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keebmyn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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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는 일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프로는 자신이 결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로들은 걱정할 시간에 그냥 노트북을 켜고 일을 시작한다. 흰 화면에 커서만 깜빡이더라도. 영감도, 창의력도 결국은 구력에서 나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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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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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some point, everything’s gonna go south on you. Everything’s going to go south and you’re going to say, ‘This is it. This is how I end.’ Now you can either accept that, or you can get to work. That’s all it is. You just begin. You do the math. You solve one problem… then you solve the next one… and then the next. And If you solve enough problems, you get to come home. All right, questions?”
<The Mar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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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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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love what other people are passionate about. You remind people of what they’ve forgotten.”
<La La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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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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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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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Interstel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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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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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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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 공동체에서 제공하는 주택, 운송, 교육, 보건의 수준이 낮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피해 단단한 벽 뒤에서 살게 된다. 평범하다는 것이 존엄과 안락에 대한 중간적인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일 때는 높은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구성원 다수가 강력한 기독교적(종종 프로테스탄트적) 유산을 물려받은 공동체도 있다. 이런 곳에서는 구성원들이 공적인 영역의 원칙과 구조를 존중하며, 이에 따라 사적인 영역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요구도 줄어든다. 도시의 공적인 공간이나 시설이 그 자체로 훌륭할 때에도 개인적 영광에 대한 야심은 어느 정도 줄어든다. 그냥 평범한 시민이 되는 것이 괜찮은 운명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는 가장 큰 도시에 가도 낯선 사람들과 함께 버스나 열차를 타는 일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로스엔젤레스나 런던만큼 강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취리히의 최고 수준의 전차 네트워크 덕분이다. 취리히의 전차는 청결하고, 안전하고, 따뜻하며, 그 정확성과 기술적 솜씨라는 면에서 교훈적이기도 하다. 불과 몇 프랑이면 효율적이고 당당한 전차를 타고 황제도 부러워할 만한 안락함을 느끼며 도시를 가로지를수 있으니 굳이 혼자서 여행을 할 이유가 없다.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그럴 때 단단한 벽 뒤에 고립된 채 혼자 의기양양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구는 약화될 것이며, 이것은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 이것이 공동체의 윤리에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적 통찰이다.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기본적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어되고 경감된다. 성공하여 피어날 것이냐 아니면 실패하여 시들 것이냐 하는 이분법의 그 가혹한 칼날도 약간은 무디어지는 것이다.
- 물론 모든 영역에서 완벽해지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모든 영역에서 한없이 많은 경쟁자를 상대로 싸워야하는 경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스스로 남들보다 재능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스스로를 더욱 차별화함으로써 개별화된 다중 선택 사회의 압박에 맞서야 한다. 공식적인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경계와 표지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인생은 이제 대중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듬고 완성시켜나가야 하는 하나의 종합예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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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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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omplete me.”
<Jerry Magu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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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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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 확실히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와, 그리고 우리를 모든 것과 비교해 보도록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행불행은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대상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독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문학의 환상적인 이미지에 영향받은 우리의 상상력에는 본질적으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충동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피조물을 한층 고양시킨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이게 되어 우리 이외의 것은 모두 우리보다 훌륭하고 누구 할 것 없이 우리보다는 완전해 보인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고 우리는 느낀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이 다른 사람에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이상적인 삶은 즐거움마저도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행복한 사람이 한 명 완성되는 것인데, 이처럼 완벽하게 이룩된 사람이란 사실은 우리 스스로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 나는 이렇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만다. 나는 이렇게도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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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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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 강신주
- 엘리자베트의 말처럼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타성에 빠져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게 된다.
- 인생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 그만큼 모든 사람을 품어 줄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좌절하지 말고 그 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박애의 감수성을 배우게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비참한 삶을 경험했던 사람이 박애의 감정을 갖기 더 용이한 법이다. 물론 비참함이라는 삶의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는 경험은 불가피하지만 말이다. 비참한 삶을 겪어내는 사람은 마침내 박애라는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지만,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박애는 막연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 ‘후회’라는 감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후회에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영민한 스피노자가 이 점을 간과할 리 없다.
후회(poenitentia)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 에서 
‘후회’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우리는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불운을 자기가 초래한 것이라고 믿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은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모든 불행을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런 사람은 후회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다. 결국 후회는 신과 같은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스피노자의 정의가 중요한 것은, 여기서 후회라는 슬픈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행위가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후회라는 슬픈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 한 번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여간해서 이 감정을 떨쳐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 후회는 유아적인 감정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는데, 비가 오는 것도 자신이 울어서라고 생각하고 무지개가 뜬 것도 자신이 방금 사탕을 먹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세계의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자기 뜻대로 세상이 되지 않을 때 그렇게 쉽게 짜증을 내곤 한다. 후회는 불행한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후회라는 감정에는 자기중심적을 세상을 판단하는 유아적인 태도가 전제되어 있���. 자신의 어떤 행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후회라는 감정은 생길 수도 없다. 후회에 금방 젖어드는 사람에게는 대학에 떨어진 것도 오로지 자기 탓이다. 대학 정원 같은 구조적 문제라든가 학과 선택에 있어서 부모님의 강요 혹은 공부에 물도하기 힘든 가정환경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실연당한 것도 완전히 자기 탓이라고 믿는다. 애인이 더 멋진 이성을 만나서 자신을 떠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인이 학업 때문에 자신을 멀리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결국 후회라는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유아적 태도를 벗어나야만 한다. 이것은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해야 가능하다. 한마디로 타자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즉 타자의 타자성을 받아들여야 후회라는 감정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몇 가지 지혜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소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기치 않은 행복이나 불행이 나에게 올 수도 있다."
- 확신과 의심이라는 치명적인 변증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의 슬로건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님 말고!”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한 다음에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쿨하게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닌 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확신하거나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그저 행운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 혹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타인에 대해 확신을 갖거나 의심을 품을 이유는 없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의심과 확신에 갇힌 사람이라면 이제 시선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도록 하자. 그러면 아마도 너무나 의존적이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나약함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영원히 확신과 의심 사이를 방황하는 길 잃은 영혼으로 남게 될 것이다.
-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몸에 기쁨이 찾아오는 경우에 우리는 정신에서도 반드시 기쁨을 느끼지만, 반대로 정신의 기쁨이 필연적으로 몸의 기쁨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항상 옳지만, 정신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피노자가 "우리는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때 행복을 느끼는지, 그리고 어느 때 불행을 느끼는지 계속 응시해야만 한다. 아무리 정신으로 "이럴 때 자신은 틀림없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해도 직접 몸으로 겪은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저 기쁨을 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슬픔을 주는 대상이라며 단연코 그것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변덕’이나 ‘변심’을 이야기하는 사회적 평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쿨’해질 필요가 있다.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 그냥 지금 내 앞에 있는 타자가 기쁨을 주는지, 그렇지 않는지에만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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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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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not who you are underneath, it's what you do that defines you.”
<Batman Beg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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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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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 이제 언론은, 한 인간을 상상력도 없고 창조적이지도 않고 마음도 교활한데 그와 동시에 얻어들은 건 무척이나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헛똑똑이는 과거에는 오직 천재들만이 알 수 있었던 것들을 일상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얼간이다. 그는 이전 세대가 결코 걱정해본 적 없던 특성을 지닌 절망적인 결합체다. 플로베르가 보기에 뉴스는 우둔한 자를 무장시키고 바보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 직업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건 언제일까? 하루가 끝날 무렵, 내 일이 어떤 면에서는 미약하게나마 타인의 비참함을 줄이거나 만족감을 늘리는 데 도움을 준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하고, 나아가 동료 인간들의 삶에 우리의 활동이 미친 영향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노동이 무척이나 자잘하게 세분화될 때, 혹은 타인의 안녕에 극히 짧은 순간만 영향을 주거나 아예 그럴 일도 없을 물건을 만드는 데 경력 전체를 바칠 때, 노동의 의미는 악화돼버린다. 주식시장은 이런 의문에 관심을 둘 리 없어, 그런 건 주말로 미뤄둬야 할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 누군가를 동경하려는 욕구는 우리 심성의 뿌리깊고 중요한 특징이다. 무시하거나 비난한다고 해서 없앨 수가 없다. 그런 무시나 비난은 동경의 욕구를 단순히 저 아래로 밀어넣을 뿐이고, 그럴 경우 이 욕구는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미성숙한 상태로 잠복해 있다가 부적절한 대상에 달라붙기 십상이다. 셀러브리티에 대한 사랑을 억압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지적이고 생산적인 최선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가장 큰 명성을 얻는 이는 가장 고귀하고 고상하며 사회에 진정으로 보탬이 되는 가치를 구현하고 그것을 강화한 사람들일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회에서 특정 유명인을 숭배한다고 시인하는 건 수치심이나 자기비하적인 비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 될 것이다.
- 시기심은 언제나 맹렬한 도덕주의적 비판의 표적이 되어왔지만, 이는 품위 있는 삶에 꼭 필요한 감정이기도 하다. 시기심은 신중해져야 한다는 신호다. 이 감정에는 우리 인격의 혼란스럽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보내온,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뒤틀린 메시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기심을 주의깊게 응시하는 건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발걸음을 떼는 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시기심을 억제하려 애쓰는 대신 이 감정을 연구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시샘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은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요건이 그려진 퍼즐 조각을 쥐고 있다. 잡지를 넘겨볼 때,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 옛 동창의 근황의 근황을 듣게 될 때, 그들에게서 느낀 질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이라는 초상의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시기심은 처음에는 굴욕감과 열패감을 동반하며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시기하는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만히 던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감정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시샘이라는 감정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그 대상이 모호하며 공포심까지 동반할 때가 아주 많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특정한 개인에 대해 질투할 때 그의 모든 것을 두고 질투심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차분히 살펴볼 시간을 갖는다면, 그들이 이룬 것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이 우리가 더 나은 사람으로 진화하는 데 진정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시기심을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타인의 성공에 대해 닥치는 대로 듣다보면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아무것도 안하게 되거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어떤 계획도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워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자신만의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위업을 다룬 뉴스가 주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쭉 뻗어나가야 한다. 뭔가 가치 있는 것, 다시 말해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시샘을 받게 될 만한 일을 해내려면 내면으로 침잠해들어가는 고요한 은둔의 시간이 필요하다.- 뉴스가 보여주는 것과는 반대로, 사실 대부분의 사업이 실패한다. (…) 엄청나게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준점을 놓고, 그에 비해 우리가 가진 조건이 하찮다고 여기며 한탄해서는 안 된다. 숨막힐 듯한 어려움을 견뎌낼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미워해서도 안 된다.
-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핵심에는 감동적이면서도 연약하고 단순한 열망이 있다. 바로 제대로 대접받고 싶다는 바람이다. 돈, 호화로운 삶, 섹스 혹은 권력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은 부차적인 자극제일 뿐,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원동력이다.
- 하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간절하게 유명해지길 바라는 건 아니다.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 지금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곳인지에 따라 명성에 대한 욕구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 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 하는 문제는 그들이 속한 사회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극소수에게만 존엄과 호의가 주어진다면, 평범한 존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은 더욱 거세진다. 따라서 ‘셀러브리티 문화’를 콕 집어 부도덕한 젊은이들 탓이라며 비난하는 사람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셀러브리티 문화의 진짜 원인은 자기도취적인 얄팍함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친절함의 부족이다. 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여러 정치적 이유로 인해 평범한 삶을 살면서는 품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사회다.
- 현대 세계가 셀러브리티에 목을 매는 한, 우리는 부박하기보다는 불친절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경로가 되었다. 또한 존경은 친절한 행동 같은 명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잡지의 표지 인물이 되어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만약 명성을 향한 열망들이 사그라지길 바란다면, 셀러브리티 뉴스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거나 그 뉴스에 대한 검열을 시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친절, 인내심, 배려 같은 미덕이 더 널리 퍼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말이다.
-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타인의 드라마가 이와 반대로 좋지 않은 효과를 발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무시했던 우선적인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기보다는 우리가 진실한 관심사로부터 멀어지게 할 위험 또한 품고 있다. 뉴스에 등장하는 재난의 규모, 성격, 직접성으로 인해 재난 뉴스는 우리 의식의 핵심부로 밀고 들어오는 힘을 발휘하는데, 그 이야기들은 우리 의식 속에 끈덕지게 웅크린 채 매 10분마다 새로운 소식을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직접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는, 훨씬 조용하지만 더 중요한 자신만의 골칫거리의 외침을 외면하도록 만든다. 네팔에서 비행기가 막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항공사고 조사관이나 충격에 빠진 친척같은 태도로 뉴스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 사건이 실제로 우리와는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그날 하루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자아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희미한 불안의 맥박을 해석하려 노력하는 편이 실은 훨씬 타당하다는 걸 기억해내지 못한 채 말이다.
- 균형잡힌 삶을 위해서는 내면과 외부의 관심사를 절묘하게 혼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이 겪은 사고를 통해 드러나는 일반적인 메시지(우리가 정말로 취약하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것)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구체적인 경험에 너무 깊이 몰입한 나머지 낯선 이에게 닥친 재앙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거리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뉴스가 늘 우리 앞에 갖다놓고자 애쓰는 슬픔과 고통을 명확히 인식하는 한편, 거기에 고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우리는 단순히 감정대로 행하는 것을 인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데 워낙 익숙해서, 가끔은 무덤덤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또한 인간이 필수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통찰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집중력과 공감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가 깊이 의지하는 몇몇에게 진지하면서도 ���절한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종종 타인에 대한 공감과 흥미를 의도적으로 제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뉴스가 어떤 주장을 펴든 간에, 그리고 뉴스 속 이야기가 얼마나 직접적이고 놀랍고 감동적이든 간에, 뉴스가 제기하는 문제가 언제나 우리 자신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십분 인정하는 것이 곧 우리가 사이코패스 같은 본성을 지녔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 물건을 손에 넣을 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그저 물질적 만족일 뿐인 경우는 거의 없으며, 이는 주된 동기도 아니다. 우리는 종종 모종의 심리적 변화를 얻고자 하는 더 깊고 무의식적인 욕망에 인도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충분한 관심과 관대함을 가지고 소비 행위를 살펴볼 경우, 우리가 결코 못 말릴 정도로 물질주의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 시대를 ��른 시대와 뚜렷이 구분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물질적 상품의 획득을 통해 각종 복잡한 심리적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우리의 야망이다.
- 외국에 나가는 것도 그저 색다른 경치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풍경이 내면의 풍경을 재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나가는 것이다.
- 어쨌거나 어떤 작품에 정당한 가치가 있는데도 공감하기 힘들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우리에게 딱 맞는 시기에 만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작품의 객관적 가치를 인지하면서 ‘위대한’ 책, 영화, 전시를 마주함에도, 그 작품에 대해 냉담하고 지루해하며 죄책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그건 비평가들이 훌륭한 약사처럼 처신하지 못해, 그 작품이 어떤 조건에서 적합한 교정물이 될 수 있는지 충분히 혹은 섬세하게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작품이 지닐 수 있는 가치의 상당 부분, 심지어 결정적인 부분이 관객이 처한 심리적 상황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진다는 건 불편한 진실이긴 하다.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우리 내면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소중한 순간에만 진정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 문화 저널리즘은 바로 이런 순간들을 알아내고 알릴 수 있도록 지성을 갖춰야 하고, 그러면서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치유제를 조제하는 약사의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 하지만 객관적인 기사 편집 방침을 포기한다는 기획에는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이 기획은 우리가 어떤 뉴스를 접하길 바라는지 잘 알 만큼 정말 스스로 의식적인 준비를 갖추었는지 자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괜찮은 어른으로서의 삶, 다시 말해 늘 양심적이면서도 자의식을 잃지 않고 안전한 삶, 공적 책임과 사적 책임을 균형 있게 이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를 보조하는 모든 지식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지식 중 어떤 것들은 첫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뉴스를 편성하는 책임을 지게 되면 우리의 발전에 무척 중요한 정보를 내쳐버릴 위험성이 있다. ‘맞춤 뉴스’는 풍부하고 복합적인 개성을 도야하는 걸 돕기는 커녕 우리의 병적인 측면만 강화하거나 우리를 평범함이라는 형벌에 처하도록 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 자신을 성찰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안에는 내면 탐사라도 시작한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라고 협박해야 할 난감한 진실들이 수없이 많이 숨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길 정말 간절히 피하고자 하는 그때가 바로, 불편하지만, 잠재력 있는 생생한 생각들을 배양하는 순간이다. 뉴스가 우리를 붙잡아매는 순간도 이때다.
- 하지만 우리가 먼저 자신만의 생각을 잉태시킬 만한 인내심 많은 산파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단한 무엇을 하나도 갖지 못할 것이다.
- 우리는 무선 신호를 끊고 읽을거리도 손에 쥐지 않은 채 멀리 기차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 객실은 거의 텅 비어 있고 탁 트인 경치가 펼쳐 있으며 들리는 거라곤 기차바퀴가 철컹철컹 리듬감 있게 연속적으로 철로를 지나는 소리뿐이다.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비행기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 두세 시간 동안 집중할 것이라곤 구름 꼭대기와, 짐작도 못할 추위 속에서 널찍한 잿빛 날개 아래 달려 있는 롤스로이스 엔진, 우리에게서 겨우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방랑하는 사색에 시동을 거는 절제와 용기를 지닌 엔진의 지속적인 현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여행 말이다.
- 현재로서는 우리의 인간성을 원숙하게 다듬는 데 필요한 걸 다 찾아낼 수는 없다. 몇 세기를 거슬러올라가 오래된 도서관 복도를 걸어, 녹슬어가는 중세 갑옷으로 꽉 찬 잊힌 박물관의 캐비닛을 지나, 지금은 죽고 사라진 원래 소유자들이 주석을 달아놓은 낡은 책의 책장을 넘길 때 얻게 되는, 혹은 반쯤 부서지고 이끼로 뒤덮인 사원의 재단에서 얻게 되는 태도와 이데올로기, 감정의 양상, 마음의 철학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크린 위에서 계속 변화하는 화소와의 접촉과, 제본과 서체로써 장래에 갖게 될 생각의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웅변하는 묵직한 양장본의 본문 페이지와의 접촉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 뉴스가 더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때 우리는 타자와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타자를 정복하고 망가뜨리고 만들거나 없애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할당된 짧은 시간 속에서 견지해야 할 자신만의 목적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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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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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시시때때로 찾아오지 않는다. 적어도 운명적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아주 가끔 우연히 찾아드는 극적인 순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운명이다. 그래서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은 타이밍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리고 타이밍은 그저 찾아드는 우연이 아니다. 간절함을 향한 숱한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기적같은 순간이다. 주저없는 포기와 망설임 없는 결정들이 타이밍을 만든다. 그 녀석이 더 간절했고, 난 더 용기를 냈어야 했다. 나빴던 건 신호등이 아니라, 타이밍이 아니라, 내 수많은 망설임들이었다.’
<응답하라1988> 18화 굿바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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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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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ly person standing in your way is you.”
<Black S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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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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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시기다. 사람들은 자꾸만 지금은 믿을 수 없으니 무언가를 더 보이라고 보챌 것이다. 이때 남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잘 모른다. 충고인 것 같지만 자기자랑인 경우도 많다. 다들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난감한 재고 취급을 받더라도 이게 끝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중요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 만큼 나라도 나를 믿어야 나라는 개인에 대한 균형이 맞춰질 것이니까. 비관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찾는 방식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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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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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you see in training manifests itself on the game field. So every training session was about quality. We didn’t allow a lack of focus. It was about intensity, concentration, speed—a high level of performance. That, we hoped, made our players improve with each session.
Sir Alex Fergu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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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bmyn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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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관계는 익숙해지고 결국엔 당연해진다. 선물의 가장 강력한 힘은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를 새삼 다시 설레고 감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선물을 고르고 카드문구를 고민하며 그에게 마음을 쓰는 사이 어느새 그 사람은 내게 다시금 새삼스러워진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가 급기야 무뎌짐으로 퇴화되버린 다면, 이젠 그 어떤 선물도 뒤늦은 노력도 의미 없다.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베란다 귀퉁이에서 바짝 시들어버린 난초에게 때늦은 물과 거름은 소용없는 일이다. 관계가 시들기 전에, 서로가 무뎌지기 전에 선물해야 한다. 마음을 전해야 한다.’ <응답하라1994> 6화 선물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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