈중앙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메타마스크가 이런 지경이라면 다른 지갑 앱도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구글 계정을 통해 로그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라이트닝 로그인Lightning Login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여 좀 더 완벽한 익명 신원으로 웹 3.0 기반 웹사이트에 로그인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이다. 앞에서 다뤘듯, 라이트닝 네트워크는 완전히 탈중앙화된 오픈 네트워크로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기업이나 운영 팀이 없다. 그래서 라이트닝 네트워크 기반의 비트코인 지갑은 사용자에게 메타마스크보다 더 완벽한 수준의 자기 주권을 제공한다. (p242) (246) 비트코인 채굴산업이 커지면서 기업 단위로 대규모 투자가 집행되고, 데이터센터와 맞먹는 규모로 채굴 시설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개인이 집에서 혼자 채굴기 몇 대를 가동해서 채굴 보상을 가져갈 확률이 매우 낮아진 것이다. 그러자 비트코인을 채굴하고 싶은 일반 개인을 위해 채굴을 대신 해주는 호스팅 서비스가 등장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호스팅 서비스 업체는 컴퍼스 마이닝Compass Mining이다. (p272) 주식회사의 가장 큰 장점은 경영진의 횡포를 막는 견제 장치가 많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모든 권력은 위선을 낳는다. 만약 기업 경영진이 회사를 제대로 운영하지 않고 태업을 하거나, 자신들의 사익 편취를 추구하는 방향으로만 경영하게되면 즉시 이사회와 주주의 제재를 받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영진에서 해임될 수 있고 주주의 가치에 손해를 입히면 형사처벌 대상이 되기도 한다. DAO에는 근본적으로 이를 미연에 방지할 법적·제도적 장치가 없다. 따라서 달성하려는 목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얽혀있는 이해관계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AO를 통해 큰 목표를 달성하려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요건은 충족해야 한다. 첫째, 충분히 실현할 수 있으면서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할 것. 둘째, 설립자가 DAO 운영에 미치는 영향을 최대한 빨리 줄여나갈 것. 최근 미국에서 이 두 가지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DAO가 하나 등장해서 눈길을 끈다. 이 책의 초반에서도 언급한 링크다오인데, 이 DAO는 미국에 있는 PGA급 국제규격 골프장 두 개를 구입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골프장 구입 자금을 모으려고 NFT를 9,090개 발행했으니, 일단 NFT의 사용처가 명확하다. NFT는 총 두 종류로 나뉘어 발행되었다. 하나는 일반 등급 레저 멤버십총 6,363개 발행, 나머지 하나는 VIP 등급 글로벌 멤버십총 2,727개 발행이다. NFT는 성공리에 판매되었고 약 120억 원의 규모 자금이 모집되었다. (p296) 비트코인을 인터넷 세상에 툭 던져진 주인이 없는 땅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이 땅을 빨리 발견한 선지자들은 이미 자기 깃발을 꽂고 건물을 짓고 있을 수도 있다. (...) 사용자가 인터넷을 소유한다는 개념은 경영진에서 억지로 사용성을 부여하여 발행한 토큰을 나눠 갖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소유한다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이 개념을 실행하기 위한 '땅'으로서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최적인 이유는 실제로 주인이 없기 때문에 사용자가 스스로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기 가장 적합하며, 게다가 가장 오래되어 잘 개발되어 있고, 제일 넓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p308) - 백훈종 , ' 웹 3.0 사용설명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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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1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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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5361617 ) [들어가며: 광주로 가는 길] 2019년 현재 광주의 주택 52만 6,000호 가운데 아파트는 42만호에 달한다. 아파트 비중은 79.7%로 대전(73.5%), 대구(72.4%) 부산(66.5%), 서울(58.3%)을 앞선다. 아파트 단지를 이어붙인 기이한 형태를 한 세종시(85.2%)가 유일하게 광주보다 아파트 비중이 높은 도시다. 그러다 보니 광주의 지역 경제와 정치는 '아파트'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p11) 광주의 침체는 꽤 오래된 이야기다. 지역에 이렇다 할 산업 기반이 없다 보니 기술 변화와 산업 구조 발전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 지난 10년간 여기서 성공한 기업은 호반, 중흥, 한양 등 건설사뿐이다. 그러나 주택건설 위주의 업체들이 성장 한다고 해서 지역의 산업 역량이 일자리 질 개선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p13) 광주나 전라도가 관심을 받는 거의 유일한 영역은 정치, 정확히는 선거다. (p14) 20 지역 내 기업가와 중산층의 층위가 얇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 및 행정 우위의 사회를 만들어낸다. 이는 민주당계 정당이 모든 사회 집단을 대표하는 지역패권정당으로 작동하는 것과 맞물려,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는 후진적 거버넌스를 낳는다. 지역사회의 부패와 무능은 구조적인 것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자원 투입은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개발 프로젝트의 성공 확률도 낮아진다. 결국 호남 내에서 계속되는 저발전은 그 함정에 도지히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원인이 있다. (p22) 광주는 주요 광역시 중 유일하게 창고형 할인 매장과 대형 복합쇼핑몰이 없는 지역이다. 타 광역시에 비해 부족한 구매력을 가진 데다 지역 상인들의 표를 의식한 지자체가 인허가를 내주지 않아서다. 저발전과 지역정치에 이중으로 고통받는 양상인셈이다. (p24) [1장: 반도의 흑인 또는 아일랜드인] 35 피에르 발리에르Pierre Vallieres <아메리카의 하얀 깜둥이들White Niggers of America> (p40) 한국의 국가 주도적 산업화 과정 덕분에 이 자리 경쟁은 근본적으로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는다. 관가, 기업, 언론의 고위직 인사 등은 모두 정치권력을 가진 이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 또 정부의 각종 유무형 인프라 투자가 큰 영향을 미치던 시절이라, 자본에 대한 배분권을 쥔 정치권력에 가까울수록 성장의 기회를 받는다.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주창한 '소용돌이 사회'는 1950년대 한국을 관찰하고 나온 개념이지만,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도 적실성이 있게 되는 이유다. 헨더슨은 한국을 "중앙권력을 향하여 모든 활동적 요소를 휘몰아가는 소용돌이"라고 묘사했다. 원자화된 단위들이 중앙권력을 향하여 돌진하고, 그 과정에서 대중과 엘리트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중앙 정치로 함께 빨려 올라간다는 것이다. (p43) 강준만 <전라도 죽이기> (p47) 49-50 52 55-6 58 '전라디언'이 형성되는 두 가지 경로인 엘리트 사회 내의 배제와 도시 하층 노동자로 편입된 이주민 집단에 대한 차별은 2000년대 들어 '차별받는 호남인'이라는 공통분모를 상실한다. 그 내부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까닭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전라도인이 '이등시민'이긴 하지만, 이등시민 내부에서도 경제적 이해관계나 출신 계층 등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지역 기반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해도 다른 정체성이나 이해관계를 압도할 수 없다. 언어와 거주지역이 분리되고, 직업이나 경제적 관계 등에서 독자적인 인클레이브enclave를 형성하지 않는 한 말이다. (p60) 이런 의미에서 '진짜 호남인'은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의 차별을 받는 존재다. 2010년 이후 호남 지역이 민주당의 적잖은 골칫거리가 되고, 2016년 안철수가 이끄는 국민의당이 이곳을 석권하는 등 투표장에서의 '반란'이 때때로 터져나오는 이유다.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한 수도권의 엘리트들이 '진짜 호남인'들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못하며, 정확히 말해 대변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호남문제'의 핵심은 호남 내부의 분화와 이해관계의 대립일 것이다. (p64) [2장: '산업화 열차의 꼬리칸'이라는 문제] 68 72-3 2019년 조사대상 기업 1만 2,900곳 가운데 광주, 전남, 전북에 본점을 둔 ��업은 단 4.8%(617곳)에 그쳤다. 다른 지역의 경우 각각 부산, 울산, 경남은 12.4%(1,606곳), 대구, 경북은 6.9%(886곳), 충청은 9.1%(1,172곳)을 차지했다. (p81-82) 광주는 세종시 다음으로 아파트 거주 비율이 높다. 주택 보급률은 2019년 107.0%로 광역시 중 울산(111.5%)에 뒤질 뿐 103~104%인 부산, 대구를 앞선다. 광주시에 딸면 2025년 주택보급률은 119.4%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는데, 향후 10년간 17만 3,000호 정도의 아파트가 공급되기 때문이다. (p87-88) 건설업의 눈부신 성장과 견주어 지역의 R&D 역량은 처참한 수준이다. 한국은행 광주, 전남본부가 2021년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기준 R&D 투자액 가운데 광주, 전남, 전북의 비중은 각각 0.8%, 1.1%, 1.3%로 강원도(0.6%) 다음으로 비중이 낮은 지역이었다. (p90) 91,2 97 [3장: 흔들리지 않는 패권, 민주당 초우위의 비결] "지역 정치권에서는 3월 대통령선거보다 6월 지방선거에 더 관심이 쏠려 있죠. 지선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은 다들 권리당원 표를 붙잡기 위해 물밑 작업에 열심인 상황입니다." 2021년 8월에 만난 광주시의 어느 더불어민주당 인사는 광주 정가의 분위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p103) 대선과 지선이 거의 동시에 열리는 상황에서 지역 정가의 이와 같은 분위기는 호남에서 민주당의 초우위가 어떻게 작동하고 유지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민주당 정치 기구가 시민 사회에 깊숙이 침투해 구석구석 뻗어 있는 상황에서, 지방선거 경선은 시민 다수가 참여하는 정치적 이벤트다. 이 이벤트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역 정치인들은 신규 당원 확보와 조직책 포섭 등에 사력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민주당에 반영시킨다. 누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는지 등 '중앙정치'는 지역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다. 국회의원 공천 결과에 따라 지역위원회(옛 지구당)내 판세다 큰 영향을 받긴 하지만, 지역구를 원만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지역 정치인들과 역시 원만한 관계를 구축해야 하낟. 지역정치의 상대적 자율성이 보장되는 이유다. (p104)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다른 광역시 의원들보다 평균 재산이 더 많은 편이다. <중앙일보>가 2018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각급 단체장과 광역의회 의원 670면의 재산신고 내역을 집계한 자료를 이용해서 광주, 대구, 부산, 대전, 인천시 의회 초선 의원의 평균 재산을 살폈다. 광주는 평균 8억 3,400만 원으로 대구보다 적었지만, 3억 7,200만원에 불과한 대전이나 부산, 인천보다는 많았다. (p117-118) 126-7 127, 8 하지만 386의 정치적 기획은 수도권에서의 대규모 지지율 하락으로 파산하게 된다. 무엇보다 호남 출신 이주민의 정당은 계급적으로 관악구 봉천동이나 성남시 중원구에 사는 중하층을 위한 정당이지, 분당구나 마포, 용산, 성동에 사는 대기업-대졸 중산층의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32) 132-3 137-8 이렇게 좋은 기회에 단 2명만 응모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당시 민주당 최고 실세인 L 의원의 측근 A씨가 움직인다는 풍문에서였다. 정확히는 A 씨의 자녀가 청년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 비례후보를 뽑겠다고 발표했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A씨의 자녀가 출마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다들 응모를 단념했다"고 한 민주당 관계자는 말했다. (p142) (142) 지역정치 내부의 정체와 낙후 그리고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 약화는 2021년 이른바 '호남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다. 사실 두 사안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지역 정치권이 스스로 대안을 만들지 못하고, 전국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데올로기를 창조하지 못하며, 그 결과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당 내에서 호남의 영향력은 계속 축소되었다. 그런데 민주당 내에서 영향력이 약해지고, 수도권 상위 중산층에 기반한 정치 세력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하는 과정은 지역정치의 정체와 사람과 담론이 바뀌지 않는 동맥경화를 강화한다. 중앙정치 세력 중 이득을 가장 많이 줄 법한 이를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한데 몰려가 '킹메이커' 노릇을 한 대가로 받는 것은 지역 정치인들의 기득권 보장에 그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권 이주민을 레버리지 삼았던 호남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상황에서, 지역정치의 정체가 계속될 경우 호남이 민주당의 '2대 주주'나 '전주'로 계속 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본다면 전통적인 호남 정치의 '위기'는 이제 시작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p144-145) [4장: 부패와 무능의 도시] 호남이 자체적인 성장 역량을 갖추는 데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이 지역의 정치, 경제, 행정의 운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거버넌스governance의 결함이다. 적합한 발전전략을 세우지 못하고, 이를 장기간에 걸쳐 수행하는 역량이 없으며, 성과를 평가하고 자원을 재배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p151) 155, 6, 7 158-9, 160 2016년부터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광주의 대규모 개발사업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부패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먼저 특정한 사업을 기획하거나 어젠다를 제시하는 것 자체부터 특정 관계자 또는 기득권층의 이해타산을 반영한다. 그리고 시행되는 과정에서 기득권의 이익이 우선적으로 보장된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좀처럼 반영되지 않고, 또 환경, 노동, 주거권 등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지역의 자산가, 기업인, 다양한 층위의 정치인, 관료 등은 지연, 학연, 혈연 등으로 얽혀 있으며 민주당의 지역정치 기구를 중심으로 결집해있다. 등질적인 사회이고 다원성이 떨어지다 보니, 사업 입안과 집행 과정에서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부정과 비리가 싹트기 쉽다. 간혹 사업 실패나 대형 사고, 비위 적발 등이 발생하곤 하는데, 그저 적당히 수습하는 절차가 뒤따른다. (p162) 169, 170 181 결국 광주가 직면한 '무능'의 문제는 낡은 방식의 개발사업에서나 통했을 제도적 역량을 가지고, 선진국형 첨단 산업과 고부가가치 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하는 데서 기인한다. 내재적인 역량이 없기에 중앙정부나 대기업에 자본, 기술, 시장 나아가 사업 진행까지 모든 걸 의지한다. 중앙정부와 대기업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며, 나름의 이해관계와 조직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만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광주는 내재적인 역량이 없고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자원을 투입해도 성장할 수 없는 일종의 '제3세계형' 저발전의 함정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p190-191) [5장: 지방지배체제의 균열] 197 201 203 복합쇼핑몰 유치 논란은 이러한 점에서 광주의 기존 지방지배체제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중앙정부로부터 자본이나 개발사업을 따와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방법은 좀처럼 성과를 내기 힘들게 됐다. 경제 구조의 변화로 지역의 여건은 전방위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원정 쇼핑'은 소비 측면에서도 지역의 주변부화를 보여준다. 함께 일치단결해 파이를 키운 뒤, 나누어 먹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지역민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격심한 갈등을 빚는다. (p219) 218-9 [6장: 이중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차별을 당하는 호남인의 실태라 할 수 있다. 호남인들은 역사적으로 산업화 열차의 '꼬리칸'에 겨우 탑승이 허락된 이들이다. 문자 그대로 제대로 된 '부르주아지'를 가져보지 못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주변부로 밀려났었던 사람들이 탈산업화, 4차 산업혁명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시기에 곧바로 적응해 제대로 된 발전전략을 세우고 성공의 경험을 쌓기란 여간해서는 어렵다.  (p223) 228-9 238-9 [나오며] 지난 몇 년간, 정확히 말하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호남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소지역주의'다. 중앙정부가 내어주는 각종 사업들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시,군,구로 유치하려고 양보 없는 경쟁이 벌어졌다. 개발 과정에서 부산물로 감당해야 하는 기피시설은 거꾸로 다른 곳으로 밀어넣으려 했다. 호남에 풀 선물이 많은 민주당 정부 아래에서 소지역주의가 더 기승을 부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소지역별로 나뉘어져 벌이는 혈투 속에서 정작 대규모 개발 사업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다. 지역으로서 자립하지 못하고 파편화된 채 '중앙'에 예속된, 현재 호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다. (p253) 256-7 소지역주의가 발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역사회가 정치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무등일보>는 "소지역주의가 호남권에서 유독 득세를 부리"고 있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행정과 경제 등 모든 분야가 정치에 예속되면서 정치인의 소지역주의 조장이 먹힌다"고 원인을 분석한다. 지역패권정당 역할을 하는 민주당이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와 사회 전반에 침투하면서, 표를 얻기 위한 정치인의 소지역주의 행보에 흔들린다는 것이다. <무등일보>는 민주당에 대해 "그 정당"이라고 에둘러 말하면서 "정책이나 지역발전의 긴 안목 없이 즉흥적이고 대중영합적인 이익단체로 변질됐다"고까지 말했다. 중앙정부의 예산을 따내는 것 이외에 자립적인 지역경제발전 모델이 없다 보니 "정치인이나 지역민 모두 파이를 키우기보다 자기 몫을 더 가져가기 위해 싸운다"는 것도 또 다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광주공항 이전 건을 국무조정실로 가지고 간 것은, 소지역주의의 악순환을 압축해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p260) 259-260-1-----------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  (p268) - 조귀동 , ' 전라디언의 굴레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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