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doskharaas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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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초고) 사랑과 평화를 두 주먹에 by. 손지상
중편소설 200매 X 182매 = 30000자 2016년 6월 9일 초고 완성
사랑과 평화를 두 주먹에 손지상
1. “그러게 왜 쓸데 없는 말을 하고 그래?”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홍대 공항철도 역에서 동교동 삼거리 쪽으로 가는 어둡고 인적 드문 길. 없다. 빛도. 도움 청할 사람도. “물어 내.” “뭐를…… 요?” 나는 도망칠 각오를 했다. 뒷걸음질. “술값이랑 남의 산통 깬 위자료.” ‘술값? 위자료? 설마?’ 나는 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나타난 손이 내 입을 막았다. 목덜미에 더운 숨이 닿아 솜털을 간지럽혔다.  나는 빠져나오려고 몸을 마구 비틀었다. 핸드백이 바닥에 떨어졌다. “가만히 있어, 이 년아!” 하고, 등 뒤의 남자는 겨드랑이 아래서 팔을 넣어 날개 꺾기를 걸었다. 목이 짓눌려 숨 쉬기 어려웠다. 체구가 평균보다 조금 작은 내가 남자 하나를 등에 업은 꼴이었다. 등 뒤의 남자가 말했다. “골뱅이 좀 먹겠다는데 말이야. 분위기며 산통이며 다 파토냈으면 책임 져야지, 응?” "대신 이거 먹으면 되겠네.” 하고, 눈 앞의 남자가 입술을 핥는다. “물뽕값도 같이 쳐서 받아내자. 아직 쓰다 남은 거 있지?” “아 씨발 벌써부터 꼴리네.” “그 전에 배에 몇 방 존나 먹여주면 자궁이 부르르 떨려서 죽겠다고 아예 홍콩 바로 갈 걸?" 하고, 눈 앞의 남자가 손으로 주먹 뼈를 꺾는다.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로 스쳐지나갔다. 얇은 입술을 구겨 웃는 입술 사이로 긴 혀가 입맛을 다셨다. “캬, 골뱅이 무침이네!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다른 남자가 대답 대신,  또 한 번 혀를 날름 거리면서, “켁켁켁” 하고, 천박한 웃음을 뱉었다. “저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자.” 식은 땀. 소름끼친다. 나를 망가뜨릴 셈이야. 아까 그 일 때문에…….
——몇 시간 전. 나는 단골 바에서 이 두 짐승을 봤다. 여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계속해서 ‘뻐꾸기’를 날려대고 있었다. 나는 바 한쪽 끝에서 조용히 깔루아 밀크를 홀짝이면서 새로 룸메이트를 구할 궁리를 하다, 수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 놈이 주의를 끄는 사이, 다른 한 놈이 몰래 ‘물뽕’을 탔다. 예전에 바텐더를 하는 사장님이 나를 그 약물 마실 뻔한 걸 겨우 막아준 적이 있다. “물뽕은 마약인데, 히로뽕 같은 거예요. 근데 물처럼 생겨서 물뽕. 술에 타면 기분 좋아져서 본능적으로 흥분하는데, 얼마 안 가면 갑자기 기절해서 3시간 정도 무의식 상태가 되죠. 그 때 못된 짓 하는 거예요. 추잡한 놈들. 그걸 골뱅이라고 부른다니까. 클럽이나 다른 바 가더라도 조심해요. 누가 뭘 탔을 지 모르니까.” 나는 너무 놀라 큰 소리로, "저 남자들, 술에 뭐 탔어요!” 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피해자가 될 뻔한 여자는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남자들은 술값은커녕 인사도 없이 그냥 도망쳤다. 사장님이 바로 쫓아 갔다. 하지만 잡지 못했다. 돌아오자 마자, 사장님은 바로 신고했다. 그 사이 여자는 두 남자와 오늘 처음 포차에서 만났다며 아무 것도 모른다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기분이 나빠진 나도 사장님과 작별했다. 그리고 그 길로 귀가하던 참에, 그 두 남자를 다시 만났다. 택시 잡아 탈 걸. 나는 격하게 저항하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누구 없——“ 충격. 주먹이 내 배에 꽂혔다. 숨이 막힌다. “조용히 안해?” 한 번 더, 충격. 남자에게 얻어맞은 배가 경련을 일으켰다. 깔루아 밀크가 도로 튀어나와 목 깊은 곳이 쓰렸다. 공포로 차갑게 굳은 몸에서 힘이 나지 않는다. 몇 시간 전 도망치듯 나간 여자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여자 때문이 아니다. 잘못하면 그 여자가 나 대신 이렇게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사냥 당한 짐승이 벽에 걸린 것처럼 어깨를 꺾은 남자의 팔에 붙들린 채 매달렸다. 충격. 구토. 목 안이 따갑고 시큼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 가 없다. “거 봐, 배 몇 방 맞으니까 좋다고 바로 부들부들 떨잖아.” “하앙, 주먹으로 가버렷!” 천박한 웃음. 순식간에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미래가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입 밖까지,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 라는 말이, 튀어 나올 것만 같다. 견뎌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심하고 더 험한 짓을 할 것 같았다.  솟구치는 토사물도 입 안 가득 머금고 참았다. 위액이 섞인 알코올의 불쾌감 쯤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기회를 엿봤다. 남자가 다가왔다. 못 생긴 얼굴을 내게 들이댄다. 기회다. 나는 토사물을 얼굴에 뱉었다. 동시에 나를 붙잡은 놈의 정강이를 뒷발로 차고 발등을 짓밟았다.
2. “씨발!” 하고, 나를 붙잡은 팔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자유를 찾았다.  빠져나오자 마자 토사물 뒤집어 쓴 놈 사타구니를 걷어올렸다.  단말마. 등 뒤에 있던 남자가 깨금발로 쫓아 왔다. 나는 떨어진 핸드백을 주워서 일어나는 기세 그대로 휘둘렀다. 충격. 운이 좋아 모서리의 단단한 부분이 코에 맞았다. 코피가 터지는 모습을 곁눈질로 겨우 확인한 채, 달렸다. 입 안에 남은 토사물을 뱉으며, 멋대로 풀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도와 달라고 소리도 질렀다. 등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이 뻗는 손아귀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오싹했다. 이대로는 잡힌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내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만 메아리 친다. “도와주세요!” “거기 안 서!” “야!” 소리가 가까워 온다. 끝났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야만적인 상상에 무릎을 꺾였다. 차라리 반항하지 말 걸 그랬나 후회가 순간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나 자신이 비참했다. ——그때. 눈 앞에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노숙자? 도와달라고 할까? 아냐, 혹시나 저 사람까지 한 패거리가 되면 어쩌지? 젊은 남자 둘이 으름장을 놓으면 얌전히 모른 척 하면 어떻게 하지? 검은 그림자가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눈 앞이 컴컴한 벽으로 가로막혔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저 사람들, 물뽕 하다, 제가 봐서." 메인 목으로 겨우 몇 마디 뱉으며 쓰러지는 나를, 단단한 팔로 붙잡은 그림자는 나를 품에 안았다. 묘하게 포근한 느낌에 갑자기 긴장이 빠져나갔다. 신기하게도 안심됐다. 두서없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알았으니 진정하라고 손짓하는 거구가 말했다. "저쪽으로 좀 물러나 있어줄래요?” 상냥한 목소리. 여자? 맞다. 여자다. 그녀는 두 남자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깨가 어지간한 남자보다 넓고, 상체며 하체며 모두 부풀어올라 트레이닝 복이 터질 것 같았다. 반면 허리는 잘록해 몸 전체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손에는 무언가 든 비닐 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감에 놀란 두 남자가 발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녀가 너무 커서, 동물적으로 상대가 나보다 센지, 이길 가능성이 있는 지 따져보느라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였다. 잔뜩 긴장했던 남자들이의 표정은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자 곧바로 풀어지더니, 비열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야, 비켜. 남에 일에 상관하지 말고.” “내 여자친구니까.” 신경 꺼, 같은 뒷 말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내가 여자친구도 아니거니와, 여자친구면 함부로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말인가? 항변하여 사실을 밝히려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여자친구든 아니든, 때리면 안돼지.” 어딘 가 모르게 어색한 억양. 약간 어눌하게 들린다. “뒤지기 싫으면 그냥 꺼지라고.” “어디서 노숙이나 하는게.” 놈들이 겁 먹은 개 처럼 짖느라 주춤하는 사이, 나는 몰래 눈에 보이는 긴 막대를 주워들었다. 휘둘러서 머리를 깨 버릴 셈이었다. 그녀는 비닐 봉지에서 코카콜라 페트병을 꺼내, 입으로 머금고 분무기처럼 뿌렸다. “으아!” “에이!” 당황한 놈들이 허우적대는 사이, 그녀의 거대한 몸이 움직였다. 도약. 거대한 몸이 우아하게 날아올랐다. 마치 그 순간 중력이 사라지기라도 한 듯한 움직임. 바다를 가르는 거대한 고래가 동료를 구하러 다가가는 것처럼 웅장하면서도 천박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충격. 어린 시절 프로레슬링에서 본 적이 있다. ‘드롭킥’이라고 부르는 기술이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그녀는 두 놈의 가슴팍을 두 발로 밀어찼다. 차에 치이기라도 한 양, 두 놈의 몸이 공중으로 튕겨 나가 붕 떴다가 그대로 벽에 부딪혀 튕겨 나와 바닥을 굴렀다.  몽둥이를 주어들고 조심스레 다가가보니, 둘 다 기절해 있었다. 그녀는 내게 씨익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네." 그녀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는 그녀를 내 방으로 초대했다. 보답으로 무언가 대접하고 싶었다. 내 방은 투룸에 거실 겸 주방이 딸린 연립주택이다. 맥주를 한 캔 씩 나눠 가지고 식탁에 마주보고 앉은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들어보니 그녀는 갈 데가 없었다.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에 올렸다. “방 하나 더 있는데, 여기서 살래요?” “정말 나 여기서 살아도 되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월세는…… 못 내는 데요.” "다른 거예요." "다른…… 거라면…… 저기——" “부탁이 있어요." "부탁?" "날 강하게 만들어줘요. 내 전속 트레이너가 되는 거예요. 기초체력 훈련이나 호신술을 알려줘요.” "강해지고 싶어요?" "날 지킬 만큼." 잠시 고민한 조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녀는 내 룸메이트가 되었다.
3. 그녀의 이름은 조네스. 본명은 모른다. 묻지 않았으니까. 조네스는 프로레슬러 시절 링네임인데, 아마조네스에서 따왔다고 한다. 성이 뭐냐 물었더니 조씨는 아니란다. 재일교포인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 프로레슬러가 되었고, 가면을 쓰고 스타 선수를 위해 얻어맞는 역할을 주로 했다고 한다. “내가 잘못 기술 걸면, 죽어요. 상대 선수.”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조네스는 껌 종이로 종이접기를 했다. 큰 덩치��� 반대로 그녀의 손끝은 섬세했다. 금새 여러 동물을 종이접기로 만들었고, 하나같이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모서리가 깨끗했다. 불황으로 단체가 문을 닫자, 실업자 신세가 된 그녀는 한국에 남은 외할머니의 간병을 위해 서울로 왔다.  외할머니는 남자들 틈에 껴서 남장을 하고 광산일을 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골병으로 망가질 줄 알았던 몸은 건강한 채, 정신이 병들고 말았다. 치매가 오자 점점 사리 분별이 되지 않았고, 정신이 돌아온 어느 날 일본에서 온 손녀가 미안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나 할머니 찾아 다녔어요. 3년. 그러다 노숙도 하고. 몸은 튼튼하��까.” 길어질수록 조네스의 말은 언제나 토막나 있다. 안 그래도 일본어 억양이 강한 데다가 말을 잘 하지 않고 지낸 기간이 긴 탓이라고 했다. 가끔씩 일본어 단어가 섞여있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일본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이어서 알아 듣는 데 어렵지는 않았다. 그 날, 나는 적어도 나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한다고 통감했다. 체격이 조금 작은 내가 그 놈들 눈에는 만만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번에는 우연히 조네스의 도움을 받았지만, 매번 그럴 수 는 없다. 만만하게 보는 놈들의 코를 박살내 줄 실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야근 잦은 회사에서 도장에 다닐 시간도 없고, 남자들 틈에 껴서 운동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왜냐면 예전에 헬스장에 다녔을 때도, 남자들은 언제나 거들먹거리면서, “여자가,” “여자는,” "운동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하고, 잘난 체 하고 오지랖을 부려댄다. 멘스플레인(mensplain), 이제는 남자들의 그런 짓거리를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이름 없던 현상에 딱 맞는 단어가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난 운동하러 헬스장에 가는 거지, '멘스플레인 오지라퍼'에게 시달리려고 가는 게 아니니까. 그런 종류의 오지랖은 운동에 집중하는 데에 도움이 전혀 안된다. 내가 퇴근하면 조네스는 나를 꼭 안아주며 오늘도 고생했다고 말해줬다. 조네스는 오전에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고, 주말에는 야간에 홍대 클럽에서 바운서 일을 했다. 그렇게 체온을 나누고 나면, 대부분 프로레슬러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훈련을 같이 했다. 일 하고 와서 피곤한 때에도 조네스와 함께 체력훈련을 했다.   조네스는 나를 철저히 훈련시켰다. 힌두 스쿼트. 팔을 흔들면서 리드미컬하게 앉았다 일어나는 하체 단련. 힌두 푸시업. 팔을 접으면서 파도 치듯 바닥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상체 단련. 데드 리프트,. 바닥의 바벨을 온 몸으로 들어올리는 전신 단련. 플랭크. 엎드려 뻗친 채로 버티기……. 운동은 종류가 많았고 엄청나게 힘들었다. 엄청나게. 처음에는 회사 가서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했다. 체력적으로 너무 부쳤다. 지하철 계단을 제대로 올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번은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데, 나보다 훨씬 정정해 보이는 할아버지들이 눈치를 주면, 조네스에게 배운 대로 쏘아보았다. 조네스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사람의 이마 한 가운데나 미간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알려줬다. (악역 레슬러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 오지랖을 부리려는 할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다른 데를 쳐다보았다. 몸이 점점 운동에 익숙해지자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일이 줄었다. 한번에 두 계단, 세 계단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될 만큼 몸이 가벼워졌다. 계단은 오히려 즐거운 놀이기구로 변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싸움 기술도 배웠다. 주먹을 뻗을 때 겨드랑이를 조이고 체중을 싣는 법.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려 바닥에 쓰러뜨리는 기술. 팔꿈치로 가격하는 법. 무릎차기 하는 법. 박치기 하는 법까지 배웠다. 상대의 눈을 보면서 시선을 끌고, 그 틈에 정강이를 차는 기술도 배웠다. 프랑스 무술 사바트의 기술이고, 이소룡도 자주 사용하던 기술이라고 한다. 그렇게 배운 기술을 써먹을 날은 금새 찾아왔다. 그리고 기술을 사용한 데에 따르는 책임도 엄청났다. 그 날 이후, 나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다.
3. 자정. 회사 사무실. 나 혼자 뿐이다.  나는 야근 중이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은 불도 다 꺼져 있어, 일 하기 위해 내가 켜 놓은 모니터 불빛만이 아련했다. 어두운 사무실에 있는 모든 물체의 윤곽은 흐릿한 그림자로만 보였다. 가끔 씩은 유령이나 귀신이 서 있는 것마냥 오싹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 친구 안다솜과 메신저로 수다를 떨었다. 곯아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도 수다는 도움이 되었다. 다솜이는 대학시절 테디베어 동아리에서 만났다. 나는 금새 테디베어에 흥미를 잃었지만, 다솜이와는 계속 친구로 지내왔다. 요새 다솜이는 탐정과 비슷한 일을 한다고 들었다. 내가 사실이냐고 묻자, 다솜이는 반만 맞다고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탐정은 아니야. 탐정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면 법에 위반되나봐. 그래도 뭐, 알바탐정인 셈이지.” 메신저 화면 속의 알쏭달송한 말은 궁금증만 더했다. 나는 더 캐물었다. ——정확히 하는 일이 뭔데? 어쩌다 하게 된 거야?” ——변호사 사무실의 법률사무 보조원 일을 하는 거지. (ㅇㅅ< ) 영어로 패럴리걸. 말하자면 꽤애애애애애나 길어. 말해줘도 못 믿을 거고. 일단은 미인 변호사 밑에서 범죄와 싸우고 있다고만 해둘게. <(ㅇㅅㅇ)> 엣헴 ——ㅋㅋㅋㅋㅋ하여튼 입만 열면 자기 자랑ㅋㅋ 그래도 대단하다. 여성 종합격투기 챔피언에 탐정이라. 나도 그렇게 신나게 살아보고 싶다. ——땡큐땡큐ㅋㅋㅋㅋ 그런데 별로 좋진 않아. 힘든 일두 많구… 미안, 나 많이 졸리다. 어제도 의뢰인 부탁으로 계속 보디가드 일을 해서ㅠㅠ 그러고 보니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아! 미안, 잘자~ ——너두 얼른 하고 집에가서 자~ 빠빠~ 조네스 씨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ㅇㅇ 나중에 셋이서 같이 함 또 보자규~ ——잘장~ 수다가 끝났다. 다시, 혼자. 다시, 정적. 다시, 수마. 졸음은 언제나 기회를 엿보다 틈만 나면 나를 물어뜯는다. 못된 놈. 수마를 쫓아 잠도 깰 겸 운동삼아 ‘메리켄’을 손에 끼고 허공에 섀도 복싱을 시작했다. 조네스가 준 선물이다. 내게 선물을 주었다. “이거,” 하고, 조네스는 쇳덩어리를 두 개 건넸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무기였다. “너클더스터. 일본서는 ‘메리켄’라고 불러요. 이걸 끼기만 해도, 다 도망가요." 메리켄은 여러 개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끼우고 주먹 줘서 때리는 무기로, 고양이 손처럼 생겼다. 손가락을 끼우는 구멍이 위에 네 개, 그리고 아래에 손 바닥 안에 꽉 차서 충격을 흡수하고 고정해주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위에 난 구멍 네 개에 손가락을 끼워 보았다. 묵직하다. 주먹을 쥐니, 커다란 구멍이 손바닥의 손목 쪽에 맞닿아 손 안에 꽉 찬 느낌을 주었다. “이걸 끼고 주먹을 세로로 쥐고 때리는 거예요. 원래 맨손으로 주먹질 할 때는 세로로 하고 휘두르는 거예요. 그래야 손목이 안 꺾여요. 이거 보여요?” 조네스는 타격할 때 부딪히는 부분을 가리켰다. 쇠로 된 주먹관절 네 개 위에는 한자와 히라가나가 한 개씩, 방향이 뒤집혀서 거울로 봐야 제대로 읽히게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마치 도장처럼. "뭐라고 써 있는 거예요?" “아이, 토, 헤이, 와(愛と平和). 사랑과 평화라는 뜻이에요." "러브 앤 피스?" "사랑과 평화를 담은 펀치가 이마에 쾅, 하고 박히면, 자국이 남는 거죠. ” 그 말을 들은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가방에 항상 부적처럼 메리켄을 가지고 다녔다. 묵직한 은빛 쇳덩어리는 금새 손에 익었다. 나는 이 무기를 메리켄이라고 불렀다. 너클 더스터나 브래스 너클 같은 이름도 있지만 나는 메리켄이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들었다. '메리’는 여자아이 이름 같고, ‘켄’은 일본어로 ‘주먹’이라는 뜻이 있다. 메리켄. 메리의 주먹. 우선은 나는 키보드의 엔터 키를 눌러 필요한 서류를 프린트했다. 그동안, 나는 물뽕으로 못된 짓을 하려다 나를 두들겨 팬 그 놈들을 상상하며 배와 턱에 강력한 연타를 날렸다. 조네스의 지도를 받으며 백 일 정도 훈련을 마치고 나자, 나는 상당히 배짱도 붙고 힘도 붙었다. 내 펀치는 자찬하자면 꽤나 예리해졌다. 무탈하게 자란 여리여리한 남자들 보다는 훨씬. 으스스한 풍경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복사기가 굉음을 울려대다, 몇장 프린트 하다 말고 기침하며 멈췄다. 가서 확인해보니 복사기 토너도 다 되고, 종이도 걸렸다. 이 애물단지 제록스. 또 누가 이면지를 썼나보다. 이면지를 쓰면 잉크가 녹아 토너에 들러붙어서 종이가 잘 걸린다. 이면지 인쇄를 한 사람이든 이 제록스든 기분이 풀리게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강력한 메리켄 펀치에 사랑과 평화를 느끼며 복사기가 망가졌다가는 물어줄 돈이 엄청나기에, 꾹 참았다. 몸에 체력이 붙고 힘이 생기자, 짜증을 참는 힘도 늘었다.  그래서 체력이 중요하다고 그러는 모양이다. “옆 사무실로 가야겠다.” 나는 아무도 듣지 않는 데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릴 때 밤길을 혼자 걸으면 무서워서 괜히 혼잣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듯. 괜찮아. 어차피 이 회사에 남은 사원은 나 말고 없을 테니까. 나는 파일을 USB에 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USB와 함께 메리켄을 주머니에 넣고, 사무실을 나섰다.
4. 옆 사무실도 똑같이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런데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사무실에 내가 있던 사무실처럼 똑같은 모니터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 야근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상대가 놀라지 않게 말을 걸고, 복사기 좀 빌리겠다고 말을 걸려고 했다. 거친 숨소리. 놀란 나는 숨을 죽이고 모니터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무언가 이상했다. 불빛 앞에 앉은 남자는 야근하는 중이 아니었다. 남자는 헤드폰을 낀 채 모니터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화장실에서 용변 보는 여성의 하반신이 연달아 나오는 동영상이 재생 중이다. 세상에. 거친 숨 소리를 내는 남자는 한 손으로 마우스를 다른 손으로는 지저분하게 달아오른 살덩어리를 붙잡고 있다. 살덩어리를 문댈 때 마다 입에서 축축하고 기분나쁜 신음소리와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화면과 화면을 찍은 사람의 추잡한 의도와 그걸 보고 흥분해서 하반신을 비벼대는 사람이 모두 역겨워, 목 깊은 곳에서 욕지기가 치밀어오른다. 화면 속 여성이 용변을 마치고 화장지로 밑을 닦는다. 그 모습은…… 나? 내 모습이었다. “이런 씹할!” 하고, 욕이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놀란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지나가다 몇 번 목례한 적이 있는 남자다. 멀쩡하고, 여자친구도 있고, 수상한 구석이라고는 없던 남자다. 이름이 아마…… 김은국이다. “김은국 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 저기…….” 하고, 급히 지퍼를 잠그며 김은국이 일어났다. “저기, 오해에요. 그게 아니고——“ “오해? 오해 같은 소리 하지 마! 방금 그거 나 였잖아! 당신 미쳤어? 회사 화장실에 몰카? 거기다가 회사 사무실에서 딸딸이를 쳐?!” “아니, 남자는 그게 생리현상이라 급할 때 바로 해결해야 해서——“ “살다 살다 별 멍청한 소리를 다 듣겠네. 길 걸어가다 마렵다고 바지에 똥 싸는 소리 하지 마!  더 듣기 싫으니까, 자세한 건 경찰이랑 이야기해!”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고 했다. 핸드폰이 잡히지 않는다.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이다. 나는 사무실 전화기를 들고 내선 번호를 누르고, 112를 눌렀다. 신호가 채 가기도 전에, 김은국이 내 손을 붙잡으며 마음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 번만 눈감아 주라. 좋게좋게 해결할 수 있는 건데 굳이 경찰을 부를 필요 없잖아? 지울게. 지울테니까——“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이 손 안 놔? 회사에 몰카 설치해서 그거로 딸딸이나 치는 주제에 뭐가 ‘좋게좋게’야? 니만 좋지, 변태 새끼야!” 적나라한 생리현상을 녹화한 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김은국의 얼굴 아래에서 위로 드리운다. 그림자 진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붉게 달아올라 더욱 추해졌다. “너,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변태? 남자가 고분고분 머리 숙이고 나오니까 아주 머리 끝까지 기어오르고 개기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봐요, 김은국 씨. 당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회사 화장실에 몰카 설치해서 녹화한 다음에 그걸 회사에서 딸딸이 치던 사람은 당신이야. 누가 봐도 당신 감방가게 생겼는데, 고분고분하게 머리 숙이고 나온다고? 이 손 안놔?” 하고, 나는 손을 뿌리치고 다시 신고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러자 김은국이 다시 전화를 거는 내 손에서, 수화기를 잡아 채 집어던졌다. “이 씹할 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니가 그러면 겁 먹을 줄 알아? 어디서 함부로 물건 집어던져!” 나의 태도가 강경하자, 김은국이 당황했다. 그러나 그 당황은 여자가 자기에게 반항했다는 상황인식과 함께 굴욕으로 변해갔다. 김은국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불었다. “좋게 봐 줄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조선 년은 삼일에 한 번씩 패야 말을 듣는다더니…….” 김은국이 나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뺨을 때린다. 분노로 머리로 피가 몰리고, 흥분으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흥분해선 안된다. 흥분하면 제대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다. 나는 조네스가 가르쳐 준 대로 호흡을 천천히 골랐다. 프로레슬러가 흥분을 가라앉히거나, 위험한 기술을 당하고 호흡을 되찾을 때 사용하는 호흡법이다. 두번 내뱉고, 짧게 한 번 들이쉬고. 두번 내뱉고, 짧게 한 번 들이쉬고. 동시에 메리켄 낀 주먹을 치켜들었다. 모니터 불빛을 은빛으로 반사하는 흉악한 초대형 반지를 본 김은국이 움찔거렸다.. “아, 저기, 잠깐만 그게 아니고——“ “여자 얼굴 맘 대로 쳐 놓고 '그게 아니고'? 아니면 뭔데? 내가 알려줄까? ‘사랑과 평화’다, 이 자식아! 이게 ‘사랑’이고——” 나는 김은국의 턱을 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충격. 묵직한 반동이 손목에 전해진다. 김은국의 턱이 찢어졌다. 피가 난다. 머리카락을 쥐던 손에 힘이 더 들어가 아파 왔고, 분노는 더욱 솟구쳐 올랐다. 분노를 그대로 담아 김은국의 더러운 사타구니를 걷어 차 올렸다. 충격으로 괴로워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김은국의 명치에, 나는 한 번 더 메리켄 어퍼컷을 쑤셔 박았다. 몸이 기역자로 꺾여 주저앉는다. 나는 머리채를 잡은 김은국의 손을 잡아 꺽어 틀어올렸다. 김은국의 머리카락이 좌우로 물러나,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가 드러났다. “이게 평화다, 이 자식아!” 하고, 내가 메리켄을 이마에 내리꽂았다. 충격. 둔탁한 소리. 이마에 선명하게 '사랑과 평화’가 새겨진 김은국이 기절했다.
5. 회사 여자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고 자위까지 하는 놈을 잡았는데도, 잘못은 모두 여자인 내 탓이었다.   나는 이 일을 용서할 수 없어 공론화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은 수치스럽다며 쉬쉬하고 넘어가려 했고, 회사 '남자' 간부들은 모두 피해자인 내가 아니라 내게 얻어맞은 범죄자에 변태인 김은국을 동정했다. 공감능력과 감정이입이 같은 남자인 김은국에게만 넘쳐 흐르는 놈들. 동영상을 서로 공유하는 공범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여자가 여자답지 못한 짓을 해 남자 혼사길을 망칠 뻔했다.” 하고, 사타구니를 걷어찬 건 심했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일 주일 동안의 투쟁은 패배로 끝났다. 회사는 피해자인 내가 아니라, 김은국이라는 남자를 택했다. 나는 시집가면 되지만 김은국은 가장이 될 몸이고, 군대에서 고생도 했다는 이유였다. 퇴직 사유 치고는 참 기분 더러운 사유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부터 시작이었다. 김은국 그  개자식이 내 얼굴을 인터넷에 고스란히 노출했다. 얻어터진 자기 얼굴 사진은 상처만 남기고 모자이크와 블러를 먹여 흐릿하게 만들어놓고, 악명 높은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 '인증'하면서, “여자에게 억울하게 당했다” 하고, 호소문을 올렸다. 나는 경찰에 신고해 몰카 동영상과 신상정보 공개 만이라도 막아보려고 했다. 급히 집 근처 파출소로 가서 신고해, 해당 글을 삭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몰카는 인터넷에 유출되어 김은국과 같은 부류의 놈들이 모인다는 '무슨무슨 넷'이라는 커뮤니티에 올라가 있었다. 커뮤니티의 규모는 회원수가 몇 십 만명이나 되는 거의 도시 하나 규모인 데다가, 서버가 외국에 있어서 처벌할 수 가 없단다. 다솜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일이 커졌을 것이다. 다솜이 덕분에 사건은 점점 진정되고 망각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 보고 돌아온 사이에 대문에 이상한 쪽지가 붙어있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개 씨발 년아. 너 어디 사는 지 아니까, 고소하면 가만 안 둔다. ——맨 오브 저스티스.’
웃음이 터졌다. 맨 오브 저스티스. 나는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어서 조네스에게도 따로 말하지 않았다. 세상에, 맨 오브 저스티스라니. 진심으로 멋있다고 그 이름을 지었을 것을 생각하니 애들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글씨도 엉망이었다. 정말 중학생이 쓴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고 그래서 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수였다. 쪽지를 받은 다음 날, 나는 퇴직의 여유를 즐기며 집에서 운동하고 있었다. 조네스가 곧 퇴근할 시간이어서 미리 워밍업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급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전 쪽지가 생각난 나는 살짝 겁이 나서, “누구세요?” 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큰일 났어요!” 조네스였다. 문을 여니, 조네스는 얼굴이 뭉개지고 목이 반 쯤 잘려나간 피투성이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그 놈이다.  맨 오브 저스티스. 뇌리에 그 엉성한 글씨가 떠올랐다. 조네스가 상의로 싸 안고 있는 고양이는 겨우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곧바로 동물병원으로 갔다. 수의사는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는 지 의심스러워 했다만 나도 제대로 설명해줄 방법이 없었다. 수술에 들어간 이름 모를 고양이가 살기를 기원하며, 나는 놈들의 비겁하고 비열한 짓에 잔뜩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 묻는 조네스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하자, 평소 누구보다 온화한 조네스의 얼굴에도 살기가 깃들었다. 등이 평소보다 부풀어 오르기까지 했다. 조네스가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레슬러가 정말 사람을 죽이겠다고 마음 먹으면, 펌프업——근육에 혈액이 몰려서 부풀어 오르는 걸 말하는 데——이 등 근육에서 일어나요. 그래서 등짝이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보이죠. 나도 딱 한 번 봤어요. 그런 광경. 엄청 위험한 상황이었죠.” 나는 그자리에서 그런 광경을 보았다. “저기 죄송한데, 잠깐 와보실래요?” 하고, 수의사가 심각한 목소리로 불렀다. 조네스를 다독이며, 나는 수의사를 따라 구석으로 갔다.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도대체 무슨 짓을 했습니까? 아니면 누구한테 원한 살 만한 짓이라도 했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수의사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다. “무슨 일인데요? 고양이는 살았나요?” “안타깝게도…….” 그 고양이에게는 아무 죄도 없었는데. 내 등도 부풀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용서를 구해도 해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격하고 복잡한 감정은 수의사가 내 보인 피 묻은 비닐봉지 때문에 더욱 거세져갔다. “고양이 목 안에서, ‘이런 게’ 나왔어요.” 수의사가 피 묻은 비닐 봉지 안에 든 USB를 내보였다.
6. 집으로 돌아온 나와 조네스는 USB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나'의 얼굴이 나온 화장실 몰카 동영상이 들어있었다. 또 다른 영상파일은 ‘배빵 홍대 0011.avi’ 이었다. 열어보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화면은 컴퓨터 게임처럼 1인칭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촬영 중인 사람의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카메라는 인적 드문 밤거리——내가 언젠가 봉변을 당한 뻔한 그런 거리였다——에서 살짝 비틀거리는 취한 젊은 여자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점점 가까워져간다. 손이 화면 밖에서 튀어나와 젊은 여자의 어깨를 잡아 뒤로 돌린다. 뒤 돌아본 여자의 배에 주먹이 꽂힌다. 카메라로 촬영중인 남자는 충격으로 굳어버린 여자의 머리를 틀어 잡은 채, 연달아 배를 가격했다. “세상에…… 미친 놈…….” 조네스가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이거 카메라 어떻게 찍은 거죠? 두 손이 다 나오잖아요.” 정말이었다. 이 수수께끼를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음 파일로 넘어갔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였다. 핑크색 보자기를 차도르처럼 뒤집어쓰고,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온 몸이 근육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엄청 크다……. 근육이 무슨 괴물 같아…….” 내 말에 대답하듯, 조네스가 화면 속 맨 오브 저스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강제로 불린 몸이에요. 아마도 스테로이드로.” 핑크색 보자기는 음성변조된 목소리로 화면 밖 우리를 향해 말했다. “나는 맨 오브 저스티스다. 니 년에게 경고한다. 우리 남성의 권리와 쾌락을 방해하고,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너 년에게 경고한다. 정의의 주먹이 널 찾아갈 거다. 내가 우리 동지에게 사용한 것과 똑같이 처벌을 가할 것이다. 네 못생긴 면상이 완전히 뭉개질 줄 알아라. 우리의 메시지는 장난이 아니다. 니 년 면상은 곧 이렇게 될 것이다.” 하고, 화면 속 핑크색 보자기가 고양이의 목을 잡아 들어올렸다. 주먹을 들어보였다. “안돼!” 나는 동영상을 껐다. 다음은 안 봐도 뻔 했다. 조네스가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용서 못해……!” “왜 저런 짓을…….” “아마, 원래 덩치, 작았을 거예요. 그게 싫으니까 약을 써서 몸을 키운 거고. 자기가 세다는 걸 증명받고 싶으니까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거죠.” “열등감으로 남 탓을 하는 거군요. 최악이네요.” “게다가 스테로이드에는 부작용이 있어요. 심하게 사용하면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많아요. 레슬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덩치가 작다고요? 커 보이던데요?” “키는 작을 거예요. 손을 보면…….” 조네스는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 없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 조네스는 단숨에 비웠다. 아마 고양이 목을 잡았던 손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아까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었으니까. 조네스가 말했다. “이제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수준은 지난 것 같아요. 경찰에 알려야 해요.” “하지만 경찰에 알리면, 조네스…….” “……난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 내가 문제가 아니니까.” 조네스은 신분 상 경찰이…… 부담스러운 상태다. 그런 데 내가 경찰에 신고해버리면, 어쩌면, 경찰은 조네스를 의심하고 나에게서 조네스를 떨어뜨리려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네스가 그걸 모를리가 없다. 그런데도 조네스는 정의를 위해 경찰을 부르자고 하고 있다. 이게 정의지, 도대체 뭐가 정의란 말인가? 힘 없고 불쌍한 고양이를 해하는 것? 아무 관계 없는 여자 폭행하는 것? 적어도 나 자신의 ‘개인적 정의’는 다르다. 이 ‘맨 오브 저스티스’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머저리를 처벌하는 게, 내게는 정의다. 하지만 지금은 공적 정의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다. 나는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경찰은 내 전화를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사람도 보내주었다. 하지만 경찰관은 입장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고양이가 다치기는 했지만, 내가 키우는 고양이도 아니기에 침입한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피해가 있지도 않다. 누군 지 알아야 접근금지 명령이라도 내릴 것 아닌가. USB도 평범하고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어서 추적하는 것도 어려웠다. 경찰관은 일단 내일 다시 관할서로 와 달라고 부탁하고 떠났다.
그날 밤, 나와 조네스는 밤새도록 맥주를 마셨다. 잠을 자기 불안하기도 했고, 우리끼리라도 추리를 해 보려는 마음에서였다. 조네스가 물었다. “그 영상은 어떻게 찍은 걸까요? 배를 때리는 영상. 찍으면서 그러기는 힘들텐데.” “어쩌면…….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데, 안경에 몰카를 숨겨놓아서 동영상을 녹화하는 경우가 있대요. 어쩌면 그걸 지도 몰라요. 보는 시선 대로 촬영하는 거죠. 그래서 두 손이 다 나오는 거겠죠.” “지나다니는 여자만 노리고, 배를 때린다……. 왜 그런 짓을 할까요……?” “아까 조네스가 그랬잖아요. 열등감으로 몸 키우는. 그런 놈들이 생각하는 수준이야 뻔하죠. 여자가 싫어요. 그런데 여자 가슴은 엄청 좋아하니까 때리기 싫고, 엉덩이는 때리기가 힘들고, 얼굴은 금방 쫓아올 것 같고, 남은 건 배죠. 정확히는 뱃속이겠지만요. 여자가 남자랑 가장 다른 곳이잖아요. 자궁. 진짜 수준이 저질이에요. 여자 자궁을 강간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힘으로. 그래서 자기가 크고 강하고 세다는 걸 확인하려는 거죠.” 내 말에 말 없이 맥주를 들이키며 역겨움을 목 아래로 쓸어내린 조네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런 안경은 구하기 어려울 테니까 안경 몰카를 추적해달라고 하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내일 경찰에 부탁해 볼게요. 다솜이 기억하죠?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애. 탐정 같은 일도 하는 친구.” “기억해요.” “다솜이에게도 연락해볼게요. 전에도 도움을 줬으니까.” “불안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벌써 출근할 시간이네요……. 다녀올게요.” “괜찮겠어요? 잠 한 숨도 안 잤는데?” “거기서 자면 되죠. 좀 많이 시끄럽긴 하지만.” 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조심해요, 조네스.” "걱정 마요. 난 괜찮으니까. 이 팔뚝 안 보여요?” 하고, 조네스가 우람한 팔뚝을 찰싹 때려 보였다. 그래도 나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7. 점심 무렵, 잠에서 깬 나는 파출소로 가 경찰에 우리가 추리한 내용을 알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솜이에게 전화하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들어 있는 모양이다. 필요할 때 없는 건 다솜이 특기 중에 특기지만, 이번 만큼은 전화를 받길 바랐는데. 신경이 끊어질 것 같이 불안해졌다. 문이 열려있었다. 불안해진 나는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집이 엉망이다. 쇠지레로 억지로 연 집 문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모두 흙발로 어지러웠다. 살림살이며 그릇, 가구, 이불, 옷가지까지 모두 부서지고, 깨지고, 망가지고, 찢기고, 더럽혀져있었다. 벽과 바닥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남자를 우습게 보지 마라. —맨 오브 저스티스’
라고 써 있었다. 집이 문제가 아니었다. 조네스는 더 엉망이었다. 옷이 조금 찢어져 있었고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방바닥에 피웅덩이가 생겼다. “조네스! 괜찮아요?” 조네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곧바로 119에 신고했고, 112에도 신고했다. 파출소에서는 방금 다녀가 놓고 왜 또 전화하냐는 반응을 처음에 보였지만, 두서 없이 상황을 설명하는 내 목소리와 태도에 놀랐는지 곧바로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119에 연락을 했으니, 응급실로 먼저 가야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응급실로 바로 가겠다고 했다.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나는 뒤통수의 상처를 압박지혈하면서 조네스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혹시라도 조네스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문을 잠궈 더 이상 누가 공격해오지 않게 막고, 손에는 ‘사랑과 평화’를 꼈다. 숨어서 나 까지 공격하려고 하는 개 자식을 경계하면서. 다솜이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앰뷸런스를 타고 조네스에게 계속 말을 거는 동안 구급대원은 차분히 응급처치를 했다. 그리고 내게 신분이나 관계, 기타 필요한 정보를 물었다.  대답하는 내내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흔들려선 안된다. 그래야만 했다. 내 조네스를 위험하게 만들었고, 다치게 한 거나 다름없다. 조네스가 위험에 맞서 나를 구해줬다. ���번엔 내 차례다. 조네스가 가르쳐준 프로레슬링 호흡법을 계속하는 나를 구급대원은 과호흡 상태라고 잠시 오해했다. 응급실 수속을 마치고, 조네스의 상태를 물었다. 다행히 조네스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도착한 경찰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관은 현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조네스를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곁에 있기를 바랐다. 마침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다솜이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많이 전화했어? 미안해. 일하는 중이라 못 받았는데.” 나는 다솜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당장 와달라고 했다. 다솜이에게 조네스를 부탁할 셈이었다.  20분 정도 지나 다솜이가 도착했다. 병원 내 사람이 모두 주목할 정도로 커다란 배기음을 끌고 나타난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조수석에서 다솜이가 내렸다. 놀란 내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 운전석에 앉아있던 화려한 차림새에 미인이 선글라스를 살짝 내렸다. 그녀는 나를 향해 목례했다. 나도 엉겹결에 답례하는 사이, 다솜이가 날 불렀다. “우리 사무실 변호사님이야. 하리나 변호사님. 이번 일도 도와주신다고 했어.” 가까이서 보니, 넘치는 자신감과 화려한 분위기가 더욱 선명해졌다. 우아하지만 강한. 나는 내 소개를 한 뒤 감사를 건넸다. “별말씀을 요.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여자끼리 도와야죠. 다솜 씨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시고요.” 하고, 하리나는 내게 명함을 건넸다. “죄송해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룸메이트 분이 빨리 괜찮아지시길 빌게요. 그리고, 그 ‘개새끼’들을 빨리 잡는 것도요.” 하리나의 스포츠카는 경쾌한 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미인이 하는 욕은 기분을 시원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하리나라는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 밝아진 기분은 경찰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온 순간 다시 엉망으로 변했다. 경찰관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 경찰관이 욕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범죄와 혼란으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 신촌과 홍대입구 사이에 낀 이 작은 동네는 평화로운 섬과 같다. 주변은 오래 된 상가 건물 아니면 중소기업이라는 말이 버거울 정도로 작은 회사 사무실과 그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작은 가게들——중국집, 치킨집, 밥집, 술집,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 등등——이 전부다.  이런 배경에 어울리는 사건은 고작해야 주차단속이나 술에 취해 주정 부리는 주폭이 전부다. 가끔 부부싸움이나 근처 대학교 학생의 난동이 격한 사건이다.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한 서울 한 복판의 작은 동네로까지 쳐들어와 자기를 과시하려고 폭력을 휘두르는 멍청이를 경찰관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건 또 뭐지?” 하고,  경찰관은 부엌 한쪽 구석에 있는 USB를 발견했다. 고양이 목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안에 뭐 들었나 확인해 볼래요. 여기서 말고요. 증거니까요.” 내 말에 경찰관은 손수건으로 USB를 주어올렸다.
8. 파출소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평소 파출소 안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그 날도 그랬다. 나는 경찰관과 함께 파출소 컴퓨터에서 두 번 째 USB의 내용을 확인했다. 형광색 조끼를 덧입은 제복 차림의 중년 제복경찰관이 내 등 뒤에 서서 화면을 내다보았다. 제복경찰관은 혀를 찼다. “뭔 저런 미친 놈들이……?” 나는 그 말에 찬성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몇 번이고 영상에서 눈을 돌려야 했다. 너무 끔찍했다. 카메라는 배를 때리던 영상처럼 1인칭 시점이었다. 안경 몰래카메라를 이용한 것이리라. ‘빠루'로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놀란 조네스가 달려든다. 빠루를 휘두르는 두 손. 장갑을 끼고 있다. 조네스가 빠루를 피하고 달려든다. 뒤로 물러서는 화면. 등 뒤에서 나타난 또 다른 아이언맨 가면 쓴 남자가 전기 충격기를 조네스에게 사용한다. 경련을 일으키는 조네스. 제복경찰관은 얼빠진 소리로 “두 명이었어?”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자기 감상을 아무나 들으라고 늘어놓았다. 아무 말이나 내뱉는 그 아저씨를 째려보는 나를 눈치챈 경찰관이 급히 화면을 정지했다. “더 이상 안 보셔도 되요.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계속 보겠어요.” 화면이 다시 재생되었다. 조네스가 뒤통수를 '빠루'로 얻어맞는 순간——나는 눈을 돌렸다.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사람을 그렇게 크고 무거운 쇠지레로 때리다니. 죽일 셈이잖아. 조네스가 살아남아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둔탁한 소리. 털썩. 쓰러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 부서지는 소리. 소리. 소리——경찰관이 내게 다시 물었다. “정말 계속 보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단서를 찾아야만 놈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내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런 나를 본 제복경찰관이, “아가씨가 ‘곤조’가 장난 아니네.” 하고, 또 멍청한 아무 말을 지껄였다. 나는 이 중년 경찰관이 계속 거슬렸다. 남이 다치는 광경을 마치 영화 구경하듯 보는 이 사람의 감수성이 험한 경찰 일을 오래해서 이 지경이 된 건지 아니면 원래 이 지경이었는지 궁금했다. 경찰관은 한숨쉬며, “알겠습니다.” 하고, 화면을 다시 재생했다. “야! 이 씹할 년아! 보고있냐?” 하고,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목이 졸리는 닭이 최후에 저항하는 듯한 끽끽대는 새댄 목소리였다. 내 이름.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를 맨 오브 저스티스라 부르는 핑크색 보자기가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화면 속 미친 놈의 모습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무그루터기처럼 근육이 뒤엉킨 몸. 핑크색 보자기를 차도르처럼 뒤집어 쓰고 선글라스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마 저 선글라스에 몰래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 미친 놈이 깨진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으로는…… 지저분한 아랫도리를 비비고 있었다. 제복경찰관이 킥킥거리고 웃으며, “미친 놈이네.” 하고, 뇌까리자 나는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내 화를 막은 것은 경찰관이었다. 그는 급히 화면을 정지하며, “죄송합니다. 정말로 더 이상 안 보셔도 되요. 선배님?” 하고,  제복경찰관에게 눈치를 줬다. 헛기침하며, 제복경찰관이 자리를 피한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계속 틀어주세요. 어떤 짓을 했나 똑똑히 보고 싶어요.” 화면이 다시 재생된다. 핑크색 보자기는 헉헉대며, 단속적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은…… 너 년 차례다……. 지금은…… 이 년 차례고…….” 하고, 쓰러진 조네스를 가리킨다. 피웅덩이에 쓰러진 조네스가 화면에 비춘다. 맨 오브 저스티스 핑크색 보자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하더니, “다음은 너 차례라고!” 하고, 거슬리는 새댄 목소리로 손에 담긴 정액을 거울에 뿌렸다. 영상이 꺼지고, 나는 헛구역질을 해댔다. “개자식……!” “괜찮으십니까?” “고소장부터 쓰고 싶어요.” 내 말에 경찰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소장을 쓰는 내내 눈물이 터져나오려 했다. 분하고 억울해서였다. 집으로 돌아와 집 청소 하면서 핏자국을 닦으면서도 눈물이 터져나왔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꼭 복수할 거야. 가만 두지 않겠어. 전화가 왔다. 안다솜이었다. 좋은 소식이기를 바라며 전화를 받았다. “조네스 씨 깨어났어.” 또 다시 울음이 터졌다.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 “너 지금 어디냐? 너 지금 설마 집 안에 있어? 설마, 혼자있어?” “혼자지 당연히. 왜? 데리러 오게? 청소 중이야.” “당장 나와! 뭐 하는 거야, 지금? 그 놈이 또 오면 어떻게 하려고! 경찰은? 아냐, 대답도 하지마! 시간 아까우니까. 당장 전화 끊고 짐 빨리 챙겨서 나와! 일단 병원에서 지내! 얼른 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나는 다솜이가 시키는 데로 했다. 급히 가방에 그나마 멀쩡한 옷가지 몇 개를 챙겨넣었다. 그 외에 귀중품과 비상금도 찾아넣었다. 문이 안 잠기니 두고 갈 수 없었다. 가방을 다 챙기고 일어선 내 머릿속에 빼 먹은 물건이 떠올랐다. 메리켄. 나는 메리켄을 손에 꼈다. 메리켄에 새겨진 사랑과 평화라는 말을 보며, 흉악한 폭력에 당한 조네스를 떠올렸다. 단순히 내 몸을 지키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문제라는 사실도 곱씹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눈 앞의 문제를 얼버무릴 수 는 없다. 부당한 폭력이 나를 위협하고 있다. 공허한 구호나 아무 생각없이 중립을 되풀이해봤자 변화하는 것은 없다. 옳고 그른 것 이전에, 생존의 문제다. 싸울 힘을, 조네스는 내게 주었다. 나는 싸울 것이다.
9. 한밤 중. 인적 드문 골목길에는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와 골목길을 거쳐 큰길가로 향했다. 옷가지며 귀중품을 스포츠 가방에 잔뜩 쑤셔 넣어 한쪽 어깨에 걸쳐매고,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가방 끈을 잡은 손의 반대쪽에는 은빛 메리켄이 묵직하니 자리잡고 앉았다. 반전되어 새겨진 ‘사랑과 평화’가 가로등 불을 반사했다. 대로변으로 나오자 마자 운 좋게도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가 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으려 했다.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메리켄 주먹을 날렸다. 얼굴에 정통으로 꽂힌 훅에 나가떨어진 남자는 아이언 맨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이언 맨을 욕보이는 짓을 하다니. 또 다른 방향에서 분노가 솟아올랐다. 아이언 맨 가면이 허둥대며 일어났다. 어설픈 자세를 취한다.  그 모습은 나는, ‘지금 나랑 장난 치는 거야?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거지?’ 하고, 어이가 없었다. 한방 더 먹여주려고 메리켄을 치켜들었다. 방심. 놈은 내 가방을 낚아 채 도망쳤다. “야! 거기 서!” 나는 놈을 쫓았다. 영화 속 추격전처럼 허둥지둥 달리는 놈을 잡으려고 골목길을 헤집고 달리는 와중에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다. 놈은 제 발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내 가방을 품에 안고 벌벌 떠는 아이언 맨 가면에게, 나는 일갈했다. “얌전히 가방 주고 꺼져. 그리고 다신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아니, 다른 여자들 앞에도 나타나지 마! 그리고 그 가면도 쓰지 마! 아이언맨이 언제부터 약자를 괴롭혔어?” 내 말에 아이언 맨 가면이 멍청한 소리를 더듬더듬 뇌까렸다. “여, 여, 여, 여자가 무슨, 뭐, 무슨, 야, 약자냐? 이 페미나찌 년아!” “뭐? 가만히 있는 사람 집에 무단 침입하고, 물건 훔치고, 폭행하고, 인터넷에 신상정보 까발리고, 죄 없는 동물 학대하는 네 놈들이 나찌겠지!” 하고, 메리켄 낀 주먹을 치켜들자, 놈은 겁에 질려 가방을 마구 휘둘렀다. “오, 오지마! 오지마라고! 꺼져!” 나는 완전히 어이가 사라져버렸다. 웃음이 터졌다. “쫄았냐? 남자라며? 배짱도 없으면서 그런 짓은 왜 해?” 나는 다가갔다.  벌레라도 쫓듯 아이언 맨 가면이 가방을 휘둘러 댔다. 발작하듯 발버둥 쳐서 가방이 벽에 마구 부딪혔다. “야! 남의 가방 막 휘두르지마!” “히익! 힉! 저리 가! 저리 가 이 씹할 년아!” 하고, 막다른 벽에 기대 가방을 흔들다 다리가 풀렸는지, 아이언 맨 가면이 반쯤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애초부터 때리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겁에 질려도 내가 여자니까 자기가 강하다고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같잖아보였을 뿐이다. 경고성으로 겁 좀 주고, 가방 되찾아서 갈 생각이었다. 조네스가 더 걱정되었으니까. 내가 한 걸음 더 다가갔을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뒤돌아 보는데, 온 몸에 전류가 흘렀다. 말 그대로, 전류였다. 그것도 고압전류. 전기충격기. 고압전류가 주는 고통은 순식간에 온 몸의 근육이 제 멋대로 수축시켰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릴 정도로 온 몸에 힘이 꽉 들어간 탓에 부들부들 경련이 일어났다. 턱의 힘을 이기지 못한 어금니가 서로 마찰하며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눈 앞에 남자가 나타났다. 핑크색 보자기를 둘러 쓰고 있었다. ——스스로 맨 오브 저스티스라 불렀던 그 변태. 그 뒤로 남자 여섯 명이 보였다.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 가면이다. 아이언 맨 가면이 나를 지나쳐 여섯 명의 조커 뒤로 숨었다. 조커 가면 한 명은 캠코더로 촬영하고 있었다. 세 명은 삼단봉, 쌍절곤, 목도로 무장하고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은 맨 손이다. 전기충격기는 고통스러웠지만, 생각보다 후유증이 없었다. 온 몸을 물어 뜯었던 전류의 송곳니도 한번 입을 떼고 물러나니 아픔이 금새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자기가 이기고 있다고 착각할 때 가장 빈틈을 내보이는 법이라고 조네스는 가르쳐줬다. 내가 먼저 이겼다고 생각하며 어리석게 함정에 빠졌던 만큼, 이번엔 놈들 차례다. 핑크색 보자기가 새댄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씹할년아!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남자 우습게 보니까 그 꼴 나는 거 거든? 님, 지금 촬영 하고 있죠?” 이 말을 들은  촬영 중인 조커 가면이 낄낄 거리며 대답했다. “실시간 방송 중이에요. 님들아 별풍 좀 싸봐. 대신 우리가 딴 거 싸노.” 다른 조커 가면들도 따라서 천박하게 웃으며 천박하게 한 마디 씩 했다. “배빵 하면 되노? 배빵 먹일 생각에 공중제비 돈다 이기.” “돌려 먹고 김치년 X지에 전구 넣고 깨버리노?” 강하다고 허세 부리면서 나를 겁 주려고 되먹지 않은 말을 내뱉는 놈들이, 나는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영화 속 조커의 이미지에 취해서 자기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짜 강한 남성이라고 착각하는 허세가 가소로왔을 뿐이다. 나는 활로를 모색하느라 생각을 거듭했다. 냉정해야 한다. 나는 작게 프로레슬링 식 호흡법을 계속했다. 메리켄이 보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두 번 내뱉고, 한 번 들이쉬고, 두 번 내뱉고, 한 번 들이쉬고……. 핑크색 보자기가 다가왔다.
10. “여자면 여자답게 얌전히 다리나 벌리고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기, 어딜 개겨? 내가 얼굴 다 뭉개지기 싫으면 깝치지 말라고 했지? 남자 중의 남자——”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 몸을 세우고, 핑크색 보자기의 말을 가로챘다. “그렇게 남자 중의 남자인 분이 왜 핑크 보자기 쓰고 여자처럼 끽끽 빽빽 대실까……? 그리고 뭐? 맨 오브 저스티스? 중학생이냐? 안 쪽팔려?” “뭐?! 진짜 봐 주니까!” 핑크색 보자기가 씩씩대며 전기 충격기를 들어올려 버튼을 눌렀다. 푸른 전류가 흐른다. 놈은 전류를 내 얼굴을 향해 쑤시려고 달려들었다. 나는 메리켄으로 가랑이 사이의 더러운 물건을 후려쳤다. 스트레이트가 치골에 맞아 연골이 으깨지는 감각이 들었다. 빗맞았지만 위력이 있었다. 놈이 칠판을 긁는 것 같이 거슬리는 단말마를 외쳤다. 나는 세워둔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서며, 가랑이 사이를 걷어 차 올렸다. 놈은 가랑이 사이에 손을 끼고 쓰러졌다. 나는 전기 충격기를 빼앗아 들고 일어섰다. 전기 충격기 사용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면 전류가 흘렀다. 놀란 조커 가면이 모두 전투태세를 취했다. 나는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등을 벽에 기댔다. 배수진. 말 그대로 배수진이었다. 내가 아무리 조네스와 훈련을 쌓아왔고, 훈련을 쌓아왔고, 적 중 가장 강한 핑크색 보자기 뒤집어 쓴 변태가 쓰러졌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혼자서 여덟명을 상대로 싸우는 기는 힘들다. 하지만, 다 이길 필요는 없다.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나는 틈을 봐서 도망칠 활로를 찾는 데만 집중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조커 가면과 아이언맨 가면은 덤비지 않았다. 교착상태가 계속되었다. 왜 덤비지 않지? 나는 곧바로 답을 깨달았다. “뭐해? 안 덤벼?” 그 말에도 가면 쓴 겁쟁이들은 머뭇거렸다. “니들, 쫄았지? 남자 7명이 가면 쓰고 비겁하게 여자 하나 다구리 하려고 하는데, 정작 나서려니까 쫄아서 한 발자국도 못 내미는 거 잖아? 맞지? 입만 살아서.” “다, 닥쳐! 김치년아!” “뒤지고 싶냐!” 놈들은 정곡을 찔린 게 확실했다. 동요하고 있다. 조네스는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적이 동요하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나는 계속 도발하면서 흔들었다. 흔들다 보면, 빈틈이 나온다. 그리고 그 빈틈이 활로로 이끌어 줄 것이다. “겁쟁이라 큰소리 만 치지. 니들이 왜 못 덤비는 지 알아? 니들은 비겁하거든. 겁쟁이에 비겁하고 치졸해서 뒤에서 사람 욕하는 거 말고는 못해. 남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을 줄만 알거든. 언제 자기 손으로 밥을 차려보길 해, 뭘 해?” “다, 다, 다, 닥쳐! 썅년아아아!” 하고, 조커 가면 중 하나가 쌍절곤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허둥댔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모습이 쌍절곤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쌍절곤에 휘둘리는 꼴이었다. 자기 머리를 때려 빈 틈이 생긴 사이, 나는 달려들어 메리켄 주먹으로 턱을 후려친다. 단단한 턱뼈와 쇳덩어리에 낀 가면의 마찰로, 피부가 터져 생채기가 났다. 얼굴이 드러난다. 좋게 봐 줘도 평범한, 졸린 눈을 한 남자다. 얻어맞은 생채기에서 피가 조금 나는 것을 확인하자,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거의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으아아아! 피! 피! 저 년이 나 때렸어! 저 년이 나 때렸다고! 다 찍어! 고소할 거야! 고소할 거라고!” “니들이 먼저 덤볐잖아! 멍청아!” 하고, 쌍절곤을 빼앗아 든 나는 놈의 정수리를 수직으로 내려쳤다. 핑크색 보자기쳐럼 충격으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버렸다. 나는 선풍기처럼 쌍절곤을 마구 돌리고, 전기 충격기 버튼을 누르며 견제했다. “꺼져! 안 꺼져? 비키라고!” 동료가 얻어맞아 피가 난 모습을 본 조커 가면 일동은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다가오는 나를 제지할 생각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활로가 보인다. 계속해서 쌍절곤과 전기 충격기로 견제하면서, 나는 천천히 활로를 향해 나아갔다. 마치 검객이 서로 마주 본 채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빈틈을 보이는 순간 공격이 날아든다. 철저해야 한다. 활로 밖으로 보이지 않는 선이 보였다. 그 선 안으로는 위험지대, 그 선 밖은 도망칠 수 있는 안전지대다. 선으로 향하는 활로를 뚫으려면 장애물을 몇 개 더 해치워야 했다.
11. 긴장을 참지 못하고 조커 가면 하나가 먼저 움직였다. 머리 위로 치켜든 삼단봉을 내리쳤다.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침착하게 쌍절곤으로 날아드는 삼단봉을 항해 후렸다. 줄이 휘감겨 삼단봉과 쌍절곤이 뒤엉켰다. 조네스에게 배운대로, 나는 허리를 낮추어 무게중심을 끌어내렸다. 동시에, 뒤엉킨 쌍절곤을 끌어당겼다. 로프 반동이라고, 프로레슬러가 상대를 로프로 던질 때 중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해머 드로(hammer throw)'라는 기술을 응용한 것이다. 체중은 내가 더 적게 나갈지는 몰라도, 내가 더 낮은 무게중심을 유지하고 있기에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달려가다 누가 딴죽을 걸었을 때처럼 놈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낙법도 못 치는 멍청이 같으니. 가면이 없었으면 코가 완전히 뭉개졌을 것이다. 또 다른 공격——이번에는 목도였다. 공격을 알아차렸을 때는 피하기에 너무 늦었다. 해머 드로를 하느라 중심이 쏠린 탓이었다. 그러나 아드레날린으로 흥분한 나는 대담해졌다. 나는 날아드는 목도를 향해 오히려 달려들었다. 공격 반경 안으로 들어가면 위력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어깨에 목도의 중간 부분이 부딪혔다. 분명히 충격은 반감됐다. 그러나 고통과 충격은 선명했고 내 분노를 더 타오르게 만들었다. 입에서 비명이 뒤섞인 기합이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전기 충격기를 목도를 휘두른 멍청이의 배에 쑤셔 박았다. 파치지지직. 멍청이는 고압전류에 놀라 목도를 놓치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비명 지르는 입을 막으려고 메리켄 스트레이트를 날려, 가면을 반으로 쪼갰다. 놈은 똑같은 맨얼굴을 드러내며 나가 떨어졌다. 나머지 둘이 달려들었다. 나는 목도를 주어들고 힘껏 좌우로 휘둘렀다. 둘은 머리 옆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남은 것은 비디오 촬영하는 조커 가면, 그리고 미끼 역할을 하던 아이언맨 가면이었다. 이 둘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떻게 생겼을 지 뻔히 보였다.   이 놈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 가면으로 가리든 가리지 않았든, 하나 같이 판에 박은 양 똑같은 얼굴 생김새다. 개성이 없다. 열등감으로 뒤틀려있다. 그 자체로 가면이나 다름 없다. 본판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열등감을 가리려고 다른 사람 얼굴을 가려봤자 변한 건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 거겠지. “너. 그리고 이거 보고 있는 변태 놈들. 똑똑히 봐. 난 절대 굴하지 않아. 알아 들었어?” 나는 둘에게 다가갔다.  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켜! 그리고 내 가방 내놔!” 놀라서 움찔하는 아이언 맨 가면이 가방을 건넸다. 그 순간 나는 안전지대로의 선을 넘었다.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 뒤에서 엄청난 힘이 나를 붙잡았다. 두 팔로 허리를 감싸고, 나를 공중으로 뽑아올렸다. 핑크색 보자기였다. 핑크색 보자기가 새된 소리로 악을 썼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아아! 야! 뭐해! 조져!”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자, 캠코더를 찍던 조커 가면과 아이언 맨 가면이 비겁한 미소를 지으며 땅에 떨어진 무기를 주어들었다. 나는 팔꿈치로 나를 붙잡아 올린 핑크 보자기의 관자놀이를 찍었다. 그리고 나를 붙잡은 손등을 메리켄으로 후려쳤다. 고통으로 힘이 느슨해졌다. 나는 몸을 돌리며 얼굴에 메리켄으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선글라스와 부서지고, 얼굴이 드러났다. 역시나 똑같은 얼굴이었다. 열등감으로 뒤틀린, 답답한 표정. 나는 탈출하여, 다시 한 번 메리켄 펀치를 날렸다. 이마에 '사랑과 평화'가 선명히 찍혔다. 핑크 보자기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이마에 손을 대고 히스테릭한 비명을 질러댔다. 남에게 고통 주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주제에, 자기가 받은 상처는 무엇보다 소중한 모양이다. 나는 놈의 시끄러운 입에 한번 더 펀치를 날렸다. 숨이 차올랐다. 온 몸이 안에서 폭발해 파열될 지경이었다. 남은 두 놈이 도망치려고 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달려들었다. 주어든 목도를 휘둘러 캠코더를 박살내고, 내던져 앞서 달리던 아이언 맨 가면의 다리에 딴죽을 걸었다. 낙법을 모르는 놈은 넘어진 충격에 기절하고 말았다. 그 사이 캠코더를 찍던 조커 가면이 도망쳤다. 나는 가방을 되찾아 뒤쫓았다. 큰길가로 나오자, 놈이 허둥대며 차도로 뛰어들었다. 커브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가 미쳐 보지 못하고 놈을 치려고 했다. 나는 몸을 날려 놈을 밀쳐냈다.   그 순간, 눈 안에서 빛이 폭발했다. 번쩍이는 불길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내 의식도 사라졌다.
12.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 앞에는 네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이름 모를 의사. 변호사——저번에 본 하리나. 탐정——친구 안다솜. 프로레슬러——또 다른 친구 조네스. 모두가 웃고 있었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온 몸이 다 아팠다. "여기 어디야……? 조네스, 괜찮아요?” “병원이에요. 난 괜찮아요.” “내가 마침 도착했었거든.” 하고, 다솜이가 말했다. “그리고 경찰 아저씨도 같이. 너한테 해꼬지 한 놈 목숨을 구하다니. 어쩐 일이냐? 착한 일을 다 하고. 다행히 교통사고로 다친 데는 딱히 없다더라. 다행이지.” “교통사고…….” 어렴풋이 기억이 돌아왔다. “그 놈들은?” “경찰 아저씨가 다 잡아갔어.” 하리나 씨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인터넷 방송을 포함해, 불법 침입, 협박, 폭력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른 놈들은 모두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들 거예요. 제가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걱정마세요. 다솜이가 말했다. “우리 변호사님 실력 알아주는 분이셔. 걱정마.” “나…… 그 놈들 한테 사랑과 평화를 한 가득 안겨줬어.” 내 말에 정신이 덜 들었나 싶은 다솜이가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조네스는 미소 지으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하리나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쉬세요. 뒷 일은 걱정 마시고.” 다솜이도 뒤따라 일어섰다. “그래. 푹 쉬어.  한숨 자. 참, 조네스 씨 병실은 아래층에 있어. 나 거기에 있을 게.” 나는 그 말대로 잠을 청했다.
모든 게 잘 해결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영상은 인터넷에 퍼져나갔고, 많은 남자들이 나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해왔다. 나는 굴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니까. 조네스와 나는 새로운 직장을 찾기 전 까지 하리나 변호사님의 사무실에서 일하기로 했다. 다솜이 조수 같은 일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변호사님 덕분에 더 안전하고 좋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 나는 몇 가지 활동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겪은 일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리나 변호사님이 후원해주었다. 먼저 나는 sns 계정을 하나 만들었다. 계정 이름은 시스터후드였다. 내가 벌일 활동의 이름이기도 했다. 나는 시스터후드의 이름으로 클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전문가를 불러 호신술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고 보급하는 일, 실용적인 호신용품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 그리고 후드티도 하나 만들었다. 시스터후드라고 커다랗게 써 있는 짚업 티셔츠다. 자금 마련을 위해서 만들었지만 입고 다니기 부끄럽지 않게 디자인도 신경썼다. 클라우드 펀딩을 시작하자, 많은 사람이 우리를 지지해주었다. 시스터후드라는 이름으로 모임도 가졌다. 선글라스 몰카를 만드는 업자를 추적해, 사실을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몰카를 공유하는 업자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고소했다. 직장에서 빡치게 하는 상사가 있으면 우리가 가서 후드와 가면을 뒤집어쓰고 대신 시위를 해주는 활동도 벌였다. 감히 우리더러 이러쿵 저러쿵 덤벼드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나는 조네스와 함께 시스터후드의 이름으로 우범지역의 방범활동도 하고 있다. 물론 그 때 마다 내 두 주먹에는 은빛 사랑과 평화가 함께하고 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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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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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완전히 정지한 남자 손지상 -18300자. 2016-01-20 01:48 초고 완성. “형, 마셔도 돼요? 감량은?” “괜찮아.” 마시지 않고는 못 버틸 것 같으니까— 나는 잔을 내밀고 소주를 따라주는 최준용에게 꽉 채우라고 했다. 최준용이 술을 따르는 몸짓은 예의 바르기가 그지 없다. 몇년 전 같은 복싱 도장에서 스파링 해 줄 때만 해도 천지분간 못하는 놈이었는데, 건달이 되고 나서는 많이 배웠는지 동작 만큼은 정중하다. 고깃집은 언제나 시끄럽다. 대화가 불가능한 공간. 그래서 더 좋다. 다들 별 의미없는 이야기 하면서 싸구려 고기와 맛 없는 술을 들이키기만 하면 되니까. 배는 부르고 시간은 간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목살 삼인분을 주문한 이두현 형이 잔을 치켜들었다. “미래의 UFC 챔피언을 위해 건배하자!” 이 형은 변한 게 없다. 과거 나랑 같이 권투를 했다가, 지금은 그만 두고 퍼스널 트레이너 준비를 한단다. 변함없이 착하고, 변함없이 얄팍하다. 늙은이들이나 하는 삼행시로 건배사를 하겠다는 것을 말리고, 잔을 들었다. “위하여!” 술잔을 부딪히고 각자 잔을 비우는 동안에도 머리가 아파왔다. 병원에서 결과를 보자마자 두 사람에게 전화했다. 그나마 한잔 하자고 부를 사람이다. 복싱을 그만두고 종합격투기로 전향할 때, 별로 좋게 헤어지질 못했다. 나는 언제나 그렇다.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고 헤어진다. 같은 학교 친구, 도장 친구. 여자친구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 두현이 형이 감개무량한 모양이다. 아까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도 UFC에 진출한 선수가 몇이나 되냐? 그 중 한 명이 된 거 아냐! 잘했다. 정말 잘했어.” 최준용은 적당히 응답하며 고기를 굽고 있다. 나는 대꾸하고 싶지 않아 한 점 두 점 입에 가져가기 바빴다. “옛날 부터 넌 맷집으로 버티는 인파이터였는데, 그게 종합 격투기에 잘 맞아 떨어진 거지. 요새 복싱은 죄다 메이웨더 마냥 아웃복싱이잖냐? 그래가지고 관객들이 좋아하겠냐고.” “근데 미국 애들 덩치 엄청 크던데. 다들 스테로이드 하는 거 아니에요?” “소문은 있는데. 모르지. 도핑에는 안 걸리니까.” “걸리면 가차 없잖아요. 미국 애들 가차 없던데.” “메이저리그도 그렇잖냐. 스테로이드 썼다고 바로 명예의 전당에서 내리고, 성적이 안 좋아도 바로 방출하고.” 나이를 뒷구멍으로 쳐먹었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준용이가 화제를 돌린다. “스테로이드 쓰면 완전히 달라지던데. 우리 ‘회사’에도 원래 개멸치였는데, 스테로이드 맞고 바로 등빨 좋아진 애가 있거든요. 몸이 그냥 막 불더라고. 그런 애를 약 안 먹고 어떻게 이기겠어. 그런 애들이랑 인파이팅 하려면 진짜 힘들 거 같은데.” 손이 조금 떨린다. “정찬성이라고 맷집 좋은 선수 또 있지 않냐?” “코리안 좀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별명 뭐예요?” “킬러 샌드백.” 내 대답에 최준용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생각해도 웃긴 별명이다. 미국 놈들은 사람 우습게 만드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내가 경기 중에 엉망진창으로 얻어 터지면서도 난타전 끝에 승리하는 모습을 두고 붙인 별명이다. 사람들은 화끈한 경기라고 칭찬한다. 같은 업계 사람들은 내 실력 부족을 금새 눈치챈다. 나는 반 쯤 남은 소주를 들이키고, 최준용에게 잔을 내밀었다. “진짜 드셔도 되요?” 나는 말 없이 잔을 흔들었다. 받자마자, 한 번 더 들이켰다. “형 뭐 고민 있어요?” 눈치 빠른 놈. “아냐 없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요.” 나 혼자 소주 다섯 병을 비우고 나서야, 자리는 파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서 알려준 결과를 곱씹었다. —메이저리그도 성적 안 좋으면 바로 방출하잖아. 두현이 형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울렁이는 속은 금방이라도 솟구쳐 오를 것 같다. UFC는 보통 삼 세 번 기회를 준다. 연패하면, 곧바로 방출이다. 그리고 난 지금 4연패 중이다. 경기가 화끈하다는 이유로 기회를 더 주고 있기는 하지만, 위험하다. 여기까지 오려고 일본의 군소단체를 전전했다. 죽어라 영어공부를 했다. 미국의 주짓수 도장을 기웃거리다가 얻은 인맥으로 미국 대회에 나갔다. 여기까지 왔다. 기회가 멀어지려 하고 있다. 버텨야 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끝나지 않는 시간 내내 온 몸으로 공격을 받아내면 된다……. 택시에서 내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리 내가 바란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고, 되돌릴 수 없다. 이미 굳어버린 파이팅 스타일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선고된 의학적 결과도 바꿀 수 없다. 쉽게 바꿀 수 있는 거라고는 현관문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다. 기계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삑삑거리는 전자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불이 켜져있다? 사범님? 깜짝 놀란 내 배로 주먹이 꽂혔다. 라이트 보디블로, 짧게 끊어 친 예리한 쇼벨훅이 대각선으로 태양신경총을 찔러 올렸다. 횡경막이 제 멋대로 떨리더니 위에 가득 담겨있던 알코올과 덜 소화된 고기가 솟구쳐올랐다. 한참 구토를 하고 나서야 어지러웠던 머리가 정리됐다. 다행히 무릎이 꺾이지는 않았다. 다운이 아니다. “지금같은 중요한 시기에 술이 목을 넘어가디?” “사범님…….” “내가 아직 네 코치긴 한 모양이구나, 이 배은망덕한 새끼. 네가 그러고도 무도인이냐? 시합이 얼마 남았다고 술을 마셔!" 사범님은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싱크대에서 잔에 수돗물을 채워 건넸다. 내가 받아들고 입을 헹구는 사이, 사범님은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배가 나오고 손을 조금 떨고 있어도, 여전히 펀치는 매섭고 정확하다. “이번에 지면 퇴출인 걸 알고서 마신 거냐? 자포자기냐? 이 조홍식이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 “사범님……, 전 미국 안 가겠습니다.” “개처럼 꼬리 말고 도망치겠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병원에서—” “병원? 언제 다녀왔어? 그걸 나 몰래 다녀왔냐!” “중요한 건 언제가 아니라 결과잖아요!” “뭐라던데?” “위험하답니다. 너무 많이 맞아서, 각막도 뇌도 너덜너덜하데요.” 사범님이 입을 다물었다. 망막박리. 사범님이 복싱을 그만 두게 된 것도 너무 많이 맞아서 눈의 망막이 벗겨지고, 뇌가 망가져 신경이 엉망진창이 되어 손을 떨기 시작해서 였다. 레슬러의 양배추같이 망가진 귀나 복서의 연골이 뭉개진 코처럼 사투를 벌여온 역사가 담긴 눈에 보이는 훈장이 아니라, 링 위로 다시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투명한 족쇄. “어차피……,” 어렵게 입을 연 사범님의 얼굴이 억지로 누그러져있다. 한 라운드만 더 버티라고 사탕발림 할 때 표정.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그 방법으로 망가졌는데도. “이번에 지면 퇴출 아니냐.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해보자.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범님은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방금 전에 내 배에 강렬한 주먹을 박아넣었던 사람이다.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형. 형.”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까지 나니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어둑어둑한 걸로 보아 새벽인 모양이다. 쇼벨훅이 알코올을 채 빼내지 못했는지 발을 내딛을 때 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사범님도 많이 늙은 모양이다. 문을 여니, 최준용이다. 기계적으로 웃는 얼굴이 짜증스럽다. 눈치 빠른 놈인 줄 알았는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 “형이 어제 알려줬잖아."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들어온다. 거부할 명분도 없어 그대로 문을 닫았다. 침대에 앉은 준용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영어 책이 왜 이리 많아, 집 좋네, 하고 마음에도 없는 몇 마디 하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 도핑 안 걸리고 약 할 수 있으면 할래?” “뭐?” 당연한 소리다. 안 걸리고 약을 쓸 수 있다면 거절 할 사람이 있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계에서 남들 다 하는 걸 안 하면 내가 손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걸어온 제안을 덥썩 물기에 나는 너무 많이 당해왔다. “일단 이거 부터 마셔.” 준용이가 앰플을 건넸다. 약국에서 파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섣불리 받아마셨다가는 준용이 페이스에 말린다. 싸움은 박자다. 남의 박자에 말려들어가면 진다. “속셈이 뭐야.” “뭐기는. 그냥 유명인 인맥 덕 좀 보려는 거지.” “나가.” “오해하지 마. 판매 루트 뚫어달라거나 하는 치사한 부탁 하려는 게 아니니까. 일단 그거 부터 좀 마셔. 숙취는 풀고 이야기를 하든 말든 해야지, 안 그래?” 그 말을 거절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아프다. 앰플 속 액체는 의외로 달았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탄산수 캔을 꺼냈다. “이야, 이젠 이런 것도 먹네?” 준용이가 탄산수 캔을 따며 말했다. 나는 탄산수로 입을 씻어 넘겼다. 가벼운 트림이 올라온다. “본론이 뭐야?” “아는 분이 형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그 분이 약을 공급해줄 거야. 대신 형은 그 분을 고용하는 거지.” “고용?” “세컨드로.” “뭐 하던 사람인데?” “외국인이야. 딱히 운동 하거나 한 사람은 아닌데. 그 외 분디니 같은 사람이야.” “분디니?” “분디니 브라운. 무하마드 알리 트레이너 하던 사람 있잖아.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그 사람도 복싱은 하나도 모르는 데도 알리 트레이너였어. 뭐랄까, 응원단장? 요새 말로 하면 멘탈 관리하는 사람이랄까?” 건달 되더니 많이 똑똑해졌군. “난 그런 사람 필요없어. 나한텐 트레이너가 있고, 날 응원하는 사람도 있어.” “약은 필요하잖아. 안 그래?” 침묵. “필요 없어.” “형도 알잖아. 가끔씩 막판에 몰린 복서나 야구선수가 뽕 맞고 링에 오르는 거. 날아오는 공 실밥도 보이고, 글러브 찢어진 데도 다 보인다잖아. 내가 말하는 약은 그냥 갑빠 키우는 스테로이드만 이야기하는 게 아냐. ‘비타민’도 포함하는 거라고. 게다가 도핑에도 안 걸리고.” “그런 약이 어디있어? 너 이 새끼, 나 뽕쟁이로 만들어서 한 몫 챙기려나 본데—” “내가 씨발 아무리 건달이라도 그런 짓은 안해, 형. 그리고 솔직히 이제 무리 아냐? 맷집으로 버티는 것도? 전에 보니까 손도 좀 떠는 것 같고 그런데? 병원에서 뭐라 안해?” 카운터 펀치. 준용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로 바로 보낼게. 외국인이지만 한국말 잘 하셔. 졸린 것 같은데 푹 쉬고, 나 갈게.” 내가 거부하려고 일어나자, 준용이는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넉 다운!” 나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텐 카운트!”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템플에 강렬한 훅을 맞은 것 같다. 나는 더 거절할 의지도 잊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카운트가 사라지는 메아리처럼 귓속에서 울렸다. 1…… 2…… 3…… 4…… …… “세븐!” 반사적으로 눈이 열렸다. “에잇!” 몸이 저절로 일어난다. 종합격투기로 전향하고 난 뒤에도 복서 시절의 과거가 온 몸에 인이 박혀있나보다. 상황을 파악하기에 시간이 걸렸다. 방금 전 준용이를 만났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지금 눈을 뜬 이 상황도 꿈처럼 느껴졌다. 카운트를 한 사람은 누구지? 지금 몇시지? “안녕하시오.” 경쾌한 목소리. “정신 차렸소? 미래의 챔피언? 아니, 이미 챔피언이 된 거나 다름 없지. 숙취는 좀 어때요? 마셔도 되겠소?”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 멋대로 냉장고를 열었다. 그는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흑인이었고, 몸에 걸친 것은 온통 보라색이었다. 위 아래로 보라색 츄리닝을 입고 있었고, 냉장고 속에 머리를 쳐박고 뒤지는 사이로 얼핏 보이는 뉴에라 캡도 보라색이었다. 미친 놈인가? 놈은 탄산수 캔을 내게 던졌다. 엉겹결에 받아들기는 했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을 파악하느라 캔을 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상한 놈이면 캔 채로 던져서 쓰러뜨려야 한다. 함부로 무기를 낭비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미친 놈에게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폭탄처럼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섬세하게 다루어야 해체할 수 있다. “누구…… 십니까?” “아! 난 바론 사메디입니다!” “바론?” “예명 같은 거죠. 준용씨에게 말씀 못 들었습니까?” “그럼 당신이 그…….” “네. 트레이너죠. 정확히 말하자면 코치지만요.” “코치?” “한국에서는 코치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고 있어요. 원래 코치라는 말은 ‘플레이어’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 정신상태를 유지하도록 돕는 사람이죠. 사람은 누구나 맹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린 그 맹점을 벗어나게 해 주죠.” “그럼 난 이미 코치가 있으니까, 꺼져! 이 방엔 어떻게 들어왔어?” “당신에겐 제대로 된 코치가 필요해요. 분디니 브라운처럼 당신을 완전히 믿어줄 사람이 필요하죠. 다 압니다. 뇌에 문제가 생겼죠? 당신 트레이너는 무작정 맞아도 버티라고 시켰을 겁니다. 하! 그런 정신론으론 아무 것도 못해요. 근성이라고 하나요? 근성이 있으면 왜 굳이 맞습니까? 피하는 근성을 발휘하면 되지. 그래서 일본이 우리 미국을 못 이겼던 겁니다.” “당신 미국인이야?” “중요한 건 미국이냐 중국이냐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당신에게는 ‘모조’가 필요해요.” “‘모조’……?” “한국말로는 뭐라 해야 할지…… 마법이 적당하겠군요.” “미쳤군. 내가 보기엔 뇌가 맛 간 건 너다, 이 미친놈. 마법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져! 안 그러면 내 손에 박살 날 줄 알아!” “준용씨에게 도핑에 걸리지 않는 약물이 필요하다고 했다면서요?” 침묵. 당장에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다가가니, 생각보다 바론 사메디라는 이 미친 작자의 덩치가 크다. 아니, 커졌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정말로 내 뇌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 눈에 이 미친 흑인이 점점 더 커져갔다. 눈 앞이 빙빙 돈다. “왜 그러십니까? 덤빌 생각 아니었나요?” 말도 안돼! 삼 미터가 넘어 보인다. 내 머리가 완전히 맛이 간 건가?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하긴, 선수가 함부로 민간인을 때려서야 큰일날 일이지요. UFC 단체에 걸리면 바로 선수등록이 정지될 지도 모르니까. 그렇죠? 당신은 내 ‘코칭’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내 ‘모조’도요.” “오, 오지마!” “뭘 겁내십니까? 이걸 겁내십니까?” 놈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손바닥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수 십개는 되어 보이는 다리를 꿈틀거리는 커다란 벌레가 튀어나왔다. 지네처럼 생긴 그 벌레에서 끈적이는 체액이 뚝뚝 떨어졌다. 구역질. “1988년에 나온 영화 ‘브레인 데미지’라고 혹시 본 적 있습니까? 싸구려 코미디 호러 영화죠. 그 영화를 보면 말입니다. 목덜미에 붙어서 사람의 뇌를 먹는 기생충이 나옵니다. 기생하는 대신 뇌를 조종해서 기분 좋은 환각을 느끼게 해주지요. ” 거대해진다. 다가온다. “이것도 비슷한 겁니다. 이 녀석 이름은 ‘칼라’, 당신 머릿속에 들어가, 당신의 뇌를 수 십 배, 아니, 수 백 배, 수 천 배는 빠르게 돌아가게 해 줄 겁니다.” 거대해진다. 다가온다. 놈은 내 펀치를 피했다. 아니, 내 펀치는 놈을 때리지 못했다. 놈의 배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내 손을 삼켜버렸다. —내가 이미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오지마……!” “그리고 내 ‘모조’를 당신의 뇌에다 직접 부어넣어 줄 거고요.” 배에 박힌 손을 뽑으려고 애쓰는 사이, 놈의 야구 미트 같은 커다란 손이 내 목을 붙잡았다. 숨이 막힌다. 팔을 꺾어버리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젠장. 벌레. 저리 치워. 벌레가 내 목 뒤에 붙었다. 다리. 목 뒤를 긁는다. 소름. 고통. “자, 깔끔하게 들어갔군요.”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칼라가 당신의 뇌 두 부분을 자극할 겁니다. 뇌 아래 쪽에 있는 그물 모양의 조직인 망상활성계, 그리고 조직과 도파민을 분비하는 A10 회로. 망상활성계는 당신의 뇌로 들어오는 정보 중 필요한 것 만 걸러내고, A10 회로는 도파민을 분비해서 당신이 행동하고, 흥분하고, 사고를 가속시켜 기분좋게 만들어주지요.” “으으…… 으어……." 내 입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놈을 죽여버리겠다는 말이. “지금은 칼라에 깨물린 뇌세포가 마비되어서, 지금 당신은 알츠하이머에 파킨슨씨 병이 한꺼번에 찾아온 상태가 되어버렸죠. 어차피 당신이 종합격투기를 계속 하면 찾아오게 될 상태입니다. 미리 경험하세요. 나쁘지 않죠?” “끄르르르르…….” “이제 칼라가 내 ‘모조’에 반응해 망상 활성계와 A10 회로를 깨물 때 마다, 당신은 지금까지 경험 한 것 보다 몇 만 배는 많은 정보를 경험할 것이고, 코카인이나 크리스털 메스 보다 더 당신의 뇌를 가속시켜 모든 정보를 처리시킬 겁니다. 그 말은 이제 당신은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미친 놈이 뭐라는 거야? “내 친구 간디가 그랬죠. 듣는 것 보다 하는 게 더 빨리 배운다고. 자, 이제 내가 당신 머리에 손을 얹고 내 ‘모조’를 집어넣을 겁니다. 준비 되었나요? 엉, 드, 뚜와! 부왈라!” 충격. 뒷목이 짓눌린다. 두개골 안으로 폭포수처럼 전류가 흘러들어와 스파크를 튀겼다. 번개와 불꽃놀이로 뇌가 산산조각 나는 것 같다. 척추를 타고 전류가 꼬리뼈까지 쏟아져 내려간다. 관능이 세포 하나하나를 태운다. 발기. 사정이 멈추지 않는다. 죽음. 이대로는 죽는다. 모든 게 느리게 흐른다. 눈을 부릅떴다. 시계가 보인다. 초침이 느리게 넘어간다. “무지하게 느리게 느껴지죠, 그렇죠? 내 말 빼고는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죠? 그거 압니까? 시간은 원래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겁니다. 경우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과정이죠. 말하자면 깔때기처럼 시간이 줄어들다가, 당신의 결정으로 현재가 과거가 되는 거랄까요? “그리고 새로 얻은 정보랑 당신의 기억이 서로 차이가 날 때, 그 오차가 바로 인간이 느끼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정보를 많이 인식할 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거죠. 이제 당신은 ‘시간이 보일 겁니다.’ 생생하게 미래가 눈 앞에 펼쳐질 거예요. 별 거 아닙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할 만큼 똑똑해진 것 뿐이죠. 시험해볼까요?” 바론 사메디가 발을 쳐 들었다. 내리 꽂힌다. 순간, 내 눈에는 그의 발이 움직이는 모습과, 가능한 모든 궤적이 생생히 보였다. 눈 앞에 발 여러 개가 겹쳐 보이는 감각. 눈 앞의 다양한 가능성. 짓밟힌다. 피한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피한다. 나는 몸을 움직였다. 발은 내가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이제 더 이상 킬러 샌드백일 필요가 없어요. 오감으로 쏟아져들어오는 정보에 익숙해지기 쉽진 않겠지만 금방 익숙해집니다. 당신은 무하마드 알리처럼 옥타곤 위에서 춤 추게 될 겁니다. 상대의 펀치가 어떻게 날아올지 뻔히 보이는 데다가, 엄청나게 천천히 보일 테니까. 내가 칼라를 통해 모조를 불어넣는 한, 당신은 시간을 지배할 겁니다. 무적이죠. 도핑 테스트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요. 하지만 내 모조를 받지 않으면, 칼라가 당신의 뇌를 다 집어먹을 겁니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마음 껏 내 모조를 즐겨요. 난 이만 가죠. 연락 할게요.” 바론 사메디는 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내 온 몸에 에너지가 흘러 넘친다. 떨림. 신이라도 단숨에 박살낼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곧바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샌드백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다섯 명과 스파링해서 모두 케이오 시키고 나서야 겨우 진정됐다.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난 무적이다. 누구도 날 이길 수 없다. “통역 대신 미국까지 따라온 것 까지는 참았다. 하지만 옥타곤까지 같이 나간다고? 세컨드로? 너 지금 제정신이냐?” “사범님, 이유가 있어요.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냐? 시합 직전까지 락커��에 ���라들어오는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경기장에 굳이 따라가야 하냐? 내가 몇 번이나 저 인간이 싫다고 했잖아! 이번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지? 이번 경기에서 지면 끝장이다! 정말 알고 있는 거냐?” “알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제발—” “선생,” 바론 사메디가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연극 무대에 선 신파조 배우같은 잔뜩 꾸민 말투로. “시합 직전에 선수에게 스트레스를 줘서 되겠습니까? 집중력을 높여 줘야죠. 정말로 선수가 이기길 원한다면, 잠시 자리를 좀 비워주시겠습니까? 코치로서 마지막으로 멘탈 관리를 해야 하거든요.” “너 이 사기꾼 새끼!” “사범님! 그 손 놓으세요!” 사범님은 멱살 잡은 두 주먹을 흔들며 소리질렀다. “정체가 도대체 뭐야? 나더러 나가라고? 감히 네 놈이! 썩 꺼지지 못해!” “선택하게,” 바론 사메디가 내 눈을 쏘아보았다. 보라색 눈동자. “자네 의지로.” 모조가 내 몸으로 들어온다. “정신 차려, 이 놈아! 사기꾼이야, 이 놈은!” 나는 고민했다. 순간. 영원처럼 느껴졌다. “사범님, 잠깐 자리 좀 비워주세요.” “뭐라고?” “잠깐이면 되요.” “너 지금…… 진심이냐?” 침묵. 보라색 눈동자. “예.” “좋아, 네 맘대로 해라! 난 가마!” 사범님이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간다. 죄송해요. 하지만 이기려면 모조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준비 되었나요?" 바론 사메디는 내게 다가왔다. 거대해진다. —왔다. 커다란 손이 내 정수리를 덮는다. 엄지 손가락이 미간을 누른 채 빙글빙글 돌린다. 전류가 정수리와 미간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칼라가 뇌속에서 꿈틀거린다. 온 몸이 제 멋대로 떨린다. 전신의 세포에 모조가 가득 충전되어 견디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다. 모조가 근육에 힘을 불어넣어 준다. 당장에라도 대전 상대인 조지 벨라스케즈를 때려 눕힐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정말로 때려눕혔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수 십 번. 바론 사메디의 안내를 받으며 경기장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똑같은 무수한 미래를 보았다. 옥타곤에 들어가, 선수 소개. 공이 울리고, 글러브 터치, 풋워크. 보인다—가능성이—미래가—점차 줄어든다. 잽이나, 훅이냐. 레그킥이냐. 태클이냐. 잽이냐. 레그킥이냐. 태클이냐. 잽이냐. 태클이냐. 선택의 순간—양자택일. 수 십 번이나 본 미래. —땡. 이제서야, 공이 울린다. 뒤 늦게 ‘현실’이 경기를 시작했다. 지겨워. 글러브 터치—풋워크—그 다음 벌어질 일은 뻔하다. 난 이미 저 놈을 수 십 번이나 다운 시켰다. —충격. 나는 니킥으로 카운터를 넣었다. 카운터는 적중했다. 벨라스케즈의 안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는 순간이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아니, 카운터가 아니다. 카운터는 상대의 공격에 빠르게 반응해 맞받아치는 것, 후(後)의 선(先). 내 공격은 선(先)의 선(先)이다. 내가 본 ‘시간’, 내가 본 ‘사건’은 현실에서 한 번 더 반복됐으니까. 나는 공격보다 먼저 니킥을 날렸다. 반사신경도, 재능도 아니다. 나는 ‘미래’를 봤다. 내가 본 ‘미래’, ‘시간’, ‘가능성’은—‘현실’이 되었고—내가 본 그대로 벨라스케즈의 태클이 들어와—정확히 그 위치에 머리가 놓일 줄 나는 알고 있었다. 시합의 나머지도 내가 본 미래 대로 시간이 움직였다. 그대로 마운트 포지션—파운딩. 레프트. 라이트. 레프트. 라이트. 해머링. 해머링. 엘보. 엘보. 엘보. 엘보.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승리. 몸에 가득 찬 모조가 아직 모자르다고 외친다. 포효. 아직 모자르다. 더. 더. 더 먹을 것을 줘. 쥐어 뜯고, 물어 뜯고, 숨통을 끊을 것을 줘. 시선. 바론 사메디가 내게 웃어보인다. 보라색 미소. 나는 강력한 모조의 현존을 온 몸으로 느끼며, 심판이 승리를 선언하며 들어올리는 손을 더욱 쳐들었다. 조 로건이 인터뷰 하러 다가왔다. “승리—축하—킬러 샌드백—오늘은 전혀—상처 없는 승리—" 내 짧은 영어 실력에 흥분이 겹쳐, 조 로건의 멘트가 토막 나게 들려왔다. 어느 새 통역으로 바론 사메디가 내 곁에 서 있었다. “모조의 맛이 어떤가요? 날 선택하길 잘했죠?” 조 로건의 말을 통역하는 대신, 보라색 거인은 내게 속삭였다. 나는 더 이상 그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모조 보다 짜릿한 승리에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챔피언을 박살내 버리겠다! 앤더슨 존스 기다려라!” 오늘따라 영어가 제대로 튀어나왔다. —관객의 함성.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서늘한 감촉이 등줄기에 흘렀다. —그날 이후. 나는 승승장구했다. 5연승. 언론은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환호성을 질렀고, 내 펀치 하나 하나에 교성을 질렀다. 트레이닝을 게을리 해도 이겼다. 경기에 앞서 인터뷰를 할 때도 어떤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이 올 지가 명확히 보였다. 킬러 샌드백은 과거의 별명이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수 백 배 느린 시간 속에서 다가오는 미래의 가능성을 생생히 체험한다. 바둑 기사가 머릿속으로 수를 읽듯, 수 십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최적의 답을 내 놓는다. 킥복서의 가볍고 조잡한 펀치나 낙무아이의 크게 휘두르는 무에타이 스타일 킥은 미묘한 헤드슬립 만으로 피했다. 궤도가 뻔히 보이는 느린 킥 따위 맞아줄 자비심을 보이지 않는 한 맞을 리가 없다. 복서 출신인 나를 그라운드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는 레슬러나 주지떼로도 있었다. 복싱은 넘어지면 지는 경기다. 굼벵이 보다 느리게 기어오는 태클에 걸려 줄 만큼 시합은 한가하지 않다. 느려. 너무 느려. 뻔해. 모든 것 이. 나는 이제 무적이었다. 권태를 이기지 못하고 일부러 한 대 맞아 줄 정도다. 물론 맞아도 지지 않는다는 미래를 몇 번이고 경험한 뒤 베푸는 은혜다. 갑작스러운 내 승리에 놀란 UFC와 미국의 ‘위원회’는 도핑 테스트를 몇 번이고 가했다. 나오는 것은 알코올 뿐이다. 모조는 절대 오줌으로도, 혈액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관객도, UFC와 미국의 ‘위원회’도 의심을 풀었다. 의심을 풀지 않는 것은 조홍식 사범님 뿐이었다. —저녁. 호화로운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바에는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화려한 옷과 화장, 번쩍이는 장신구, 나른하게 움직이는 교태. 그러나 내 눈에는 보인다. 고급 콜걸. 중년의 위기를 벗어나려 사막의 도시를 찾아와 도박으로 짜릿한 자극을 얻으려다 실패한 왜소한 남자를 먹이로 삼는다. 자신의 매력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 시간을 되돌리려고 애쓰는 멍청한 자들. 그들에게 젊은 날의 과거를 꿈으로 선사하고 대신 돈을 빼앗아 가는 게 그녀들이다. 나는 다른 사냥감을 물색했다. 내일이면 드디어 앤더슨 존스와의 시합. 긴장을 풀 필요가 있다. 앤더슨 존스와의 시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초조해져있었다. 요 며칠 바론 사메디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범님은 트레이닝 하는 내내 잔소리를 해 댔다. 그런 건 평범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뇌를 헤집어 놓은 초인인 내게 그런 건 필요없다. 그 사실을 사범님께 이해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전화벨. “헬로?” “헬로는 무슨. 형. 나야. 준용이.” 설마, 바론 사메디랑 관계가 있는 건가?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축하하려고 그러지. 내일이 챔피언 전이라면서? 응원하려고 전화했지. 거긴 몇시야? 밤인가?” “집어 치우고, 바론 사메디 어디있어?” “바, 뭐?” “장난치지 말고.” “무슨 말 하는 거야?” “바론 사메디. 어디 있냐니까.” “그게 뭐야?” “뭐라고?” “마론 싸맨디 같은 거 몰라. 그게 뭔데?” “네가 그 날 소개해줬잖아? 날 가지고 노는 거냐? 그 놈이 시켰냐?” “그날? 두현이 형이랑 같이 소주 한 잔 한 날? 그때 보고 연락 못 했��는 데 무슨 말이야?” “새벽에 나 찾아왔었잖아!” 너무 큰 소리로, 그것도 외국어로 소리를 쳐서인지 바 안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해 별일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현이 형이랑 본 날 새벽에 네가 찾아와서 도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안다고 바론 사메디를 소개해 줬잖아!” “형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난 그런 적 없어. 미쳤어? 축하해 주려고 전화했더니…….” —전화가 끊겼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과거가 불확실해진다. 경우의 수가 단 하나 뿐인 시간, 물체로 변한 사건, 아물지 않는 흉터. 그것이, 과거인데—바론 사메디를 모른다고? 그럼 그 날의 일은 무엇이지? 그동안 내 곁에서 모조를 부어준 그 보라색 흑인 거한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지? 무언가를 과거로 만들어야만 한다. 확실함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눈 앞에 보이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외로워 보이는 젊은 여자다. 남자가 말 걸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무수히 반복되는 미래’를 보았다. 반복되는 시뮬레이션으로 어색한 영어 문장을 세련되게 바꾸고, 여러 발언의 반응을 검토하여, 최적의 해를 뽑아내어,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끝에, 여자의 빈틈을 찾아, 공격을 피하고, 카운터를 먹여, 다운을 빼앗는다. 엘리베이터. 시간이 너무 느리다. 안절부절하는 기분이 싫다. 불확실한 게 싫다. 숫자가 1에서 2로, 5에서 6으로 넘어가는 시간 동안 이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여 몇 만 번이고 범했다. 완전히 물려버릴 정도였다. 팔에 들러붙어 팔짱 낀 이 여자의 살 냄새가 구역질 났다. 숫자가 다시 돌아갔다. 젠장. 내 방은 19층이다. 1층, 2층, 3층, 4층…… 다시 2층, 3층, 4층, 5층, 6층, 7층…… 다시 3층, 4층, 5층, 6층, 7층, 8층…… 다시 4층, 5층, 6층, 7층, 8층, 9층…… 다시…… 다시…… 다시…… …… “다 왔어요.” 여자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19층. 문이 열리는 사이 백 번은 나갔다. 여자 손목을 잡아 끌며 복도로 향했다. 복도는 끝없이 늘어났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복도가 끝 없이 늘어날 때 마다 허공을 걷어 찼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 한다. 내 문 앞까지 왔다. 열쇠를 여는 데, 꺼내도 꺼내도 열쇠가 다시 주머니에 들어있다. 문을 열었나 열지 않았나, 헷갈린다. 문 안에 조홍식 사범님이 서 있었다. 여자가 놀랐다. 여자의 표정 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가 읽혔다. 아니. 난 셋이서 즐기려고 널 데려온 게 아니야. 내가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사범님이 다가왔다. “겟 로스트.” 사범님의 말에 여자가 허락이라도 받은 양 도망치려 했다. 나는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범님이 내 생활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할 권리는 없다. 붙잡은 손을 끌어당겨, 여자를 품에 앉고 입을 맞췄다. 입술을 마구 빨면서 가슴을 더듬었다. 여자가 몸 안에서 구불텅댔다. 나는 완전히 여자의 중심과 움직임을 제압했다. 사범님 눈 앞에서 범해주겠어. 똑똑히 보라고—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사범님의 말에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내 손에는 누구의 손목도 없었다. 여자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이었다. 복도를 내다보자, 그 여자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여자의 궤적이 동시에 겹쳐 거대한 지네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어서 꺼져. 내 ‘현재’를 점유하지 마. “내—일이—시—합—인—데——여—자—를——끌—어—들—여—?” 사범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소리 마저 길게 늘어나있다. 대답도 귀찮다. 듣기도 귀찮다. 현재가 귀찮다. “배—” 쇼벨훅. 날아든다. “은—” 간장을 노리고 날아든다. “망—” 피하기도 귀찮다. “덕—” 어서 때려. 때리라고. “한—” 때리라고! 때려! 때리란 말이야! 제발 때리고 끝내줘! “놈—!” 느긋하게, 확실하게, 천천히 횡경막으로 파고드는 주먹. 위액이 솟구친다. 불쾌감이 끝 없이 반복된다. 무릎이 꺾인다. 무릎이 땅에 닿으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차라리 생각을 그만두고 싶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다. 생각을. 그만. 두고. 싶다. 생각. 그만. 생각. 그만. 그만……. “엉망이네요." 무릎이 바닥에 닿은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몸을 돌리자 눈 앞에는 둥근 흑인의 둥근 미소가 보였다. “어디 갔었어!” “진정해요. 진정.” “모조를 줘!” “모조?” 사범님이 말했다. “너 이 새끼, 그럴 줄 알았어! 감히 우리 선수한테 약을 줘?!” 사범님이 바론 사메디의 멱살을 잡는다. “썩 사라져!” 사범님의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바론 사메디가 말했다. “그럼 우리 계약은 끊이군요. 더 이상 모조를 줄 필요가 없겠어요.” 둥근 미소. 소름이 끼친다. 안돼. 난 모조가 필요해. 나는 사범님을 끌어내고 가로막았다. “당신 해고야.” “해고?” “그래. 당신 해고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냐? 내일이 챔피언 전이야! 그런데도 나를 해고한다고? 도핑 테스트에 걸리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미스터 조를 처리하지 않으면 모조는 더 이상 없습니다.” “이 놈!” 조홍식 사범님이 바론 사메디에게 달려든다. 모조는 더 이상 없습니다. 미스터 조를 처리하지 않으면. 처리하지 않으면. 쇼벨훅과 함께 사범님을 동양 챔피언으로 만들어줬던 특기, 콕스크류 크로스, 오른손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다. 너무도 느리게. 벌써 수 백 번 똑같은 궤도로 반복되는 펀치. 그 길고 긴 반복 속에서 나는 바론 사메디와 사범님을 저울질했다. 주먹이 중간지점까지 날아들고 있다. —결심. 나는 사범님의 품으로 파고 들면서 몸을 회전시켰다. 팔꿈치 뒤 단단하고 돌출된 부분이 원심력을 받아 예리하게 공간을 베며, 경동맥을 파고든다. 기분 나쁜 감촉. 뇌의 충격을 받은 사범님이 무너져내린다. 지독할 정도로 느린 슬로모션. 눈을 하얗게 뒤집고 있는 얼굴에는 생기가 전부 빠져나가 있었다. 평소에도 고혈압으로 약을 먹던 사범님. 나를 훌륭한 복서로 만들어 줬던 사범님.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사범님. —나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내 미래를 위해, 사범님의 미래를 빼앗았다. “잘 했습니다. 상으로 모조를 주지요.” 은총. 미래가 내게로 온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바론 사메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범님은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코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몸이 들썩이는 모습을 보아 아직 죽지 않았다. 눈물. 나는 프론트에 전화했다. “프론트, 구급차를 불러줘요. 어서.” —락커룸. 시합이 곧 벌어진다. 어젯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UFC 스태프가 사범님이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아임 소리” 라고 무기질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스태프 멤버들은 사정을 몰라 묵묵히 밴디지를 감아줄 뿐이었다. 바론 사메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상관 없다. 모조는 충분히 받았다. 앤더슨 존스는 내 적이 아니다. 사범님이 네놈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다. 네 놈을 사범님과 똑같은 처지로 만들어주마. 그러면 챔피언 벨트를 사범님께 바칠 것이다. 모든 것은 사범님 덕분이니까. 옥타곤으로 향하는 동안, 앤더슨 존스가 움직일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다. 무수히 시간을 반복했다. 그런데 거듭 시뮬레이션 해도 내가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이 시간을 더 길게 느끼게 만들었다. 이미 빅뱅에서 빅크런치를 수 십 번 맛본 기분인데도. 옥타곤 안에 들어갔는데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경기가 시작했는데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경기가 시작하자, 일단은 한 걸음 앞의 미래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앤더슨 존스 특유의 자세. 유연한 움직임. 무릎 관절을 향해 날아오는 옆차기, 오블릭 킥이라고 했던가? 확실하게 피하기는 했지만,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펀치의 제공권에서 앤더슨 존스가 벗어나 버린다. 나는 공격의 궤도를 피해 접근했고, 쇼벨훅을 먹였다. 그러자 풋워크를 이용해 거리를 물린다. 슬로 모션으로 도망치는데도, 따라가는 데 한참이나 걸리는 데다가, 이 느린 시간 속에서도 나 보다 조금 더 빠르다. 공격이 날아든다. 모두 적절하게 피한다. 서로 허공만 두들겨대는 시간. 10 라운드는 지난 것 같다. 그러나 시계는 점멸하는 붉은 문자로 아직 1 라운드 초반이라고 말하며, 내 감각을 배반한다. 초조함. 나는 오블릭 킥을 피하면서 도약해 슈퍼맨 펀치를 날렸다. 단숨에—내게는 3년처럼 느껴진—거리를 좁혔다. 공격은 실패했다. 하지만 선(先)은 내가 잡고 있다. 곧바로, 쇼벨훅— 손에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릎 관절에 충격이 전해져온다. 나는 아직 오블릭 킥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슈퍼맨 펀치를 시도하는 와중에 쇼벨훅을 날려버린 나를 앤더슨 존스가 의아해하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 그러나 곧바로 카운터 펀치가 날아들어온다. 오블릭 킥의 충격 탓에 피할 수 가 없다. 타이밍을 맞춰서 고개를 돌려, 펀치를 흘려낼 마음을 먹었다. 와라. 어서 와라. 오라고. —충격. 공격은 이미 내 턱에 꽂혔다.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무릎이 꺾인다. 젠장. 태클이 들어온다. 명령계통을 잃은 오합지졸처럼 신경계가 내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근육이 제 멋대로 풀려버렸다. 중력이 나를 천천히 늪으로 끌어들였다……. —15년. 그동안 천천히 나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직 1라운드 중반이다.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30년. 내 위로 앤더슨 존스가 덮쳐온다. 그 사이 나는 무한히 반복되는 ‘현재’ 속에서 얻어맞고 패배했다. —120년. 앤더슨 존스가 마운트 포지션을 취한다. 그 사이 나는 무한히 반복되는 ‘현재’ 속에서 얻어맞고 패배했다. -1842년. 파운딩이 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다. 그 사이 나는 나는 무한히 반복되는 ‘현재’ 속에서 얻어맞고 패배했다. -XXXXXXX년? 가능한 모든 공격이 한꺼번에 겹쳐 나를 항한다. 세상이 모두 슬로우 모션에 랙 걸린 것처럼 움직인다. 동시에 상대의 파운딩이 날아온다. 동시에 상대의 엘보우가 완전히 정지한 남자 손지상 -18300자. 2016-01-20 01:48 초고 완성. “형, 마셔도 돼요? 감량은?” “괜찮아.” 마시지 않고는 못 버틸 것 같으니까— 나는 잔을 내밀고 소주를 따라주는 최준용에게 꽉 채우라고 했다. 최준용이 술을 따르는 몸짓은 예의 바르기가 그지 없다. 몇년 전 같은 복싱 도장에서 스파링 해 줄 때만 해도 천지분간 못하는 놈이었는데, 건달이 되고 나서는 많이 배웠는지 동작 만큼은 정중하다. 고깃집은 언제나 시끄럽다. 대화가 불가능한 공간. 그래서 더 좋다. 다들 별 의미없는 이야기 하면서 싸구려 고기와 맛 없는 술을 들이키기만 하면 되니까. 배는 부르고 시간은 간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목살 삼인분을 주문한 이두현 형이 잔을 치켜들었다. “미래의 UFC 챔피언을 위해 건배하자!” 이 형은 변한 게 없다. 과거 나랑 같이 권투를 했다가, 지금은 그만 두고 퍼스널 트레이너 준비를 한단다. 변함없이 착하고, 변함없이 얄팍하다. 늙은이들이나 하는 삼행시로 건배사를 하겠다는 것을 말리고, 잔을 들었다. “위하여!” 술잔을 부딪히고 각자 잔을 비우는 동안에도 머리가 아파왔다. 병원에서 결과를 보자마자 두 사람에게 전화했다. 그나마 한잔 하자고 부를 사람이다. 복싱을 그만두고 종합격투기로 전향할 때, 별로 좋게 헤어지질 못했다. 나는 언제나 그렇다.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고 헤어진다. 같은 학교 친구, 도장 친구. 여자친구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 두현이 형이 감개무량한 모양이다. 아까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도 UFC에 진출한 선수가 몇이나 되냐? 그 중 한 명이 된 거 아냐! 잘했다. 정말 잘했어.” 최준용은 적당히 응답하며 고기를 굽고 있다. 나는 대꾸하고 싶지 않아 한 점 두 점 입에 가져가기 바빴다. “옛날 부터 넌 맷집으로 버티는 인파이터였는데, 그게 종합 격투기에 잘 맞아 떨어진 거지. 요새 복싱은 죄다 메이웨더 마냥 아웃복싱이잖냐? 그래가지고 관객들이 좋아하겠냐고.” “근데 미국 애들 덩치 엄청 크던데. 다들 스테로이드 하는 거 아니에요?” “소문은 있는데. 모르지. 도핑에는 안 걸리니까.” “걸리면 가차 없잖아요. 미국 애들 가차 없던데.” “메이저리그도 그렇잖냐. 스테로이드 썼다고 바로 명예의 전당에서 내리고, 성적이 안 좋아도 바로 방출하고.” 나이를 뒷구멍으로 쳐먹었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준용이가 화제를 돌린다. “스테로이드 쓰면 완전히 달라지던데. 우리 ‘회사’에도 원래 개멸치였는데, 스테로이드 맞고 바로 등빨 좋아진 애가 있거든요. 몸이 그냥 막 불더라고. 그런 애를 약 안 먹고 어떻게 이기겠어. 그런 애들이랑 인파이팅 하려면 진짜 힘들 거 같은데.” 손이 조금 떨린다. “정찬성이라고 맷집 좋은 선수 또 있지 않냐?” “코리안 좀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별명 뭐예요?” “킬러 샌드백.” 내 대답에 최준용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생각해도 웃긴 별명이다. 미국 놈들은 사람 우습게 만드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내가 경기 중에 엉망진창으로 얻어 터지면서도 난타전 끝에 승리하는 모습을 두고 붙인 별명이다. 사람들은 화끈한 경기라고 칭찬한다. 같은 업계 사람들은 내 실력 부족을 금새 눈치챈다. 나는 반 쯤 남은 소주를 들이키고, 최준용에게 잔을 내밀었다. “진짜 드셔도 되요?” 나는 말 없이 잔을 흔들었다. 받자마자, 한 번 더 들이켰다. “형 뭐 고민 있어요?” 눈치 빠른 놈. “아냐 없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요.” 나 혼자 소주 다섯 병을 비우고 나서야, 자리는 파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서 알려준 결과를 곱씹었다. —메이저리그도 성적 안 좋으면 바로 방출하잖아. 두현이 형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울렁이는 속은 금방이라도 솟구쳐 오를 것 같다. UFC는 보통 삼 세 번 기회를 준다. 연패하면, 곧바로 방출이다. 그리고 난 지금 4연패 중이다. 경기가 화끈하다는 이유로 기회를 더 주고 있기는 하지만, 위험하다. 여기까지 오려고 일본의 군소단체를 전전했다. 죽어라 영어공부를 했다. 미국의 주짓수 도장을 기웃거리다가 얻은 인맥으로 미국 대회에 나갔다. 여기까지 왔다. 기회가 멀어지려 하고 있다. 버텨야 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끝나지 않는 시간 내내 온 몸으로 공격을 받아내면 된다……. 택시에서 내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리 내가 바란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고, 되돌릴 수 없다. 이미 굳어버린 파이팅 스타일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선고된 의학적 결과도 바꿀 수 없다. 쉽게 바꿀 수 있는 거라고는 현관문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다. 기계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삑삑거리는 전자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불이 켜져있다? 사범님? 깜짝 놀란 내 배로 주먹이 꽂혔다. 라이트 보디블로, 짧게 끊어 친 예리한 쇼벨훅이 대각선으로 태양신경총을 찔러 올렸다. 횡경막이 제 멋대로 떨리더니 위에 가득 담겨있던 알코올과 덜 소화된 고기가 솟구쳐올랐다. 한참 구토를 하고 나서야 어지러웠던 머리가 정리됐다. 다행히 무릎이 꺾이지는 않았다. 다운이 아니다. “지금같은 중요한 시기에 술이 목을 넘어가디?” “사범님…….” “내가 아직 네 코치긴 한 모양이구나, 이 배은망덕한 새끼. 네가 그러고도 무도인이냐? 시합이 얼마 남았다고 술을 마셔!" 사범님은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싱크대에서 잔에 수돗물을 채워 건넸다. 내가 받아들고 입을 헹구는 사이, 사범님은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배가 나오고 손을 조금 떨고 있어도, 여전히 펀치는 매섭고 정확하다. “이번에 지면 퇴출인 걸 알고서 마신 거냐? 자포자기냐? 이 조홍식이가 널 그렇게 가르쳤냐?” “사범님……, 전 미국 안 가겠습니다.” “개처럼 꼬리 말고 도망치겠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병원에서—” “병원? 언제 다녀왔어? 그걸 나 몰래 다녀왔냐!” “중요한 건 언제가 아니라 결과잖아요!” “뭐라던데?” “위험하답니다. 너무 많이 맞아서, 각막도 뇌도 너덜너덜하데요.” 사범님이 입을 다물었다. 망막박리. 사범님이 복싱을 그만 두게 된 것도 너무 많이 맞아서 눈의 망막이 벗겨지고, 뇌가 망가져 신경이 엉망진창이 되어 손을 떨기 시작해서 였다. 레슬러의 양배추같이 망가진 귀나 복서의 연골이 뭉개진 코처럼 사투를 벌여온 역사가 담긴 눈에 보이는 훈장이 아니라, 링 위로 다시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투명한 족쇄. “어차피……,” 어렵게 입을 연 사범님의 얼굴이 억지로 누그러져있다. 한 라운드만 더 버티라고 사탕발림 할 때 표정.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그 방법으로 망가졌는데도. “이번에 지면 퇴출 아니냐.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해보자.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범님은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방금 전에 내 배에 강렬한 주먹을 박아넣었던 사람이다.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형. 형.”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까지 나니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어둑어둑한 걸로 보아 새벽인 모양이다. 쇼벨훅이 알코올을 채 빼내지 못했는지 발을 내딛을 때 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사범님도 많이 늙은 모양이다. 문을 여니, 최준용이다. 기계적으로 웃는 얼굴이 짜증스럽다. 눈치 빠른 놈인 줄 알았는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 “형이 어제 알려줬잖아."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들어온다. 거부할 명분도 없어 그대로 문을 닫았다. 침대에 앉은 준용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영어 책이 왜 이리 많아, 집 좋네, 하고 마음에도 없는 몇 마디 하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 도핑 안 걸리고 약 할 수 있으면 할래?” “뭐?” 당연한 소리다. 안 걸리고 약을 쓸 수 있다면 거절 할 사람이 있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계에서 남들 다 하는 걸 안 하면 내가 손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걸어온 제안을 덥썩 물기에 나는 너무 많이 당해왔다. “일단 이거 부터 마셔.” 준용이가 앰플을 건넸다. 약국에서 파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섣불리 받아마셨다가는 준용이 페이스에 말린다. 싸움은 박자다. 남의 박자에 말려들어가면 진다. “속셈이 뭐야.” “뭐기는. 그냥 유명인 인맥 덕 좀 보려는 거지.” “나가.” “오해하지 마. 판매 루트 뚫어달라거나 하는 치사한 부탁 하려는 게 아니니까. 일단 그거 부터 좀 마셔. 숙취는 풀고 이야기를 하든 말든 해야지, 안 그래?” 그 말을 거절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아프다. 앰플 속 액체는 의외로 달았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탄산수 캔을 꺼냈다. “이야, 이젠 이런 것도 먹네?” 준용이가 탄산수 캔을 따며 말했다. 나는 탄산수로 입을 씻어 넘겼다. 가벼운 트림이 올라온다. “본론이 뭐야?” “아는 분이 형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그 분이 약을 공급해줄 거야. 대신 형은 그 분을 고용하는 거지.” “고용?” “세컨드로.” “뭐 하던 사람인데?” “외국인이야. 딱히 운동 하거나 한 사람은 아닌데. 그 외 분디니 같은 사람이야.” “분디니?” “분디니 브라운. 무하마드 알리 트레이너 하던 사람 있잖아.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그 사람도 복싱은 하나도 모르는 데도 알리 트레이너였어. 뭐랄까, 응원단장? 요새 말로 하면 멘탈 관리하는 사람이랄까?” 건달 되더니 많이 똑똑해졌군. “난 그런 사람 필요없어. 나한텐 트레이너가 있고, 날 응원하는 사람도 있어.” “약은 필요하잖아. 안 그래?” 침묵. “필요 없어.” “형도 알잖아. 가끔씩 막판에 몰린 복서나 야구선수가 뽕 맞고 링에 오르는 거. 날아오는 공 실밥도 보이고, 글러브 찢어진 데도 다 보인다잖아. 내가 말하는 약은 그냥 갑빠 키우는 스테로이드만 이야기하는 게 아냐. ‘비타민’도 포함하는 거라고. 게다가 도핑에도 안 걸리고.” “그런 약이 어디있어? 너 이 새끼, 나 뽕쟁이로 만들어서 한 몫 챙기려나 본데—” “내가 씨발 아무리 건달이라도 그런 짓은 안해, 형. 그리고 솔직히 이제 무리 아냐? 맷집으로 버티는 것도? 전에 보니까 손도 좀 떠는 것 같고 그런데? 병원에서 뭐라 안해?” 카운터 펀치. 준용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로 바로 보낼게. 외국인이지만 한국말 잘 하셔. 졸린 것 같은데 푹 쉬고, 나 갈게.” 내가 거부하려고 일어나자, 준용이는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넉 다운!” 나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텐 카운트!”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템플에 강렬한 훅을 맞은 것 같다. 나는 더 거절할 의지도 잊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카운트가 사라지는 메아리처럼 귓속에서 울렸다. 1…… 2…… 3…… 4…… …… “세븐!” 반사적으로 눈이 열렸다. “에잇!” 몸이 저절로 일어난다. 종합격투기로 전향하고 난 뒤에도 복서 시절의 과거가 온 몸에 인이 박혀있나보다. 상황을 파악하기에 시간이 걸렸다. 방금 전 준용이를 만났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지금 눈을 뜬 이 상황도 꿈처럼 느껴졌다. 카운트를 한 사람은 누구지? 지금 몇시지? “안녕하시오.” 경쾌한 목소리. “정신 차렸소? 미래의 챔피언? 아니, 이미 챔피언이 된 거나 다름 없지. 숙취는 좀 어때요? 마셔도 되겠소?”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 멋대로 냉장고를 열었다. 그는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흑인이었고, 몸에 걸친 것은 온통 보라색이었다. 위 아래로 보라색 츄리닝을 입고 있었고, 냉장고 속에 머리를 쳐박고 뒤지는 사이로 얼핏 보이는 뉴에라 캡도 보라색이었다. 미친 놈인가? 놈은 탄산수 캔을 내게 던졌다. 엉겹결에 받아들기는 했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을 파악하느라 캔을 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상한 놈이면 캔 채로 던져서 쓰러뜨려야 한다. 함부로 무기를 낭비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미친 놈에게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폭탄처럼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섬세하게 다루어야 해체할 수 있다. “누구…… 십니까?” “아! 난 바론 사메디입니다!” “바론?” “예명 같은 거죠. 준용씨에게 말씀 못 들었습니까?” “그럼 당신이 그…….” “네. 트레이너죠. 정확히 말하자면 코치지만요.” “코치?” “한국에서는 코치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고 있어요. 원래 코치라는 말은 ‘플레이어’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 정신상태를 유지하도록 돕는 사람이죠. 사람은 누구나 맹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린 그 맹점을 벗어나게 해 주죠.” “그럼 난 이미 코치가 있으니까, 꺼져! 이 방엔 어떻게 들어왔어?” “당신에겐 제대로 된 코치가 필요해요. 분디니 브라운처럼 당신을 완전히 믿어줄 사람이 필요하죠. 다 압니다. 뇌에 문제가 생겼죠? 당신 트레이너는 무작정 맞아도 버티라고 시켰을 겁니다. 하! 그런 정신론으론 아무 것도 못해요. 근성이라고 하나요? 근성이 있으면 왜 굳이 맞습니까? 피하는 근성을 발휘하면 되지. 그래서 일본이 우리 미국을 못 이겼던 겁니다.” “당신 미국인이야?” “중요한 건 미국이냐 중국이냐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당신에게는 ‘모조’가 필요해요.” “‘모조’……?” “한국말로는 뭐라 해야 할지…… 마법이 적당하겠군요.” “미쳤군. 내가 보기엔 뇌가 맛 간 건 너다, 이 미친놈. 마법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져! 안 그러면 내 손에 박살 날 줄 알아!” “준용씨에게 도핑에 걸리지 않는 약물이 필요하다고 했다면서요?” 침묵. 당장에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다가가니, 생각보다 바론 사메디라는 이 미친 작자의 덩치가 크다. 아니, 커졌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정말로 내 뇌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 눈에 이 미친 흑인이 점점 더 커져갔다. 눈 앞이 빙빙 돈다. “왜 그러십니까? 덤빌 생각 아니었나요?” 말도 안돼! 삼 미터가 넘어 보인다. 내 머리가 완전히 맛이 간 건가?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하긴, 선수가 함부로 민간인을 때려서야 큰일날 일이지요. UFC 단체에 걸리면 바로 선수등록이 정지될 지도 모르니까. 그렇죠? 당신은 내 ‘코칭’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내 ‘모조’도요.” “오, 오지마!” “뭘 겁내십니까? 이걸 겁내십니까?” 놈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손바닥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수 십개는 되어 보이는 다리를 꿈틀거리는 커다란 벌레가 튀어나왔다. 지네처럼 생긴 그 벌레에서 끈적이는 체액이 뚝뚝 떨어졌다. 구역질. “1988년에 나온 영화 ‘브레인 데미지’라고 혹시 본 적 있습니까? 싸구려 코미디 호러 영화죠. 그 영화를 보면 말입니다. 목덜미에 붙어서 사람의 뇌를 먹는 기생충이 나옵니다. 기생하는 대신 뇌를 조종해서 기분 좋은 환각을 느끼게 해주지요. ” 거대해진다. 다가온다. “이것도 비슷한 겁니다. 이 녀석 이름은 ‘칼라’, 당신 머릿속에 들어가, 당신의 뇌를 수 십 배, 아니, 수 백 배, 수 천 배는 빠르게 돌아가게 해 줄 겁니다.” 거대해진다. 다가온다. 놈은 내 펀치를 피했다. 아니, 내 펀치는 놈을 때리지 못했다. 놈의 배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내 손을 삼켜버렸다. —내가 이미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오지마……!” “그리고 내 ‘모조’를 당신의 뇌에다 직접 부어넣어 줄 거고요.” 배에 박힌 손을 뽑으려고 애쓰는 사이, 놈의 야구 미트 같은 커다란 손이 내 목을 붙잡았다. 숨이 막힌다. 팔을 꺾어버리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젠장. 벌레. 저리 치워. 벌레가 내 목 뒤에 붙었다. 다리. 목 뒤를 긁는다. 소름. 고통. “자, 깔끔하게 들어갔군요.”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칼라가 당신의 뇌 두 부분을 자극할 겁니다. 뇌 아래 쪽에 있는 그물 모양의 조직인 망상활성계, 그리고 조직과 도파민을 분비하는 A10 회로. 망상활성계는 당신의 뇌로 들어오는 정보 중 필요한 것 만 걸러내고, A10 회로는 도파민을 분비해서 당신이 행동하고, 흥분하고, 사고를 가속시켜 기분좋게 만들어주지요.” “으으…… 으어……." 내 입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놈을 죽여버리겠다는 말이. “지금은 칼라에 깨물린 뇌세포가 마비되어서, 지금 당신은 알츠하이머에 파킨슨씨 병이 한꺼번에 찾아온 상태가 되어버렸죠. 어차피 당신이 종합격투기를 계속 하면 찾아오게 될 상태입니다. 미리 경험하세요. 나쁘지 않죠?” “끄르르르르…….” “이제 칼라가 내 ‘모조’에 반응해 망상 활성계와 A10 회로를 깨물 때 마다, 당신은 지금까지 경험 한 것 보다 몇 만 배는 많은 정보를 경험할 것이고, 코카인이나 크리스털 메스 보다 더 당신의 뇌를 가속시켜 모든 정보를 처리시킬 겁니다. 그 말은 이제 당신은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미친 놈이 뭐라는 거야? “내 친구 간디가 그랬죠. 듣는 것 보다 하는 게 더 빨리 배운다고. 자, 이제 내가 당신 머리에 손을 얹고 내 ‘모조’를 집어넣을 겁니다. 준비 되었나요? 엉, 드, 뚜와! 부왈라!” 충격. 뒷목이 짓눌린다. 두개골 안으로 폭포수처럼 전류가 흘러들어와 스파크를 튀겼다. 번개와 불꽃놀이로 뇌가 산산조각 나는 것 같다. 척추를 타고 전류가 꼬리뼈까지 쏟아져 내려간다. 관능이 세포 하나하나를 태운다. 발기. 사정이 멈추지 않는다. 죽음. 이대로는 죽는다. 모든 게 느리게 흐른다. 눈을 부릅떴다. 시계가 보인다. 초침이 느리게 넘어간다. “무지하게 느리게 느껴지죠, 그렇죠? 내 말 빼고는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죠? 그거 압니까? 시간은 원래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겁니다. 경우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과정이죠. 말하자면 깔때기처럼 시간이 줄어들다가, 당신의 결정으로 현재가 과거가 되는 거랄까요? “그리고 새로 얻은 정보랑 당신의 기억이 서로 차이가 날 때, 그 오차가 바로 인간이 느끼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정보를 많이 인식할 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거죠. 이제 당신은 ‘시간이 보일 겁니다.’ 생생하게 미래가 눈 앞에 펼쳐질 거예요. 별 거 아닙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할 만큼 똑똑해진 것 뿐이죠. 시험해볼까요?” 바론 사메디가 발을 쳐 들었다. 내리 꽂힌다. 순간, 내 눈에는 그의 발이 움직이는 모습과, 가능한 모든 궤적이 생생히 보였다. 눈 앞에 발 여러 개가 겹쳐 보이는 감각. 눈 앞의 다양한 가능성. 짓밟힌다. 피한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피한다. 나는 몸을 움직였다. 발은 내가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이제 더 이상 킬러 샌드백일 필요가 없어요. 오감으로 쏟아져들어오는 정보에 익숙해지기 쉽진 않겠지만 금방 익숙해집니다. 당신은 무하마드 알리처럼 옥타곤 위에서 춤 추게 될 겁니다. 상대의 펀치가 어떻게 날아올지 뻔히 보이는 데다가, 엄청나게 천천히 보일 테니까. 내가 칼라를 통해 모조를 불어넣는 한, 당신은 시간을 지배할 겁니다. 무적이죠. 도핑 테스트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요. 하지만 내 모조를 받지 않으면, 칼라가 당신의 뇌를 다 집어먹을 겁니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마음 껏 내 모조를 즐겨요. 난 이만 가죠. 연락 할게요.” 바론 사메디는 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내 온 몸에 에너지가 흘러 넘친다. 떨림. 신이라도 단숨에 박살낼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곧바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샌드백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다섯 명과 스파링해서 모두 케이오 시키고 나서야 겨우 진정됐다.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난 무적이다. 누구도 날 이길 수 없다. “통역 대신 미국까지 따라온 것 까지는 참았다. 하지만 옥타곤까지 같이 나간다고? 세컨드로? 너 지금 제정신이냐?” “사범님, 이유가 있어요.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냐? 시합 직전까지 락커룸에 따라들어오는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경기장에 굳이 따라가야 하냐? 내가 몇 번이나 저 인간이 싫다고 했잖아! 이번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지? 이번 경기에서 지면 끝장이다! 정말 알고 있는 거냐?” “알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제발—” “선생,” 바론 사메디가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연극 무대에 선 신파조 배우같은 잔뜩 꾸민 말투로. “시합 직전에 선수에게 스트레스를 줘서 되겠습니까? 집중력을 높여 줘야죠. 정말로 선수가 이기길 원한다면, 잠시 자리를 좀 비워주시겠습니까? 코치로서 마지막으로 멘탈 관리를 해야 하거든요.” “너 이 사기꾼 새끼!” “사범님! 그 손 놓으세요!” 사범님은 멱살 잡은 두 주먹을 흔들며 소리질렀다. “정체가 도대체 뭐야? 나더러 나가라고? 감히 네 놈이! 썩 꺼지지 못해!” “선택하게,” 바론 사메디가 내 눈을 쏘아보았다. 보라색 눈동자. “자네 의지로.” 모조가 내 몸으로 들어온다. “정신 차려, 이 놈아! 사기꾼이야, 이 놈은!” 나는 고민했다. 순간. 영원처럼 느껴졌다. “사범님, 잠깐 자리 좀 비워주세요.” “뭐라고?” “잠깐이면 되요.” “너 지금…… 진심이냐?” 침묵. 보라색 눈동자. “예.” “좋아, 네 맘대로 해라! 난 가마!” 사범님이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간다. 죄송해요. 하지만 이기려면 모조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준비 되었나요?" 바론 사메디는 내게 다가왔다. 거대해진다. —왔다. 커다란 손이 내 정수리를 덮는다. 엄지 손가락이 미간을 누른 채 빙글빙글 돌린다. 전류가 정수리와 미간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칼라가 뇌속에서 꿈틀거린다. 온 몸이 제 멋대로 떨린다. 전신의 세포에 모조가 가득 충전되어 견디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다. 모조가 근육에 힘을 불어넣어 준다. 당장에라도 대전 상대인 조지 벨라스케즈를 때려 눕힐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정말로 때려눕혔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수 십 번. 바론 사메디의 안내를 받으며 경기장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똑같은 무수한 미래를 보았다. 옥타곤에 들어가, 선수 소개. 공이 울리고, 글러브 터치, 풋워크. 보인다—가능성이—미래가—점차 줄어든다. 잽이나, 훅이냐. 레그킥이냐. 태클이냐. 잽이냐. 레그킥이냐. 태클이냐. 잽이냐. 태클이냐. 선택의 순간—양자택일. 수 십 번이나 본 미래. —땡. 이제서야, 공이 울린다. 뒤 늦게 ‘현실’이 경기를 시작했다. 지겨워. 글러브 터치—풋워크—그 다음 벌어질 일은 뻔하다. 난 이미 저 놈을 수 십 번이나 다운 시켰다. —충격. 나는 니킥으로 카운터를 넣었다. 카운터는 적중했다. 벨라스케즈의 안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는 순간이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아니, 카운터가 아니다. 카운터는 상대의 공격에 빠르게 반응해 맞받아치는 것, 후(後)의 선(先). 내 공격은 선(先)의 선(先)이다. 내가 본 ‘시간’, 내가 본 ‘사건’은 현실에서 한 번 더 반복됐으니까. 나는 공격보다 먼저 니킥을 날렸다. 반사신경도, 재능도 아니다. 나는 ‘미래’를 봤다. 내가 본 ‘미래’, ‘시간’, ‘가능성’은—‘현실’이 되었고—내가 본 그대로 벨라스케즈의 태클이 들어와—정확히 그 위치에 머리가 놓일 줄 나는 알고 있었다. 시합의 나머지도 내가 본 미래 대로 시간이 움직였다. 그대로 마운트 포지션—파운딩. 레프트. 라이트. 레프트. 라이트. 해머링. 해머링. 엘보. 엘보. 엘보. 엘보.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승리. 몸에 가득 찬 모조가 아직 모자르다고 외친다. 포효. 아직 모자르다. 더. 더. 더 먹을 것을 줘. 쥐어 뜯고, 물어 뜯고, 숨통을 끊을 것을 줘. 시선. 바론 사메디가 내게 웃어보인다. 보라색 미소. 나는 강력한 모조의 현존을 온 몸으로 느끼며, 심판이 승리를 선언하며 들어올리는 손을 더욱 쳐들었다. 조 로건이 인터뷰 하러 다가왔다. “승리—축하—킬러 샌드백—오늘은 전혀—상처 없는 승리—" 내 짧은 영어 실력에 흥분이 겹쳐, 조 로건의 멘트가 토막 나게 들려왔다. 어느 새 통역으로 바론 사메디가 내 곁에 서 있었다. “모조의 맛이 어떤가요? 날 선택하길 잘했죠?” 조 로건의 말을 통역하는 대신, 보라색 거인은 내게 속삭였다. 나는 더 이상 그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모조 보다 짜릿한 승리에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챔피언을 박살내 버리겠다! 앤더슨 존스 기다려라!” 오늘따라 영어가 제대로 튀어나왔다. —관객의 함성.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서늘한 감촉이 등줄기에 흘렀다. —그날 이후. 나는 승승장구했다. 5연승. 언론은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환호성을 질렀고, 내 펀치 하나 하나에 교성을 질렀다. 트레이닝을 게을리 해도 이겼다. 경기에 앞서 인터뷰를 할 때도 어떤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이 올 지가 명확히 보였다. 킬러 샌드백은 과거의 별명이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수 백 배 느린 시간 속에서 다가오는 미래의 가능성을 생생히 체험한다. 바둑 기사가 머릿속으로 수를 읽듯, 수 십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최적의 답을 내 놓는다. 킥복서의 가볍고 조잡한 펀치나 낙무아이의 크게 휘두르는 무에타이 스타일 킥은 미묘한 헤드슬립 만으로 피했다. 궤도가 뻔히 보이는 느린 킥 따위 맞아줄 자비심을 보이지 않는 한 맞을 리가 없다. 복서 출신인 나를 그라운드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는 레슬러나 주지떼로도 있었다. 복싱은 넘어지면 지는 경기다. 굼벵이 보다 느리게 기어오는 태클에 걸려 줄 만큼 시합은 한가하지 않다. 느려. 너무 느려. 뻔해. 모든 것 이. 나는 이제 무적이었다. 권태를 이기지 못하고 일부러 한 대 맞아 줄 정도다. 물론 맞아도 지지 않는다는 미래를 몇 번이고 경험한 뒤 베푸는 은혜다. 갑작스러운 내 승리에 놀란 UFC와 미국의 ‘위원회’는 도핑 테스트를 몇 번이고 가했다. 나오는 것은 알코올 뿐이다. 모조는 절대 오줌으로도, 혈액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관객도, UFC와 미국의 ‘위원회’도 의심을 풀었다. 의심을 풀지 않는 것은 조홍식 사범님 뿐이었다. —저녁. 호화로운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바에는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화려한 옷과 화장, 번쩍이는 장신구, 나른하게 움직이는 교태. 그러나 내 눈에는 보인다. 고급 콜걸. 중년의 위기를 벗어나려 사막의 도시를 찾아와 도박으로 짜릿한 자극을 얻으려다 실패한 왜소한 남자를 먹이로 삼는다. 자신의 매력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 시간을 되돌리려고 애쓰는 멍청한 자들. 그들에게 젊은 날의 과거를 꿈으로 선사하고 대신 돈을 빼앗아 가는 게 그녀들이다. 나는 다른 사냥감을 물색했다. 내일이면 드디어 앤더슨 존스와의 시합. 긴장을 풀 필요가 있다. 앤더슨 존스와의 시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초조해져있었다. 요 며칠 바론 사메디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범님은 트레이닝 하는 내내 잔소리를 해 댔다. 그런 건 평범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뇌를 헤집어 놓은 초인인 내게 그런 건 필요없다. 그 사실을 사범님께 이해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전화벨. “헬로?” “헬로는 무슨. 형. 나야. 준용이.” 설마, 바론 사메디랑 관계가 있는 건가?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축하하려고 그러지. 내일이 챔피언 전이라면서? 응원하려고 전화했지. 거긴 몇시야? 밤인가?” “집어 치우고, 바론 사메디 어디있어?” “바, 뭐?” “장난치지 말고.” “무슨 말 하는 거야?” “바론 사메디. 어디 있냐니까.” “그게 뭐야?” “뭐라고?” “마론 싸맨디 같은 거 몰라. 그게 뭔데?” “네가 그 날 소개해줬잖아? 날 가지고 노는 거냐? 그 놈이 시켰냐?” “그날? 두현이 형이랑 같이 소주 한 잔 한 날? 그때 보고 연락 못 했었는 데 무슨 말이야?” “새벽에 나 찾아왔었잖아!” 너무 큰 소리로, 그것도 외국어로 소리를 쳐서인지 바 안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해 별일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현이 형이랑 본 날 새벽에 네가 찾아와서 도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안다고 바론 사메디를 소개해 줬잖아!” “형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난 그런 적 없어. 미쳤어? 축하해 주려고 전화했더니…….” —전화가 끊겼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과거가 불확실해진다. 경우의 수가 단 하나 뿐인 시간, 물체로 변한 사건, 아물지 않는 흉터. 그것이, 과거인데—바론 사메디를 모른다고? 그럼 그 날의 일은 무엇이지? 그동안 내 곁에서 모조를 부어준 그 보라색 흑인 거한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지? 무언가를 과거로 만들어야만 한다. 확실함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눈 앞에 보이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외로워 보이는 젊은 여자다. 남자가 말 걸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무수히 반복되는 미래’를 보았다. 반복되는 시뮬레이션으로 어색한 영어 문장을 세련되게 바꾸고, 여러 발언의 반응을 검토하여, 최적의 해를 뽑아내어,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끝에, 여자의 빈틈을 찾아, 공격을 피하고, 카운터를 먹여, 다운을 빼앗는다. 엘리베이터. 시간이 너무 느리다. 안절부절하는 기분이 싫다. 불확실한 게 싫다. 숫자가 1에서 2로, 5에서 6으로 넘어가는 시간 동안 이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여 몇 만 번이고 범했다. 완전히 물려버릴 정도였다. 팔에 들러붙어 팔짱 낀 이 여자의 살 냄새가 구역질 났다. 숫자가 다시 돌아갔다. 젠장. 내 방은 19층이다. 1층, 2층, 3층, 4층…… 다시 2층, 3층, 4층, 5층, 6층, 7층…… 다시 3층, 4층, 5층, 6층, 7층, 8층…… 다시 4층, 5층, 6층, 7층, 8층, 9층…… 다시…… 다시…… 다시…… …… “다 왔어요.” 여자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19층. 문이 열리는 사이 백 번은 나갔다. 여자 손목을 잡아 끌며 복도로 향했다. 복도는 끝없이 늘어났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복도가 끝 없이 늘어날 때 마다 허공을 걷어 찼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 한다. 내 문 앞까지 왔다. 열쇠를 여는 데, 꺼내도 꺼내도 열쇠가 다시 주머니에 들어있다. 문을 열었나 열지 않았나, 헷갈린다. 문 안에 조홍식 사범님이 서 있었다. 여자가 놀랐다. 여자의 표정 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가 읽혔다. 아니. 난 셋이서 즐기려고 널 데려온 게 아니야. 내가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사범님이 다가왔다. “겟 로스트.” 사범님의 말에 여자가 허락이라도 받은 양 도망치려 했다. 나는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범님이 내 생활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할 권리는 없다. 붙잡은 손을 끌어당겨, 여자를 품에 앉고 입을 맞췄다. 입술을 마구 빨면서 가슴을 더듬었다. 여자가 몸 안에서 구불텅댔다. 나는 완전히 여자의 중심과 움직임을 제압했다. 사범님 눈 앞에서 범해주겠어. 똑똑히 보라고—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사범님의 말에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내 손에는 누구의 손목도 없었다. 여자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이었다. 복도를 내다보자, 그 여자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여자의 궤적이 동시에 겹쳐 거대한 지네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어서 꺼져. 내 ‘현재’를 점유하지 마. “내—일이—시—합—인—데——여—자—를——끌—어—들—여—?” 사범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소리 마저 길게 늘어나있다. 대답도 귀찮다. 듣기도 귀찮다. 현재가 귀찮다. “배—” 쇼벨훅. 날아든다. “은—” 간장을 노리고 날아든다. “망—” 피하기도 귀찮다. “덕—” 어서 때려. 때리라고. “한—” 때리라고! 때려! 때리란 말이야! 제발 때리고 끝내줘! “놈—!” 느긋하게, 확실하게, 천천히 횡경막으로 파고드는 주먹. 위액이 솟구친다. 불쾌감이 끝 없이 반복된다. 무릎이 꺾인다. 무릎이 땅에 닿으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차라리 생각을 그만두고 싶다. 생각을 그만두고 싶다. 생각을. 그만. 두고. 싶다. 생각. 그만. 생각. 그만. 그만……. “엉망이네요." 무릎이 바닥에 닿은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몸을 돌리자 눈 앞에는 둥근 흑인의 둥근 미소가 보였다. “어디 갔었어!” “진정해요. 진정.” “모조를 줘!” “모조?” 사범님이 말했다. “너 이 새끼, 그럴 줄 알았어! 감히 우리 선수한테 약을 줘?!” 사범님이 바론 사메디의 멱살을 잡는다. “썩 사라져!” 사범님의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바론 사메디가 말했다. “그럼 우리 계약은 끊이군요. 더 이상 모조를 줄 필요가 없겠어요.” 둥근 미소. 소름이 끼친다. 안돼. 난 모조가 필요해. 나는 사범님을 끌어내고 가로막았다. “당신 해고야.” “해고?” “그래. 당신 해고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냐? 내일이 챔피언 전이야! 그런데도 나를 해고한다고? 도핑 테스트에 걸리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미스터 조를 처리하지 않으면 모조는 더 이상 없습니다.” “이 놈!” 조홍식 사범님이 바론 사메디에게 달려든다. 모조는 더 이상 없습니다. 미스터 조를 처리하지 않으면. 처리하지 않으면. 쇼벨훅과 함께 사범님을 동양 챔피언으로 만들어줬던 특기, 콕스크류 크로스, 오른손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다. 너무도 느리게. 벌써 수 백 번 똑같은 궤도로 반복되는 펀치. 그 길고 긴 반복 속에서 나는 바론 사메디와 사범님을 저울질했다. 주먹이 중간지점까지 날아들고 있다. —결심. 나는 사범님의 품으로 파고 들면서 몸을 회전시켰다. 팔꿈치 뒤 단단하고 돌출된 부분이 원심력을 받아 예리하게 공간을 베며, 경동맥을 파고든다. 기분 나쁜 감촉. 뇌의 충격을 받은 사범님이 무너져내린다. 지독할 정도로 느린 슬로모션. 눈을 하얗게 뒤집고 있는 얼굴에는 생기가 전부 빠져나가 있었다. 평소에도 고혈압으로 약을 먹던 사범님. 나를 훌륭한 복서로 만들어 줬던 사범님.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사범님. —나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내 미래를 위해, 사범님의 미래를 빼앗았다. “잘 했습니다. 상으로 모조를 주지요.” 은총. 미래가 내게로 온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바론 사메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범님은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코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몸이 들썩이는 모습을 보아 아직 죽지 않았다. 눈물. 나는 프론트에 전화했다. “프론트, 구급차를 불러줘요. 어서.” —락커룸. 시합이 곧 벌어진다. 어젯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UFC 스태프가 사범님이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아임 소리” 라고 무기질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스태프 멤버들은 사정을 몰라 묵묵히 밴디지를 감아줄 뿐이었다. 바론 사메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상관 없다. 모조는 충분히 받았다. 앤더슨 존스는 내 적이 아니다. 사범님이 네놈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다. 네 놈을 사범님과 똑같은 처지로 만들어주마. 그러면 챔피언 벨트를 사범님께 바칠 것이다. 모든 것은 사범님 덕분이니까. 옥타곤으로 향하는 동안, 앤더슨 존스가 움직일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다. 무수히 시간을 반복했다. 그런데 거듭 시뮬레이션 해도 내가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이 시간을 더 길게 느끼게 만들었다. 이미 빅뱅에서 빅크런치를 수 십 번 맛본 기분인데도. 옥타곤 안에 들어갔는데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경기가 시작했는데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경기가 시작하자, 일단은 한 걸음 앞의 미래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앤더슨 존스 특유의 자세. 유연한 움직임. 무릎 관절을 향해 날아오는 옆차기, 오블릭 킥이라고 했던가? 확실하게 피하기는 했지만,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펀치의 제공권에서 앤더슨 존스가 벗어나 버린다. 나는 공격의 궤도를 피해 접근했고, 쇼벨훅을 먹였다. 그러자 풋워크를 이용해 거리를 물린다. 슬로 모션으로 도망치는데도, 따라가는 데 한참이나 걸리는 데다가, 이 느린 시간 속에서도 나 보다 조금 더 빠르다. 공격이 날아든다. 모두 적절하게 피한다. 서로 허공만 두들겨대는 시간. 10 라운드는 지난 것 같다. 그러나 시계는 점멸하는 붉은 문자로 아직 1 라운드 초반이라고 말하며, 내 감각을 배반한다. 초조함. 나는 오블릭 킥을 피하면서 도약해 슈퍼맨 펀치를 날렸다. 단숨에—내게는 3년처럼 느껴진—거리를 좁혔다. 공격은 실패했다. 하지만 선(先)은 내가 잡고 있다. 곧바로, 쇼벨훅— 손에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릎 관절에 충격이 전해져온다. 나는 아직 오블릭 킥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슈퍼맨 펀치를 시도하는 와중에 쇼벨훅을 날려버린 나를 앤더슨 존스가 의아해하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 그러나 곧바로 카운터 펀치가 날아들어온다. 오블릭 킥의 충격 탓에 피할 수 가 없다. 타이밍을 맞춰서 고개를 돌려, 펀치를 흘려낼 마음을 먹었다. 와라. 어서 와라. 오라고. —충격. 공격은 이미 내 턱에 꽂혔다.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무릎이 꺾인다. 젠장. 태클이 들어온다. 명령계통을 잃은 오합지졸처럼 신경계가 내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근육이 제 멋대로 풀려버렸다. 중력이 나를 천천히 늪으로 끌어들였다……. —15년. 그동안 천천히 나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직 1라운드 중반이다.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30년. 내 위로 앤더슨 존스가 덮쳐온다. 그 사이 나는 무한히 반복되는 ‘현재’ 속에서 얻어맞고 패배했다. —120년. 앤더슨 존스가 마운트 포지션을 취한다. 그 사이 나는 무한히 반복되는 ‘현재’ 속에서 얻어맞고 패배했다. -1842년. 파운딩이 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다. 그 사이 나는 나는 무한히 반복되는 ‘현재’ 속에서 얻어맞고 패배했다. -XXXXXXX년? 가능한 모든 공격이 한꺼번에 겹쳐 나를 항한다. 세상이 모두 슬로우 모션에 랙 걸린 것처럼 움직인다. 동시에 상대의 파운딩이 날아온다. 동시에 상대의 엘보우가 날아온다.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파운딩을 맞고 맞고 또 맞는데도 끝나지 않는다. 영원히 얻어맞는다. 심판을 보는 데 심판의 반응이 아직 없다. 시계 초침이 자꾸 0, 1, 0, 1, 0, 59, 0, 1 을 반복한다. 타격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타격. 아무리 미래를 봐도, 결과를 바꿀 방법이 없다. 시간에서 나는 벗어나기 시작했다. 생각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정지했다. —병실에 나는 누워있다. —바론 사메디가 병실로 찾아온다. —바론 사메디가 내 머리에 손을 집어넣더니, 칼라를 회수한다. —안돼. —칼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시간이라는 뜻이야. 동시에 죽음이라는 뜻도 있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과거야 말로 죽음이니까. 이미 자네에겐 아무 의미가 없지만 말이야. 영원이 얼어붙은 채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응시하라고. 눈꺼풀로 덮을 수 없는 정지한 눈으로. 그 동안 자네의 욕망이 가려서 보지 못했던 모든 가능성을 말이야. —이미 너무 늦었다. —이미 너무 일렀다. —영원히 구간반복하는, 정지한 시간. —바라본다. —바라본다. —바라본다……. <끝> 날아온다.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엘보우. 파운딩. 연타. 연타. 연타. 연타. 연타. 파운딩을 맞고 맞고 또 맞는데도 끝나지 않는다. 영원히 얻어맞는다. 심판을 보는 데 심판의 반응이 아직 없다. 시계 초침이 자꾸 0, 1, 0, 1, 0, 59, 0, 1 을 반복한다. 타격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타격. 아무리 미래를 봐도, 결과를 바꿀 방법이 없다. 시간에서 나는 벗어나기 시작했다. 생각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정지했다. —병실에 나는 누워있다. —바론 사메디가 병실로 찾아온다. —바론 사메디가 내 머리에 손을 집어넣더니, 칼라를 회수한다. —안돼. —칼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시간이라는 뜻이야. 동시에 죽음이라는 뜻도 있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과거야 말로 죽음이니까. 이미 자네에겐 아무 의미가 없지만 말이야. 영원이 얼어붙은 채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응시하라고. 눈꺼풀로 덮을 수 없는 정지한 눈으로. 그 동안 자네의 욕망이 가려서 보지 못했던 모든 가능성을 말이야. —이미 너무 늦었다. —이미 너무 일렀다. —영원히 구간반복하는, 정지한 시간. —바라본다. —바라본다. —바라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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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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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베이스 소비’의 결함: 데이터베이스 개념의 오류들
원문트윗: 須藤玲司(@LazyWorkz) http://togetter.com/li/733380  번역: 손지상(@doskharaas) (역주* 須藤玲司(@LazyWorkz)가 2014-10-17 00:10:30부터 쓴 트윗 타래의 번역입니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판단해 번역했습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론’ 하면 이 개념도입니다. 그림 3a “트리 모델(투사 모델)”과 그림 3b “데이터페이스 모델(읽기* 모델)”의 이항대립. 이 그림에 모두가 오랫동안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역주* 読み込み,read. 여기서는 정보공학 용어로 데이터베이스에서 정보를 읽어내는 과정을 가리킨다. )



 먼저 주의할 점은 ‘트리(tree)’가 정보공학에서 말하는 트리형 데이터구조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틀뢰즈와 가타리가 제창한 ‘트리/리좀’ 대립의 트리, 유사하지만 철학용어입니다. 반면 “데이터베이스”는 정보공학용어입니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유사용어로 이항대립을 세운 것이 혼란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트리/리좀’이라는 용어는 ‘구조’, 달리 말하면 ‘데이터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에 반해 ‘데이터베이스’는 ‘구현형태(実装形態)’를 가리킵니다. 데이터 형태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데이터베이스는 스키마(schema) 설계에 의해 다양한 데이터 형태를 구현합니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의 이론적인 최대 오류는 트리 모델/데이터베이스모델의 이항대립을 출발점으로 삼은 데에 있습니다. ‘트리’는 구조(형태)입니다. 반면 ‘데이터베이스’는 구현입니다. 둘은 차원이 다른 개념이라 대립구조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카라테 선수와 유도복, 어느 쪽이 강한가?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트리 모델’이라고 하면, 트리도 형태, 모델도 형태라는 의미라서 ‘형태형태’가 되어버립니다. 데이터베이스 모델이라고 하면 데이터베이스는 구현(무차원), 모델은 형태, ‘형태’입니다. 이것을 비교하려고 하니 꼬이게 됩니다. *C언어로 이야기하면 이중포인터와 포인터를 비교해 컴파일러 경고가 나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역주* ‘바로가기 아이콘’과 ‘바로가기 아이콘의 바로가기 아이콘’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비슷한다.) ‘트리 모델(투사형)’이라는 용어도 혼란의 원인입니다. ‘투사(projection)’의 철학적 의미는 모르나, 수학적으로 ‘투영(projection)’은 데이터베이스의 기초개념입니다. 집합론이나 기하학에서도 사용합니다만, 정보공학의 경우 ‘컬럼 사양(列選択, column specification)’을 의미하는 데이터베이스 용어입니다. ‘데이터베이스 모델 (읽기 모델)’이라는 용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데이터베이스의 기본은 CRUD*, 즉 작성, 읽기, 갱신, 삭제입니다. 왜 이 과정을 아무 말도 없이 ‘읽기’로만 한정하는 가? 꼬투리 잡기가 아닙니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에서는 데이터베이스의 작성, 갱신, 동기화 등 운용보수적 관점이 희박합니다. (역주* CRUD는 대부분의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가지는 기본적인 데이터 처리 기능인 Create(생성), Read(읽기), Update(갱신), Delete(삭제)를 묶어서 일컫는 말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갖추어야 할 기능(정보의 참조/검색/갱신)을 가리키는 용어로서도 사용된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에서는 데이터베이스가 작성한 이야기나 캐릭터를 ‘시뮬라크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리지널이 없는 복제를 의미하는 철학용어입니다. 허나 저자의 논점은 카피 보다도 요소를 조합하는 것에 있으며, 적절한 용어는 수학용어인 ‘사상(寫像, mapping)’이겠지요. 시뮬라크르로는 논점이 불명확합니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의 ��란은 ‘Key/Value*의 혼동’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데이터베이스의 역할은 등록한 데이터(Value)를 검색어(Key)로 검색할 경우 결과인 데이터 집합을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에서는 무엇이 검색 워드고 무엇이 데이터인지가 명확하지 않고 혼란스럽습니다. (역주* 데이터베이스 형태의 일종) 단순한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감상할 경우를 예로 들어보이겠습니다. ‘거대로봇’을 키로 검색하면 {건담, 마징가 Z…} 등의 셋값(値集合, set value)을, ‘안노 히데아키’를 키로 검색하면 {톱을 노려라, 나디아, DAICON 필름…}이라는 셋값을 얻습니다. 이 데이터를 참고로 ‘에반겔리온이란 나디아 감독이 만든 건담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소비’의 솔직한 소비입니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의 모델과는 다릅니다. 오카다 토시오(岡田斗司夫)의 오타쿠론*은 오타쿠가 장기로 삼는 사고법으로 이 모델을 강조합니다. (역주* 오카다 토시오는 초대 가이낙스 사장이자, 과거 오타킹을 자칭하며 오타쿠 문화 비평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타쿠론은 <오타쿠, 만화 게임 영화에 미친놈들>을 참조할 것. 요약하면 ‘오타쿠는 다양한 교양을 바탕으로 특정한 작품이나 기호에 깊이를 가해 음미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2000년대 이후 모에 세대의 오타쿠는 자신이 정의한 오타쿠와는 다른 질의 존재라고 규정하고 <오타쿠 이즈 데드>라는 강연에서 자신의 오타쿠론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가 그리는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이와 다릅니다. ‘모에요소 데이터베이스’에는 ‘고양이 귀’, ‘메이드복’, ‘안경’ 등 ‘모에요소’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캐릭터(시뮬라크르)를 낳고, 소비자도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해 ‘모에한다’, 는 것이 골자입니다. 하지만 ‘고양이 귀’, ‘안경’ 등의 ‘모에요소’를 등록한 데이터베이스는 어떤 검색어로 검색하면 좋을까요? 혹은 반대로 모에요소를 인덱스 키로 삼을 경우, 등록된 값은 무엇일까요? 키(인덱스)가 없는 데이터베이스는 그냥 다락방입니다. 애초부터 문제점으로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는 ‘요소 / 집합’이라는 개념이 매우 희박합니다. ‘캐릭터(시뮬라크르)와 모에요소(데이터베이스)의 이층구조’라는 표현이 빈번히 나옵니다만, 데이터베이스는 당연히 집합입니다. 요소가 아닙니다. ‘모에요소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캐릭터를 생성한다’라는 표현도 빈번합니다만, 이 과정의 구체적 작업 이미지가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데이터베이스의 선택결과는 복수(집합)이며, 각 요소를 균일화(一意化, uniformization) 하지 않으면 팔이 3개인 캐릭터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모에로운 귀 파트’를 모에요소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면 {고양이 귀, 강아지 귀, 토끼 귀}의 집합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걸 전부 붙여버리면 매우 특수한 성적 취향의 캐릭터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검색조건을 조여서 하나로 만들지 않으면(균일화) 안됩니다. 여기에 작가성이 깃듭니다. 조금 이야기가 어수선해졌습니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의 데이터베이스 비유의 결함은 다음과 같습니다.
-트리/데이터베이스라는 차원이 다른 대립구조 -Key/Value의 구분이 불명확 -요소/집합의 개념이 부족

이번에 건드리지 못한 부분에도 이런 결함이 있습니다.
-‘읽기’만을 의식해 생성, 갱신, 혹은 공유, 복제 등의 운용관리의 개념이 없다 -데이터베이스 자체의 개층구조를 보여주나 모호해 안정적이지 않다. -보안이 빈약. 일반유저가 뷰(view)*를 통하지 않고 직접 액세스가 가능한 모델을 보여준다.
 (역주* 관계데이터베이스relational database의 용어.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테이블에서 특정한 조건에 근거해 일부 데이터만을 뽑아내어, 마치 새로운 테이블 처럼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역자는 균일화 문제와 함께 과거 데이터베이스 소비에서 이 부분을 공격한 바 있으며, 가설적으로는 캐릭터/스토리가 뷰의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지리멸렬하게 꼬투리나 잡고! 데이터베이스는 그저 비유일 뿐이니 현실의 데이터베이스와 충실히 일치하지 않아도 상관 없어!” 라고 생각하는 분은 소칼 선생님*의 따끔한 벌이 기다리고 있으니 두려움에 떨면서 잠드시길 바랍니다. (역주* 앨런 소칼이 1996년에 유명 인문학 저널 <소셜 텍스트(Social Text)>에 적당히 가짜 논문을 투고한 사건. 포스트모더니즘이 학문적 엄정성을 잃었다고 생각해'그럴듯 하게 들리고, 편집자의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에 편승하기만 하면’ 내용에 관계없이 게재가 되는지 시험하기 위해 가짜 논문을 투고하였다. 떨면서 잠들라는 말은 역자가 사랑하는 삽입곡 가사입니다.) (중략) (역주* 여기에 중략된 트윗내용은 아래의 생략된 트윗 내용에 의해 부정되고 있으며 본문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기에 두 부분 모두 생략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쯤에서 트윗타래를 멈추겠습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으로 길게 길게 적어놓고 나니, 의외로 제대로 된 형태로 정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빈번히 나오는 ‘모에요소(데어테베이스)’라는 수수께끼에 찬 개념. 요소와 집합을 혼돈하는 실수에 대해서는 ‘한 명 죽이면 미스테리지만 인류몰살하면 SF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만, 이건 어딘가에 존재하는 명언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생각한 건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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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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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좀비에 물린 한국 예능을 위한 백신
(주. ‘제2회 한국방송평론상’에 투고해 낙선한 글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좀비 소비’란 오오츠카 에이지가 제안한 ‘이야기 소비’, 그리고 이야기 소비의 맥락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제시한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소비’는 문자문화적으로 유사-거대서사를 소비하는 양식인데 반해,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거대서사가 탈맥락하여 다양한 미시서사의 데이터베이스 중에서 특정 기호에 동물적(=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소비 양식입니다. 제가 제안하는 ‘좀비 소비”는 참조할 데이터베이스가 형성된 적 없이 그 표층 기호(=시뮬라크르)만을 빌려와 재구성한 2차-구술문화-데이터베이스-소비양식이라고 가설적으로 정의한 개념틀입니다. MBC <무한도전>은 이 좀비소비를 방해하는 ‘메타적 비평행위’를 하는 예능방송으로 ‘그나마’ 찾을 수 있는 샘플이었기에 소재로 삼았습니다.)
1. 반지성주의: 한국 예능의 심각한 문제 한국 예능은 지금 심각한 반지성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반지성주의란 자동적—무의식적—조건반사적으로 축척된 일상감각과 경험, 사회적 편견으로 구성되며, 이성적 해석이나 비평, 담론 나누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이 직접 사고하기 보다는 일상을 통해 외부로부터 축적된 고정관념, 편견, 경험에만 의존하고, 이성적인 분석이나 비평 등은 자기 자신의 감각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며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예능의 경우 반지성주의는 일반적으로 탈맥락적이고, 감각적이며,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강화하는 유머를 선호하는 취향으로 발현된다. 대표적인 예는 최근 KBS <개그콘서트>와 TVN <코미디 빅리그>에서 ‘못생긴 여성’, ‘비만한 사람’, ‘가난한 사람’ 등 혐오와 차별, 편견을 소재로 삼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지성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유머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재미있기만 하면 되는 데 왜 따지냐”는 식의 언설로 억압한다는 데에 있다. 또한 약자에 대한 억압과 공격에 기반하기에 유머를 공유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억압에 가담하게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시청자는 조건반사적이고 말초적인 유머를 향유하며 정당성을 강화하고, “나는 약자가 아니다”라는 안심감도 얻는다. 이 과정은 본래 ‘풍자’의 기능을 띄어야 할 예능과 코미디가 오히려 파놉티콘(panopticon)처럼 서로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파놉티콘은 본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한 감옥의 구조로, 중앙의 감시탑을 두고 원형으로 감옥을 배치해 시선을 느껴 스스로가 행동을 제안하게 유도한다. 미셸 푸코는 현대 사회가 서로를 파놉티콘처럼 감시하며 스스로 억압을 내화시키게 유도한다고 지적한다. 반지성주의적 유머는 점점 더 “나는 약자가 아니다” 라는 자기 인식을 재확인하도록 시청자를 압박한다. “너는 왜 웃지 않지?” 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그는 약자로 전락한다. 왕따와 같은 구조다.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 편견을 모방해 따라 웃으면서 스스로 반지성주의를 강화한다. 그 결과 개성을 상실하고 균일화 되어, 마치 좀비처럼 자신과 같은 ‘반지성주의적 유머센스’를 공유하는 공범을 찾는다. 유머센스의 미감(taste)은 지속적으로 동물화하여 자동적, 무의식적, 조건반사적으로 표층만 남는다. 그 결과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유행어라 재미있는” 상태로 시뮬라크르(simulacre), 표층의 모방 만을 반복하다 아우라를 완전히 잃는 타락에 빠진다. 표층의 모방 반복은 일반적으로 피드백처럼 상호작용하지 않고 일방적이다. 따라서 특정한 게슈탈트(gestalt)를 형성하지 못한다. 게슈탈트는 부분과 전체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특정한 의미를 이루는 덩어리를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다. 뇌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게슈탈트를 이루고 있다. 시뮬라크르는 게슈탈트를 이루지 못하나, 시뮬라크르를 향유하는 행위 자체는 미시서사—여기서 서사는 게슈탈트와 유의어다—즉 자아와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한다. 반지성주의적 유머센스는 그 자체를 기준으로 다수�� 사람들을 게슈탈트로 묶어주고, 웃지 않는 사람은 동료가 아니라고 간주하는 사상검증의 기준으로 전락한다. 반지성주의적 유머는 최종적으로 메타-판옵티콘의 게슈탈트,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의 감시탑이 되어 억압하는 신옵티콘(synopticon)으로 변한다. 이 과정을 통해 좀비화 된 개인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며 똑같은 예능 방송을 공유하는 사람과 방송 내용을 공유하는 커뮤니케이션으로 스스로를 확인하고, 손쉽게 우경화하여 프로파간다에 넘어간다. 균질하면서도, 정동에 의존하며, 이성의 기능이 뒤떨어져있기에, 단순히 “감정적으로 공감한다”, “재미있으면 장땡이다”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탈맥락—탈윤리—탈민주주의적인 담론이라도 감정을 움직인다면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단순한 예능 방송 만으로 너무 과장된 해석이 아니냐고 반발할 지 모른다. 논리적 개연성과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반지성주의적 유머라고 규정한 자동적—무의식적—자동적 유머가 비록 동물적일지는 모르나 개인의 자유 범위 내에 있는 일이다” 라는 반박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도하게 개인을 강조하면 할 수록, 개성은 사라지고 대중의 일부로 균일화 한다. 개인의 일상이나 신체감각 등 미시서사를 강조하면 할 수록 거대서사가 부여하는 의미가 사라진다. 개인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기하학에서 두 직선의 교차하는 부분을 점으로 정의하듯, 사회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범위가 결정된다. 점의 또 다른 기하학적 정���로는 점과 원의 관계가 있다. 특정한 점이 존재하면, 그 점을 중심점으로 삼아 일정한 거리가 떨어진 점의 집합을 원으로 정의한다. (이는 판옵티콘의 구조와 같다.) 특정한 원이 존재하면, 반드시 중심점이 존재한다. 개인을 강조하면 할 수록, 각각의 점이 원의 일부로 변해 판옵티콘, 더 나아가 신옵티콘을 형성하여 균질한 대중의 일부로 전락한다. 시청자의 반지성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예능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시청을 유도하기 위해 이성적 피드백을 제공해야 한다.
2. 무한도전: 반지성주의를 막는 백신의 가능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MBC <무한도전>에서 반지성주의에 대항하는 이성적 피드백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성적 피드백이란 반지성주의의 감정적 소비 뿐 만이 아니라 방송 내용의 이성적 해석과 비평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을 말한다. 방송이 시청자에게, 시청자가 방송에게 가하는 피드백도 이성적 피드백이다. 또한 방송 자체가 역사, 사회, 장르적 관습 등 거대서사와 나누는 상호 피드백도 이성적 피드백이다. <무한도전>은 다른 예능과 달리 적극적으로 이성적 피드백을 도입하고 있다. 예능의 근본목적은 물론 재미다. 재미는 분명 개인의 정동(情動) 문제다. 그러나 “재미있기만 하면 돼”, “재미가 재미지” 같은 반지성주의적 태도로는 이미 지적했듯, 시청자를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하게 만든다. 정동 그 자체는 객관적으로 분석과 비평이 가능하다.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이를 부정하고, 자신의 미감 만을 근거로 삼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영화처럼 비평과 리뷰가 활발한 분야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이 평론가의 비평을 부정하면서, “난 아닌데?” 처럼 자기 자신의 미감을 근거로 삼는다. 예능은 이런 태도가 더욱 심하다. 조금이라도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그냥 보고 즐겨라” 라는 반발이 인다. 재미는 이성적 피드백을 얻지 못하면 도태될 위험이 있다. 이성적 피드백은 정동 외부에서 오는 개입이다. 만일 외부에서의 피드백 없이, 내부적으로 피드백을 반복하면 최적화가 일어난다. 최적화는 궁극적으로 뼈대만 남겨, 대중의 일부로 전락하는 개인처럼 변한다. 외부와의 신진대사가 없이 굶으면 자기 몸의 근육과 지방을 분해해 에너지를 얻다가 결국에는 뼈만 남은 것처럼 바싹 말라 사망하고 만다. 이는 모든 장르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로, 오랫동안 살아남는 장르는 지속적으로 외부와의 피드백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무한도전>은 외부와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예능방송이다. 과거에도 MBC는 <양심냉장고>, <책, 책, 책을 읽읍시다.> 등 공익 성격을 띄는 예능방송을 선보인 바가 있다. 추후 자세히 설명하겠으나, 사회적 문제를 피드백하는 행위는 이성적 피드백을 유발한다. 그러나 MBC의 소위 공익 예능은 도덕적인 제약이 커 재미를 주는 예능 본연의 역할을 방해하는 경우도 발생했으며, 방송 콘셉트의 제약도 커 내용의 변화가 크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무한도전>은 매 화 방송 콘셉트를 바꾸는 ‘메타—콘셉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때문에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소화해 이성적 피드백을 유발한다. 대표적인 예는 2011년 방영한 <무한도전 ‘스피드 특집’>이다. 전체적으로 예능의 게임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게임의 내용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 <스피드>를 레퍼런스로 삼고 동시에 ‘독도 문제’를 암시하도록 구성하여, 시청자들에게 재미와 이성적 피드백을 동시에 성취했다. 이 글에서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는 예능의 재미와 이성적 피드백을 양립시키는 것의 가능성이다. 예능의 재미만을 추구하면 반지성주의적 좀비를 유발할 위험이 있다. 이성적 피드백만을 추구하면 예능 본연의 의미와 모순된다. 둘을 양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나라 예능이 어떻게 재미를 일으키는 가를 고찰하고, 이를 이성적 피드백과 양립시키는 것이 가능한 지를 검토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좀비를 치료하는 백신의 역할을 할 것이다.
3. 캐릭터 의존증: 한국 예능이 재미를 낳는 구조 예능은 하나의 세계관이나 사상으로까지 확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 예능은 재미에 있어서 캐릭터와 캐릭터 간 상호작용에 의존하며, 시뮬라크르에서 멈추고 말았다. 예능 그 자체의 장르적 관습을 형성하거나,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가까운 예로 옆 나라 일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일본어로 예능을 의미하는 ‘게노(芸能)’는 연예계 전반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의 예능이나 영어의 코미디에 해당하는 말은 ‘오와라이(お笑い)’ 라고 한다. 이들은 ‘만자이(漫才)’, ‘콩트’, ‘모노마네(モノマネ, 성대모사나 형태모사)’, ‘시카이(司会)’, ‘토크’, 등 각자 전문으로 맡은 하위 장르가 있다. 각각의 장르는 언어적으로 명확히 규정되고, 각자의 역할도 정해진다. 예를 들어 만자이는 ‘보케(ボケ)’와 ‘츳코미(ツッコミ)’의 2인으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는 각자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보케는 “헛소리”, “허풍” 정도로 번역할 수 있으며 상황에 맞지 않는 말로 긴장을 유발한다. 츳코미는 “딴죽”, “정정” 정도로 번역할 수 있으며 보케의 말에 “딴죽”을 걸어 긴장을 완화하고 게슈탈트를 이루어 웃음을 유발한다. 일본에서 오와라이는 적어도 1980년대부터 단순히 코미디가 아니라 젊은이의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오와라이에서 활약하는 ‘게닌(芸人, 코미디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상식을 뛰어넘는 일종의 기인이나 초인으로 여겨지며, 영화감독, 가수, 저술활동 등 활발하게 사회에 자기를 표현한다. 만자이를 명명하고 다수의 스타 게닌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 기획사 ‘요시모토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의 경우, 1982년 부터 ‘요시모토 종합 게노 학원(吉本総合芸能学院)’ 통칭 ‘NSC(New Star Creation)’라 불리는 양성소를 설치해, 오와라이나 만자이를 성문화하고, 지금까지도 엄청나게 많은 게닌을 배출하고 있다. 게닌은 젊은이들에게 있어 선망의 직업이고, 게닌을 목표로 삼지 않은 일반적인 젊은이들도 일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그들의 발언이나 행동, 패션을 모방하고 행동규범으로 삼으며, 사용하는 ‘자곤(jargon, 전문용어)’도 도입한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도 보케와 츳코미를 의식해서 구분하고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판단기준으로 삼으며,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frame)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의 오와라이가 이와 같은 노력을 한 이유는 오와라이 자체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예능은 일본의 오와라처럼 성문화, 양식화, 언어화의 과정을 거치기 보다는, 우연히 발견하는 개인의 개성에만 의존해 왔다. 이를 캐릭터라고 부르는데, ‘기억에 남을 만큼 기호로 축소된 개인의 특성’을 말한다. 캐릭터는 고유한 특징이자 성격적 특질인데, 주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것이 기능이자 목적이다. 거의 대부분의 서사는 캐릭터의 존재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한데, 이는 예능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예능은 맨 처음 방송을 시작하면 각 등장 연예인의 캐릭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반복해 기억에 남도록 ‘비호감’, ‘사차원’, ‘예능돌’, ‘군인돌’, ‘능력자’, ‘하로로’, ‘막내’, ‘큰형님’ 등등의 별명을 붙인다. 별명은 대부분 평면적이고, 사회적인 편견(상하관계, 남녀 성역할 등)에 기초한다. 캐릭터의 과도한 의존은 사회적 편견을 강화해 반지성주의를 공고히한다. 한편 캐릭터가 구축되면, 본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피드백 과정이 시작된다. 이 과정 중에 본격적인 예능이 성립한다. 캐릭터의 상호작용으로 재미를 만드는 것은 코미디 뿐 만이 아니라 서사의 기본이다. 캐릭터 간 상호작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규칙의 형태로 언어화 된 ‘캐릭터—게임’의 형태, 상황극이나 대화 등 암묵적인 ‘캐릭터-일상’의 형태를 띈다. 전자는 SBS <러닝맨>, 후자는 <1박 2일>가 대표적이다. <러닝맨>은 초창기 고전적이고 순차적인 모험소설 플롯을 차용했다가, 시청률 저하를 겪고 <무한도전>의 ‘추격전 콘셉트’를 벤치마킹해 철저히 게임성을 강조했다. 캐릭터는 알기 쉽게 단순화하여 반복하고, 이들을 다양한 꼬리표(tag)에 결부시켜 조건반사를 이루었다. 게임은 매번 같은 형식에 룰을 달리하나 구조는 그대로 유지해 반복한다. 반면 <1박 2일>은 게임이 등장하기는 하나 대부분 즉흥적으로 룰을 제안한 게임이고, 방송이 게임을 중심으로 두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시청자는 캐릭터에게 감정이입해 가상의 일상을 향유한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양념으로, 대부분의 재미는 등장인물 간의 잡담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또한 언제나 같은 형태의 상호작용을 반복하는 형태로, 역시나 사회적 편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 과정은 심리학의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 과정을 거친다. 조작적 조건화는 선행자극—행동—보상의  피드백으로 행동을 강화한다. 특정한 자극이 행동을 유발하고 이로 인한 결과가 피드백하여 행동의 경향성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캐릭터의 기호적 특질과 행동은—비록 무의식적 사회적 편견을 반영한다 하더라도—웃음을 이끌어낸다. 웃음은 캐릭터에 감정이입한 시청자의 기억 속 무의식적 편견을 강화한다. 반복될수록 시청자는 거대서사의 맥락에서 파편화 돼 미시서사로 축소되고, 쉽게 조종 당한다. 그 결과 ‘좀비 소비’라는 특수한 향유 양식이 탄생한다. 시야는 좁아지고, 공감만을 추구하며, 사회적 편견을 부비판적으로 수용해 기준으로 삼고 탈윤리적이고 동물적인 감각과 취향에 의존하는 태도로 정의한다. 반면 <무한도전>의 경우 좀비 소비를 방해한다. 한 예로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를 들 수 있다. 캐릭터를 설정하는 것은 같으나 일부러 이러한 ‘별명’을 과잉시킨다. 정보량이 과잉되면 게슈탈트는 파괴되고 편견으로 고착되는 것을 방해한다. 한 예로 <무한도전>의 박명수는 과거 프로그램에서는 ‘호통’, ‘버럭’ 등 흐름을 무시하고 돌발행동을 하는 거만함 등에만 캐릭터가 국한되었다. 그러나 <무한도전>에서는 수없이 많은 별명(이미 300개를 넘었다.)과 더불어, ‘하찮은’, ‘벼멸구’ 등 모순되는 캐릭터를 별명으로 동시에 부여해 입체감을 주고 있다. 이 때문에 시청자는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기 보다 박명수의 돌발행동을 ‘해석’하는 비평행위로 유도되어 스스로 별명을 짓는 단계에 이른다. 이러한 ‘메타픽션’적인 방법론의 다용이 <무한도전>이 좀비 소비를 막는 백신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근거한다.
4. 감정의 정체: 거대서사와 미시서사의 마찰 재미는 ‘몸의 떨림’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몸(mom)’이란 도올 김용옥이 <아름다움과 추함>에서 제안한 미학이론인 ‘몸 이론’의 개념으로, 거대서사(역사적, 문화적, 관습적, 사회적, 유전적 흐름)과 미시서사(일상적, 신체적, 기억의 연속적 흐름)가 다층적—공시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이다. ‘나’라는 자아 안에는 단순히 내 육체와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 민족, 인류의 역사가 공시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몸에는 유전적—선천적으로 타고난 경향성 뿐 만이 아니라 경험적—후천적으로 축적된 경향성도 동시에 존재한다. 이 요소는 때때로 마찰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엄숙한 공적인 자리에서 누군가 방귀를 뀐 상황을 가정해 보자. 공적인 자리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몸을 요구한다. 반면 생리적 현상은 그 자체의 흐름으로 발생해, 엄숙하기를 ‘기대(expectation)’하는 사회적 몸과 마찰을 일으킨다. 이를 경험한 몸은 다층적 흐름 간의 마찰과 모순을 경험하게 된다. 이 때 발생한 에너지를 해소하는 것이 바로 감정이라고 도올은 정의한다. 이는 뇌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뇌과학에서 감정은 ‘예기실패(expectation failure)’라는 기제로 정의한다. 뇌는 기존의 선천적—후천적 경험을 언어적인 형태로 장기기억에 저장하는데,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행동연쇄를 기록하고 있어 ‘스크립트(script)’라 부른다. 만일 스크립트대로 일이 진행—예기—되면 ‘감각적 쾌락’이 보상으로 주어지는데, 이는 조작적 조건화와 동일한 과정이다. 반면 예기되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뇌는 이를 위급상황으로 판단하고 생리적 흥분상태를 만든다. 이때 발생한 에너지로 뇌는 동시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여 상황을 처리한다. 이 흥분상태가 바로 감정이다. 뇌의 정보처리 방식 중 스크립트를 처리하는 순차적—언어적 방식은 ‘L모드’, 현재 감각정보를 처리하며 동시적—감정적 처리방식은 ‘R모드’로 정의할 수 있다. 전자와 후자는 각각 과거와 현재, 심층과 표층, 거대서사와 미시서사, 양식과 표현 등과 대응한다. ‘몸의 떨림’은 L모드와 R모드가 상호 피드백으로 발생한다. 반면 예기—조작적 조건화—로 발생하는 ‘감각적 쾌락’은 단순히 R모드가 기계적으로 L모드를 강화하기만 한다. 다른 나라의 예능은 ‘몸의 떨림’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한다. 역사적 전통, 사회적 관습과 편견, 양식화 된 장르적 특성 등 L모드의 스크립트를 R모드의 미시서사로 예기실패를 일으키면서 웃음을 유발하고 ‘풍자’를 이루어낸다. 그 결과 생성된 새로운 기억은 다시 집단기억인 거대서사에 피드백 되어, 장르 자체의 역사와 맥락을 만들어내고 생명력이 유지된다. 반면 한국 예능은 ‘감각적 쾌락’만 추구해 좀비 소비를 유발한다. 이 배경에는 과거 특히 한국 예능은 외국의 표층만을 무맥락적으로 모방한 어두운 역사가 있으나,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겠다.
5. 좀비 소비: 데이터베이스가 부재한 데이터베이스 소비 좀비 소비는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정의한 ‘데이터베이스 소비’와 유사하다. 아즈마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이야기 소비(物語消費)를 전제로 한다. 이야기 소비는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가 제안한 개념으로, 1980년대 일본에서 출연한 오타쿠(おたく)의 향유 양식인, 거대서사가 파괴된 현대에 오타쿠들이 자기규정을 위해 가상의 거대서사(=세계관)를 공유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거대서사를 말한다. 오쓰카는 오타쿠가 과거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담당하던 헤게모니를 서브컬쳐의 애니메이션이나 텔레비전 방송이 대신하게 되며, 마치 현실의 역사를 공부하듯 작품에 몰두하여 자신의 의미를 규정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1980년대 오타쿠는 표층의 개별작품을 향유하며 심층에 숨어있는 가상의 거대서사인 세계관에 접촉하려고 시도했다. 작품도 오타쿠도 세계관과 피드백하면서 정체성을 구축했고, 같은 작품의 팬은 세계관의 공유로 커뮤니케이션하며 특수한 공동체인 오타쿠 문화를 이루었다. 얼마나 세계관에 많이 접근해 정보량을 높이는 가가 오타쿠를 특수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는 L모드 중심의 향유양식이다. 한편 아즈마는 1990년대 시장의 확대로 소비 양식이 변화하면서 오타쿠의 향유 양식도 변화했다고 지적한다. 가상의 거대서사에서 역사적 맥락이 탈락하고 단순한 정보의 조합인 데이터베이스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표층과 심층, 미시서사와 거대서사, 작품과 세계관이 서로 해리되면서, 종래의 이야기 소비처럼 맥락적—통사적—일방통행적 향유가 아니라, 탈맥락적—공시적—동시적으로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는 방식의 소비로 변화하였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표층의 작품과 오타쿠 개인은 취향으로 상대화 되고, 특정한 기호에 동물적으로 반응하게 된다고 그는 지적한다. 여기서 동물적이란 조작적 조건화를 거쳐 R모드로만 향유하는 태도를 말한다. L모드(=데이터베이스)와 R모드(동물적 소비)가 서로 해리되고 각자의 취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이합집산하며 산발적으로 미시서사를 형성하다 사라진다. 한국 예능의 좀비 소비는 탈—데이터베이스 소비다. 이데올로기 등 거대서사가 힘을 잃고 서로 공유할 만한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하지 못했다. 소비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0년 대 이후로 외국에서 표층만 베껴오는 시뮬라크르를 반복해, 가치판단만 발달시켰다.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필수적인 심층의 거대서사와 연결이 불가능해지고, 이성적—언어적인 L모드의 활동이 억압되어 미시서사인 일상의 결과로 형성한 미감과 취향의 호불호를 기준으로 삼는다. 동시에 점점 파편화되는 취향을 기준으로 자기 규정을 확고히 하기 위해, 좀비처럼 몰려다니고 다른 표층집단을 물어뜯어 감염시키려 한다. 인터넷의 악플이나 무익한 싸움도 좀비 소비의 가능태일 가능성이 크다.
6. 가능성: <무한도전>의 메타자막과 메타규칙 <무한도전>의 메타자막과 메타규칙은 좀비 소비를 막는다. 메타성은 피드백과 자기참조를 전제로 반성하는 특징이 있다. 그 결과 중층구조가 발생하게 된다. <무한도전>은 방송 내부에 메타적인 피드백을 가해 중층구조를 만들고 몸의 떨림을 유도한다. 대표적인 예는 자막이다. 일본 예능방송에서 수입된 자막은 기본적으로 화면 안에 내용이나 말을 자막의 형태로 설명해준다. 이 과정은 복잡한 R모드의 정보를 시청자가 L모드로 해석하지 않고 방송이 대행해 준다. 그 결과 시청자는 점점 자막을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 능동적인 해석을 가하지 않게 된다. 이는 연구결과로도 뒷받침된다. 자막의 위험성은 노구치 유키오의 <초학습법>에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똑같이 텍스트를 읽는 다 하더라도, 책을 읽는 행위와 자막을 읽는 행위는 다르다. 전자는 이성적—언어적인 L모드 우위인 반면 후자는 즉시적—감각적인 R모드 우위다.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인 제인 할리가 한 실험에 의하면, 책을 읽는 동안 인간의 뇌파는 활동적이고 빠른 베타(β)파가 우위에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 동안은 정신 활동의 결여를 나타내는 완만하고 수동적인 알파(α)파가 우위에 놓이며,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처럼 일반적으로는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조차 즉시성이 강한 시각적 자극에 잠기면 L모드의 읽는 능력, 다시 말해 이성적 비판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은 소위 바보상자처럼 시청자의 이성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시각적 자극이 아니라 즉시성에 있다. 다층구조로 몸의 떨림을 만들어낸다면 즉시성을 방해하고 이성적 피드백이 일어나게 된다. 메타규칙은 위의 <무한도전 스피드 특집>에서도 설명했듯, 다양한 사회적 문제나 다른 예술 장르의 양식을 패러디하면서 이를 규칙에 도입한다. <런닝맨>처럼 고정적인 구조를 유지하는 규칙에 새로운 표층만 바꿔씌우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룰을 도입해 심층구조의 맥락을 구축하고 일종의 거대서사를 만들어낸다. 또한 <무한도전 배달의 민족>, <무한도전 토토가> 등 시청자 뿐 만이 아니라 대중이 공유하고 있으나 언어화 되지 않은 무의식적 심층구조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두가 공유하는 가상의 거대서사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시청자는 스스로 <무한도전>의 평론가가 되어 이번 콘셉트는 좋고, 이번 콘셉트는 나빴다는 것을 단순한 호불호가 아니라 언어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무한도전>이 이성적 피드백을 유발시키는 가장 독자적인 기술은 메타자막이다. 메타자막은 화면 속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을 담으며, 피디 김태호의 의견이나 속내라는 캐릭터를 세우고 있어 방송 내 다른 자막과는 글자체도 다르다. 이는 예능 방송에 서사적 화자를 부여하고 방송 내용을 다층구조로 만든다. 이는 다른 예능방송에서는 보기 드물거나, 서툴게 사용된다. 다른 예능 방송은 상황을 요약하고 전달하는 데 급급하거나,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르게 수식하는 데 그친다. 반면 <무한도전>의 메타자막은 지속적으로 상황을 역전시키고 모순적이거나 정 반대로 묘사하며 시청자에게 몸의 떨림을 유도한다. 그 결과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L모드와 R모드를 상호작용하며 병행이용한다. 두 장치는 시청자가 방송을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비평행위를 유도한다. 좀비 소비를 막고, 장르의 신진대사를 촉진한다. <무한도전>은 현재 10년 넘게 장수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지속적으로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이성적 피드백의 기능을 맡아서 하고 있고, 동시에 예능으로서의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는 코미디가 갖는 본연의 기능인 풍자와 재미를 동시에 담고 있으며, 좀비가 된 시청자가 잠시동안이나마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거대서사가 되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끝>
참고문헌. 노구치 유키오. (1996). <초학습법>. 랜덤하우스코리아.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2013). <“새로운” 무의식 -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까치. 리사 크론. (2015).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웅진지식하우스. 마이클 가자니가. (2012). <뇌로부터의 자유>. 추수밭. 미우라 도시히코. (2013). <허구세계의 존재론>. 그린비. 베티 에드워즈. (2004).<The New 오른쪽 두뇌로 그림 그리기>. 나무숲. 아즈마 히로키. (2007).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아즈마 히로키. (2012).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현실문화. 苫米地英人. (2010). <脳を鍛える「超」記憶法>. アスコム> 苫米地英人. (2014). <認知科学への招待>. CY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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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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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명치에 세게 사랑과 평화! (2)
2.
같이 살기로 합의한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네스에게 답례로 술을 샀는데, 필름이 끊기고 깨어보니 나는 광흥창역 근처의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고, 조네스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조네스의 아침식사는 술 먹고 다음 날 아침에 먹기에 딱 좋은 날 위한 콩나물 국과 술 먹고 다음 날 아침부터 어떻게 저걸 먹기 싶은 스테이크 한 덩어리였다. 물론 스테이크는 조네스를 위한 것이었고, 커다란 우유통도 같이 있었다.
왜 조네스가 내 방에 있지?
가벼운 착란을 겪는 사이 내 시야에 낡고 헤진 더플백이 보였다. 그제서야 기억의 필름이 단편적으로 현상되어왔다. 홍대 클럽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여자 바운서 조네스에게 나는 룸 메이트를 제안했었고, 그날 바로 여자에게 업혀서 창전동 자취방으로 같이 돌아왔다.
아마도.
술은 고민을 녹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뇌를 녹이는 데도. 숙취가 심해 더 고민하기 어려웠다. 나는 상 위에 놓인 시원한 콩나물국을 단숨에 들이켰다. 고민은 그 뒤에 해야지. 만세, 오늘은 일요일.
식사를 마친 우리는 홍차 잔을 두고 다과회를 시작했다. 앞으로 매번 일요일 아침마다 이어진 다과회의 시작이었다. 홍차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우리는 하루 종일 수다를 했다. 나는 옆으로 눕고, 어지간한 남자보다 어깨가 넓고 풍만한 조네스는 내내 자수를 놓았다.
"난 악역 레슬러였죠. 아마존 여전사 기믹(gimmick)이었어요. 아마조네스. 그래서 조네스. 일본에서는 다들 조네에상(조 언니)하고 불렀어요. 웃기죠? 난 브라질은 가본 적도 없고 브라질이 무슨 말 쓰는 지도 모르는 데."
본명은 따로 묻지 않았다. 굳이 물으면 실례일 것 같았다. 기믹은 나중에 물어보니 일종의 캐릭터였다. 아마존 여전사. 데스밸리에서 온 장의사. 등등.
"조네스는 귀여운데, 악역이었어요?"
거구에 얼굴도 이목구비가 뚜렷해 우리나라 사람 보다는 인도나 이란 사람 같았다. 화가 나면 얼음 칼 같은 표정의 윤곽을 그리지만, 조네스의 평소 얼굴은 어린 아기처럼 귀여운 곡선을 그렸다. 말을 할 때도.
조네스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악역인데 착하게 생겼다고 항상 가면을 썼어요. 나야 좋죠. 안 부끄럽고. 일본에서는 여자 프로레스(일본에서는 프로레슬링을 프로레스라고 줄여 부른다) 따라다니면서 가랑이 사진 찍는 변태도 많거든요."
"가만 놔둬요?"
“손님이니까 프로모터는 아무 말 안 해요. "
"너무하다."
"상관없어요. 가면 쓰면.” 조네스는 자수를 내보였다. 기하학적인 모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쓰는 가면 문양이에요. 밀 마스카라스. 천 개의 얼굴을 가진 남자. "
"가면이 좋아요?"
"가면을 쓰면 모든 게 다 가능해요. 프로레스 같은 가짜도 진짜처럼 할 수 있죠. "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데서 얻은 해방감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클럽 한 가운데에서 신나게 춤을 출 때 기분 같은. 뮤지컬을 보면서 노래와 배역에 빠져들어 한 바탕 울어버릴 때 기분 같은.
"아 맞다! 이거, 선물로 줄게요. 언제나 내가 곁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조네스는 더플백을 뒤지더니 내게 쇳덩어리를 건넸다.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네 개의 구멍이 뚫린 쇳덩어리, 주먹에 끼고 때리는 흉기다. “너클더스터. 일본서는 ‘메리켄 삭쿠’라고 해요. 내가 선수 시절에 쓰던 거예요.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어요.”
“호신용이라기엔 좀 그렇지 않아요?”
“이걸 끼기만 해도 어지간한 양아치는 무서워서 도망칠 거예요. 여기 이거 보여요? 한 대 이마에 맞으면 자국이 쾅! 찍혀요.” 조네스가 타격하는 부��을 가리켜서 보니, 일본어가 부조로 새겨져있어 기묘해 보였다. “이거, 카타카나로 ‘아이토헤이와’라고 쓰여 있어요.”
“아이토헤이와?”
“사랑과 평화라는 뜻이에요.”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서로 사는 시간대가 달라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 어려웠다.
조네스는 평일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고 금요일과 토요일 야간에만 바운서로 일했다. 나는 마포에 있는 중소기업에 다녔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점심을 차리고 회사로 출근하면, 그 사이 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 조네스가 점심을 먹고 할리퀸 로맨스를 읽거나 운동을 한다. 내가 퇴근하면 조네스는 나를 꼭 안아주며 오늘도 고생했다고 말해줬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 조네스는 편의점으로, 클럽으로 출근했다. 혼자 방에 남으면 그 말이 머리에 울려서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가끔은 금요일 밤에 클럽으로 놀러가 조네스랑 춤을 추기도 했는데, 유연하게 춤을 잘 추면서도 춤 보다는 방에서 할리퀸 로맨스이나 BL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차라리 BL이 낫지, 얇고 오글거리는 내용으로 가득한 할리퀸 로맨스 소설은 처음 우리 집에 온 날 조네스의 더플백에도 잔뜩 들어있었다. <나와 사장님의 배덕 스위트룸>이나 <성가신 애인> 같은 것은 빌려 보아도, 난 <아랍 왕자의 하렘>이나 <틴에이저 러브 스토리>, <변호사와 검사>는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가끔은 나랑 같이 신촌에 있는 헌책방인 <숨어있는 책방>이나 <공씨책방>, <글벗서점>에 들러 책을 잔뜩 사오기도 했다. (<알라딘 중고서점 신촌점>에는 할리퀸 로맨스가 소설이 잘 없어서 드문드문 들렸다.) 다 사면 마지막 코스인 <글벗서점> 앞 정류장에서 753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바로 돌아와, 컵라면에 우유팩을 잔뜩 모아두고 하나하나 읽었다.
조네스는 읽으면서 언제나 감동했고, 눈물을 글썽였다. “프로레스하고 똑같아요. 가면을 쓰면 솔직해질 수 있어. 나도 이 소설이 말도 안 된다는 것 잘 알아요. 원래 사랑이든 우정이든, 무슨 일이든 다 프로레스에요. 그게 진짜냐 가짜냐는 의미 없어요. 중요한 건 얼마나 솔직해지느냐.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부끄럼쟁이에요. 그래서 가면이 필요해요..”
조네스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부끄러운 제목이 쓰여 진 표지를 내보였다. “이건 가면이에요. 안 그러면 이런 제목 같은 삶, 상상이나 하겠어요?”
조네스의 말이 맞는 지 아닌 지는 잘 몰랐다. 어쨌든 소설을 공유할 친구가 있다는,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느끼는 연대감에 마음이 든든했다. 느긋하게 흐르던 우리 일상.
그런데 회사 남자 직원이 보던 징그러운 <몰카>가 우리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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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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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명치에 세게 사랑과 평화! (1)
1.
"저 남자, 술에 뭐 탔어요!"
아차. 내 입은 왜 이리 말을 안 듣고 경솔하지?
고발당한 남자가 당황하는 사이, 뺨을 할퀸 빨간 드레스 는 그 추악한 술을 뿌려 친절하게소독까지 해주고 클럽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야.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푹 젖은 남자는 나를 노려봤다.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적반하장으로 내게 분풀이 할 셈이었다. 설마 이렇게 사람 많은데 날 때리거나 하진 않겠지? 하지만 남자는 옹졸해서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그래서 더 무섭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자도 일어났다. 나를 뒤쫒는 남자 좌우로 일행이 들러붙어 세명이 되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된 게 사람이 위험에 처했는데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을까?
곁눈질로 문의 위치를 확인하며 도망치려는 데 의도적으로 길을 방해하는 치도 있었다. 툭, 부딪히는 순간 소름 끼치는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왜 남의 산통은 깨고 지랄이야?"
"골뱅이 좀 먹겠다는데."
"저런 년은 쳐 맞아야 해."
이런 미친놈들.
남자 패거리는 실실 쪼개며 영화 속 양아치 마냥 주먹 뼈를 꺾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소리는 안 들렸지만 내 귀에는 우두둑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이미 돋은 소름 위에 또 돋을 지경이었다.
아, 나는 왜 이리 남자 복이 없을까. 클럽에 혼자 온 것도 바람 피우는 걸 팔 년 참아줬더니 보답으로 나를 찬 머저리 탓이었는데, 멋진 남자는 없고 대신 물뽕 타는 짐승 머저리들한테 봉변당하게 생기다니.
소리를 질러볼까 했는데 디제이가 한 패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하필 지금 볼륨을 높이고 함성을 유도한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닫자 남은 건 도망뿐이라는 냉정한 현실만 남았다. 방방 뛰는 사람들 틈을 억지로 비집고 나간 나는 사물함에 넣어 둔 가방을 챙길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야! 잡아!"
뛰어오는 남자들의 고함소리를 피해, 시린 도가니 부여잡고 열심히 계단을 뛰어올랐다. 계단을 거의 다 오르는 데 상처가 터지듯 벌컥 열린 문에서 시끄러운 클럽의 음악이 터져 나왔다.
발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거기 안 서! 썅년아!"
“너 같으면 서겠냐?” 하고 대꾸하며 캄캄한 밤거리로 한 발 내딛으려는 순간, 눈앞이 컴컴한 벽으로 가로막혔다. 아. 끝났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야만적인 상상에 무릎을 꺾였다. "살려 주세요. 저 사람들, 물뽕 하다, 제가 봐서."
메인 목으로 겨우 몇 마디 뱉으며 쓰러지는 나를 단단한 팔이 붙잡아 품에 안았다. 묘하게 포근한 느낌에 갑자기 긴장이 빠져나가며 신기하게도 안심됐다. 두서없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알았으니 진정하라고 손짓하는 거구는 여자였다. 손목에 편의점 비닐봉지가 매달려 있었고, 손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우유 통이 들려 있었다.
"손님. 저쪽으로 좀 물러나 있어줄래요?"
하고, 날 한 쪽 구석으로 보내더니 비닐봉지를 던졌다. 놀라서 엉겁결에 받아 들기는 했는데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 했다. 그 사이 입을 대고 우유 마셨다.
그녀의 존재에 놀란 세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하얗게 자국이 남은 입을 혀로 날름거리는 모습을 멍 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만사가 귀찮다는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저는 이 클럽의 보안팀장 조네스라고 합니다. 결정하세요. 경찰 한테 가실래요, 맞고 끝낼래요?"
"뭐?" 조네스의 말에 다들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이 년이 미쳤나? 감히 손님한테——."
조네스가 말을 끊었다. "물뽕질 하다 걸리신 분은 손님도 아니고, 백보 양보해 손님이라고 인정해 드려도 저희 업소의 위해를 가하셨기에 책임을 지셔야겠죠?"
남자들의 나머지 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어디 암컷이 건방지게 남자님에게 불경한 말을 지껄이냐, 수컷의 알량한 자존심이 상처 받았다 이거지.
조네스는 말을 이었다. "곱게 올라오세요. 계단서 잘못 맞으면 이 다 나갑니다? 임플란트, 비싸요.”
발끈한 남자들이 계단 위로 올라오는 동안 나는 조네스를 방패 삼아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물뽕 탄 술로 푹 젖은 남자와 일행 둘은 조네스와 홍대 밤거리에 대치했다. 모두 조네스 보다 한참 작았다. 조네스가 너무 큰 탓인 지도 모르겠다. 어깨가 어지간한 남자보다 넓었다. 잘록한 허리 아래로 걸쳐입은 트레이닝 바지 안에 강인한 하체가 엿보였다. 잔뜩 긴장한 남자들에 비해 우유를 들이키는 조네스는 느긋해 보였다.
빈틈이라 생각한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조네스는 입 안의 우유를 분무기처럼 뿜어냈다. 놀란 남자들이 허둥대는 사이, 조네스가 날아올랐다.
충격.
조네스는 공중에서 두 발로 맨 앞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 찼다. 세 남자가 꼬치구이처럼 강력한 발차기에 한 덩어리가 되었다. 프로레슬링의 드롭킥이라는 기술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차에 치인 것처럼 튕겨나간 세 남자 모두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고, 어느 새 착지한 조네스는 남은 우유를 들이켰다.
멋있다.
조네스가 손짓하며 내게 봉투를 달라고 정중한 말투로 부탁하고, 내가 건네주면서 손끝이 부딪히는 그 순간 이미 결정이 났던 것 같다.
나는 새로운 룸메이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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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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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낭자 갈버미 나가신다 (1)
갈버미, 나타나다. “이게 무슨 냄새야?” “어��, 어디서 산 짐승 냄새가 난담.” 빽빽한 저잣거리가 어느 새 텅 비었다. 훤해진 길을 느긋히 걷는 사람은 냄새의 주인만 남았다. 산사람의 몸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허나, 사람들이 줄행랑을 놓는 이유는 냄새 만이 아니다. 공포—. 동물은 냄새로 자기보다 강한 자인지 아닌지를 안다. 이들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떠오른 공포는 이 지역 노인들이 어린 아이에게 해 주는 옛 이야기의 잔상이었다. 옛 이야기에 따르면 산에는 ‘범도깨비’가 산다고 한다. 평소에는 사람의 모습이나, 그믐밤이 되면 호랑이로 변한다는 도깨비다. 고기를 좋아하고, 몸이 날래며, 힘이 장사라, 어지간한 포수 열이 덤벼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분명 냄새의 주인은 큰 키에 체격도 건장했다. 덩치도 커서, 어지간한 장정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있었다. 그러나 이 냄새의 주인은 누구를 해할 마음이 없었다. 그저 처음 내려온 저잣거리가 신기할 뿐이었다. 맨 발로 휘적휘적 걷는 그 앞으로 말이 세 기 달려왔다. 앞서 달리는 한 기, 뒤로 조랑말 두 기가 겨우겨우 쫓아왔다. 앞선 이는 세련됨이 없이 거칠게 말을 다루었으나, 옷은 도포에 갓을 쓴 양반이었다. 양반이 양반답지 못한 세월이 된지 오래였다. 말 엉덩이가 찢어져라 채찍질을 해대는 모습이 술 대신 날랜 달음박질에 이미 취해있었다. 뒤 따르는 부하들은 초립 쓴 자들로 등에는 큰 칼을 차고 있었다. 뺨에 칼자국이 커다랗게 난 자가 하나. 귀가 하나 없는 자가 하나. —살략계(殺掠契)다! 자리를 피했던 저잣거리 사람들이 아예 몸을 숨겼다. 널판지로 몸을 가리거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린 이도 있었다. 살략계란 검계(劍契)라고도 부르며, 칼을 차고 폭력을 휘두르는 동래모임이다. 이 마을은 스스로를 승냥이나 이리로 자칭하는 ‘시랑계(豺狼契)’가 판을 쳤다. 말 세 기는 시랑계에 속한 자들이었다. 앞서가던 말이 달음을 멈췄다. 뒤따라 오던 조랑말도 연이어 멈추었다. 길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걷는 야인(野人) 때문이었다. “훠이! 훠이! 비키지 못할까!” 칼자국이 길 한 가운데를 떡 하고 버틴 ‘방해물’에게 소리쳤다. “감히 양반 나서는 길을 갖바치 놈이 막아? 썩 비키지 못할까!” 칼자국 난 자의 말 대로, 냄새의 주인은 백정—갖바치였다. 천한 신분으로 조선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유목생활의 습속을 버리지 못한 이민족들. 고기를 도축하고 우유에서 기름을 짜내며 생활하는 이들이다. 가죽 옷을 입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짐작이 갔다. 가죽으로 만든 바지에 모피 조끼. 원래는 하얀 색이었을 누런 저고리를 입고 있다. 조끼가 잠기지 않고, 대중 묶은 옷고름도 찢어지려 한다. “가만, 저 거 여자 아니냐?” 구하곤이 말했다. “여자가 저렇게 크다니?!” “두억시니가 따로 없구나.” 부푼 근육 위로 더욱 봉긋히 부푼 젖무덤 때문이었다. 실로 냄새의 주인은 여자였다. 더벅머리에 가린 얼굴에는 쌍커풀 진 커다란 눈에 오똑한 코가 보였다. 커다란 입은 귀에 걸린 것 같다. 조선���서는 보기 드문 얼굴이다. 백정 중에는 이런 이형(異形)이 많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북방에서 온 유목민족의 후예였다. 습속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는 유전적인 요인도 있었다. —먹음직스럽군. 구하곤은 갖바치 여인을 눈빛 만으로 난도질해댔다. 호색으로는 마을 제일이었다. 성벽(性癖)도 기괴해서, 여자의 몸을 해하는 것을 즐겼다. 벌써 마을의 노비 처자 중 몇 명이 피해를 입고, 시집도 못갈 몸이 되었는 지 모른다. 구하곤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부하 둘은 놀라 말을 가까이 댔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목을 치시려는 겁니까?” 짝귀 물었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그랬다간 즐기지 못하지 않느냐.” “켁켁케헷,” 하고 숨이 넘어가게 웃으며 등의 칼을 뽑았다. 구하곤이 험한 짓을 할 때 앞장서서 채찍을 휘두르면서, “고기랑 북어는 팰 수록 연해진다,” 하고 농을 지껄이는 포악한 놈이었다. 칼자국은 켕기는 모양인지, “갖바치 년으로 갖바치 노릇을 하시려는 겝니까? 괜히 어디서 온 년인지도 모르는 데, 건드려서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말려 보았으나, 구하곤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구하곤과 짝귀가 내 달렸다. 칼자국은 할 수 없이 다가갔다. 순간— 갖바치 여인이 도약했다. 순식간에 두발낭상으로 구하곤의 칼을 걷어올렸다. 손목이 부러진 구하곤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여인은 말의 목덜미를 걷어차고, 반동을 이용해 공중을 걷듯 연달아 말 세 마리를 짓밟고 날아올랐다. 휘청하는 말 위에서도 짝귀가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여인은 칼을 피하며 둘의 초립을 잡아끌었다. 중심을 잃은 두 부하와 구하곤이 낙마했다. 그 위로 말이 쓰러졌다. 말에 깔려 다리를 다친 세 사람이 악다구니를 외쳤다. 구하곤이 입을 다물었다.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칼이 얼굴 바로 옆에 떨어져 꽂혔기 때문이었다. "이 칼 받아간다." 여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뽑아 들더니, 칼집을 도포에서 잡아 떼어 도로 집어넣었다. 칼을 들고 사라지는 여인의 등에 대고 구하곤이 외쳤다. "네 이년!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이름이 뭐냐!" "이름?" 고개를 뒤로 돌린 여인이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름… 갈버미." "뭔 놈의 이름이…." 구하곤은 채 말을 못 끝내고 혼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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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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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늘어진 외줄 2014-07-28
늘어진 외줄
손지상
         솔직히 인정하자면 나는 매우 비겁한 사람이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맺고 이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 일에 저속한 관심을 보이며 달려들었던 당신들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도대체 나와 지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그런 천박한 말을 퍼붓고 있단 말인가? 내게 사기꾼이라고 고소하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하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타인을 마음대로 비난할 권리를 주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권리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의 일환으로 나는 지나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상세히 고백하려고 한다.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나의 입장에서 서술된 지나와 지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리 양해를 구한다면, 나는 문학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 문장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거짓말쟁이의 눌변이나 조잡한 신변잡기에나 어울릴 만한,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배운 언문일치처럼 그냥 하는 말을 녹취한 것 같은 그런 수준의 문장으로 비추어져, 내가 이야기 할 고백의 수준을 무시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두렵다. 단순히 스포츠 신문이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피상적으로 소비되고 마는 그런 일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려한 미사여구나 비유와 은유를 이용해 인생의 단면을 예리하게 저며 내어 보여주는 문장력으로 세간을 들썩이게 만든 사건을 극화할 능력은 없을지라도, 평소 책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해온 사람으로써 비루한 수준이나마 진지한 문장을 흉내 내서 쓸 따름이다. 감상적이고 유치할 지도 모르나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한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역시나 전문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을 훈련받은 바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술집에서 내 경험을 이야기하듯, 내 기억과 인상에 의지해 과거를 더듬어 풀어놓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상은 입에 담배를 물고 옥상에서 기타를 치던 지나의 모습이다. 지나는 학교 락 밴드에 가입해 남자를 만났다. 지나는 나와 대학 동기다. 고위 공무원으로 지방 중소도시 군청에서 인맥을 과시하던 아버지의 명령으로 오직 공부만 하고 자란 내게 생소한 퍼머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학교에 나타나 스스럼없는 태도로 남자들에게 불을 빌려달라고 하는 지나는 충격적인 동시에 매력적이었다. 술자리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힘 잃은 우아한 다리로 비틀거리는 모습에도 위험을 무서워하지 않고 외줄타기 하듯 사는 사람 같이 보였고, 그 모습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당시의 나는 술이나 담배는 입에 대 본 적도 없이 서울로 유학 온 고지식한 ‘지방 찌질이’였다. 지나는 처음으로 느끼는 자유였다. 나는 지나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지나가 학교 밴드에서 남자를 만났을 때, 제대로 헤어지지 않은 곧 삼십 살이 되는 전 남자가 학교로 난입해 온 사건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나서지 못하고 멀찍이서 이를 바라보기만 할 정도였다. 과실 앞에서 서로를 떠밀며 싸우는 두 남자 사이에 괴로워하는 지나를 비난하는 친구는 없었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며 술자리에서 유쾌하게 떠들고 농담을 하는 밝은 지나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었고, 두 남자 사이에 끼어 괴로워할 때는 동기와 선배들이 나서서 변호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과거와는 얼마나 동떨어진 행동인지는 상관하지 않거나, 아니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순간순간에 집중해서 살았고, 순간순간이 즐겁기만 하면 되었다. 말 그대로 외줄타기 하듯 매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 자기 자신을 갉아먹어갔다. 그녀는 개미지옥이었고, 지금의 나라면 절대 가까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어리석은 풋내기였다. 지나를 보러 학과행사 뒷풀이에 빠짐없이 참석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바닥에 구토를 해가며 하숙방으로 돌아가면서도,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 술잔을 든 지나의 빛나는 얼굴을 곱씹으면서 행복해해했다.
하숙방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 하숙방은 당신들은 설마 21세기 서울 한 복판에 그런 집이 아직도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방이었다. 나는 거리가 가깝고 싸고 자유로워 이 방을 선택했는데, 대학 정문에서 1차선 도로만 건너면 바로 내 방이었다. 사람이 둘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었다. 기와집을 개수하여, 발 하나가 겨우 찰 정도로 작은 대청마루가 달린 출입문은 방음이나 방한이 전혀 되지 않는 미닫이문에, 불투명 유리가 끼어 있었고 잠금장치도 열쇠가 아니라 7자 모양으로 된 쇠붙이를 0자 모양으로 된 쇠붙이에 거는 원시적인 장금장치가 전부였다. 안에 들어가면, 벽은 황토벽으로 되어 겨울이 되면 냉기가 그대로 전달되어 들어왔고, 천장에는 아직도 나무 서까래가 남아있어, 거기다 못을 박아 옷이나 빨래를 걸기도 했다.  심지어 화장실은 공용이었고, 그나마도 관처럼 좁고 벽의 석회가 오래되어 무너져 내렸다. 시멘트를 바른 마당은 장마가 되면 물이 넘쳤다. 나중 일이지만 지나가 이곳에 추락해 앞니가 4개나 부러지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밤이면 가까운 내 하숙방으로 선배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곤 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마음에 드는 애가 있느냐고 대답을 강요했다. 각자 노리고 있는 신입생 여자애들하고 겹치나 확인하려는 속셈이었다. 그 중에는 강요를 받아 애매모호한 감정을 입 밖으로 내놓아버린 탓에, 진짜 자기가 좋아한다고 스스로 믿어버린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들은 서투르게 굴다가 선배들의 뒷공작으로 어설프게 고백하고 채여서 군대로 떠나기까지 했���. 후배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일을 의도적으로 망치게 조종한 다음, 마음이 흔들린 여자애에게 접근해 자기 것으로 만드려는 수작이었다.
나도 선배들의 취중 취조에 당해 지나의 이름을 이야기해버렸고, 그들은 웃으며 너에게는 무리라고 했다. 사실은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나의 주변을 계속 얼쩡거렸고, 지나는 나를 같은 과 친구 이상으로는 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와 지나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다.
나는 신입생 환영회에 참가하기 위해 강원도에 있는 청소년 수련원으로 향했고,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프로그램을 하러 간 사이 나는 술을 많이 먹어 방에서 쉬고 있었다. 나머지 남자 동기들은 여자 신입생을 보러 모두 프로그램에 참가하러 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방 안으로, 지나가 들어왔다. 놀란 나는 지나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고, 지나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왔다고 했다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라 했다. 내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이 지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브래지어의 후크를 벗는 소리와, 티셔츠를 벗고 다른 티셔츠를 사이 천과 천이 그리고 살갗과 천이 마찰하는 소리에, 나는 흥분했었던 것과, 귀와 발가락이 따뜻해졌던 것만을 기억한다. 그 이후로도 지나와 사소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은 기억하지만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 이후 지나를 보지 못했다. 다만 지나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밴드에서 만난 남자가 지나를 때리고, 의심하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지나가 엉망으로 붓고 멍든 얼굴로 학교에 나타나기 시작해 여자아이들이 이를 막으려고 했고, 그럼에도 지나는 남자친구의 편을 들고 매달렸다고 한다. 나는 그 동안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20사단의 장갑차 부대인 110대대에서 답답한 시간을 보냈고, 그 소식을 들으며 기생오래비라는 오래된 비유가 어울리는 그 밴드하는 남자의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짓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점점 지나는 잊혀졌다. 지나를 떠올리거나, 생각하거나, 기억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잊어버렸기 때문에 언제부터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된 때는 복학을 하고 난 뒤 다시 여름방학이 찾아온 때였다. 나는 예전에 살던 하숙방으로 돌아갔다. 내가 없는 사이 내 선배가 그 방에 잠시 살았다고 듣기는 했으나, 그 선배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방을 빼기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모습은 없다. 복학생 선배가 되어 한 밤 중에 양 손에 싸구려 안주와 소주를 든 남자선배의 기습을 당할 일이 없어진 나는 편안하게 늘어져 있다가,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제대한 동갑내기 군대 후임이었다.
“야. 뭐하냐?”
“집에 있지.”
“너 혹시 지나씨 아냐? 너 대학 동기라는데?”
“지나?” 그 순간 내 가슴에는 아주 작은 동요가 일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지금 같이 술 마시고 있는데, 나올래?”
내가 하숙방 바로 옆에 있는 술집이었다. 학교 앞 술집 특유의, 학생들의 단체 술자리에 기생하며 사는 서비스도 인테리어도 엉망인데다가 앉으면 푹 꺼지는 소파 밖에 없는 테이블에 지나가 앉아있었다. 힘없이 손목을 흔들며 웃는 지나의 살갑고 허물없는 태도에는 남자친구에게 얻어맞은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손목의 흉터를 알아차리고 기분이 무거웠다. 나는 아무런 동요도 느끼지 않는 척 기본안주를 주워 먹으며, 잔 하나 더 달라는 후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곁눈질로 지나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았다. 술 때문에 달아오른 동그란 볼, 약간 아래로 쳐진 커다란 눈, 취기가 오르면 보이는 어리광 부리는 태도도 여전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였다.
“금방 왔네?” 후임이 말했다.
“바로 옆에 살거든.”
그 말을 들은 지나가 나른하게 물었다.“아직도, 거기 살아?”  
대답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는 여전히 후임에게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여기 오면 나한테 보고를 해야지.”
“지랄하네.” 후임이 웃으며 잔을 건넸고, 내가 잔을 받아들자 소주를 채웠다. “아니, 저기, 트위터에서 지나씨를 알게 되었거든.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해서 보는데, 네 이야기가 나오잖아. 긴가민가 했는데, 이야기 하다 보니까 너 맞더라고. 그래서 불렀지.”
“내가 핸드폰을 바꿔서 그런 가 번호가 없더라고.” 지나가 말했다. 아니, 넌 내 번호를 저장한 적이 없어. 나는 잔을 입에 가져갔다. 소주가 씁쓸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가 말을 이었다. “나 저기 교회 옆에 사는데.”
“옆문 앞에?” 놀란 내가 물었다. 교회는 내 방에서 3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응. 너는?”
방금 내가 어디 사는 지를 알아차렸던 지나는 이미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내가 위치를 이야기하자, 심지어 지나는 내 방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내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살고 있던 선배와 그 방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고 했다. 내 방에 지나가 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술자리가 진행될수록 대화는 나와 지나가 나누는 과거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고, 공통화제가 적은 후임은 소외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후임은 술을 마구 들이켰다. 지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빤히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나는 몸에 달라붙어 라인이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반쯤 열어둔 지퍼 안으로 보이는 흰 티에 검은 브래지어 장식이 비쳐보였다. 여전히 몸가짐은 솔직한 듯, 헤픈 듯, 거침도 주저도 없었다. 예전보다 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 더욱 더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 같았다.
먼저 일어나자고 제안한 사람은 역시나 후임이었다. 지나가 더 이상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후임이 지나와 자게 놔둘 수 없었던 나는 집 근처인 내가 지나를 바래다주겠다고 했고, 불퉁스레 얼굴을 구긴 후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술값을 계산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언제 화가 났었냐는 하듯 태도가 바뀌어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꽤나 술값이 나왔고, 시간은 새벽 한시를 넘겼다. 지나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때서야 어쩌면 후임은 골치 아픈 짐을 내게 떠넘기려고 전화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를 부축하려고 어깨와 팔을 잡는데 자연스럽게 살이 닿고 풍만한 가슴이 팔뚝 부근에서 느껴졌다. 흥분을 감추려 애써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집에 데려다주려고 하는데, 그녀는 나를 뿌리치며 내 방으로 들어가는 오미터도 안 되는 골목길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내 모든 생필품을 공급하는 가게였다. 그곳에 들어간 지나는 술을 사겠다고 난리였고, 맥주 페트 두 병과 마른안주를 샀다.
종이컵과 맥주와 안주는 내 방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상 위에 놓였다. 맥주를 마시면서, 몇 학기를 다니고 있는 지를 묻거나, (이제야 알게 된)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의 험담을 하기도 하면서 피상적인 대화로 서로의 현재와 과거를 확인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지나는 상 앞에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웠다. 겉에 입고 있던 운동복은 이미 벗은 지 오래였다. 땀에 젖은 흰색 티셔츠 등 안으로 검은 색 브래지어 끈이 보여,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지나는 내 잔이 빈 것을 보고
“야, 있어봐. 내가 따라줄게.”
하고, 지나는 취한 손으로 말랑말랑한 PET을 덥썩 집어 들더니 내 빈 술잔에 따라주려다, 자신의 옷과 이불 위로 술을 쏟고 말았다. 놀란 내가 술을 닦아주려 했지만 너무 ‘개인적인’ 부분이 젖어서 내가 닦아줄 수 가 없었다. 지나가 짜증을 부리며 티셔츠를 벗자, 검은 브래지어 차림이 되었고, 나는 커튼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당황해서 가슴이 뛰기 시작하자 취기가 모두 순식간에 휘발되어버렸다.
“야, 이거 봐봐.”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금.
곁눈질로 겨우 본 지나는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선명한 검은 브래지어 어깨끈 바로 옆, 견갑골 위로 또 다른 검은 무늬가 보였다.
“이쁘지?”
타투. 갈기처럼 비늘이 돋은 도마뱀의 형상을 추상적으로 디자인한 문신이 희고 둥근 어깨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도마뱀이야. 도마뱀은 재생이랑 지혜를 상징한데. 이쁘지?”
“으, 응.”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뇌리에는 선명하게 문신이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옷 잠깐 여기다 걸어놓을게. 말리게.”
“티, 꺼내줄게.”
“아냐, 됐어. 어차피 크잖아.”
“아니. 그래도.”
나는 티셔츠를 하나 꺼내 주었다. 지나는 받아 들기만 하고, 입지는 않았다. 문신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나는 문신을 새기게 된 경위를 들어야 했다.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새겼지만, 다 새기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헤어졌다고 한다.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 지나는 갈증에 시달리는 듯 보였다. 아무리 맥주를 마시더라도, 물을 마시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갈증에.
“안 아팠어? 새길 때?”
“만져볼래?”
내가 주저하자 지나가 웃음을 터트리며 티셔츠를 입었다. 헐렁한 티셔츠가 몸 위에 늘어져, 오히려 풍만한 라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다음날 아침, 필름이 끊겼던 나는 두통과 갈증, 오한, 근무력증 같은 평범한 숙취증상과 함께 깨어났다.
방은 비어있었고, 지나의 운동복이 대신 그대로 의자에 걸려있었다. 술을 마시던 상은 어질러져있는 채였고 이불에서는 맥주 냄새가 났다. 시간이 늦었다. 나는 수업이 있어 씻지도 않고 서둘러 강의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서 수업 필기를 위해 아이패드를 켜자, 배경화면이 바뀌어있었다. 검은색 브래지어 끈, 풍만하고 살집 있는 어깨, 연약한 견갑골을 덮은 하얀 살갗 위로 보이는 검은 도마뱀 문신. 교수님이 들어오시자마자 전화가 왔다. 핸드폰에 어느새 지나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언제 저장한 거지? 전
화를 받자마자 지나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어디야.”
“강의실.”
“수업 있었어?”
“넌 어디 갔었는데?”
“슈퍼에 담배 사러. 야. 해장 안할래? 볶음짬뽕 먹자.”
수업을 팽개치고 볶음짬뽕을 주문한 뒤,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지나는 둥근 어깨와 브래지어 끈을 드러낸 채, 내 티셔츠를 입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숙취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볶음짬뽕을 먹은 뒤, 내 부축을 받으며 지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3층에 있는 원룸이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벽에는 록 밴드 퀸의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침대의 시트는 역시나 분홍색이었다. 경대 위에는 화장품이, 책꽂이에는 시집이, 싱크대에는 설거지 하지 않은 그릇이, 빨래 바구니에는 화려하고 요염한 디자인의 속옷이 잔뜩 들어있었다. 내 부축을 뿌리치며 침대로 몸을 던진 지나는 엎드린 채로 선잠에 들었다.
나는 나가려 했다.
“가지마.” 지나가 잠결에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종일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삼일, 거기서 나가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삼일이나 지났는지도 당시에는 몰랐다. 떠나려 하면 지나는 가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계속해서 자기가 얼마나 괴로운 지를 두서없이 털어놓다가 술에 취해 잠들었고, 일어나자마자 방에 있는 마리아 상을 향해 죄송하다고 울면서 술을 마셨다. 나는 같이 술을 마셨고, 괴로워하며 잠든 지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나가려고 문을 열라 치면 금방 깨서 히스테릭한 비명을 질렀고, 나는 지나를 품에 안고 진정시킨 뒤 다시 재워야 했다. 나는 개미지옥처럼 그 방에서 나가지 못했고, 시간의 경과도 몰랐다. 지나의 남자친구라는 차가운 현실이 나타나고 나서야, 나는 삼일이나 지났는지 알았다.
지나의 남자친구는 자기 열쇠로 방문을 열고 왜 이리 연락이 되지 않는 지를 따지려 들었고 나를 발견하자마자 화가 나 덤벼들었다.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켰고, 나는 그가 들어 올리는 힘 때문이 아니라 목이 졸리는 게 귀찮아 일어났다. 숙취와 피로로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나는 덩치가 꽤 큰 편이어서, 키는 나 만큼 크지만 밴드 기타리스트다운 날씬한 체형인 그에게 쉽사리 떠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지난 삼일동안 지나에게서 이 남자가 어떻게 자기를 범하고 어떻게 자기를 때리고 어떻게 자기를 괴롭혔는지를 들어왔었고, 그 때 마다 품었던 분노를 연료로 번뇌를 태웠었다. 그러나 아직 불완전연소 상태였거나, 분노가 여전히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혹여 잘생긴 그에게 열등감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으로도 멱살을 잡은 손을 뿌리치면서 그를 떠밀었다. 냉장고에 부딪힌 그가 튕겨 나오는 찰나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잡고 뒤흔들며 뺨을 후려갈겼다. 충격으로 나가떨어져서 그의 머리카락이 뽑혀서 손에 남았다. 헤어왁스 때문에 손바닥이 끈적거렸다. 엉망이 된 머리에 입 안이 터져 피가 흐르는 그는 지나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고, 지나는 갑작스러운 폭력과 고함으로 귀를 막고 히스테릭한 비명을 질러댔다.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려는 그를 발로 걷어차며, 당장 꺼지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 지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 모습을 지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키를 빼앗고, 문을 잠근 뒤, 비명을 지르는 지나를 품에 안았다. 몇 시간이나 울고 소리 지르던――그 사이 몇 번이고 옆방에서 거칠게 벽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고――지나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 사이 나는 모든 술을 버렸다. 일어나자, 지나는 술을 찾았고, 술을 모두 버렸다는 내 말에 나를 마구 때리더니 손목을 그었다. 이미 몇 번이고 그은 흔적이 하얗게 켈로이드로 돋아나있는 손목 위로 붉은 줄이 그어졌다. 그 위를 계속 긁어댔고, 손톱 밑이 빨갛게 변했다. 나는 놀라 거칠게 막았고, 약을 찾아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았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나는 방을 나왔다.
그 뒤로 나는 그녀가 손목을 그었다는 전화를 받으면 이를 치료해주러 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회전목마 타듯 남자를 갈아치웠고, 문제가 생기면 나를 불렀다. 나는 졸업을 하고 회사에 다니게 돼서까지 그녀와 술을 마시거나, 손목을 치료해주거나, 어깨를 마사지하는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그녀의 친아버지에게 전화를 받고 회사 점심시간 동안 전화로 그녀의 집으로 119를 부른 적도 있다. 그러나 우리 둘 사이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여전히 나는 그녀에게 아무 존재도 아니었고 나도 그랬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는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란 것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인생을 모두 정해주고 모든 선택에 길을 준비하고 자신의 감정을 모두 받아 줄 ‘아버지’를 찾았다. 자기가 어느 남자와 자고 어느 술을 마시고 어떤 옷을 사 입고 어떤 감정의 기복으로 괴로워하더라도 모두 받아주고 품어주는 ‘아버지’, 나는 그런 존재는 되지도 못했고 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될 마음도 없었다. 한밤 중, 아니, 새벽에 전화를 해 “손목을 그었다”는 말을 해도, 군소리 없이 나타나 손목을 치료해주고 건넛방에서 얌전히 잠을 자는 착한 사람은 되어줄 수 있어도, 그녀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내 인생까지 위태롭게 갉아먹으며 뒤흔들리는 외줄타기를 위한 중심잡기용 장대나 안전그물이 되어줄 역량 따윈 애초부터 내게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새벽 세시의 주말이었다. 계약직이기는 하나 직장인이 되고 난 뒤로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던 나는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금요일 이후로 핸드폰 배터리도 꺼내놓고 죽은 핸드폰처럼 잤다. 중간 중간 배가 고파서 깨거나 허리가 아파서 깼다. 그럴 때면 집 앞 슈퍼마켓에 가 컵라면과 스팸과 햇반을 사와 한꺼번에 컵라면에 말아 먹은 뒤 다시 잠을 잤다. 허리가 아프면 일어나 자리에 앉은 채 졸았다. 일요일 새벽 세시까지.
큰 소리를 내며 열린 미닫이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깬 내 눈에 빛이 들어왔다. 비인체공학적이고 투박한 삼십년은 된 스위치를 용케 찾은 지나가 켠 불이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부비며 몽롱한 정신을 다잡으려는 내게 지나는 맥주가 가득 담긴 종이컵을 들이밀었다. 술을 마시며, 지나는 억지로 술과 담배를 들이밀며――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중언부언 횡설수설, 자신이 얼마 전 겪은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그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고, 망가진 인형이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듯 방금 한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지나는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외줄타기에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틀거린다. 곧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지나가 지금 내게 부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가 되어 주기를, 안전망이 되어 주기를, 떨어지는 자기를 아무 말 없이 꼭 품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지치기 시작했던 나의 외줄타기도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후임이었다. 후임은 내게, 혹시 지나가 거기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지나는
“야. 내 타투 볼래?”
하고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지나가 웃옷을 벗고 브래지어만 입은 채로 등을 내 보였다. 견갑골 바로 위에는 내 아이패드에 아직도 배경화면으로 남아있는 문신이 보였다.
“도마뱀은 꼬리 잘려도 다시 나잖아. 그래서 상징한데.”
“일단 옷부터 입어.”
“우리 같이 하자.”
“여기 티셔츠.”
“너, 나 싫어?”
“술 다 마셨어?”
지나가 입을 다물었다.
“대답 안 해?”
“술 다 마셨냐니까.”
“대답 해!”
“뭘!”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나는 짜증이 나 있었고 왜 지나가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너도 똑같아.” 지나가 말했다.
“뭐가?”
“변할 거잖아.”
“너는?”
“내가 뭐?”
나는 후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걔랑 있었어?”
“……너랑 상관없잖아.”
“여긴 왜 왔어?”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걔랑 잤어?”
“뭐?”
“다신……,” 지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시에는 하지 못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적인 이유 때문인지, 지나는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지나를 받아들이려 했다. 이미 늦었다.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하고 지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다, 좁은 대청마루에 넘어져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지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져 기절해버렸다. 지나는 큰 부상을 입었다. 위의 앞니 네 개가 시멘트 마당의 턱에 부딪쳐 뿌리까지 완전히 뽑혀버렸다.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한 행동만을 따라가자면, 나는 지나를 깨워 위로 부축해 올려놓고,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뿌리까지 완전히 뽑혀 나온 이 두 개를 찾아 물컵에 담았다. 휴지로 지혈을 시키면서, 부모에게도 119에게도 전화를 하지 말라고 애원하는 지나의 이해할 수 없는 만류를 뿌리치고 응급차를 불렀다. 응급차에 지나를 실고, 또 다시 기절하여 응급차 침대에 누운 지나의 옷을 뒤져 핸드폰을 꺼낸 뒤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어머니는 “듣고 싶지 않고, 병원비도 내고 싶지 않으니 나중에 연락하면 따로 보내주겠다”고만 말하고 끊어버렸다.) 응급실에 가서는 계속해서 지혈시키고, 포카리스웨트를 사와 가글을 시켰고, 챙겨온 앞니 두 개 (뿌리까지 깨끗이 뽑혀나와 있었다.) 가 든 컵을 의사에게 건넸다. 이를 치료하는 동안 내내 나는 졸음을 참으며 옆에 있었고, 부모는 여전히 연락이 안 되었다. 지나는 계속 울었고, 잡히지 않는 택시를 잡는 동안에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해 내 부축을 받았다. 품 안에서 지나는 떨었다. 택시에 타서 가는 동안 지나는 계속해서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방에 뉘일 때 까지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침대 위에서 잠이 들자 나는 방을 나왔고, 시간은 오전 아홉시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자고 싶었다. 집은 엉망이었다. 나는 모든 쓰레기를 모두 모아다가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마당에서 피 묻은 앞니를 발견했다. 나는 이 앞니를 변기에 넣고 흘려버렸다.
그렇게 나와 지나의 관계는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사를 갔고, 지나도 그랬다. 조직 폭력배나 다름없는 남자와 사귀다 그의 집으로 들어갔고, 그가 차려준 강남에 있는 바의 마담이 되었다가 그에게 강간을 당했다며 내게 경찰에 신고해달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사진도 보냈다. 손목을 그은 사진이었다. 프로필 사진으로 보이는 지나는 과거와 같은 바람처럼 가벼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진한 화장과 지나치게 빨간 립스틱 아래로 더욱 더 지쳐보였다.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강간했던 남자와 다시 만나다, 헤어지고, 여러 남자를 전전하던 지나는 결국 정치인 A씨의 정부가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지나에게서 들었다.
새벽, 문자가 왔다. 자기가 정치인 A씨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위험해졌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지나가 보낸 문자였다. (카카오톡은 이미 차단해버렸었고, 문자는 전혀 모르는 번호로부터 왔었다.) 나는 무시하려 했다. 지나는 계속해서 문자를 보냈고, 내용은 점점 더 다급해졌다. 나는 결국 그 주소로 갔다.
가는 내내, 나는 왜 내가 지나에게 가야 하는 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다른 여자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지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도 지나같은 사람이었고 내게 의존하곤 했다. 이 여자와도 얼마 못가 헤어졌고, 내가 여자를 때린다는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덕분에 나는 회사를 옮겨야 했다. 여자들은 내 인생을 뒤틀어놓았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그들의 인생을 뒤틀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리광을 들어주는 부모가 자식을 망치듯. 애초부터 나는 부모가 될 자격도 연인이 될 자격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나의 집 문 앞까지 도착한 나는 초인종을 누르는 데에 주저하고 있었다. 새벽 세시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당시 내 머릿속에서는 선명하게 그날의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시시포스도 까뮈도 아니다. 계속해서 굴러 떨어지는 짐을 끝없이 지고 오르는 실존주의적 마조히스트 가축은 더 이상 되고 싶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손을 거두는 내 귀에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시간도 견디지 못하고 계단을 일부러 세게 밟으며 일층까지 내려왔다. 문 앞에 주차한 차에 올라타려는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 사시는 분이십니까?”
하고, 중년 남자가 물었다.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말투 말고는 눈길을 끄는 구석은 전혀 없는 남자였다. 내가 이 남자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게 다가왔다.
“실례지만, 몇 층에 볼일이 있어서 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칠층입니까?”
“예?” 칠층은 꼭대기 층이었고, 지나가 사는 방이 있는 층이기도 했다. 나는 기세에 눌려 고분고분 대답했다. “아, 아니요. 오층인데요.”
“엘리베이터는 칠층까지 올라오고 있던데요.”
“저, 계단으로 내려갔는데요. 저기, 누구시죠?”
“아, 경찰입니다.” 남자는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경찰이라는 직업도 다른 직업처럼 사람을 아무 개성 없는 평범한 얼굴로 변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층에 누가 비명을 질렀다고 해서 신고가 들어왔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지나 때문에 타오른 차가운 불도 잦아들고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신고를 받았으면 경찰차와 제복을 입고 찾아왔을 것이다. 이렇게 사복을 입고 왔다면 형사라는 말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경찰차가 보이지 않았고, 남자는 제복도 입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경찰은 언제나 짝으로 다닌다. 나는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어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단언한다. 그는 경찰이 아니다. 백보 양보해 경찰이라고 하자. 그러나 적어도 경찰업무 때문에 그곳에 온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 수상한 남자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남자는 지나의 방 번호를 이야기하며 내게 물었다. “여기 사는 분에 대해 혹시 아십니까?”
나는 모른다고 말하고 차에 올라탔다. 남자는 창문을 두들기며 내게 이름을 물었다. 나는 급히 차의 시동을 걸었다. 문득 이대로 가다간 차번호를 들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앞뒤에 달린 번호판을 보이지 않으려 방향을 틀면서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주차를 하다가, 차 옆 유리창에 작게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다들 알다시피, 다음 날 지나는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손목을 긋고 목을 맨 상태였다. 우울증 때문에 단순자살한 것으로 처리되었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더 이상 지나는 외줄을 타지 않는다. 늘어진 외줄에 매달려, 언제까지나 떨어질 걱정 없이, 영원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기를 밟으며.
    * * *
    이 글을 적는 동안, 나는 여러 차례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협박을 받았다. 유서가 발견되었다. 아이 아버지 이름으로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DNA 검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이 글을 적고 있다. 내 외줄타기가 시작되었다. 끝없이 남의 짐을 같이 들어주지 못한 업보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외줄에 올라탈 것이다. 늘어진 외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끝>
    초고: 2014년 7월 28일 월요일 오전 9:33~8월 13일 수요일 오후 5:42:27. (200 X 80 = 150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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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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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카추사 2014-12-26
카추사
손지상
    1.
“사모님, 제가 보기엔 텔레비전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쪽으로 문의 하셔야—”
“아니,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앙칼진 목소리로 사모님이 말했다. “여기에 연락하면 저기로 연락해라, 저기로 연락하면 또 다른 데로 연락하라, 아니 무슨 그렇게 책임의식이 없어요? 고객이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고칠 생각을 해야지, 그냥 대충 보고 모르겠다고 하고 말이야!”
부잣집. 거실을 가득 채운 고동색 서양 가구는 내 연봉보다 비싸 보였다. 벽걸이 텔레비전은 저렇게 큰 화면으로 볼 만한 방송이나 영화가 있나 궁금할 정도로 크다. 하지만 더 궁금한 것은 사모님의 거짓말이다. 내가 비록 비정규직 케이블TV 기사고, 텔레비전은 내 전문이 아니지만, 케이블TV 셋톱박스 문제는 아니다. 나는 장비를 챙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밝혔다. 그 말을 들은 사모님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교육을 받는 내내 얼음송곳으로 귓구멍을 쑤시듯 듣는 말이 있다. 고객이 화를 내면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라. 나는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죄송하다면 다야! 어디서 못배워 쳐먹어가지고.”
과거의 습관이 충동적으로 되살아났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꼭 쥐며 화를 안으로 꽉 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변한 걸 보이지 않으려고 감추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언젠가 옐레나에게 이런 집에서 호강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에만 집중했다. 입으로는 사과에만 집중했다. 교도소에서 안에서 욕을 먹어가며 검정고시를 따고, 빚을 내 가며 방통대 수업을 들은 결과, 나는 말로 내 감정을 설명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말할 수는 없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힘은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있으면 생각 없이 지껄여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돈이 없으면 아무리 깊은 지혜를 담아도 흰소리 취급을 받는다.
“있다가, 고객만족도 전화란 게 걸려 올 겁니다. 그때, 저기, 서비스에 만족한다고, 대답 좀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뭐? 만족? 만족 같은 소리 하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아파트 단지를 나와 다마스의 핸들을 잡을 때까지 무릎이 떨렸다. 겨우 자리에 앉았다. 한숨이 멋대로 나온다. 나는 노래를 틀었다. 카추사. 러시아 민요다. 한참 노래를 듣고 있는데, 조수석 문이 열렸다.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얼굴이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박장용이.”
“형, 잘 지냈어? 바뻐? 밥 먹자.”
우리는 국밥집으로 갔다. 국밥집에서 게걸스레 숟가락질을 하며, 박장용은 그동안의 인생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여전히 두서없다. 요약하면, 박장용이도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형님’ 덕분에 교도소를 다녀왔다.
“아줌마, 소주 한 병.” 박장용이 말했다.
“나 운전해야 해.”
“아이고, 씨발 준법시민 나셨네. 언제부터 우리가 법 따졌다고.” 술잔을 단숨에 비운 박장용이 목 깊은 곳에서 술 냄새를 뿜으며 말했다. “형. 한 건 만 더 하자. 준비는 다 되었어. 형은 숟가락만 얹으면 돼.”
“잘 먹었다. 여기는 내가 낼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까지 그러고 다니려고 그래? 막말로 왕년에 ‘선수’ 하면 윤두현이였는데, 이제는 씨발 완전히 쫄아붙었구만. 내가 뭐 그냥 하자고 하냐? 엉? 나도 싸나이야. 다 대의가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져도, 우린 그러면 안 되지. 일단 앉아봐.”
나는 앉고 싶지 않았다. 앉아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미 예감을 배신했다 큰 대가를 치룬 적이 있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 속삭이는 예감을 따르면 언제나 결과가 좋았다.
잔을 한 번 더 비운 박장용이 손짓했다. “앉아 보라니까, 형.”
“다음에 보자.”
나는 지갑에서 만원 짜리 하나를 꺼내 상 위에 올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박장용의 외제 SUV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새파랗게 젊은 꼬마 하나가 움찔 거렸다. 차에 올라탄 나는 박장용의 말을 곱씹었다. 대의. 의리. 아무 의미 없는 말. 속이 더부룩해졌다. 볼륨을 높였다. 음울한 카추사의 멜로디가 창문 밖으로 새어나갔다. 일을 하기가 싫어졌다. 차가운 멜로디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나는 핸들을 틀었다.
         2.
“겐차나요?”
약과 치킨을 사 들고 들어온 나를 본 옐레나가 놀라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평소와 달리 일찍 퇴근한 이유가 걱정된다는 의미다. 우리 둘 사이의 의사소통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옐레나는 아직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고, 나는 러시아어를 전혀 모른다. 짧은 말에도 최대한 많은 의미를 담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한다.
흐트러진 금발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옐레나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여전히 옐레나의 얼굴은 피곤하고 창백해 해보였다. 그래도 업소의 어두컴컴하고 독기 어린 조명 아래에서 시들어갈 때 보다는 나아졌다.
“잤어요?”
나는 질문의 대답을 기다리며, 치킨을 건네고, 상을 펴고, 약을 먹을 물을 뜨러 현관이자, 거실이자, 부엌인 곳으로 갔다. 내 가슴 높이도 되지 않는 작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는 사이, 깊고 허스키한 옐레나가 한 단어, 한 단어, 주의 깊게 발음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안, 아파요.”
“치킨 먹어요. 약 먹으려면 뭘 좀 먹어야지. 기다려요. 무 뜯어줄게요.”
기침. 정맥이 비치는 하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는 기침. 그녀가 아픈 이유를 나는 모른다. 옐레나도 모른다. 여권을 빼앗겨 밀입국자 신세인 그녀는 병원에 갔다가는 신분이 들통 나 러시아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내가 아무리 안심시켜도 이 말 만은 듣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온 아름답고 겁 많은 여자는 고향보다 추운 세파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내 눈치를 보더니, 안심시키려는 듯 옐레나는 더 열심히 닭다리를 뜯었다. 하얀 얼굴 때문인지, 희미한 입술 위에 묻은 붉은 양념이 진하게 보였다. 옐레나가 나와 함께 살게 된 날, 입가에 묻은 붉은 것은 피였다. 나이트 클럽에서 댄서로 일하던 그녀가 무슨 이유로 폭행을 당했는지는 모른다. 그걸 알아볼 겨를이 없었다. 몸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폭력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나는 구두 끝으로 풋내기 놈의 갈비뼈를 걷어차 산산조각 냈다. 옐레나는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나는 옐레나를 보려고 반년이나 업소를 드나들었었다. 한번은 꽃바구니를 보낸 적도 있었다. 옐레나가 나를 좋아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연히 지나치는 기차를 잡아 탄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놈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옐레나를 데리고 도망쳤다. 여권이고 뭐고 모두 뒤로 한 채.
알루미늄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놀란 옐레나가 얼어붙었다. 나는 옐레나를 손짓으로 안심시키고, 현관 근처에 걸어둔 작업용 혁대에서 드라이버를 하나 꺼냈다. 끝이 날카로운 일자 드라이버다. 반 지하 방이라 현관 앞에는 작은 계단이 있다. 나는 계단 위에 서서 말했다.
“누구세요?”
“형, 나 장용이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온 박장용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그리 취한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손에는 맥주병이 든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아이고, 형수님이 계셨네?” 계단을 비틀거리며 내려온 박장용이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오셨나? 러시아? 우크라이나? 스발씨발! 이거 인사 맞지, 형? 러시아 새끼들은 씨발 아주 인사도 예술로 해. 쓰발씨발!”
다가오는 박장용의 태도에 옐레나는 완전히 겁을 먹었다. 나는 박장용을 막아서면서, 등 뒤의 옐레나를 향해 안심하라고 눈짓하고, 문을 닫았다. 낡고 니스칠이 벗겨져가는 나무문이라 방음은 안 될지라도,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 것이다.
“앉아.”
“부엌에서 마시려고? 형수! 술상 좀 봐오지?”
나는 작은 상과 컵 두개를 꺼내 올렸다. 박장용은 맥주와 간단한 마른 안주를 꺼내 올렸다. 컵에 맥주를 따르는 박장용의 손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근데 진짜 인사가 쓰발씨발이야?”
“스빠시바, 그리고 그건 인사가 아니라 고맙습니다야.”
“이야, 러시아 여자랑 살더니 러시아 사람 다 됐네.”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여기 사는 지는 어떻게 알았어?”
“서운하게 이럴래? 형, 나도 그 씨발 새끼 때문에 빵에서 썩었어. 나도 피해자야.”
박장용이 말하는 ‘씨발 새끼’는 예전에 내가 박장용과 같이 있던 조직의 ‘형님’이다. 이동호. 고아였던 나를 거두고, ‘기술자’로 키운 장본인이다. 그 ‘씨발 새끼’ 밑에서, 나는 어떻게 때리면 사람이 죽고, 다치고, 불구가 되는 지 기술만 겨우 배웠고, 명령 받은 대로 기술을 사용하며 살아남았다.
나는 이동호 때문에 교도소에 갔다. 이동호는 오른팔이자 행동대장이던 김승옥에게 명령해, 다른 조직의 ‘창고장’을 빼앗는 작전 때문이었다. 범죄의 먹이사슬 꼭대기에는 중독이 있다. 술, 담배, 뽕, 떨, 그리고 도박. 그 중에서도 도박이 제일이다. 서울에서 밀려나와 지방도시로 전락한 이동호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경쟁조직을 칠 생각이었다.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창고장을 지키는 문방 놈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박장용은 이미 내뺐고, 형님은 살기 위해 나를 상대조직에 팔았다. 나는 린치 당했고, 경찰에 넘겨졌다. 조직 폭력배가 경찰에게 재산권을 주장하며 다른 조직의 건달은 넘긴다. 세상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
박장용의 말은 내가 아는 것과는 달랐다. 박장용도 그들과 가담한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는 것과, 이동호가 필리핀으로 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동호 그 새끼 지금 이 동네에 있어.” 박장용이 말했다. “그래서 나도 온 거야. 그러다가 형이 여기 있는 걸 알았고.”
“그걸 왜 내가 몰랐지?”
“그 새끼가 나서서 뭘 하지 않거든. 형한테 오른쪽 눈깔이 터진 뒤로.”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배신당하고 팔려나가기 전에, 나는 작별인사로 투척용 나이프를 던져줬다. 배운 대로 날아간 나이프가 눈에 파고들었다. 대가로 갈비뼈가 부러지기는 했어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도.
“김승옥이가 일을 대신 해. 창고장. 바다이야기 알지? 빠찡꼬 말이야. 돈이 엄청나. 거기다 가루장사도 같이 하거든. 빠찡꼬는 핑계고. 게임 하시면서 피곤하실 텐데 ��료수 한잔, 하고 서비스 주면서 뽕 타는 거지. 옛날하고 똑같애. 빠찡꼬만 하는 게 아니고, 비디오 경마에 뭐 이것저것 하는 모양이야. 기계로 하면 타짜 안 써도 되고, 쉴 시간 안 줘도 되고, 끝도 없이 뽑아먹을 수 있지. 인건비 안 들어, 문제 안 생겨, 딱이지. 위자료 뜯어야 되지 않겠어? 사람은 내가 모아놨어. 낄 거야, 안 낄 거야?”
문 안에서 옐레나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장용이 손을 뒤로 짚으며 몸을 젖히더니, 곰팡이 핀 천장을 보며 말했다. “이런 데서 살면 안 아프던 사람도 아프지. 좋은 데서 살아야 돼, 사람은. 형도 알잖아? 학교에서 살면 안 아픈 허리도 아픈 법이지. 내 동생들도 다 믿을만 해. 내가 보장할 게. 당연하지. 안 그러면 이 정도 큰일을 맡기겠어, 형? 이건 인과응보야. 이동호 그 개새끼한테 한방 먹일 기회라고. 잘 하면 그 새끼 사업을 우리가 완전히 접수할 수 있을지도 몰라. 돈만 있으면 못할 게 뭐 있어? 그리고.”
박장용이 술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돈이 있으면, 형수님도 안심하고 살 수 있을 거고.”
박장용을 따라, 나도 술잔을 비웠다.
         3.
밤. 골목은 드문드문한 가로등으로 조각나 있었다. 바닥에는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돌아다녔다. 박장용이 돌아가고, 옐레나가 잠든 사이, 나는 담배를 연달아 태우며 골목을 서성였다. 딱히 갈 곳을 정한 걸음이 아니라,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허리에는 연장이 든 혁대를 차고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쓸수록 흙탕물처럼 뿌옇게 변해갔다. 처음 검정고시 공부를 할 때 같은 기분이다. 답은 분명히 있을 텐데. 이 공식이 옳은 공식인지, 이 풀이과정이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일단 문제를 곱씹었다. 언제나 답은 문제 안에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안의 구조는 우리도 정확히 모르거든.” 나는 박장용의 말을 떠올렸다. “설계도를 구해보려고 했는데 없더라고. 물어서 알아낸 정보로는 3층 건물에, 1층이 창고장이랑 교환소 겸 금고, 2층이 사무소, 3층이 김승옥이 개인 집이야. 그리고 지하 주차장이 3층. 월요일 오전에 나이트클럽 수익금이나 기타 수익금 포함해 현금이 죄다 1층으로 모여. 김승옥이 명의로 된 유령회사 법인 통장으로 들어가지. 필리핀이랑 무역한다고 하는. 그래서 이동호 그 새끼가 필리핀으로 튀었다고 소문이 난 거야. 현금은 봉고차에 실어서 은행까지 가져가고.”
“그걸 노릴 생각이야?”
“아니. 보디가드가 엽총 들고 지프에 타서 동서남북 호위하면서 가. 수송 중에 덮치는 것은 무리야. 길거리에서 그랬다가는 눈길을 끌기 쉬어. 일요일 저녁 때 돈이 다 모여. 그때를 노려야 돼.”
담배가 다 떨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3시 반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곧 이 구질구질한 방하고도 이별이다. 주인집 마당의 나무를 향해, 나는 드라이버를 던졌다. 월세를 올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주인 아줌마가 아끼는 감나무다. 드라이버는 공중에서 천천히 사분의 일 회전 하더니 아름드리 몽통에 박혔다. 나는 연달아 다섯 개를 더 던졌다. 솜씨는 녹슬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없다. 먹고 살기 위해 기술을 쓰는 것이다. 다만 기술이 달라진 것 뿐 이다.
    일주일 뒤.
나는 사전작업을 하기 위해, 카추사가 울리는 다마스를 몰고, 김승옥의 창고장으로 향했다. 문방 꼬마 둘이 건물 앞쪽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문방은 경호원 역할을 하고 창고장을 지키는 일을 하는데, 밖을 지키는 문방은 외방, 안에 있는 문방은 내방이라고 부른다. 외방은 영역을 지키는 잔챙이들이 주로 한다. 둘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무전기로 연락을 취하더니, 다가와 창문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창문을 열자, 두 놈 중 하나가 담배를 튕기며 말했다.
“뭐야?”
“XX 케이블인데요. 점검 나왔습니다. 저기, 건물을 다 확인해야 하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며, 두 꼬마 놈이 건물을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마스를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내 귀에는 전자음의 잔향이 들렸다.
전기시설을 확인하는 척하며, 나는 미리 만들어온 퓨즈 차단용 원격장치를 두꺼비집에 설치했다. 전화를 걸면, 바로 퓨즈가 끊어지게 하는 장치다. 설치를 끝내고, 나는 두꺼비집을 내렸다. 방금까지 수 백 대의 오락기에서 나는 디지털 소음으로 가득 찼던 창고장 안이, 항의하는 손님의 아날로그 욕설로 시끄러웠다. 전기불도 나가 캄캄했다.
“돈 돌려줘! 정전 된 거 물어줘야 할 것 아니야!”
창고장 문 앞에 다다르자, 내방 양아치가 항의하는 손님들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반쯤 미친 도박쟁이 사이를 헤치고 들어간 나는 양아치에게 회사 상호가 붙은 조끼를 보여주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양아치는 나를 급히 안으로 들여보냈다. 안의 구조를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나는 교환실까지 들어갔다.,
김승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건달은 나 같은 신분의 사람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물건처럼 무시한다. 말을 알아듣는 우리는 물건보다 못하다. 그는 여전히 고집과 힘으로 가득 차돌 같았다. 오함마라는 별명도 붙었는데, 해머를 무기로 써서가 아니라, 오함마처럼 단단했기 때문이다.
이 방은 따로 전기계통을 이용하는 지, 불이 나가지 않았다. 단단하고 더러운 유리로 교환실을 나누어 놓았는데, 구멍이 뚫려 의사소통과 얼굴 확인이 가능했다. 여관이나 목욕탕 입구에 있는 관리실 같았다.
손님 중 하나가 나를 밀치고 들어왔다. 돈을 환불해달라고 항의하며 손님이 김승옥의 멱살을 잡았다. 짜증이 난 김승옥이 멱살을 뿌리치고, 양복 재킷을 젖혀 양복바지 춤 끼워둔 검게 빛나는 쇳덩이를 보여줬다. 권총이었다. 손님이 겁을 먹고 물러났다.
“이게 부산 촌놈이나 쓰는 토카레프인 줄 아냐?” 김승옥이 김승옥이 총을 꺼내들고, 홍콩영화의 주인공처럼 폼을 잡았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베레타야, 이 새끼야. 뒤지고 싶냐? 응?”
자기 자신은 주윤발이라도 된 양 굴었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홍콩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엑스트라 같았다. 손님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그 사이 안을 꼼꼼히 확인했다. 교환실 유리 안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고, 작은 텔레비전과 CCTV 모니터가 있었다. 금고는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이불 아래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자기들 범죄기록을 자기네 손으로 만드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CCTV로 녹화한 영상은 곧바로 지울 것이다.
“너 뭐야?” 김승옥이 나에게 고함쳤다.
“케이블 티비 기사입니다. 텔레비전이 안 나온다고 하셔서—”
“응?” 그는 내 얼굴을 뜯어보더니, 다가와 등을 후려쳤다. “꼬맹이! 꼬맹이 맞지?”
김승옥은 나보다 어깨는 더 넓어도, 키는 나보다 작다. 그런 김승옥이 나를 꼬맹이라 부르는 이유는 내가 정말 꼬맹이일 때 김승옥에게 칼 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 몸 구석구석에는 저 돼지가 남긴 칼자국 흉터가 있다.
“아.” 나는 놀란 척 연기하며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 “형님이셨군요.”
“지랄 까네. 새끼야, 쪽팔려서 모른 척 했지?”
“아, 아닙니다. 형님이신 줄 모르고.”
“언제 나왔어?”
“2년 되었습니다. 저, 일단 테레비 부터 손 보겠습니다.” 나는 셋톱박스를 조작하는 시늉을 했다. “다 되었습니다, 형님. 저기, 전기도 봐드릴까요?”
“뭐? 너 전기 볼 줄도 아냐? 잘 되었다. 씨발, 손놈 새끼들이 난리다. 전기 꺼졌다고.”
김승옥은 내가 전기를 고치는 척 밖으로 나오자, 따라 나왔다. 옆에서 내내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하고, 자기 자랑을 해댔다. 내가 이렇게 몰락한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인지, 내 옷차림이나 행색에 일일이 시비를 걸어댔다. 자기가 가진 롤렉스 시계나, 권총, 반지, 차와 비교했다.
“남자가 말이야, 째째하게 남한테 고개 숙이고 그렇게 살면 남자는 끝인 거야. 남자로 태어났으면 칼 뽑아서 크게 한탕하고 그래야지.”
그래, 곧 한탕 할 테니 기다려라. 허리에 찬 드라이버를 만지작거리며, 금방으로 뇌졸중에 걸릴 것 같은 살찐 목을 따 얼굴에 몰린 피를 뽑아주는 상상을 했다. 전기를 원래대로 돌렸다. 오락기가 요란한 전자음을 뿜어냈다.
“돈은 됐습니다, 형님.” 나는 미리 선수를 쳤다. “제가 감히 어떻게 돈을 받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김승옥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발로 밟은 찐빵을 삼킨 두꺼비 같은 얼굴에 잔뜩 주름이 졌다. 자기 딴에는 웃은 것이다. “역시 내가 잘 가르쳤어. 새끼, 은혜를 아네. 사나이야.”
김승옥이 또 내 등을 후려쳤다.
나는 이를 악물며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명함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문제 생기면 이리로 연락 주세요.”
“그래, 들어가라. 근처 오면 한 번 놀러와.”
김승옥의 형식적인 인사를 뒤로 하고, 나는 차에 올라탔다. 카추사를 있는 대로 크게 틀어놓고, 분함을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고 액셀을 밟았다.
         4.
이틀 뒤, 결전의 날이 왔다.
나는 바지춤에 잡지를 쑤셔 넣고, 옷으로 가렸다. 혹시라도 칼을 맞을 지 모른다. 카우보이가 허리에 권총이 든 홀스터를 차듯, 드라이버가 든 혁대를 찼다. 드라이버는 미리 잘 갈아두었다. 서부 영화 속 존 웨인이 그랬던 것처럼, 허벅지 까지 내려오게 느슨하게 찼다. 그럴수록 더 빨리 뽑을 수 있다. 군대에서 연대장 운전병 노릇을 하던 시절, 특전사 출신인 연대장이 옛날이야기를 자랑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 존 웨인처럼 홀스터를 늘어지게 찼다고. 시험해보니, 정말 그랬다. 순식간에 뽑았고, 상대가 뽑았다고 눈치 챘을 땐 이미 드라이버가 명중해 있을 만큼 빨랐다.
이 모습을 본 옐레나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부자리 속에 누운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했다. 입술에 핏기가 없다. 옐레나가 사진으로 보여준 고향 러시아의 풍경이 생각났다. 눈과 산, 그리고 무뚝뚝한 얼굴을 한 사람들.
“안가요.” 옐레나가 말했다. 가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괜찮아요. 집에 편하게 있어요.”
“겐차나요? 정말?”
“네. 짐 싸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왜요?”
“우리 여행 갈 거예요. 놀러 가는 거요.”
“어디?”
“따뜻한 데요. 좋아요? 저녁 때 올게요. 노래 듣고 있어요.”
나는 옐레나에게 선물했던 MP3로 카추사를 틀었다.
“안가요, 안 되요?”
“다녀올게요.”
“건강해요.”
나는 밖으로 나갔다. 옐레나가 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문을 나가기 전에, 나는 드라이버를 나무에 던졌다. 빠르게 던진 드라이버가 나무에 빗맞았다. 박히지 않고 바닥에 떨어졌다. 드라이버를 주어들다가, 한 번 더 던져봤다. 이번에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다마스에 올라타, 카추사를 틀고, 김승옥의 창고장으로 향하는 내내, 나무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드라이버가 생각났다.
작전은 이랬다. 전화를 걸고 전기를 끊은 뒤, 김승옥에게 전화를 건다. 김승옥을 밖으로 유인하면, 박장용이 동생들과 함께 나타나 그들을 제압하고, 돈을 털어 미리 답사를 다녀온 외곽지역의 버려진 창고로 가서 돈을 나누고 도망치는 것이다.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나는 노랫소리를 줄이고, 박장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몇 번 더 걸어도 마찬가지다. 포기하고 전화를 끊자, 창고장에서 수 십 명분의 욕설과 고함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김승옥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어디냐!”
“무슨 일이시—”
“야, 씨발 몰라서 묻냐? 어?”
“…죄송합니다.”
“어디냐고!”
“근처입니다.”
“또 전기 끊겼다. 당장 튀어 와!”
전화가 끊겼다. 박장용에게 다시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 상황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전개해야 하나? 박장용이 이 자식은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 2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전화가 다시 울렸다. 김승옥이었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개새끼는 옛날부터 변한 게 없다.
“가고 있습니다.”
“빨리 와!”
전화가 다시 끊겼다. 이대로 가다간 김승옥과의 연결이 끊어질 지도 모른다. 그랬다가는 창고장에 접근이 어려워질 지도 모른다. 아니면 김승옥이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업자를 부를지도 모른다. 그랬다가는 내가 한 장난질을 들킬 것이다. 한 번 더 박장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개새��.”
나는 차에서 내렸다.
김승옥은 나를 보자마자 욕을 해댔고, 나는 일단 퓨즈를 향해 달려갔다. 그대로 남아있는 원격장치를 회수하려는데, 손님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김승옥이 화풀이로 애먼 나를 걷어찼다. 바닥에 쓰러진 내 손이 저절로 드라이버로 향했다. 머릿속에서는 카추사의 멜로디와 함께, 옐레나의 조심해요 라는 말이 되풀이 됐다. 옐레나. 난 돌아가야 한다. 따뜻한 나라로 가서 옐레나의 병을 고쳐야 한다. 환하게 웃는 미소. 나는 퓨즈를 고쳤다.
혼란스럽게 뒤섞인 전자음을 찢으며 굉음이 달려들었다.
검은 색 봉고차였다. 운전석에 일전에 본 동생이, 조수석에는 12연발까지 가능한 엽총 윈체스터 수퍼 X3를 안은 박장용이 앉아있었다. 김승옥이 놀라서 베레타를 뽑아들었다.
세 발. 폭발음이 주차장을 부술 기세로 울려 퍼졌다. 구멍 뚫린 유리창에 수천 조각으로 네모난 금이 갔다. 운전하던 동생이 총에 맞았다. 앞 유리창과 박장용에게 피가 튀었다. 봉고차가 벽에 격돌했다. 창고장 안에 남아있던 손님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나는 드라이버를 던졌다. 손등에 드라이버가 박힌 김승옥이 비명을 지르며 총을 떨어뜨렸다. 나는 몸을 날려 총을 주어 들었다. 그 사이 김승옥이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찰칵 하고 접혀있던 날이 튕겨 나왔다.
“배은망덕한 새끼!”
김승옥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폭발음. 아까보다 더 큰 소리다. 메아리치며 증폭된 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차가 벽에 부딪히기 전에 뛰어 내린 박장용이 발포한 것이다. 산탄이 김승옥을 구멍투성이로 만들었다. 벌집이 된 얼굴은 더 못생겨졌다. 나는 팔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산탄이 튀어 팔뚝에도 박혀 있었다. 박장용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엽총을 휘두르며, 사냥에 성공한 원주민처럼 고함쳤다. 다행히 김승옥은 아직 죽지 않았다. 금고를 열려먼 죽여서는 안된다.
“이햐아아아!”
총을 바지 뒤춤에 숨긴 나는 차로 가 상황을 확인했다. 에어백도 없었는지, 이마에 바람구멍이 난 동생의 얼굴은 핸들에 부딪혀 엉망으로 뭉개져있었다. 바닥에는 피 묻은 누런 이가 굴러다녔다. 안에는 하나는 브라우닝 피닉스 헌터 5연발 엽총을, 나머지 하나는 커다란 가마니 여러 개를 든 풋내기가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뭐해! 당장 나와!”
내방과 외방 일을 보는 양아치들도 소란을 눈치 채고 나타났다. 나는 드라이버를 꺼내들었다.
“히하!”
허리춤에 엽총을 겨눈 박장용이 엽총을 난사했다. 양아치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놀라서 밖으로 나온 풋내기 둘이 어리둥절해 하자, 박장용이 총으로 안을 가리켰다. 나는 풋내기 둘의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전자음으로 시끄러웠다. 나는 둘을 이끌고 금고가 있는 안쪽 방으로 갔다. 생각한 데로였다. 이불을 치우니 들창문이 나왔다. 열어보니, 금고가 그 안에 있었다.
나는 5연발 엽총을 빼앗아 들고, 풋내기에게 명령했다. “가서 김승옥이 데려와.”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풋내기를 무시하고, 나는 CCTV가 저장되는 하드웨어에 엽총을 발포했다. 그 때 또 다른 격발음이 들렸다.
“뭐 하고 있어! 돈 안 챙기고!”
“박장용! 너 설마!”
“뭐? 김승옥이? 완전히 조져놨어.”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명령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해!” 박장용은 금고를 열었다. 비밀번호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뭘 멍하니 쳐 보고 있어! 돈 챙겨서 나가자!”
나는 그 말대로 했다. 돈을 채운 가마니를 채우려고 보니, 검은 봉고차는 운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내 다마스에 채웠다. 그 사이 흥분한 박장용은 윈체스터에 남아있던 산탄을 오락기에 쏟아 붓고, 내가 들고 있던 브라우닝을 빼앗아 들었다. 차에 타고 출발하려는 데 박장용이 늑장을 부렸다. 사이드미러로 보니, 박장용은 검은 봉고차를 운전하던 부하와 양아치들에게 확인사살을 가하고 있었다.
미친 놈.
사람들이 오기 전에 떠야 한다. 나는 박장용을 재촉했다. 다마스에 올라탄 박장용이 또 다시 괴성을 지르더니,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평소보다 무거워진 다마스는 느렸다. 나는 최대한 교통법규를 지키며, 천천히 움직였다. 긴장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카추사를 틀고 싶었지만, 차 안 분위기 상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6.
외곽으로 빠져나와, 주변 풍경이 논밭으로 바뀌자 긴장도 조금씩 풀려갔다. 다들 엄청난 돈에 신이 나 환호했다. 풋내기들이 가마니를 열어보고 싶어 했지만, 박장용의 윽박에 기가 죽어 그만두었다. 나는 돈 보다 옐레나가 걱정이었다. 박장용이 자신의 사격실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박장용이 거슬렸다. 예전부터 그랬다. 김승옥이나 이동호나 박장용이나 모두 똑같다.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가 강하다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자들. 너무 과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조용히 돈을 받고 이들과 헤어지고 싶었다. 옐레나와 함께 따뜻한 나라로 뜨고 싶었다. 창고로 향하는 내내 카추사를 듣고 싶었다.
창고 안으로 돈을 나르고 난 뒤, 나는 구석에 돌아다니는 상자 위에 앉아 쉬었다. 이제야 산탄에 맞은 팔이 아파왔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박장용과 풋내기가 돈을 정리하는 사이, 나는 콧노래로 카추사를 흥얼거렸다. 엽총은 안전을 위해 산탄을 모두 빼고 내가 보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손에 드라이버를 들었다.
눈앞으로 총구가 쑤시고 들어왔다. 고개를 드니, 엽총을 든 박장용과 부하가 서 있었다. 입술을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드라이버 버려.” 박장용이 말했다.
“총알도 없는 총으로 장난치지 마라.”
“있나 없나 한번 시험해볼까?” 장전음. “드라이버 버리라고.”
“갑자기 왜 이러냐?”
박장용은 웃기만 했다. 그 뒤에서 오른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 이동호였다. “오랜만이다. 씨발새끼야.”
이동호가 풋내기에게 손짓했다. 명령받은 풋내기가 드라이버를 뺏어갔다. 몸을 수색하지는 않았다.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동호가 내개 다가와, 주먹을 날렸다. 이를 악물고 미리 대비해, 이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대신 입 안이 찢어져, 쇠맛이 났다. 여전히 비겁한 놈이었다. 자기가 안전하다고 확신해야만 나서는 놈.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걷어찼다. 나는 뒤로 넘어졌지만, 바로 일어섰다.
입 안에 고인 피를 뺐으며 말했다. “박장용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뭐긴 뭐야? 배신당한 거지, 새끼야.”
“원래 장용이는 김승옥이 밑에서 일했거든.” 이동호가 말했다. “그래서 내 자리를 뺏은 그 돼지새끼 돈을 뻇으러 직접 나설 수 가 없었지. 그걸 네가 미끼가 되서 끌어내 준 거야.”
“그래서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나?”
박장용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러시아 년은 내가 잘 보살펴 줄테니, 걱정—!”
박장용의 옆구리에 풋내기가 나이프를 박아 넣었다.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는 박장용에게서 이동호가 엽총을 빼앗아 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박장용이 입을 뻐끔거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번 배신한 놈은 또 배신하게 마련이지.” 이동호가 엽총을 겨누며 말했다. “처음엔 날 배신해서 김승옥이한테 붙었다, 이번에는 김승옥이를 배신하고 나한테 붙는다고? 지랄하네, 새끼가. 인생이 그렇게 쉬운 잘 알아? 야, 윤두현이. 잘 봐라. 이게 니 미래다.”
폭발음. 창고 안이 흔들렸다. 박장용의 얼굴이 뭉개진 수박처럼 산산조각났다. 이동호와 풋내기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아간 사이, 나는 바지 뒤에 숨겨두었던 베레타를 꺼내 발포했다. 연사였다.
대강 조준한 데 다가, 한쪽 팔에 총을 맞아 조금 둔했다. 다섯 발. 그 중 한 발은 이동호의 배를 맞추고, 나머지 한 발은 풋내기의 팔꿈치를 뚫었다. 충격으로 팔이 뒤로 돌아갔고, 어깨 관절이 탈구 되었다. 짐승같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이동호는 응사했고, 나는 몸을 날려 피하려 했지만, 옆구리를 맞았다. 한쪽 눈이 안 보여 원근감이 없는 놈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피를 쏟는 배를 감싸 안으며, 이동호는 돈가방을 올려놓은 책상 뒤에 숨었다. 나는 구석으로 엄폐했다. 엄폐물 위로 산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재수 없게 정강이에 산탄이 박혔다. 불타는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잡아끌면서, 나는 카추사를 흥얼거렸다.
탄창을 꺼내보니, 총알은 한 발만 남았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드라이버를 주었다. 또 다시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건강해요. 총성이 메아리치는 창고에서 옐레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돈이 모두 내 것이 된다. 저 개새끼만 죽이면.
나는 몸을 일으키며 총을 쏘았다. 통증 때문에 총알은 빗나가고 말았다. 내 총성이 사라지기도 전에, 자기 차례라는 듯 이동호가 몸을 일으켰고, 목에 드라이버가 막혔다. 이동호가 허공에 엽총을 갈겼다. 나는 바닥의 나이프를 주어들고 다가갔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어야 했다. 이동호가 목의 드라이버를 뽑으려다, 나를 발견하고 손을 내저었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사, 살려, 살려줘… 의사를….”
“화려하게 현역으로 복귀하고 싶으셨다? 나한테 복수하고 싶으셨다?”
“돈은… 얼마든지….”
“돈? 돈은 신경쓰지 마. 난 얼마든지 가지고 있으니까. 나라면 그거 안 뽑을 거야. 동맥에서 피가 다 쏟아져서 과다출혈로 죽을 테니까. 멍청한 짓이지. 그러니까 내가 대신 뽑아줄게.” 나는 드라이버를 뽑았다. 피가 분수같이 쏟아졌다. “지문을 남길 수 는 없으니까. 확인사살은 안 하고 놓아주마. 그 사이 119에 연락을 하든 어쩌든 네 선택이야. 대신 난 돈을 가져가지.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라고.”
나는 돈가방을 모두 지고 밖으로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다마스에 돈 가방을 실고, 운전석에 올라탄 나는 시동을 걸었다. 카오디오에서 바로 카투사가 흘러나왔다. 가야지. 옐레나를 데리고, 남쪽나라로. 따뜻한 남쪽나라로. 액셀을 밟으려는 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이 점점 흐려진다.
<끝>
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오후 5시~26일 금요일 오후 10시
15700자, 3800단어, 원고지 8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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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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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뫼비우스의 띠를 두번 자르면 2014-07-22
뫼비우스의 띠를 두 번 자르면    
손지상
1. She's out of my life
1.1. 0
스스로가 겁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각한 윤신아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평소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방 안에서 평소 취미대로 원석 팔찌를 만들었다.
기분은 평소와 달랐다.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즐거웠다. 단단하게 지켜왔던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서, 작고 귀여운 물건을 만들고 있으면 기분이 차차 가라앉아 안정되어 갔고 세계는 견고해졌다. 따분하고 짜증이 날 때는 멍하니 허공을 보며 팔찌 디자인을 생각했다. 그렇게 자기 안의 연약한 부분을 감추어왔다. 작은 세계에 스스로 가두며.
작은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다.
원하는 원석을 고르고,
원하는 매듭을 짓고,
원하는 팔찌를 만들 수 있다.
모든 게 원하는 데로 움직인다.
그 작고 안정된 세계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내일은 대답을 해야겠지?
팔찌를 하나 완성 지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여전히 세상은 뒤흔들리고 있다.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어떻게?
답은 나오지 않는다.
팔찌를 한쪽으로 밀며, 그녀는 책상에 턱을 굈다.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1.2. 4`
밥 먹으라고 깨우는 어머니의 말에도 오태겸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기 전까지, 태겸이는 자기가 한 일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서 계속해서 이불을 걷어찼다. 그 때문인지 허벅지가 뻣뻣하게 당겼다. 허벅지의 근육통이 방아쇠가 되어, 태겸이의 머릿속에는 어제 있었던 일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제발, 태겸이는 생각했다. 다시 한 번만 기회가 찾아온다면. 다시 한 번만. 그럼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볼 텐데.
학교 가기가 무서워진 태겸이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빛에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부셔서 제대로 뜰 수 없는 눈으로 본 방에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많은 먼지가 떠다니며, 아침햇살에 반사되고 있었다.
대체 이불을 얼마나 걷어찬 거야?
태겸이는 중얼거렸다.
학교 가기 싫다.
학교에 가면 얼굴을 봐야할 텐데.
학교에 가기 싫다고 생각하는 내내, 태겸이는 움직였다. 습관대로,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착실하게, 태겸이의 몸은 등교준비를 마쳤고, 어느 새, 등교도 마쳤다.
‘3학년 2반’ 이라는 팻말 아래의 교실 문.
문을 열려고 뻗은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교실 안에는 신아가 있다.
“후우, 하아.”
심호흡을 한 태겸이는 비장한 마음으로 단숨에 문을 열었다. 눈은 질끈 감았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자기 자리를 향해 걸어가 자리에 앉아마자, 머리를 파묻고 엎드렸다.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랬다가는 건너건너 옆자리에 앉아 있을 신아랑 눈이 마주친다.
신아.
젠장.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부끄러워 옆구리가 간지러웠다.
하지만 고개를 들 배짱도 없는 자신은 더 부끄러웠다.
젠장.
차라리 자자.
태겸이는 중얼거렸다.
자는 동안에는 모든 게 다 없던 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시간이 어제로 돌아가 버렸으면, 얼마나——
    “오태겸. 오태겸. 야, 태겸이 좀 깨워라. 0교시 때 마다 자냐?”
웃음.
태겸이는 잠에서 깼다.
“어제 안자고 뭐했냐? 또 야동 봤냐? 적당히 봐라. 왼손 팔뚝 터지겠다.”
또 다시, 웃음이 터졌다.
태겸이는 전혀 웃기지 않았다.
신아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는 게 너무 싫어서, 계속 고개만 숙이고 수 천 번은 본 책상을 쳐다보았다.
“응? 왜 자리 하나 비냐? 누구 자리냐?”
“윤신아요.”
“윤신아? 아직 안 왔냐?”
“네. 안 왔는데요.”
그 말에 태겸이는 고개를 들었다. 신아가 안 왔다고?
“왜 안 왔냐?”
“몰라요.”
“아는 사람 없냐?”
대답이 없다.
“아주 잘 하는 짓이다. 얘, 요새 뭐하고 지내냐? 이상한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고 그런다면서? 그래가지고 대학 가겠냐? 어제도 모의고사도 영점 처리 돼서 불렀더니, 아주 건방지게 굴더니 말이야, 이 썅년이 이게 요새 아주 반항 질이네? 아는 사람 없냐?”
침묵.
“걔 친구 없냐? 하여튼 생긴 것도 싸가지 없이 생긴 년이 말이야.”
냐, 냐, 냐, 선생이라는 새끼가.
태겸이는 화가났다.
담임 선생님에게 화가 났다.
그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다.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하고, 어느 대학에 얼마나 진출시켜 점수를 따는 것 말고는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났다.
자기 캐릭터가 죽어도 아무 신경 쓰지 않는 격투게임 플레이어 같다.
어차피 다음 판에는 없던 일이 되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날 테니까, 어떻게 얻어맞고 어떻게 죽어도, 나랑은 상관없다는 태도.
플레이어는 경험과 기억이 쌓이고, 성장한다.
캐릭터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게임보다 영화를 더 좋아했다.
영화도 게임처럼 끝나면 모든 일이 0으로 돌아가 버리지만, 영화가 흐르는 동안은 모두가 변화를 겪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단 2시간 동안이라도, 그들은 살아있다.
우리는 그 캐릭터랑은 다르다고.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살아있어.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상처받고, 그걸 곱씹고 후회해야 한다고.
속물의 상징 같은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는 생각했다.
담임에게 학생들은 그저 대학입학실적이라는 점수를 더 높게 만들어줄 캐릭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아는 그 중에서도 가장 고르기 싫어할만한 캐릭터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전학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태겸이의 반으로 신아가 전학 온 이후, 태겸이와 신아는 줄곧 같은 반이었다.
하지만 둘은 전혀 친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어머니와 단 둘이 투룸 오피스텔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4년이나 같은 반이었던 태겸이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세한 사정은 잘 몰랐다.
신아는 친하게 지내는 애들이 없었다.
시내에서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봤다느니, 담배나 술을 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었고, 신아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운동은 발군인 신아는 키가 보통 남자애들보다도 컸고, 긴 팔다리도 유연하고 강인해 달리기를 하면 언제나 일등이었다. 그래서 육상부 고문 선생님이나, 소위 노는 애들이, 큰 키와 운동신경을 보고 접근한 적도 있었다만, 역시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아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거리를 두려는 아이처럼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언제나 하늘을 보면서 멍하니 있으니, 성적이 좋을 리도 없다.
그렇다고 운동으로 성적을 내 학교를 빛내지도 않는다.
신아는 점차 자발적인 왕따로 취급되었다.
학교는 신아를 공공연하게 무시했고, 아이들도 그랬다.
신경 쓰는 사람은, 중학교 3학년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오직 태겸이 혼자였다.
중학교 3학년 체육대회 날 릴레이에서 신아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태겸이는 치타처럼 빠르고, 우아하고, 과묵하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지금도 그랬다.
“안 온 애는 할 수 없고.”
선생님이 말했다.
“나중에라도 오면 교무실로 오라고 해라. 알았냐? 아, 오늘 전학생 오니까, 있다 0교시 끝나고, 의자랑 책상 좀 가지고 와라. 누가 가지고 올래? 아, 오태겸이. 니가 갔다 와. 그리고 있다 조회시간에는 쳐 자지 말고, 알았냐?”
태겸이는 고개를 숙이며 알았다고 말했다.
    창고를 향해 가는 내내, 태겸이는 어제 일을 곱씹었다.
어제, 신아와 태겸이는 선생님에게서 크게 혼이 났다.
둘 다 모의고사 때문이었는데, 태겸이는 모의고사 성적이 자꾸 떨어지기만 해서였고, 신아는 모의고사 성적표가 0점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신아는 아예 OMR 답안카드에 마킹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 갈 마음이 없냐는 선생님에 말에 신아는 그렇다고 대꾸했다. 신아의 말을 선생님은 도전이라고 받아들였고, 손을 대려고 했다.
태겸이는 화가 났지만 무력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신아는 선생님의 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선생님을 되쏘아보았다.
잠시 뒤 손을 내린 선생님이 꺼지라고 욕을 했다.
신아는 교무실을 나갔다.
불똥은 태겸이에게 튀었다.
이런 성적으로는 지방 잡대 말고는 못 같다고 철저히 무시를 당하고 난 뒤, 풀려났다.
화가 났다.
선생님에게.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하교 길.
태겸이는 방향이 다른 데도 신아를 뒤따라갔다.
신아는 태겸이를 알아차렸지만, 역시나,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1년 고등학교 3년 같은 반에서 보냈는데도, 태겸이와 신아의 관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태겸이는 생각했다.
이대로 손가락 사이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뫼비우스의 띠를 맴돌 듯, 아무런 퇴적 없이 시간이 흘러 스쳐지나가게 할 수 는 없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그는 몰랐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모습에서 연민을 느껴서 였는 지도 모른다.
이대로 졸업할 때 까지, 오늘과 같은 접점 없이 시간이 흐를 같다는 불안을 느껴서 였는지도 모른다.
입이, 제 멋대로 움직였다.
“있잖아, 신아야.”
침묵.
“나 있지…….”
침묵.
“너 좋아해.”
신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뒷모습만 보여서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태겸이는 어깨에 손을 대려 했다.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치타처럼, 신아는 달려가 버렸다.
    그날 밤 내내, 태겸이의 눈앞에는 신아의 뒷모습만 떠올랐다.
눈을 떠도,
감아도,
역동적으로 흔들리는 한 줄기의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부끄러움에 이불을 걷어찼다.
몇 번이고 걷어찼다.
    그래서 학교에 안 온 걸까?
태겸이는 책상과 의자를 들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부담스러워 학교에 안 온 건지도 몰라
지금도 무언가를 걷어차고 싶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신아가 학교에 안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의자와 책상을 낑낑대며 들고, 그는 교실 문까지 왔다.
발걸음이, 멈추었다.
담임선생님 옆에 처음 보는 남자애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잘 생긴 얼굴에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있어 단번에 전학생임을 알 수 있었다. 체격이 건장해, 태겸이보다 머리 반 개 정도 더 컸고, 주머니에서 손을 뺄 생각도 하지 않고 한쪽 다리에 체중을 맡기고 선 모습은 오만해 보였다.
잘 생긴 얼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난폭해 보인다.
의자와 책상을 내려놓고, 태겸이는 두 ���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전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씨익.
미소 지었다. 고르고 가지런한 하얀 이.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아, 태겸이에게는 그 미소가 파충류같이 느껴졌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담임선생님이 들어갔다.
잔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따라 들어가던 전학생이, 슥, 고개를 돌리며 속삭였다.  
“오태겸, 맞지?”
“응?”
“맞으면 가서 내 책상이나 갖다 놔. 어차피 안 앉을 거지만.”
전학생은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어리둥절해 하며, 태겸이는 뒤따라 들어갔다.
책상과 의자를 두고, 자리에 앉았다.
“조회 시간에 누가 쳐 자냐?”
담임선생님이 조례를 시작했다.
“일어나. 출석 부르기 전에, 먼저 전학생 소개 한다. 박두준이다.”
교실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전학생, 박두준이 말했다.
“윤신아는 어디 갔어? 안 보이네?”
전학생의 건방진 태도와 반말에 화가 난 선생님이, 항상 들고 다니는 당구 큐대를 잘라 만든 몽둥이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야, 인사 똑바로 안해?”
한숨을 내쉰 박두준이 말했다.
“어째 반응이 이렇게 똑같냐.”
그는 곁눈질로 담임선생님을 한번 힐끗 보더니, 이내 무시하고 반 전체를 향해 소리쳤다.
“윤신아네 집 주소 아는 사람?”
“이 싸가지 없는 새끼!”
화가 난 선생님이 몽둥이를 휘둘렀다가, 채 절반도 휘두르지 못한 채 얼굴에서 피를 쏟으며 주저앉았다.
마치 선생님이 어떻게 움직일 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양, 박두준은 정면을 본 채로 등주먹으로 선생님의 코를 으깨놓았다.
연골이 으깨져 코피를 쏟아내는 선생님의 뒷머리를 틀어잡으며 박두준이 말했다.
“발전이 없어요. 만날 똑같고. 기계적이야, 기계적!”
쾅.
말끝에 마침표를 찍듯, 박두준이 선생님의 얼굴을 교탁에 찍었다.
쾅.
쾅.
쾅.
뒤통수에 팔꿈치도 내리찍었다.
피투성이로 얼굴이 함몰되어 기절한 선생님의 몸이 교탁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리듯 쓰러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박두준은 지갑과 열쇠를 뒤져 꺼냈다.
충격으로, 교실이 얼어붙었다.
몸을 일으키며, 박두준이 말했다.
“윤신아네 집 아는 사람 없어?”
태겸이는 알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겁이 났다.
막 전학 온 박두준이, 어떻게 자기 이름과 신아의 이름을 어떻게 알지?
어떻게 저런 무자비하고 부조리한 폭력을 저지르지?
신아의 집을 알려주었다가는, 저 짐승 같은 놈이 신아에게 어떤 짓을 저지를 지도 모른다. 상상도 하기 싫다.
신아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태겸이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모든 일이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어제도 이랬어야만 했다.
고백, 말이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 텐데, 왜, 나는 고백을 해버렸을까?
“아무도 없어?” 박두준이 말했다.
침묵.
“양소윤, 모르냐?”
갑자기 자기 이름을 부른 데에 놀란 소윤이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하고 묻는 듯한 얼굴로, 박두준의 잘생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태겸. 너는?”
태겸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냐?”
“으, 응…….”
“너 윤신아 좋아하잖아. 그런데도 몰라?”
“!?”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사람은 태겸이 뿐만이 아니었다.
반 전체가 당황해, 어찌 행동해야할 지 몰랐다.
박두준은 차례로 반 아이들의 이름을 몇 명 부르며 탐문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반 아이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본 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박두준이 나가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고, 책임감 강한 반장 최재현이 교무실로 상황을 알리러 갔다. 기절한 담임선생님의 응급치료나 조치를 취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몇 명은 태겸이에게 박두준의 말이 사실이냐는 질문을 했다.
“뭐가?” 태겸이가 되물었다.
“너 윤신아 좋아하냐고.”
태겸이는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시에, 신아를 걱정했다.
지금 당장 학교 밖으로 나가 신아를 찾아야 할까?
아니면, 학교 끝나고? 고
그가 민하는 사이 창문 밖에서 자동차가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담임선생님의 자동차가 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전학생이 신아를 찾으러 간 게 분명했다.
수없이 많은 질문이 머리를 채울 상황이다.
그러나.
태겸이의 머리에는, 오직 신아에 관한 생각과 의문만이 채웠다.
왜?
왜, 신아를 찾지?
신아는 지금, 어디에 있지?
뒤따라 가야하나?
막아야 하나?
태겸이는 계속 고민했다.
머릿속의 다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모든 게 지나갈 때까지, 숨죽이고, 엎드리고, 비겁하게 있으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갈등은 계속되었다.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 까지.
    하교길.
태겸이는 신아와 전학생이 신경 쓰였다.
주변을 살피며, 몰래 신아의 집으로 향한 태겸이는 오피스텔 앞에서 낭패했다.
오피스텔에는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입구에 잠금장치가 되어 있어, 전자식 자물쇠의 숫자판 앞에 멈춰서야만 했다.
1층에 있는 커피숍이 있었다.
혹시 알지 않을까?
물어보려고 다가가는 데, 피자 배달부가 나타났다.
그는 숫자판을 눌렀다.
자주 배달을 오기 때문에 아예 번호를 알아둔 모양이었다.
몇 번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배달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태겸이는 4층을 눌렀다.
중학교 앨범에서 주소를 보아 기억하고 있었다.
4층, 신아네 집 문 앞에 선 태겸이는 또 다시 갈등에 빠졌다.
벨을 눌러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어제도 이대로 가다간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고 한 행동 때문에 후회했는데, 오늘도 그래야 할까?
벨 위 2cm 떨어진 허공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떨리던 손가락은 결국, 단추를 눌렀다. 집에 있는 리모컨 단추를.
    결국 태겸이는 신아네 집 벨을 누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밥상이 거실 한 가운데에 놓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상에 앉자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시작했다.
뉴스의 내용은 당황스러운 내용이었다.
청소년 남자 1명이 자동차로 인도의 행인을 공격하고, 운전하며 창문 밖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가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5명이 사망했다.
2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CCTV에 잡힌 남자의 모습이,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한 몽타주와 함께, 공개되었다.
어머니의 젓가락이 허공에 멈추었다.
“어머 세상에, 뭔 저런 놈이 다 있데?”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화면의 얼굴을 향해 혀를 차며, 콩나물국을 떠먹은 아버지의 관심은 금새 상 위의 돼지고기 산적으로 옮겨갔다.
태겸이는 벨을 눌러보지 않았던 일을 후회했다.
뉴스에 나온 몽타주는 직접 본 박두준의 얼굴보다 훨씬 잔인해보였다.
신아의 핸드폰 번호를 모른다는 사실마저 후회가 되었다.
잠을 자러 누워도, 계속해서, 신아의 뒷모습과 전학생의 몽타주 사진이 어른거렸다.
         1.3. 6`
밥 먹으라고 깨우는 어머니의 말에도 오태겸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기 전까지, 태겸이는 자기가 한 일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서 계속해서 이불을 걷어찼다. 그 때문인지 허벅지가 뻣뻣하게 당겼다. 허벅지의 근육통이 방아쇠가 되어, 태겸이의 머릿속에는 어제 있었던 일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제발, 태겸이는 생각했다. 다시 한 번만 기회가 찾아온다면. 다시 한 번만. 그럼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볼 텐데.
태겸이는 밖으로 나갔다.
신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온 몸이 굳어버렸다.
어제 고백 때문일까?
고백 한 것에 대답을 하러 찾아온 걸까?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안녕.” 신아가 말했다.
“아, 안녕.”
“어제,”
신아의 입이 잠시 멈추었다.
“는, 미안했어.”
“아냐, 내가 미안해.”
“바쁘니? 잠깐 시간 있니?”
“응?”
신아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나랑 잠깐, 어디 가지 않을래?”
         2. Remember the time
2.1. 0
윤신아는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어제, 하교 길.
방향이 다른데도 태겸이가, 뒤를 따라왔다.
거리를 유지한 채.
4년 전 처음 전학을 왔을 때부터 줄곧 같은 반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인 애였다.
별로 신경 쓰이는 존재도 아니었다.
선생님에게 불려가 0점 처리 된 답안지를 이유로 욕을 먹을 때 만큼이나,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태겸이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태겸이의 말이 어떤 의미인 지, 신아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뭐가?”
“아까, 그, 선생님이랑 좀…… 그랬잖아.”
“아.”
침묵.
차간거리를 유지하는 고속도로의 자동차처럼, 둘은 일정한 거리를 떨어져서, 걸었다.
불편하고 긴장된 침묵이 그 사이를 채웠다.
신아는 침묵이 싫지 않았다.
애초에 사교적인 대화를 나누기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사교적인 대화를 할 만한 소재거리도 별로 없다.
취미를 통해서 대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공통점을 찾아내 대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신아에게는 무리다.
태권도부 주전선수에, 키가 커서, 전학 오기 전에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별명이 시고니였다. 에일리언을 물리치는 여전사 시고니 위버 같다는 이유였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성격도 한몫했다.
이런 외모부터 오태겸과는 달랐다.
반면, 외모와 달리, 신아는 작고 귀여운 물건을 좋아했다.
신아의 취미는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를 만드는 일이다. 태겸이가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대화가 통할 리도 없다.
기억나는 말은 단 한마디였다.
“있잖아, 나,”
태겸이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긴장이 신아의 어깨를 딱딱하게 굳어지게 만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신아야. 나……, 너 좋아해.”
침묵.
신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얼굴을 돌릴 수도,
대답을 할 수도,
거절을 할 수도 없이,
그저 제자리에 붙박여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태겸이는 대답을 기다리며 뒤에 서 있었다.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질주.
단련된 두 다리가 땅을 박찰 때 마다,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대로 날아올라 모든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전학을 온 지 4년이 되어가는 데도, 아직도 그 코치가 뒤에서 쫓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중학 시절.
태권도부 에이스였던 신아가 전국대회를 준비하려고 태권도부실에서 샌드백을 차던 날의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태권도부실에서 신아는 혼자서 개인연습을 했다. 수 천 번 같은 폼으로 발차기를 하고 난 뒤, 반대 쪽 발로 다시 발차기를 반복하는, 단순하지만 과격한 훈련방법이었다. 파워를 기르기 위한 훈련이다. 신아는 또래 여중생보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었지만, 선천적으로 몸에 근육이 잘 생기지 않는 체질이어서 파워가 부족했다.
지금까지는 체격의 차이로 극복을 해 왔다.
앞으로는 무리다.
샌드백을 찬다.
한 번.
또 한 번.
쇠사슬이 삐걱거렸다.
한 가운데에, 발등이 꽂힌다.
신아의 발차기에는 열망이 담겨있었다.
발차기.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태권도를 해야 한다.
발차기.
대학에만 들어가면, 집에서 나와 살 수 있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발차기.
작고 귀여운 액세서리를 만들며 자립할 수 있을 거야.
발차기.
발차기.
발차기.
발차기…….
    시간은 이미 아홉시가 되었다.
바닥에는 땀이 흥건하게 흘러 웅덩이가 생겼다.
이 웅덩이에 몇 번이고 미끄러질 번 해, 바닥에 수건을 깔고 그 위에서 발차기를 했다. 발등과 정강이가 부어오르고, 종아리의 비복사근이 비명을 질렀다.
도복 상의는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땀으로 하얀 티셔츠가 완전히 젖었다.
태권도부실의 전신거울 위로 김이 서릴 정도였다.
“……삼천.”
발차기가 멈추었다.
쇠사슬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샌드백이 몸을 떨었다. 천천히 흔들린다.
지칠 대로 지친 신아가 바닥에 깐 수건 위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숨이 차서, 기도가 사포로 거칠게 긁혀나가 가슴이 찢겨나가는 기분이다. 어깨와 등에서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간 자리를 채운 피로의 무게가, 몸 전체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신아야.”
태권도부실 문이 열리고 얼마 전 새로 온 코치가 들어왔다.
신아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코치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신아의 코앞까지 왔다.
고개를 드니 거친 숨을 내쉬며 젖은 티셔츠를 내려다보는 코치의 얼굴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자 코치가 달려들었다.
“왜 이러세요!”
“어차피 아무도 없어. 너도 나 기다리느라 늦게까지 있었던 거잖아.”
코치가 어깨를 붙잡고 밀어붙였다.
이전부터 친절하게 대해 온 이유가 이거였다니, 신아는 환멸과 혐오로 저항했다.
지친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땀으로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넘어졌다.
이를 이용해, 코치가 덮쳤다.
몸 위를 짓누르는 코치의 냄새나는 숨결이 얼굴에 가까이 왔다.
비명.
신아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코치는 계속해서 변명을 했다.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
“너 때문이야. 네가 계속 날 유혹했잖아, 이 쌍년아. 네가 먼저——”
코치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추잡하게 부풀어 오른 코치의 사타구니를 신아가 무릎으로 쳐 올렸다.
짐도 챙기지 않고, 신아는 도망쳤다.
    다음 날.
신아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코치는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
태권도실에 널브러진 코치의 두 무릎은 반대로 꺾여있었고, 이가 모두 깨져있었다. 한쪽 눈은 안구가 터져 완전히 실명되었다. 신아가 자신을 유혹했고, 선생님으로서 이를 선도하려 했다가, 불량배를 시켜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코치가 주장했다.
신아의 주장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친구들도 자신을 변호해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 지역에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었다며, 신아를 탓했다.
얼마 안 되어 신아는 전학을 갔다.
완전히 낯선 지역이었다.
오피스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온 어머니는, 미워했다.
지역을,
오피스텔을,
자기 딸을,
철저히 미워했다.
안도한 것은 신아였다.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아.
집에 돌아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작고 예쁜 재료로 반짝이는 팔찌를 만들면 상처받지 않는다. 나가고 싶지 않아. 아름다운 것과 귀여운 것만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하지만.
이제는 그 작은 세계에서도, 무리다.
안심되지 않는다.
불안하다.
뒤흔들리고 있었다.
태겸이 때문이다.
고백.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공격이다.
경기 중에 배를 걷어 차였을 때 보다, 훨씬 더 아프고 겁이 났다. 가슴이 진정이 안 됐다. 가슴에 손을 올리는 순간, 신아는 스스로가 겁쟁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내일은 태겸이에게 대답을 해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2.2. 1
“신아야, 일어나.”
어머니.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
신아는 눈을 떴다.
평소처럼 기계적으로 교복을 갖춰 입고, 머리를 빗고, 아침을 거르고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등굣길에는 언제나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커피숍 사장인 스승님에게 인사를 보낸다.
“신아야, 안녕.” 스승님이 말했다.
그녀는 가죽 끈을 이용한 장신구를 만들어, 블로그에 작품을 찍어 올리고 장신구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가죽끈 공방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안 신아는 최대한 용기를 내어 가르침을 청했고, 그녀는 스승님이 되었다. 손님에게 언제나 미소와 사교적인 대화로 응대하는 스승님은 신아가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신아는 언제나 스승님이 주는 첫 커피를 마시며 등교를 한다.
“이거, 새로 만든 거예요.”
신아가 손목에 두른 가죽 끈 팔찌를 보여줬다.
“예쁘죠?”
“예쁘네? 오늘 학교 끝나고 사진 찍자. 블로그에 올리게. 응?”
커피를 건네던 스승님이 신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아, 혹시 무슨 일 있니?”
“네?”
당황한 신아는 급히 커피를 입에 가져가 얼굴을 가렸다.
“아, 아니요.”
“아니긴. 다 쓰여 있는데. 남자 문제구나?”
신아의 몸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 모습을 스승님은 놓치지 않았다.
“우리 신아, 다 컸네? 하긴 내년부터는 어른이니까. 어떤 애야?”
얼굴 한 가득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아보다 훨씬 키가 작아, 깨금발을 들어야 했다.
신아는 커피만큼이나 쓴 웃음이 나왔다.
자기보다 훨씬 키도 작고,
어려보이고,
귀여워 보이는 스승님이, 자기더러 다 컸다고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이러니가 오히려 신아의 마음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바로 이 힘, 타고난 내면의 밝음은 언제나 상대방을 손쉽게 무장해제 시켰다.  커피숍을 번성하게 하는 가장 큰 자산이었다.
“……어제 고백을 받았어요.”
“어머! 잘 됐다!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그게…… 제가 아직 대답을 못했어요.”
“무서웠구나?”
그녀는 신아의 사정과 마음을 부모님보다 더 잘 알았다.
“나쁜 아이니?”
“아니요. 그냥 좀, 갑작스럽게 그래서요.”
“하여튼 남자들이란. 지 혼자 고민하다가 갑자기 고백하고, 책임을 떠넘긴단 말이야. 신아야, 그래도 말이지. 그 아이한테 나도 너 좋아, 나는 너 싫어, 아직 잘 모르겠어, 이 중 하나로 답은 꼭 해주어야 해.” 스승님이 엄격한 말투로 말했다.
팔찌 만드는 기술을 가르칠 때와 똑같이 위엄 있었다. 꺼낼 말이 신아에게는 오래된 상처를 건드리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남자는 혼자서 이상해져서, 혼자 연애하다 혼자 헤어지고 혼자 상처받는단다.”
“알아요.”
“힘들 거야. 하지만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돼. 태권도 할 때도 그렇지? 받아치기 할 때 기다리고 있니, 아니면 공격하게 유도하니?”
“유도하죠.”
“마냥 기다리면 상대 선수가 룰도 어기고 덤벼들게 되어있어. 단번에 KO시켜버려. 알았지?”
“네.”
그날따라 커피가 썼다.
    건너건너 자리는 아직 비어있었다.
아직 태겸이는 오지 않았구나.
신아는 자리에 앉았다.
오면 뭐라고 하지?
일단 인사부터 해야 할까?
한 번도 태겸이를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통틀어 4년이나 같은 반이었는데도, 대화를 나누어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도 사무적인 대화였다.
선생님이 불러.
오늘 수업 뭐야.
사실 신아는 누구하고도 사무적인 대화 말고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 평소에는 쓸데없는 잡담 대신 새로운 팔찌 디자인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속에는, 예술가나 종교가가 얻는 고독한 열락과 비슷한 종류의 즐거움이 있었다. 대화로 얻는 얄팍한 즐거움과는 수준이 다르다.
하지만.
이번에 나눠야만 하는 대화는, 얄팍하지 않다.
이대로 무시하고 남은 몇 개월을 보낼까?
안 돼. 스승님 말씀이 옳아. 어떤 방향으로는 결판을 내야 해. 그렇지만, 어떤 방향으로 내야 하지?
난 태겸이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문이 열리고 태겸이가 들어왔다.
말을 걸려고 했지만 바닥을 본채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책상에 파묻어 버린 태겸이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0교시 내내.
항상 저래. 4년 내내 쭉. 무책임해. 자기가 좋아한다고 툭 던져버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신아는 계속해서 고민했고, 고민하는 사이, 담임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태겸.”
선생님이 말했다.
“오태겸. 야, 태겸이 좀 깨워라. 0교시 때 마다 자냐? 어제 안자고 뭐했냐? 또 야동 봤냐? 적당히 봐라. 왼손 팔뚝 터지겠다.”
천박해.
신아는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담임선생님이 싫었다.
옛날 태권도부 코치와 똑같은, 저열하게 뒤틀린 안면근육.
그때 느꼈던 불쾌감이, 얼굴 위로 다가오는 축축하고 냄새나는 숨결이, 다시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오늘 전학생 오니까, 있다 0교시 끝나고, 의자랑 책상 좀 가지고 와라. 누가 가지고 올래? 오태겸이. 니가 갔다 와라. 창고 어딘 지 알지? 그리고 있다 조회시간에 쳐 자지 말고, 알았냐?”
선생님이 밖으로 나갔다.
태겸이가 자기가 있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자, 신아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럴 거면 고백을 하지 말던가.
이기적이야.
남자들은 전부 다 이기적이야.
고민하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창밖에 보이는 구름 보며, 신아는 팔찌 디자인 생각에 억지로 몰두했다.
이번에는 구름을 테마로 원석 팔찌를 만들어볼까? 동대문에서 재료는 얼마에 떼올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담임선생님과 함께 전학생이 도착했다.
전학생은 얼굴이 잘 생긴 편이었지만, 신아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오히려 불쾌했다.
한쪽 다리에 체중을 맡기고 서서, 주머니에서 손을 뺄 생각도 하지 않는 모습이 오만해 보였다.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해, 운동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신아는 단번에 특정한 스포츠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근육이 굵직하지 않고, 하체가 발달한 늘씬한 체형. 수영, 농구, 아니면 태권도 같은 운동을 했겠지.
관심은 이게 전부였다.
눈을 돌리려는데, 전학생과 신아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전학생이 씨익, 미소 지었다. 하얀 이가 고르게 박혀있었고,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파충류 같아.
신아는 소름이 돋았고,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오만해 보이는 얼굴에는 코치나 담임과 마찬가지로 천박하게 뒤틀린 안면근육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이 느껴졌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걸까?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태겸이가 교실 뒤로 책상과 의자를 끌고 들어갔다. 신아와 잠깐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얼굴을 붉혔다.
“조회 시간에 누가 쳐 자냐?” 선생님이 항상 들고 다니는 당구 큐대로 교탁을 두들겼다. “일어나. 출석 부르기 전에, 먼저 전학생 소개 한다. 박두준이다.”
“반가워. 박두준이라고 해.”
점심시간이 되는 동안, 아이들은 박두준에게 모여 질문공세를 했다. 특히 여자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신아는 교실에서 벌어지는 전학생 축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신아는 머리가 혼란스러운 것이 제일 싫었다. 누군가가 자기 영역에 들어올 때 마다 그랬다.
제일 싫어하는 짓이다.
박두준이 그 짓을 했다.
박두준은 신아의 책상에 손을 올리고 섰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 속에 하얗고 촘촘하게 들어선 이가 빛났다.
“윤신아, 맞지?”
박두준은 신아가 예전에 다니던 중학교 이름을 댔다.
“중3 올라갈 때 전학 갔었잖아.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로 왔었구나. 반갑네. 많이 변했네. 못 알아봤어. 나 기억 안나?”
과거가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신아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망가고 싶다.
이 과장되고 양식적인 친절함, 예전에 그 코치——그 개새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자신이 싫어하는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과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는 교실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신아는 가방을 들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교문을 나설 때 까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신아야!”
등 뒤에서 태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늦었어, 이 바보야.
신아는 달렸다.
아무도 없는 오피스텔로 돌아와, 방문을 닫고 잠들 때 까지.
         2.3. 2`
“신아야, 일어나.”
어머니.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
신아는 눈을 떴다.
어제 일 때문에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핑계 댈 게 없을까?
고민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몸은 습관대로 움직여주었다. 교복을 갖춰 입고, 가방을 싸고, 머리를 빗고, 아침을 거르고 밖으로 나왔다.
스승님이 인사를 건넸다.
“신아야, 안녕.”
“안녕하세요, 스승님.”
스승님이 커피를 타러 들어간 사이, 머뭇거리던 신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스승님. 저 어제, 못했어요.”
“뭘?”
“그, 대답이요.”
“무슨 대답?”
“그저께 일이요. 고백.”
“고백? 어머! 잘 됐다!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네?!”
“축하해.”
“아니, 아직 대답 안했어요. 스승님이——”
“하여튼 남자들이란. 지 혼자 고민하다가 갑자기 고백하고, 책임을 떠넘긴단 말이야. 신아야, 그래도 말이지. 그 아이한테 나도 너 좋아, 나는 너 싫어, 아직 잘 모르겠어, 이 중 하나로 답은 꼭 해주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남자는 혼자서 이상해져서, 혼자 연애하다 혼자 헤어지고 혼자 상처받는단다.”
놀란 신아가 벙찐 표정을 짓는 것이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서라고 생각한 스승님은, 말을 이었다.
“힘들 거야. 하지만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돼. 태권도 할 때도 그렇지? 받아치기 할 때 기다리고 있니, 아니면 공격하게 유도하니?”
“……”
“응?”
“……유도하죠.”
“마냥 기다리면 상대 선수가 룰도 어기고 덤벼들게 되어있어. 단번에 KO시켜버려. 알았지?”
“……네.”
커피를 받아들고 학교로 향하면서, 신아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커피는, 변함없는 맛이었다. 학교에 돌아가자, 3학년 2반의 풍경도 어제와 다름없었다. 태겸이의 자리도 아직 비어있었다. 시간이 지나, 고개를 푹 숙이고 성큼성큼 걸어와 책상에 엎드린 태겸이의 모습도 어제와 똑같았다. 어제와 똑같은 변함없는 하루는 심지어 전학생이 온다는 말까지 똑같았다.
전학생?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고, 태겸이가 의자와 책상을 가지러 나갔다.
신아는 용기를 내서 앞자리에 앉은 양소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어제 전학생 오지 않았어? 박두준이라고?”
“누구?”
이상한 소리를 해서 기분 나쁘다는 듯, 소윤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신아는 핸드폰의 날짜를 확인할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꺼내 날짜와 요일을 확인했다.
날짜는 어제였다.
‘오늘’이 ‘어제’라고?
고민하는 사이 전학생이 담임선생님과 도착했다.
박두준이었다.
어지러웠다. 모든 것이 다 이상했다.
박두준은 어제와 같은 자기소개를 하고, 질문공세를 받은 뒤, 또 다시 뻔뻔하게 공간에 불쑥 들어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책상에 손을 대지도 않았고, 얼굴을 들이밀지도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데 서서 말했다. 대사도 어제와는 달랐다.
“저기,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신아는 이 말에 놀랐다.
‘어제’는 분명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던 박두준이 갑자기 나를 모른다고?
혹시 내가 꿈을 꾼 건 아닐까? 일종의 예지몽 같은?
“물어보면 안 되는 걸 물어본 건 아니지?”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신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이름 알잖아, 너.”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모르는 척 하지 마. 내가 어느 학교 다니다, 언제 전학 왔는지, 다 알고 있잖아.”
반 아이들은 드디어 미쳤구나 하는 표정으로 신아를 쳐다보았다. 모두들 불똥이 튈까 무서워 우르르 급식실로 향했다.
교실은 텅 비었다. 박두준과, 신아, 그리고 태겸이만이 남아있었다. 어색한 공기가 빈 공간을 채웠고 긴장이 그 위로 흘렀다.
“흠…….”
박두준이 지긋이 신아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맞아. 난 네가 누군 지 알아, 신아야. 전에 네가 중2까지 다니던 학교에 나도 다녔었거든. 그런데 그걸 넌 어떻게 안 건데?”
적당히 둘러댈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겸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와 박두준을 쳐다보는 모습이 어떤 의미인지, 신아는 이해가 갔다. 지금 나와 박두준 사이에 모종의 ‘썸’이 타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멍청이.
겁쟁이.
치고 들어오란 말이야.
뭘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어.
도와달란 말이야.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야?”
박두준이 말했다.
“나는 에픽 하이 좋아하는데. 넌?”
“왜 궁금한데?”
“그거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잖아?” 박
두준이 씨익 웃었다.
“흑역사가 다 드러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흑역사? 무슨 말이지?
“아직도 해? 태권——”
“마이클 잭슨.”
말을 자르며, 신아가 대답했다.
“마이클 잭슨 좋아해. 됐어?”
“마이클 잭슨?”
박두준이 이번에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이클 잭슨을 좋아한다고?”
“뭐가 이상한데?”
“아니, 그냥.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무슨 데스메탈 같은 걸 들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안 들어.”
“그럼, 이번에는, 음, 좋아하는 영화는?”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
박두준이 ‘어제’와 같은 오만한 태도로 책상 위에 걸터앉아, 아래로 신아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나한테 화가 많이 났나 보네? 너무 딱딱하게 굴 거 없잖아?”
화가 난 신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겸아.”
“으, 응?”
“나 조퇴할 거니까, 선생님한테 그렇게 전해줘.”
박두준이 어깨를 붙잡았다.
거칠게 뿌리치며, 신아가 말했다.
“함부로 손 대지마.”
“또, 도망가려고?”
신아는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박두준은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태겸이가 따라왔다.
교문 앞 까지.
아무 말 없이.
신아는 교문 앞에서 몸을 돌리고, 태겸이의 뺨을 때렸다. 갑자기 얻어맞은 태겸이가 어리둥절해 하자, 신아는 더 화가 났다.
“너,”
신아가 말했다.
“사람한테 고백을 할 거면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대화도 한 다음에 하는 거지, 4년 동안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그렇게 툭 던지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미, 미안해…….”
“눈치도 없어? 박두준이 저러는 데 왜 끼어들어서 말리지 않은 거야? 내가 널 좋아해주기를 바라면 내가 뭘 원하는 지 알아채려고 하고 행동하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다야? 사년 동안 옆에서 맴돌았던 것처럼, 입 다물고 주변 맴돌면서, 나 부담스럽게 하려고?”
침묵.
“네가 내일 이 말을 기억할 지 어쩔지 모르겠어. 다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게. 내 대답은 노야. 지금 이 순간 네 모습이 내일도 모레도 계속 된다면, 내 대답은 계속 노일 거고. 알았어?”
태겸이가 눈물을 터트렸다.
“미안……해…….”
맙소사.
“마음대로 해!”
쏘아붙이고, 신아는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신아는 진정되었다.
차갑게 식은 머리에 의문이, 떠올랐다.
설마, ‘내일’도, ‘오늘’처럼 ‘어제’와 똑같지는 않을까?
‘어제’와 같은 ‘오늘’을 채 소화하기도 전에 또 다른 ‘어제’가 찾아올 거라는 생각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속이 얹힌 기분이다.
‘오늘’과 같은 일을 또 겪어야 한다니. 박두준은 또 전학 와 제 멋대로 내게 접근해오고, 태겸이는 또 찌질하게 굴면서 내가 알아서 다 해주기를 바란다니.
최악이야.
어쩌면.
갑자기 머릿속에 생각이 떠올랐다.
확인해 봐야 한다.
책상 위에 책을 어질러놓고, 핸드폰도 일부러 꺼내기 힘든 벽과 침대 사이에 빠뜨렸다.
불안을 품고, 신아는 잠이 들었다.
이상하게, 잠들기 직전 태겸이가 생각났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2.4. 3`
일어나라고 하는 엄마의 말은 똑같았다. 핸드폰이 말해주는 날짜와 요일도 똑같았다.
다른 것은 책상 위였다.
책이 한권도 없다.
핸드폰 만 덩그러니 올라가있다.
    집을 나서,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을 때 까지, 마치 처음 겪는 양 연기해야 했다. 스승님의 조언과 태겸이의 찌질함, 선생님의 천박함을 지나 박두준의 등장까지 ‘어제’와 똑같았다.
연극배우들은 어떻게 매번 이 짓을 하지?
지겹고 답답했다.
    아이들은 점��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교실에는 박두준과 신아, 그리고 태겸이가 남았다. 이번엔 아예 어떻게 행동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신아는 박두준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각본대로, 박두준이 다가왔다.
신아가 먼저 선제공격을 날렸다.
“이번엔 뭘 물어볼 건데?”
각본에 없는 갑작스러운 신아의 공격에는 천하의 박두준도 당황한 듯 보였다.
잠시 뜸을 들여 각본을 확인한 뒤 박두준이 말했다.
“무슨, 말이야?”
“너, 내 이름 알잖아? 아니야?”
“뭐라고? 난 널 처음 보는 데? 너 좀 특이하다.”
“모르는 척 하지 마. 내가 어느 학교 다니다, 언제 전학 왔는지, 다 알고 있잖아.”
신아는 용기를 내서, 다시는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던 중학교의 이름을 말했다.
“너도 다녔잖아.”
“흠,”
박두준이 팔짱을 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낯이 익네.”
뻔뻔한 연기.
대사는 달라졌어도 ‘어제’와 똑같은 과장되고 양식적인 위선적이다. 신아는 박두준이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가리려고 가면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기억나네. 윤신아 맞지?”
박두준이 말했다.
“날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기억한 게 아니야.”
“호오.”
박두준이 책상 위에 걸터앉아, 웃음을 터트렸다.
“신아 네가 좋아하는 가수가 마이클 잭슨이었지? 나돈데. 역시, 우린 운명이었어.”
“에픽 하이 아니었어?”
“어제부로 바뀌었어.”
“관심 없는데.”
“앞으로는 관심 가져야 할 걸. 널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 나 밖에 없으니까.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이 믿을 수 없지. 말해줘도 누가 믿겠어? 아침에 일어나면 시간이 다시 아침으로 리셋 되어 버린다고 말이야.”
박두준의 말에 놀란 사람은 태겸이었다.
신아는 태겸이의 머릿속이 훤히 보였다. 시간이 리셋 되고 있다고? 그럼 난 매일 ‘오늘’을 되풀이해야 한 단 말이야? 고백하고 차인 바로 다음 날을?
박두준은 이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 우주에서 너와 나, 단 둘이서만 시간을 되풀이하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운명이라고 생각 안 해?”
“너, 정체가 뭐야?”
“설마 내가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이렇게 사용하지는 않았겠지. 나도 너랑 마찬가지로 이 시간의 감옥에 갇힌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새로운 시간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아가는 동안, 너랑 나는 계속해서 같은 시간을 반복하고 기억해야 하지. 어쩌면 영원히 이래야 할지도 몰라. 그러니,”
박두준이 신아에게 손을 뻗어 어깨를 살짝 잡았다.
“사이좋게 지내자고. 앞으로도 쭉.”
“손 치워.”
신아가 박두준의 손을 뿌리쳤다.
“넌 너 혼자 시간을 반복한다고 생각했잖아. 그래서 그걸 이용해서 나에 대해 파악하고 나한테 접근했잖아. 목적이 뭐야? 그리고 정체가 뭐야?”
“하, 이거,”
박두준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얼굴에는 잔인한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생명의 은인한테 너무하는데?”
“생명의 은인?”
“자세한 이야기, 듣고 싶어?”
침묵.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신아는 적대적이었지만, 박두준은 한결 여유로웠다.
둘 사이에 낄 수 없는 태겸이만이 안절부절못했다.
“어차피 내일 똑같은 수업이잖아,”
박두준이 말했다.
“나가자.”
신아의 손목을 잡아챈 박두준이, 강제로 잡아끌었다.
“이거 놔!”
신아가 버텼다.
역부족이었다.
“네가 아무리 중학교 때 전국대회 나갈 만큼 대단한 태권도 선수였어도, 결국은 여자애야. 남자 힘은 못 당해. 그리고 난 보통 남자가 아니거든.”
끌려가면서, 신아가 태겸이를 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3. Smooth criminal
3.1. 3` (계속)
태겸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몰랐다.
어제와 같은 용기는 왜 다시 나지 않는 거지? 난 왜 이리 겁쟁이인 거야.
젠장.
젠장.
젠장.
태겸이가, 외쳤다. “놔.”
“응?”
박두준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여 태겸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는 모습이 위협적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안 들렸는데.”
“그 손 놓으라고.”
저항하던 신아마저 놀라서 태겸이를 쳐다보았다.
“하하하.”
일부러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들어 올린 박두준이 손을 놓고, 주먹을 날렸다.
보디블로.
정타다.
얻어맞은 태겸이 바닥에 쓰러지자, 배를 걷어찼다.
명치를 찌른다.
숨이 막혔다.
“찌질한 새끼가,”
박두준이 말했다.
“어디서 나대고 지랄이야!”
발길질.
흉곽 안까지 파고드는 발길질에, 내장이 다 터져나가는 기분이다.
머리가 멍해진다.
배가 뜨겁다.
흥분으로 몸이 붕 뜨는 감각이 찾아와 이성도 함께 휘발되어 날라가고, 몸 속에 그동안 잠들어있던 투쟁본능에 불이 붙었다.
“태겸아!”
신아가 발차기를 날렸다. 태권도 선수 출신답게 반사적으로 날린 중단 발차기였다.
두 번.
세 번.
효과가 없었다.
몸통으로 날아드는 중단 발차기를 무시하며, 박두준은 태겸이의 배를 걷어찼다.
당황해 공격을 멈춘 신아를 향해, 박두준이 태겸이의 얼굴을 짓밟으며 말했다.
“몇 년을 운동을 쉬어 놓고, 그 정도 공격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태권도 수준으로는 나한테 못 덤벼.”
쉬익.
날카로운 숨소리를 내며, 박두준이 몸을 돌렸다. 공간을 가르며 날아든 하단 발차기가, 신아의 허벅지를 때렸다.
신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태권도는 낙법도 안 가르친단 말이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너를 내 손에 넣기 위해서 말이야. 그 때 그 코치 새끼를 발라버린 게 누군데. 바로 나야.”
“네가……!”
몸을 일으키는 신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너 때문에……!”
“설마 그렇게 일찍 이사 갈 줄은 몰랐어. 의지할 곳 없이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 내가 나타나려는 계획이었는데 말이야.”
“뭐라——”
신아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박두준이 일어나려는 신아의 팔을 발로 후렸다 다시 쓰러지는 충격으로, 신음을 질렀다.
땅바닥에 쓰러진 태겸이의 눈이 신아와 마주쳤다.
그 순간.
‘어제’와는 다른 감정이, 끓어올랐다.
이가 서로 부서질 정도로, 꽉 맞물렸다.
주먹이 떨린다.
박두준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근육에, 힘을 불어넣었다.
무력할 지라도, 무책임하지는 않겠어.
설령 내일 다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태겸이가, 움직였다.
얼굴을 짓누르는 박두준의 발을 두 손으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박두준의 정강이에, 아마추어 레슬링 태클을 하듯 밀어붙였다.
허를 찔린 박두준이 뒤로 넘어졌다.
의자와 책상이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바닥에 볼펜이 굴렀다.
주어든 태겸이가, 달려들었다.
팔뚝으로 목을 누르고, 볼펜을 박두준의 눈에 가져다댄 태겸이가 외쳤다.
“신아야! 도망쳐!”
머뭇거리며 일어나는 신아에게, 한 번 더 외쳤다.
“도망쳐! 얼른!”
신아에게 말하는 동안에도, 태겸이의 눈과 볼펜은 박두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눈을 찔러버릴 거야.”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럴 배짱도 없는 새끼가.”
틀린 말이 아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젠장.
젠장.
젠장.
정신 차려. 각오하라고.
“시간이 반복 된다면서?”
태겸이 말했다.
박두준의 안구 위 몇 밀리미터 되는 허공에서 펜 끝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 내가 네 눈 찔러 봤자 난 기억 못하잖아. 그리고 넌 멀쩡하게 돌아갈 거고. 그 고통은 너만 기억하겠지. 그럼 못할 게 뭐 있어? 응? 어차피 기억 못하는 줄 알면 못할 짓이 없거든. 신아야, 어서 가!”
“태겸아……, 미안해.”
“내일 보자!”
신아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안도감과 함께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렸다.
틈이 생기고 말았다.
박두준이 펜을 든 태겸이의 손목을 잡아 펜 끝의 방향을 빗겨내며, 주먹을 휘둘렀다.
평소 싸움을 해 보지 않은 태겸이의 맷집은 생각보다 약했다.
맷집은 육체의 내구도만이 아니라, 육체에 가해진 충격이라는 정보에 뇌가 얼마나 익숙하냐 와도 관계가 있다. 마치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 호러영화는 무섭지 않듯.
박두준의 주먹은 처음 본 호러영화와도 같았다.
처음으로 제대로 턱을 얻어맞은 태겸이의 뇌가 두개골 내부에서 좌우로 흔들렸다.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태겸이는 기절했다.
    태겸이가 정신을 차린 곳은 양호실이었다.
선생님은 무슨 일이 벌어 졌는지 말하라고 추궁했지만, 태겸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실에 돌아가보니, 신아도, 박두준도, 없었다.
하굣길.
주변에 박두준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 가 경계하면서, 신아의 집으로 향했다.
출입구에는 전자자물쇠가 달려있었다.
번호를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커피숍이 보였다.
여기 주인이라면 비밀번호를 알지 않을까?
태겸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는 어른 여성의 육감적인 몸매가 하늘하늘하고 부드러운 원피스에 드러났다. 태어나 처음으로 주먹다짐을 한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태겸이에게는 너무 자극적이었다.
이러면 안 되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는 데, 커피숍 주인은 어느 새 눈앞에 까지 다가와 있었다.
평균 키 밖에 안 되는 자신보다 작은 주인이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말씀 좀 여쭐——”
“혹시 이름이 오태겸, 아니에요?”
“네?”
“맞구나. 신아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신아한테요?”
“네. 신아 남자친구죠? 오늘부터 1일이라고 그러던데.”
“네?!”
당황한 태겸이의 반응을 평범한 남고생의 부끄러움이라 해석했는지, 커피숍 주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커피 한잔 하고 가요. 어차피 신아 지금 없으니까. 아메리카노?”
“없다고요?”
“몰랐어요? 친척이 일이 있다고 급하게 내려가야 한다던데요? 남자친구가 혹시 찾아온다면 그렇게 전해달라고.”
남자친구?
내가?
“핸드폰이 고장 나서 연락을 못한다고. 내일 연락한데요.”
“내일…….”
과연 ‘내일’이 올까?
“라떼가 괜찮을까나?”
“아, 네.”
커피숍 주인이 커피를 만드는 동안, 태겸이는 생각에 잠겼다.
박두준을 피해 도망 친 걸까?
내일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집 주소를 알아내는 건 금방일 텐데…….
“여기요.”
커피숍 주인이 커피를 내왔다.
“들고 갈 �� 있게 머그잔에 안 담고 여기다, 괜찮죠?”
고개를 끄덕이며 플라스틱 잔을 입에 가져간 태겸이가 물었다. “그런데, 어디에 갔다고 하셨죠?”
“부산이요.”
“부산……?”
“못보고 가서 어떻게 해요? 그래도 다행이네. 내가 오늘 아침에 그랬거든. 남자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고백하는 게 아니라고. 남자라면 책임감이 있어야지. 아니, 남자 여자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책임을 지고,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해야 하는 법이에요. 알았죠? 그리고 우리 신아 울리면 가만 안 있을 줄 알아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책임.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꼭 지킬게요.”
“듬직하네. 편하게 마시다 가요.”
그녀가 웃으며 카운터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생방송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속보에는 한낮에 벌어진 강력범죄를 다루고 있었다.
박두준이다.
저 미친놈이 게임하듯 사람을 죽이고 있어.
어차피 내일이 되면 게임 리셋하듯 시간이 돌아가 있고,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고, 자기 죄는 모두 사라져버리니까 저런 짓을 하는 건가? 신아를 자기 물건으로 만들고, 신아에게 이 모든 피해는 다 네 탓 이라고 떠넘기고, 너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거라고. 자기와 같은 길로 빠지라고 강요하는 건가?
신아의 정신을 완전히 파괴해 자기가 지배할 때 까지 계속해서 저 짓을 반복할 셈인가?
비겁한 놈.
내일이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겠지.
저 분도.
나도.
다만 박두준 그 개자식과, 신아만이, 이 지옥을 기억하겠지.
젠장.
젠장.
젠장.
태겸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갑작스럽게 일어난 태겸이에게 놀란 커피숍 주인이 앞치마로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벌써 가려고?”
“네. 커피 잘 마셨습니다.”
지갑을 꺼내려는 태겸이의 손을 막으며 그녀가 말했다. “됐어. 앞으로 신아 잘 해달라고 주는 거니까.”
“고맙습니다.”
태겸이는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11시 58분.
아무도 없는 공원에 바람이 불었다.
태겸이는 그네에 앉아 있었다.
바닥을 보며, 태겸이는 기다렸다.
만일 박두준의 말대로 시간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언제 반복되는 것인지, 반복되는 바로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게 된다면 이 시간을 벗어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59분.
곧 자정이 찾아온다.
과연 시간은 ‘내일’로 흐를까?
아니면, ‘오늘’과 똑같은 시간, 또 한 번의 ‘어제’가 반복될까?
56초.
57초.
58초.
59초.
         3.2. 5`
신아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무단으로 돌아온 박두준은 아버지가 남겨준 유품인 사냥용 산탄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박두준은 점점 스스로를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조직 폭력배 출신이자 고리대금업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거액의 현금을 남기고 채권자의 칼에 찔려 죽고 난 뒤로, 박두준은 제멋대로 살아왔다.
네 앞을 막는 건 다 박살 내 버려라.
아버지는 말했다.
남자는 모든 지배하고 마음대로 주물러야 남자다.
아버지의 말 대로, 박두준은 살아왔다.
정복하지 못한 여자는 없었다.
때려눕히지 못한 남자는 없었다.
어른이라도 깔아뭉갰고, 어른이라도 두들겨 팼다.
단 한 명을 빼고.
흥신소로부터 윤신아를 찾았다는 보고서를 받자마자, 박두준은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마지막 남은 성을 정복할 때가 왔다.
박두준은 능숙하게 개머리판을 어깨에 댔다.
수평으로 들어 올린 총신을 내려다보며, 박두준은 보이지 않는 표적을 노리듯 조준을 겨눴다.
박두준의 눈에는 보였다.
표적.
윤신아의 벌거벗은 몸.
“팡.”
    또 다시 찾아온, 전학 첫 날.
박두준은 담임을 때려눕히고, 차키와 현금을 뺏고, 오태겸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혔다는 점이다.
오태겸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뒤로 나가떨어진 오태겸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손 안 가득 코피가 차올랐다.
박두준이 손등 채로 얼굴을 짓밟았다.
발뒤꿈치에 내리 찍힌 손등과 콧등이 박살났다
“이런 찌질이 새끼가 내 일을 방해했었단 말이지? 나한테 덤볐단 말이지?”
두 번.
세 번.
앞니가 부러졌다.
손등과 손가락의 뼈가 부러졌다.
제멋대로 구부러졌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터졌다.
인대가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철저한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오태겸이, 기절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폭력으로 얼어붙은 교실을 만족스레 훑어보며, 박두준은 가방에서 식칼을 꺼냈다.
교실 안 아이들의 웅성거렸다.
박두준이 담임선생님의 목을 식칼로 내리찍었다.
비명.
경악.
식칼을 뽑았다.
경동맥의 혈압을 이겨내지 못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목에 구멍이 뚫려 제대로 말도 못하게 된 담임선생님이 부릅뜬 눈으로 박두준을 노려보았다.
“멍청하긴,”
박두준이 말했다.
“발전이 없어요. 발전이. 뭐?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리젠 돼, 병신아.”
얼굴 한 가운데에, 식칼이 내리꽂혔다.
경련.
정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박두준은 교실 밖으로 도망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점수가, 그에게는 보였다.
오늘은 여자만 노려 죽이겠다.
박두준은 스스로 규칙을 정했다. 게임은 그냥 하는 것 보다 제약을 주는 편이 더 재미있는 법이다.
박두준은 여자아이들만 노리고 무차별로 식칼을 휘둘러댔다.
살이 베였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식칼이 살육을 노래했다.
아이들의 비명이 코러스가 되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온 옆 반 선생님과 학생들이 교실 안의 지옥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옆반 학생 중에서도, 여자아이들의 얼굴이 모두 찢겨나갔다.
여자아이 하나를 붙잡은 박두준이, 목에 칼을 대, 인질로 삼고 밖으로 나갔다. 설득하려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담임의 차에 올라탔다.
자동차가 학교를 떠났다.
인질로 삼은 여자아이는 달리는 도중 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물론 목을 긋고 난 뒤였다.
박두준은 게임을 하듯 자동차를 몰았다.
이번에도 표적은 여자였다.
인도를 걷는 행인이 자동차에 파괴되었다.
앞 유리에 피가 튀었다.
와이퍼로 닦아냈다.
자동차의 배기음이 피의 노래가 되어 울려 퍼졌고, 비명과 고함이 장단을 맞추었다. 노래는 비처럼 내렸다.
끊임없이.
소나기처럼.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경찰차가 출동해도, 박두준의 무차별 살인은 사람을 죽인다는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계속되었다.
방송국까지 나타났다.
헬리콥터가, 박두준과 경찰 간의 추격전을 생중계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뚫고 들어 간 뒤로는 한 번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역주행.
총알처럼 자동차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박두준은 미리 조사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방송국이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박두준이 전화기에 대고 일방적으로 소리쳤다.
“잘 들어, 윤신아! 네가 어디를 가 있더라도,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어. 난 끝까지 널 찾을 거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네가 지금 어디 있는 지 찾아낼 거라고. 넌 내거야! 절대 도망 못가!”
히스테릭한 금속성 웃음소리와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박두준의 앞에 거대한 트럭이 돌진해왔다.
충돌.
자동차가 산산히 부서졌다.
         3.3. 5`
부산행 KTX에서 내린 신아는 해운대로 향했다.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연고도 연관도 없고 가장 먼 곳이기 때문이었다.
박두준을 피하기 위해서다.
영화를 연속으로 보고 나와 밥을 먹은 뒤, 해운대 백사장에 앉으니 벌써 주변은 어둑어둑해졌다.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신아에게 남자들이 접근해왔다.
해변의 남자들은 술을 ���하기도 하고, 담뱃불을 빌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몸을 더듬기도 했다.
그 모든 남자들이 신아의 오른발 상단 돌려차기의 제물이 되었다.
박두준과의 싸움을 위한 일종의 예행연습인 셈이었다.
배가 고파져 가게에 들어가자,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신기한 지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신아는 무시했다.
가게 주인이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렸다.
뉴스가 흘러나왔다.
텔레비전 속 아나운서가 말했다. “용의자 박 모 군이 저희 방송국과 전화 연결이 되었을 때 남긴 음성기록입니다.”
신아는 텔레비전 화면에 고개를 돌렸다.
“잘 들어, (삐) 네가 어디를 가 있더라도,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어.”
박두준의 목소리다.
“난 끝까지 널 찾을 거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네가 지금 어디 있는 지 찾아낼 거라고. 넌 내거야. 그리고 널 잡을 때 까지 계속 절대 도망 못가. 알았어!”
뉴스는 계속되었다.
신아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4. 6`
태겸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는 태겸이를 신아는 여전히 답답했다.
태겸이는 변했지만,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자기를 위해 몸을 던졌던 태겸이는 어디로 갔을까?
“안녕.” 신아가 말했다.
“아, 안녕.”
“어제,”
신아의 입이 잠시 멈추었다.
“는, 미안했어.”
“아냐, 내가 미안해.”
“시간 좀 내줄래?”
    KTX 기차에 나란히 앉은 태겸이와 신아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태겸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신아는 피곤했다.
객실은 아침 일찍 이라 그런지 승객이 없이 텅 비었다.
이 객실에 탄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다.
기차가 출발했다.
물감을 뭉개듯 스쳐지나가는 창밖 풍경이 창가 쪽에 앉은 신아는 벌써부터 지겨워졌다.
아침을 안 먹어서인가?
신아는 생각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저기,”
태겸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아야.”
신아는 태겸이가 먼저 행동한 데에 놀랐다.
“왜?”
“어제는, 미안했어. 갑자기.”
혹시 태겸이도, 나나 박두준처럼 시간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어제?”
“어떤 어제? 그게 무슨 말이야.”
한숨.
“배 안고프니?”
“응?”
“나, 아침을 안 먹어서.”
마침 여승무원이 끌고 오는 음식물 카트가 다가왔다.
신아는 넉넉히 먹을 생각이었다. 소시지, 바나나우유, 맛밤, 도시락, 사이다, 과자 몇 봉지를 샀다.
먹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대화도 없었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굉음이 없었다면 숨 막히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해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신아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했다.
그 개자식 코치 때문에 지겹도록 맛보았다.
그런데도, 태겸이가 고백한 순간에는 견딜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그렇게 갑자기 고백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신아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지 혼자 멋대로 고민하다가, 결국엔 못 참고 갑자기 고백하고, 나한테 책임 다 떠넘기고.”
“……미안.”
“‘어제’는 날 구해 줘 놓고. ‘오늘’은 왜 그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응? ‘어제’? ‘오늘’?”
“기억 안나? 당연히 그렇겠지만.”
“……넌 좀, 특이한 것 같아.”
“아닌데.”
“그거 알아? 우리 오늘 이야기 한 게, 그동안 알고 지낸 동안 이야기한 거 보다 더 많아.”
“그동안은, 왜, 말 안 걸었어?”
“……말 거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았어.”
“걸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그러면서 어떻게 좋아할 수 있어? 말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을?”
침묵.
태겸이의 얼굴이 조금 화난 것처럼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게 되는 게,”
태겸이가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거 아닐까?”
“뭐?”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에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안 부끄러워? 그런 말 하는 거?”
태겸이가 헛기침을 했다.
“너한테 어제 고백할 때 보다는…….”
“그렇게 갑자기 고백하면 누구라도 도망칠 거야. 숲 속에서 호랑이가 갑자기 튀어나온 거랑 뭐가 달라?”
“……미안.”
“계속 미안하다고만 할 거야?”
“…….”
“별명, 뭐였어?”
“응?”
“전학 오기 전에 내 별명, 알아?”
“아니.”
“뭘 거 같아?”
“그, 글쎄…….”
“시고니.”
“시고니? 시고니 위버?”
“알아?”
“알아. 에일리언 주인공.”
“에일리언? 아바타에 나오는 박사 아니야?”
“옛날에 에일리언이라는 영화 주인공이었어. 여전사 캐릭터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거 있잖아. 나 그런 캐릭터 좋아하거든. 터미네이터 2에 나오는 사라 코너나, 아바타에 트루디나.”
“트루디?”
“그 헬기 조종사.”
“아. 난 그냥 키 크고 머리가 짧아서 시고니였는데.”
“그땐 머리 짧았어?”
“응. 영화 좋아해?”
“그런 편이지.”
“영화 보러 갈래?”
    해운대 메가 박스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버거킹에서 세트메뉴를 사들고, 해운대 해수욕장을 향해 하염없이 걸었다. 걷는 동안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를 보고 난 감상, 좋아하는 영화, 배우, 태권도 선수 시절 이야기, 그리고 요 며칠간 계속 되는 기묘한 일까지.
해운대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햄버거를 꺼내면서, 신아가 말했다.
“믿겨져?”
바닷바람이 서늘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아는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동안 태겸이는 말을 걸지 않았다.
“똑같은 게임을 몇 번이고 하는 셈이네.”
“게임?”
“게임도 결국 똑같잖아. 같은 상황, 같은 캐릭터, 같은 규칙.”
“하지만 그건 게임 속이고, 아무도 다치지 않아.”
“맞아. 지금 이 시간의 반복이 게임이라면, 신아 너는 게임 플레이어겠지. 난 NPC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넌 게임 밖에 있어. 게임을 하는 동안 경험이 쌓이지. 하지만 난 게임 속에 있어. 변하지 못해. 지금 내가 얻은 깨달음도, 경험도,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지. 혹시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 알아?”
“아니.”
“옛날 영환데, 고스트 버스터즈 주인공으로 나왔던 아저씨, 빌 머레이가——”
“고스트 버스터즈?”
“……여하튼, 그 아저씨가 성격 진짜 나쁜 데, 지금 너처럼 하루가 계속 반복되면서 별별 일을 다 겪어. 그러다가 좋아하는 여자를 꼬시려고 계속 반복해서 피아노도 배우고, 좋아하는 취향도 다 알아내고, 그렇게 고생고생하다 결국 다 꼬셨나 했는데, 실패해. 그래봤자 결국 자기 말고는 관심 없는 거니까. 여주인공이 그러거든. 당신은 당신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잖아요, 하고. 게임하는 사람하고 똑같지. 깨는 것 말고는 신경 안 쓰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한 10년을 그렇게 반복하나봐. 좋은 사람이 되려고, 매번 좋은 일을 찾아 하는 거야. 감사 인사도 못 받고, 아무 이득도 없는데, 그냥 남 좋은 일 계속 하는 거야.”
“나라면 자살해버리고 말 거야.”
“자살해도 소용없어. 다시 눈을 뜨면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어버려.”
“나도 그러려나.”
“그 남자는 남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게 되더라고. 물론 성격이 바뀌지는 않지만. 그래서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그런 거 아닐까? 니체의 영원회귀 같은 거지.”
“영원 뭐? 태겸이 너 아는 거 많구나. 난 지금 네가 하는 말, 반도 못 따라가겠어. 그 니체라는 사람, 신은 죽었다고 말한 사람 아니야?”
“맞아. 그래서 만든 말이 영원회귀야. 니체는 이 세상은 무한하니까,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을 때처럼 분명 이미 경험한 일을 또 경험했을 수 있다고 말했어.”
“나랑 똑같네.”
“그걸 영원회귀라고 그랬어.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매 순간순간 대가를 바라지 말고, 집중해서 열심히 살라고 말이야.”
“말이야 쉽지. 막상 당해보면 그러기 얼마나 어려운데.”
“그래서 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니체도 미쳤었어.”
“아마 나도 그렇게 될지 몰라. 미쳐서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혼자 이상한 짓 하면서 살겠지. 어쩌면 박두준이 원하는 게 그건 지도 모르고.”
침묵.
가져온 음식을 다 먹은 둘은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았다.
신아는 바닷바람에서 나는 짠내가 익숙해져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조금씩.
“지금쯤,”
태겸이가 모래를 이리저리 만지며 말했다.
“박두준이라는 애는, 사람을 죽이고 다니고, 널 찾아다니겠지?”
“그러겠지. 날 꼭 잡겠다고 그러더라고.”
“어쩌지?”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한 비밀 있어?”
“응?”
“내일이면 넌 이 기억을 잊을 거야. 하지만 난 네가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죽는 건 싫어. 내일도 난 널 데리고 부산으로 올 거야. 하지만 만일 오늘처럼 순순히 안 따라오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네가 날 믿을 수 있게, 너만 아는 비밀 하나 이야기해줘. 그걸 들으면 어느 정도 믿음이 갈 거 아니야.”
“비밀……,”
생각에 잠겼던 태겸이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 사실, 내 방에 네가 체육복, 가지고 있어.”
“뭐?! 윽, 기분 나빠!”
“화내지 마! 사실, 졸업할 때 책상에 그냥 놓고 가더라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
“취소. 내일 너랑 같이 안 내려올래.”
놀란 태겸이가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자, 신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하지만 역시 기분 좀 나빠. 내일 그거 가지고 나와. 태워 없애게. 그런데 네가 고백하고 난 뒤로 계속 시간이 반복되는 건 왜일까? 혹시 네가 이상한 소원 빈 거 아니야?”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내일은 뭐 보지. 난 본 영화 또 봐야하는데.”
“신아야.”
“응?”
“뫼비우스의 띠는 한 가운데를 따라 자르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
“두개 되는 거 아니야?”
“아니, 두 번 꼬인 커다란 뫼비우스의 띠가 돼.”
“신기하네.”
“그걸 한 번 더 자르면 뭐가 되는 지 알아?”
“뭐가 되는 데?”
“만일 내가 내일,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한다면 이야기해줄게. 그리고 만일 내가 기억을 못한다면,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줘. 알았지?”
“알았어.”
신아가 웃었다.
태겸이도 웃었다.
두 아이 사이의 주먹 두 개 되는 틈으로 바닷바람이 스쳐지나갔다.
         4. Off the wall
4.1. 15`
신아는 아침 일찍 태겸이의 집으로 가, 체육복을 가지고 나오라고 말해 태겸이의 혼을 빼놓았다.
벌써 아홉 번째 반복되는 일인데도, 신아는 매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태겸이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태겸이는 아무 것도 몰랐다. 심지어는 네 번이나 ‘첫 키스’를 나누었다는 사실도, ‘지금’의 태겸이는 몰랐다.
“얼른 나와.”
신아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하고, 중얼거리며 태겸이가 대문을 열었다.
굉음.
타이어가 찢어지는 소리다.
골목.
돌진.
자동차가 나타났다.
놀란 신아가, 태겸이를 밀쳐냈다.
자동차의 돌진을 겨우 피한 대신, 태겸이는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충격으로 머리가 몽롱해져 손에 든 체육복을 바닥에 떨어뜨려, 쓰러졌다.
폭발.
신아는 처음으로 듣는 굉음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고막이 얼얼하다.
거대한 소리였다.
불길한 소리였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물이 평온한 주택가를 위협하고 있었다.
괴물은 어느 새 사라졌다.
잔향만이 메아리쳤다.
신아의 온 신경이 비상사태를 알렸다.
폭발음은 총성이었다.
영화와는 다른, 온 몸의 피부를 한꺼번에 조이는 박력이, 희미해진 메아리 대신 남았다.
누가 총을 쏜 거지?
신아는 주변을 확인했다.
박두준이었다.
자동차 문을 열고 나와, 문 위에 엽총을 얹고 겨누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신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멀리서도, 박두준이 웃고 있다고 알 수 있었다.
잔인하고, 눈앞의 모든 것을 자기가 조종할 수 있는 물건으로 여기는 웃음.
“박두준……!”
“신아야! 보고 싶었어! 응?”  
폭발.
굉음이 공기를 찢었다.
신아의 마음이 소리 내며 바스러져, 비명이 되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증발되어 하늘로 퍼져나갔다.
굉음도, 태겸이의 생명도.
담벼락을 후벼 판 수십 개의 탄흔과 똑같은 모양으로, 태겸이의 얼굴은 벌집처럼 구멍이 나 짓이겨져 있었다.
발포.
굉음.
그 위로 또 다시, 산탄이 파고들었다.
“태겸아!”
신아가 달려가, 태겸이를 품에 안았다.
“태겸아! 태겸아! 태겸아!”
태겸이는 말이 없었다.
“태겸아——”
신아가 태겸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떨려 살갗을 겨우 스쳐지나갔다.
아직 따뜻했다.
“윤신아!”
박두준이 총을 겨눈 채 다가왔다.
“넌 어차피 내게 될 수밖에 없어. 이 감옥 안에서 제 정신인 건 너랑 나 밖에 없거든.”
“너하고는,”
박두준에게는 등을 돌린 채, 태겸이의 주검을 품에 안은 신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하고는 절대, 절대로…….”
“나를 봐.”
박두준이 총구를 신아의 뒤통수에 댔다.
“나를 봐!”
“네 맘대로 해.”
신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저번처럼 억지로 끌고 가든, 때리든, 총으로 쏘든, 네 멋대로 하라고! 넌 절대 날 못 가져. 난 물건이 아니야. 내 팔 다리를 다 잘라도 소용없어. 넌 절대 날 못 가져!”
총성.
         4.2. 16`
울음.
신아는 잠에서 깼다.
눈물이, 그녀를 깨웠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몸을 껴안고, 더듬어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태겸이가 죽었을 때 느꼈던 감정도, 아직 따스했던 태겸이의 주검을 품에 안았던 감촉도, 뒤통수에 들이댔던 총구의 차가움도, 박두준의 뒤틀린 목소리도, 모두, 생생하게 남아있다.
자기가 죽은 뒤 무슨 일이 벌어졌을 지가 떠올랐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박두준이 자신의 시체에 대고 무슨 짓을 했을까?
신아는 눈물을 닦았다.
태겸이에게 미리 경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온 신아를 누군가가 덮쳤다. 놀란 신아가 반격하려했다.
그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속삭였다.
“신아야. 나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태겸아…….”
    택시가, 아직 자동차가 적은 도로를 달렸다.
택시 뒷자리 두 사람이 앉아있다.
태겸이.
그리고, 신아.
신아는 말없이 태겸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택시는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단은 거리를 벌리고 작전을 세울 장소가 필요했다. 두 사람은 가장 익숙한 데이트 코스로 갈 생각이었다. 묘하게도 두 사람에게 있어 가장 먼 곳, 부산의 해운대역 근처로.
“어제, 죽는 순간……,”
태겸이가 말했다.
“널 지켜주겠다고 생각했었어.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내가 품은 소망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도……. 너에게 다시 한 번, 고백할 기회가 오기를 바랐었어. 그리고 사실 상, 그 날 이후 계속해서, 시간이 반복되고 있고.”
태겸이는 말을 멈추고, 신아의 손을 꼭 쥐었다.
신아는 손을 단단히 감싸는 그 힘이 좋았다. 예전의 태겸이의 손도 이렇게 단단했을 지가 궁금했다.
“아무리 다시 되살아난다고 해도,”
태겸이가 말을 이었다.
“죽는 건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어. 다시는 죽고 싶지 않아.”
“죽는 걸 보는 것도 끔찍한 경험이야. 아니, 더 끔찍할 지도 몰라.”
침묵.
택시 안에는 기묘한 긴장이 흘렀다.
택시기사는 두 학생의 이상한 대화를 아예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백미러로도 뒷좌석을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아가 입을 열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죽지 마.”
신아는 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자각하고, 더욱 부끄러워졌다. 얼굴은 그런 마음과는 반대로, 더욱 더 붉게 물들었다.
역에 가까워왔다.
“문제는,”
신아의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두준이 앞으로 더 심하게 나설 거라는 거야.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까지 죽이려 들지 몰라. 정신이 망가질 데로 망가져서, 자기 밑으로 들어오게 만들려고.”
“박두준을 죽여도 소용없어. 결국 다시 되살아 날 테니까. 결국 방법은 두 가지 뿐이야.”
“시간의 반복을 멈추는 방법을 찾던가, 아니면 박두준의 집착을 멈추게 하던가. 둘 다 쉽지 않네.”
태겸이가 한숨을 쉬었다. “무기가 될까 싶어서 이것저것 챙겨오기는 했는데. 우리한테 유리한 게 있다면, 박두준은 아직 내가 시간의 반복을 자각한 줄 모른다는 거야. 이걸 이용해야 해.”
“어떻게?”
“그것까지는, 잘……. 하지만,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 시간에서 나가고 말 거야.”
“기억 나? 뫼비우스의 띠를 반으로 자르면 어떻게 된다고 나한테 이야기해줬던 거?”
“해운대 백사장에서?”
태겸이가 자신과의 추억을 기억해준다는 사실이, 신아에게는 감동이었다.
택시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택시비를 치르고, 내렸다.
태겸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두 번 꼬인 띠를 한 번 더 자르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
“응?”
대답 대신, 총성이 울렸다.
굉음.
택시의 옆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비명을 지르며, 택시기사가 몸을 숙였다.
역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굉음.
택시에 구멍이 뚫렸다.
산탄이 철판을 찢으며, 금속과 금속이 서로 부딪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오태겸!”
박두준이 말했다.
“기억 나냐? 어제 내가 바람구멍 내 준 거!”
“아저씨! 어서 달려요!” 신아가 말했다.
“흐으으.”
신음소리를 내며 떠는 아저씨는 쇼크 상태에 빠져 떨고 있었다. 살펴보니, 어깨에 산탄 중 하나가 박혀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떠는 인파를 헤치며, 박두준이 다가왔다.
윈체스터 m60.
총구는 택시를 향해 있었다.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박두준은 차갑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성을 잃은 모습이 오히려 더 차갑고 냉정해 보였다.
멀리서도, 미소가 보였다.
차갑고, 파충류 같은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윤신아! 넌 내거야! 절대 도망 못가!”
총성.
“오태겸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나와!”
총성.
“아직 늦지 않았어, 용서해줄게. 그러니까 내게 돌아와. 내게! 난 널 위해 난 다 했어. 코치 새끼도, 이리로 전학 온 것도, 모두 다! 그런데, 감히 날 떠나려고 해?”
총성.
“내 마음에 상처를 줘?”
신아는 몸에 소름이 끼쳤다.
기분이 나쁘다.
동시에.
박두준의 생각이 어떻게 흐르는 지도 알아차렸다.
다행히도, 시간을 벌게 해준 사건이 벌어졌다.
노숙자들 중 몇명이 박두준에게 달려들었다.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피해망상으로, 박두준이 자신을 공격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아는 차에서 내렸다.
“신아야! 뭐하는 거야!”
태겸이의 말을 무시하고 운전석의 문을 연 신아가 택시기사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탔다. 택시기사는 오히려 안도한 듯 했다.
신아가 시동을 걸었다.
“태겸아, 내 곁에 있어야 해.”
“뭐라고?”
택시가 출발했다.
앞을 가로막는 자동차를 차례로 추월했다.
서울역에서 삼각지를 거쳐 용산으로 향하는 도로인 한강대로는 일직선에 가까워 운전이 어렵지 않았고, 출퇴근 시간에는 차량이 많지만 다행히 오늘은 차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운이 좋았다.
“운전 할 줄 알았어?” 태겸이가 말했다.
“뭐가 액셀이고, 뭐가 브레이크인지 정도만. 그보다, 박두준이 뭘 노리는 지 알았어.”
신아가 핸들을 꺾으며 말했다. 그 날의 충격이 되살아나 목이 막혔다. 신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게 만들려는 거야.”
“뭐라고?”
“그 개 자식은, 네가 죽는 모습을 내가 보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네가 죽는 모습을 보게 만들어서, 내가 더 이상 못 견디게 하려는 거야. 그러면 내가 자기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분명.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아까 역에서도 함부로 공격하지 않은 거야.”
“미친 놈…….”
“아직 희망은 있어.”
“뭐라고?”
“그 말은 아직 네가 시간이 반복되는 걸 모르는 줄 안다는 말이야.”
“그렇구나, 그러니까…….”
“네가 나랑 붙어있으면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야. 널 ���이는 게 목적이지만, 나랑은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할 테니까. 응?!”
“무슨 일이야?”
“쫓아오고 있어.”
백미러에 자동차가 보였다.
차례로 앞의 차를 추월하고, 신호를 무시하며, 꽁무니를 바짝 쫓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한강대교야.” 태겸이가 말했다.
“어쩌지? 총에 대항할 만한 무기가 없을까?”
충격.
택시가 크게 흔들렸다.
다시 한 번, 충격.
박두준의 차가 뒤꽁무니를 박았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로, 몸이 뒤흔들렸다.
버스 전용차선을 달리는 파란색 750A번 버스를 피하며, 택시는 신용산역을 통과했다. 박두준은 버스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살짝 부딪혔다. 덕분에 거리가 좀 더 멀어졌다.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태겸이는 연장통을 꺼내고 있었다. “다리까지 얼마나 남았어?”
“얼마 안 남았어. 다리 바로 앞은 사거리야.”
“작전이 하나 있어.”
“작전?”
“다리 가까이 사거리라 그랬지? 그 전에 연장을 던져서, 박두준 앞 유리에 맞추는 거야. 그럼 시야를 막을 수 있을 거야.”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일단은 해 봐야지.”
“변했구나?”
“뭐가?”
“아니야.”
신아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해보자.”
신아가 액셀을 밟았다.
태겸이가 뒷자리에서 운전석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뭐, 뭐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태겸이가 신아가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고마워.”
“해볼게.”
태겸이가 뒷좌석 창문을 열고 몸을 내밀었다.
손에 펜치를 들고 있다.
던진다.
펜치가 박두준이 모는 차를 맞췄다.
유리창이 아니다.
그 아래, 보닛.
시야를 막지는 못했다.
튕겨나간 펜치가 다른 차의 유리창을 깼고, 방향을 잃고 흔들려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바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신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젠장!”
태겸이 몸을 집어넣고 연장통을 뒤졌다.
“이번에는 실수하면 안 돼!”
신아가 말했다.
“아무리 내일이면 아무 일 없이 돌아온다고 해도, 우리까지 박두준처럼 되면 안 되니까! 이제 곧 다리야, 빨리!”
“알고 있어!”
태겸이 다시 몸을 내밀었다.
박두준이 자동차를 좌우로 흔들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태겸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복서가 펀치를 피하기 위해 상체를 흔드는 위빙이나 다름없었다. 타이밍을 잰 태겸이, 스패너 두 개를 연달아 던졌다. 원투펀치처럼 시간차를 두고 날아간 스패너가 차례로 명중했다. 박두준의 자동차 앞 유리가 수천조각의 입방체로 쪼개져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 두 자동차는 한강대교 앞 사거리에 도달했다.
빨간 불.
신아는 액셀을 밟았다.
좌우로 달려드는 차를 가까스로 피했다.
경적이 울렸다.
충돌.
박두준의 차는 연쇄추돌을 일으켰다.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다, 반대 차선의 차와 부딪혀 스핀을 일으켰고, 다시 한 번 충돌했다.
완전히 뒤집어져버렸다.
“해냈어!”
태겸이가 환성을 질렀다.
신아는 방심해버렸다.
반대편에서, 패닉을 일으키며 역주행해오는 트럭과 범퍼의 한쪽 구석을 부딪쳤다.
충격으로 스핀을 일으켰다.
세 바퀴 정도 도는 동안 내내, 카운터로 핸들을 꺾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신아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연장통의 연장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가드레일에 격돌하며, 택시가 멈추었다.
도로는 완전히 막히고 말았다.
경적소리와 욕설이 한강대교 위에 울려 퍼졌고, 바로 옆 지하철 4���선 선로를 지나치는 지하철의 승객들은 대형 사고에 놀라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신아는 정신을 차렸다.
온 몸이 아팠다.
“태겸아……, 괜찮아?”
“……내리자.”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택시를 내렸다.
사고가 나 멈춰선 차에서 운전자들이 고개를 내밀거나, 아예 내려서 욕을 해댔다.
버스는 커다란 경적을 울려댔다.
버스 안에 탄 사람들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순식간에 도로는 마비되었다.
걸어서 도망가려는 두 사람을 향해 고함이 날아들었다.
“학생! 괜찮아?”
군용 레토나 지프에서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한강대교 너머의 국립현충원에서 근무하는 간부로 보였다. 계급은 소령이었다.
총성.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군인은 곧바로 몸을 바닥에 엎드렸다.
혼자서 숙인 것이 아니다.
신아와 태겸을 감싸서 보호하면서였다.
훈련받은 대로다.
총성이 들리면 일단 그 자리에 엎드려 노출되는 면적을 최소화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울 한 복판에 총성이 울리는 지를. 그가 자주 듣던 M16도, K2도, K5도 아니었다.
박두준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박두준이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태겸!”
박두준이 외쳤다.
“여자 꽁무니에 숨어서 그러지 말고 나와!”
“어디 쏴 봐! 이 새끼야!”
태겸이가 화를 내며 일어섰다.
“태겸아! 그만해!”
굉음.
태겸이가 어깨를 맞고 쓰러졌다.
“태겸아!”
신아가 일어나 태겸이를 몸으로 감쌌다.
“비켜!” 박두준이 말했다.
총구가 떨렸다.
“그 놈이 그렇게 중요해? 윤신아? 그 놈보다 내가 못한 게 뭐야?”
“넌 절대 이해 못 해! 넌 어린애야, 책임감 같은 말은 절대 이해 못해! 백 번, 천 번, 만 번 반복해도 마찬가지야!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넌! 넌! 그대로야!”
신아가 고개를 돌렸다.
코 앞 까지 다가온 총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흥분과 광기로 일그러진 박두준의 얼굴에서 거친 숨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신아는 똑바로 응시했다.
“어디 쏴 봐.”
일어서며, 신아가 말했다.
“네 덕분에 우리 둘 사이는 더욱 단단해지겠지. 내 마음을 부수려고, 내가 보는 앞에서 태겸이를 죽이면, 나도 같이 자살할 거야. 넌 영원히 나를 차지하지 못해. 적어도 살아있는 나는. 왜냐면 난 물건도, 게임 속 캐릭터도 아니거든. 나한텐 의지가 있어. 그리고 그 의지는 네가 아니라 태겸이와 함께 하고 있어!”
“으아아아아!”
박두준이 총을 고쳐 잡았다.
발포 할 작정이었다.
상단 앞차기.
신아의 발차기에, 총구가 하늘로 향했다. 충격으로 박두준은 발포했고, 반동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늘로 산탄이 흩어졌다.
신아는 엽총의 달궈진 총구를 짓밟아 땅에 고정시키고, 박두준의 손을 걷어찼다.
방아쇠울에 얽힌 손가락이 부러졌다.
비명.
박두준이 엽총을 내던지며 손가락을 붙잡고 바닥을 뒹구는 사이, 엽총을 빼앗은 신아는 다리 밖으로 총을 내던졌다.
총이 한강 아래로 가라앉았다.
격통.
허리 아래 부분에 뜨거운 충격이 찔러 들어왔다. 신아는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으로 척추가 찌릿했다.
나이프였다.
박두준이 나이프를 들고 덮친 것이다.
신장 부근을 찔렸다.
거인이 몸통을 손으로 으깨는 것만 같은 엄청난 고통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그만둬…….”
총상을 입은 태겸이가 기어오며 말했다.
발차기.
박두준이 턱을 걷어찼다.
이가 부서지고 턱이 깨졌다.
“넌 내 거야.”
거친 숨을 내쉬며, 박두준은 신아의 머리를 잡아 일으켰다.
“넌 내거라고. 내거야.”
“넌 지금…… 너 자신도…….”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은 박두준의 손목을, 신아가 겨우 두 손으로 붙잡았다.
“제대로 못 가진 주제에…….”
신아가 말했다.
“누굴…… 갖겠다는…… 거야?”
신아가 박두준의 손목을 비틀었다.
동시에, 급소를 걷어 찼다.
비명.
가슴팍을 떠밀었다.
럭비선수처럼 밀어붙여, 난간으로 밀어붙였다.
박두준이 신아를 안았다.
신아는 느꼈다.
박두준은 자신을 떼어낼 의지가 없었다.
외로웠구나.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외로움과 비슷한 종류의 감각을, 박두준과 맞닿은 피부를 통해 신아는 공감했다.
네가 원하는 데로 해 줄게.
박두준을 끌어안은 채, 신아는 난간 밖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널 향해 눈을 돌리게 하고 싶었으면, 그냥 나를 봐 달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신아야!”
태겸이 붙잡으려 했다.
너무 늦었다.
한강물을 향해 추락하며 신아는 박두준을 더 꼭 안았다.
미안.
너무 늦었어.
네게도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두 사람은 한강 수면을 향해 추락했다.
시간이 멈춘 것 만 같았다.
검게 빛나는 수면이 다가왔다.
수면과 격돌 직전.
신아는 고백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겁먹었던 자신이 자기 직전 문득 떠올린 생각을 기억해냈다.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순간.
신아는 깨달았다.
시간의 뒤틀림은, 이 모든 혼란은, 겁쟁이 같은 자신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도망치던 건 나 였구나.
태겸아, 미안해.
괜찮아.
두준아, 미안해.
괜찮아.
모두들, 미안해요.
할 수 없지, 뭐.
    충격.
커다란 물보라가 한강 위로 솟았다.
         5. The girl is mine
5.1. 1
신아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온 몸이 뻐근하게 아팠다. 화면을 보니 태겸이가 카카오톡으로 아침인사를 보냈다.
‘굳모닝! 일어나야지ㅋㅋ’
순간, 어제 갑작스럽게 받았던 고백을 받아들였던 기억이 떠올라 괜히 부끄러웠다.
뻥.
이불을 걷어찼다.
태권도 선수답게 이불을 걷어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금방 갈게.’
답장을 보낸 신아는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손목에는 가죽 끈 팔찌를 찼다.
두 개.
어젯밤 만든 팔찌였다.
    등굣길에는 언제나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커피숍의 사장님, 신아에게는 스승님에게, 아침인사를 보낸다.
아침식사 대신
“신아야, 안녕.”
“안녕하세요, 스승님. 이거, 새로 만든 거예요.”
신아가 손목에 두른 가죽 끈 팔찌를 내보였다.
“예쁘죠?”
커피를 건네던 스승님이 신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아, 혹시 무슨 일 있니?”
“네? 히히, 맞춰보세요.”
“어디, 잠깐만. 이 팔찌 그거네?”
“맞아요.”
신아의 팔찌는 두 번 꼬인 뫼비우스의 띠 모양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이 알려주셨잖아요. 뫼비우스의 띠는 반으로 자르면 두 번 꼬인 뫼비우스의 띠가 되고, 한 번 더 자르면 연결된 고리가 된다고. 그래서 절대 사랑이 안 깨진다고.”
“그럼?!”
“네! 저, 어제 고백 받았어요. 하나는 남자친구 줄 거예요.”
“어머어!”
스승님은 얼굴 한 가득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아보다 훨씬 키가 작아, 깨금발을 들어야 했다.
“우리 신아, 다 컸네? 하긴 내년부터는 어른이니까. 어떤 애야?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네. 1일이에요.”
“어떤 애야?”
“그냥 평범해요. 키도 작고, 운동도 잘 못하고. 4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애예요.”
“정말? 그럼 그 동안 걔가 혼자 짝사랑 하고 그런 거야?”
“당연하죠.”
“넌 아니고?”
“흠, 비밀이에요.”
“어쭈!”
스승님이 웃으며, 쿠키를 꺼내왔다.
“이거 있다가 남자친구 줘.”
“고맙습니다아.”
“굳이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수능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현명하게 연애해. 안 그러면 나처럼 수능 망쳐서 재수하니까.”
“알았어요.”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맞다, 하나 더. 삼각관계 안 되게 조심해.”
“삼각관계요?”
“그래. 두 번 꼬인 뫼비우스의 띠를 삼등분해서 자르면 고리가 세 개가 된다?”
“정말요?!”
“나도 대학 때 삼각관계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조심해. 알았지?”
“걱정 마세요. 저나 걔나, 다른 데 한눈 팔 사람 아니니까요.”
“어쭈, 자신 넘치네? 많이 달라졌구나?”
“네?”
스승님이 시계를 보았다.
“늦었다! 얼른 가!”
“다녀오겠습니다아!”
    학교에 도착한 신아는 쿠키와 함께 가죽 끈 팔찌를 태겸이에게 건넸다. 뫼비우스의 띠에 담긴 의미도 설명해줬다.
태겸이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땅을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팔찌를 차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날, 신아는 예전에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박두준이라는 아이가 전학왔다.
그 아이에게서 고백을 받았다.
신아는 대답했다.
“미안. 남자친구 있어.”
    그날 저녁.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에, 신아와 태겸이, 그리고 두준이가 남았다.
“미안. 내가 한발 더 빨랐네.”
태겸이가 말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두준이는 자기 차례가 올 때 까지 기다릴 거라고 말했다.
“난 끈질기거든.”
“좀 오래 기다려야 할 지도 몰라.”
하고, 태겸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연적이 되려면 일단 친구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두준이는 한 방 먹은 얼굴로, 자기보다 덩치도 훨씬 작은 태겸이와 태겸이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았다.
“엄청난 친구를 골랐구나. 못 당하겠는데.”
신아에게, 두준이가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악수, 아직 기다리고 있어.”
태겸이가 말했다.
“아, 미안.”
두 사람은 굳게 악수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신아는 눈물이 났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끝>
분    량: 200 X 291매 = 43000자. 10400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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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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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뼈무덤(’감옥육체’로 개제) 2014-04-22
뼈 무덤  (주:중편 ‘감옥육체’의 초기버전)
손지상
     ***
1.
C시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주지역과 환락가가 등을 지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모여 만든 거주 지역이 투명한 빛의 세계라면, 찻길 하나 건너 러브호텔과 술집이 모여 만든 속칭 ‘모텔촌’은 어두운 밤의 세계였다.
밤에 필요한 시설들——술집, 고기집, 룸살롱, 성인용품점, 크고 작은 편의점과 성을 사고파는 편의시설인 풍속업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모여 만들어진 환락가가, 바로 모텔촌이다.
모텔촌은 거대하고 기계다. 열다섯 개의 대학교, 네 개의 대기업 공장, 그리고 크고 작은 중소기업의 돈을 연료삼아 밤이면 움직였다. 만취한 남녀와 그들을 상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악다구니는 엔진소리, 그들의 욕정과 본능은 윤활유였다.
기계가 찍어내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검은 돈은 기계를 관리하는 조직 폭력배,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극소수의 부정부패 시의원과 공무원에게 전달되었다. 덕분에 엔진에서는 끊임없이 사건사고라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매연이 C시의 어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과 공무원과 의원들은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
    모텔촌의 어느 술집에서 한 무리의 남자와 여자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와 인사를 나눴다. 회사 회식 이차가 끝나고 삼차를 가자고 난리인 남자들 틈에서 살짝 빠져나온 박미경은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B회사 택시였다.
“어? 박미경씨!” 평소 박미경에게 음심을 품고 있었던 과장이 박미경에게 다가갔다. “에이, 어디 가려고 그래? 삼차 가야지! 홍일점이. 안 그러면 술자리 칙칙해서 되겠어?”
“내일 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요, 과장님.”
“아니, 내일 일 없는 사람��� 어디 있나? 다 있지?”
“저 지금 집에 가서 바로 일 해야 해요.”
“진짜 삐딱하게 이러기야? 이래서 여자가 안 돼. 자기밖에 몰라요. 남자가 딱 가자면 따라와서 술도 따르고 그러는 맛이 있어야지.” 과장이 박미경의 엉덩이를 슬쩍 더듬었다.
“과장님.” 박미경이 차갑게 말하며 손을 뿌리쳤다. “경찰에 신고할까요? 많이 취하신 것 같네요. 실수하시는 거 보니.”
기다리던 택시가 경적을 울렸다.
“에이 진짜 왜 이래.”
“과장님이 먼저 이거 타고 집에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미경씨, 그게 아니고——”
“사람 우습게보지 마세요. 한 번만 더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 쌍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말 다하셨어요, 지금?”
“그래, 됐다. 가라, 가! 얼굴 좀 반반하다고 존나 튕기네, 씨발. 너 같은 년 먹어도 맛없어. 가!”
일행이 이제야 이상하다 여기고 다가왔다. “과장님!”
“에이, 그만 하세요!” 다른 일행이 과장을 붙잡았다.
구경하는 사람이 생기자 과장은 남성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충동에 박미경의 뺨을 후려갈겼다.
“다 보셨죠?” 박미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경찰에 정식으로 고발하겠습니다.”
“고발 해! 이 씨발 년아!”
“다들 증인 되어 주실 거죠?”
“증인?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주지도 않는 년이! 누가 먼저 쳤어? 엉? 너 지금 뭐해?” 박미경이 핸드폰 녹음기능을 이용해 자신의 폭언을 녹음하고 있다고 알아챈 과장이 더 심하게 날뛰었다. “이 좆같은 년이! 씨발 일로 안와? 그거 꺼! 끄라고!”
“야!”
차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택시기사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불량해 보이는 외모에 수염과 금발머리를 한 중년의 노란 남자가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정말로 노란 남자였다.
천박하고 탁한 노란 색, 아니, 누런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정도다.
검은 색 가죽바지 위에 금색 체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검은 색 실크셔츠에는 앞뒤로 호랑이 자수가 들어가 있었다. 단추를 풀어 드러낸 가슴에는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뼈가 불거진 단단한 얼굴은 거친 삶을 살아왔다고 암시하고 있었다.
노란색 렌즈의 레이 밴 선글라스인 헌팅 글라스를 머리띠처럼 이용해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겼는데, 길고 지저분하게 뒤엉킨 머리카락은 싸구려 염색약으로 염색한 금발이었다. 염색을 한 지 시간이 지났는지 뿌리 부분이 검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이마에는 날붙이에 베인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고 인상을 쓰는 그의 오른쪽 위 앞니가 금니였다. 잇소리를 내며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야, 대머리.” 노란 남자가 말했다.
“뭐야?” 과장이 자신을 말리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노란 남자는 대답 대신 팔꿈치로 과장의 턱을 후려쳤다. 과장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노란 남자가 구두 뒷굽으로 과장의 가랑이 사이를 짓밟았다.
짐승같은 비명이 밤거리를 울렸다.
그는 연달아 과장의 가랑이를 걷어차고 짓밟았다. 손으로 막아보려던 과장의 손등과 손가락이 부러졌다.
제지하려 달려드는 회사 동료들에게 노란 남자가 말했다. “너네 어느 회사야?”
그 순간 동료들이 주춤했다.
“내가 윗대가리한테 여직원 돌려먹으려다 안 되니까 길거리에서 지랄했다고 이 새끼랑 니네 꼰질러 볼까? 응?”
동료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할까봐 얌전해졌다. 그 사이 노란 남자가 과장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서 주민등록증을 챙겼다.
“이 새끼 민증 내가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만일 이 아가씨가 회사에서 불이익 당했거나 이러면 바로 찾아간다. 알았어?”
으름장을 놓는 그에게 동료들은 꼼짝하지 못했다.
노란 남자가 택시에 올라타며 말했다. “아가씨, 타요.”
박미경은 그의 말에 따랐다.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두고, 택시가 떠났다.
    2.
C시에서는 열한시만 되어도 버스가 끊긴다. 최근 인구 50만을 넘겨 구청이 생겼으나, 대중교통은 아직 면단위 수준을 넘지 못한 셈이다.
버스가 일찍 끊긴 밤의 C시는 택시가 지배한다. 시내의 택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내 지역을 담당하는 택시회사 B는 안전하고 합리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 택시회사의 상호가 적혀있는 택시를 골라서 탈 정도였다.
문제는 외곽지역에 있는 이른 바 ‘도깨비 택시’였다.
C시의 중심지는 최근 들어서 수도권 못지않게 발달했지만 아직도 외곽지역은 건물은 이층, 삼층을 겨우 넘는 소도시 티를 벗지 못했고 논밭이 넓게 펼쳐져있다.
도깨비 택시란 이 지역에서 일하는 개인택시기사나 소규모 택시회사를 말한다. 이들은 조직 폭력배나 다름없었다. 실제로도 나이를 먹은 조직 폭력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합승을 시키거나 미터기를 아예 꺼놓고 정액제 마냥 거리에 관계없이 기본요금이 오천 원이라며 폭리를 취하는 경우마저 있다. 트렁크에 쇠파이프를 실고 다니는 도깨비 택시 기사도 여러 명 있다.
이런 부당한 서비스에 지역주민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무섭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린치를 당해 공중파 방송의 아홉시 뉴스에 등장한 시민도 있었다.
외곽지역 주민들은 중심부에 직장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밤이면 B회사 택시는 외곽지역으로 가기를 꺼려했다. 도깨비 택시들이 노골적으로 영업을 방해하거나 심지어 폭행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곽지역 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를 이용해왔다.
밤이 되면 도깨비 택시들은 모텔촌에 모여 외곽지역으로 가는 손님을 물려고 기다렸다. 이들은 술에 취한 손님의 지갑을 훔치기도 했고 일부러 먼 곳을 빙빙 돌아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모텔촌에서 박미경을 태운 택시는 도깨비 택시가 아니었다. 차 옆에는 B회사의 상호가 적혀있다. 차에 올라타던 박미경도 분명히 확인했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택시는 차라리 도깨비 택시였어야 했다.
    ***
    박미경은 택시 안에서 거친 숨을 골랐다.
내일 회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눈에 훤히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을 두고 수군거릴 것이고 미안하다며 대머리 과장이 찾아와서는 횡설수설 자기 합리화와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까처럼 무자비하게 얻어맞았으니 분명 복수를 하려 들 것이다. 이 택시기사와 내가 무슨 육체관계라도 맺는 사이라고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택시기사가 고맙기는 했지만 외모를 보니 그 다지 질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자기가 품는 그 냄새나는 썩은 성욕이 해결이 안 되니 그런 트집을 잡아 소문내고 다닐 게 분명하다. 아니면 고발을 하겠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입막음 조로 자기와 모텔에 가자고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아까 맞아서 부러져버렸으면.
앞으로 벌어질 일이 박미경은 소름이 돋았다.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남자들은 비겁하고 더럽다. 자기가 책임지고 무언가를 할 생각은 못하고 음습하게 군다. 그런 주제에 성욕만 강해서 머릿속이 고환으로 가득차서 섹스밖에 모른다. 영화 속에서나 진짜 남자가 있지. 강하고, 깔끔하고, 나를 배려해주고, 나랑 자자고 하지 않는.
“안전벨트 매세요.”
생각에 잠겼던 박미경은 택시기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안전벨트요. 요새 단속이 심하기도 하고 위험하거든요.”
“아, 네.”
안전벨트를 잠그자, 택시기사가 씨익, 웃는 모습이 백미러로 보였다. 노란색 선글라스에 앞니에 금니를 박은 게 천박해보였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박미경이 말했다.
“어디까지 가시는 지 말씀 안하셨는데?”
“아! 죄송해요,” 당황한 박미경이 주소를 말했다. C시의 외곽지역이었다. “아까는…… 고맙습니다.”
“뭘요. 나이 먹고 그런 짓 하는 놈들이 나쁜 거지.”
침묵.
박미경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택시비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주변 풍경도 논밭이 전부라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어 어두컴컴하니 뒤숭숭했다.
매일 같이 보는 풍경인데도 마음가짐에 따라 생소하게 보이기도 하는 법이구나, 박미경은 생각했다. 창밖의 어둠이 스크린이 되어 미래에 벌어질 일을 비춰주고 있었다. 생각할 수 록 기분이 나빠졌다.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아가씨. 아까 그 사람 상사죠?”
“네?”
“아니, 내일 회사에서 뭐라고 하지 않을라나 해서.”
“그러겠죠.”
“있다가 연락처 알려줄 테니까, 만약에 뭐라고 그러면 연락해요. 내가 그 새끼 민증도 가지고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하지만,” 박미경은 조금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이 남자와 소문이 돌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찮아요. 아마 별 일 없을 거예요.”
“그러지 말고, 기왕 주소도 들었는데.”
하고 미소 짓는 남자가 그녀는 갑자기 소름끼치도록 무서워졌다. 어릴 때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모습을 산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뱀이 노려보면 개구리는 몸이 굳는다. 뱀이 개구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개구리를 구하려고 급히 뱀의 몸통을 붙잡았었다. 손바닥 안이 서늘한 음료수 캔을 만질 때처럼 서늘했었지만 감촉이 달랐다. 피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촉감이 있었다.
그 순간 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선에서 뱀의 피부 같은 촉감이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냉정하게 계획을 조립하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문다. 그렇게 느낀 그녀는 뱀을 집어던졌다.
고개를 돌리니 개구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개구리가 불쌍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저렇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다니.
“주소가 어디냐니까?” 택시기사는 집요했다.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기,” 박미경은 집에서 오백 미터 정도 떨어진 삼거리를 가리켰다. 단골로 삼는 편의점이 보였다. “저 앞에 삼거리에서 세워주세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집 앞에서 세워줄게요. 위험하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워준다니까.”
“여기서 세워주세요.” 박미경이 단호히 말했다.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
“저기 편의점 앞에 세워주세요!”
미소가, 사라졌다.
택시가 박미경이 말한 곳을 지나쳤다.
“세워주세요!”
택시기사가 말없이 천장의 햇빛가리개를 열었다. 이상한 스위치가 잔뜩 있었다. 스위치를 하나 둘 켜자,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더니 자동차 문이 잠기며 철컥, 하고 잠겼다.
“뭐하시는 거예요!” 잠금장치를 해제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
택시가 속력을 올렸다.
“아저씨!”
택시가 박미경의 집을 지나쳤다. 창문 밖으로 멀어져가는 집을 눈으로 쫓으며 그녀가 창문을 두들겼다. “세워줘! 세워! 세워!”
“조용히 안 해!”
택시기사의 고함에 그녀가 움츠러들었다. 먹이를 앞에 둔 짐승처럼 뿜어내는 살기를 느꼈다. 자신이 뱀 앞에 선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지면 안 된다. 절대 져선 안 된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세워!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거야!”
“경찰? 씨발 년이 은혜도 모르고…….”
“세우라고!” 박미경이 주먹으로 운전석을 두들겼다. “이 미친놈아, 세워!”
“부를 테면 어디 불러 봐!”
하고 택시기사가 낄낄거리며 천장의 또 다른 스위치를 눌렀다. 주르륵, 하는 소리가 나며 안전벨트가 조여졌다.
택시기사에게 저항하기 위해 앞으로 기울어졌던 박미경의 몸을 강제로 뒤로 잡아챘다. 그녀는 손으로 잡고 버텼지만, 안전벨트는 그녀의 힘을 무시하고 더욱 강하게 조여 왔다.
핸드폰을 들고 있느라 한 손으로 밖에 힘을 못 쓴 그녀는 결국 안전벨트를 놓치고 말았다.
거대한 뱀에게 몸의 자유를 빼앗긴 먹잇감처럼 안전벨트에 조여진 그녀는 가슴이 짓눌려 숨이 가빠왔다. 안전벨트를 풀려고 잠금 해제 버튼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당황해 몇 번이고 재차 눌러봐도 마찬가지다.
아까 전 스위치.
그 금속음.
그 스위치가 안전벨트를 고정시킨 것이다.
안전벨트가 멈출 줄 모르고 살을 파고들어갔다. 캐주얼 정장의 셔츠 단추가 터져 브래지어의 레이스가 드러났다. 대각선으로 맨 부분이 가슴과 목을 조였다. 배 위의 부분은 허리를 끊을 기세였다.
“신고 안 해?” 택시기사가 말했다. “이 씨발 년아, 신고한다면서?”
박미경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긴급통화를 시도했다.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안 되지?” 택시기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 택시에서는 핸드폰이 잘 안 터진다고 손님들이 불만이 존나 많더라고? 왜냐면 내가 안 터지게 해 놨거든!”
“아저씨……,” 박미경이 말했다. “잘못했어요. 제발 저 보내주세요. 네? 살려주세요, 제발…….”
“그러게 왜 내가 잘 해주는 데 떽떽 거리고 그래? 응?”
“살려주세요…….”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택시기사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있을 때 잘 해애, 후회하지 마알고오.”
“아저씨!”
“풀어줘?”
“보내주세요……, 제발…….”
“이 짓 하다보면 꼭 있거든. 매라고 해도 안 매는 새끼들. 안전벨트 잘 매야 돼. 그래야 안전하지.”
액셀을 밟자, 차가 더욱 속력을 높였다. 시골길에서는 너무 위험한 속력이다. 울퉁불퉁한 바닥이나 과속방지턱을 무시하고 내달렸다. 차가 위아래로 들썩이다 못해 도로에 부딪힌 바닥이 쇳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히——하——! 재밌지? 응? 안 재밌어?”
박미경이 울음을 터트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안 재밌냐고!”
“재미있어요. 그러니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데로 다 할게요.
“진짜?”
“네……. 제발…….”
“에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그냥 좀 때리고 따먹고 목 부러뜨려 죽이기만 할 거야. 먹지는 않아.”
그 말을 들은 박미경의 머릿속은 공포로 정지해버렸다.
비명.
택시 밖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외곽지역의 일차선 도로 주변에는 논과 밭, 가로등, 그리고 완전히 드리운 어둠만이 있었다. 비명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택시기사는 비명소리가 즐거운 지, 좋아하며 웃음을 터트렸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안전벨트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려줄게.”
택시가 최대 속력으로 달렸다.
박미경은 좌석 안으로 욱여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를 잃고 박제가 되어버린 것 만 같다. 이성은 이미 사라지고 몸은 통제를 잃었다.
급정거.
브레이크에서 굉음이 터지며 차가 멈추었다. 동시에 택시기사가 스위치를 눌러 안전벨트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그러자 안전벨트가 강제로 풀리고,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간 박미경이 앞좌석의 등받이에 부딪혔다. 등받이 안에 미리 설치해둔 단단한 쇠뭉치에 그녀의 얼굴 앞쪽이 완전히 뭉개지고, 두개골 속에서는 뇌가 막 꺼낸 푸딩처럼 뒤흔들렸다.
택시기사는 이마의 흉터를 긁으며 미소 지었다.
“거 봐,” 택시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안전벨트 매야 한다고 했지?”
박미경은 대답이 없었다.
택시기사는 야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즐길 생각을 하자 가죽바지가 찢어질 정도로 발기했다.
오늘은 만찬이었다.
         3.
박미경이 납치되던 날 아침——
C시 기차역은 경부선과 장항선과 전철 1호선이 교차하는 곳치고는 규모가 작았다. 새로 보수공사를 해 깨끗하기는 했지만 이 이상 규모를 키울 부지도 명분도 없었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역 주변에는 재개발만 기다리는 건물들로 가득했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지은 신축역사는 KTX 열차 전용 역 차지였다. C시와 붙어있는 인접지역 A시에 있으면서도 C시의 이름을 사용하려해 데모가 일어난 적이 있다. C시와 A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는 지금에도 이름의 순서가 C시가 먼저라는 이유로 또 한 번 데모가 있었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역사 앞에는 대중교통이 특히 더 불편했다. 버스의 관할권 때문이었다. 결국 택시만 가득하게 되었고, C시와 A시 택시들이 손님을 잡으려고 난리였다. A시 택시를 타고 C시로 가려 하거나, C시 택시를 타고 A시로 가려고 하면 시외요금이 붙기 때문이다.
역사를 막 나온 이 남자는 이 사실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가 잡으려는 남자였다. 서울에서 사채업을 하는 조직폭력배로 이름은 장덕용이었다.
장덕용은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미국 마피아 흉내 내 멋 부리려는 게 아니라 삼각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자, 보디가드 삼아 데리고 온 동생이 즉각 불을 붙여주었다. KTX 기내와 역사 내는 금연이었다.
“조사장은 어디냐?” 담배연기를 뿜으며 장덕용이 말했다. “전화해봐.”
“아까 카톡 왔습니다, 형님. 여기 앞에 있을 거라던데——” 장덕용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동생은 카카오톡으로 수신한 사진과 지역을 대조하며 위치를 찾았다. “아, 저기 있습니다, 형님.”
두 사람은 조사장이라는 인물에게 다가갔다. 그도 사채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회계사를 하던 사람이라 폭력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이고, 장사장니임.” 붙임성 있게 말끝을 늘리며 조사장이 말했다. 팔 때문에 악수는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 왜 차 안타고 오시고.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조사장. 택시로 갑시다.”
“네? 아니 왜 굳이. 대접하는 입장이 좀——”
“이유가 있어.”
“자네 이 지역 택시업계는 좀 아나?”
“B운수라고 큰 게 하나 있는데 거기 사장 얼굴은 압니다.”
장덕용은 품에서 사진을 꺼냈다. 낡은 사진 속에는 평범한 외모의 중년 남자가 딸과 함께 어색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뒤에는 C시에 위치한 대학교 정문이 찍혀있었다.
“이 사진 복사해서 뿌려.”
“잠깐만요,” 조사장이 핸드폰을 꺼냈다. “사진을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지요.”
장덕용은 불쾌했다. 카카오톡이니 스마트폰이니 하는 게 생기고 나서 그는 장사에서 뒤처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사장은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서 열심히 화면을 눌러가며 말했다. “이놈입니까? 잡으려 하시는 새끼가? 평범해 보이는데요?”
“이 새끼 분명 여기 있을 거야. 돈을 삼천만원 빌려가고 아직도 안 갚았어. 삼천이야 애들 껌값이니까 상관없긴 한데,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어.” 장덕용이 팔을 들어올렸다. “드라이버로 쑤시고 부러뜨려놨어. 그리고 뽕도 훔쳐갔다고, 그 개새끼가.”
“나쁜 놈이군요.” 조사장은 화를 자극하지 않게 맞장구를 치려고 했다. 장덕용과 그의 동생이 폭력을 무기로 삼듯 그는 눈치를 무기로 삼았다.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장덕용이 말을 이었다. “그 미친놈은 하루에도 택시를 수 십 번 타. 왠지 아나?”
눈치를 살피던 조사장이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딸내미가 택시 타고 난 뒤로 실종됐거든. 딸내미 찾는다고 일도 안하고 택시만 타니 돈이 있나? 그래서 나한테 돈을 빌렸는데, 이자 받으러 왔더니 나를 이 꼴로 만들었어.”
“그런데 왜 이리로 왔답니까?”
“딸내미가 서울에서 택시를 탔는지, 여기서 탔는지를 몰라서 그동안 서울 택시를 이 잡듯이 타고 돌았다더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서울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여기로 온 거야. 딸이 여기 대학 다녔거든.”
“그래서 택시 타시려는 거군요. 택시기사들이 혹시 아는 게 있나 물으라고 알리겠습니다.” 조사장이 카카오톡으로 부하들에게 전체메시지를 전달했다.
“형님, 택시 잡았습니다.” 동생이 다가와 말했다.
조사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장덕용은 조사장을 무시하며 상석에 올라탔다. 장덕용의 동생은 장덕용 옆에 앉았다. 조사장은 앞자리에 앉았다.
장덕용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본 택시기사는 제지하려다 그만 두었다. 담배 냄새보다 진한 그들에게서 나는 폭력의 냄새 때문이었다. 그는 도깨비 택시를 모는 사람들과는 다른 평범한 사람이었고 폭력은 교통사고만큼이나 멀리하고 싶은 것이었다.
택시기사가 목적지를 묻기도 전에 조사장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눈치와 재빠른 행동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남자다운 대처였다.
“기사양반, 이 남자 본 적 있나? 몸에 근육이 엄청나게 붙어있는데.”
택시기사는 무관심하게 핸드폰을 받아들고 멀리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그 미친놈 아니야.”
“알아?”
“예, 밤에 택시 타고 돌아다니면서 아무 말 안하고 드라이버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아무대서나 내리고 다른 택시타고 그래요. 미친놈.”
“혹시 어디 있는지 아나?”
“예.”
“정말?” 그 말을 들은 조사장과 동생이 동요했다. 장덕용은 아무 말 안고 담배를 피웠다.
“한바탕 돌고 나면 새벽에 ‘덕수장’으로 가달라고 하거든요.”
“장기투숙 받는 거기? 여관바리 하는데?”
“예. 택시기사들도 가끔씩 거기서 여관바리 따먹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손님이 어디 여관 없냐, 그러면 덕수장으로 데려갑니다.”
“기사양반, 그리로 갑시다.” 장덕용이 창밖으로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지금 거기 없을 겁니다. 새벽에 들어오거든요.” 택시기사가 말했다.
“장사장님. 일단 저희 가게로 가셔서 좀 쉬시고 새벽에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위치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형님.” 먹고 놀 생각에 부푼 동생이 말했다.
장덕용은 신경질적으로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튀겼다. “알아서 해. 대신 네가 다녀와라.” 장덕용이 동생에게 말했다.
동생의 표정이 구겨졌다.
택시가 출발했다.
    4.
쇠붙이를 숫돌에 가는 소리가 화장실에 울렸다. 오래된 여관의 화장실이라 좁고 곰팡이 냄새가 났다. 바닥이며 벽이며 붙어있는 타일은 대충 붙인 티가 났고 타일과 타일 틈으로 시멘트가 드러나 있었다.
사각 팬티 하나만 입고 있는 중년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남자의 몸은 근육이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있어 바위덩어리 같았다. 쭈그린 자세가 불편해보일 정도였다. 과하게 부풀어 오른 승모근과 동그란 모양에다 유륜이 살짝 튀어나온 대흉근으로 미루어 보아,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이용해 만든 몸이었다.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 사각팬티가 타이즈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내압을 이기지 못해 군데군데 해져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 화가 난 듯 보였다. 묵직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느껴질 정도로 기묘한 남자였다. 특히 그의 눈이 그랬다.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눈동자가 완전히 열려 모든 정보를 다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귀신들린 사람의 눈이다.
물을 받아 둔 세숫대야를 옆에 두고 숫돌에 틈틈이 물을 뿌리며 손에 든 쇠붙이를 갈았다. 나이프나 낫 같은 날붙이가 아니었다. 길고 견고해 보이는 일자드라이버였다.
손끝으로 틈틈이 예리한 정도를 확인하자, 이번에는 날을 넓게 갈기 시작했다. 뾰족한 쐐기 모양인 일자 드라이버의 경사면을 길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작업이 다 끝나자 드라이버를 세숫대야 옆 바닥에 놓인 일자 드라이버 두 개 옆에 두었다. 또 다른 드라이버는 미리 갈아둔 두 개와 방금 다 간 한 개보다 훨씬 짧았다. 마찬가지 작업을 끝내자 세숫대야의 물을 이용해 뒷정리를 하고 드라이버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관방은 침대에서도 벽지에서도 곰팡내가 났다. 냉동실이 없는 소형 냉장고, 옆에는 서랍이 텅 빈 고동색 가구, 그 위에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놓여있었다. 남자는 밖에서 사 들고 온 커다란 돼지고기 덩어리를 텔레비전 옆 공간에 올려두고 드라이버를 챙겨 침대 위에 앉았다.
이 남자는 언제나 드라이버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날붙이나 무기를 들고 다니면 의심받는다. 드라이버라면 아무 문제없이 들고 다닐 수 있다. 누가 보아도 그저 연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육체가 곧 무기였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의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그는 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의 적이었다. 그 이유는 가방 속 작은 주머니에 있었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그는 고깃덩어리와 최대한 거리를 두기 위해 침대 끝으로 갔다. 벽에 기대지는 않았다.
손가락 위에 드라이버를 놓고 신중하게 무게중심을 찾아 균형을 잡더니, 중심점에 손가락을 대고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일자 드라이버를 감싸 쥐었다.
귀 옆으로 드라이버를 들어올렸다. 드라이버의 날이 천장을 향했다.
투척.
공중을 가르며 날아간 드라이버가 고깃덩어리에 박혔다.
노스핀 스로(No-Spin Throw)라는 기술이었다.
어차피 한국은 총기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싸움은 보통 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 누가 더 긴 무기를 들고 싸우느냐가 승부를 결정한다. 그래서 조직 폭력배들은 리치가 긴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사용해왔으나, 최근에는 훨씬 가벼운 금속 야구 배트를 주로 사용한다.
택시를 타고 돌아다녀야 하는 그로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더 긴 무기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리치가 긴 공격법을 찾아야 했다. 그 결과 찾은 것이 랄프 쏜(Ralph Thorn)이 개발한 컴뱃 나이프 스로잉(Combat Knife Throwing)이었다.
완전히 릴랙스 한 상태로 손에 든 물체——그것이 나이프든 드라이버든 가위든 심지어 톱이나 일본도 같은 긴 물건이라도——의 무게중심점을 머리 위에서 손가락 끝으로 밀어낸다. 동시에 손목과 팔꿈치를 이용해 잡아채듯 투척한다. 그러면 물체에 모든 체중이 실리면서도, 회전하지 않고 날아가게 된다. 허공에 뜬 물체는 중력에 의해 포물선을 그리듯 사분의 일 회전하며 날 끝이 표적에 박힌다. 이것이 노스핀 스로다. 야구와 마찬가지로 오버스로, 사이드스로, 언더스로도 가능하다.
그는 네 개의 드라이버를 모두 사용해 드라이버를 던진 뒤 결과를 확인하러 다가갔다. 드라이버는 모두 정확히 표적에 꽂혔다. 평균 깊이 삼 센티미터. 사람에게 던진다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드라이버를 뽑고 작은 드라이버를 지닌 채로 그는 다시 침대로 가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에는 일회용 주사기와 작은 유리병이 들어있었다.
각성제였다.
그는 주사기로 각성제 용액을 빨아들이고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기포를 없애고 실린더를 살짝 밀어 완전히 공기를 제거했다. 준비가 끝났다. 어금니를 이용해 한손으로 손목에 끈을 묶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내압으로 혈관이 불거졌다. 그는 검지와 엄지 사이의 살집이 두둑한 곳의 혈관에 각성제를 주사했다.
끈을 풀면서 긴 한숨을 내쉰 남자가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분홍색 알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정제였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스테로이드를 넘긴 그는 창문턱 위로 발을 올리고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오 분 동안 팔굽혀펴기가 계속되었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삼두근과 광배근에서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팔굽혀펴기가 끝나자, 그는 창문턱을 발로 차며 물구나무를 섰다. 그 상태로 일분을 버티다, 두 손으로 바닥을 치며 뛰어올라 일어났다. 몸에는 맺혔던 땀방울이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그리 큰 키는 아니다. 평범한 중년 남자의 키에 채워 넣을 수 있을 만큼 근육을 채워 넣어 두꺼워진 몸이 키를 더욱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 보디빌더처럼 아름답게 조각된 몸이 아니었다. 작고 세밀한 근육군보다 커다란 근육군인 광배근, 승모근, 대퇴근 등이 발달되어있었다. 근육 위에 지방이 붙어 근육의 윤곽이 불분명해 씨름선수나 프로레슬링 선수처럼 보였다.
그의 몸은 길거리에서 싸울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몸이었다. 근육만으로는 날붙이나 둔기의 공격에 당하기 쉽다. 지방이 도포된 근육은 갑옷이 되어 공격을 흡수한다. 그리고 갑옷 자체가 무기가 된다. 단단한 몸은 최선의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자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시끄러운 폭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 영화에 시선만 둔 채로 스쿼트를 시작했다.
팔을 크게 흔들며 반동을 주면서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반만 굽히는 하프 힌두 스쿼트였다. 영화가 끝날 때 까지,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영화 화면에는 눈길만 준채로 스쿼트를 계속했다.
온 몸에 흐른 땀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사각팬티를 완전히 적시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웅덩이까지 만들었다. 스쿼트를 할 때 마다 반동으로 땀이 웅덩이 위로 떨어져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영화가 끝나자 그는 속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찬 물을 몸에 끼얹었다. 잔뜩 열을 냈던 근육이 식으며 잔뜩 조여들었다. 손에는 드라이버를 들고 있었다.
각성제의 부작용으로 생긴 편집증이었다. 코카인이나 각성제 등 도파민 경로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은 과거 정신분열증이라 불렀던, 남들과는 다른 현실을 고르는 병이라는 의미의 조현병(調現病)이 발병시킬 위험이 있다. 조현병의 대표적인 증세 중 하나가 편집증이다. 언제 어디서 적이 공격해 들어올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이 발생한다. 천장에서 적이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벽이 부서지며 적이 공격해 올 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현실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에게 망상인지 아닌지를 물으며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다. 미세하고 작은 발자국 소리지만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지?
적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약물에 의한 편집증 때문만이 아니다. 중요한 존재를 잊은 결핍을 채운 광기 때문이었다.
그는 샤워기를 튼 채로 밖으로 나갔다. 전라다. 엄청난 근육에서 튕겨나간 물방울과 땀의 웅덩이 위로 수건을 던져 발로 훔치면서 손으로는 드라이버를 쥐었다. 양 손에 드라이버를 쥔 채로 그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엄폐물도 없지만 잠깐은 적이 들어와도 관찰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확인한 드라이버의 날은 둘 다 예리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5.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과격하게 달리던 검은 색 승용차가 허름한 중고차를 추월했다. 이런 중소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일제 고급 세단이었다.
“씨발 놈이!” 중고차의 경적을 울려대며 욕을 퍼붓는 사람은 노란 남자였다. 만찬을 마치고 나면 일부러 야산 근처에 있는 공터에서 차를 갈아타고 돌아온다. 증거를 지우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노란 남자가 여관 ‘덕수장’으로 들어오자, 아까 그 세단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 셋이 내려 입구로 향했다. 덩치가 작은 남자가 한 명이었고 나머지는 체격이 크고 두꺼웠다. 누가 보아도 건달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차림새였다.
“뭐야?” 카운터의 주인에게 키를 받으며 물었다.
“위층에 그 아저씨 있잖아.” 중년 여인인 여관 주인이 호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노란 남자가 일용직 노동자라고만 알고 있었다.
“누구?”
“그 왜 갑빠 빵빵한.” 여관주인이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며 말했다. “아유, 함 만져봤음 소원이 없겠어.”
“아.” 노란 남자도 본 적이 있었다. 택시를 몇 번이고 갈아타는 사람이다. 그는 기분이 나빠 일부러 택시기사임을 숨겨왔다. 여관 주인을 비롯해 장기투숙객들 모두가 그가 택시기사임을 몰랐다. “깍두기들이구나. 잡으려고.”
“왜애?”
“눈 보면 딱 알지. 뽕 하잖아.”
“정말?”
“뽕 값 받으러 왔겠지. 여관 박살나게 생겼는데 뭐가 그리 신났어?”
“미리 다 받았지.”
“하여튼, 짠순이야.”
“오늘도 넣어줄까?” 여관바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미연이 오늘 비는 데.”
“됐어, 오늘은.”
“어쩐 일 이야? 떡 안치는 날도 있어?”
“밖에서 실컷 치고 왔어.” 노란 남자가 윙크하며 복도로 들어갔다.
“그년은 좋겠다아. 아주 죽었겠네.”
“그럼, 아예 죽여 놓고 왔어.”
주인의 천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문을 여는 데, 키가 열쇠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비명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노란 남자가 위로 올라갔다.
    ***
    김청수의 여관방 앞에 세 명의 남자가 섰다. 조사장과 조사장의 부하, 그리고 장덕용의 동생 박대영이었다.
“여기 맞지?” 박대영이 말했다. 조사장을 자기 아래로 깔아보는 말투였다.
“뭐 이 새——”
하고 덤벼들려는 부하를 가로막은 조사장이 비굴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장덕용은 조사장과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조직의 간부다. 그 부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일이 없다. 어차피 머리에 든 것 없는 멍청이니까 기분 맞춰주면 그만이다.
의기양양해진 박대영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
멍청아, 조심스럽게 들어가야지, 조사장은 생각했다. 안에 있는 상대에게 차라리 들어간다고 알려주고 들어가지 그러냐. 그는 부하의 엉덩이를 밀어 박대영의 뒤를 따라가라고 말없이 재촉했다.
안은 비어있었다.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다.
박대영이 화장실 문을 말없이 가리켰다. 부하가 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버튼을 누르면 날이 튀어나오는 스위치 블레이드였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움직였다.
박대영이 문을 열었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연, 부하가 살기를 느끼고 등을 돌리자 물에 젖은 타월이 그의 얼굴에 감겼다.
김청수가 문 밖으로 두 사람을 동시에 밀어붙였다. 엄청난 힘이었다. 박대영과 부하가 태클에 밀려 벽에 부딪혔다. 동시에, 부하의 짧은 드라이버가 배에 박혔다.
신음.
부하가 드라이버가 박힌 배를 움켜주며 나이프를 떨어뜨리자, 김청수가 무릎으로 턱을 걷어 올려 하악골을 쪼개버렸다.
김청수가 떨어뜨린 나이프를 객실 안으로 차는 사이, 박대영이 반격하려 덤벼들었다.
김청수가 얼굴에 팔꿈치를 박아 넣었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박대영이 버릇처럼 김청수의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벌거벗고 있는 김청수의 몸은 물기로 미끄러웠다.
김청수가 달려드는 박대영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당기며 턱에다 카운터로 박치기를 먹였다.
박대영의 코에서 선지피가 쏟아졌다.
비틀거리는 박대영의 허벅지에 김청수가 긴 일자 드라이버를 찍었다. 날카로운 날이 파고들어갔다.
비명.
뇌가 흔들리고 기도가 막혀 숨을 쉴 수 없게 된 박대영은 허벅지까지 찔려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김청수의 몸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직 폭력배들도 지방과 근육을 모두 갖춘 몸을 갖추고 있다. 박대영의 경우 지방층이 매우 두꺼워 경동맥을 빗겨날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허벅지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깨금발을 뛰는 박대영의 멱살을 양손으로 잡은 김청수가 발목을 후려쳤다. 흔히 ‘아사바리’라는 은어로 부르는 유도의 모두걸기, 아시바라이(足払い)였다. 낙법을 치지 못하게 멱살을 놓지 않고 뒤통수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박대영은 유도 경험자임에도 그대로 기절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기절할 때 까지, 조사장은 겁을 먹고 떨기만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김청수의 폭력은 기계적일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무자비했지만 감정이 억제되어 있었다. 끼어들지만 않으면 공격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비겁하지만 올바른 판단이었다.
“너.” 김청수가 말했다. “이리와.”
“네?” 조사장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새된 소리였다. 벌벌 떨던 그가 도망치려 하자 김청수가 달려가 멱살을 붙잡았다.
“히익!”
“장덕용이가 보냈지?”
조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증이랑 명함 내놔.”
“네?”
“민증이랑 명함.”
벌거벗은 채로 타인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된 이 남자의 위협에 조사장은 황급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여, 여기……,”
하고 명함과 주민등록증을 건넸다.
김청수는 이를 받아들고 멱살을 끌고 조사장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광경을 계단 너머로 노란 남자가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
    “미연이 불러줘.”
하고 노란 남자가 자신의 방 안에서 카운터로 전화를 걸었다.
“아까는 괜찮다면서?”
“갑자기 꼴려서 그래. 얼른!”
“아이고, 대신에 돈 두 배로 줘야해. 자기랑 하고 나면 애들이 밑에가 다 헐어서 며칠 일 못한단 말이야.”
“씨발, 세배로 줄게.”
“알았어, 자기. 기다려.”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운 노란 남자는 방금 전 보았던 싸움을 떠올렸다. 피투성이의 근육질 몸에는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기계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에서 자신과 같은 짐승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 새끼랑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불만이 끓어올랐다.
문이 열리고 미연이 들어왔다. 여관바리는 구르고 굴러 도착하는 바닥이다. 이 일을 하는 여자들은 섹스란 코를 파는 것 보다 무의미한 행위다. 그럼에도 미연은 음탕하게 몸을 비틀며 침대로 다가왔다. 노란 남자는 이미 몇 번이나 닳고 닳은 그녀를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일이 아닌 취미를 즐길 마음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그는 ‘서지’ 않았다.
욕을 퍼부으며 샤워실로 향하는 미연의 처진 엉덩이를 보며 그는 박미경을 떠올렸다. 그 근육질의 벌거숭이에게 마음속으로 위축감을 느꼈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수컷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박미경의 민증을 꺼내 응시하며 그녀의 육체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고 완전히 정복했던 만찬을 되새겼다.
그런데도, ‘서지’ 않았다.
피칠갑을 한 그 남자, 그 ‘개새끼’가 자기 안의 짐승에게 목줄을 채웠다. 쇠사슬에 묶여버린 짐승이 울부짖고 있다.
벗어나고 싶다.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6.
조사장의 사채업 사무소는 모텔촌 외곽에 있었다.
쇼핑에 중독된 술집 여자나, 유흥비가 모자란 양아치들이 찾아오면, 조사장은 자신의 작은 몸 보다 두 배는 큰 고급 의자에 몸을 묻은 채 거만하게 턱짓을 하는 자신이 좋았다. 우습게 보이면 이 세계에서는 끝장이다.
뒷골목은 허장성세의 거리다. 신기루 성이나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야수의 흉내를 내는 겁쟁이 양들이 서로의 탈이 더 크고 더 무섭다고 자랑하는 프로레슬링의 링이다. 진짜 폭력은 이 프로레슬링이 거짓이라는 진실을 밝혀버리고 만다.
프로레슬링은 종합격투기의 탄생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신기루의 세계에서 쌓아올린 폭력의 이미지에게 있어, 진짜 폭력은 오히려 진실을 폭로하는 불순물이라는 아이러니. 뒷골목은 이를 두려워하고 있다. 누가 더 강하고 누가 더 잔인한가가 결정되지 않는 편이, 뒷골목에서는 더 좋다.
조사장은 강함을 꾸미는 겁쟁이들의 몸짓과 양식을 익혀왔다. 돈을 빌리러 온 약자들에게는 아무리 힘이 없고 작은 체격이라도 충분히 위압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포지션이 강함을 만든다. 허장성세의 물리학이다.
고도로 양식화된 폭력을 해체하는 진짜 폭력 앞에 조사장은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목을 전기코드로 만든 올가미가 묶고 있다. 언제 조여 올지 모른다. 올가미는 김청수가 쥐고 있었다.
김청수는 조수석에 앉아, 조사장이 운전하는 내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갈게.”
그리고 한동안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을 했다.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갈게.”
그 모습을 옆에서 보는 조사장은 공포에 떨었다. 미친놈이다.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박대영과 그의 부하를 단숨에 쓰러뜨리고도, 흥분한 기색 없이 전기코드로 목줄을 채워놓고 샤워를 한 놈이다. 자기를 지켜줘야 할 박대영과 부하는 지금 트렁크에 널브러져 있다. 최대한 눈치를 봐야 한다. 가지고 있는 무기는 그게 전부다.
조사장이 차를 세우자, 검은 세단의 조수석이 열렸다. 허름한 차림새를 한 김청수가 밖으로 나가며 목줄을 당겼다.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기면서 조사장이 밖으로 나왔다.
드라이버를 들이대며 김청수가 말했다. “앞장 서.”
조사장은 장덕용에게 희망을 걸었다. 계단을 오르며 일부러 크게 발을 굴렀다. 이 소리를 듣고 장덕용이 이상함을 알아차렸으면 했다. 말을 꺼낼 수 는 없다. 여관에서부터, 한 번이라도 입을 열면 죽여 버리겠다고 미친 남자에게 위협 당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자신의 속셈을 이 미친 남자가 눈치 챈 것은 아닌 가 두려워 뒤를 돌아보았다.
허름한 가방을 맨 김청수의 눈은 어둠 속에서 더욱 기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치광이의 눈이다.
광기.
소인배가 가장 두려워하는 불순물이다.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자가 상황을 지배하게 마련이다. 어떤 예측도 물거품으로 만든다.
김청수는 자신만의 논리로, 자신만의 현실 속에서 계단을 올랐다. 수많은 계획이 머릿속에서 구축되었다 파괴되기를 반복했다. 모든 것은 놈을 잡기 위해서다. 놈을 잡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고, 언제든 반응하고 움직일 신경을 유지하기 위해 각성제가 필요하다.
그는 긴 일자 드라이버를 들고 있었다. 작고 비굴한 저 남자가 허튼 짓을 하면 바로 투척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두 개의 드라이버는 각각의 양쪽 양말에 들어있다. 짧은 드라이버는 주머니 속이다. 탈취한 무기는 가방에 넣어두었다.
조사장이 자기 사무실을 여는 순간, 그는 이상한 기색을 감지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전혀 의심하지 않을 만한 작은 기척을 그는 알아차렸다.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안구의 작은 떨림, 그 모든 것을 감지할 만큼 그의 신경은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목줄을 잡아채 입을 열려는 남자를 제지하고 문으로 달려들었다.
방 안에 팔이 부러진 남자가 사무실에 장식된 일본도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장덕용.
한손이 불편해 겨드랑이에 칼집을 끼고 칼을 뽑느라 장덕용의 반응은 한 템포 늦춰지고 말았다.
반쯤 칼을 꺼낸 장덕용의 팔에 일자 드라이버가 날아와 박혔다.
비명.
김청수가 노스핀 스로로 드라이버를 던진 것이다.
칼과 칼집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꿈틀거리는 장덕용에게 조사장의 몸이 날아들었다. 김청수가 발로 차 밀은 것이다. 곧바로 몸을 숙여 양쪽 다리에서 드라이버를 꺼낸 김청수는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을 이용해 달려들었다.
몸통박치기.
밀려난 두 사람이 창문이 있는 벽에 격돌했다. 충격으로 창턱에 올려놓은 난이 바닥에 떨어졌다. 화분이 산산조각 나며 자갈을 바닥에 흩뿌렸다.
부러진 팔의 고통, 드라이버가 박힌 팔의 고통, 또 다시 당했다는 굴욕, 이 모든 고통이 동시에 장덕용을 덮쳤다. 또 다른 고통이 뱃속 깊이 파고들었다.
드라이버.
김청수가 쑤셔 박은 것이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바닥에 쓰러진 장덕용의 배와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조사장이 피를 보고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눈앞에 다시 칼집에 들어간 일본도가 보였다. 검도를 배웠거나 한 적은 없다. 야쿠자와의 일을 도와주고 받은 기념품이었다.
조사장은 자갈이 배기는 것도 모르고 몸을 던져 칼을 붙잡고 일어섰다.
“머, 멈춰!”
하고, 넥타이처럼 목에 전기코드 올가미를 감은 조사장이 칼을 뽑으려 했다. 단번에 뽑히지 않고 무언가가 툭 걸려, 잘 되지 않았다.
일본도는 칼이 쉽게 빠져 사고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칼집에 사카즈노(逆角), 혹은 카에리즈노(返り角)라 불리는 돌기가 붙어있어서, 엄지손가락으로 손잡이 보호구인 츠바(鍔)를 밀어 사카즈노를 빼낸다. 방금 전 장덕용이 칼을 뽑기 위해 고생한 이유도 이 사카즈노 때문이었다.
흥분한 조사장은 사카즈노를 빼는 데 머뭇거렸고 그 사이 김청수는 장덕용의 관자놀이를 걷어차 기절시키고, 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칼집을 내던지며 자세를 취한 조사장을 그가 노려보았다. 칼끝이 떨리고 있었다. 엉덩이가 완전히 뒤로 빠져있어 검도의 자세로는 실격이었다. 바지 안쪽은 젖어서 색이 변해있었다. 척척하게 들러붙는 바지 때문에 움직임은 더욱 제한될 터였다.
그는 조사장에게 다가갔다.
“저리 가!”
그는 멈추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는 것은 오히려 조사장이었다.
“저리 가라고!”
그가 다가갔다.
“내가 못 찌를 거 같아, 엉?” 조사장은 히스테리에 빠져 있었다. “이 새끼고 저 새끼고 씨발 다 나를 좆으로 보나! 씨발 죽여 버리겠어! 너도 장덕용이 이 개새끼도 다 죽여 버리겠어!”
그가 다가갔다.
목을 칼끝에 찔릴 기세로 들이댔다. 칼끝이 목을 건드리는 감촉이 조사장에게 전달되었다.
“으악!” 놀란 조사장이 칼을 뒤로 뺐다.
폭력을 저지르는 자는 상대를 물건으로 보게 마련이다. 그렇게 보지 못하는 자는 폭력을 휘두르지 못한다. 공감능력——자신이 폭력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상대에���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막는다.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려는 행동이 가져오는 스트레스가 브레이크가 된다. 인간은 그렇게 동족을 보호하며 진화해왔다.
겁을 먹고 히스테리에 빠진 조사장은 사람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칼을 뺀 것이다.
틈.
그는 거리를 급격히 채웠다. 칼의 사정거리 안으로 파고들어, 그의 두꺼운 주먹으로 칼을 쥔 손목을 내리찍었다.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명.
조사장의 손목이 부러졌다.
그는 조사장의 멱살을 틀어잡아 들어올렸다. 한 손으로 조사장의 몸을 공중에 띄웠다. 발을 버둥거리는 조사장에게 그가 말했다. “금고.”
“네?”
“금고.”
“저, 저기…….” 고통스러워하며 조사장이 눈짓으로 사무실 구석을 가리켰다.
“번호.”
조사장은 번호를 알려주었다.
조사장이 가지고 있던 현금과 약물 총 팔천만원어치가 그의 가방 안으로 사라졌다.
망연자실해 바닥에 주저앉은 조사장의 눈앞에 그가 섰다. 그는 손목을 붙잡아 비틀었다.
“사, 사, 사, 살려, 살려——”
“넌 약속을 어겼어.”
“살려——”
그는 완전히 펴진 팔꿈치를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인대가 끊어지는 소리.
관절이 끊어지는 소리.
불길한 소리에 이어 조사장의 비명이 이어졌다.
“씨발——” 조사장이 몸을 비틀었다.
그는 발목을 붙잡았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는 말없이 무릎을 밟았다.
충격.
비명.
불쾌한 소리.
무릎의 인대와 관절이 끊어져 기묘한 방향으로 비틀렸다. 고장 난 꼭두각시 인형처럼 흐느적거렸다.
조사장은 기절했다.
그는 장덕용의 배와 팔에서 드라이버를 뽑았다. 피가 왈칵 쏟아졌다. 충격으로 장덕용이 정신을 차렸다.
“경고하는 데,” 장덕용의 양복에 피를 닦으며 그가 말했다. “한번 만 더 나를 방해하면, 그 때는 정말 죽여 버리겠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알았나?”
“좆까, 이 새끼——으아——”
김청수가 장덕용의 손가락을 밟아 부러뜨렸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장덕용이.” 김청수가 장덕용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목을 부러뜨리면 다시는 나를 쫒지 못하겠지. 설마 경찰에게 신고하는 쪽팔리는 짓을 할 리도 없고.”
그제야 공포에 질린 장덕용이 몸을 떨었다. “미, 미, 미안해. 내 다신 안 그럴게. 얌전히 서울로 돌아갈 테니까, 제발…….”
“여자도 못 안고 똥 지리며 살아가게 될 거야.”
“제발…….”
“내 딸 같은 어린 애들 빚 대신 팔아넘기고,” 장덕용의 목이 갸웃거리듯 옆으로 기울어져갔다. “걔네들한테 마약 팔고, 장기 떼던 죄. 갚아야지.” 목이 더욱 기울어져 갔다. “평생 천장보고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하고 몸부림치면서 살아 봐.” 목이 완전히 기울어져 귀가 어깨에 닿았다. “그게 네 죗값을 갚는 길이니까.”
비명.
김청수의 주먹이 옆통수에 내리꽂혔다. 지렛대의 원리로 완전히 꺾인 경추가 부러졌다.
김청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이게 하고 또 한 번 주먹을 내리 찍었다. 그렇게 네 방향으로 모두 경추를 골절시켰다.
장덕용이 살고 싶다고 몸부림치기를 그는 바랐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만큼 가장 큰 속죄는 없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경추골절의 충격으로 배설물을 지린 장덕용을 내버려두고, 그는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겁에 질린 택시기사가 물었다. 그의 몸에 묻은 피에 대해서는 차마 묻지 못했다. 내리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그는 사무실의 주소를 댔다. 그가 거래하고 있는 흥신소 사무실의 주소였다.
택시가 떠났다.
         7.
C시에 있는 이름 없는 야산을 택시가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자동차가 자주 다니는 길인지 바퀴가 지나간 흔적 위로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
노란 남자가 택시를 몰고 있었다.
택시는 묘지 앞에 자동차를 세웠다.
양지바른 곳이라 그런지 달빛 정도의 조명으로도 윤곽이 확실히 보였다. 봉분 주위로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흙 위로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었다.
두 개의 봉분은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봉분은 깨끗하게 정돈된 잔디가 깔려있었고, 반대쪽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잡초가 자라 있어 관리를 받지 않은 티가 역력히 났다.
택시에서 내린 노란 남자가 트렁크에서 삽을 꺼내 오른쪽의 봉분으로 다가갔다. 그는 삽을 바로 옆의 봉분에다가 박아 넣었다.
“엄마. 나 왔어.”
하고 그는 오른쪽 봉분의 잡초를 뽑았다. 한동안 잔디를 쓰다듬고, 어머니의 젖무덤에 매달리는 갓난아기처럼 봉분을 한 아름 품에 안고 눈을 감으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뒤 자리에서 일어난 노란 남자는 삽을 뽑아들고 왼쪽의 봉분을 파기 시작했다. 흙의 색이 다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몇 번이나 헤집은 적이 있는 곳이었다. 삽 끝에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나자, 흙을 좌우로 헤집었다. 노란 물체가 그 사이로 나타났다.
그는 흙을 꼼꼼히 헤집었다.
그 아래로 하얀 물체가 보였다.
사람의 손.
그리고, 뼈.
젊은 여자의 반쯤 벌거벗은 시체가 드러났다. 그 아래에는 반쯤 썩은 사람의 살과 뼈가 십 수 명 분 묻혀있었다.
부패로 인한 악취가 그에게는 어떠한 향수보다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위축되었던 짐승을 되살리려고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 뭉치를 꺼내, 열심히 찾은 끝에 한 장의 주민등록증을 꺼내들었다.
박미경의 주민등록증이다.
만찬.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꺼내 자위를 시작하며, 그는 박미경을 마음껏 먹어치웠던 만찬을 떠올렸다. 손 안의 페니스가 단단해지기를 기다리며.
    ***
    ——밤.
노란 남자는 땅을 파고 있었다. 야산의 묘지는 오늘도 달빛으로 밝았다. 그 옆에는 박미경이 기절해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박미경의 몸을 철저히 묶었다. 뒤로 꺾인 팔의 양 손목이 묶여있었고, 남은 줄로 목을 감았다. 이 끈의 중간을 잡아당기면 양 어깨가 꺾이고 목이 졸린다. 다리도 발목이 묶여있다.
땅을 다 판 그는 택시 트렁크에서 비닐로 된 돗자리를 펴고 그 위로 박미경을 굴렸다. 그 충격으로 박미경이 정신을 차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녀가 한참동안 착란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그는 가죽바지를 벗고 콘돔을 착용했다.
“살려주세요,”
하고 정신을 차린 박미경이 애원했다.
엎드린 채로 고개만 뒤로 돌린 그녀의 뒤에서 노란 남자가 접근해왔다. 그녀는 공포 때문에 몸을 떠는 것인지 아니면 한기 때문인지, 그는 알 바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먹이를 먹어치울 생각에 흥분한 그는 아직 젖지도 않은 그녀를 강간했다.
비명.
그는 목과 손목을 연결한 끈을 잡아 당겼다. 목이 막힌 그녀가 몸을 비트는 모습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쾌감이었다. 엉덩이를 향해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자 점막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했다.
피투성이가 된 콘돔을 묶어 한쪽에 던져 넣은 그는 콘돔을 꺼내 항문에 피를 발라 억지로 삽입했다. 갑작스러운 통증과 충격으로 박미경이 기절했다. 점막이 완전히 찢어지고 괄약근이 파열될 때 까지 그는 억지로 피스톤 운동을 계속했다.
기절한 박미경을 내버려 둔 채로 노란 남자가 일어났다. 콘돔을 처리하고 난 그는 줄을 거칠게 잡아당겨 박미경을 일으켜 세웠다. 정신을 잃은 채인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뺨을 후려쳤다. 충격으로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따귀는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부어오르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린다. 그런데도 그는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도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따귀는 주먹질이 되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의 입에서 부러진 어금니가 피에 뒤섞여 떨어졌다. 고통으로 실금하기까지 했다.
노란 남자는 내내 미소 짓고 있었다. 금니는 물론이고 어금니까지 드러낸 그의 입은 짐승처럼 찢어져있었다.
“울지 마, 아가씨. 아까처럼 덤벼야지. 응?”
“아저씨,” 심한 구타로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박미경씨,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갚아야지. 그렇게 욕을 하고 개기고 그러면 되겠어?”
신음.
오열.
그녀는 몸부림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이 그에게는 쾌감이었다.
발길질.
주먹질.
닥치는 대로 폭력을 가했다. 발기.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핥으며 웃음을 터트린 그는 박미경의 다리를 들어 올리고 다시 한 번 범했다. 유방을 이로 깨물어 이빨자국을 냈다. 피가 흘러내렸다. 주먹으로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얼굴에도 주먹을 휘둘렀다. 울음이 끊이지 않는 박미경이 피를 토했다.
내일 회사에 갈 걱정.
과장에 대한 분노.
부모님에게 대한 미안함.
삶에 대한 욕망.
자신의 몸이 물건처럼 격하되고 짓밟히는 데에 향한 공포.
고통.
분노.
절망.
“씨발 놈아……, 절대로 용서 못해……. 경찰에 신고하든…… 널 죽여 버릴 거야…….”
“죽여?”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란 남자가 말했다. “내가 죽여줄게. 너 오늘 아주 죽여줄게.”
그는 목을 졸랐다.
박미경의 피투성이로 엉망이 된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뒤섞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깊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동정으로 동조할 그 감정을 그는 자위를 위한 도구로만 삼았다.
박미경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 제대로 조여주네.”
하고 그는 손에 힘을 더욱 더 가했다.
박미경의 숨이 끊어졌다.
그는 아직 사정하지 않았다.
피에 젖은 콘돔을 꺼내 손으로 자위를 시작했다. 손에 남은 교살의 감촉이 그대로 성기로 전해지는 기분이 든 그는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사정했다…….
    ***
    “사장님, 그런 짓을 하면 어떡합니까? 일 났네, 진짜.”
효성흥신소 사장 최계문은 김청수의 말을 믿을 수 가 없었다. 장덕용이라면 그의 업계에서는 유명한 사채업자고, 조사장도 이 지역에서 발이 넓어 친교를 맺은 건달도 많은 사채업자다. 그런 두 사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돈과 약까지 털어가지고 나왔다는 이 남자를 지금 당장이라도 내쫒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는 없다. 그랬다가는 그도 같은 꼴이 될 테니까.
“갈아입을 옷이랑 숙소.” 김청수가 말했다. 소파에 앉은 그는 시종일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손에는 짧은 드라이버를 쥐고 있었다. “그 여관으로는 다시 못 가. 라이터 좀 줘봐.”
최계문이 건넨 라이터를 받아든 그는 강탈한 각성제 결정을 꺼냈다. 주머니에서 쇠숟가락을 꺼내 결정을 올리고 라이터로 가열을 시작했다.
“택시 조사는 끝났나?”
“예.”
“우리 딸은 택시 탄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 어디 있는 지는 말하지도 못했지. 급하다고. 그게 마지막이야. 사랑한다는 말도, 아끼고 있다는 말도 하지 못했어. 분명 택시기사야. 서울에는 없었어. 그럼 남은 건 여기밖에 없어.”
최계문이 한숨을 내쉬며 아이패드를 꺼내 조사한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도깨비 택시 기사들 사이에 소문이 있어요.”
“도깨비 택시?” 각성제 용액을 주사기에 담으며 김청수가 대답했다.
“이 동네 개인택시 하는 기사들이죠. 그 사람들 사이에 몇 년 간격으로 못 보던 택시가 돌아다닌 데요. 유령 택시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도깨비 택시에 유령 택시라.”
각성제를 주사한 김청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 쪽에서 구한 정보를 보니까,” 최계문이 수첩을 꺼내 자료를 대조하며 말했다. “유령 택시가 돌아다니는 시기랑 여자들이 실종되는 시기랑 비슷하게 겹쳐요.”
“그 놈이군.”
“아직 확��할 수 는 없습니다.”
“그 놈에 대한 정보를 찾아 줘.” 김청수가 가방에서 지폐뭉치를 꺼냈다. 오만 원짜리 백장이었다. “삼일 안에.”
침을 삼키게 최계문이 지폐를 받아들었다. “제가 아는 DVD방이 있는데, 거기에 며칠 숨어 계세요. 연락은 전에 드린 대포폰으로 하시고.”
“알았어.”
최계문이 주소와 전화번호를 휘갈겨 적은 수첩을 찢어 건넸다.
김청수가 밖으로 나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최사장.”
“예?” 신이 나 돈을 세던 최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나 배반하면, 최사장도 장덕용이 꼴 날 줄 알아.”
“……예.”
“정보가 쓸 만하면 한 뭉치 더 줄 테니까, 확실하게 처리해줘.”
“걱정 마십쇼. 살펴 가세요. 아, 김사장님.” 일 억짜리 일을 맡긴 고객을 함부로 움직이게 할 수 는 없다. 그는 차키를 던졌다. “밑에 차 쓰세요. 옷은 제가 따로 사람 시켜 보내겠습니다.”
“그냥 차에서 지내면 안 되나?”
“요새 경찰이 단속이 심해서 분명 걸릴 겁니다. 그냥 DVD방에 계시는 편이 나아요. 샤워시설도 있고요.”
김청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8.
노란 남자는 그때처럼 사정하려 했다.
그러나, 발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씨발!”
그는 뼈를 짓밟았다.
그 새끼 때문이다, 노란 남자는 생각했다. 삽질을 해 흙을 원래대로 덮은 그는 짜증스레 봉분을 밟아 다졌다. ‘전리품’으로도 발기가 되지 않는다. 풀리지 않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온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에서조차, 해소가 안 된다는 절망. 짜증. 불만. 신경질.
전국을 떠돌며 짐승처럼 충동에 충실히 살아왔다. 제멋대로 폭력을 휘둘러왔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겪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안달이 났다. 뒷정리를 마치고, 거칠게 트렁크를 닫으면서도 그는 이름 모를 그 남자——김청수——를 생각했다. 그 근육. 그 힘. 모든 것이 일일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운전석에 타 시동을 걸었다. 머릿속으로는 그 남자를 두들겨 패 죽이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타고 야산을 내려갔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 속으로 손을 넣고 자위를 했다.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발기가 되지 않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해결되지 않은 짜증 때문인지, 아니면 그 남자와 싸울 때 취할 전략을 짜느라 머리가 너무 무리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숨 자지 않으면 이 모든 긴장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정도로 전신에 긴장이 쌓여갔다. 긴장의 내압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그의 성질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갔다. 곪아서 곧 터질 종기처럼 건드리기만 하면 곧바로 신경질적인 폭력이라는 고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목덜미가 가려워왔다.
노란 남자는 거친 산길에 요동치는 차 안에서 욕설을 중얼거렸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
    “야, 너 뭐야? 문 안 열어?”
하고,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차 유리창을 두들겼다. 밤인 데다가 선팅이 되어있어 자동차 안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우락부락하고 짤룩한 몸집에 상고머리를 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얻어맞아 변형된 눈썹 뼈가 불거져 나와 눈꺼풀이 아래로 쳐진 거적눈이었다. 노란 가로등불 아래에서 보니 더욱 더 험상궂게 보였다.
그가 두들기는 자동차는 택시였고 그도 택시기사였다. 자기 구역에 버젓이 차를 세워둔 택시가 괘씸해 혼을 내주려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함부로 택시를 몰 수 없다. 분명 나이 먹고 소일거리 하려고 개인택시를 시작한 노인��가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개념 없는 노인네에게 이 지역의 룰을 뼈아프게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말 그대로 뼈아프게.
싸움에는 자신이 있는 남자는 교활하기도 했다. 손에는 트렁크에서 꺼낸 렌치를 들고 있었다. 무기를 들고 있으면 겁을 주기 더 쉽다. 만일 계속 반응이 없으면 자동차 앞 유리를 깨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면 며칠 장사를 못하게 되고 개념을 제대로 잡을 테니까.
“야! 야!”
하고 손가락으로 문을 두들기던 남자는 본때를 보여줄 요량으로 렌치를 높이 들어올렸다. 앞 유리를 겨냥하고 내리치려는 데 전기모터 소리를 내며 자동차 창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왜?”
안에서 들린 목소리는 생각보다 젊었고 생각보다 건방졌고, 그를 더 화나게 했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려고 창문가에 눈을 가져다댔다만, 창문 위에 설치한 플라스틱 빗물받이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아 더 화가 났다. “내려.”
“왜?”
“뭐 이 새끼야?”
“왜?”
뻔뻔한 대답에 외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침착함을 되찾고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 내 구역이야. 나가.”
“왜?”
“내 구역이라고.”
“그러니까, 왜?”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왔다. “왜 여기가 니 구역인데?”
그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설명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 새끼가!” 화가 난 그는 렌치를 휘둘렀다.
충격.
차문이 벌컥 열리며 그의 배를 쳤다. 렌치를 휘두르려고 무게중심이 위로 쏠렸던 그는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씨발 놈이!”
하고 남자가 고개를 들다, 날아드는 구둣발에 얼굴이 짓이겨졌다.
“아저씨, 왜 남에 차에다 지랄 질이세요.” 나른한 말투로 차에서 내린 남자가 말했다.
코뼈가 뭉개져 피를 흘리는 험상궂은 남자가 일어나 렌치를 휘두르려 하자, 노란 남자는 다리만 들어 올려 구둣발로 가슴팍을 밀어 찼다.
험상궂은 남자가 바닥을 구르며 렌치를 놓쳤다.
노란 남자가 렌치를 주어 들었다. “여기가 누구 구역이라고요?”
“씨발…….” 험상궂은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기침을 토했다. “너 내가 누군 줄 알——”
비명.
노란 남자가 렌치를 내리쳐 험상궂은 남자의 쇄골을 부러뜨렸다.
고함을 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험상궂은 남자를 다시 한 번 렌치로 내리쳤다. 이번에는 등줄기였다.
“남자가,” 노란 남자가 말했다. “허리 다치면 큰일인데. 어쩐다? 기집도 못 따먹고 다니시겠네?”
“사……살려주세요…….”
“그런데 누구시더라?” 엎드려서 떠는 험상궂은 남자를 발로 밟으며 노란 남자가 말했다. “내가 누구신지도 모르고 실례를 범하네요?”
“아니……아무 것도——”
비명.
렌치가 허리를 내리쳤다.
험상궂은 남자가 눈물을 흘렸다.
노란 남자는 렌치를 내던지고 발길질을 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배와 등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걷어찼다. 한참을 걷어차던 노란 남자가 거친 숨을 고르며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아저씨,” 노란 남자가 험상궂은 남자의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 데, 복수니 이런 거 생각하지 마쇼. 똘마니 잔뜩 데려와도 난 아저씨만 조질 거니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뽑아 들여다보았다. “아저씨 주민등록증이랑 면허증은 내가 챙겨 갑니다, 응? 이런 분이셨네? 몰라봐서 죄송해 죽겠네, 아주 그냥. 우리 아부지 같아서 내가 봐주고 아저씨 차도 내가 손 하나 안 댈 테니까, 앞으로 잘 보고 오줌 싸지르고 다니쇼, 응?”
험상궂은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통으로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답이 없네. 차도 부수고 아저씨도 그낭 목 아래로 조져놓을까? 못 쓰게? 아니면 아저씨 집 한번 찾아갈까?”
“아……, 알겠습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 일은 딱 다물고 어디서 씨불이고 다니지 마시고. 솔직히 쪽 팔리잖아. 나이 쳐 먹고 꼬장 부리다 존나 맞았다고 하면. 집에서 한 달 푹 쉬시고. 알았어? 내가 아저씨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파. 그래서 위자료 좀 챙겨 갈 테니까, 그렇게 아시고. 불만 없죠?”
“네……, 네…….”
“복 받을 양반이야.”
노란 남자는 험상궂은 남자의 택시에서 돈을 모두 챙겼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험상궂은 남자는 그대로 기절했다.
그는 택시를 몰고 거리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야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죽여 달라고 할 때 까지 폭력을 휘둘렀을 것이다. 늙은 남자들이 문제다. 그는 늙은 남자를 싫어했다.
“꼰대 새끼들.” 그는 운전대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다 죽여야 돼.”
그는 나이 먹은 남자를 싫어했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늙은 남자의 얼굴에서 짐승 같은 무표정과 잔인함을 발견할 때 마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했고,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다. 요즘 들어 모두 자신에게 개기는 놈이 많아졌다. 잠깐 눈 좀 붙이려는 데 방해를 받아 긴장과 짜증은 외려 배로 늘어나버렸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다.
그는 자신보다 강한 수컷,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를 싫어했다. 그 뿌리에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잠들어있었다.
         9.
어린 시절 나이 그의 아버지는 남들이 보기에는 할아버지였다. 흰머리에 흰 수염이 난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할아버지였다. 그는 마을에서 돈이 꽤나 있는 집에 막둥이로 태어났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어디 가서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었다. 학교에서도 애들이 놀려대곤 했다. 하지만 그래서 싫었던 것은 아니다.
막둥이는 보통 예쁨 받으며 자라게 마련인데도 그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이유도 없이 계속해서 맞았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회초리나 가죽 허리띠로 얻어맞는 날이 네 살 때부터 있었다. 그 이전에도 얻어맞았을 테지만 기억을 하지 못했다.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던 이유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맞았다. 그의 아버지는 구타를 즐기고 있었다. 자신의 등에 허리띠를 휘둘러대면서 발기했던 아버지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때 마다 그를 보듬어 준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이차이가 상당히 났다. 그는 중학교 3학년이 될 때 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머니의 젖을 빨았다. 그때 그녀는 아직 30대 후반이었다.
아버지의 학대는 어머니에게도 용서가 없었다. 어릴 때는 밤마다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와 아버지가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 옆방에 있는데도 방음이 제대로 안 되는 한옥집이다보니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가 된 일체감을 느꼈다.
다음 날 어머니의 젖을 물 때 가슴에 생긴 이빨자국을 발견하면 가만히 만져보거나 자신의 입을 가져가 대기도 했다. 그럴 때 자기에게 힘이 생기는 감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약간 모자란 사람이었고 밖에 나가는 일도 없었다. 살림도 하지 않았다. 살림은 식모가 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모든 일에 무관심해보였다. 마취된 사람처럼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감각을 멀리하려했다. 졸린 표정으로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더러운 것을 바라보듯 자신을 쳐다볼 때 마다 그는 그 식모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식모만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기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수군거리고 자기랑 놀고 있는 아이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저 집 애랑 놀지 말라”고 하는 동네사람들이 그는 증오스러웠다. 자기가 어딘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긴 구석이 있어서 그런가 싶어 거울을 꼼꼼히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사내새끼가 거울이나 보고 있다고 그의 뒤통수를 짓밟았고, 앞니가 완전히 깨졌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자기를 터부시 한 이유를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깨물려 생긴 상처를 빨다가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정통(精通)을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 어머니를 지키고 아버지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낮 동안 밖에서 술과 노름으로 시간을 보내, 집은 어머니와 식모와 그를 포함한 세 명 밖에 없었다. 식모는 낮잠을 잤다. 외부에서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집 안은 사실상 어머니와 그, 단 둘이었다.
그는 마당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아버지가 예전에 사용했다던 시멘트를 굳혀 만든 역기를 들었다. 그런 그를 어머니는 자랑스러워하며 하루가 다르게 단단해지는 아들의 몸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가끔씩 수건이 없으면 손으로 훔치거나 혀로 핥아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 마다 그는 발기했고 어머니가 흐뭇한 표정으로 살짝 자신의 물건을 손으로 스치고 지나갈 때 마다 황홀경에 빠졌다.
둘 사이의 은밀한 관계는 아버지가 밖에서 여자를 만들어 집에 드문드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밤이 되면 그는 어머니의 젖을 빨면서 어머니가 요구하는 대로 엉덩이며 배를 꼬집었고, 흥분해 그가 발기하면 어머니가 손으로 그의 성기를 애무했다. 그가 사정을 하려 하면 어머니가 입으로 정액을 받아먹었다. 그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둘 사이의 관계를 식모는 알아차리고 있었다. 식모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둘의 관계가 들통 난 것은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어머니가 구강성교를 하고 있을 때 장지문이 열렸다. 비에 젖은 아버지는 손에 낫을 들고 있었다. 다짜고짜 낫으로 어머니의 등을 찔렀다. 분수처럼 튀기는 피가 드러난 그의 하반신에 튀겼고, 그는 어머니의 입 안에 사정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신적인 상태가 그대로 그에게 동조되었다. 고통과 쾌락이 수 만 개의 바늘이 되어 그의 뇌를 찌르는 듯 했다.
어머니를 욕하며 낫을 뽑아 든 아버지는 자신을 향해서도 낫을 휘둘렀다. 이마에 깊이 낫의 날 끝이 스치고 지나갔다. 얼굴 한쪽이 완전히 피로 젖었다. 두려움에 몸을 떨던 그의 앞에 아버지가 섰다.
“이 니애미씨발놈, 너 같은 놈이 진짜 니애미씹할놈이지, 감히 내 걸 노려?”
“아버지…….”
“누가 니 애비야? 어떤 자식새끼가 감히 아버지 걸 지 맘대로 처먹고 지랄이야!”
아버지가 낫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죽는다.
그는 공포로 몸이 굳었다.
그 순간, 아버지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방탕한 생활로 약해진 심장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 틈을 노려 달려들었다. 낫을 쥔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심장이 힘을 앗아가 그의 아버지를 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낫을 빼앗아 아버지의 얼굴에 쑤셔 박았다.
절정.
그는 온 몸의 세포가 솟구쳐 오르는 고양감을 느꼈고 쓰러진 아버지의 등에 낫을 박아 넣었다.
정수리로 모이는 열기와 쾌감은 그가 낫을 박아 넣을수록 강해졌다.
수 십 번의 난도질.
낫을 페니스 삼아 마구 휘둘러댔다. 어머니의 시체에도 낫질을 해댔다.
날붙이에 찢겨나간 등의 상처 사이로 근육과 내장과 척추가 보였다.
어머니의 벌어진 상처를 향해 자위를 하던 그는 사정했다. 내장이 쏟아져 나오며 풍기는 악취조차 느끼지 못했다. 절대적인 절정감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공포였다. 살인이라는 금기를 어겼다는 데서 오는 공포나 생리적 혐오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애초에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살인을 한 뒤로 자기가 받아야 할 불이익이 두려웠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를 등지고 선 그림자가 있었다. 식모였다.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는지, 그는 몰랐다. 낫을 주어 들었다. 증인을 없애야 한다.
“부전자전이구나.” 식모가 말했다. 식모의 손에는 식칼이 들려있었다.
식모는 무관심한 표정 그대로 그에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모든 진실이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산산조각 냈다. 그는 울었다. 식모를 죽이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식모는 그의 친할머니였다. 남편에게 학대를 받던 그녀는 불감증이 되었고, 그는 임신 중 자기가 가한 폭력의 영향으로 백치로 태어난 아름다운 친딸을 성욕의 도구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할아버지기도 했던 것이다. 식모——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보험금과 부동산 등 재산을 노리고 지금까지 철저히 참아왔다. 그리고 오늘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부정한 존재끼리의 근친상간도, 할아버지를 불러오게 한 것도, 낫을 쥐어준 것도, 다 그녀의 계획이었다. 할아버지가 그와 그의 어머니를 죽인다면 그녀가 직접 할아버지를 죽일 셈이었다.
할머니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뇌물을 받은 의사 덕분에 두 사람의 죽음은 자연사로 처리되었고, 장례는 치르지 않았다. 보험금을 받아 챙긴 할머니는 당시로는 거액이었던 500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을 쥐어주고, 고아원에 그를 남겨둔 채 사라졌다. 그 뒤로 그녀의 소식은 없었다…….
    ***
    밤이 되어 더욱 독기어린 불빛을 어지러이 뿌리는 모텔��을 돌아다니며, 그는 한 가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대로는 영원히 ‘서지’ 못한다.
전국을 떠돌며 마음대로 살아온 그가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계속해서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 목덜미가 가려워왔다. 이대로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과거 그랬듯이, 이번에도, 없애야 한다.
누구를?
그 개새끼를.
하지만, 어디서 찾지?
         10.
며칠 동안 단서는 보이지 않았고, 사정을 금지당해 해면체가 곪아 들어가는 페니스처럼 노란 남자는 예민해져갔다. 건드리기만 해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다.
단서를 찾기 위해 그는 택시 운행을 했다. 손님들이 신경을 거스를 때도 많았다. 그럴 때 마다 그는 박미경을 떠올렸다.
대낮의 기사식당은 단서를 찾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택시기사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말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매우 천천히 국밥을 먹었다. 가게 주인이 눈치를 줄 때 마다 수육을 추가했다. 앞으로 다가올 전투를 위해 그 정도는 먹어야 했다.
드디어, 단서가 들렸다.
“조사장 소식 들었어?” 멀리서 택시기사들의 대화에서 그의 관심을 끄는 이름이 나왔다. 덕수장에서 얻어터졌던 그 사채업자다.
“병원에 입원했다면서? 엄청 얻어맞아서.”
“팔이랑 무릎이 완전 나갔데. 산산조각 났나봐.”
“그 조사장 사무실에 와 있던 그 서울 조폭 있지?”
“장덕용이?”
“종로쪽 계보 아냐? 사채하는.”
“목이 부러져서 목 밑에가 완전 나갔데.”
“장덕용이가?”
그 말을 들은 노란 남자는 흥분으로 몸이 떨려왔다. 귀를 기울였다.
“최문순이가 그날 봤어.”
“뭘?”
“조사장 사무실에서 피 잔뜩 묻히고 나오는 남자.”
“정말?”
“키는 그렇게 안 큰데 몸이 아주 갑빠랑 근육으로 가득하더라고. 뭐라고 뭐라고 중얼중얼 하던데.”
노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잡았다. 드디어 잡았다.
노란 남자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응?” 기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조사장님 사무실에 나왔다는 그 새끼, 혹시 어디 있는 지 아십니까?”
“아, 최문순이가 봤다던? 나도 못 들었는데. 왜요?”
노란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열었다. “조사장님한테 신세를 졌었는데, 지금 처음 들어가지고요. 병문안도 가고, 그 새끼 잡으려고.”
“누군지는 모르고,” 남자는 국밥을 떠먹으며 말했다. “조사장이 지금 그 놈 잡으려고 난리던데. 가서 도와줘요, 그럼.”
“병실이 어딘지 아십니까?”
남자가 병실을 알려주었다.
    ***
    조사장은 분노하고 있었다. 화가 나 고함치는 그의 목소리가 병원 안에 울려 퍼졌다. 환자, 환자 보호자, 심지어 이런 일에 익숙할 데로 익숙한 간호사들까지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조사장은 분노를 육체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애초부터 빈약했던 데다가 부러지고 상처입어 석고로 고정되어 있었다. 소리를 지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저녁식사가 놓인 쟁반을 조사장이 힘없이 집어 던져도 부하들은 피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자기들에게까지 날아오지도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침대 주변에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죄책감이나 동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귀찮다. 돈만 아니었다면 여기 있지도 않는다.
“잡아오란 말이야!” 조사장이 목쉰 소리를 질러댔다. “그놈이 최계문이하고 관계가 있다면서! 그런데 왜 못 잡냐고!”
“증거가 없어요,” 부하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최계문이는 딱 잡아떼고 있고, 또 그 뒤에 경찰 간부들이 버티고 있어서 함부로 대하지도 못한단 말입니다.”
“병신 새끼들…….”
“사장님,” 부하 하나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놈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어디!”
“애기들 중 하나가 DVD방에서 기집이랑 떡치러 갔다가 본 것 같다고 합니다. 변장하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근육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맞을 거랍니다.”
“확실한 게 아니고?”
“확인하러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럼 빨리 움직여, 새끼들아!” 부하들이 어물어물 밖으로 나가자, 조사장이 등에 대고 소리쳤다. “또 각그렌저 같은 거 타고 가고 그래라, 응? 티 다 나게. 대가리 좀 써라, 새끼들아. 택시 잡아서 가! 그래야 눈치 못 챌 거 아냐! 그리고 다 가면 어떡해! 몇 놈은 여기 남아서 심부름 하고, 몇 놈은 혹시 모르니 딴 데 수색해야 할 거 아냐! 대가리가 씨발 몇 갠데 이렇게 답답하냐? 야, 담배!” 부하 하나가 담배를 물려주었다. “무개념 새끼들. 야, 택시 카드로 긁으면 영수증 챙기고.”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환자분, 병원 안에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됩니다.”
“아, 씨발!” 조사장이 깁스 위에 담배를 눌러 껐다.
병원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한편 부하들은 현관 로비에서 서로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었다.
DVD방으로 갈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다.
양복 차림의 거한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는 기묘한 모습에 병원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그들이 사람을 잡으러 간다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아! 씨발!”
“다녀와라, 병신아.”
두 명이 선택됐다.
추적조 둘은 밖으로 나와 명령대로 택시를 잡으려고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병원 앞 정류장에는 언제나  택시가 잔뜩 늘어서 있다.
그들에게 불량하게 생긴 금발머리 중년이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뭐야?” 부하 중 하나가 말했다.
“혹시 조사장님 쪽 식구들이십니까?”
“너 뭐야?”
“제가 조사장님에게 신세를 많이 져서, 병문안을 왔는데 어디인지를 몰라서요.”
“돈 빌렸어?”
“예.”
“지금 열 받았으니까, 나중에 가쇼.” 그들은 중년 남자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
“어디 가십니까?” 남자는 집요하게 그들을 붙잡았다.
“아, 왜?”
하고 짜증스럽게 대답하자 중년 남자가 병원 한쪽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제가 택시기사를 하는데, 태워드리겠습니다. 공짜로요.”
중년 남자가 미소 지었다. 앞니 한 구석의 금니가 침으로 번들거렸다.
    ***
    DVD방의 객실 안에서 근육질 남자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틀어놓은 채로 담담히 힌두 스쿼트를 하는 남자의 몸에는 구슬땀이 맺혀있었다.
김청수는 영화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소룡이나 성룡처럼 되고 싶다고 운동을 한 적도 있었다. 박노식처럼 폼 나게 살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으로 꿈이 바뀌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얼굴로는 배우가 되는 게 무리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공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장 일을 견디기 위한 공상이었다.
공장을 다니면서도 영화는 그의 취미였다. 경리 일을 하던 아내와 결혼 전 하던 데이트도 영화보기였다.
공장이 망한 것은 그들이 결혼하고 딸이 태어났을 때였다. 돈을 모아 비디오 가게를 차렸다.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DVD, 대여용 책, 비디오가 잔뜩 있었다.
딸이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죽었다. 고생만 시키다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딸에게 더 신경을 썼다. 그의 사랑이 딸에게는 구속으로 느껴졌었고, 그녀는 지방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딸은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누구와 있는 지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럴수록 더욱 귀찮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삼년 전——
“아빠, 나 있다가 전화할게. 택시 타려고.”
“어딘데?”
대답 없이 전화가 끊겼다.
마지막 통화였다.
그는 딸을 찾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했다. 경찰에게 매일같이 찾아갔다. 택시라는 단서만 가지고 서울 시내를 이 잡듯이 뒤졌다. 가게는 팔아 넘겼고, 사채를 썼다. 범인을 잡기 위해 몸을 키웠���. 싸움을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단서의 실마리를 잡았다.
스쿼트를 하는 허벅지의 근육이 꿈틀대며 날뛰고 싶다고 소리 없이 애원했다. 팔을 흔드는 등의 광배근이 폭력을 원하며 꿈틀거렸다.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이 부러웠다. 영화는 납치된 딸을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저 아버지는 구할 딸이 살아있다.
그는 딸이 살아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 어딘가로 팔려갔을 지도 모른다.
어느 날부터 그의 귀에서는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 추워.”
그의 귓가에서 딸이 속삭인다. 딸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알려왔다.
그는 믿지 않으려 했다. 세상 어느 부모도 실종된 자식이 죽었다고 인정하는 경우는 없다.
“아빠,” 딸은 속삭였다. “나 아파. 아빠, 나 무서워. 아빠, 어디 있어? 아빠. 아빠. 아빠. 그 놈을 죽여줘. 그놈이 날 죽였어.” 딸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딸은 자신이 죽었다며 복수를 부탁해왔다.
그는 언제나 딸에게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갈게. 넌 아직 안 죽었어. 넌 살아있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딸이 아직 살아있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세상 모두가 딸이 죽었다고 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영화가 끝났다. 주인공은 딸을 구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생각했다. 인생에는 특수효과도, 편집도, 되감기도, 재촬영도, 해피엔딩도 없다. 자기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
옷을 입고 드라이버를 양말에 집어넣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최계문이었다.
“사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최계문은 조사장의 병문안을 가겠다는 택시 기사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아무래도 수상한 차림새였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면 연관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불량해 보이고 나잇값을 못하고 있었데요. 노란 염색에 금니에 노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사장이 아무래도 거길 눈치 챈 것 같습니다. 바로 옮기셔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은신처를 바로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스테로이드와 각성제를 사용한 뒤, 가방을 맸다. 몸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좁은 곳에 갇혀 있으면 불리하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객실마다 영화를 보며 서로의 몸을 더듬는 커플들이 가득했다.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사장에게 인사한 뒤 가게 밖으로 나갔다. 가게는 3층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밑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적.
그는 곧바로 긴 드라이버를 꺼내 한손에 쥐었다. 연달아 던질 준비를 했다. 나이프도 꺼내 날을 뽑았다. 계단 위로 올라간 그는 적들이 DVD방의 문 앞까지 오기를 기다리며 매복했다.
적이 나타났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DVD방의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비명.
일자 드라이버가 손등을 관통했다.
놀라서 주변을 살피는 조직 폭력배 둘에게 일자 드라이버와 나이프가 날아와 꽂혔다.
계단을 뛰어내린 김청수가 난간을 잡은 채로 둘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두 사람이 뒤엉켜 버둥거렸다.
도약.
일어나려는 조직 폭력배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공중에 뛰어오른 그가 무릎으로 둘의 몸을 내리찍었다. 두 사람의 흉곽이 동시에 내려앉았고 부러진 갈비뼈가 장기를 찔렀다.
절규.
놀란 DVD방 사장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등에 단단히 조여 맨 가방을 푼 그가 만 원짜리 지폐 한 덩이를 꺼내 사장에게 던졌다. “미안합니다.”
당황해 머뭇거리던 사장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사이, 그는 일자 드라이버와 나이프를 회수해 피를 닦았다.
계단을 내려간 그는 최계문에게 전화를 걸면서 택시를 잡으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습격당했어. 일단 그리로 가지. 혹시 모르니까, 이 대포폰 위치추적 시켜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그의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선팅이 심하게 되어있었다. 그는 조수석 창문을 두들겨 창문을 내리라고 신호했다.
창문이 내려갔다.
택시기사의 머리카락은 염색한 금발이었다.
그의 직감이 꿈틀거렸다.
“안전벨트 매 주세요.” 택시기사가 말했다.
그는 요구에 따랐다. 가방을 벗어 옆에 두고 안전벨트를 맸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하고 묻는 택시기사에게, 그는 최계문의 흥신소 사무실 주소를 불러주었다.
“거기 흥신소 아닙니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봅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최계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최계문이 말했다.
“하고 있나?”
“예? 아, 예. 위치추적 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한 그 건 말이야. 오천만원. 그거 준비 다 되었으니까, 받아가.”
“찾았습니까?”
“음.”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음.”
그는 전화를 끊고,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양말에 넣어 둔 일자드라이버를 피부로 느꼈다. 팔을 살짝 움직여 주머니의 나이프와 벨트 사이에 끼어 둔 짧은 드라이버도 확인했다. 그는 준비가 되었다.
택시기사——노란 남자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 보였다. 상상한 대로의 남자였다. 자기 멋대로 상황을 휘두르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놈. 그가 파악한 범인상에 딱 맞았다.
잡았다.
자동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흥신소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가야하는데, 택시는 왼쪽으로 들어갔다.
놈은 딸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의 광기가 속삭였다.
아빠, 추워.
기다려, 아빠가 갈게.
         11.
택시가 갑자기 가속을 시작했다.
그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아서가 아니다.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수장에 묵었었죠?” 노란 남자가 말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봤어요. 건달들 두들겨 패는 거. 운동하셨나봅니다? 몸이 장난이 아니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하시는 분입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건달은 아니신 거 같은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을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노란 남자가 천장의 스위치를 눌렀다. 금속음과 함께 안전벨트와 차문의 잠금장치가 작동했다.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야.”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노란 남자를 백미러를 통해 노려보기만 했다.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침묵.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이 개새끼가, 사람을 무시하나.” 화가 난 노란 남자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야! 내 말 안 들리냐고! 어? 씨발 놈이, 입 안 열어? 어!”
침묵.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무시한다 이거지? 응? 그렇게 세다 이거지?”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나 같은 새끼 말은 무시한다 이거지! 응? 이 개새끼야! 네가 그렇게 센 줄 알아?”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좆까, 씨발. 내가 더 세. 너 같은 새끼 대가리 깨서 죽여 버려, 알아? 이 새끼야?”
침묵.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뒤져, 새끼야!”
브레이크를 밟으며, 천장의 스위치를 눌렀다.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그의 몸이 튕겨나갔다.
두 손이 자동차의 앞좌석을 붙잡았다. 손에 딱딱한 금속이 잡혔다. 그는 그 순간 이 노란 남자의 수법을 바로 파악했다.
택시가 멈췄다.
노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뒷좌석에 널브러져있었다.
“씨발 놈이, 진작 알아서 기었어야지.” 노란 남자가 흥분으로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꺾었다. “넌 오늘 뒤졌다, 새끼야.”
택시가 야산으로 향했다.
그는 몰래 주머니에서 나이프와 짧은 드라이버를 꺼내 뒷좌석으로 던졌다.
그가 뿌린 미끼를 노란 남자가 물었다. 이제는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 만 남았다. 흥분으로 몸이 떨려왔다.
그는 이를 악 다물었다. 망쳐서는 안 된다. 참아라. 죽은 시체처럼 얌전히. 조용히. 숨조차 쉬면 안 된다. 저 개새끼가 이겼다고 생각하게 만들자. 시체처럼.
이제 곧 저 개새끼가 시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딸을 만난다.
어디 있어, 아빠. 나 무서워.
아빠가 금방 갈게, 기다려.
금방 갈게.
    ***
    야산의 묘지 앞에 택시가 섰다. 묵직한 산바람이 봉분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고 달빛으로 밝았다.
노란 남자는 택시에서 내려 뒷자리의 문을 열었다. 나이프와 드라이버가 떨어져 있었다. 무기가 분명했다. 모두 챙겨들고,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뺏었다.
핸드폰도 드라이버도 나이프도 모두 숲속으로 던졌다. 놈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트렁크로 향했다.
노란 남자는 언제나 하던 데로 돗자리를 깔고 끈으로 묶고 마음껏 때리고 먹어치운 다음 숨통을 끊어놓을 생각이었다. 삽을 꺼낼 때 까지만 해도 그 생각에 몸이 떨려왔다. 발기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사정할 수 있다. 마음껏 싸지를 수 있다.
    ***
    그는 택시에서 튀어나가 등을 보이고 있는 택시기사에게 돌진했다.
비명.
기다란 일자 드라이버가 신장을 찔렀다. 그가 온몸의 체중을 이용해 쑤셔 넣은 것이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노란 남자가 삽을 휘두르며 반격했다.
뒤로 물러나 피하다 이마에 격통을 느꼈다. 삽날에 맞은 것이다. 피가 뺨을 타고 흘렀다. 충격으로 일자 드라이버를 놓쳤다.
삽을 휘두르며 달려들려는 노란 남자가 신장의 통증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그가 달려들었다.
노란 남자가 삽을 내질렀다.
배를 얻어맞은 그가 나가떨어졌다.
삽을 지팡이삼아 일어난 노란 남자가 삽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가 삽에 맞았다. 삽날의 예리한 부분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관자놀이를 쇳덩이로 맞았다. 머리가 어질해졌다.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거리를 둬야 한다.
몸을 일으킨 그의 두 손은 비어있었다. 드라이버를 꺼내지 못했다. 아직 남겨둬야 한다.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이 개새끼…….” 노란 남자가 말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 지 알아? 다 네 놈 때문이야.” 노란 남자가 삽을 쳐들며 달려들었다. “너 때문이라고, 개새끼야!”
두 손을 권투선수처럼 올리고 공격을 피하는 그의 몸에 삽이 달려들었다. 둔탁하게 쇠가 울리는 소리가 연달아 퍼졌다. 세 방. 네 방. 다섯 방. 그는 견뎠다.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뒤로 돌아서서 달리는 방법은 취할 수 없었다. 뒤통수를 맞으면 정말로 끝장이다.
그는 뒤로 물러서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걸려 넘어졌다.
“죽어, 이 새끼야!” 노란 남자가 달려들었다.
몸을 굴리며 일어난 그는 양말에서 드라이버를 뽑아 언더스로로 던졌다. 오버스로보다 힘을 받지 못하지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비명.
허벅지에 일자드라이버가 박혔다.
삽을 떨어뜨릴 정도로 노란 남자가 괴로워했다.
웅크린 채로 단거리 육상선수의 스타트처럼 달려든 그가 도약했다. 슬라이딩을 하듯, 그가 프로레슬링 선수의 드롭킥처럼 무릎을 향해 두 발을 뻗었다.
충격.
일자 드라이버가 허벅지 중심의 뼈를 찔렀다.
노란 남자가 쓰러졌다.
그는 몸을 굴리며 일어나, 바닥을 구르는 노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씨발——” 노란 남자가 허벅지에 박힌 드라이버를 뽑으려 했다.
“드라이버 뽑으면 네 손해다.” 그가 말했다.
이마의 피가 얼굴을 뒤��은 그는 지쳐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다. 피가 거미줄처럼 얼굴에 들러붙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옆에 널브러진 삽을 주워들었다.
그는 삽을 내리쳤다.
삽날의 넓적한 부분으로 노란 남자를 내리쳤다. 등. 팔. 다리. 허벅지. 배. 가리지 않았다. 기계적이고 정확한 동작이었다.
두 방. 셋 방. 네 방. 다섯 방. 여섯 방. 구타는 멈추지 않았다. 철저하지만, 계산된 폭력이었다.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알고 싶은 게 남았기 때문이다.
폭력이 멈추었다.
노란 남자를 장식하고 있는 모든 금색이 피에 젖어 더없이 천박해 보였다. 침과 피로 번들거리는 금니도 마찬가지였다. 침을 뱉으며 욕하고 비명 지르고 웃었다.
“말해.” 그가 말했다.
“뭘?” 노란 남자가 말했다. “씨발. 씨바알…….”
“어디 있어?”
“누구?”
“내 딸.”
“딸?”
그는 딸의 이름을 말했다. “어디 있어?”
“좆까,” 노란 남자는 다시 한 번 침을 뱉었다. “알려주면 얼마 줄 건데?” 그는 천박하게 웃다가 아까 전에 찔린 등 뒤의 신장 언저리를 붙잡고 신음을 토했다. 상처를 누를 때 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얼마를 줄면 알려줄 거지?”
“그건 나도 모르지.”
“농담하지 마. 어디 있어?”
“어머니 무덤 앞에서 너무하는 거 아니야?” 노란 남자는 봉분을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이 씨발 좆같은 새끼야, 자식이 쳐 맞는데 누워 자빠졌냐?”
“이쪽은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세상 그렇게 빡빡하게 살아 되겄어? 설렁설렁 하고 싶은 거 즐기며 살아야지.”
“내 딸 어디 있어?” 그는 잠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딸의 사진을 내보였다. “이 애는 지금 어디 있어? 말해!”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도 그는 노란 남자의 눈동자의 변화를 살폈다. 만일 눈동자가 오른쪽 위로 올라갔다면 시각 정보를 꾸며낸 것이고 왼쪽 아래로 움직였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노란 남자의 눈동자는 왼쪽 위로 움직였다.
전에 본 시각적인 기억을 떠올렸다는 의미였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이 개새끼는 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데? 몇 살이야?”
하고 노란 남자가 시치미를 떼자, 그가 삽을 휘둘렀다. 삽날의 평평한 부분으로 옆통수를 맞은 노란 남자가 신음소리와 비명을 질렀다.
“내 딸 어디 있어?”
“씨발!”
“어디 있어!”
“아파 뒤지겠네.” 노란 남자가 허공에 손가락질 했다.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저씨 딸 저기 있잖아. 데려 가.”
그가 삽을 휘둘렀다.
삽날의 쇠가 울리는 소리와 두개골에서 나는 둔탁한 뼈소리, 그리고 욕설과 신음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 때마다 그는 딸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소리 질렀다.
몽둥이질이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이마를 붙잡았다. 출혈과다에 갑작스럽게 움직여서 어지러워진 것이다.
“씨발,” 노란 남자가 텅 빈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달밤에 체조도 아니고 삽질하고 앉았네.” 노란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아저씨도 인생 참 힘들게 산다. 살살 달래도 알려줄까 말까인데 줘 팬다고 알려줄 거 같냐? 응? 이 또라이 새끼야!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말해!”
“이런다고 알려주겠냐? 너 같으면? 응? 평생 해 봐! 내가 부나. 내 목 조르는 짓을 내가 왜 하냐? 평생 허공에 헛좆질 해 보쇼. 구천을 떠도는 딸내미 만나나 해 보라고!”
그는 침묵했다. 이를 악다물어 턱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 나야 헛좆질 안하지. 그럼,” 노란 남자가 말했다. “당신 딸내미 씹맛 제대로 보면서 좆질 했었어. 맞아. 나 당신 딸내미 알아. 아저씬 딸 씹 안 먹어봤지?”
그가 삽의 날을 세워 도끼처럼 내리찍었다.
비명.
노란 남자의 왼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손가락! 씨발, 내 손가락——”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화 좋아하나?”
“인생이…… 워낙 영화 같으셔서…… 안 쳐보신다, 씨발아…….” 쇼크로 몸을 떨면서 노란 남자가 말했다.
“인생에는 특수효과라는 게 없지.” 그가 등을 돌렸다. “편집도. 되감기. 재촬영도, 해피엔딩도 없어.”
“뭐라는 거야, 또라이 새끼야!” 노란 남자가 왼손을 들어 첫째 마디가 날아간 중지를 세워보였다. 피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좆이나 까 잡숴!”
그는 삽을 지렛대 삼아 주변에 있는 커다란 돌을 굴리며 다가왔다. 무덤가 앞에 놓인, 성묘 때 음식을 올리거나 쓰는 상돌(床石)이었다.
본래 장방형으로 깎아놓았을 화강암은 세월에 마모되어 거칠고 투박하게 변했지만 무게는 여전했다. 삽날을 바닥에 쑤셔 넣고 온 체중을 실어 삽을 밀어내 겨우 앞으로 굴렸다.
상돌의 세로로 길쭉한 쪽으로 삽날을 쑤셔 넣은 그가 발로 삽을 밟아 공간을 만들고, 두 손을 넣어 일으켰다. 비석처럼 일어선 상돌의 모서리가 풍화되어 제대로 서지 못하자, 그가 손으로 직접 붙잡아 바닥의 빈 공간에 발로 흙을 채워 넣어 겨우 세웠다.
노란 염색머리를 움켜주고 질질 끌고, 그는 상돌의 바로 아래까지 노란 남자를 끌고 왔다. 저항하는 노란 남자를 무시한 채 상돌의 바로 아래에 두었다.
“당신 딸 찾아서 어쩌려고,” 머리를 붙잡힌 채로 노란 남자가 말했다. “이미 썩어서 뼉다구만 남았을 텐데 찾아서 어쩌려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냐!”
“내 딸은 살아있어.”
“내가 따먹고 죽였다고!”
그가 상돌의 꼭대기를 잡아끌었다.
부채꼴로 쓰러지는 상돌이 작두날처럼 노란 남자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비명.
상돌에 깔린 다리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상돌 밖으로 삐져나온 정강이와 발끝이 기묘한 각도로 서로 등을 돌리며 구부러져 하늘을 향했다.
“이씨발개새끼야으아아아——”
“말 했지? 인생에는 특수효과가 없다고.”
“씨발…… 또라이 새끼,” 입가에 거품을 물고 노란 남자가 말했다. “너나…… 나나…… 똑같은 개새끼야, 새끼야! 너도…… 즐기고 있는 거라고…… 너도…… 괴물이야…… 이 새끼야!”
“어디 있어.”
“네 딸년…… 죽을 때 까지 좋아서…… 아빠, 아빠, 하고 찾더라……. 내가 그년…… 목 조르고 박아주니까…… 좋아서…… 죽더라고. 그래서…… 그냥 죽여…… 버렸어.” 노란 남자가 비웃었다. “목을 콱…… 졸라서 죽여…… 버렸어…….”
“내 딸은 살아있어.”
김청수가 또 다시 삽을 휘둘렀다.
비명.
노란 남자의 오른손의 손가락이 날아갔다.
그는 허벅지의 드라이버를 뽑았다.
또 다시, 비명.
작게 뚫린 동그란 상처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드라이버로 허벅지를 난도질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완전히 폭발했다. 폭력에 취한 그는 폭력을 멈출 수 없었다. 허벅지가 벌집처럼 엉망이 될 때 까지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말해!”
그는 찔렀다.
“말해!”
그는 찔렀다.
“말해!”
그는 찔렀다.
“말해!”
“죽었다니까!”
드라이버를 내던지고 주먹질을 했다. 말 타듯 노란 남자 위로 올라탄 그가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관절의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고 손가락뼈에 금이 갈 정도인데도 멈추지 않았다.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뼈가 내려앉고 눈이 부어오르는 이 개새끼를 내려다보자, 그동안의 모든 감정이 폭발했다. 가슴 속의 울분을 날려버렸다. 뇌가 폭발하는 것 같은 쾌감. 그 어떤 행위보다 감미로운 폭력.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마를 훔쳐보니 땀에 뒤섞인 피가 흥건히 묻어났다. 숨이 거칠다. 폐가 터져버릴 것 같다.
“말해.”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며, 그가 말했다.
“네 딸…… 은…… 죽었……어…….”
“아니야!”
그는 택시로 향했다. 가방에서 각성제를 꺼내왔다.
“이래도 안부는 지 보자.”
“이 미친 새끼…… 넌 딸 핑계대고…… 날 줘 패는…… 걸…… 즐기는…… 거야…… 너나 나나…… 짐승이야……. 흐히히…… 짐승이라고…….”
그는 각성제를 노란 남자에게 주사했다. “사람이 뽕을 맞으면 감각이 예민해지지. 바람에 사각거리는 자기 머리카락 소리까지 거슬리게 되거든.” 그는 두변에 있는 단단한 돌을 주어들고, 노란 남자의 머리를 휘어잡아 뒤로 획, 젖혔다. “그리고 사람 이빨은 다른 어디보다 신경이 예민하지.”
“하…… 하지 마……, 제발…….”
“그래, 빌어. 내 딸한테 한 것처럼 너도 빌어. 그런다고 내가 멈출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가 돌을 내리쳤다.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입 안 가득 피가 차 오른 노란 남자가 기침을 쿨럭였다. 기도로 피가 넘어가려 했다.
돌을 계속해서 내리쳤다.
이가 부러졌다. 어떤 이는 잇몸 속 뿌리까지 뽑혀 나왔다.
위아래의 앞니 여덟 개가 완전히 빠져 구멍이 뚫린 잇몸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고, 조각난 이가 뒤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멈추지 않고 양쪽 볼을 돌로 내리쳤다.
어금니가 깨졌다.
깨진 조각이 목 너머로 넘어가 식도를 손상시켰다.
그는 머리카락을 내던지듯 놓고, 배를 걷어찼다. 노란 남자가 격렬하게 기침하며 이빨 조각을 토했다.
“꺼져, 개새끼야……,” 노란 남자가 말했다. “꺼져……. 이 짐승 같은 새끼…….” 이가 없어 발음이 부정확했다.
그는 팔을 비틀어 올려, 조사장에게 했듯 주먹을 내리쳤다. 팔이 부러졌다. 다른 팔도 마찬가지로 부러뜨렸다. 팔이 흐느적거리게 되어도 노란 남자는 계속해서 반행했다.
“죽을 때…… 까지…… 딸 얼굴…… 못 볼 줄——으아아아아악——”
그의 두 주먹이 노란 남자의 쇄골을 동시에 박살냈다. 이제 노란 남자는 두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말할게! 말할…… 게……. 그러니…… 그만……해……. 제발…….”
“아니.” 그는 삽을 주어 들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이지? 나를 다른 데로 보내고 그 사이 도망칠 생각이잖아. 그렇지?”
“아니야. 아니야……, 그러니 제발——” 노란 남자가 목 안에 들어찬 피를 울걱거리며 애원하다, 비명을 질렀다.
그가 삽날로 갈비뼈를 내리쳤다. 갈비뼈가 조각이 나 흉곽이 내려앉을 때 까지 삽을 내리쳤다.
“내 딸 어디 있어.” 그가 말했다.
“죽었다니……까…….”
“내 딸은 살아있어!” 그가 삽끝으로 가랑이 사이를 내리쳤다.
비명.
그는 삽을 내던지고 노란 남자의 성기를 짓밟았다. 고환이 터지고 해면체가 짓이겨져도 멈추지 않았다. 충격으로 정액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 아래……,”
하고 무덤을 가리킨 노란 남자가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아니야.” 그가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절규.
무덤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두들기며 그는 울부짖었다. 바닥을 뒹굴며 그는 울부짖었다. 삽을 주어들고 기절한 노란 남자의 목으로 삽을 쳐 박으려 했다.
침묵.
그는 삽으로 봉분을 파헤쳤다.
한참동안 봉분을 무너뜨린 그는 바닥을 파내려갔다. 삽질을 하는 내내 아니야, 아니야, 하고 중얼거렸다.
하얀 물체가 보였다. 노란 물체가 보였다. 뼈와 썩어가는 시체가 가득했다.
“아니야.” 그는 뼈와 시체를 뒤적였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
침묵.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에 잡힌 뼈.
매일 밤 꿈에서 봤던 그 옷.
뼈가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오열.
절규.
신음.
비명.
삼년 분의 감정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그는 울었다. 온 몸으로 울었다. 억지로 만들어왔던 근��도, 각성제에 중독된 뇌도, 울부짖었다.
“아빠 왔어, 유리야…… 일어나봐……. 아빠 왔어……. 유리야…….”
유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입었던 옷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썩어 해진 옷감 사이로 눈물이 스며들어갔다.
그는 딸의 뼈를 안고 일어섰다.
노란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너를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가 말했다. “내 딸이 살고 싶어서 몸부림 칠 때 그걸 보고 즐긴 네 놈이 그리 쉽게 죽도록 놔두지 않을 거다. 살고 싶다고, 움직이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죽을 때 까지 나를 저주하게 만들 거다. 살고 싶어서 발악해라. 그게 네 놈에게 남은 마지막 속죄다.”
목을 비틀었다.
불길한 소리를 내며 경추가 부러졌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소리도 내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그는 힘없이 너덜거리는 그의 턱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혀를 잡아 뽑았다. “네놈에겐 과분한 일이니까. 원하는 게 있어도 말하지 못하게 될 거다. 유리가 그랬듯이.”
그는 혀를 쥐어뜯었다.
그는 그 혀를 씹어 삼켰다. 그리고 딸을 품에 안고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얼마 뒤, 자동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다가왔다.
“사장님…….”
최계문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구급차 불러. 그리고 경찰에 신고해.”
“네?”
“저 놈이 죽게 내버려둬선 안 돼.”
최계문은 그의 말에 따랐다.
구급차가 도착한 것은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끝>
제1고:
2014년 4월 22일 화요일 오후 12시~4월 29일 화요일 오후 6시.
분량 200 X 290매 = 49300자. 11900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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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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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감옥육체 2014-05-06
감옥육체
손지상
     ***
    1. 일자 드라이버를 든 남자
C시 기차역은 경부선과 장항선과 전철 1호선이 교차하는 곳치고는 규모가 작았다. 새로 보수공사를 해 깨끗하기는 했지만 이 이상 규모를 키울 부지도 명분도 없었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역 주변에는 재개발만 기다리는 건물들로 가득했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지은 신축역사는 KTX 열차 전용 역 차지였다. C시와 붙어있는 인접지역 A시에 있으면서도 C시의 이름을 사용하려해 데모가 일어난 적이 있다. C시와 A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는 지금에도 이름의 순서가 C시가 먼저라는 이유로 또 한 번 데모가 있었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역사 앞에는 대중교통이 특히 더 불편했다. 결국 택시만 가득하게 되었다.
C시와 A시 택시들이 손님을 잡으려고 난리였다. A시 택시를 타고 C시로 가려 하거나, C시 택시를 타고 A시로 가려고 하면 시외요금이 붙기 때문이다.
역사를 막 나온 이 남자는 이 사실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서울에서 사채업을 하는 조직폭력배로 이름은 장덕용이었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가 잡으려는 남자였다.
장덕용은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미국 마피아 흉내 내 멋 부리려는 게 아니라 삼각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자, 보디가드 삼아 데리고 온 동생이 즉각 불을 붙여주었다. KTX 기내와 역사 내는 금연이었다.
“조사장은 어디냐?” 담배연기를 뿜으며 장덕용이 말했다. “전화해봐.”
“아까 카톡 왔습니다, 형님. 여기 앞에 있을 거라던데——” 장덕용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동생은 카카오톡으로 수신한 사진과 지역을 대조하며 위치를 찾았다. “아, 저기 있습니다, 형님.”
두 사람은 조사장이라는 인물에게 다가갔다. 그도 사채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회계사를 하던 사람이라 폭력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는 돈의 힘으로 이 지역의 폭력조직을 비롯한 어두운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은 서울의 사채업자들의 투자를 기대고 있었다.
“아이고, 장사장니임.” 붙임성 있게 말끝을 늘리며 조사장이 말했다. 팔 때문에 악수는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사장, 자네 이 지역 택시업계는 좀 아나?”
“B운수라고 큰 게 하나 있는데, 거기 사장 얼굴은 압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있는 도깨비 택시 기사들은 다 제가 관리하고 있지요.”
“도깨비 택시?”
“개인택시 중에 우리 쪽 밥 먹은 놈들이 있습니다. 그 놈들 제가 봐주고 있지요.”
장덕용은 품에서 사진을 꺼냈다. 낡은 사진 속에는 평범한 외모의 중년 남자가 딸과 함께 어색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뒤에는 C시에 위치한 대학교 정문이 찍혀있었다.
“B운수랑, 그 도깨비인지 뭔지 하는 놈들한테도, 전부 다 이 사진 복사해서 뿌려.”
“이놈입니까? 잡으려 하시는 새끼가? 평범해 보이는데요?”
“이 새끼 분명 여기 있을 거야. 돈을 구천만원 빌려가고 아직도 안 갚았어. 구천이야 애들 껌값이니까 상관없긴 한데,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어.” 장덕용이 팔을 들어올렸다. “뽕도 훔쳐갔고.”
조사장은 화를 자극하지 않게 맞장구를 치려고 했다. 장덕용과 그의 동생이 폭력을 무기로 삼듯 그는 눈치를 무기로 삼았다.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장덕용이 말을 이었다. “그 미친놈은 하루에도 택시를 수 십 번 타. 왠지 아나?”
눈치를 살피던 조사장이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딸내미가 택시 타고 난 뒤로 실종됐거든. 딸내미 찾는다고 일도 안하고 택시만 타니 돈이 있나? 그래서 나한테 돈을 빌렸는데, 이자 받으러 왔더니 나를 이 꼴로 만들었어.”
“그런데 왜 이리로 왔답니까?”
“딸내미가 서울에서 택시를 탔는지, 여기서 탔는지를 몰라서 그동안 서울 택시를 이 잡듯이 타고 돌았다더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서울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여기로 온 거야. 딸이 여기 대학 다���거든.”
“그래서 택시 타시려는 거군요. 택시기사들이 혹시 아는 게 있나 물으라고 알리겠습니다.”
“형님, 택시 잡았습니다.” 동생이 다가와 말했다.
조사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택시기사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장덕용은 조사장을 무시하며 상석에 올라탔다. 장덕용의 동생은 장덕용 옆에 앉았다. 조사장은 앞자리에 앉았다.
장덕용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본 택시기사는 제지하려다 그만 두었다. 조사장이 꼼짝 못하는 두 사람에게서, 담배 냄새보다 진한 폭력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택시기사는 폭력이라면 교통사고만큼이나 멀리하고 싶었다.
택시기사가 목적지를 묻기도 전에 조사장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눈치와 재빠른 행동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남자다운 대처였다. “기사양반, 이 남자 본 적 있나? 몸에 근육이 엄청나게 붙어있는데.”
택시기사는 무관심하게 핸드폰을 받아들고 멀리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그 미친놈 아니야.”
“알아?”
“예, 밤에 택시 타고 돌아다니면서 아무 말 안하고 드라이버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아무대서나 내리고 다른 택시타고 그래요. 미친놈.”
“혹시 어디 있는지 아나?”
“예.”
“정말?” 그 말을 들은 조사장과 동생이 동요했다. 장덕용은 아무 말 안고 담배를 피웠다.
“한바탕 돌고 나면 새벽에 ‘덕수장’으로 가달라고 하거든요.”
“장기투숙 받는 거기? 여관바리 하는데?”
“예. 택시기사들도 가끔씩 거기서 여관바리 따먹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손님이 어디 여관 없냐, 그러면 덕수장으로 데려갑니다.”
“기사양반, 그리로 갑시다.” 장덕용이 창밖으로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지금 거기 없을 겁니다. 새벽에 들어오거든요.” 택시기사가 말했다.
“장사장님. 일단 저희 가게로 가셔서 좀 쉬시고 새벽에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위치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형님.” 먹고 놀 생각에 부푼 동생이 말했다.
장덕용은 신경질적으로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튀겼다. “알아서 해. 대신 네가 다녀와라.” 장덕용이 동생에게 말했다.
동생의 표정이 구겨졌다.
택시가 출발했다.
***
쇠붙이를 숫돌에 가는 소리가 화장실에 울렸다. 오래된 여관의 화장실이라 좁고 곰팡이 냄새가 났다. 바닥이며 벽이며 붙어있는 타일은 대충 붙인 티가 났고 타일과 타일 틈으로 시멘트가 드러나 있었다.
사각 팬티 하나만 입고 있는 중년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남자의 몸은 근육이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있어 바위덩어리 같았다. 쭈그린 자세가 불편해보일 정도였다.
과하게 부풀어 오른 승모근과 동그란 모양에다 유륜이 살짝 튀어나온 대흉근으로 미루어 보아,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이용해 만든 몸이었다.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 사각팬티가 타이즈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내압을 이기지 못해 군데군데 해져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 화가 난 듯 보였다. 묵직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느껴질 정도로 기묘한 남자였다. 특히 그의 눈이 그랬다.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눈동자가 완전히 열려 모든 정보를 다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귀신들린 사람의 눈이다.
물을 받아 둔 세숫대야를 옆에 두고 숫돌에 틈틈이 물을 뿌리며 손에 든 쇠붙이를 갈았다. 나이프나 낫 같은 날붙이가 아니었다. 길고 견고해 보이는 일자드라이버였다.
손끝으로 틈틈이 예리한 정도를 확인하자, 이번에는 날을 넓게 갈기 시작했다. 뾰족한 쐐기 모양인 일자 드라이버의 경사면을 길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작업이 다 끝나자 드라이버를 세숫대야 옆 바닥에 놓인 일자 드라이버 두 개 옆에 두었다. 또 다른 드라이버는 미리 갈아둔 두 개와 방금 다 간 한 개보다 훨씬 짧았다. 마찬가지 작업을 끝내자 세숫대야의 물을 이용해 뒷정리를 하고 드라이버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관방은 침대에서도 벽지에서도 곰팡내가 났다. 냉동실이 없는 소형 냉장고, 옆에는 서랍이 텅 빈 고동색 가구, 그 위에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놓여있었다. 남자는 밖에서 사 들고 온 커다란 돼지고기 덩어리를 텔레비전 옆 공간에 올려두고 드라이버를 챙겨 침대 위에 앉았다.
이 남자는 언제나 드라이버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날붙이나 무기를 들고 다니면 의심받는다. 드라이버라면 아무 문제없이 들고 다닐 수 있다. 누가 보아도 그저 연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육체가 곧 무기였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의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그는 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의 적이었다. 그 이유는 가방 속 작은 주머니에 있었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그는 고깃덩어리와 최대한 거리를 두기 위해 침대 끝으로 갔다. 벽에 기대지는 않았다.
손가락 위에 드라이버를 놓고 신중하게 무게중심을 찾아 균형을 잡더니, 중심점에 손가락을 대고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일자 드라이버를 감싸 쥐었다.
귀 옆으로 드라이버를 들어올렸다. 드라이버의 날이 천장을 향했다.
투척.
공중을 가르며 날아간 드라이버가 고깃덩어리에 박혔다.
노스핀 스로(No-Spin Throw)라는 기술이었다.
어차피 한국은 총기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싸움은 보통 근거리에서 이루어진다. 누가 더 긴 무기를 들고 싸우느냐가 승부를 결정한다. 그래서 조직 폭력배들은 리치가 긴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사용해왔으나, 최근에는 훨씬 가벼운 금속 야구 배트를 주로 사용한다.
택시를 타고 돌아다녀야 하는 그로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더 긴 무기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리치가 긴 공격법을 찾아야 했다. 그 결과 찾은 것이 랄프 쏜(Ralph Thorn)이 개발한 컴뱃 나이프 스로잉(Combat Knife Throwing)이었다.
완전히 릴랙스 한 상태로 손에 든 물체——그것이 나이프든 드라이버든 가위든 심지어 톱이나 일본도 같은 긴 물건이라도——의 무게중심점을 머리 위에서 손가락 끝으로 밀어낸다. 동시에 손목과 팔꿈치를 이용해 잡아채듯 투척한다. 그러면 물체에 모든 체중이 실리면서도, 회전하지 않고 날아가게 된다. 허공에 뜬 물체는 중력에 의해 포물선을 그리듯 사분의 일 회전하며 날 끝이 표적에 박힌다. 이것이 노스핀 스로다. 야구와 마찬가지로 오버스로, 사이드스로, 언더스로로도 가능하다.
그는 네 개의 드라이버를 모두 사용해 드라이버를 던진 뒤 결과를 확인하러 다가갔다. 드라이버는 모두 정확히 표적에 꽂혔다. 평균 깊이 삼 센티미터. 사람에게 던진다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드라이버를 뽑고 작은 드라이버를 지닌 채로 그는 다시 침대로 가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에는 일회용 주사기와 작은 유리병이 들어있었다.
각성제였다.
그는 주사기로 각성제 용액을 빨아들이고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기포를 없애고 실린더를 살짝 밀어 완전히 공기를 제거했다. 준비가 끝났다. 어금니를 이용해 한손으로 손목에 끈을 묶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내압으로 혈관이 불거졌다. 그는 검지와 엄지 사이의 살집이 두둑한 곳의 혈관에 각성제를 주사했다.
끈을 풀면서 긴 한숨을 내쉰 남자가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분홍색 알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정제였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스테로이드를 넘긴 그는 창문턱 위로 발을 올리고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오 분 동안 팔굽혀펴기가 계속되었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삼두근과 광배근에서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팔굽혀펴기가 끝나자, 그는 창문턱을 발로 차며 물구나무를 섰다. 그 상태로 일분을 버티다, 두 손으로 바닥을 치며 뛰어올라 일어났다. 몸에는 맺혔던 땀방울이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그리 큰 키는 아니다. 평범한 중년 남자의 키에 채워 넣을 수 있을 만큼 근육을 채워 넣어 두꺼워진 몸이 키를 더욱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 보디빌더처럼 아름답게 조각된 몸이 아니었다. 작고 세밀한 근육군보다 커다란 근육군인 광배근, 승모근, 대퇴근 등이 발달되어있었다. 근육 위에 지방이 붙어 근육의 윤곽이 불분명해 씨름선수나 프로레슬링 선수처럼 보였다.
그의 몸은 길거리에서 싸울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몸이었다. 근육만으로는 날붙이나 둔기의 공격에 당하기 쉽다. 지방이 도포된 근육은 갑옷이 되어 공격을 흡수한다. 그리고 갑옷 자체가 무기가 된다. 단단한 몸은 최선의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자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시끄러운 폭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 영화에 시선만 둔 채로 스쿼트를 시작했다.
팔을 크게 흔들며 반동을 주면서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반만 굽히는 하프 힌두 스쿼트였다. 영화가 끝날 때 까지,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영화 화면에는 눈길만 준채로 스쿼트를 계속했다.
온 몸에 흐른 땀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사각팬티를 완전히 적시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웅덩이까지 만들었다. 스쿼트를 할 때 마다 반동으로 땀이 웅덩이 위로 떨어져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영화가 끝나자 그는 속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찬 물을 몸에 끼얹었다. 잔뜩 열을 냈던 근육이 식으며 잔뜩 조여들었다. 손에는 드라이버를 들고 있었다.
각성제의 부작용으로 생긴 편집증이었다. 코카인이나 각성제 등 도파민 경로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은 과거 정신분열증이라 불렀던, 남들과는 다른 현실을 고르는 병이라는 의미의 조현병(調現病)이 발병시킬 위험이 있다.
조현병의 대표적인 증세 중 하나가 편집증이다. 언제 어디서 적이 공격해 들어올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이 발생한다. 천장에서 적이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벽이 부서지며 적이 공격해 올 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현실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에게 망상인지 아닌지를 물으며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다. 미세하고 작은 발자국 소리지만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지?
적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약물에 의한 편집증 때문만이 아니다. 중요한 존재를 잊은 결핍을 채운 광기 때문이었다.
그는 샤워기를 튼 채로 밖으로 나갔다. 전라다. 엄청난 근육에서 튕겨나간 물방울과 땀의 웅덩이 위로 수건을 던져 발로 훔치면서 손으로는 드라이버를 쥐었다. 양 손에 드라이버를 쥔 채로 그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엄폐물도 없지만 잠깐은 적이 들어와도 관찰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확인한 드라이버의 날은 둘 다 예리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
김청수의 여관방 앞에 세 명의 남자가 섰다. 조사장과 조사장의 부하, 그리고 장덕용의 동생 박대영이다.
“여기 맞지?” 박대영이 말했다. 조사장을 자기 아래로 깔아보는 말투였다.
“뭐 이 새——”
하고 덤벼들려는 부하를 가로막은 조사장이 비굴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장덕용은 조사장과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조직의 간부다. 그 부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일이 없다. 어차피 머리에 든 것 없는 멍청이니까 기분 맞춰주면 그만이다.
의기양양해진 박대영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
멍청아, 조심스럽게 들어가야지, 조사장은 생각했다. 안에 있는 상대에게 차라리 들어간다고 알려주고 들어가지 그러냐. 그는 부하의 엉덩이를 밀어 박대영의 뒤를 따라가라고 말없이 재촉했다.
안은 비어있었다.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다.
박대영이 화장실 문을 말없이 가리켰다. 부하가 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버튼을 누르면 날이 튀어나오는 스위치 블레이드였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움직였다.
박대영이 문을 열었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연, 부하가 살기를 느끼고 등을 돌리자 물에 젖은 타월이 그의 얼굴에 감겼다.
김청수가 문 밖으로 두 사람을 동시에 밀어붙였다. 엄청난 힘이었다. 박대영과 부하가 태클에 밀려 벽에 부딪혔다. 동시에, 부하의 짧은 드라이버가 배에 박혔다.
신음.
부하가 드라이버가 박힌 배를 움켜주며 나이프를 떨어뜨리자, 김청수가 무릎으로 턱을 걷어 올려 하악골을 쪼개버렸다.
김청수가 떨어뜨린 나이프를 객실 안으로 차는 사이, 박대영이 반격하려 덤벼들었다.
김청수가 얼굴에 팔꿈치를 박아 넣었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박대영이 버릇처럼 김청수의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벌거벗고 있는 김청수의 몸은 물기로 미끄러웠다.
김청수가 달려드는 박대영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당기며 턱에다 카운터로 박치기를 먹였다.
박대영의 코에서 선지피가 쏟아졌다.
비틀거리는 박대영의 허벅지에 김청수가 긴 일자 드라이버를 찍었다. 날카로운 날이 파고들어갔다.
비명.
뇌가 흔들리고 기도가 막혀 숨을 쉴 수 없게 된 박대영은 허벅지까지 찔려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김청수의 몸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직 폭력배들도 지방과 근육을 모두 갖춘 몸을 갖추고 있다. 박대영의 경우 지방층이 매우 두꺼워 경동맥을 빗겨날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허벅지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깨금발을 뛰는 박대영의 멱살을 양손으로 잡은 김청수가 발목을 후려쳤다. 흔히 ‘아사바리’라는 은어로 부르는 유도의 모두걸기, 아시바라이(足払い)였다. 낙법을 치지 못하게 멱살을 놓지 않고 뒤통수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박대영은 유도 경험자임에도 그대로 기절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기절할 때 까지, 조사장은 겁을 먹고 떨기만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김청수의 폭력은 기계적일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무자비했지만 감정이 억제되어 있었다. 끼어들지만 않으면 공격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비겁하지만 올바른 판단이었다.
“너.” 김청수가 말했다. “이리와.”
“네?” 조사장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새된 소리였다. 벌벌 떨던 그가 도망치려 하자 김청수가 달려가 멱살을 붙잡았다.
“히익!”
“장덕용이가 보냈지?”
조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증이랑 명함 내놔.”
“네?”
“민증이랑 명함.”
벌거벗은 채로 타인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된 이 남자의 위협에 조사장은 황급히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여, 여기……,”
하고 명함과 주민등록증을 건넸다.
김청수는 이를 받아들고 멱살을 끌고 조사장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
C시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주지역과 환락가가 등을 지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모여 만든 거주 지역이 투명한 빛의 세계라면, 찻길 하나 건너 러브호텔과 술집이 모여 만든 속칭 ‘모텔촌’은 어두운 밤의 세계였다.
조사장의 사채업 사무소는 모텔촌 외곽에 있었다.
쇼핑에 중독된 술집 여자나, 유흥비가 모자란 양아치들이 찾아오면, 조사장은 자신의 작은 몸 보다 두 배는 큰 고급 의자에 몸을 묻은 채 거만하게 턱짓을 하는 자신이 좋았다. 우습게 보이면 이 세계에서는 끝장이다.
뒷골목은 허장성세의 거리다. 신기루 성이나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조사장은 강함을 꾸미는 겁쟁이들의 몸짓과 양식을 익혀왔다. 돈을 빌리러 온 약자들에게는 아무리 힘이 없고 작은 체격이라도 충분히 위압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포지션이 강함을 만든다. 허장성세의 물리학이다.
고도로 양식화된 폭력을 해체하는 진짜 폭력 앞에 조사장은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목을 전기코드로 만든 올가미가 묶고 있었다. 언제 조여 올지 모른다.
올가미는 김청수가 쥐고 있었다.
조사장이 차를 세우자, 검은 세단의 조수석이 열렸다. 허름한 차림새를 한 김청수가 밖으로 나가며 목줄을 당겼다.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기면서 조사장이 밖으로 나왔다.
드라이버를 들이대며 김청수가 말했다. “앞장 서.”
둘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김청수는 긴 일자 드라이버를 들고 있었다. 작고 비굴한 저 남자가 허튼 짓을 하면 바로 투척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두 개의 드라이버는 각각의 양쪽 양말에 들어있다. 짧은 드라이버는 주머니 속이다. 탈취한 무기는 가방에 넣어두었다.
조사장이 자기 사무실을 여는 순간, 그는 이상한 기색을 감지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전혀 의심하지 않을 만한 작은 기척을 그는 알아차렸다.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안구의 작은 떨림, 그 모든 것을 감지할 만큼 그의 신경은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목줄을 잡아채 입을 열려는 남자를 제지하고 문으로 달려들었다.
방 안에 팔이 부러진 남자가 사무실에 장식된 일본도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장덕용이다.
한손이 불편해 겨드랑이에 칼집을 끼고 칼을 뽑느라 장덕용의 반응은 한 템포 늦춰지고 말았다. 반쯤 칼을 꺼낸 장덕용의 팔에 일자 드라이버가 날아와 박혔다.
비명.
김청수가 노스핀 스로로 드라이버를 던진 것이다.
칼과 칼집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꿈틀거리는 장덕용을 향해, 김청수가 조사장의 몸을 발로 차 밀었다. 조사장이 나가떨어지는 사이, 몸을 숙이며 양쪽 다리에서 드라이버를 꺼낸 그는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을 이용해 달려들었다.
몸통박치기.
밀려난 두 사람이 창문이 있는 벽에 격돌했다. 충격으로 창턱에 올려놓은 난이 바닥에 떨어졌다. 화분이 산산조각 나며 자갈을 바닥에 흩뿌렸다.
김청수가 드라이버를 장덕용의 배와 허벅지에 쑤셔 박았다.
조사장이 피를 보고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눈앞에 다시 칼집에 들어간 일본도가 보였다. 검도를 배웠거나 한 적은 없다. 야쿠자와의 일을 도와주고 받은 기념품이었다.
조사장은 자갈이 배기는 것도 모르고 몸을 던져 칼을 붙잡고 일어섰다.
“머, 멈춰!”
하고, 넥타이처럼 목에 전기코드 올가미를 감은 조사장이 칼을 뽑으려 했다. 단번에 뽑히지 않고 무언가가 툭 걸려, 잘 되지 않았다.
일본도는 칼이 쉽게 빠져 사고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칼집에 사카즈노(逆角), 혹은 카에리즈노(返り角)라 불리는 돌기가 붙어있어서, 엄지손가락으로 손잡이 보호구인 츠바(鍔)를 밀어 사카즈노를 빼낸다. 방금 전 장덕용이 칼을 뽑기 위해 고생한 이유도 이 사카즈노 때문이었다.
흥분한 조사장은 사카즈노를 빼는 데 머뭇거렸고 그 사이 김청수는 장덕용의 관자놀이를 걷어차 기절시키고, 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칼집을 내던지며 자세를 취한 조사장을 그가 노려보았다. 칼끝이 떨리고 있었다. 엉덩이가 완전히 뒤로 빠져있어 검도의 자세로는 실격이었다. 바지 안쪽은 젖어서 색이 변해있었다. 척척하게 들러붙는 바지 때문에 움직임은 더욱 제한될 터였다.
그는 조사장에게 다가갔다.
“저리 가!” 조사장ㅇ l말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는 것은 오히려 조사장이었다.
“저리 가라고!”
그가 다가갔다.
“내가 못 찌를 거 같아, 엉?” 조사장은 히스테리에 빠져 있었다. “이 새끼고 저 새끼고 씨발 다 나를 좆으로 보나! 씨발 죽여 버리겠어! 너도 장덕용이 이 개새끼도 다 죽여 버리겠어!”
그가 다가갔다.
목을 칼끝에 찔릴 기세로 들이댔다. 칼끝이 목을 건드리는 감촉이 조사장에게 전달되었다.
“으악!” 놀란 조사장이 칼을 뒤로 뺐다.
폭력을 저지르는 자는 상대를 물건으로 보게 마련이다. 그렇게 보지 못하는 자는 폭력을 휘두르지 못한다. 공감능력——자신이 폭력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막는다.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려는 행동이 가져오는 스트레스가 브레이크가 된다. 인간은 그렇게 동족을 보호하며 진화해왔다.
겁을 먹고 히스테리에 빠진 조사장은 사람을 죽일 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칼을 뺀 것이다.
빈틈.
그는 거리를 급격히 채웠다. 칼의 사정거리 안으로 파고들어, 그의 두꺼운 주먹으로 칼을 쥔 손목을 내리찍었다.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명.
조사장의 손목이 부러졌다.
그는 멱살을 틀어잡아 들어올리고, 발을 버둥거리는 조사장에게 말했다. “금고.”
“네?”
“금고.”
“저, 저기…….” 고통스러워하며 조사장이 눈짓으로 사무실 구석을 가리켰다.
“번호.”
조사장은 번호를 알려주었다.
조사장이 가지고 있던 현금과 약물 총 팔천만원어치가 그의 가방 안으로 사라졌다.
망연자실해 바닥에 주저앉은 조사장의 눈앞에 그가 섰다. 그는 손목을 붙잡아 비틀었다.
“사, 사, 사, 살려, 살려——”
“넌 약속을 어겼어.”
“살려——”
그는 완전히 펴진 팔꿈치를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인대가 끊어지는 소리.
관절이 끊어지는 소리.
조사장의 비명이 이어졌다.
“씨발——” 조사장이 몸을 비틀었다.
그는 발목을 붙잡았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는 말없이 무릎을 밟았다.
충격.
비명.
불쾌한 소리.
무릎의 인대와 관절이 끊어져 기묘한 방향으로 비틀렸다. 고장 난 꼭두각시 인형처럼 흐느적거렸다.
조사장은 기절했다.
그는 장덕용의 배와 팔에서 드라이버를 뽑았다. 피가 왈칵 쏟아졌다. 충격으로 장덕용이 정신을 차렸다.
“경고하는 데,” 장덕용의 양복에 피를 닦으며 그가 말했다. “한번 만 더 나를 방해하면, 그 때는 정말 죽여 버리겠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알았나?”
“좆까, 이 새끼——으아——”
김청수가 장덕용의 손가락을 밟아 부러뜨렸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장덕용이.” 김청수가 장덕용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목을 부러뜨리면 다시는 나를 쫒지 못하겠지. 설마 경찰에게 신고하는 쪽팔리는 짓을 할 리도 없고.”
그제야 공포에 질린 장덕용이 몸을 떨었다. “미, 미, 미안해. 내 다신 안 그럴게. 얌전히 서울로 돌아갈 테니까, 제발…….”
“여자도 못 안고 똥 지리며 살아가게 될 거야.”
“제발…….”
“내 딸 같은 어린 애들 빚 대신 팔아넘기고,” 장덕용의 목이 갸웃거리듯 옆으로 기울어져갔다. “걔네들한테 마약 팔고, 장기 떼던 죄. 갚아야지.” 목이 더욱 기울어져 갔다. “평생 천장보고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하고 몸부림치면서 살아 봐.” 목이 완전히 기울어져 귀가 어깨에 닿았다. “그게 네 죗값을 갚는 길이니까.”
비명.
김청수의 주먹이 옆통수에 내리꽂혔다. 지렛대의 원리로 완전히 꺾인 경추가 부러졌다.
김청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이게 하고 또 한 번 주먹을 내리 찍었다. 그렇게 네 방향으로 모두 경추를 골절시켰다.
장덕용이 살고 싶다고 몸부림치기를 그는 바랐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만큼 가장 큰 속죄는 없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경추골절의 충격으로 배설물을 지린 장덕용을 내버려두고, 그는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겁에 질린 택시기사가 물었다. 그의 몸에 묻은 피에 대해서는 차마 묻지 못했다. 내리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그는 사무실의 주소를 댔다. 그가 거래하고 있는 흥신소 사무실의 주소였다.
택시가 떠났다.
         2. 노란 남자
C시에서는 열한시만 되어도 버스가 끊긴다. 최근 인구 50만을 넘겨 구청이 생겼으나, 대중교통은 아직 면단위 수준을 넘지 못한 셈이다.
버스가 일찍 끊긴 밤의 C시는 택시가 지배한다. 시내의 택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내 지역을 담당하는 택시회사 B는 안전하고 합리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 택시회사의 상호가 적혀있는 택시를 골라서 탈 정도였다.
문제는 외곽지역에 있는 이른 바 ‘도깨비 택시’였다.
C시의 중심지는 최근 들어서 수도권 못지않게 발달했지만 아직도 외곽지역은 건물은 이층, 삼층을 겨우 넘는 소도시 티를 벗지 못했고 논밭이 넓게 펼쳐져있다.
도깨비 택시란 이 지역에서 일하는 개인택시기사나 소규모 택시회사를 말한다. 이들은 조직 폭력배나 다름없었다. 실제로도 나이를 먹은 조직 폭력배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합승을 시키거나 미터기를 아예 꺼놓고 정액제 마냥 거리에 관계없이 기본요금이 오천 원이라며 폭리를 취하는 경우마저 있다. 트렁크에 쇠파이프를 실고 다니는 도깨비 택시 기사도 여러 명 있다.
이런 부당한 서비스에 지역주민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무섭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린치를 당해 공중파 방송의 아홉시 뉴스에 등장한 시민도 있었다.
외곽지역 주민들은 중심부에 직장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밤이면 B회사 택시는 외곽지역으로 가기를 꺼려했다. 도깨비 택시들이 노골적으로 영업을 방해하거나 심지어 폭행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곽지역 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를 이용해왔다.
밤이 되면 도깨비 택시들은 모텔촌에 모여 외곽지역으로 가는 손님을 물려고 기다렸다. 이들은 술에 취한 손님의 지갑을 훔치기도 했고 일부러 먼 곳을 빙빙 돌아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오늘도 도깨비 택시가 모텔촌에 모인 사람들을 노리고 모였다.
술집에서 한 무리의 남자와 여자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와 인사를 나눴다. 회사 회식 이차가 끝나고 삼차를 가자고 난리인 남자들 틈에서 살짝 빠져나온 박미경은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다행히, B회사 택시였다.
“어? 박미경씨!” 평소 박미경에게 음심을 품고 있었던 과장이 박미경에게 다가갔다. “에이, 어디 가려고 그래? 삼차 가야지! 홍일점이. 안 그러면 술자리 칙칙해서 되겠어?”
“내일 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요, 과장님.”
“아니, 내일 일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다 있지?”
“저 지금 집에 가서 바로 일 해야 해요.”
“진짜 삐딱하게 이러기야? 이래서 여자가 안 돼. 자기밖에 몰라요. 남자가 딱 가자면 따라와서 술도 따르고 그러는 맛이 있어야지.” 과장이 박미경의 엉덩이를 슬쩍 더듬었다.
“과장님.” 박미경이 차갑게 말하며 손을 뿌리쳤다. “경찰에 신고할까요? 많이 취하신 것 같네요. 실수하시는 거 보니.”
기다리던 택시가 경적을 울렸다.
“에이 진짜 왜 이래.”
“과장님이 먼저 이거 타고 집에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미경씨, 그게 아니고——”
“사람 우습게보지 마세요. 한 번만 더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 쌍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말 다하셨어요, 지금?”
“그래, 됐다. 가라, 가! 얼굴 좀 반반하다고 존나 튕기네, 씨발. 너 같은 년 먹어도 맛없어. 가!”
일행이 이제야 이상하다 여기고 다가왔다. “과장님!”
“에이, 그만 하세요!” 다른 일행이 과장을 붙잡았다.
구경하는 사람이 생기자 과장은 남성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충동에 박미경의 뺨을 후려갈겼다.
“다 보셨죠?” 박미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경찰에 정식으로 고발하겠습니다.”
“고발 해! 이 씨발 년아!”
“다들 증인 되어 주실 거죠?”
“증인?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주지도 않는 년이! 누가 먼저 쳤어? 엉? 너 지금 뭐해?” 박미경이 핸드폰 녹음기능을 이용해 자신의 폭언을 녹음하고 있다고 알아챈 과장이 더 심하게 날뛰었다. “이 좆같은 년이! 씨발 일로 안와? 그거 꺼! 끄라고!”
“야!”
차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택시기사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불량해 보이는 외모에 수염과 금발머리를 한 중년의 노란 남자가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정말로 노란 남자였다.
천박하고 탁한 노란 색, 아니, 누런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정도다.
검은 색 가죽바지 위에 금색 체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검은 색 실크셔츠에는 앞뒤로 호랑이 자수가 들어가 있었다. 단추를 풀어 드러낸 가슴에는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뼈가 불거진 단단한 얼굴은 거친 삶을 살아왔다고 암시하고 있었다.
노란색 렌즈의 레이 밴 선글라스인 헌팅 글라스를 머리띠처럼 이용해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겼는데, 길고 지저분하게 뒤엉킨 머리카락은 싸구려 염색약으로 염색한 금발이었다. 염색을 한 지 시간이 지났는지 뿌리 부분이 검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이마에는 날붙이에 베인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고 인상을 쓰는 그의 오른쪽 위 앞니가 금니였다. 잇소리를 내며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야, 대머리.” 노란 남자가 말했다.
“뭐야?” 과장이 자신을 말리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노란 남자는 대답 대신 팔꿈치로 과장의 턱을 후려쳤다. 과장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노란 남자가 구두 뒷굽으로 과장의 가랑이 사이를 짓밟았다.
짐승같은 비명이 밤거리를 울렸다.
그는 연달아 과장의 가랑이를 걷어차고 짓밟았다. 손으로 막아보려던 과장의 손등과 손가락이 부러졌다.
제지하려 달려드는 회사 동료들에게 노란 남자가 말했다. “너네 어느 회사야?”
그 순간 동료들이 주춤했다.
“내가 윗대가리한테 여직원 돌려먹으려다 안 되니까 길거리에서 지랄했다고 이 새끼랑 니네 꼰질러 볼까? 응?”
동료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할까봐 얌전해졌다. 그 사이 노란 남자가 과장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서 주민등록증을 챙겼다.
“이 새끼 민증 내가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만일 이 아가씨가 회사에서 불이익 당했거나 이러면 바로 찾아간다. 알았어?”
으름장을 놓는 그에게 동료들은 꼼짝하지 못했다.
노란 남자가 택시에 올라타며 말했다. “아가씨, 타요.”
박미경은 그의 말에 따랐다.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두고, 택시가 떠났다.
박미경은 택시 안에서 거친 숨을 골랐다.
내일 회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눈에 훤히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을 두고 수군거릴 것이고 미안하다며 대머리 과장이 찾아와서는 횡설수설 자기 합리화와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까처럼 무자비하게 얻어맞았으니 분명 복수를 하려 들 것이다. 이 택시기사와 내가 무슨 육체관계라도 맺는 사이라고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택시기사가 고맙기는 했지만 외모를 보니 그 다지 질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자기가 품는 그 냄새나는 썩은 성욕이 해결이 안 되니 그런 트집을 잡아 소문내고 다닐 게 분명하다. 아니면 고발을 하겠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입막음 조로 자기와 모텔에 가자고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아까 맞아서 부러져버렸으면.
앞으로 벌어질 일이 박미경은 소름이 돋았다.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남자들은 비겁하고 더럽다. 자기가 책임지고 무언가를 할 생각은 못하고 음습하게 군다. 그런 주제에 성욕만 강해서 머릿속이 고환으로 가득차서 섹스밖에 모른다. 영화 속에서나 진짜 남자가 있지. 강하고, 깔끔하고, 나를 배려해주고, 나랑 자자고 하지 않는.
“안전벨트 매세요.”
생각에 잠겼던 박미경은 택시기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안전벨트요. 요새 단속이 심하기도 하고 위험하거든요.”
“아, 네.”
안전벨트를 잠그자, 택시기사가 씨익, 웃는 모습이 백미러로 보였다. 노란색 선글라스에 앞니에 금니를 박은 게 천박해보였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박미경이 말했다.
“어디까지 가시는 지 말씀 안하셨는데?”
“아! 죄송해요,” 당황한 박미경이 주소를 말했다. C시의 외곽지역이었다. “아까는…… 고맙습니다.”
“뭘요. 나이 먹고 그런 짓 하는 놈들이 나쁜 거지.”
침묵.
박미경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택시비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주변 풍경도 논밭이 전부라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어 어두컴컴하니 뒤숭숭했다.
매일 같이 보는 풍경인데도 마음가짐에 따라 생소하게 보이기도 하는 법이구나, 박미경은 생각했다. 창밖의 어둠이 스크린이 되어 미래에 벌어질 일을 비춰주고 있었다. 생각할 수 록 기분이 나빠졌다.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아가씨. 아까 그 사람 상사죠?”
“네?”
“아니, 내일 회사에서 뭐라고 하지 않을라나 해서.”
“그러겠죠.”
“있다가 연락처 알려줄 테니까, 만약에 뭐라고 그러면 연락해요. 내가 그 새끼 민증도 가지고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하지만,” 박미경은 조금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이 남자와 소문이 돌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찮아요. 아마 별 일 없을 거예요.”
“그러지 말고, 기왕 주소도 들었는데.”
하고 미소 짓는 남자가 그녀는 갑자기 소름끼치도록 무서워졌다. 어릴 때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모습을 산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뱀이 노려보면 개구리는 몸이 굳는다. 뱀이 개구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개구리를 구하려고 급히 뱀의 몸통을 붙잡았었다. 손바닥 안이 서늘한 음료수 캔을 만질 때처럼 서늘했었지만 감촉이 달랐다. 피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촉감이 있었다.
그 순간 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선에서 뱀의 피부 같은 촉감이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냉정하게 계획을 조립하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문다. 그렇게 느낀 그녀는 뱀을 집어던졌다.
고개를 돌리니 개구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개구리가 불쌍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저렇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다니.
“주소가 어디냐니까?” 택시기사는 집요했다.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기,” 박미경은 집에서 오백 미터 정도 떨어진 삼거리를 가리켰다. 단골로 삼는 편의점이 보였다. “저 앞에 삼거리에서 세워주세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집 앞에서 세워줄게요. 위험하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워준다니까.”
“여기서 세워주세요.” 박미경이 단호히 말했다.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
“저기 편의점 앞에 세워주세요!”
미소가, 사라졌다.
택시가 박미경이 말한 곳을 지나쳤다.
“세워주세요!”
택시기사가 말없이 천장의 햇빛가리개를 열었다. 이상한 스위치가 잔뜩 있었다. 스위치를 하나 둘 켜자,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더니 자동차 문이 잠기며 철컥, 하고 잠겼다.
“뭐하시는 거예요!” 잠금장치를 해제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
택시가 속력을 올렸다.
“아저씨!”
택시가 박미경의 집을 지나쳤다. 창문 밖으로 멀어져가는 집을 눈으로 쫓으며 그녀가 창문을 두들겼다. “세워줘! 세워! 세워!”
“조용히 안 해!”
택시기사의 고함에 그녀가 움츠러들었다. 먹이를 앞에 둔 짐승처럼 뿜어내는 살기를 느꼈다. 자신이 뱀 앞에 선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지면 안 된다. 절대 져선 안 된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세워!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거야!”
“경찰? 씨발 년이 은혜도 모르고…….”
“세우라고!” 박미경이 주먹으로 운전석을 두들겼다. “이 미친놈아, 세워!”
“부를 테면 어디 불러 봐!”
하고 택시기사가 낄낄거리며 천장의 또 다른 스위치를 눌렀다. 주르륵, 하는 소리가 나며 안전벨트가 조여졌다.
택시기사에게 저항하기 위해 앞으로 기울어졌던 박미경의 몸을 강제로 뒤로 잡아챘다. 그녀는 손으로 잡고 버텼지만, 안전벨트는 그녀의 힘을 무시하고 더욱 강하게 조여 왔다.
핸드폰을 들고 있느라 한 손으로 밖에 힘을 못 쓴 그녀는 결국 안전벨트를 놓치고 말았다.
거대한 뱀에게 몸의 자유를 빼앗긴 먹잇감처럼 안전벨트에 조여진 그녀는 가슴이 짓눌려 숨이 가빠왔다. 안전벨트를 풀려고 잠금 해제 버튼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당황해 몇 번이고 재차 눌러봐도 마찬가지다.
아까 전 스위치.
그 금속음.
그 스위치가 안전벨트를 고정시킨 것이다.
안전벨트가 멈출 줄 모르고 살을 파고들어갔다. 캐주얼 정장의 셔츠 단추가 터져 브래지어의 레이스가 드러났다. 대각선으로 맨 부분이 가슴과 목을 조였다. 배 위의 부분은 허리를 끊을 기세였다.
“신고 안 해?” 택시기사가 말했다. “이 씨발 년아, 신고한다면서?”
박미경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긴급통화를 시도했다.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안 되지?” 택시기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 택시에서는 핸드폰이 잘 안 터진다고 손님들이 불만이 존나 많더라고? 왜냐면 내가 안 터지게 해 놨거든!”
“아저씨……,” 박미경이 말했다. “잘못했어요. 제발 저 보내주세요. 네? 살려주세요, 제발…….”
“그러게 왜 내가 잘 해주는 데 떽떽 거리고 그래? 응?”
“살려주세요…….”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택시기사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있을 때 잘 해애, 후회하지 마알고오.”
“아저씨!”
“풀어줘?”
“보내주세요……, 제발…….”
“이 짓 하다보면 꼭 있거든. 매라고 해도 안 매는 새끼들. 안전벨트 잘 매야 돼. 그래야 안전하지.”
액셀을 밟자, 차가 더욱 속력을 높였다. 시골길에서는 너무 위험한 속력이다. 울퉁불퉁한 바닥이나 과속방지턱을 무시하고 내달렸다. 차가 위아래로 들썩이다 못해 도로에 부딪힌 바닥이 쇳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히——하——! 재밌지? 응? 안 재밌어?”
박미경이 울음을 터트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안 재밌냐고!”
“재미있어요. 그러니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데로 다 할게요.
“진짜?”
“네……. 제발…….”
“에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그냥 좀 때리고 따먹고 목 부러뜨려 죽이기만 할 거야. 먹지는 않아.”
그 말을 들은 박미경의 머릿속은 공포로 정지해버렸다.
비명.
택시 밖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외곽지역의 일차선 도로 주변에는 논과 밭, 가로등, 그리고 완전히 드리운 어둠만이 있었다. 비명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택시기사는 비명소리가 즐거운 지, 좋아하며 웃음을 터트렸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안전벨트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려줄게.”
택시가 최대 속력으로 달렸다.
박미경은 좌석 안으로 욱여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를 잃고 박제가 되어버린 것 만 같다. 이성은 이미 사라지고 몸은 통제를 잃었다.
급정거.
브레이크에서 굉음이 터지며 차가 멈추었다. 동시에 택시기사가 스위치를 눌러 안전벨트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그러자 안전벨트가 강제로 풀리고,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간 박미경이 앞좌석의 등받이에 부딪혔다. 등받이 안에 미리 설치해둔 단단한 쇠뭉치에 그녀의 얼굴 앞쪽이 완전히 뭉개지고, 두개골 속에서는 뇌가 막 꺼낸 푸딩처럼 뒤흔들렸다.
택시기사는 이마의 흉터를 긁으며 미소 지었다.
“거 봐,” 택시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안전벨트 매야 한다고 했지?”
박미경은 대답이 없었다.
택시기사는 야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즐길 생각을 하자 가죽바지가 찢어질 정도로 발기했다.
오늘은 만찬이었다.
***
C시에 있는 이름 없는 야산을 택시가 달려 올라가갔다. 자동차가 자주 다니는 길인지 바퀴가 지나간 흔적 위로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
노란 남자가 택시를 몰고 있었다.
택시는 묘지 앞에 자동차를 세웠다.
양지바른 곳이라 그런지 달빛 정도의 조명으로도 윤곽이 확실히 보였다. 봉분 주위로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흙 위로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었다.
두 개의 봉분은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봉분은 깨끗하게 정돈된 잔디가 깔려있었고, 반대쪽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잡초가 자라 있어 관리를 받지 않은 티가 역력히 났다.
택시에서 내린 노란 남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박미경의 몸을 철저히 묶었다. 뒤로 꺾인 팔의 양 손목이 묶여있었고, 남은 줄로 목을 감았다. 이 끈의 중간을 잡아당기면 양 어깨가 꺾이고 목이 졸린다. 다리도 발목이 묶여있었다. 택시 트렁크에서 비닐로 된 돗자리를 펴고 그 위로 박미경을 굴렸다. 그 충격으로 박미경이 정신을 차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녀가 한참동안 착란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그는 가죽바지를 벗고 콘돔을 착용했다.
“살려주세요,”
하고 정신을 차린 박미경이 애원했다.
엎드린 채로 고개만 뒤로 돌린 그녀의 뒤에서 노란 남자가 접근해왔다. 그녀는 공포 때문에 몸을 떠는 것인지 아니면 한기 때문인지, 그는 알 바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먹이를 먹어치울 생각에 흥분한 그는 아직 젖지도 않은 그녀를 강간했다.
비명.
그는 목과 손목을 연결한 끈을 잡아 당겼다. 목이 막힌 그녀가 몸을 비트는 모습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쾌감이었다. 엉덩이를 향해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자 점막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했다.
피투성이가 된 콘돔을 묶어 한쪽에 던져 넣은 그는 콘돔을 꺼내 항문에 피를 발라 억지로 삽입했다. 갑작스러운 통증과 충격으로 박미경이 기절했다. 점막이 완전히 찢어지고 괄약근이 파열될 때 까지 그는 억지로 피스톤 운동을 계속했다.
기절한 박미경을 내버려 둔 채로 노란 남자가 일어났다. 콘돔을 처리하고 난 그는 줄을 거칠게 잡아당겨 박미경을 일으켜 세웠다. 정신을 잃은 채인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뺨을 후려쳤다. 충격으로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따귀는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부어오르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린다. 그런데도 그는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도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따귀는 주먹질이 되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의 입에서 부러진 어금니가 피에 뒤섞여 떨어졌다. 고통으로 실금하기까지 했다.
노란 남자는 내내 미소 짓고 있었다. 금니는 물론이고 어금니까지 드러낸 그의 입은 짐승처럼 찢어져있었다.
“울지 마, 아가씨. 아까처럼 덤벼야지. 응?”
“아저씨,” 심한 구타로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박미경씨,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갚아야지. 그렇게 욕을 하고 개기고 그러면 되겠어?”
신음.
오열.
그녀는 몸부림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이 그에게는 쾌감이었다.
발길질.
주먹질.
닥치는 대로 폭력을 가했다. 발기.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핥으며 웃음을 터트린 그는 박미경의 다리를 들어 올리고 다시 한 번 범했다. 유방을 이로 깨물어 이빨자국을 냈다. 피가 흘러내렸다. 주먹으로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얼굴에도 주먹을 휘둘렀다. 울음이 끊이지 않는 박미경이 피를 토했다.
내일 회사에 갈 걱정.
과장에 대한 분노.
부모님에게 대한 미안함.
삶에 대한 욕망.
자신의 몸이 물건처럼 격하되고 짓밟히는 데에 향한 공포.
고통.
분노.
절망.
“씨발 놈아……, 절대로 용서 못해……. 경찰에 신고하든…… 널 죽여 버릴 거야…….”
“죽여?”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란 남자가 말했다. “내가 죽여줄게. 너 오늘 아주 죽여줄게.”
그는 목을 졸랐다.
박미경의 피투성이로 엉망이 된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뒤섞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깊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동정으로 동조할 그 감정을 그는 자위를 위한 도구로만 삼았다.
박미경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 제대로 조여주네.”
하고 그는 손에 힘을 더욱 더 가했다.
박미경의 숨이 끊어졌다.
그는 사정했다.
피에 젖은 콘돔을 꺼내 손으로 자위를 시작했다. 손에 남은 교살의 감촉이 그대로 성기로 전해지는 기분이 든 그는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또 한번, 사정했다…….
***
“엄마. 나 왔어.”
하고 그는 오른쪽 봉분의 잡초를 뽑았다. 한동안 잔디를 쓰다듬고, 어머니의 젖무덤에 매달리는 갓난아기처럼 봉분을 한 아름 품에 안고 눈을 감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옆에는 얻어맞고, 강간당하고, 유린당한 박미경이 구겨버린 쓰레기처럼 버려져있었다.
얼마 뒤 자리에서 일어난 노란 남자는 삽을 뽑아들고 왼쪽의 봉분을 파기 시작했다. 흙의 색이 다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몇 번이나 헤집은 적이 있는 곳이었다. 삽 끝에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나자, 흙을 좌우로 헤집었다. 노란 물체가 그 사이로 나타났다.
그는 흙을 꼼꼼히 헤집었다.
그 아래로 하얀 물체가 보였다.
사람의 손.
그리고, 뼈.
젊은 여자의 반쯤 벌거벗은 시체가 드러났다. 그 아래에는 반쯤 썩은 사람의 살과 뼈가 십 수 명 분 묻혀있었다. 부패로 인한 악취가 그에게는 어떠한 향수보다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그 위로 몸을 내 던진 노란 남자는 드러누워 자위를 했다.
사정이 주는 허탈감도 지나가고, 산바람에 몸이 식어갈 만큼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박미경의 사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경험해 능숙한 솜씨였다.
***
네 시간 뒤, 노란 남자가 장기투숙 중인 여관으로 돌아오자, 카운터의 주인에게 물었다. 오늘도 넣어줄까?” 여관바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미연이 오늘 비는 데.”
“됐어, 오늘은.”
“어쩐 일 이야? 떡 안치는 날도 있어?”
“밖에서 실컷 치고 왔어.” 노란 남자가 윙크하며 복도로 들어갔다.
“그년은 좋겠다아. 아주 죽었겠네.”
“그럼, 아예 죽여 놓고 왔어.”
주인의 천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는 문을 열었다.
         3.추적
“사장님, 그런 짓을 하면 어떡합니까? 일 났네, 진짜.”
효성흥신소 사장 최계문은 김청수의 말을 믿을 수 가 없었다. 장덕용이라면 그의 업계에서는 유명한 사채업자고, 조사장도 이 지역에서 발이 넓어 친교를 맺은 건달도 많은 사채업자다. 그런 두 사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돈과 약까지 털어가지고 나왔다는 이 남자를 지금 당장이라도 내쫒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는 없다. 그랬다가는 그도 같은 꼴이 될 테니까.
“갈아입을 옷이랑 숙소.” 김청수가 말했다. 소파에 앉은 그는 시종일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손에는 짧은 드라이버를 쥐고 있었다. “그 여관으로는 다시 못 가. 라이터 좀 줘봐.”
최계문이 건넨 라이터를 받아든 그는 강탈한 각성제 결정을 꺼냈다. 주머니에서 쇠숟가락을 꺼내 결정을 올리고 라이터로 가열을 시작했다.
“택시 조사는 끝났나?”
“예.”
“우리 딸은 택시 탄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 어디 있는 지는 말하지도 못했지. 급하다고. 그게 마지막이야. 사랑한다는 말도, 아끼고 있다는 말도 하지 못했어. 분명 택시기사야. 서울에는 없었어. 그럼 남은 건 여기밖에 없어.”
최계문이 한숨을 내쉬며 아이패드를 꺼내 조사한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도깨비 택시 기사들 사이에 소문이 있어요.”
“도깨비 택시?” 각성제 용액을 주사기에 담으며 김청수가 대답했다.
“이 동네 개인택시 하는 기사들이죠. 그 사람들 사이에 몇 년 간격으로 못 보던 택시가 돌아다닌 데요. 유령 택시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도깨비 택시에 유령 택시라.”
각성제를 주사한 김청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 쪽에서 구한 정보를 보니까,” 최계문이 수첩을 꺼내 자료를 대조하며 말했다. “유령 택시가 돌아다니는 시기랑 여자들이 실종되는 시기랑 비슷하게 겹쳐요.”
“그 놈이군.”
“아직 확신할 수 는 없습니다.”
“그 놈에 대한 정보를 찾아 줘.” 김청수가 가방에서 지폐뭉치를 꺼냈다. 오만 원짜리 백장이었다. “삼일 안에.”
침을 삼키게 최계문이 지폐를 받아들었다. “제가 아는 DVD방이 있는데, 거기에 며칠 숨어 계세요. 연락은 전에 드린 대포폰으로 하시고.”
“알았어.”
최계문이 주소와 전화번호를 휘갈겨 적은 수첩을 찢어 건넸다.
김청수가 밖으로 나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최사장.”
“예?” 신이 나 돈을 세던 최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나 배반하면, 최사장도 장덕용이 꼴 날 줄 알아.”
“……예.”
“정보가 쓸 만하면 한 뭉치 더 줄 테니까, 확실하게 처리해줘.”
“걱정 마십쇼. 살펴 가세요. 아, 김사장님.” 일 억짜리 일을 맡긴 고객을 함부로 움직이게 할 수 는 없다. 그는 차키를 던졌다. “밑에 차 쓰세요. 옷은 제가 따로 사람 시켜 보내겠습니다.”
“그냥 차에서 지내면 안 되나?”
“요새 경찰이 단속이 심해서 분명 걸릴 겁니다. 그냥 DVD방에 계시는 편이 나아요. 샤워시설도 있고요.”
김청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
김청수는 DVD방에서 벌써 사흘 째 단서를 기다렸다. 그 사이 또 다른 여자가 실종되었다.
DVD방의 객실 안에서 그는 영화를 틀어놓은 채로 담담히 힌두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몸에는 구슬땀이 맺혀있었다. 스쿼트를 하는 허벅지의 근육이 꿈틀대며 날뛰고 싶다고 소리 없이 애원했다. 팔을 흔드는 등의 광배근이 폭력을 원하며 꿈틀거렸다.
그는 영화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소룡이나 성룡처럼 되고 싶다고 운동을 한 적도 있었다. 박노식처럼 폼 나게 살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으로 꿈이 바뀌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얼굴로는 배우가 되는 게 무리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공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장 일을 견디기 위한 공상이었다.
공장을 다니면서도 영화는 그의 취미였다. 경리 일을 하던 아내와 결혼 전 하던 데이트도 영화보기였다.
공장이 망한 것은 그들이 결혼하고 딸이 태어났을 때였다. 돈을 모아 비디오 가게를 차렸다.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DVD, 대여용 책, 비디오가 잔뜩 있었다.
딸이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죽었다. 고생만 시키다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딸에게 더 신경을 썼다. 그의 사랑이 딸에게는 구속으로 느껴졌었고, 그녀는 지방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딸은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누구와 있는 지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럴수록 더욱 귀찮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삼년 전.
“아빠, 나 있다가 전화할게. 택시 타려고.”
“어딘데?”
대답 없이 전화가 끊겼다.
마지막 통화였다.
그는 딸을 찾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했다. 경찰에게 매일같이 찾아갔다. 택시라는 단서만 가지고 서울 시내를 이 잡듯이 뒤졌다. 가게는 팔아 넘겼고, 사채를 썼다. 범인을 잡기 위해 몸을 키웠다. 싸움을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단서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 몸이 망가져갔다. 정신이 망가져갔다. 그래도 이 방법 밖에는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 말고는 없다. 딸을 되찾고 난 뒤의 생활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오직 단 하나, 딸을 훔쳐간 놈을 잡는 것 만을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딸은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 어떤 물건보다 소중한.
그가 보고 있는 영화는 <테이큰>이었다.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 싸우는 남자의 이야기다. 벌써 수십 번이나 되돌려 본 영화다. 그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영화는 모두 봤다. <테이큰>, <맨 온 파이어>, <추적자>, <수색자>…….
어느 날부터 그의 귀에서는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 추워.”
그의 귓가에서 딸이 속삭인다. 딸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알려왔다. 그는 믿지 않으려 했다. 세상 어느 부모도 실종된 자식이 죽었다고 인정하는 경우는 없다. 그는 딸이 살아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 어딘가로 팔려갔을 지도 모른다.
“아빠,” 딸은 속삭였다. “나 아파. 아빠, 나 무서워. 아빠, 어디 있어? 아빠. 아빠. 아빠. 그 놈을 죽여줘. 그놈이 날 죽였어.”
딸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딸은 자신이 죽었다며 복수를 부탁해왔다.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딸이 아직 살아있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세상 모두가 딸이 죽었다고 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딸에게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갈게. 넌 아직 안 죽었어. 넌 살아있어.”
영화가 끝났다.
주인공은 딸을 구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생각했다. 인생에는 특수효과도, 편집도, 되감기도, 재촬영도, 해피엔딩도 없다. 자기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
옷을 입고 드라이버를 양말에 집어넣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최계문이었다.
“사장님, 좋은 소식입니다.” 최계문은 정보를 전달했다. “아무래도 수상한 차림새였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면 연관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불량해 보이고 나잇값을 못하고 있었데요. 노란 염색에 금니에 노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합니다. B회사 상호를 달고 있기는 한데, B회사에서는 그런 사람은 소속 택시기사 중에는 없다고 그럽니다. 아마 유령 택시인 것 같아요.”
“도깨비 택시일 확률이 높겠군. 어떻게 찾지?”
“조사장이 도깨비 택시라면 꽉 잡고 있습니다.”
“조사장을 잡아야겠군……,” 잠시 생각에 잠긴 김청수가 입을 열었다. “최사장. 조사장에게 내가 있는 곳의 정보를 흘려.”
“네?”
“생각이 있어. 미끼를 던지는 거야.”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방법이 없으니까.”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닙니다. 김사장님은.”
“최사장이 내 상황이 되어 봐.”
“……알겠습니다. 바로 알리겠습니다.”
***
그는 스테로이드와 각성제를 사용한 뒤, 가방을 맸다. 몸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좁은 곳에 갇혀 있으면 불리하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객실마다 영화를 보며 서로의 몸을 더듬는 커플들이 가득했다.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사장에게 인사한 뒤 가게 밖으로 나갔다. 가게는 3층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밑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적.
그는 곧바로 긴 드라이버를 꺼내 한손에 쥐었다. 연달아 던질 준비를 했다. 나이프도 꺼내 날을 뽑았다. 계단 위로 올라간 그는 적들이 DVD방의 문 앞까지 오기를 기다리며 매복했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적이 나타났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DVD방의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비명.
일자 드라이버가 손등을 관통했다. 놀라서 주변을 살피는 조직 폭력배 둘에게 일자 드라이버와 나이프가 날아와 꽂혔다. 계단을 뛰어내린 김청수가 난간을 잡은 채로 둘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두 사람이 뒤엉켜 버둥거렸다.
도약.
일어나려는 조직 폭력배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공중에 뛰어오른 그가 무릎으로 둘의 몸을 내리찍었다. 두 사람의 흉곽이 동시에 내려앉았고 부러진 갈비뼈가 장기를 찔렀다.
절규.
놀란 DVD방 사장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등에 단단히 조여 맨 가방을 푼 그가 만 원짜리 지폐 한 덩이를 꺼내 사장에게 던졌다. “미안합니다.”
당황해 머뭇거리던 사장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사이, 그는 일자 드라이버와 나이프를 회수해 피를 닦았다.
“으으…….”
신음하는 적의 멱살을 잡고 그가 물었다. “조사장이 보냈나?”
“그……렇다…….”
“전할 수 있으면 전해.” 김청수가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한번만 더 날 방해하면 정말로 죽여버리겠다고.”
“예…….” 충격으로 떨면서 적이 대답했다.
“그리고, 혹시 노란 염색한 남자를 아나?”
“노란…… 염색…… 말입니까?”
김청수는 그에게 최계문에게 들은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그 놈이라면, 저랑 가끔 포카치는 놈인데……,” 그는 이름을 댔다. “……라고——”
“연락 되나?”
“네?…… 네.”
“불러내.”
***
DVD방 건물 앞에서 노란 남자의 택시를 기다리며, 김청수는 최계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한 뒤, 대포폰의 위치추적을 지시했다.
전화를 끊는 그의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선팅이 심하게 되어있었다. 그는 조수석 창문을 두들겨 창문을 내리라고 신호했다.
창문이 내려갔다.
택시기사의 머리카락은 염색한 금발이었다.
잡았다.
그는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택시에 올라탔다.
“안전벨트 매 주세요.” 택시기사가 말했다.
그는 요구에 따랐다. 가방을 벗어 옆에 두고 안전벨트를 맸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하고 묻는 택시기사에게, 그는 최계문의 흥신소 사무실 옆에서 본 룸싸롱 이름을 댔다.
“거기 비싼데, 더 싼데 알려드릴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최계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최계문이 말했다.
“하고 있나?”
“예? 아, 예. 위치추적 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한 그 건 말이야. 오천만원. 그거 준비 다 되었으니까, 받아가.”
“찾았습니까?”
“음.”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음.”
그는 전화를 끊고,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양말에 넣어 둔 일자드라이버를 피부로 느꼈다. 팔을 살짝 움직여 주머니의 나이프와 벨트 사이에 끼어 둔 짧은 드라이버도 확인했다. 그는 준비가 되었다.
오천만원이라는 말을 듣자 택시기사의 태도가 변한 것을 그는 백미러를 통해 확인했다. 미끼를 더 확실히 물게 하기 위해 그는 가방을 열고 일부러 지폐 다발을 꺼내 확인작업을 하듯 이리저리 휘둘렀다. 택시기사의 눈이 노란 선글라스 안에서 욕망으로 빛났다.
됐다, 그의 광기가 속삭였다.
미끼를 물었다.
자동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흥신소가 있는 방향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가야하는데, 택시는 왼쪽으로 들어갔다.
택시가 갑자기 가속을 시작했다.
그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아서가 아니다.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노란 남자가 천장의 스위치를 눌렀다. 금속음과 함께 안전벨트와 차문의 잠금장치가 작동했다.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란 남자를 백미러를 통해 노려보기만 했다.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침묵.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이 개새끼가, 사람을 무시하나.” 화가 난 노란 남자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야! 내 말 안 들리냐고! 어? 씨발 놈이, 입 안 열어? 어!”
침묵.
택시가 속도를 더했다.
“뒤져, 새끼야!”
브레이크를 밟으며, 천장의 스위치를 눌렀다.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그의 몸이 튕겨나갔다.
두 손이 자동차의 앞좌석을 붙잡았다. 손에 딱딱한 금속이 잡혔다. 그는 그 순간 이 노란 남자의 수법을 바로 파악했다.
택시가 멈췄다.
노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뒷좌석에 널브러져있었다.
“씨발 놈이, 진작 알아서 기었어야지.” 노란 남자가 흥분으로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꺾었다. “넌 오늘 뒤졌다, 새끼야.”
그는 몰래 주머니에서 나이프와 짧은 드라이버를 꺼내 뒷좌석으로 던졌다.
그가 뿌린 미끼를 노란 남자가 물었다. 이제는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 만 남았다. 흥분으로 몸이 떨려왔다.
그는 이를 악 다물었다. 망쳐서는 안 된다. 참아라. 죽은 시체처럼 얌전히. 조용히. 숨조차 쉬면 안 된다. 저 개새끼가 이겼다고 생각하게 만들자. 시체처럼.
이제 곧 저 개새끼가 시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딸을 만난다.
어디 있어, 아빠. 나 무서워. 추워.
딸이 속삭였다.
아빠가 금방 갈게, 기다려.
택시가 야산으로 향했다.
야산의 묘지 앞에 택시가 섰다. 묵직한 산바람이 봉분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고 달빛으로 밝았다.
노란 남자는 택시에서 내려 뒷자리의 문을 열었다. 나이프와 드라이버가 떨어져 있었다. 무기가 분명했다. 모두 챙겨들고,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뺏었다. 핸드폰도 드라이버도 나이프도 모두 숲속으로 던지고 트렁크로 향했다.
그는 택시에서 튀어나가 등을 보이고 있는 택시기사에게 돌진했다.
비명.
기다란 일자 드라이버가 신장을 찔렀다. 그가 온몸의 체중을 이용해 쑤셔 넣은 것이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노란 남자가 삽을 휘두르며 반격했다.
뒤로 물러나 피하다 이마에 격통을 느꼈다. 삽날에 맞은 것이다. 피가 뺨을 타고 흘렀다. 충격으로 일자 드라이버를 놓쳤다.
삽을 휘두르며 달려들려는 노란 남자가 신장의 통증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그가 달려들었다.
노란 남자가 삽을 내질렀다.
배를 얻어맞은 그가 나가떨어졌다.
삽을 지팡이삼아 일어난 노란 남자가 삽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가 삽에 맞았다. 삽날의 예리한 부분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관자놀이를 쇳덩이로 맞았다. 머리가 어질해졌다.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거리를 둬야 한다.
몸을 일으킨 그의 두 손은 비어있었다. 드라이버를 꺼내지 못했다. 아직 남겨둬야 한다.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두 손을 권투선수처럼 올리고 공격을 피하는 그의 몸에 삽이 달려들었다. 둔탁하게 쇠가 울리는 소리가 연달아 퍼졌다. 세 방. 네 방. 다섯 방. 그는 견뎠다. 계속해서 뒤로 물러섰다.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뒤로 돌아서서 달리는 방법은 취할 수 없었다. 뒤통수를 맞으면 정말로 끝장이다.
그는 뒤로 물러서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걸려 넘어졌다.
“죽어, 이 새끼야!” 노란 남자가 달려들었다.
몸을 굴리며 일어난 그는 양말에서 드라이버를 뽑아 언더스로로 던졌다. 오버스로보다 힘을 받지 못하지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비명.
허벅지에 일자드라이버가 박혔다.
삽을 떨어뜨릴 정도로 노란 남자가 괴로워했다.
웅크린 채로 단거리 육상선수의 스타트처럼 달려든 그가 도약했다. 슬라이딩을 하듯, 그가 프로레슬링 선수의 드롭킥처럼 무릎을 향해 두 발을 뻗었다.
충격.
일자 드라이버가 허벅지 중심의 뼈를 찔렀다.
노란 남자가 쓰러졌다.
그는 몸을 굴리며 일어나, 바닥을 구르는 노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씨발——” 노란 남자가 허벅지에 박힌 드라이버를 뽑으려 했다.
“드라이버 뽑으면 네 손해다.” 그가 말했다.
이마의 피가 얼굴을 뒤덮은 그는 지쳐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다. 피가 거미줄처럼 얼굴에 들러붙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옆에 널브러진 삽을 주워들었다.
그는 삽을 내리쳤다.
삽날의 넓적한 부분으로 노란 남자를 내리쳤다. 등. 팔. 다리. 허벅지. 배. 가리지 않았다. 기계적이고 정확한 동작이었다.
두 방. 셋 방. 네 방. 다섯 방. 여섯 방. 구타는 멈추지 않았다. 철저하지만, 계산된 폭력이었다.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알고 싶은 게 남았기 때문이다.
폭력이 멈추었다.
노란 남자를 장식하고 있는 모든 금색이 피에 젖어 더없이 천박해 보였다. 침과 피로 번들거리는 금니도 마찬가지였다. 침을 뱉으며 욕하고 비명 지르고 웃었다.
“말해.” 그가 말했다.
“뭘?” 노란 남자가 말했다. “씨발. 씨바알…….”
“어디 있어?”
“누구?”
“내 딸.”
“딸?”
그는 딸의 이름을 말했다. “어디 있어?”
“좆까,” 노란 남자는 다시 한 번 침을 뱉었다. “알려주면 얼마 줄 건데?” 그는 천박하게 웃다가 아까 전에 찔린 등 뒤의 신장 언저리를 붙잡고 신음을 토했다. 상처를 누를 때 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얼마를 줄면 알려줄 거지?”
“그건 나도 모르지.”
“농담하지 마. 어디 있어?”
“어머니 무덤 앞에서 너무하는 거 아니야?” 노란 남자는 봉분을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이 씨발 좆같은 새끼야, 자식이 쳐 맞는데 누워 자빠졌냐?”
“이쪽은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세상 그렇게 빡빡하게 살아 되겄어? 설렁설렁 하고 싶은 거 즐기며 살아야지.”
“내 딸 어디 있어?” 그는 잠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딸의 사진을 내보였다. “이 애는 지금 어디 있어? 말해!”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도 그는 노란 남자의 눈동자의 변화를 살폈다. 만일 눈동자가 오른쪽 위로 올라갔다면 시각 정보를 꾸며낸 것이고 왼쪽 아래로 움직��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사진을 보는 순간 노란 남자의 눈동자는 왼쪽 위로 움직였다. 전에 본 시각적인 기억을 떠올렸다는 의미였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이 개새끼는 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음 보는 데? 몇 살이야?”
하고 노란 남자가 시치미를 떼자, 그가 삽을 휘둘렀다. 삽날의 평평한 부분으로 옆통수를 맞은 노란 남자가 신음소리와 비명을 질렀다.
“내 딸 어디 있어?”
“씨발!”
“어디 있어!”
“아파 뒤지겠네.” 노란 남자가 허공에 손가락질 했다.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저씨 딸 저기 있잖아. 데려 가.”
그가 삽을 휘둘렀다.
삽날의 쇠가 울리는 소리와 두개골에서 나는 둔탁한 뼈소리, 그리고 욕설과 신음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 때마다 그는 딸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소리 질렀다.
몽둥이질이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이마를 붙잡았다. 출혈과다에 갑작스럽게 움직여서 어지러워진 것이다.
“씨발,” 노란 남자가 텅 빈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달밤에 체조도 아니고 삽질하고 앉았네.” 노란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아저씨도 인생 참 힘들게 산다. 살살 달래도 알려줄까 말까인데 줘 팬다고 알려줄 거 같냐? 응? 이 또라이 새끼야!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말해!”
“이런다고 알려주겠냐? 너 같으면? 응? 평생 해 봐! 내가 부나. 내 목 조르는 짓을 내가 왜 하냐? 평생 허공에 헛좆질 해 보쇼. 구천을 떠도는 딸내미 만나나 해 보라고!”
그는 침묵했다. 이를 악다물어 턱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 나야 헛좆질 안하지. 그럼,” 노란 남자가 말했다. “당신 딸내미 씹맛 제대로 보면서 좆질 했었어. 맞아. 나 당신 딸내미 알아. 아저씬 딸 씹 안 먹어봤지?”
그가 삽의 날을 세워 도끼처럼 내리찍었다.
비명.
노란 남자의 왼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손가락! 씨발, 내 손가락——”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화 좋아하나?”
“인생이…… 워낙 영화 같으셔서…… 안 쳐보신다, 씨발아…….” 쇼크로 몸을 떨면서 노란 남자가 말했다.
“인생에는 특수효과라는 게 없지.” 그가 등을 돌렸다. “편집도. 되감기. 재촬영도, 해피엔딩도 없어.”
“뭐라는 거야, 또라이 새끼야!” 노란 남자가 왼손을 들어 첫째 마디가 날아간 중지를 세워보였다. 피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좆이나 까 잡숴!”
그는 삽을 지렛대 삼아 주변에 있는 커다란 돌을 굴리며 다가왔다. 무덤가 앞에 놓인, 성묘 때 음식을 올리거나 쓰는 상돌(床石)이었다.
본래 장방형으로 깎아놓았을 화강암은 세월에 마모되어 거칠고 투박하게 변했지만 무게는 여전했다. 삽날을 바닥에 쑤셔 넣고 온 체중을 실어 삽을 밀어내 겨우 앞으로 굴렸다.
상돌의 세로로 길쭉한 쪽으로 삽날을 쑤셔 넣은 그가 발로 삽을 밟아 공간을 만들고, 두 손을 넣어 일으켰다. 비석처럼 일어선 상돌의 모서리가 풍화되어 제대로 서지 못하자, 그가 손으로 직접 붙잡아 바닥의 빈 공간에 발로 흙을 채워 넣어 겨우 세웠다.
노란 염색머리를 움켜주고 질질 끌고, 그는 상돌의 바로 아래까지 노란 남자를 끌고 왔다. 저항하는 노란 남자를 무시한 채 상돌의 바로 아래에 두었다.
“당신 딸 찾아서 어쩌려고,” 머리를 붙잡힌 채로 노란 남자가 말했다. “이미 썩어서 뼉다구만 남았을 텐데 찾아서 어쩌려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냐!”
“내 딸은 살아있어.”
“내가 따먹고 죽였다고!”
그가 상돌의 꼭대기를 잡아끌었다.
부채꼴로 쓰러지는 상돌이 작두날처럼 노란 남자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비명.
상돌에 깔린 다리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상돌 밖으로 삐져나온 정강이와 발끝이 기묘한 각도로 서로 등을 돌리며 구부러져 하늘을 향했다.
“이씨발개새끼야으아아아——”
“말 했지? 인생에는 특수효과가 없다고.”
“씨발…… 또라이 새끼,” 입가에 거품을 물고 노란 남자가 말했다. “너나…… 나나…… 똑같은 개새끼야, 새끼야! 너도…… 즐기고 있는 거라고…… 너도…… 괴물이야…… 이 새끼야!”
“어디 있어.”
“네 딸년…… 죽을 때 까지 좋아서…… 아빠, 아빠, 하고 찾더라……. 내가 그년…… 목 조르고 박아주니까…… 좋아서…… 죽더라고. 그래서…… 그냥 죽여…… 버렸어.” 노란 남자가 비웃었다. “목을 콱…… 졸라서 죽여…… 버렸어…….”
“내 딸은 살아있어.”
김청수가 또 다시 삽을 휘둘렀다.
비명.
노란 남자의 오른손의 손가락이 날아갔다.
그는 허벅지의 드라이버를 뽑았다.
또 다시, 비명.
작게 뚫린 동그란 상처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드라이버로 허벅지를 난도질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완전히 폭발했다. 폭력에 취한 그는 폭력을 멈출 수 없었다. 허벅지가 벌집처럼 엉망이 될 때 까지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말해!”
그는 찔렀다.
“말해!”
그는 찔렀다.
“말해!”
그는 찔렀다.
“말해!”
“죽었다니까!”
드라이버를 내던지고 주먹질을 했다. 말 타듯 노란 남자 위로 올라탄 그가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관절의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고 손가락뼈에 금이 갈 정도인데도 멈추지 않았다.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뼈가 내려앉고 눈이 부어오르는 이 개새끼를 내려다보자, 그동안의 모든 감정이 폭발했다. 가슴 속의 울분을 날려버렸다. 뇌가 폭발하는 것 같은 쾌감. 그 어떤 행위보다 감미로운 폭력.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마를 훔쳐보니 땀에 뒤섞인 피가 흥건히 묻어났다. 숨이 거칠다. 폐가 터져버릴 것 같다.
“말해.”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며, 그가 말했다.
“네 딸…… 은…… 죽었……어…….”
“아니야!”
그는 택시로 향했다. 가방에서 각성제를 꺼내왔다.
“이래도 안부는 지 보자.”
“이 미친 새끼…… 넌 딸 핑계대고…… 날, 줘 패는 걸…… 즐기는 거야……. 너나 나나…… 짐승이야……. 흐히히…… 짐승이라고, 지 물건 뺏겼다고 날뛰는 짐승……!”
“아니야.”
“솔직히 말해……. 너도 네 딸년…… 따먹고 싶었잖아……?”
“아니야.”
“맞지……? 그래서 이 난리치는 거지……?”
그는 각성제를 노란 남자에게 주사했다. “사람이 뽕을 맞으면 감각이 예민해지지. 바람에 사각거리는 자기 머리카락 소리까지 거슬리게 되거든.” 그는 두변에 있는 단단한 돌을 주어들고, 노란 남자의 머리를 휘어잡아 뒤로 획, 젖혔다. “그리고 사람 이빨은 다른 어디보다 신경이 예민하지.”
“하…… 하지 마……, 제발…….”
“그래, 빌어. 내 딸한테 한 것처럼 너도 빌어. 그런다고 내가 멈출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가 돌을 내리쳤다.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입 안 가득 피가 차 오른 노란 남자가 기침을 쿨럭였다. 기도로 피가 넘어가려 했다.
돌을 계속해서 내리쳤다.
이가 부러졌다. 어떤 이는 잇몸 속 뿌리까지 뽑혀 나왔다. 위아래의 앞니 여덟 개가 완전히 빠져 구멍이 뚫린 잇몸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고, 조각난 이가 뒤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멈추지 않고 양쪽 볼을 돌로 내리쳤다. 어금니가 깨졌다. 깨진 조각이 목 너머로 넘어가 식도를 손상시켰다. 그는 머리카락을 내던지듯 놓고, 배를 걷어찼다. 노란 남자가 격렬하게 기침하며 이빨 조각을 토했다.
“꺼져, 개새끼야……,” 노란 남자가 말했다. “꺼져……. 이 짐승 같은 새끼…….” 이가 없어 발음이 부정확했다.
그는 노란 남자의 팔을 비틀어 올려, 조사장에게 했듯 주먹을 내리쳤다. 팔이 부러졌다. 다른 팔도 마찬가지로 부러뜨렸다. 팔이 흐느적거리게 되어도 노란 남자는 계속해서 반행했다. “죽을 때…… 까지…… 딸 얼굴…… 못 볼 줄——으아아아아악——”
그의 두 주먹이 노란 남자의 쇄골을 동시에 박살냈다. 이제 노란 남자는 두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말할게! 말할…… 게……. 그러니…… 그만……해……. 제발…….”
“아니.” 그는 삽을 주어 들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이지? 나를 다른 데로 보내고 그 사이 도망칠 생각이잖아. 그렇지?”
“아니야. 아니야……, 그러니 제발——” 노란 남자가 목 안에 들어찬 피를 울걱거리며 애원하다, 비명을 질렀다.
그가 삽날로 갈비뼈를 내리쳤다. 갈비뼈가 조각이 나 흉곽이 내려앉을 때 까지 삽을 내리쳤다.
“내 딸 어디 있어.” 그가 말했다.
“죽었다니……까…….”
“내 딸은 살아있어!” 그가 삽끝으로 가랑이 사이를 내리쳤다.
비명.
그는 삽을 내던지고 노란 남자의 성기를 짓밟았다. 고환이 터지고 해면체가 짓이겨져도 멈추지 않았다. 충격으로 정액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 아래……,”
하고 무덤을 가리킨 노란 남자가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아니야.” 그가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절규.
무덤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두들기며 그는 울부짖었다. 바닥을 뒹굴며 그는 울부짖었다.
삽을 주어들고 기절한 노란 남자의 목으로 삽을 쳐 박으려 했다.
그가 삽을 내리찍었다.
    4.복수
삽은 봉분에 박혔다.
한참동안 봉분을 무너뜨린 그는 바닥을 파내려갔다. 삽질을 하는 내내 아니야, 아니야, 하고 중얼거렸다.
하얀 물체가 보였다.
노란 물체가 보였다.
뼈와 썩어가는 시체가 가득했다.
“아니야.” 그는 뼈와 시체를 뒤적였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
침묵.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매일 밤 꿈에서 봤던 그 옷.
두 손에 잡힌 뼈가,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오열.
절규.
신음.
비명.
삼년 분의 감정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그는 울었다. 온 몸으로 울었다. 억지로 만들어왔던 근육도, 각성제에 중독된 뇌도, 울부짖었다.
“아빠 왔어, 유리야…… 일어나봐……. 아빠 왔어……. 유리야…….”
유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딸을 품에 안고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가 입었던 옷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썩어 해진 옷감 사이로 눈물이 스며들어갔다.
자신이 잃어버린 물건을 영영 찾을 수 없다는 상실감이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한참을 운 그는 일어나 노란 남자의 꼬리뼈를 걷어찼다. 완전히 기절한 노란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라이터로 턱 밑을 지지자, 그제서야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그는 노란 남자의 눈을 내리찍었다. 충격으로 안와가 골절되고 안구가 터져 수정체의 유리액이 피가 뒤섞여 새어나왔다. 양쪽 눈이 모두 파괴되었다. 뒤이어 코를 내리 찍었어 연골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쥐어뜯었다. 피부가 찢어져 피에 젖은 비강이 드러났다. 혀를 쥐어뜯었다. 고막을 터트렸다.
고통스러워 꿈틀거리는 노란 남자에게 그가 말했다. “넌 이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냄새를 맡지도 못해. 죽고 싶겠지. 하지만 넌 죽지 못해. 그리고 나도 너를 죽이지는 않을 거다. 내 딸이 살고 싶어서 몸부림 칠 때 그걸 보고 즐긴 네 놈이 그리 쉽게 죽도록 놔두지 않을 거다. 살고 싶다고, 움직이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죽을 때 까지 악을 써라. 나를 저주해라. 살고 싶어서 발악해라. 그게 네 놈에게 남은 마지막 속죄다. 평생 동안 네 몸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죽지 못해 영원히 살게 해 주마.”
그는 노란 남자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두 손으로 목을 비틀었다.
불길한 소리를 내며 경추가 부러졌다.
<끝>
2014년 5월 6일 화요일 오전1시~오전 3시
분량 200 X 214 매 = 36600 자. 8800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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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Text
(중편소설) 일코 인 러브 2013-06-19
일코 인 러브
손지상
         황금빛 저녁하늘이 이제 곧 퇴근할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즐거운 시간임에도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는 라성일은 고민이 가득 붙어 곤란해 보였다.
“성일 씨? 성일 씨,”
하고 과장님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성일은 인터넷 카페의 게시물 본문을 읽고 있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글의 내용은 이랬다.
‘이번 주말 토요일 한강에서 촬영회를 엽니다! 이번엔 제가 힘써서 그 유명한 코스튬 제작자이자 사진사이신 월영님이 참가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제가 억지 부렸어요.ㅎㅎ 욕은 제가 먹을 테니 여러분 많이 참석해주세요!’
아래의 댓글 창에는 이런 댓글이 줄줄이 달려있었다.
‘그 유명한 사진사 월영님이요?! 참가 희망합니다!’
‘월영님 카메라 봤어요? 엄청나다니까요. 분명 그 님 부잣집 자식일 겁니다. ㅎㅎ 사진사 중 존잘 오브 존잘 이죠.‘
‘사진만 존잘이 아니라 코스튬도 존잘님이세요. 코스를 직접 하시지는 않으시지만 요.’
‘월영님이 오신다니! 전 꼭꼭 갈게요!’
—등등.
본문글과 댓글을 다 읽은 성일이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 약속 있는데.”
손에 쥔 펜을 던진 성일이 목이 답답한 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데, 컴퓨터 모니터 위의 피규어 대여섯 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시선이 자기를 한심하게 보는 것 같아 성일이 “뭐?” 하고 내뱉었지만, 피규어들은 말없이 화려한 차림새를 자랑하며 기기묘묘한 포즈로 몸을 비틀고 서 있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의 피규어로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이 달린 옷을 입고 있었는데, 실제로 만들어 입으면 제대로 움직이기나 할까 하고 의심이 가는 복장이었다. 적어도 후줄근한 와이셔츠 차림의 30대 남자가 입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옷들이다. 피규어들은 경고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성일의 뒤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는 성일의 등으로 무언가의 그림자가 비치더니, 서서히 위로 올라가 컴퓨터 화면을 가렸다.
“라성일!”
“아, 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성일이 뒤를 돌아보았다. 손은 능숙한 솜씨로 키보드를 두들겨, 컴퓨터 화면을 인터넷 서핑을 하는 브라우저에서 숫자가 잔뜩 적힌 사무용 계산 프로그램으로 전환시켰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뭐하고 있어?”
“아, 뭐야. 춘규구나….”
자기 뒤에 선 그림자가 입사 동기인 함춘규였다는 것을 안 성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춘규는 험악한 표정으로 성일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심하다는 얼굴이다.
“과장님께서 부르시잖아. 서류 다 처리 했어? 오늘까지라고 끝내라고 하신 과장 말씀 기억나지?”
“아! 미안, 춘규야. 그게 있지─”
곤란한 표정으로 땀을 흘리며 서류를 뒤지던 성일이 파티션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윤수지의 머리카락이 힐끔 보였다. 이런 모습을 수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성일은 자기 기분을 알아주길 바라며 춘규를 올려다보았다.
춘규가 성일의 마음 따윈 알 리가 없었고, 오히려 그런 처량한 얼굴이 화를 돋궜다. 입사 동기 욕을 다 먹이는 놈이. 군대에 있을 시절부터 보기만 해도 때려주고 싶은 얼빠진 얼굴을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춘규다. 어른스럽게 사회생활 하지 않을 거면 그냥 방에 쳐 박혀 있으란 말이야, 나와서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모니터 위에 있는 인형들을 보자 더더욱 화가 났다. 자기 월급 낭비하는 거야 춘규가 알 바가 아니었다만, 이렇게 행동하는 놈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도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만 같아 참을 수 없어진다.
“일처리 다 안하고 인터넷 하고 있으면 돼?” 춘규가 말했다. 과장님의 뒷받침도 있으니 숫제 부하취급이다. “제발 어른 좀 되라. 이런 장난감 좀 치우고. 애도 아니고.”
춘규의 훈계 아닌 훈계에 사무실 직원들이 성일을 살짝 쳐다보았다가, 한 사람을 제외 하고는 이내 심드렁하니 자기 ��로 관심을 돌렸다. 자주 있는 일이다. 계속해서 파티션 너머로 성일을 쳐다보는 한 사람은 수지였다.
윤수지는 깔끔하고 세련된 외모에 빈틈없이 메이크업과 복장을 갖춘 유능한 커리어 우먼으로 보였다.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고 일에만 매달릴 것 같은 인상은 과장과 비슷하였다만, 젊고 생기 있는 에너지가 차가운 표정 아래에서도 느껴졌다. 평소에는 무표정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하고 정돈된 표정인 수지가 지금은 어째서인지 표정이 복잡했다. 성일이 춘규에게 잔소리를 듣기 전부터 이랬으니 성일 때문은 아니었다. 카카오톡 메시지 때문이다.
근무 중에 인터넷 서핑이나 쇼핑을 한다거나, 메신저를 켜서 잡담을 한다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누구나 하는 짓이지만, 수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수지가 근무 중에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상대는 오랜 친구인 서나현이었다.
나현은 계속해서 수지를 설득하고 있었다. 이를 거절하려 수지가, “나 약속 있어서 못 간다니까,” 하고 메시지를 보내면, 나현은 “누구랑 약속인데? 남자친구 없잖아?! 수지야 부탁해ㅠㅠ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니ㅠㅠㅠㅠㅠ,” 하고 고집을 부렸다.
한숨을 쉬며 수지가 파티션 너머를 보았다. 라성일과 눈이 마주쳤다. 춘규는 여전히 화를 내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성일이 시선을 돌리자, 수지가 핸드폰을 책상 위로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춘규와 성일에게 다가갔다.
춘규가 수지를 보자, 잘 보이려고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수지는 춘규를 보지 못한 것인지, 무시하며 라성일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성일 씨, 잠깐 저 좀 보실래요?”
“네? 아, 네.” 성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실망과 분노가 뒤섞여 부들부들 떠는 춘규를 눈치 못 챈 수지가 성일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머뭇머뭇 끌려 나가면서 성일은 안도했다. 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본 춘규가 불만스레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수지 씨….”
침통하게 춘규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여직원 세 사람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 구석에 있는 실내용 커피 자판기 앞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중년 여성이 된 그녀들은 퇴근 시간 30분 전부터 미리 이곳으로 와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때우는 게 일과였다. 사원복지 차원에서 들여 놓은 실내용 커피 자판기로, 작은 박스 크기에 윗부분에 플라스틱 물통을 꽃아 놓은 모습이 네모 각진 눈사람 같다. 너무 달아 젊은 사람들은 불만이 많지만, 커피는 자판기 커피가 아니면 다방 커피라고 주장하는 중역들의 강한 의견이 가미되어 커피는 갈수록 단 맛이 강해져갔다.
“음, 카페인과 당분, 야근이라는 장기 레이스를 위한 엔진오일이지.”
묵직하고 멋진 목소리로 대사를 날리며, 아직 김이 나는 커피를 홀짝이는 여직원, 근속 13년의 박귀자씨는 누가 봐도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수염자국도 보이는 게 남자처럼 생겼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머지 두 여직원은 수지에게 끌려 나가는 성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또 성일 씨야? 어떻게 매번 저래?” 뚱뚱한 여직원이 말했다. “춘규 씨랑 동기인데 참 달라. 일 못하면 눈치라도 좋아야지. 어떻게 저 바보가 저렇게 유능한 수지 씨랑 사귀는 가 몰라? 차라리 춘규 씨가 낫지.”
“남녀관계란 게 모르는 거지. 수지 씨 눈에는 우리가 모르는 매력이 보이는 가 봐. 춘규 씨만 불쌍하지.” 날씬한 여직원이 대답했다.
“이해가 안가. 수지 씨, 정말 철두철미한게 얼음장 같잖아? 말도 똑 부러지고, 딴 짓도 잘 안하고. 저런 타입이 승진하게 마련이지. 미리 친해져야 하나? 노후를 생각해서. 우리 애 대학갈 때 까지는 이 지긋지긋한 회사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우리 애는 장학금 받아오니 숨통이 좀 트여.”
“…좋겠네.”
“우리 애도 원래 학교 공부 못 따라가고 그러다가, 어느 새 변해서 성적이 올라가고 그러더라고. 남자는 원래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저런 확실한 타입이 성일 씨 같은 남자에게 끌리고 고쳐주고 싶어하는 법 아니겠어? 평강공주 콤플렉스라고 해야 하나?”
“그럼 성일 씨가 바보 온달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바보겠지.”
“사람은 누구나 잠재력이 있는 법 아니겠어? 혹시 또 모르지, 다른 곳에서는 능력을 발휘해서 유능한 사람이 될 수 도 있지. 바보 온달도 그랬잖아?”
“그건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거고. 친구로 삼아야 한다면, 난 절대 성일 씨 같은 사람은 싫어. 귀자 언니는 어때?”
“윤수지… 뻿고 싶게 만드는 여자야.” 박귀자가 말했다.
홀딱 반한 표정의 귀자를 보고 날씬한 직원은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고, 뚱뚱한 직원은 춘규가 측은해 수지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충고를 건넸다.
그 때 당사자 수지는 사람의 왕래가 드문 복도 구석 끝으로 성일을 끌고 왔다.  사용하지 않는 의자나 책상, 버리기 귀찮아 쌓아놓은 서류 박스, 행사 때만 꺼내는 스포츠 용품이 창고처럼 쌓여있는 어수선한 곳이다.
주변을 살피는 수지의 태도가 사무실 안과는 달리 격정적이고 활달하다. 성일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수지가 두 손을 허리춤에 대고 딱 버티고 자기 앞에 서자 춘규나 과장님 앞에서 위축되던 것 보다 더 오그라들었다.
“아까 뭐하고 있었어?” 수지가 말했다.
“어? 아, 그게—”
“뻔 하지 뭐. 일 안하고 컴퓨터 하고 있었지? 춘규 씨 말이 틀린 건 아니야. 제발 회사에서 그런 짓 좀 하지 마. 그 피규─인형도 좀 치우고. 부끄럽지도 않아? 춘규 씨는 승진 후보라는데. 성일아, 너 언제 어른 될 거야?”
어른, 그 단어가 성일의 가슴을 나이프처럼 찔렀다.
“…미안.” 성일이 말했다.
“그 이야긴 됐고, 할 이야기가 있는데…. 나 있지, 주말에 일이 생겼어. 미안, 진짜 급한 일이라….”
“사실, 나도 갑자기 일이 생겼거든, 그래서─”
“그래? 잘 됐네! 그럼 다음 주로 미루자. 알았지? 미안해.”
성일의 말은 듣지도 않고 가볍게 뽀뽀를 한 수지가 성큼성큼 사무실로 돌아갔다. 걸음걸이가 점점 차분해지다, 모델처럼 완벽한 워킹으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성일이 머리를 긁었다.
“하여튼.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네… 하긴, 물어도 이 상황에서 대답하긴 힘드니까….”
성일은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앉았다. 춘규와 수지의 말이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어른이 되��. 어른이 되라. 어른이 되라. 역시 회사에 피규어를 가져다 놓은 건 실수였나. 그래도 이 지겨운 회사에서 버티려면 필요한 데—
다행히,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 * * * *
토요일.
풍부한 태양빛으로 가득해 사진 찍기 좋은 오전 10시의 한강변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벌써부터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코스프레 촬영회다.
코스프레는 코스튬 플레이의 준말로,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옷이나 복장을 재현해서 입음으로써, 캐릭터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민명서방에서 간행한 <황대리, 코스프레의 달인이 되다>에 실린 유명한 코스튬 제작자이자 사진사 월영은 인터뷰에서 코스프레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불교, 그 중에서도 밀교의 수행법은 일종의 소환술이에요. 처음에는 부처님과 같은 복장, 법구, 표정, 자세를 취하고 부처님이 이야기 한 주문을 외우면서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면 겉모습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부처님이 되어, 완전히 부처님으로 해탈한다는 과정입니다. 코스프레도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되어 일상을 잊고 자신이 꿈꾸던 새로운 내가 되는 인스턴트 환생이지요.”
윤수지도 오랜만에 인스턴트 환생 중이었다. 입술도, 손톱도, 눈 화장도, 귀여운 단화와 무릎 위 까지 올라오는 스타킹도, 바람에 날려 하늘거리는 하얀 프릴이 잔뜩 달려 귀엽다 못해 조금 부담스러운 드레스까지도 다 검었다. 검고 장식적인 중세의 고딕(gothic) 풍 디자인을 가미한 롤리타(Lolita) 패션, 고스로리 스타일의 코스튬이다. 여기에 더해 한쪽 눈은 장미 문양이 그려진 안대를 하고 있었고, 발포 스티로폼으로 만든 사람만한 검을 들고 있다. 같은 고스로리 풍 드레스를 입고 옆에 선 서나현은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수지와 달리 의기양양하다. 양손에는 모형 권총 두정을 들 연방 사진을 찍어대는 사진사들 앞에서 대담한 포즈를 취하며, 나현이 말했다.
“오랜만에 코스 하니까 어때?”
"말 시키지 마. 최악이야."
“고등학교 때 까지 만해도 유명 코스어였잖아? 닉네임이 미유키였나?”
“야!” 수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부끄럽게 옛날이야기 하지 마! 그건 내 흑역사라고! 내가 회사 사람들이나 성일 씨 앞에서 일코 하느라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일코─일반인 코스프레의 준말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오덕’, ‘덕후’ 라는 사실을 감추고 일반인을 연기하는 행위다. 지금 내 모습을 회사 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수지는 생각했다. 생각만 해도 오싹해. 성일이도 일이 있어서 다행이야.
“일코 하려면 제대로 해.” 나현이 말했다. “평범한 회사원이 ‘흑역사’ 같은 말을 쓰겠어? 덕후들이나 쓰는 말이지.”
“으으… 아무튼!”
“내가 괜히 오라고 한 게 아니야. 요새 코스계에 일명 돈지랄의 여왕이라고, 어디 재벌집 딸인데 자기가 옷도 안 만들고 다 사서 입는 주제에 퀄리티는 높아서 사진집까지 낸 여자가 있거든.”
“그게 뭐 어쨌다고?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짜증나잖아! 그리고 그 여자, 월영님을 노리고 있데.”
“월영님을? 그래서 월영님이 나오신 건가?”
“그건 아니야. 월영이 나오신다는 소문 듣고 나온다고 한 거겠지. 어머! 월영님 오셨나 봐.”
수지는 주변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멀리서 태양을 등지며 역광이 되어 다가오는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월영님이시다!
“저 카메라 좀 봐.”
월영이 거대한 카메라를 들어 눈을 대자 코스어 몇 명이 앞 다투어 다가가 포즈를 잡았고, 월영을 존경하는 사진사도 뒤따랐다. 찰칵, 찰칵, 찰칵—연속해서 터지는 기계적인 셔터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코스어들이 제각각 멋져 보일 거라고 연습했던 포즈를 취했다. 월영의 카메라는 차례로 코스어를 뷰 파인더에 담기만 하고 찍지는 않다가, 두 명의 고스로리 캐릭터에게서 멈추더니 사진을 찍어댔다.
월영이 자신들을 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수지와 나현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아직도 부끄러움이 채 가시지 않은 수지는 우물쭈물하고 있는 반면, 나현은 대담하고 맨 살이 드러나 조금 위험한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를 유혹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나현에게서 수지로 넘어갔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순진하고 신선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얼굴을 향해 줌을 당겼다. 뷰 파인더 한 가득 수지의 얼굴이 비추었다.
월영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월영이 당황해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수지와 나현이 의아해하며 다가가자, 월영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설마, 하고  수지가 돌격해 카메라를 치우자, 땀을 뻘뻘 흘리는 월영의 얼굴이 드러났고, 얼굴이 붉어진 수지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나현이 말했다.
“성일 씨가 월영님이었어요?! 대애애애애애박!”
“아, 안녕, 수지야. 오늘 일 있다더니….” 성일이 말했다.
“너야말로….”
잠시 간 정적—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성일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수지야—”
수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라고 외치며 수지는 도망치고 있었다.
달리는 수지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른 채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현과 성일이 수지를 뒤쫓았고, 세 사람 앞을 거대한 핑크색 캐딜락 리무진이 가로막았다.
“어머!”
“뭐야!?”
놀란 세 사람 앞에서 부담스러운 핑크 리무진의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양복을 입은 거대한 체구의 근육질 남자가 내렸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역력한 기색을 억지로 감추어 얼굴이 무표정했고, 느긋하게 뒷좌석으로 향하는 걸음걸이에서도 느껴졌다. 문을 열고 90도로 인사하는 남자를 무시하며, 화려한 코스프레를 한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코스어들과 사진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지, 이 사람은?”
“코스튬 퀄리티 좀 봐?!”
“엄청나다, 돈을 얼마나 들인 거야?”
“…이리나!” 나현이 말했다.
“이리나?!” 사진을 찍다가 그 말을 들은 사진사가 중얼거렸다. “돈지랄의 여왕으로 불리는 그 이리나? 사진보다 훨씬 예쁘잖—?”
이리나를 칭찬하던 사진사가 채 말을 끝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이리나가 어느 새 다가와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억울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사진사를 차갑게 내려다보던 이리나가 사진기를 뺏어 바닥으로 던졌고, 사진기가 바닥의 보도블록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 버렸다. 사진사의 마음도 산산이 깨져버려 분노보다 슬픔과 당혹이 한 발 앞서 사진사의 눈을 물기로 채웠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조각난 사진기를 들고 눈물을 흘리던 사진사가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벌떡 일어나는데, 그 앞을 이리나의 운전기사가 막아서자 사진사는 소시민적 근성으로 한발짝 물러나 흘겨보기만 했다.
“너,” 이리나가 말했다. “내 사진을 함부로 찍었으니 그런 거니까, 불만 가지지 마. 잘못은 네가 먼저 했으니까. 김 실장, 처리 해.”
김 실장이라 불린 남자가 품 안으로 손을 넣자, 미국영화에서처럼 총을 꺼내는 것은 아닐 지라도 최소한 흉기를 꺼내려는 줄 안 사진사가 뒤로 물러섰다.
김 실장이 꺼낸 것은 지갑이었다. 지갑에서 현금뭉치를 꺼낸 김 실장이 사진사에게 다가가 돈 뭉치로 뺨을 살짝 두들겼다.
“미안,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마 그 카메라 두 개는 살 수 있을 거야. 너무 화 내지 말라고.”
김 실장이 사진사를 두고 리나를 향했다. 그녀는 성큼성큼 성일에게 다가가 말했다. “월영… 님…?!”
“네?”
“…맞으시죠?
“…네? 누구세요?”
그 말을 들은 리나가 성일에게 와락 안겼고, 이 모습을 본 수지와 나현이 놀라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선 사이 리나가 엄청난 짓을 했다.
리나가 성일을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꼭 안았다. 노출이 심한 코스튬 안에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아 가슴의 풍만함이 그대로 성일의 얼굴을 덮쳤다. 당황한 성일이 떨어지려 하는 와중에 리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월영 니이이이임!!! 여러분! 저와 월영님의 약혼 축화 모임에 와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뭐라고—
모임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당사자인 성일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떼어내며 항변하려는 성일에게 어느 새 수지가 다가와 있었다. 화가 난 수지에게 성일이 말했다. “수지야, 내 말 좀 들어 봐! 나도 지금 처음 듣는 말—!”
호쾌한 풀스윙으로 수지가 따귀를 날렸다.
“너!” 이리나가 성일을 내던지며 수지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우리 월영님에게 무슨 짓이야! 김 실장!”
귀찮은 표정을 짓는 김 실장이 느릿하게 다가오는 사이 수지는 울면서 사라졌다. 나현이 바닥에 쓰러진 성일에게 다가왔다.
“성일 씨, 실망이에요.”
“잠깐만요. 나현 씨, 오해─”
나현도 호쾌한 풀스윙으로 따귀를 날리고 수지에게 향했다. 두 뺨을 부여잡고 일어난 성일이 말했다. “수지야! 기다려, 수지야!” 성일은 수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리나가 성일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설명 좀 해줘—!”
성일의 외침에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 *
불경기로 회사를 타의로 그만 둔 중년들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 치킨호프집을 시작하고는 한다. 한강 변 치킨호프집 <조아닭 호프>의 사장도 전직 대기업 중역 출신이라 눈치하나는 천하일품이었고, 노천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가게 안에서 터져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자 이를 헤아리고 치킨과 맥주를 내려놓으며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오랜만의 단체손님이라 역시나 이를 헤아리고 주의를 주거나 하지 않았다.
가게 안에서는 뒤풀이가 한창이었다. 코스프레 촬영회 모임에 참석했다 남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었는데, 테이블 맨 끝에서는 술자리 게임으로 시작한 왕 게임에서 지목된 사람이 완벽한 성대모사로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일본어 대사를 소화해 함성이 터졌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진지하게 코스프레의 의의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갔고, 나머지 한쪽 끝에는 다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와중에 혼자서만 여전히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이리나가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며 몸을 빼려는 라성일의 팔에 매달려 행복해하고 있었다.
“저기, 잠시만 실례할게요.” 성일이 전화기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리나가 그의 팔에 매달려 얼굴을 부비며 못 가게 막자, 하는 수 없이 성일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속에서 수화음이 울리는 것을 들으며 잠시 멍하니 상황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성일의 지친 뇌는 이 이상한 상황을 정리하지 못했고, 자신이 전화를 거는 상황을 리나가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는 지도 눈치 채지 못했다.
치킨호프집에서 발신되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가 기지탑과 송전탑을 통해 전달되고 전달되어 어느 방에 놓인 핸드폰으로 연결되었다. 핸드폰은 “우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웅.” 하고 몸을 떨어, 주인에게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방의 주인이 과도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아 방 안은 사람이 사는 집 보다 모델하우스 같은 인공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일일이 깔끔한 글자로 적은 라벨을 써 붙인 작은 서랍장이 잔뜩 모인 수납장이 방안 곳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너저분하질 만한 것은 미리 수납해버리는 모양이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 같은방 분위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낡은 트레이닝 복을 입은 수지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둘둘 말아 안고 있었다. 침대 한쪽 구석에는 코스프레 촬영회에서 입었던 고스로리 드레스가 놓여있었다. 핸드폰을 들어올려 '바보라성일' 이라는 발신자 성명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지 않고 침대 위로 툭 던져버린 뒤, 부끄러운 듯 몸을 비틀었다.
한편—
수지의 한탄이 멀리 떨어진 한강변 치킨호프집 <조아닭 호프>에 있는 라성일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어리둥절해 하며 전화를 끊은 성일이 중얼거렸다.
“안 받네…. 수지 화 많이 났나….”
성일이 전화기를 내려놓자, 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여러분!” 리나는 이 분위기를 이용해 월영—성일을 완전히 넉다운 시킬 생각이었다. “오늘은 기쁜 날이에요. 그러니 오늘 이 가게 모든 계산은 제가 하겠어요! 여러분 마음껏 드세요!”
“와아!”
함성이 터지는 가운데 리나가 마치 권투 경기 중 상대가 도망 못 가게 하려고 클린치를 하는 복서처럼 성일에게 안기듯 팔짱 꼈다. 성일이 화를 내며 나가버리는 것을 막��려는 것인데, 정작 성일은 놀라 도망갈 생각조차 못했다.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은 리나는 클���치 상태에서 등 아래의 신장 부위를 치는 반칙기술인 키드니 블로와 같은 결정타를 먹였다.
“여기 계신 월영님께서,” 리나가 말했다. “곧 프로 디자이너로 데뷔 하시게 될 거예요. 데뷔 패션쇼 날, 여러분을 모두 초대하겠습니다!”
함성.
“네?!” 라성일이 말했다. “잠깐만요?!! 프로 디자이너?! 갑자기 무슨—”
“와아아아아아!”
“엣헴,” 헛기침을 해 좌중을 조용히 시킨 리나가 그로기 상태가 되어 비틀거리는 성일에게 키드니 블로보다 더 비겁한 기술인 래빗 펀치—뒤통수 가격과도 같은 마지막 한 방을 찔러 넣었다.
“저와 월영님의 ‘약혼’도 알려드립니다!
“네?!” 제대로 한방 먹은 성일이 항변하려 했지만 이미 심판의 카운트는 10을 알렸다.
“축하드려요, 월영 님!”
더더욱 크게 터지는 함성에 항변하는 성일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축하 인사를 하느라 제 스스로 흥이 나서 건배를 하고 왁자지껄 맥주를 들이켜 대느라 바쁜 나머지, 그 틈을 타 뒤에서 몰래 성일의 술잔을 꺼내 약을 타는 김 실장을 아무도 눈치 못 챘다. 리나가 김 실장이 건넨 술잔을 받아 들었을 때 성일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진실을 알리려 했다. 리나가 억지로 성일에게 술을 먹이며 외쳤다.
“자, 여러분! 제 ‘피앙세’가 다 같이 한잔 하자네요! 건배!”
“잠시만요!” 성일이 저항하려 했지만, 뒤에서 몰래 붙잡은 김 실장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약이 든 술을 억지로 삼켰다. “우읍!” 목울대를 울리며 술을 마신 성일이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더니 풀린 눈으로 비틀거리다 바로 옆에 앉은 리나의 어깨 위로 고개를 대고 쓰러졌다. 어깨 위의 성일을 내려다보며 이리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김실장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굳이 이 남자 방으로 데려갈 필요가 있나요? 그냥 아가씨 방에서 처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오늘 아버님이 오신다고 했어. 그건 안 돼. 그리고 자기 방에 외갓여자가 잠들어 있어야 충격이 더 크지 않겠어?”
김 실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 *
인공적이고 깔끔한 방 안, 수지는 침대 위를 여전히 뒹굴면서 부끄러움에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다.
수지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평소 덕질하던 성일이에게 설교를 늘어놓은 주제에 코스 하는 것을 들켜버렸어. 내 일코가 다 엉망이 되버렸어. 사진도 찍혔어. 성일이가 월영님이라니. 그런데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바람 피운거야? 그래서 나 몰래 그런 데 다녔던 거야? 나쁜 놈! 나쁜—또 다시 울리는 진동에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수지가 핸드폰을 붙잡았다. “성일인가…? 나현이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나현아….”
“너 지금 그럴 때가 아냐! 너 성일 씨 옆집 살지? 빨리 가봐! 아까 그 여자 있지? 그 여자가 뒤풀이에서 성일 씨랑 약혼을 선언했데! 그리고 사라졌다는 거야! 성일 씨랑! 같이 온 운전기사가 떠메고 가는 걸 봤데. 차도 없어지고─”
수지가 급히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다. 수지의 집은 단독주택을 단독 주택을 자취방 용 원룸으로 나눈 다세대 주택으로, 현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철문을 열면 바로 골목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골목길은 주황색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어 어두컴컴하고, 바닥의 보도블록은 아무렇게나 깔려있고 틈새로 잡초가 나 있는 오래된 서울의 구시가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성일아!” 수지가 바로 옆집 문을 두들겼다. 반응이 없다. “아직 안 왔나….” 수지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성일은 받지 않았다.
그 때 골목길 저편에서 남자가 다가왔다. “여기 근처라 들었는데….”
남자는 손에 꽃을 들고 걸어오며 두리번거렸다. 수지는 초조하게 전화를 거느라 남자의 존재를 눈치 못 채고 있었다. 남자는 위화감 없이 전화를 걸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고 두리번거리다, 그 여자가 윤수지 임을 알고 놀라 하마터면 꽃을 떨어뜨릴 뻔 했다.
“수지… 씨…?!” 다가가니 역시 수지다. “수지 씨!!!”
그제서야 춘규의 존재를 알아챈 수지가 고개를 돌렸으나, 수지의 회사와는 다른 옷차림에 놀란 춘규에게 관심을 보이기에는 다른 일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인지 시큰둥한 반응이다. 만일 성일이 일로 머리가 복잡하지 않았다면 바로 방으로 돌아가 완벽한 복장과 메이크업으로 ‘일코’하고 나타났을 수지가 지금은 자기 차림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성일이 걱정 뿐 이다.
“춘규 씨?!” 수지가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 그게.”
“죄송한데요,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
다시 핸드폰을 붙들고 전화를 하는 수지에게 무시당했다 느낀 춘규의 속에서 불만이 부글거렸다. 저렇게 정신없이 걱정하는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그 머저리 성일이라는 점도 화를 돋웠다. 왜 내가 아니고 그 놈이지? 왜? 왜? 왜! 손에 쥔 꽃다발이 부르르 떨리고 꽃잎이 한 잎 두 잎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말을 걸려는 춘규를 커다란 소리가 방해했다. 요란한 배기음을 내며 나타난 자동차는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덩치의 리무진이었다. 김 실장이 먼저 내려 뒷문을 열자, 정신을 잃은 성일을 안듯 부축하며 화려한 코스튬을 입은 리나가 나왔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이 만리장성만 쌓으면…” 리나가 말했다. “우린 영원히 함께야.”
음흉하게 웃는 리나 앞으로 수지가 달려들었고, 그 사이를 김 실장이 가로 막았다. “비켜요!” 수지가 말했다. “성일아! 괜찮아?! 비키라니까요!” 김 실장이 꼼짝도 하지 않자, 수지가 정강이를 걷어찼다. 김 실장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수지가 겁에 질려 정강이를 다시 한 번 걷어찼지만 김 실장은 여전히 미동도 않았고, 오히려 수지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춘규는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고 뒤로 물러나있었다.
“이거 놔! 성일아!” 수지가 말했다.
짝!
리나에게 뺨을 얻어맞은 수지가 순간 멍 해졌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하고 반사적으로 리나의 뺨을 갈겼다. 얻어맞아 얼얼해진 뺨을 쥔 리나가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아 본 사람처럼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서 김 실장을 쳐다봤다. 긴장한 수지가 대항할 준비를 하며 자세를 취했다. 김 실장은 뒷짐을 진 채로 딴 곳을 보기만 했다. 네들 일은 네들이 알아서 하라는 태도다.
“성일이 내놔!” 수지가 말했다.
“너, 감히 날 때렸어?” 리나가 말했다.
“웃겨, 먼저 선빵 때린 게 누군데!”
리나가 분해하며 손을 들어올리자, 수지가 먼저 잽싸게 한 방 더 올려붙였다. 휘청하는 리나가 도끼눈으로 수지를 노려보았다.
“두 대나 때렸어?! 아버님께도 손찌검 받아본 적 없는 나한테?!”
“허이구, 대단한 분 납셨네. 맞지도 않고 어른이 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네가 무슨 어디 파마머리 뉴타입 중학생이야?”
이 말을 들은 김 실장이 멀리서 고개를 끄덕였다.
“뉴타입?” 리나가 말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이 천박한 년이?”
“성일이나 내려 놔!”
“너, 월영님과 무슨 관계야? 말해!
“너야말로 무슨 관계야?!”
“난 월영님의 피앙세야!”
“뭐?”
“무식해서 못 알아듣나 본데, 약혼자라는─”
“나도 알아! 내가 묻고 싶은 건 왜 네가 성일이 약혼자냐 이 말이야? 내가 여자친구인데!”
이 말을 들은 춘규가 멀리서 어깨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저런 놈이 어디가 좋다는 거야….”
“뭐?” 리나가 말했다. “감히 네가 월영 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 주제를 좀 아시지 그래? 이 분은 너 같은 벌레가 가까이 하실 분이 아니라고!
“벌레?! 너 오늘 이 언니가 예절교육 제대로 시켜줄 테니까, 고맙게 생각해라!”
수지가 리나의 뺨을 다시 후려치고 축 늘어진 라성일의 팔을 붙잡아 끌자, 충격에서 회복한 리나가 뒤늦게 성일의 다른 쪽 팔을 잡아 당겼다. 한 동안 이어진 줄다리기의 교착 상태를 리나가 끊었다. 리나가 뺨을 날린 것이다.
수지가 반격에 나섰다. 수지와 리나가 성일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면서 시소를 타듯 번갈아 서로의 뺨을 후려쳤다. 손바닥과 손등으로 왕복해 때리는 귀기어린 따귀 대결이었다.
먼저 항복한 이는 경험이 부족한 리나였다. 제대로 얻어맞아 휘청거리는 리나가 갑자기 어설픈 발차기를 날렸고, 수지가 반격으로 축이 되는 다리를 걷어차 쓰러뜨렸다. 이때를 노리고 수지가 성일을 빼앗아 주머니를 뒤지며 도망쳤다. 이리나가 발끈해서 악을 썼다.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월영님이랑 난,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야!”
이 말에 움찔하고 놀란 수지가 성일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문 안으로 성일을 던져놓고 문을 잠갔다. 어깨를 붙잡혀 고개를 돌리니 리나가 뺨을 때리려 하고 있었다. 리나의 손목을 붙잡아 방어한 수지가 그대로 비틀어 올려 팔을 꺾었다.
꺅, 비명을 지르며 제압당한 리나와 수지의 눈이 마주치며 불꽃이 튀겼다. “꺼져!” 라고 말한 수지가 리나를 떠밀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길에는 리나와 김 실장, 그리고 춘규가 남았다. 춘규는 꽃을 바닥에 내던지고 고개를 숙이고 이를 갈았다. 바보같이 쳐다보고만 있던 자신에게까지 화가 났다.
“젠장…!” 춘규가 말했다. “젠장! 젠자아아앙!”
“저기.” 리나가 춘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가만보니, 나랑 이해관계가 맞을 것 같은데, 맞죠?”
춘규가 어리둥절하게 리나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다, 무언가 깨달은 듯 같이 미소 지었다. 이윽고 악당처럼 크게 웃는 두 사람 뒤에서 김 실장이 한심해 하고 있었다.
* * * * *.
현관 앞에 널브러진 채로 자고 있는 성일을 깨운 것은 쾅쾅쾅, 하고 거칠게 울리는 철로 된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였다.
“윽?! 아…머리야….”
입가의 침을 훔치며 일어난 성일이 문을 열자 아직 은은한 아침 햇살이 눈을 찔러 태양빛에 괴로워하는 뱀파이어가 된 기분이었다. 빛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자 문 앞에 숙취해소음료 여명808 한 캔과 쪽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가 죽어, 멍청아. 아니, 월영님. (─_ ─+) from. 아무 관계없는 타인이.’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성일이 주변을 둘러 보았다.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기억이 안나…. 아! 그 여자! 디자이너가 어쩌고, 패션쇼가 어쩌고, 약혼자가 어쩌고 했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 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을 너무 마셔서 취했나. 없어진 물건은 없나… 잠깐?! 내 카메라! 어디 갔지?! 성일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피규어와 만화책, 소설책 등으로 가득해 지저분하고 정리가 덜 되된 방 안으로 들어간 성일이 카메라를 찾아 샅샅이 뒤졌다. 카메라는 없었다.
다음 날 월요일, 사무실 안에는 이상한 공기가 저녁까지 흘렀다. 냉랭한 수지에게 말도 못 건네고 춘규에게 계속 잔소리를 들은 성일은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얼굴로 일을 하고 있는 수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수지 씨?”
어느새 옆에 다가온 춘규가 성일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면서 옆으로 밀어냈다. 성일이 당황한 사이, 춘규가 말을 이었다. “오늘 괜찮은 뮤지컬 티켓을 구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두 사람을 모두 무시하려 했으나 집요하게 말을 거는 춘규에게 수지가 얌전히 대답했다. “저기, 제가 오늘 좀─”
“사진을 봤는데,” 춘규가 말을 자르며 음흉하게 말했다. “잘 어울리시더라고요? 그 프릴 많이 달린 스커트. 뭐라고 하죠? 고스로리?”
“!”
성일과 수지가 모두 놀라 숨을 집어삼켰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지에게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트라넷에 올려서 다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갈게요.”
차가운 얼굴로 수지가 대답했다. 수지를 내려다보는 춘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있다 퇴근하고 뵙죠. 아, 성일아. 점심 먹으러 같이 안 갈래? 너 카메라 말이야. 그거 어디 있는 지, 내가 알거든.”
“뭐라고?! 그걸 네가 왜?”
“아니다, 너한테 연락 갈 걸? 잘 해봐라.”
춘규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리자, 당황한 성일이 수지에게 무언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수지가 차가운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어 입을 다물었다. 수지가 험악한 얼굴로 일어나 나가버렸고, 붙잡으려는 성일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에는 피앙세라고 이름이 표시되고 있었다.
“피앙세?” 성일이 ��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저예요,”  목소리를 듣고 누구지, 하고 고민하던 성일에게 전화 속 피앙세가 말했다. “월영님?”
월영님?
“오늘 시간 되세요? 카메라, 돌려드리고 싶은데.”
* * * * *
이리나가 경영하는 코스프레 패밀리 레스토랑 <코스코스 월드>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여자로 하나 같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고스로리 드레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하녀 복장인 메이드 복, 플레이보이 마스코트 복장인 토끼 귀에 레오타드를 입은 바니 걸, 그 외에도 각종 코스프레 복장을 한 직원들이 돌아다녔다. 하나같이 패티시를 자극하는 차림새였다.
리나 역시 바비 인형이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마녀 글린다나 입을 법한 부담스레 번쩍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풀코스 음식이 늘어서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성일은 매우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앉아있었는데, 그 옆으로 <스타워즈>의 레이아 공주가 금색 비키니를 입고 있는 모습을 코스프레한 직원이 음식을 놓아주고는 인사 하며 물러섰다. 그 사이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리나가 핸드폰을 치우며 말했다.
“실례했어요. 급하게 연락할 데가 있어서요. 그나저나 월영님! 마음에 드세요? 이 가게는 제 오랜 꿈이에요. 저희 그룹에서 전 미운오리새끼였죠. 그런데 월영님을 알게 되고나서 전 다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님께 졸라 코스프레 쇼핑몰이랑 코스프레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를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물론 월영님과 함께!”
자신을 자꾸 월영, 월영하고 부르는 리나에게 성일은 점점 화가 났다.
“저기, 제 이름은 월영이 아니라 라성일이에요. 그건 그냥 닉네임─”
“아니요. 월영님은 월영님이세요. 라성일이라는 이름은 그저 세상을 속이는 가명에 불과해요! 월영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코스프레는 환생이라고. 월영님은 라성일에서 월영으로 다시 태어나신 거예요!”
성일이 테이블을 쾅! 때리며 벌떡 일어섰다. “그만 하세요!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뭡니까! 마음대로 프로 데뷔를 하네, 피앙세가 어쩌네! 곤란합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갑자기 리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세요?!” 성일이 물었다.
뚝, 울음을 그친 이리나가 말했다. “격렬한 감정을 들때 바로 내뱉으면, 언제나 이성을 유지할 수 있죠”
‘무슨 지거리야?!’ 라성일이 생각했다.
“월영님이 아무리 아니라고 하셔도 전 진실을 알아요. 월영님은 저와 함께 하셔야만 해요. 그게 월영님이 원하시는 것이니까요.”
“제 카메라나 돌려주세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말 그런 회사에서 평생 사실 생각이세요? 40살 겨우 넘기고 쫒겨 나서 닭이나 튀기시게요? 왜 재능이 있는 데 그걸 사용하려 하지 않으시는 거죠?”
“당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닐 텐데요?!”
“신경 쓰여요! 피앙세니까!”
“그러니까! 누가 피앙세에요! 저에겐─”
“그 천박한 여자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지금쯤 다른 남자 품에 있겠죠,” 라고 말하며 리나가 테이블 아래에서 핸드폰을 조작해 메시지를 보냈다. “못 믿으시겠으면 한번 전화해 보세요. 아마 다른 남자가 받을 걸요?”
“!…….”
핸드폰을 꺼내 든 성일이 전화를 걸었다. 잠시 기다리다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성일이냐?” 춘규였다. “지금 수지 씨 샤워하는 중인데? 뭐라고 전해줄까?”
물소리가 들렸고 성일이 전화를 끊었다. 망연자실해 핸드폰을 든 손을 축 늘어뜨렸다.
“제 말이 맞죠?” 이리나가 말했다. “그런 여자는 잊으세요. 그리고 이 코스프레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의 전속 프로 디자이너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게 월영님의 꿈이잖아요? 디자이너! 그것 때문에 코스튬 만들고 사진 찍으시던 것, 아니었나요?”
복잡한 표정으로 성일이 몸을 떨었다.
“참, 카메라 찾아 가셔야죠? 어머, 이걸 어쩌죠? 집에 놓고 온 것 같은데. 찾으러 가실래요? 어차피 오늘 약속도 없으시잖아요.”
성일이 고민하다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리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 *
이미 공연이 시작된 뮤지컬 상연 극장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뒤늦게 들어온 사람과 안내하는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수지와 춘규 뿐 이다. 무언가를 찾는 수지가 필사적이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춘규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아직도 못 찾았어요, 핸드폰?”
씨익, 웃으며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춘규가 멀리서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는 김 실장에게 윙크를 했다. 김 실장이 기분 나쁘다는 듯 바닥에 침을 뱉으려다 말았다.
* * * * *
리나의 방은 성일의 방과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한 분위기였지만, 크기가 몇 배나 차이나고 훨씬 핑크색 농도가 짙은 소녀취향의 방인 점이 달랐다. 책꽂이에는 만화책이 잔뜩 있고, 피규어나 포스터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들어오세요. 마침 오늘은 집에 아무도 없거든요.” 이리나가 말했다. “제 컬렉션은 어떠세요? 맘에 드시나요?
“맘에 들고 말게 없을 것 같은데요. 취향이랄 게 안 보이는 게, 그냥 유행하는 것은 다 돈으로 사신 것 아닌가요?
발끈한 리나가 쏘아붙였다. “그게 어쨌다는 거죠?”
“아니 뭐 그냥……. 듣기로는 코스튬을 그냥 사신다고 들어서요.”
“그게 나쁜 가요? 모델들도 디자이너의 옷을 그냥 입기만 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둘은 다르죠. 코스프레는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모습을 따라하는 게 기본이니까요.”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것과 뭐가 다르죠?”
이 말에 불뚝 솟은 화를 억지로 참으면서 성일이 말했다. “…카메라나 돌려줘요.”
“그 여자, 어디가 좋은 거죠? 그 천박한 여자 말예요. 사진을 봤어요. 예쁘지도 않고, 코스를 할 의욕도 없어 보이더라고요.
“함부로 말하지 마요!”
“나, 이미 다 이야기 들었어요. 그 여자, 월영님을 매번 무시하고, 어른이 되라고 책망했다면서요? 그런 이해심 없는 여자가 뭐가 좋으세요? 게다가 지금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데.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저 뿐예요.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요?”
갑자기 리나가 옷을 벗었다. 드러나는 나신을 손으로 가린 리나가 고개를 옆으로 숙이고 목을 드러내는 필살 유혹 포즈로 성일을 올려보았다.
* * * * *
뮤지컬 극장의 수지가 벌인 수색은 성과가 없었다. 뮤지컬 상영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답답한 춘규가 말했다.
“극장 안에 있을 수 도 있잖아요. 일단 들어가죠? 기껏 비싸게 주고 산 티켓인데, 공연 거의 끝나가요. 어차피 그 놈한테는 연락 안 와요. 지금 쯤 딴 여자랑 밥 먹고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놀란 수지가 화난 눈으로 춘규를 노려보았고, 움찔한 춘규에게 쏘아 붙였다.
“당신이 한 짓이죠?”
춘규는 당황하면서도 능글맞은 표정을 유지한 채 대꾸했다. “무슨 말씀하시는 지?”
“내 핸드폰, 당신이 가지고 있죠! 내놔요!”
“도대체!” 춘규가 폭발하여 수지를 끌고 화장실로 갔다. “그 놈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일도 못하고, 어린애처럼 인형이나 모으는 그런 놈한테, 너 같은 여잔 안 어울려! 나 같은 진짜 남자가 어울린다고! 그런 애새끼가 아니라!”
끌려가던 수지가 춘규의 뺨을 갈긴다. 어리둥절해 하는 춘규의 뺨을 연달아 갈겼다. 멈추지 않았다. 춘규가 참지 못하고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수지가 말했다. “적어도 그 사람은 너처럼 비겁하지 않아!”
분노한 춘규가 수지의 뺨을 때린다. 화장실 바닥에 쓰러지는 수지가 화가 난 얼굴로 춘규를 올려본다.
“오냐오냐하니까, 건방지게! 너 회사에서 한번 우스운 꼴 당하고 싶어? 이대로 끌고 가서 어디 험한 꼴 좀 당해볼래?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디서 애들 보는 만화 옷이나 입는 게!”
춘규가 수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어 억지로 일으키고 안으려 들었다. 저항하는 수지에게 춘규가 다시 뺨을 때렸다. 수지가 저항하려 했지만 남자에게는 체력적으로 열세였다.
춘규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 * * * *
리나가 나신을 손으로 가린 채 마릴린 먼로도 울고 갈 정도로 유혹적인 걸음걸이로 성일에게 다가갔고, 뒷걸음질 치다 책꽂이가 가득한 벽 구석에 몰린 성일은 두 손을 얼굴을 가리고 부르르 떨었다.
“여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 부끄럽게 하실 건가요?” 이리나가 말했다. “선택하세요. 당신의 꿈을 위해 정말 '모든 걸' 지원해 줄 수 있는 저인지, 아니면 당신을 이해 못하고 경멸하던 위선자인 그 여자인지.”
“…”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월영인가요? 아니면 라성일인가요?”
“…내가 선택해야 하지?! 어느 쪽이든 나잖아! 내게 어느 쪽을 하라고 강요하지 마!” 성일의 고함에 놀란 리나가 움찔해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위한다고? 웃기지 마, 넌 그냥 유명한 월영이라는 '코스튬'이 필요할 뿐이야. 얼마든 다른 좋은 코스튬이 나타나면 갈아입겠지. 하지만 수지는, 수지는 자기가 아니라 '나'를 걱정해줬어! 내가 라성일이든 월영이든 상관없이, 내가 변하기를 바랐다고!”
“그게 자기가 부끄럽지 않으려고 한 것일 수 도 있잖아요! 당신 말대로 내가 이기적이라고 해도, 나랑 그 여자랑 다른 게 뭐가 있다고요!”
“적어도! 수지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는 않아!”
“!”
“자기 손으로 이루려고 하니까 꿈인 거야. 코스프레라고 다른 것 같아? '예쁜 옷'이라서 입고 싶은 게 아니야! 남의 옷을 입더라도 그 사람과 같은 꿈을 꾸니까 입는 거야! 비록 아무 것도 아닌 천조각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코스프레를 하는 거야!”
“그래봤자 코스프레잖아요!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중요한 건 입는 사람 아니에요? 이해해주는 사람 아니에요?”
“아무리 그게 좋은 길이라도, 억지로 강요하면 아무 의미 없어!”
문이 열리고 김 실장이 들어왔다. 당황한 성일이 무의식중에 파이팅 포즈를 취하자, 김 실장이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자.”
자신이 던진 차키와 핸드폰을 받아 든 성일이 어리둥절해 하자, 김 실장이 말했다. “여자친구, 집에 갔어. 빨리 가 봐. 차 빌려줄 테니까. 카메라도 차 안에 챙겨뒀어. 그 사나이 얼굴에 먹칠하는 찌질한 놈은 내가 처리했어. 흠씬 두들겨 패 줬으니까 아마 한 일주일은 누워 지내야 할 걸?”
“왜…?”
“나야 먹고 살려고 이러고 살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더라고. 이번 일은. 아가씨.” 김 실장이 수지에게 말했다. “이 친구 애인한테 핸드폰 훔치라고 시키더니, 아가씨는 그러고 있습니까? 이 정도로 어디 사람 마음 얻겠어요? 이 세상은 싸구려 드라마가 아닙니다.” 성일에게 고개를 돌린 김 실장이 말했다. “뭐해? 빨리 안가고?”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곧바로 달려 나가는 성일을 붙잡지 못한 리나가 고함을 질렀다.
“김 실장, 너 해고야!”
“그래? 그럼 나 더 이상 김실장이 아니라 김대리인 거네?”
김 실장의 본명은 김대리였다. 김대리—김 실장이 리나에게 다가갔다. 겁먹은 리나가 이불을 더욱 끌어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말했다.
“저, 저리가! 소리 지를 거야!”
김 실장이 말 없이 다가와 살짝 뺨을 때렸다.
“아버지에게도 맞은 적이 없다면서? 그러니까 이 꼴이지. 당장 옷 입지 못해!”
* * * * *
혼자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수지 앞으로 캐딜락 리무진이 나타났다. 창문이 열리더니 경계심을 보이는 수지를 향해 플래시가 터졌다.
“꺅!”
“다른 포즈 부탁드려도 될까요?”
차 문이 열리면서 성일이 목에 카메라를 걸고 내렸다.
“뭐야!”
“뮤지컬 재미있었어?”
“…그래! 재미있었다.”
“집에 안 들어가고 뭐해?”
수지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물쭈물해 하자, 성일이 핸드폰을 건넸다. 핸드폰에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이거 네가 왜 가지고 있어?”
“뭐 어때, 그런 거. 그것보다 수지야.”
“뭐?”
“미안해.”
“���가?”
“속이고 있었던 것도 미안하고, 마음 아프게 한 것도 미안하고, 괜한 비밀을 들춘 것 같아서 미안하고, 또—”
“됐어, 내가 더 잘못한 거니까.”
“네가 코스어였다니.”
“네가 월영님이었다니.”
서로 마주보는 두 사람, 동시에 피식하고 웃음 짓는다.
“이번 주말 토요일에, 출사나 나갈까? 내가 사진 찍어줄게.”
“네가 코스튬 만들어주면 생각해볼게. 나만의 코스튬으로. 아, 그 전에 먼저.”
“먼저?”
“내 사진부터 지워.”
“싫은데?”
둘은 같이 수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핑크색 캐딜락 리무진이 말없이 둘을 바라보았다.
토요일은 아직 한참 남아 시간은 있었다.
* * * * *
후일담을 조금 말하자면—
성일은 출근하자마자 춘규를 불러내 주먹으로 한 방 먹이고, 다시는 수지 근처에 다가오지 말라고 선언했다. 이 모습을 본 박귀자 씨가 사나이다워졌다며 칭찬하며 달디 단 커피를 건넸다. 뜨거운 커피를 원샷하는 성일의 모습을 보고 수지는 다시 한 번 성일에게 반했다.
그 이후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임하여 성과를 내는 성일의 변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온달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수지는 평강공주라 불렸다. 변한 비결을 묻자 성일은 웃기만 했는데, 수지에게는 “일도 코스프레랑 다를 바 없잖아. 회사에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유능한 회사원이 되는 거지,” 라고 대답했다.
한편 이리나는 외국의 디자인 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출발하기 위해 공항에 섰을 때 김 실장, 김대리 씨의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무뚝뚝하게 서 있는 김대리의 뺨에 뽀뽀를 하며 떠나는 이리나의 모습을 본 부모들은 잔뜩 화를 냈지만 김대리는 그저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매주 토요일이면 성일과 수지는 한강에서 코스프레 촬영회를 열었는데, 수지가 입은 옷은 대부분 성일이 만든 것이었다. 1년 뒤, 둘은 코스프레 용 코스츔을 만드는 법을 담은 책과 1년 간 찍은 사진집을 냈고, 출간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두 사람은 여전히 코스프레를 즐기고 있다. 자식들을 위한 코스튬을 만드느라 성일은 주말에도 즐겁게 밤을 새곤 한다.
<끝>
    초고완성일 : 2013년 6월 16일 AM 03:35
제1고 작업 : 2013년 6월 19일
분량 : 200 X 130매 = 23400자 (5700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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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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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미래를 위해 지금을 죽여라! 2014-06-16
S#1. 자취방 건물 공용 분리수거 쓰레기통 옆. 밖. 저녁
서울 시내에 있는 오피스텔 대부분이 금연구역으로 변해버려서 엘리베이터 안이며 벽이며 죄다 구청에서 발부한 흡연금지 안내 스티커가 붙어있는 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에서 내 마음 대로 담배도 피지 못하고 육층에서 일층까지 내려가 분리수거는 전혀 안 되어 있는 그물망 쓰레기통 앞에서 담배를 피워야 하는 내 처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가지고 내려가는 담뱃갑에 돛대와 가스 거의 날아간 일회용 술집광고용 라이터가 이번 달 내 즐거운 끽연 라이프의 마지막이라는 엄정한 사실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냥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행동을 일일이 의식하며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지긋지긋한 자의식과 이걸 어딘가에 고백하고 싶다는 또 다른 자의식을 비난하는 저 멀리의 오만한 자의식도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고 사람으로 탈바꿈시킬 수 만 있다면 당장 시켜서 광대뼈와 눈썹뼈와 안와가 함몰 될 때 까지 두들겨 패 주고 싶었다. 이런 연기를 시키는 나 자신과 저 하늘 위에 있는 신인지 운명인지 모를 연출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 같은 사디스트 같으니. 어떤 놈인지 몰라도 누가 그 연출가는 죽은 지 오래라고 했는데 왜 자꾸 내 인생에 겐세이를 놓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누구 들으라고 머릿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건지.
담배나 피자. 담배.
담배 빨고 싶어.
이러다 암 걸려 죽겠지.
닥쳐 이 새끼들아.
분리수거 하려고 가지고 내려온 책을 아래에 내려놓고 담뱃불을 붙였다. 따뜻한 담배연기가 목 안으로 들어오자 조금 잠잠해졌다. 분리수거 쓰레기통. 분리수거가 전혀 안 된 분리수거 쓰레기통. 종이. 플라스틱. 캔. 나머지 하나는 쓰레기가 가득차서 보이지도 않는다. 종이라고 쓰여 있는 그물망에 플라스틱이며 캔이며 종이며 아무 거나 잔뜩 들어가 있는 데 이걸 더 이상 분리수거 쓰레기통이라고 불러야 하나? 제대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데 그 역할로 이름을 붙인다면 이름을 붙인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럼 다르게 불러야 하나? 역할에 맞게? 애초에 이름이 그렇게 의미가 있나?
이름에 대해 누가 들어주지도 않는데 이렇게 길게길게길게 고민하는 이유는——내가 지금 누구한테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내 머릿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중얼거리는 이 언어를 바라보는 시간 남아도는 사람이겠지——옛날부터 나는 이게 이상했어. 무협 같은 데서 나오는 사람들이 입만 열면 오언절구로 이야기하는 거는 애초에 있지도 않은 강호라는 세계에 나오는 있지도 않은 인간들이니까 그렇다 치고——전에 사귀던 여자애가 문학소녀라서 나더러 감동적이라고 읽어보라고 소설을 주는 데——그 뭐냐 일인칭라고 하나? 주인공이 나는 하고 이야기하더란 말이지. 아니 누가 듣는 이야기인데? 누가 그렇게 길게 자기 머릿속 생각이랑 자기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일일이 중계 하냔 말이야. 우리는 평소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데. 그리고 그걸 누가 듣는 단 말이야? 머릿속에 무슨 통신채널이라도 달려 있어서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거야?——나는 지금 내 욕하고 있는 셈이구나——그리고 무슨 그렇게 어려운 말을 해? 저번에 읽어 보니까 분명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일인칭인데 하는 말인데 무슨 ‘암흑의 핵심과도 같은 깊은 절망 한 가운데에서 엄정한 운명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한 처연한 죄수가 된 나는 하염없이 시간의 윤택하고 고운 결의 준한 무언가를 쓰다듬기를 바라마지 않고 있었다.’ 같은 말을 하더란 말이지. 그건 작가가 자기 자랑하려고 그런 말 쓰는 거 아니야? 나 이렇게 말 잘 다루고 있어 보이는 단어 많이 외웠다고 말이야. 주인공이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 아니야 결국은. 복화술 인형이랑 이야기하는 거랑 뭐가 달라. 캐릭터 깨지 말라고. 조선 시대에 전화기 이야기하는 꼴이잖아. 그리고 아무리 현실을 그대로 옮긴다고 한다지만——솔직히 옮기고 있는 지도 의심스럽고——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 그리고 요새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데 누구나 공감하는 그런 현실이 어디 있어? 그럴 바엔 아예 모두한테 다 실제 세상이 아닌 강호 같은 데를 배경으로 삼으란 말이야. 최소한 모두가 같은 가짜 현실을 경험할 거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소설이니 영화니 다 가짜 현실인데. 우리가 사는 현실도 결국엔 가짜 현실 아닌가? 픽션. 다 픽션이지——너무 돌아 왔는데?
여하튼 내가 왜 이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냐면 나는 오늘 또 면접에서 떨어진 돈도 못 벌어서 제 역할도 못하는 내가 과연 사람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고민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실존적 고민이라. 내가 이런 말도 다 알다니. 누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서 뇌를 헤집어놓고 있나?
뭐 어때 어차피 좆된 머릿속인데.
왜 좆되었냐고?
내가 누구한테 질문을 던지고 있나.
느긋하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보며 한참동안이나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담뱃불을 벽에 붙은 ‘실내흡연금지’ 종이 위에 비벼 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무데나 던져도 상관은 없지. 어차피 분리수거도 안 되어있는데 말이야. 하나라도 분리수거가 안 되어있으면 분리수거는 실패한 거라고. 쓰레기를 어지르는 방법은 무한하지만 분리수거 하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지. 세상 일이 다 그래. 의미 없이 뒤섞인 게 대부분이고. 이 쓰레기통처럼.
그리고 내 인생도.
일인칭 소설 보면 가끔 주인공이 자기 옷차림을 자기가 일일이 열거하며 보고하거나 아니면 거울을 보면서 자기가 자기 얼굴이며 옷을 마치 처음 보는 양 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안 이상한가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해. 나는 와이셔츠에 앞주머니에는 담뱃갑이 들어있고 수수한 넥타이를 맸는데 그 아래로는 바지 대신 사각팬티와 정장양말 뿐이었고 신발은 삼선 슬리퍼차림에 바로 옆에는 몇 년 간 나를 괴롭혔던 문제집과 쓰레기를 담은 쇼핑백이 놓여있다고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고 어색하지 않느냔 말이야. 게다가 이런 이상한 차림으로 서 있는 것 자체가. 이유를 설명하며 변명하면 더 이상하겠지. 그래. 나는 사실 오늘 면접이 엉망이었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바지를 벗다가 바지까지 찢어져서 빡이 너무 쳐버린 거야 그래서 책상 위에 있는 취업용 책을 죄다 쓸어 담고 담배 좀 피려 했더니 방 안에서는 못 피우니까 버리는 김에 가지고 내려왔지. 바로 올라갈 거니까 그냥 팬티바람이고. 뭐 어때. 어차피 내 인생 망했는데.
쇼핑백에서 문제집을 하나 꺼내보니 너덜너덜한 표지가 떨어지려고 하는 토익 R/C 문제집에 양윤수라고 내 이름이 매직으로 써 있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내가 썼는데 이걸 굳이 의식하는 이유가 뭐야? 뻔히 알지만 이리저리 펴보니 줄 치고 단어 모르는 거 뜻 적어놓은 흔적이 빼곡하고 군데군데 합격! 나는 할 수 있다! 900점을 향해! 대기업아 기다려라! 같은 낙서가 잔뜩. 공부는 안하고 이런 걸 쓰니까 안 되지.
뒤적뒤적 하는 사이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욕이 입에서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씨발.
——좃또.
——씨발.
——좃또.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아오!
(씨발 좆같은) 문제집을 (씨발) 던져버렸다. (좆같은) 쓰레기가 안 그래도 (좆나) 개판인데 더 개판 된다. (개씨발) 토익! (좆또) 면접! (니좆) 자소서! (개새끼) 인적성! 이게 씨발 온라인 게임이지! 숫자 맞춰서 캐릭터 찍는 거랑 뭐가 달라! 넥타이도 뭐 하러 매는 거야 솔직히 하등 쓸모도 없고 밥 먹을 때 거추장스럽기나 하고 비싸게 사서 매는 이유가 뭐야? (씨발) 의미도 없는 분리수거에 문제집에 넥타이에 이럴 거면 왜 있는 거야? (씨발)
목에 거치적거리는 넥타이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려고 하는 데 허공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는 넥타이가 목 매달 때 쓰는 올가미 같이 보였���. 그렇구나. 그래서 이걸 매는 거구나. 우린 다 죽은 목숨이고 죽은 것처럼 살라 이거구나. 교수형으로 목을 매든 자살하려고 목을 매든 어차피 우리는 죽은 거니까 욕심 갖지 말고 의미 없이 살라 이 말이구나. 그거구나. 침착하게 목을 맨다 이거지. 그래 알았어. 나도 그래야지.
침착하게 목을 맨다.
    S#2. 이태원 거리. 밖. 저녁
거리에 가득한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과 한국인이 뒤섞여 거리를 걷고 있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체험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추출된 일부 요소만을 체험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들을 속이기 위해 제공하는 일부 요소만을 진짜 한국이라고 믿고 돌아가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왜냐면 우리들도 한국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뿐 아니라 어느 일이든 어느 곳이든 세상 모든 건 다 복잡하고 뒤엉켜있어서 우리가 보는 건 한 면 뿐 이다. 처음 군대에 갔을 때 놀랐던 것이 대학을 안 다니는 애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몇 학번이냐고 물었을 때 후임은 학번 없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때 나를 쳐다보는 눈이 얼마나 열 받은 눈이었던지. 나와 다른 삶과 다른 풍경에서 살아온 사람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같은 텔레비전을 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도 그렇게 많다. 결국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통하게 하려면 현실이 아니라 영화나 텔레비전 예능방송 프로그램이나 아이돌 가수 노래를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진짜 의미에 서로가 생활을 공유하고 있는 장소와 문화를 통칭해서 이르는 한국이겠지. 그러면 저 외국인들이 바라보고 있는 한국도 한국인 거고. 그리고 이 뒷골목에서 한국의 유흥을 즐기고 한국 남자나 여자와 노는 사람들도. 어차피 자기들은 한국을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외국인이라서 일정 선의 한계가 있어서 한국이 아무리 솔직하고 적나라할 지라도 결국은 외국인이 보는 한국일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를 테다. 반대로 우리가 한국인이라서 보는 한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한국인인 이상 한국인 밖에 보이지 않는 거고. 어려운 말로 하자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중 제2정리라 이거야. 어떠한 계 내부에는 그 계 내부의 공리만으로 참/거짓을 증명 할 수 없는 명제 G가 언제나 존재한다 이거지. 아니면 하이델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 원리대로 위치를 결정하면 방향이 방향을 결정하면 위치가 불확실해진다는 거야. 아니면 칸트가 말한 인식의 한계 너머에 있는 물자체 영어로는 thing-in-itself 독일어로는 Ding-an-sich가 존재한다 이거지. 그 자체로 자족적인 거. 아 프리오리한 거. 스스로 그러한 거. 쯔르안. 자연.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거.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런 거.
내가 이런 거 모를 줄 알았나? 이거 왜 이래. 서울 소재 대학 나온 사람이라고 그래도. 내가 누구랑 이런 이야기 하나. 아마 내 자의식과 이야기하는 거겠지. 나라는 사람도 결국엔 쪼개고 보면 여러 조각이고 그 조각은 전체를 못 볼 테니까. 이런 거 아는 나의 부분을 모르는 또 다른 나의 부분이 있을 수 도 있지 뭐. 여하튼 간에 외국인이 보는 한국과 내국인이 보는 한국. 대학생이 보는 한국과 일용직이 보는 한국. 이건 다 다르다 이거지. 자영업자가 보는 한국과 대기업 사원이 보는 한국. 그리고 나 같은 취준생 백수가 보는 한국도.
그럼 우리는 평생 모르고 살아야 하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 아닌가? 세상에 그런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 뿐 인 거 아니겠어? 개나 고양이나 인간이나 다 이름이지. 세상에 실존하는 포유류가 어디 있어. 내 말은 포유류에 속하는 우리 집 개 뽀삐나 옆집 만화방 회돌이 말고, 포유류라는 존재가 현실에 떡 있느냐 말이야. 없잖아. 마찬가지 아니겠어? 한국인이라고 떡 하니 있는 게 어디 있어. 그거에 속하는 수없이 많은 것들의 공통점을 모은 최대공약수인데. 그러니 이름에 의미가 있느냐 이 말이야.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분리수거가 안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게 더 이상 분리수거 쓰레기통이라는 이름이 아니게 되는 게 아니듯 말이야. 이 사회에서는 돈을 버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거나 분리수거 안 된 분리수거 쓰레기통이나 똑같은 거 아니겠어? 분리수거 안 된 분리수거 쓰레기통이 더 이상 분리수거 쓰레기통이 아니라면 사회에서 돈을 못 벌고 공헌을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 거잖아? 그럼 뭐야? 쓰레기? 분리수거 안 된? 이 문제는 나로서는 해결하지 못할 명제 G나 다름없는 것 같아.
    S#3. 이태원 컨테이너 박스 노점상 앞. 밖. 저녁
물건을 지긋이 바라보는 양윤수. 노점상에 진열된 상품들—잭나이프, 버터플라이나이프, 휴대용 손도끼, 맥가이버 칼……. 상품을 이리저리 만져보는 양윤수의 손. 그의 손은 고생을 하지 않은 티가 나는 하얗고 부드러워 보인다. 잭나이프 하나를 집어 들고 버튼을 누른다. 튀어나오는 날. 거꾸로 쥐어들었다가, 바로 쥐어들었다가 하며, 마치 킬러가 목표를 공격하듯 양윤수가 칼을 작게 허공에 휘두른다.
    ——까지가 지금까지 내가 연기한 시나리오인데 말이지. 사실 난 진짜 나이프가 좋아. 쥐고 있으면 힘이 솟는 달까. 하나 가지고 싶어. 이태원 나오면 항상 무기를 구경하지. 아니면 휴게소 노점상. 이상하게 외국인 대상으로 이런 거 팔더라. 꼭 외국인들 사라고 하는 건 아니긴 한데 말이지. 아무래도 외국에서는 자기 몸 지키기 위해 이런 무기 들고 다니는 게 기본적인 전통 같은 건가? 아니, 애초에 여기서 말하는 외국은 어디람? 여하튼 나이프로 사람 죽이는 장면을 좋아해. 스티븐 시걸 영화에도 보면 자주 나오는데 스티븐 시걸이 아이키도 7단인데다가 칼리라고 필리핀 무술도 달인이거든. 단봉이나 나이프 쓰는 기술도 있는 무술인데 언더시즈 2 보면 마지막 결투에서 나이프 들고 사사사사사삭 하고 손을 막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슉 하고 손목 긋고 그러더라고. 그리고 얼마 전에 영화를 봤는데 제목이 레이드였는데 인도네시아 영화였고 주인공이 경찰이라 마약소굴인 커다란 빌딩을 혼자서 들어가서 다 제압 소탕하는 액션영화였는데 인도네시아 무술 푼착 실랏트인가가 나오는 영화인데 막 다 때려죽이고 이상한 나이프로 사삭삭 죽이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나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그런지 무술이 비슷한 가봐.
여하튼 나이프 하나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 이걸 사면 모든 게 다 바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는 하는 데 살 수가 없단 말이지. 지금 이 순간 돈이 없어서 미래를 사지 못하는 기분. 노점상 주인이 내가 살 마음은 있는 데 돈이 없는 건 알아챘는지 인상을 막 구기는 거야. 그리고는 불퉁스럽게 뭐 찾느냐고 묻더라고. 아 씨발 열 받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아! 그냥……, 저기, 구경, 하려고요.”
하고 칼을 얌전히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어. 어쩌겠어? 돈 없는데. 재수 없다 이건지 노점상 주인이 바닥에 탁 침을 뱉더라고. 아니 손때 타는 것도 아닌데 너무 하네 진짜.
그런데 누가 날 밀치고 들어오더라고. 뭐야 씨발하고 봤는데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겨가지고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나이프에 흥분해서 물건 고르는 거야. 딱 봐도 돈 많게 생겼더라고. 그래서 노점상 주인도 손님 대접을 해 주데? 빡쳐서 뒤에서 그냥 보고 있는데, 내가 사려고 했던 나이프를 사더라고. 버튼 누르면 날이 착 하고 나오는 데 남자 손바닥 두 개 만큼 큰 거야. 만 원짜리 두 장을 주고 거스름돈을 받더라고. 그거면 내가 두 끼 식사 할 돈인데.
나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나를 툭 치고 지나가는 데 와 진짜 빡치더라고. 나더러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안 살 거면 비키지, 씨발. 존나 걸리적거리네.”
뭐 이 새끼야?
저 새끼손에는 돈이 있고 칼이 있는데 내 손에는 아무 것도 없어. 그냥 빈손이야. 공수래공수거 같은 소리는 듣기도 싫어. 그건 그 중간에 뭐라도 쥐고 있던 사람이 하는 말이지. 내 이 빈손. 쥐었다 폈다 해 본다. 코난 더 바바리안에 나왔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코난이 죽음에서 부활하고 이렇게 손 쥐었다 폈다 하더니 아틀란티스의 검으로 품세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준비하는 장면. 에반게리온에서 신지가 똑같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을 때는 동네 꼬마들이 비웃었지만. 결국 우리는 본 영화 본 만화 본 방송 말고는 생각이 안 되는가보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닌가? 생각은 기억가지고 하는 건데? 무슨 기억에서 벗어난 아프리오리한 생각 같은 게 어디 있어? 자기가 경험한 쬐끄만 인생 쬐끄만 울타리 쬐끄만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까불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이 카피 덩어리네 대중문화에 조종당하네 그러는 인간이 있는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다 그런 거야. 이 세상은 이미 너무 커지고 복잡해져서 그런 거라고. 자기만 아닌 줄 아는 거지. 오에스가 다 다른데 자기 오에스가 최고인 줄 알고 자기 어플 깔라고 하는 격이지. 저 놈도 마찬가지야. 지가 최고인거지. 돈이 있다 이거지. 힘이 있다 이거지. 어차피 우리 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내내 저 건방진 놈이 짜증났다.
나는 저 놈의 뒤를 쫓았다.
저 놈이 들고 있는 아틀란티스의 검을 빼앗기 위해.
    S#4. 이태원 뒷골목. 밖. 저녁
양윤수의 뒷모습, 어깨너머로 김태민이 보인다. 양윤수의 뒷모습에서 천천히 내려가자, 손에 벽돌을 쥐고 있다. 김태민이 걸음을 멈추고 나이프를 꺼낸다. 놀라서 구석에 몸을 숨기는 양윤수. 김태민을 확인하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있다.
    ——가 현재 상황이다. 양윤수는 나고 김태민이 저 인간인가보다. 내가 저 인간 이름을 알 리는 없지만 왜 아는 거지? 그리고 나는 왜 저놈 뒤통수를 왜 때리려는 거야? 왜? 아? 저 놈의 뒤통수를 때려 나를 무시한 벌을 내려주려고 했었는데 손에 쥔 벽돌 보다 나이프가 훨씬 강력한데다가 저 놈이 나보다 덩치도 크니까 외려 내가 당하게 생겼다 이건가?
오케이. 할 수 없지 뭐.
불만 없이 하란 말이야. 어차피 넌 노예야. 노예.
닥쳐. 씨발.
나는 무서워서 무사히 넘어갈 수 만 있다면 오줌이며 똥이며 지려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나이 먹고 지리면 진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로 가서 뭘 해결해야 하나. 한번 그런 적이 있는데 배가 아파가지고 분명 싼다 생각해서 편의점에 들러서 화장실 좀 빌려 달라 부탁해봤는데 없다 그러고 건물 화장실도 가보고 했는데 문이 잠겨서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래서 결국 어디 공원 구석 가로등 아래 풀숲에 숨어서 바지에 지리고 만 적이 있어. 똥을. 양도 엄청나고 점성도 강한. 젠장. 구석에서 바지를 벗어다가 신문지 주어서 닦고 그랬어. 하필 그 날은 비도 왔지. 그래서 나는 겨우 택시를 잡고 집에 가서 나이 처먹고 이게 뭐냐고 자학을 했었지.
이야기를 돌리자고. 솔직히 내가 이야기하는 거 보다 영화처럼 보여주는 편이 낫겠지. 말하기보다 보여주기가 중요하다고 하잖아——
    김태민이 몸을 돌리고 양윤수에게 다가간다. 기척으로 이를 알아차리는 양윤수. 김태민의 손에 나이프가 빛난다. 겁을 먹고 떠는 양윤수. 손에 쥔 벽돌을 내려다본다. 김태민이 점점 더 가까워온다. 벽돌을 내던지고 도망치려는 양윤수를 가로막는 타임패트롤의 뒷모습. 놀라서 고개를 드는 양윤수에게 타임패트롤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고 신호한다. 그는 검은 양복 차림에 밤인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특수요원이나 보디가드 같다.
    ——타임패트롤?
잠깐만. 타임패트롤은 또 뭐야? 타임패트롤? 언제부터 장르가 갑자기 SF가 된 거야? (잠깐. 공상과학영화 같은 소리 하면 죽여 버린다? 공상과학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사이언스 픽션 앤드 판타지라는 잡지를 잘못 번역해서 생긴 말이거든?)
타임패트롤은 빠르고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어. “이름 양윤수. 1983년 출생. 본적지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14-16번지. 주민등록번호 830406-1456897. 맞습니까?”
내가 여기다 대고 뭐라고 하겠어? 그냥 당황해서 멍하니 네? 하고 대답할 뿐이지. 그런데 이 타임패트롤인지 뭔지 하는 개새끼가 역시나 기계적이고 프로다운 감정이라고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동작으로 내 뺨을 패더니, 멱살을 틀어잡더라도. 역시나 기계적이고 무감정하게. 열 받아서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어서 말이지. 입에서는 왜, 왜 이러세요? 하는 말 말고는 안 나오더라고. 생각해봐. 검은 양복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그것도 밤에 쓰고도 정확하게 내 뺨을 때리고 멱살을 잡는 데 안 무섭겠냐고.
타임패트롤은 다시 한 번 빠르고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어. “대답하십시오. 이름 양윤수. 1983년 출생. 본적지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14-16번지. 주민등록번호 830406-1456897. 맞습니까?”
맞다고 얼른 대답하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어. 뒤에는 나 죽이겠다고 칼 들고 오는 인간이 있는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야. 도망치든 뭐든 해야 하는 데 말이지 이 타임패트롤이 미친 소리를 했어.
“당신은 지금 김태민 씨를 살해하려고 했었지요?”
야 이 새끼야 그걸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 알아도 입 다물고 조용히 있었어야지.
응?
잠깐.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 맞다. 나 저 인간 이름 몰라야 하���.
그래서 나는 말했어. “누구요?”
타임패트롤이 내 등 뒤를 가리키며 대답하더라고. “저기 저 사람 말입니다. 저 사람이 김태민씨입니다. 당신은 방금 벽돌로 김태민씨를 때려죽이려고 했지요?”
(그걸 말하면 안 되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나는 말했다. “아, 아니에요!” 나는 뒤를 돌아보며 변명하려 했어. “저기, 오해가 있는데요. 저는, 저기, 응?” 내가 놀란 이유는 말이지 김태민이 칼을 든 채로 멈춰있어서야.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이제 아주 SF구나. 대놓고. 모르겠다. 구경이나 해야지——
    타임패트롤, 김태민에게 다가가며…… “이 남자, 김태민은 앞으로 30년 뒤, 커다란 사고를 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약 1700명이 사망, 12000명이 중경상을 입게 됩니다.” 타임패트롤이 김태민의 주위를 돌며…… “이 남자는 과거, 지금 이 시공간에 숨어들어와 있지요. 30년 후, 58세가 된 김태민, 다시 말해 사건의 범인은 여기 이 이 남자는 내가 찾는 그 범인의 30년 전 모습입니다. 나는 타임패트롤. 시간법을 위반한 자를 잡아들이지요.”
“잠깐만요? 그걸 나 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양윤수가 말했다.
타임패트롤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기계적인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시간을 조사하던 중, 재미있는 사건을 발견했습니다. 양윤수씨, 당신은 김태민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가, 자살했습니다. 아니, 할 것이라 해야 할까요? 미래의 일이니까. 여담이지만 당신은 목을 매달고 자살했습니다. 짧고 무의미한 인생이더군요.”
    ——더 이상 못 참겠다! 이 씨발 새끼가!
나는 타임패트롤한테 덤벼들었어. 손에 든 벽돌도 휘두를 생각이었고. 그런데 이 자식이 내 팔을 잡아 단숨에 꺾어버리더라고. 으악! 이거 안 놔? 이 새끼야?
내 말에는 대답도 안하고 타임패트롤인가 하는 이놈은 핸드폰을 꺼내다 내려다보며 말하더라고. 시간 정지는 앞으로 1분 48초 이후 끝나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쿼런틴 효과가 일어나고, 제가 시말서를 써야하죠. 그리고 이 시공간 거품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러니 제 말을 일단 들으세요. 당신이 만약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면, 지금 김태민을 죽이십시오.
나는 이 말에 몇 군데에나 태클을 걸 수 있었어. 가장 먼저, 시간 정지는 뭐고, 쿼런틴 효과는 또 무엇이며, 시공간 거품은 뭐지? 그리고 내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김태민이라는 저 덩치 큰 남자를 죽이라는 거야?
사람을 죽이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연쇄살인마나 그러는 거 아니었어? 하긴 사람 죽이려고 벽돌 들고 뒤를 쫓고 있었던 내가 연쇄살인마랑 같은 족속이 아니고 또 뭐겠어. 고맙소. 보이지 않는 내 인생의 조종자여. 이 어리석은 서푼 오페라의 연출가여. 이거 봐. 나도 내가 모르는 말을 한다니까? 얼마나 신기한 세상이야. 타임패트롤도 나오고. 여전히 팔은 꺾여있고. 아파 죽겠네.
타임패트롤이 내 팔을 놓고 말했어. “내 말을 들으면, 8년 뒤, 당신은 원하는 7급 공무원이 됩니다. (만세!) 약속하지요.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세요. (뭐라고?)”
7급…… 공무원……, 오늘은 안에다 싸도 된다고 하던 전에 사귀던 여자애 말보다 더 솔깃한 말일세. 벽돌. 이걸로 내려치면 된다 이거지. 손안에 묵직함을 휘두르세요. 강렬한 쾌감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래도 물을 건 제대로 물어야지. 약관도 안 읽고 보험 사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신문에서 읽었거든.
“만일 내가 이 벽돌로 저 사람을 내려치면, 8년 뒤 내가 공무원이 된다는 보장은 어디 있습니까?”
내 질문에 타임패트롤은 씩 웃으면서 핸드폰으로 이리저리 만지더니——미래에서 왔다는 데 핸드폰은 아직 있네. 상상력 하고는. 좀 새로운 개념의 디바이스를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핸드폰이 뭐야——당신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시지요 하고는 전화를 걸더라고. 전화기에 대고 “지금 전뇌통신으로 보낸 요청서 받았죠? (전뇌통신으로 요청서 받았으면 그냥 전뇌통신으로 끝내면 되지 뭘 또 전화하는 거야? 전화 하고 편지 쓰는 격이네.) 영상 지금 당장 보내주세요.” 하더니 핸드폰 화면을 내보였어. “이러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뭔데, 하고 봤지. 그런데——
    핸드폰 안에 또 다른 양윤수가 있었다. 또 다른 양윤수가 말했다. “야, 양윤수, 시간이 없어. 잘 들어. 넌 네가 아니야. 넌 나야.”
“이건 또 뭐야 씨발. 무슨 토털리콜이야?” 양윤수가 말했다.
“분명 넌 이게 무슨 토털리콜이냐고 하겠지. 나도 그때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난 다른 시공간 차원에 너야. 나이도 너 보다 많고. 난 그 순간에 그 새끼를 죽였어. 그래서 7급 공무원이시지. 겁쟁이처럼 굴지 마. 네가 지금 그 자리에서 그 새끼를 죽여. 안 그러면 네 인생은 거기서 그냥 끝나. 선택은 네 자유야. 하지만 나라면, 넌 나니까, 나랑 같은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 내 인생을 끝내지 마. 힘내.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거야. 나도 해 봤어. 별 거 아니야. 그냥 벽돌로 뒤통수를 내리쳐.”
핸드폰을 끈 타임패트롤이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일에는 인센티브가 필요한 법이지요. 당신 덕에 내가 이득을 보니, 당신도 이득을 볼 필요가 있겠군요.” 타임패트롤이 두툼한 봉투를 양윤수에게 내민다. “만일 당신이 하기만 한다면, 200만원을 드리겠습니다. 당장 생활에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러면 제 말을 믿으시겠지요?”
양윤수, 봉투를 뺏어들고 안을 확인한다. 놀라는 표정. “잠깐만요. 지금 이 시공간에 있는 김태민을 죽인다고, 다른 차원에 있는 김태민이 죽거나 하지는 않을 텐데요? 당신이 있는 차원의 김태민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 아닌가요?”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흐릅니다.” 타임패트롤이 말했다.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줄어듭니다. 그 결과 단 하나의 가능성, 즉, 과거로 변하지요. 과거가 변하면, 미래의 가능성은 순식간에 변하지요. 방금 당신이 보았던 영상 속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아직 김태민을 죽이지 않고, 나를 만나 생긴 가능성 속의 당신입니다. 만일 당신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간은 가장 큰 가능성대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않는 한, 당신은 오늘 자살할 것이고, 당신이 방금 보았던 영상은 꿈에서 본 풍경처럼 사라집니다. 당신은 또 다른 당신을 죽이게 되는 셈이지요. 자살인 동시에 타살인 겁니다. 당신은 지금 김태민을 죽이지 않아, 현재의 당신과 미래의 당신까지 동시에 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타임패트롤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30초, 남았습니다.”
양윤수는 벽돌과 봉투를 동시에 내려다보며 혼란스러워했다. 김태민은 여전히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핸드폰의 스톱워치가 20초, 15초로 줄어든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양윤수.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미래를 위해 지금을 죽이라고?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S#5.
양윤수는 홀연히 사라졌다. <끝>
    초고 작성: 2014년 6월 15일 일요일~2014년 6월 16일 월요일 오후 3: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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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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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서른여섯 살에 더러운 나이프로 2014-09-18
1.
여자 친구가 손 부채질 하는 모습이 귀여워, 최준규는 살짝 어깨를 끌어안았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하나같이 경계선이 거칠고 세밀했다. 어제 내린 비로 불순물이 씻겨나간 공기 덕에 거칠 게 없는 직사광선이 맹렬히 물어뜯은 탓이다. 평소보다 거리의 행인도 배는 많아 눈알이 뻑뻑하고 답답했다.
가슴과 피부 감각도 마찬가지다. 열탕처럼 가득 찬 사람들의 체온에, 달궈진 땅이 머금은 열기까지 더해진 토요일 오전 홍대 거리는 대중목욕탕 같다는 닳아빠진 비유가 꼭 맞았다. 무겁고 뻑뻑한 습도에 탕 속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처럼 숨이 답답하고, 온 몸에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품에 안긴 채 걷는 이민혜의 민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에 배어나온 땀은 선크림이 녹아 흙탕물처럼 뿌옇다.
“손수건 줘?” 그가 말했다.
“선크림 묻어.”
“괜찮아.”
그녀는 받아 든 손수건으로 가볍게 톡톡 두들겨 땀을 훔쳤다.
“불쾌지수.” 그녀가 말했다. “때려주고 싶다.”
“누구?”
“그 말 만든 사람.”
“때려줄까?”
돌연 몸을 떨며, 그녀가 걸음을 멈춘다. 불안해하는 진동이 품 안에서 으스스함으로 변한다.
“이 정도로 더우면.”
“응?”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
몸에 딱딱하게 굳는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공포로 더위에도 차갑게 식은 피부. 품에 안은 그의 등줄기도 서늘해졌다.
방금까지 그렇게 더웠는데, 그는 손수건을 돌려받으며 생각했다. 두 사람은 침묵하며 걸었다. 살짝 절뚝이며 걷는 그의 큰 몸은 불안해보였다.
네 살 차이인 둘은 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제대한 복학생이었던 그의 적극적인 구애로 연애를 시작했다. 주말에는 언제나 홍대거리를 아이쇼핑하는 게 어느 새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번에는 얼마 전 고생했던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부채를 선물하려고 언덕 위 팬시용품 가게에 가는 길이었다. ‘리락쿠마’라는 곰 모양을 한 캐릭터 상품을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 와 파는 가게로, 그녀의 단골집이었다. 리락쿠마는 언제나 늘어져서 게으름을 피우는 귀여운 곰돌이 인형이지만, 사실은 아저씨가 곰의 탈을 쓰고 있는 설정인 캐릭터로,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리락쿠마 팬시물품을 사 모았다.
언덕배기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그녀가 입을 떼며 걸음을 멈췄다. “오빠. 가지 말자. 힘들지 않아? 올라가기?”
사실 그랬다. 그는 발목을 다쳐 걸음이 조금 불편했다. 두 사람을 지금도 불안하게 만드는 얼마 전 있었던 일 때문이다.
“다음에 사자.”
“알았어. 대신 음료수 사 줄게.”
2.
한편 평소라면 최저시급도 못 받고 일하느라 불퉁스러운 태도인 김선형의 기폭 스위치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손놈’이 평소보다 여섯 배나 많은 열 두 명이나 되는 데도, 그는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편의점의 에어컨 바람과 냉장고 냉기만 공짜로 즐기며 시간을 때우는 인스턴트 피서 목적인 손님 뿐이라서, 였다.
계산하러 오는 손님은 적었다. 점장 입장에서야 곤란할 지도 몰라도, 편의점은 일을 한 회수나 실적이 아니라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푼돈으로 바꾸는 시급 시스템이다. 알바생 입장에서는 물건 사겠다고 귀찮게 안 하면 그 만큼 놀면서 같은 푼돈을 받을 수 있어, 실적이 없는 편이 오히려 이득이다.
오늘 만큼은, 김선형은 생각했다. 한가로운 저녁 이 시간만큼은, 스무 명이고 서른 명이고 좋으니 공짜 피서 맘대로 즐기도록 하라. 다만 내 성질을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 그는 멜트다운하는 핵폭탄이었다. 돈이 없고, 취직도 안 되고, 방세는 없고, 밴드 멤버 새끼들은 지랄해대고, 결국 해체하는 등등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겹치던 와중에 얼마 전부터 계속 돈을 빌려가던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렸다. 그가 알아차린 사실도 모른 채 계속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그 돼지년에게 남자답게 호통치고 뺨을 쳐 주려고 했는데, 결국은 마성의 동굴에 져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일부러 임신해서 낙태할 돈을 뜯어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미 모든 일이 다 끝난 뒤 일이었다. 안전한 날이라고 빼고 하자고 했을 때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지? 멀찍이서 리락쿠마 콘돔을 들고 닭살 행각 중인 커플을 카운터 너머로 힐끗 보니, 여자의 외모가 딱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천상 여자답게 차려입어 약간 헐렁한 옷 아래로 풍만하면서도 날씬한 라인을 가려냈다. 쇼핑몰 모델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그 옆에 있는 덩치 큰 놈하고 강제로 사귀는 것이겠지. 젠장. 저런 새끼에게서 미녀를 구해야 하는 데. 옆으로 누워 과자를 먹고 있는 리락쿠마 콘돔의 상자 위 그림이 떠올랐다. 배를 찢어 산산조각 내 버리고 싶다.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노래만이 구원이었다. 일본 록밴드가 부른 <16才の汚いナイフで街へ>라는 제목의 거친 펑크록이다. ‘열여섯 살의 더러운 나이프로 거리에서’ 라는 제목의 뜻대로, 보컬과 전기기타가 거칠고 성난 목소리로 외치는 가사는 자기를 버린 세상과 싸우겠다고 거리로 나간 열여섯 살의 은둔형 외톨이 소년이 자기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는 거리의 행인을 나이프로 마구 찌른다는 내용이다.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악을 쓰는 보컬의 기분에 그는 십분 공감했다. 노래가 아니라 숫제 악다구니다. 이 노래 때문에 밴드를 시작한 그에게는 주제가나 다름없는 이 곡을 커버하자고 했다가 싸움이 났었다. 그때 찔렀어야 하는데.
그의 주머니에도 나이프가 있었다. 얼마 전 이태원에서 산 버터플라이 나이프다. 집에 들어가면 그는 주어온 상자에 대고 나이프를 휘둘러댄다. 돼지년의 배에 대고 칼을 쑤셔 박는 상상을 할 때 마다 묘한 성적 흥분을 느끼곤 했다. 마침 읽고 있던 무협지 장면도 주인공이 초절신공의 초식을 발휘하는 장면이다. 나뭇가지에 검강을 불어넣어 수만 명의 적을 단숨에 베어버린다. 주머니 속 쇳덩어리의 미묘한 무게감을 주물거리며 그는 백일몽에 빠졌다.
객잔을 보던 허름한 차림의 하류급사, 자리에서 일어나, 무례천만 손님들을 향해 명검을 뽑아들고 일갈하니——겉보기엔 내 우둔한 일월객잔(日月客棧)의 하류급사(下流給使) 신분일지는 몰라도, 사실은 기연(奇緣)을 얻은 무공제일자니라. 이 ‘손놈’들아. 편안히 쉬며 선율을 즐기는 이 몸에게 달려들어 계산 해 달라거나 물건이 어디 있느냐 찾아 달라며 귀찮게 하기만 해 보거라. 오랜만에 피를 마시는구나 하고 내 애검이 잠룡출혈(潛龍出穴)의 초식을 노래하리라. 호학쌍형출조수(虎鶴雙形出爪手)해 마음에 안 드는 점장의 멱을 따고, 용아섬천(龍牙閃天)을 시전 해 돈 빌려달라고 소리 지르던 돼지 같은 여자 친구를 요절(腰折)하리라. 아아, 섬섬옥수로 탈번뇌막(脫煩惱膜)을 어루만지는 미목수려(眉目秀麗)여, 그 덩치만 큰 금수를 떠나 내게로 오라.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라 검은 구름을 뚫은 내 금강누각으로 그대와 함께 운우지정을 나누세——
“아.” 그는 무협지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하나 걸리기만 해 봐라.”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애검이 징징징 우는 기분이었다.
    3.
이민혜. 들어간다. 편의점. 저 놈이랑 같이.
아파. 등. 옆구리. 갈비뼈. 갔나보다. 금. 저릿저릿. 숨. 들어온다. 왜?
저 놈 때문. 이민혜. 저놈 것. 왜?
달라서? 나랑? 저 놈이랑?
뭐가? 체격? 힘? 열등? 내가?
동정. 나. 동정이다. 저자. 아니다. 다르다. 나. 열등하다. 싫다. 완벽. 나. 해야 한다. 완벽. 더. 더. 더. 끝없이. 어떻게?
취한다. 얻는다. 소유. 점유. 탈취. 갈취. 무엇을?
이민혜.
이민혜.
이민혜.
갖고 싶다. 어떻게?
뺏는다. 비밀. 우월. 저 놈의. 그녀를. 어떻게?
    4.
“야! 장사 안 해!”
고함소리에 편의점 안 공기가 인공적인 냉기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공짜 피서객들이 깜짝 놀라 멍하니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화들짝 놀란 그녀를 진정시키려 품에 안은 그는 커다란 몸으로 장벽을 만들 듯 시야를 가리며 어깨 너머로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편의점 알바가 손님과 시비가 붙은 모양인지 언성을 높였고, 예민한 그녀가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애처로워져 떨림이 진정되도록 어깨를 꼭 안았다. 그 사이에도 언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태도가 그게 뭐야!”
“아저씨, 그냥 계산하고 가세요. 예?”
“알바 새끼 주제에 건방지게. 야, 점장 불러.”
“어디다 대고 반말이세요?” 알바 새끼? 디스나 피는 새끼가.”
“뭐 이 새끼야?”
“니 애비 좆이나 불러 새끼야.”
“어린 노무 새끼가, 건방지게!”
손님이 멱살을 잡자, 편의점 알바가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 “나이 똥꼬로 쳐 먹었고 입으로 싸나, 존나 더러우시네!”
중년 남자는 손을 치켜들며 알바를 위협해댔다. 지지 않고 알바생도 고함쳤다. 다른 손님들은 무서워서 접근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말다툼으로 미루어보니, 음악을 듣느라 계산을 해 달라는 손님의 요구를 알아차리지 못해 난 싸움이다. 쓸데없는 것 가지고 싸우기는,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건가? 험악한 공기에 그녀가 불안에 떤다. 얼마 전의 일이 되살아나 그러는 모양이라고 판단한 그는 상황을 진정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끼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또 그녀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도 너무 많다.
“민혜야, 잠깐만 기다려.”
“오빠, 신경 쓰지 마. 그냥 가자.”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그 날, 자기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마음 한 구석, 남자 친구로서의 자존심과 함께 단련한 큰 몸에 대한 자신감이 겹쳐,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다.
“괜찮아. 그냥 말리려는 거야.” 하고 안심시킨 그는 싸움이 난 두 사람에게 다가가 “저기요.” 하고 끼어들었다. 갑자기 끼어든 덩치 큰 남자에 긴장한 두 사람의 입이 멈추었다. 힐끗 바라 본 그녀는 조금 안심한 듯 보였다. “다른 손님도 있는데, 진정 하시고요.” 차분하고 당당한 태도다.
덩치가 작은 중년 남자는 위축돼, 자기편으로 만드려는 속셈으로, 까맣게 탄 피부가 헐렁해 보이는 뼈다귀 같은 손을 흔들며 하소연 했다. “학생, 내 말 좀 들어봐. 담배 하나 사려는 데, 이 새끼가 레시바 끼고 들은 척도 안 하잖아? 손님은 왕 아니야? 응? 서비스가 이 모양이어서 되겠어?”
“잠깐만요. 뭐 사려고 하셨는데요.”
“이거, 담배.”
그가 알바생을 진정시키려고 미소 지었다. “조금 진정 하시고, 일단 이거 계산 좀 부탁드릴게요.” 중년의 디스 플러스와 함께 리락쿠마 콘돔을 내민다.
고개를 드니, 알바생의 얼굴은 불길할 정도로 굳어 있다. 오랫동안 운동을 한 그는 이런 수상한 공기를 잘 알고 있다. 뒤로 물러서려는 데, 눈치 없는 중년이 계속 떠들어댄다.
“어디서 씨발 눈을 꼴아보고 있어!” 중년이 따귀를 때렸다. “건방진 새끼가! 어린 노무 새끼가!” 한 번 더 따귀를 때렸다.
그는 사내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놓으라고 발버둥치는 몸에 힘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쪽 귀에는 여전히 꽂고 있던 이어폰을 천천히 뺀 알바생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카운터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하얀 이어폰에서 거칠게 악 쓰는 펑크락이 흘러나왔다. 뭐라고 말하는 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이, 알바생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오싹한 기분이 들어 뒤로 물러서는 사이, 알바생이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휘둘렀다. 그는 중년을 떠밀었다. 간발의 차. 카운터가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담배와 술로 혹사한 중년 남자의 울대가 단번에 베였을 터였다. 손님들은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눈치 채지 못했고, 그저 큰 움직임에, 싸움이 났다고만 생각했다. 마음이 거칠어진 사람은 그였다. 알바생의 돌발행동이 그동안 억눌러두었던 감정에 불을 지폈다. 그 미친놈과 다를 바 없다. 위험하기 짝이 없고, 자기만 아는 놈들. 그는 열리는 카운터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단두대처럼 강제로 닫히며 쾅, 하고 큰 소리가 났고 기세에 눌린 알바생이 휘청거렸다.
“이 씨발 놈이!”
하고 욕지기를 하며, 알바생이 자세를 고쳐잡는 동안 그는 진열대에 놓인 작은 탄산수 병을 집어 들고 뒤로 물러났다.
“경찰에 신고해요!”
겨우겨우 억눌러온 공포가 터져버린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히스테리 상태가 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카운터를 지켰다. 요사이 미친놈이 너무 많다. 아직 상황이 파악 안 된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눈치 빠른 몇은 벌써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특정한 누군가가 책임질 상황이 아니면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는 수업 중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비겁한 동물이구나. “신고하라고!” 그는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멀뚱히 선 남자에게 삿대질했다. “112에 신고 해!”
그제야 남자가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뜨끔한 충격에 팔이 무거워졌다. 불이라도 붙은 것 같다. 손에 힘이 빠져 탄산수 병을 떨어뜨렸고, 깨진 병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거품을 내뱉으며 투명한 피를 바닥에 적셨다. 그 위로 붉은 방울이 떨어졌다. 처음으로 사람을 찌른 모양인지, 알바생은 겁에 질려 피 묻은 나이프가 든 손을 떨었다. 날것의 폭력. 칼에 찔린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아무 것도 아닌 쓸데없는 다툼에 칼을 휘두르는 알바생을 향한 분노가, 아픔보다 컸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패닉에 빠진 동물은 싸우거나, 도망치려 한다. 그는 싸우려 했고, 알바생은 도망치려 했다.
“히이익!
하고, 무녀리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알바생이 카운터 아래로 기어서 도망치려 하는 모습을 본 그는 닥치는 대로 진열대의 탄산수 병을 집어던졌다. 무차별 폭격으로 바닥은 엉망이 되었다.
“오빠! 그만해!”
그녀의 외침에. 그는 순간 제정신을 되찾았다. 폭력으로 겁에 질린 그녀를 위로하려고 나온 데이트에서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에 손이 멈추었다. 알바생이 그 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하게 흔드는 나이프의 끝을 보자 흥분으로 잊어버렸던 묵직하고 둔한 통증이 되살아났다.
그녀에게 달려든 알바생은 삼류 액션영화에 나오는 양아치처럼 그녀의 목을 뒤에서 조르며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탄산수로 유니폼이 젖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요새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을 위협하는 일이 이리도 자주 터지다니. 신고는 어떻게 된 거지? 아까 그 아저씨 어디 갔어? 구석에서 떨고 있잖아! 민혜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이 창백하다. 정말로 기절할 지도 모른다. 그 날처럼.
“가까이 오지 마!”
“일단 그 칼 내려 놔.” 그는 빈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흥분한 알바생이 무슨 짓을 할이지 모른다. “진정해. 진정하고, 날 봐. 날 보라고.”
“다 죽여 버린다! 이 개새끼들이, 좆나 사람이 봐주니까!”
“알았어. 미안하다. 알았으니까, 일단 칼 내려 놔. 그 여자는 아무 관계없잖아!”
“저 새끼 이리 오라고 해.” 알바생이 턱 끝으로 까만 피부의 중년 남자를 가리켰다. “저 새끼한테 사과 하라고 해!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해!”
“아저씨!” 그가 부르자 중년 남자는 겁먹고 손사래를 친다. “가서 사과해요. 어서!” 칼이 무서워 움직이려 하지 않자, 그는 안 가려고 버티는 중년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탄산수로 젖은 바닥 위로 미끄러지는 몸을 붙들려고 몸부림치다 병조각이 손에 찔려도 모를 정도로, 중년 남자는 필사적이었다. 제물을 바치듯 억지로 내 던지며, 그는 아까 전 소리쳤던 아저씨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말없이 신고했음을 알렸다. 경찰이 오기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아무 일 없이.
“씨발, 사람이 편의점 알바 한다고 무시하고 새끼야!”
“됐지? 이제 민혜 놔 줘.”
중년의 엉덩이를 발�� 밀면서 그가 말했다. 중년은 겁에 질려 네발로 기고 있었다. 알바생이 축구공 차듯 턱을 걷어 올렸다. 겁에 질려있던 남자가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벌렁 나자빠졌다. 방금 전 까지 알바생에게 거만하게 호통 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몸을 떨었다.
그는 그녀나 다른 누군가가 갑자기 행동에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기를 바랐다. 섣불리, 게다가 서투르게 움직였다가는 놀란 알바생이 반사적으로 돌발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그랬다가는 그녀의 목숨이 위험하다.
“자, 이제 진정해. 진정하고, 민혜 놔줘.”
“멀리 가.”
“놔줘.”
“저리 가 있어! 안 그러면!” 알바생이 칼을 목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칼 제발 좀 치워.” 그가 뒤로 물러섰다.
“이 새끼들, 다 나를 좆같이 본단 말이지. 팔자 좋게 대낮부터 콘돔이나 사고, 이 걸레 년이.”
뱃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흥분해선 안 된다. 냉정하게 대처하자. 일단 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아픈 팔에서 피가 빠져 나가는 감각에 정신도 몽롱해진다.
편의점 문이 열렸다.
경찰이다! 반가움 마음도 잠시, 그는 혹시나 경찰을 보고 알바생이 허튼 짓을 할까 두려워 달려들 태세를 갖췄다. “너 뭐야!” 알바생이 칼을 뻗으며 말했다.
빈틈. 그가 달려들었다. 그녀를 강제로 밀치며 몸통 박치기를 먹였다. 그녀가 바닥에 넘어지면서 비명을 질렀으나 그는 안도했다. 아파도, 살아있으니 아픈 것이다. 지체할 틈이 없다. 손목을 붙잡아 나이프를 뺏으려는 했다. 충격. 누군가가 달려들어 부딪혀왔다. 비명. 알바생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진다.
팔에 깁스를 한 괴한이 온몸으로 알바생의 뱃속으로 식칼을 밀어 넣고 있었다. 알바생의 입에서는 억눌린 공기가 신음이 되어 새어나왔다. 사지를 뒤흔들며 저항해도 멈추지 않고 천천히 파고들어오는 칼날이 생명을 갉아먹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알바생이 비틀거리자, 괴한은 단숨에 식칼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생명도 빠져나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알바생의 창백한 얼굴이 두어 번 경련을 일으키다, 완전히 멈추었다.
그는 나이프를 주어들고 임전태세에 나섰다. 생각할 여유가 없다. 나이프를 들고 일어선 그의 팔에 통증이 되돌아왔다.
박연진. 이민혜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스토커. 며칠 전 그녀와 그를 악몽으로 만들었던 그 놈이 아직도 두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 구부러진 하얀 깁스와 식칼을 든 손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버린 사람이 느끼는 고양감과 공포감의 양가감정 때문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에겐 오직 이 미친놈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저 미친놈은 자기가 동정이라 이민혜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며, 자기가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해 달라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남자가, 이상하게 문자나 이메일이나 편지로는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3개월에 걸친 스토킹이었다. 그녀는 그의 성격을 알고 일부러 이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 일은 벌어졌다. 그녀의 자취방에서 정사를 나누다, 그는 침대 밑에서 자위를 하고 있는 박연진을 발견했다. 열쇠를 몰래 복사했던 것이다.
그는 그제서야 사실을 알고, 분노를 참지 못해 팔을 부러뜨렸다. 발목은 그러던 와중에 접질렸다. 만일 접질리지 않았다면, 목을 부러뜨렸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박연진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살인자의 모습은 그와 똑같았다. 똑같은 옷, 똑같은 머리모양, 그와는 전혀 닮지 않은 광인 특유의 중립적이고 공허한 표정만이 다른 도플갱어였다. 인형이나 로봇으로 어설프게 모습을 따라한 것 같다. 말투마저 그랬다.
“나. 해냈다.” 박연진이 말했다. “나. 턴다. 편의점. 증명한다. 남자. 죽였다. 사람. 나. 남자다. 이제 나. 할 수 있다. 섹스. 어른이다. 어른. 어른. 자격 가졌다. 나. 괜찮다. 동정으로 안 죽어도.”
그날, 그는 미친놈의 팔을 부러뜨리고, 평생 동정으로 죽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복수하려는 걸까? 그는 불안했다. “원하는 게 뭐야?”
“나. 되고 싶다. 어른.”
도대체 무슨 의미지?
그가 당황해 하는 사이, 눈치 빠른 중년 남자가 빈틈을 노려 도망치려 했다. 달려 나가던 걸음이 멈췄다. 식칼에 목을 베였다. 기계적으로 정확한 동작이었다. 숨을 헐떡인다. 바닥에 쓰러진다. 알바생 위로 포개져 피를 흘린다.
편의점 안의 비명.
광인은 시체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5.
뒤로 물러나,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앞에 섰다. 팔의 피가 멈추지 않는다. 그 사이 박연진이 손님들을 공격했다. 칼에 찔리고 베여서 도망쳤다. 그도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일어섰으나, 다친 발목과 과도한 출혈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제치고 나가지 못했다.
그와 그녀, 신고했던 남자를 포함한 손님 네 명과 시체 두 구를 포함해 도합 여섯 구 남았다.
그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나이프를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 나머지 손님들은 또 다른 구석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광인은 이미 인질로 삼은 손님을 위협해 편의점의 유리문을 대걸레로 막고, 'CLOSE' 표시를 내걸었다.
가축처럼 명령에 따랐던 게 아니다. 공포 때문이었다. 빈틈을 타 도망치려다 손님 하나는 등을 크게 베였던 것이다. 바닥에 널브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활로를 찾아야겠다.
그는 먼저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 대화로 범인과 심리적인 동조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범죄심리학에서 네고시에이션이라고 부르는 친밀감 구축과 설득 과정이다. 대부분 수업시간을 졸면서 시간을 보냈어도, 그는 심리학과 학부생이었고, 범죄심리학만큼은 빡빡한 교수님 덕분에 열심히 공부 했다. 살면서 범죄심리학이 현실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냥 말을 걸 수는 없다. 박연진은 기계처럼 이상하게 말한다. 마치 기계번역기로 변환한 문장처럼 문법이나 단어가 엉망진창이다. 그녀가 보여준 문자나 이메일에서는 멀쩡히 한국어를 구사했다. 말이 아니라 글로 시도해야 한다.
박연진은 출입문 앞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엉덩이에는 목숨을 잃은 주검이 깔려있었고, 앞에는 유리병을 깨서 만든 부비트랩이 널려있었다.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발을 다치고, 움직임이 둔해져 공격을 당하게 된다. 혹시나 유리조각을 뚫고 지나가도 시체가 걸음을 방해한다. 자기를 흉내 내고 있는 박연진의 모습을 보며, 그는 기묘한 감각으로 겨드랑이가 간지러웠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눈짓을 하고, 진열대의 유성 매직펜과 과자를 집어 들었다. 그의 행동을 알아차린 박연진이 식칼을 겨눴다. 그는 손을 뻗어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알리고,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은 과자 봉지를 적어 던졌다. 박연진이 뜻을 알아차렸다.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박연진: 이런 짓을 벌여 죄송합니다. 당신은 이해 못합니다.
최준규: 원하는개뭐야? 말은 왜그렇게
최준규: 하는거야?
최준규: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어. 일단
박연진: 알려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녀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지 당신은 모를 것입니다.
최준규: 자수하
최준규: 그녀???
최준규: 민혜를 말하는 거냐???
박연진: 나는 완벽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철저히 해내야만 합니다.
최준규: 그게 민혜랑나랑 무슨 상관이야
최준규: 말도 안되는죽음이랑
최준규: 이상한 핑계대지말고
박연진: 어머니는 영어를 하지 않으면 대기업에 가지 못한다고, 내게 영어만 사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한국어는 사용해서도 안 되고, 생각도 철저히 영어로만 해야 했습니다.
박연진: 그러다 보니, 말이 이상하게 나왔습니다. 나는 완벽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말을 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어머니는 내게 항상 이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처럼 되기 위해
최준규: 알게 뭐야
박연진: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내가 살던 환경이 바라는 대로, 나는 완벽해야 합니다. 토익도 만점이어야 하고, 대학도, 대기업도, 무엇이든 자격에 어울리는 브랜드를 다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완벽한 남자가 아닙니다.
최준규: 그거랑 우리랑
최준규: 무슨 상관인지나
박연진: 내가 동정이기 때문입니다.
최준규: 뭐라고???
박연진: 통계에도 나와 있습니다. 동정인 남자는 정치인을 암살하려 듭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암살시도는 대부분 동정인 남자가 저질렀습니다. 나는 동정 딱지를 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완벽한 남자는 매춘과 같은 추잡한 방법으로 딱지를 떼지 않습니다. 완벽한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최준규: 미친놈
최준규: 그래서지금민혜를
박연진: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완벽한 여자와 관계를 맺으려면 완벽한 남자여야 합니다.
최준규: 뭐?
박연진: 당신은 완벽한 여자를 취했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완벽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저런 완벽하지도 못한 쓰레기를 없애고, 나는 경찰이 오면 당신을 죽이고 당신 대신 당신이 되어, 그녀를 갖고 완벽해 질 것입니다.
최준규: 그럼 지금당장 죽이지
최준규: 뭘기다리지?
박연진: 당신이 출혈과다로 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흘린 피를 내가 마시고, 나는 당신이 될 겁니다. 그 다음 남은 손님들을 죽이고, 그녀를 차지할 것 입니다.
    최준규는 박연진의 공허한 얼굴을 보았다.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답장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몰랐다. 미친 사람은 자기만의 논리로 세상을 본다. 그의 논리에 동조해 활로를 찾아야 한다.
그는 모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준규: 만약에 말이야. 내가 살아있는 사이 경찰이 오면 어쩔 셈이지?
박연진: 네?
최준규: 만약 우리 둘이 모두 살아있으면,
최준규: 경찰은 우리 중 누가 진짜 나라고 생각하겠어?
최준규: 그러니까 누가 진짜 최준규라고 생각하겠냐고. 설마 쌍둥이라고 생각하겠어? 당연히 둘 중 하나는 가짜라고 하겠지.
최준규: 그럼 팔이 부러지고 온 몸에 피가 묻은 사람이 당연히 잡혀가지 않겠어? 불완전하니까?
최준규: 그리고 불완전한 동정이 어떻게 민혜를 가지겠어?
최준규: 쓰지도 못하고 늘어진 콘돔이잖아. 애초에 서기는 해?
    흥분한 박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 나, 선다! 남자! 나! 남자! 완벽하다!” 식칼이 부들부들 떨린다. 안 그래도 엉망인 말투가 더 무너지고, 더듬었다.
작전대로다. 감정적으로 흥분한 자는 그 만큼 컨트롤하기도 쉬워진다. 더 화를 돋우기 위해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맞섰다. “콘돔 쓸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야?”
갑자기 시작된 이상한 대화에 가게 안에 인질이 된 손님들과 그녀가 이상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몰래 뒤로 손짓해 그녀를 안심시켰다.
박연진이 갑자기 엄지손가락으로 핸드폰을 마구 두들겨댔다.
    박연진: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게다가 민혜 씨 앞에서 그런 추잡한 말을 하다니. 당신 제정신입니까?
최준규: 고자
박연진: 모욕을 그만두십시오.
최준규: 고자. 콘돔도 쓸 줄 모르는 고자.
박연진: 쓸 줄 압니다.
최준규: 설명서 보고 외웠겠지. 뻔해.
박연진: 아니야.
최준규: 경찰이 오면
최준규: 네놈이 가짜인 게
최준규: 다 들통나. 딱보면 알아.
박연진: 아니야.
최준규: 경찰이 바보인 줄 알아?
최준규: 아니면 증명해봐.
최준규: 니가 남자라고 증명해보라고
박연진: 난 사람을 죽여 내가 우월한 남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어.
최준규: 사람 죽이는 건 여자도 할 수 있어.
최준규: 죄와 벌 흉내내지마.
최준규: 그리고 나한테 져서 팔도 부러��잖아?
최준규: 콘돔 제대로 쓰는 지 한 번 보여보라고.
    “으아아아아아!” 박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증명해봐!” 그가 진열대의 콘돔을 집어 던졌다.
두 사람 만의 격렬한 대화를 모르는 그녀와 인질들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흠칫 놀랐고, 박연진이 식칼을 시체에 박아 넣고 허리띠를 풀기 시작하더니, 하반신을 노출한 채로 콘돔의 포장을 풀자 놀람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서지도 않잖아.” 그가 비웃었다. “그렇게 작아서 제대로 들어나 가겠어?”
“나, 나, 나! 한다! 콘돔!” 박연진이 한손으로 콘돔의 포장을 풀고 장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작은 성기는 발기하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억지로 세우려고 깁스 한 손으로 자위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 생각하면 서는 거 아니야?” 그가 말했다. “엄마가 만져주면 서는 거 아니냐고.” 그 말에 반응해 그의 성기가 움직이자, 그는 계속해서 그를 ‘마마보이’, ‘근친상간 변태’ 같은 욕을 하며 도발했다.
“넌 완벽하지 못해! 넌 남자도 아니야! 아니, 넌 사람도 아니야!”
박연진이 식칼을 뽑아들었다.
    6.
경찰은 피가 가득 담긴 콘돔, 잘려나간 성기, 그리고 머리에 콘돔을 뒤집어 쓰고 죽은 박연진을 발견했다. 팔에 상처를 입은 최준규는 정당방위로 살인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증인의 증언으로 혐의를 벗었다.
결국 최준규와 이민혜는 왜 그가 스토킹을 했고, 왜 살인을 했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끝>
초고: 2014년 9월 18일
200매 X 78쪽 = 141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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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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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들개전쟁 승전록 2013-11- 01
들개전쟁 승전록
손지상
(주: <스쿨 하프보일드>(에픽로그)(2014) 수록작 ‘ 캣푸드 하프보일드’의 원형)
    1.
다리 밑에서 작은 고양이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들개를 본 라에가 언덕을 뛰어 내려가 앞발로 주둥이를 후려쳤다. 나가떨어진 들개가 지저분한 이를 드러내며 일어섰다.
‘이봐, 고양이. 네 몫은 딴 데서 찾아.’ 들개가 생각을 전했다.
‘우리가 너네랑 같은 줄 알아?’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개나 같은 개를 먹지, 우린 아니야.’ 작은 고양이가 몸을 움츠리며 라에 뒤로 숨었다.
‘뚱뚱이 아줌마,’ 들개가 다가왔다. ‘살집 있어서 맛있어 보이기는 한데, 이번 한번만 봐줄 테니 그냥 가시지? 밥 먹을 때 우리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아줌마?!’
라에가 돌진해 따귀를 때리고 들개가 휘청대는 사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주로 물어뜯는 전법을 사용하는 개를 상대로 싸운 경험이 많은 라에가 사용하는 전법이다. 고양이 특유의 유연한 허리를 이용해 라에가 씨름에서 뒤집기 하듯 내던지자 들개가 공중으로 호를 그리며 바닥에 메다 꽂혔다.
라에가 들개의 목을 앞발로 짓밟았다. 덩지 좋은 라에의 무게에 들개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요새 네놈들 패거리가 이 동네를 어슬렁거려서 눈에 거슬리던 참인데.’ 라에는 이 녀석이 도베르만의 피가 섞여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개과 동물 특유의 길고 난폭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주둥이가 길었기 때문이다.
작은 고양이가 다가왔다. ‘그, 그만하세요, 누님!’
‘널 먹으려던 놈을 용서해주라고?’
‘그게 아니에요! 가루루 놈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이놈도 가루루 부하라고요!’
‘그래…? 꼬마야, 넌 이만 가 봐.’
작은 고양이는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며 라에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도망쳤다. 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두목은 부하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부하를 지킬 의무가 있다. 동물 전체의 불문율이다.
‘너, 집고양이지? 인간 냄새가 풀풀 나는군. 역겨워 토할 지경이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네놈들처럼 깨끗한 밥이 제때 안 나오거든. 여긴 먹을 게 많아.’
‘더 이상 더러운 밥도 못 먹게 만들기 전에, 당장 이 마을에서 나가. 네놈 패거리들 모두 다.’
‘우리 두목이 네년 뼈를 잘근잘근 씹어 잡수실 거다.’
‘존댓말도 쓸 줄 아는 놈이군. 그럼 내 말이 공갈이 아닌 것도 알 텐데?’
“컹! 컹컹! 컹!”
또 다른 들개가 달려들었다. 요크셔테리어다. 조직 생활을 하는 개의 습성 상 동료가 오지 않자 바로 탐색을 시작했고, 동료가 라에에게 당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요크셔테리어가 라에의 목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애완견으로 태어나도 거리라는 링에서 단련하면 투견처럼 꽤나 예리한 공격을 하는 법이다. 라에가 뒤로 도약하지 않았으면 목덜미가 피투성이로 너덜너덜해질 참이었다. 라에가 착지하는 틈에 요크셔테리어가 잡종 도베르만을 일으켰다. 집단의식이 강한 만큼 동료를 구하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개에 대한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혐오하는 라에도 동료를 먼저 챙기는 모습은 부하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꺼져, 그렇지 않으면…’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요크셔테리어는 혀를 내밀고 헉헉대며 비웃기만 했다. 이 더러운 털투성이가, 하고 생각하던 라에가 목덜미에서 강한 한기를 느끼고 몸을 돌렸다.
일격.
라에는 공중에 붕 떠서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바닥을 네 다리로 밟고 선 순간 시커멓고 커다란 덩어리가 달려들었다. 막거나 피할 세도 없이 박치기를 얻어맞았다. 투견의 기술이다.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누군가 온 몸을 쥐어짜는 충격에 숨을 토했다. 세 마리의 개가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잡종 도베르만과 지저분한 요크셔테리어 앞에 선 거대한 개가 피처럼 붉은 혀를 내밀고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다른 개 보다 덩지가 훨씬 커서, 그레이트데인과 세인트 버나드를 뒤섞어 둘로 나누지 않고 그대로 놔 둔 만큼 컸다. 짧은 털이 난 가죽에는 흉터가 지그소퍼즐처럼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정상이 아니라 보이는 부분은 눈이었다. 한쪽 눈은 발톱에 베여 완전히 죽어있었는데 썩은 우유 위로 떠오른 단백질 덩어리 같았다. 멀쩡한 다른 쪽 눈은 그 어떤 송곳니나 발톱보다 예리하고 단호해 보였고, 보는 순간 깊은 속까지 헤집어 놓고 낱낱이 파헤치는 기분이 들게 했다.
‘가루루’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라에가 생각을 전해도 가루루는 반응이 없었다. 들개들의 보스답게 가루루는 침착하게 서서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부하들이 라에의 좌우로 흩어지며 달려들었다.
포위할 생각이군, 라에는 생각했다. 허나 이미 늦었다. 방금 전의 충격이 남아있는 지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루루는 이 지역의 두목인 자신을 단순히 죽이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만천하에 철저히 능욕해 부서뜨릴 작정이다. 등줄기를 타고 꼬리로 내려가는 서늘한 느낌이 위기라고 속삭였다.
들개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다.
라에는 가루루를 흔들어 놓기 위해 계속해서 생각을 전해 도발했다. 허나 가루루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인간에게 생각을 전해도 인간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가루루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을 못 듣는 건가? 라에는 의심했다. 하지만 이상해, 다리 여섯 달린 놈들이면 모를까, 어째서 개가 인간과 똑같이 생각을 못 듣는 거지?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건가? 도대체 어떤 생각?
라에는 오싹해져 꼬리에 전기가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거야, 라에는 생각했다. 가끔 인간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놈도 미쳐있는 거야. 물 컵에 떨어진 작은 잉크방울이 퍼지듯 아주 작은 공포가 라에의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공포를 통해 가루루가 사로잡힌 생각, 가루루의 온몸을 뒤덮고 있는 광기가 전달되어왔다.
가루루가 다가왔다.
—죽음.
두려움에 라에는 발톱을 세웠다.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그만! 라에가 고개를 흔들었다. 광기가 마음을 다 집어삼켜 자신도 미칠 것만 같았다. 그 틈을 타 도베르만과 요크셔테리어가 동시에 덤벼들었는데도 라에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만! 그만! 그만…
‘라에야!’
머릿속으로 또 다른 생각이 파고들어와 라에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뒤이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저리 가!” 사내아이가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사내아이는 강가의 자갈을 주워 들더니 다리 밑의 개들을 향해 던지며,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각목을 휘둘렀다. “쉬! 쉬! 저리 가!”
진규야! 라에가 생각했다. 진규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돌을 각목을 휘두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에서 따뜻한 감각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진규의 돌팔매질을 피해 개들이 물러섰다.
애초에 진규도 맞출 생각은 없었고 그저 라에를 구하고 싶을 뿐이었다. 돌이 들개들 중에서도 엄청나게 커다랗고 흉측한 개의 얼굴에 맞았다. 대장 같이 보였다. 하얗게 죽은 눈 위로 난 흉터를 보자 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악몽 속에서나 존재할 그 개가 라에와 자신을 물어뜯는 광경이 떠올라버렸다.
“저, 저리가! 저리 가라고!” 진규가 각목을 허공에 휘둘러 위협했다. 두려웠다. 식은땀이 흐르고 무릎이 떨려왔다. 호흡이 가빠져와 위협하는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변한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두 다리로 일어서면 나만할 것 같아, 진규는 생각했다. 어른들이 개가 송아지만하니 어쩌니 할 때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4초, 5초 지났을 뿐인데도 다섯 시간은 지난 것 같은 긴장으로 농밀한 시간이 흘렀다. 거대하고 흉측한 개가 캑, 하고 기침하듯 울음소리를 내더니 몸을 돌려 물러났고 부하로 보이는 나머지 두 마리도 뒤따랐다. 진규에게는 그 울음소리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 따위는 언제든 숨통을 끊을 수 있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개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진규는 각목을 들고 버텼고, 개가 공격해 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질 만큼 떨어지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한숨이 제 멋대로 길게 빠져나가면서 온 몸의 긴장도 같이 빠져나가버린 기분이었다. 맥이 풀려 무릎이 제대로 버티질 못했다. 각목을 지팡이 삼지 않았으면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라에야, 괜찮아?’ 진규가 생각을 전했다.
‘괜찮아. 고마워.’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무릎에 힘이 빠졌네, 겁먹었어?’
‘누가 ���먹었다고 그래!’
‘두 번째네, 여기서 날 구해준 게.’
‘그땐 나보다 훨씬 어리고 귀여운 새끼고양이였는데, 지금은….’
‘뭐! 고양이랑 인간은 흐르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고!’
‘그때 깜짝 놀랐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들려서.’
‘나도 물에 빠져서 어찌 할 줄 몰랐거든.’
‘나도 수영을 못해서 이런,’ 진규는 각목을 내다 버렸다. ‘각목으로 겨우 건졌었지. 지금도 못하지만.’
둘은 다리 위로 올라가 집으로 향했다.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그땐 왜 강가에 왔던 거야? 지금도 못하지? 난 잘해. 본래 고양이는 원래 물을 무서워하는 데, 난 아냐. 호랑이도 아니야. 나한테는 호랑이 피가 섞여 있나봐. 그래서 이렇게 덩지가 큰 지도 모르지.’
라에의 호랑이 같은 무늬와 당당한 체격을 보며 진규는 자기가 막 구했을 때 작고 귀여웠던 라에를 떠올렸다. 정말로 인간과 고양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는구나. ‘그건 그냥 많이 먹어서 그런 거겠지.’
‘고양이는 은혜를 모른다는 말 들어봤지? 왜 그런지 직접 알려줄까?’
‘미안.’
‘몸에 힘을 빼,’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김장을 풀고 물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러면 물이 네 몸을 받쳐줘. 떠오를 수 있지. 먼저 받아들이지 않고 싸우려 들면 안 돼.’
‘릴랙스 하라 이거지? (이슬이 앞에서도 그래야 할 텐데…) 그게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슬이? 그게 누구야?’
‘응? (이런 들켰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잊지 마,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나라는 거.’
“으앗!” 진규가 마음이 아니라 입으로 소리를 냈다. “이, 이슬아?”
진규와 라에 앞에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지나갔다. 진규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몰려드는 긴장 때문에 무릎이 떨려오고 숨이 가빠왔다. 식은땀이 완전히 마른 살갗에 또 다시 축축한 땀이 솟아났다.
“진규야, 안녕?” 이슬이가 말했다.
진규는 갑자기 방금 전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서 바지가 먼지투성이라는 생각이 떠올라 급히 엉덩이를 털며 인사했다. “아, 안녕” 긴장해서 높아진 목소리다. 부끄러워 죽고 싶었고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이슬이가 웃으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하는 이 순간이 방금 전 상상한 두목 들개가 덤벼들어 자신을 물어뜯는 광경보다 더 무서웠다. 이슬이가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같은 공간에 계속 있었으면, 하고도 생각했다. 이 모순이 자기 마음과 몸을 양 쪽으로 찢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슬이가 멀어지자, 떨리는 무릎을 붙잡으며 웅크리고 전력질주를 방금 마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내쉬었다. 폭발할 듯 쿵쾅거리는 심장이 가슴을 두들겨댔다. 이렇게까지 여자아이 앞에서 긴장하는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럽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버하기는.’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진규가 화를 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라에는 달리고 있었다. 멀어지는 라에의 뒷모습을 보며, 진규는 왜 저러나 하고 생각했다.
    2.
고양이들은 인간들 몰래 회합을 가진다.
이 동네에서는 금요일이 회합일이다. 회합이라 해도 거창한 것은 아니다. 집고양이, 길고양이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모여 먹을 것을 형편 되는 대로 들고 모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평소에는 주로 어느 집 잔반이 맛있다거나, 어느 브랜드의 사료나 통조림이 맛있다 정도가 테마인 모임이 오늘은 평소와 다른 진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가루루와 들개 떼가 문제였다.
‘이대로 두었다간 문제입니다!’ 덩치가 작은 고양이 맥코리가 나서서 생각을 전했다. ‘어제 전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요! 누님이 절 구해주시지 않으셨다면 먹잇감이 되었을 겁니다!’
둥글게 모인 동물 무리 한 가운데에 선 맥코리는 아직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주변을 둘러싼 고양이들은 옆자리에 있는 고양이들과 생각을 나누며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고양이 뿐 아니라 지역의 개나 도마뱀 같은 다른 종들도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명성 있는 동물들이었다. 그들도 대책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루루는 미쳤어요!’ 맥코리가 바닥에 팡팡 꼬리를 내리쳤다. ‘아무 이유도 없이 저런다고요!’
‘같은 개지만,’ 혈통 있는 진돗개 백돌 씨가 점잖게 끼어들었다. ‘그 가루루라는 들개는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우리 개들은 주인을 위해 충성을 바치는 것을 가장 큰 신조로 삼아요. 하지만 가루루는 도대체 무엇을 따르는 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고양이 분들께서 화를 내실지 모르겠지만, 가루루라는 놈은 제멋대로인 게 마치 고양이 같습니다.’
‘동감입니다.’ 라에가 일어나 맥코리가 있는 중앙으로 암호랑이처럼 위엄차게 나아갔다. 백돌 씨의 말에 화를 내려던 맥코리가 눈치를 보고 물러났다. 중앙에 선 라에가 좌중을 둘러보며 발언해도 될지 동의를 구했고, 아무 반대도 없자 말을 이었다.
‘어제,’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저는 가루루 놈에게 크게 당할 뻔했습니다. 내 인간 동거인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가루루는 변덕스럽고 자기 말고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놈이지요. 하지만 나는 어제 순간적으로 가루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무엇을 신봉하고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 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에의 생각을 받은 많은 동물들이 동요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오래된 한옥 폐가 아래에 사는 터줏대감 구렁 영감까지 쉭쉭대며 어서 말해보라고 채근할 정도였다.
‘그 마음에는,’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끈끈하고 검은 살의와 증오, 뒤틀린 마음 말고는 없었습니다. 마치 송충이를 핥는 것 같았지요. 내 마음마저 검게 물들 뻔했습니다. 나는 오직 병든 인간에게서만 그런 마음을 느껴봤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동물들이 모두 공포에 질렸다. 그 거대하고 흉측한 외모만큼이나 마음마저 흉측하다니, 도대체 무슨 경험을 하면 그렇게 변하는 것인가 궁금할 정도였다.
하늘을 쳐다보던 라에는 벌써 이런 시간이 되었네, 하고 생각하고는 다시 한 번 좌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개인적인 일이 있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라에는 그들이 서로 불안한 마음을 전하고 받으리라고 알 수 있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닐까? 대안을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못한 채 자리를 떠나는 것은 괜한 혼란만을 만든 것은 아닐까?
추락하던 라에의 기분은 진규와 함께 부잣집 안주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완전히 최악으로 곤두박질 쳤다. 진한 화장으로도 감추지 못한 인간 여자의 추한 얼굴이(지독한 화장품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음에 안 들었다. 고양이 나이 일곱 살이면 인간으로 치면 이미 중년이다. 라에는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인간은 몇 년을 봐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라에와 진규가 이 부잣집 마나님의 집에 온 이유는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어젯밤 진규에게 전화를 했다.
“진규 학생, 학생이 그 오버스탠드인가 하는 능력이 있다면서? 그 능력으로 우리 햄찌가 왜 아픈 지 알아봐주면 안될까? 사례는 두둑이 할게.” 햄찌는 이 여자가 키우는 햄스터다. “우리 햄찌가 고양이를 무서워해서 동물병원은 못가거든. 그러니 와서 좀 봐줄 수 없을까?”
이 통화 때문에 라에와 진규가 이 으리으리한 부잣집 정원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오버스탠더로써—오버스탠더는 진규가 소위 중2병이라 불리는 사춘기 시절 만들었던 말이다.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 언더스탠드 보다 대단하니까 오버스탠드. 그 능력자는 오버스탠더. 애초에 그런 능력은 있지도 않았다. 동물과 생각이 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라에하고만 통할 뿐이다. 이제는 부끄러워 감추려 했지만 소문을 듣고 가끔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앞의 여자는 라에가 고양이라 들어오지 못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애초에 동물병원에 못 간 이유가 고양이 때문인데 고양이를 들일 수 는 없다는 논리다. 일리 있는 말이다.
‘라에야, 미안한데…’ 진규가 생각을 전했다.
라에는 이미 무엇을 부탁할지 알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에는 철망으로 된 케이스 안에 들어간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햄찌를 협박했다. (방 안에 아줌마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햄찌는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이유를 말했다. 이유는 한심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아냈어.’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뭔데? 뭔데? 어디가 아픈 건데?’
‘사타구니.’
‘사타구니?’
‘응. 발정 난 거야.’
‘발정?!’
‘발정에 욕구불만인 거지.’
중년 여자에게 진규가 부끄러워하며 진단 결과를 전하는 모습을 보며 라에는 웃음을 지었다. 가끔은 골탕을 먹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건을 해결하고 사례금을 두둑하니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에는 진규가 한눈을 파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을 보고 있나 하고 보니 부잣집 아줌마의 옆집에 있는 또 다른 부잣집 저택을 보고 있었다.
“저기가 이슬이네 집인데…” 진규가 혼잣말을 했다. “저기 커튼 쳐진 방이 이슬이 방이 어디려니….”
라에는 기분이 확 상했다. 돌아가는 길에 육포를 사달라고 할 작정이었는데 육포 생각이 확 달아났다. 혼자 가려고 내달리려는 데 멀리서 들개 울음소리가 울렸다.
“들개가 요새 동네에 많아졌네.” 진규가 말했다. “뒷산에 있는 건가? 아니면 강가에 돌아다니는 건가. 라에야. 조심해서 돌아다녀.”
‘응’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아무래도 같이 돌아가서 육포를 사달라고 해야겠군. 라에가 발걸음을 늦췄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진규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극성맞은 ���부형들이 학원에 보내한다고 우겨, 토요일은 점심시간 끝나면 바로 하교다.  가방 안에 교과서와 공책을 집어넣던 진규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저기, 잠깐 시간 있니?”
진규가 누구지, 하고 고개를 들었다. 숨이 멎을 뻔했다.
이슬이였다.
이슬이가 이끄는 데로 학교 건물 뒤로 가는 동안 진규의 심장이 드럼 솔로를 연주했다. 수줍은 표정으로 이슬이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을 올려다보자, 이미 박자고 뭐고 없이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댔다. 혹시 고백일까? 진규가 생각했다. 설마? 설마! 안 돼, 차라리 도망치고 싶다… 차라리 빨리 말해줘… 아니 아예 말하지 마…
“진규 네가 <오버스탠더> 라면서?” 이슬이가 말했다. 드럼 솔로가 끊겼다. 적막. 맥이 탁 풀리고 무릎이 떨려 주저앉고 싶어졌다. 요 며칠 계속 이러네, 내 무릎, 진규가 생각했다. “옆집에 진세네 아주머니가 이야기해주셨어. 햄찌를 고쳐줬다고.” 진세는 어제 진규에게 의뢰했던 아줌마의 딸이다. “우리 집에 오셔서 네 자랑을 엄청 하시더라고. 신통하다고. 그래서 말인데…” 이슬이가 잠깐 말을 끊더니, 진규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진규 너의 힘을 빌리고 싶어.”
진규 너의 힘을 빌리고 싶어, 적막하던 진규의 마음속에 메아리가 쳤고 간헐천처럼 용기가 솟아올랐다. “무, 물론이지! 나만 믿어!” 진규는 용기가 난 김에 자기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저기, 의뢰비 말인데… 나랑 주말에 영화 보러 가는 걸로 대신하는 건 어때?” 이슬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진규는 자신을 책망했다. 미친놈아,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산통을 깨냐… 망했어… 젠장….
“응. 그럼 있다가 우리 집에서 보자.” 이슬이가 미소 지었다.
하굣길은 꿈만 같았다.
진규는 자기 핸드폰에 정말로 이슬이 번호가 저장된 건지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연락처 목록을 확인했다. 이슬이, 010-2616-7769. 틀림없이 저장되어 있다. 염불하듯 전화번호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이 헤벌쭉한 표정을 보면 기분 나쁘다고 중얼거릴 정도였다. 전화번호를 중얼거리며 구름 위를 밟듯 다리를 건너던 진규의 기분이 두려움으로 변하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대한 개가 입에 새끼 강아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다리 건너에서 보였다. 그 뒤로 수십 마리의 들개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 들개는…?!” 공격당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진규의 몸을 잔뜩 웅크리게 만들었다. 공격당하면 어쩌지, 진규는 불길한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 전 얼굴을 맞은 그 개—가장 크다는 아이리시 울프 하운드보다 큰—공포영화에 나오는 늑대인간도 아니고—복수하려 들면—제발 그냥 가 줘—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그르렁, 하는 소리에 놀라 진규가 눈을 떴고 새끼를 문 거대한 들개의 차가운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몸 안 깊숙한 중심이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다. 뱃속이 얼어붙어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산산이 조각날 것 같다. 킁, 하고 거대한 들개가 고개를 돌렸다. 비웃는 건가, 진규는 생각했다. 분하지만 할 수 없잖아, 쪽수가 다르니까….
들개 떼가 떠나자, 진규는 주저앉고 말았다. 분하고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기분이다. 이 기분으로 이슬이에게 가야한다니. 이슬이. 010-2616-7769. 010-2616-7769. 010-2616-7769.
진규가 집에 들렀다가 이슬이네 집 정원에 나타난 것은 두 시간 뒤의 일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는 진규에게 이슬이는 자기가 키우는 ‘귀여운 통통이’를 소개했다. 어디가 귀여운 거야? 진규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써야했다. 그 들개만큼 크지는 않아도 이슬이네 귀여운 통통이는 상당한 덩치였다. 도사견이라 불리는 투견의 일종에 얼굴은 불도그처럼 가죽이 늘어져 있어 심술궂은 인상이었다. 자기를 보아도 엎드린 채 포갠 앞발 위로 턱을 올려놓고 ‘뭐 어쩌라고’ 하는 태도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큰일이다, 진규는 생각했다. 요사이 연속해서 위기가 찾아오는 게 아무래도 재수 옴 붙은 모양이야.
“불쌍한 통통이,” 이슬이가 쪼그리고 앉아 통통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통통이가 요새 통 밥도 안 먹고 밤새 잠도 안자고 끙끙대고 있어. 수의사 선생님도 이유를 모르시겠다고만 하시고…. 다리를 다쳐서 잘 걷지 못한 것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하시는 데, 우리 통통이 마음을 좀 고쳐줄 수 없겠니?”
이제는 개 심리 상담사 노릇까지 해야 한다니.
“부탁해.” 이슬이가 말했다.
진규는 이슬이의 슬픈 표정을 보는 것이 괴로워 견딜 수 가 없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라에가 없기 때문이다.
    3.
그 시각 동네 고양이들은 단단히 마음이 상한 라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양이는 마음이 토라져도 금방 잊고 놀이나 먹이에 빠지게 마련인데도 라에는 부루퉁한 심기를 감출 생각도 없이 웅크리고 있었다. 가끔씩 일어나는 가 싶으면 지나가는 부하들에게 시비를 걸어 대련을 한답시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부하들도 몸이 배겨나지 않으니 라에의 심기를 풀지 않으면 골병 나 죽을 판이었다.
‘라에 누님,’ 맥코리가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넌 저번에 내가 구해준—’
‘맥코리입니다.’ 맥코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번 모임 때 발언도 했었습니다. 누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관둬라.’ 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꼬리가 짧은 망스 종 고양이 시치였다. ‘지금 누님은 사랑 때문에 마음 아프시니까.’ 시치가 낄낄대며 웃었다. ‘인간과 고양이 간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캬!’
‘시치! 조용히 못해!’
‘누님, 또 그 꼬마가 누님더러 동물 마음 읽어서 초능력자 행세하게 도와달라고 했죠? 저번에 우리 집에도 왔잖아요. 나 소화불량 걸렸을 때. 아주 그 꼬마만 보면 헤벌쭉 해가지고는.’
‘네가 뭘 알아! 강에 떠내려가 죽을 뻔한 걸 날 살려준 게 진규야. 나한텐 아버지나 다름없고, 아들이나 다름없어. 나랑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고.’
‘누님, 인간은 목숨이 깁니다. 이대로 가면 누님은 호호 할머니가 될 거고, 먼저 죽을 게 분명해요. 아들이라 생각하시면 차라리 나은데, 연인이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같은 인간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그 마음도 닫힐 게 분명하다고요. 고양이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우리 고양이만큼 정을 맺고 끊길 잘하는 동물이 또 어디 있다고.’
‘…지금 그 계집애 집에 있단 말이야.’
‘이리 와서 육포나 씹으세요. 그리고 있다 들어가시고요. 그 꼬마도 이제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울 때가 되었어요.’
라에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육포를 씹으려 할 때 개 울음소리가 들고, 라에를 포함한 모든 고양이들이 반사적으로 전투자세를 취했다.
‘도와주십시오!’ 백돌 씨였다. ‘가루루가, 가루루가 제 아들을… 우리 진돌이를—!’
백돌 씨가 비명을 질렀다. 가루루와 부하 들개들이 라에 패거리를 습격한 것이다. 들개들은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고 맥코리와 시치를 비롯한 라에의 부하 고양이들이 발톱을 세우고 분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양이의 예민한 반사신경도 좁은 곳에서 기습을 당한데다가 체격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부하들이 하나 둘 씩 쓰러져갔다. 라에는 들개들 사이를 비집고 나갈 출구를 찾았다. 들개들을 향해 도약한 라에가 개의 대가리며 등을 짓밟으며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출구가 점점 가까워진다. 거의 밖으로 나와 몸이 반 쯤 빠져나오는 순간 갈비뼈에 엄청난 충격이 터졌다. 가루루가 앞발로 후려친 것이다.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충격으로 얻어맞은 쪽의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달릴 수 가 없었다. 라에는 그래도 달렸다. 뒤를 돌아보자 가루루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다.
—진규야!
—진규야!
—진규야!
‘…!?’
“라…에?” 진규가 말했다. 갑자기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만 같은 편두통이 일었고 아픈 부위마다 자신을 부르는 라에의 사념이 울려 퍼졌다. 보이지 않는 사념의 송곳이 고슴도치처럼 두뇌를 찔러대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 라에와 마음이 통했을 때 느꼈던 두통과 똑같은 두통이, 진규가 생각했다.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어뜯어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맥을 뛰듯 주기적으로 고통이 밀려왔다 멀어졌다. “으아아… 으으…” 입에서 제멋대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진규야, 괜찮니?” 이슬이의 목소리가 슬로우 모션으로 들을 때 마냥 잔뜩 늘어져서 들렸다. 머릿속에 엄청나게 많은 사념이 흘러들어왔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이었다. 진규가 통통이의 눈을 보자 통통이의 생각이 전해져왔다.
‘가루루 이놈,’ 통통이가 으르렁거렸다. ‘내 손자를… 내 다리만 성했어도… 이 멍청이는 왜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가루루? 그게 누구지?’ 진규가 생각을 전했다.
‘이봐, 인간 꼬마. 너 정말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가루루는 누구고 손자는 무슨 말이야?’
‘배라먹을 들개 놈들이 내 손자를 잡아갔어. 가루루는 그 들개 패 두목이고.’
—그 거대한 개!
그 순간, 진규의 머릿속에서 가루루의 생각이 폭발했다—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뭐, 뭐야?!—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그 가루루라는 놈, 제정신이 아니야!—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라에가 죽을 지도 몰라, 구해야 해!—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괴로워—죽여죽여죽여—머리가 터질 것 같아—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라에야—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라에야—!
진규가 스스로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통증이 주먹과 머리에 퍼지자 생각도 멈추었다. 그 가루루란 놈은 미쳤어, 진규가 생각했다. 막아야 해! 안 그러면 라에가 죽어! 거친 숨을 내쉬며 자기를 바라보는 이슬에게 진규가 말했다. “이슬아! 통통이한테 손자가 있니?”
“응? 아, 있어.” 이슬이가 설명했다. 불도그 잡종으로 이 근처에 산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그 개가 물고 있던 새끼는? 진규는 생각했다. 통통이의 손자는 아니야, 진돗개였으니까.
‘가루루 놈이 내 손자 말고도 다른 새끼를 잡아갔단 말이냐?!’ 통통이가 끼어들었다.
‘통통아, 손자를 구하고 싶으면 라에가 어디 있는 데로 안내해! 지금 당장!’
‘고양이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어. 다리 근처지. 날 업어 줘, 안내할 테니까!’
진규가 통통이를 업고 강가를 향해 달렸다. 손에는 이슬이에게 빌린 목도를 들고 있었다. 검도 따윈 해본 적도 없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놀란 이슬이가 뒤따라오려 하자 진규가 말리며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말만 남긴 채 이슬이 집에서 나간 지 2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강가는 아비규환이었다.
강가에 모인 들개들이 상처입고 쓰러진 고양이와 도와주러 온 동네 개들까지 노리개 삼아 괴롭히고 있었다. 강가에는 핏자국이 보였다. 목도를 든 진규의 손이 떨려왔다. 가루루가 라에를 앞발로 후려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라에가 힘겹게 앞발을 휘둘렀지만 허공을 겨우 긁을 뿐 이었다. 완전히 그로기 상태다.
“라에야!” 진규가 목도를 휘두르며 언덕을 내려갔다. 들개들이 달려들었다. 진규가 닥치는 대로 목도를 휘둘렀다. 자세는 엉망진창이었지만 필사적이었다. 그 사이 앞발로 몸을 질질 끌어 언덕을 내려간 통통이가 덤벼드는 들개들의 목을 물어 내던졌다.
‘이놈들!’ 통통이가 다리 기둥을 등지고 섰다. ‘내가 왕년에는 투견이랍시고 까부는 놈들 여럿 조졌다! 다 덤벼!’
들개가 덤벼들자 통통이가 앞발을 휘두르고 박치기를 하며 싸웠다. 이 모습을 본 개들도 노인장이 싸우는 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힘을 내서 들개들에게 달려들었다. 백돌 씨도 진돗개답게 적의 목을 물어 흔들어 싸우고 있었다.
라에가 있는 곳 까지 비집고 들어간 진규가 라에에게 생각을 전했다. ‘괜찮아?!’
‘괜…찮아…. 왜 왔어, 멍청아.’
‘싸우는 건 나중에 하자.’
진규 앞에 가루루가 나타났다.
‘가루루,’ 진규가 생각을 전했다. ‘왜 강아지들을 납치하는 거지?’
‘인간…’ 가루루가 생각을 전했다. ‘네놈은 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들어라. 네놈들은 나를 투견으로 낳았다. 내 아비와 나는 어미가 같다. 내 어미는 나의 할머니기도 하다. 그렇게 만든 것은 네놈들이다. 그렇게 태어난 나를 괴물이라 부르며 때리고 괴롭히고, 투견 판에 내보내 같은 동족의 목을 물어뜯게 만든 것도 네놈들이다. 내가 한쪽 눈이 멀자 나를 고기로 팔려 한 것도 네놈들이다. 그러나 나는 네놈들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 물러서라. 내가 원하는 것은 나를 위해 충성할 병사를 만드는 것 뿐 이고, 병사가 되지 못한 것들도 식량으로 쓸 가치가 있다. 그리고 나는 노예를 원한다. 이 지역을 내 것으로 만들어 이곳에 사는 놈들을 내 일을 위해 일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 내 일을 방해하지 마라. 그러면 네놈의 목숨은 살려주마. 내가 인간의 목숨을 빼앗은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은 마라. 네놈들의 목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연약하니까.’
진규는 무서웠다. 다리가 떨렸다. 머릿속에서는 가루루의 증오가 울려 퍼져 두통이 일었다.
‘진규야, 물러나… 이건 동물들의 일이야…’ 라에가 생각을 전했다.
진규가 다시 한 번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쳤다. 뺨을 쳤다. 너무 세게 치는 바람에 입 안이 터져 피가 조금 날 정도였다. 놀란 라에에게 진규가 생각을 전했다. ‘네 일이 내 일이야.’
가루루가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 진규가 목도를 내리쳤다. 겨냥이 빗나가 목이 아니라 어깨에 맞았다. 목도를 쥔 손이 아플 정도로 단단한 몸이었다. 앞발을 피해 물러난 진규가 발로 가루루의 턱을 걷어찼다. 가루루는 조금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약하군.’ 가루루가 생각을 전했다.
당황한 진규의 발목을 요크셔테리어가 물었다. 놀란 진규가 목도로 머리통을 내리치자 요크셔테리어가 물러났다. 발목에서 피가 났다. 그 틈에 가루루가 덤벼들어 박치기를 했다. 배를 얻어맞은 진규가 욱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명치가 욱신거렸다. 라에가 진규에게 덤벼드는 가루루에게 달려들었다. 가루루가 라에를 후려쳤다. 진규는 더 이상 화를 견딜 수 가 없었다. 진규가 목도로 가루루의 머리를 내려쳤다. 목도가 반으로 부러졌다. 세상에, 진규가 생각했다.
가루루가 달려들었다.
진규가 놀라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가루루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진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비명 소리가 울렸다.
진규가 눈을 떴다. 가루루의 가슴에 부러진 목도가 박혀있었다. 진규가 바닥에 쓰러지면서 들고 있던 목도가 마침 가루루의 가슴팍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부러져서 뾰족해진 끝이 가루루의 가슴에, 반대쪽 끝이 바닥에 댄 상태에서 가루루 스스로가 목도를 몸에 박아 넣은 셈이었다.
“이겼다…” 진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루루가 비틀거리는 모습을 본 들개들이 일제히 전의를 상실했다. 집단생활을 하는 만큼 명령을 내릴 우두머리가 당하면 속수무책이다.
진규가 라에에게 다가가는 사이 가루루가 강가로 내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들 의아해 하다 가루루가 강가 멀리 놓여있는 상자를 향하는 순간, 진규는 상자 속에서 사념을 느꼈다. 매우 미약하고 작은 사념이었다.
“강아지가!” 진규가 말했다. “강아지가 저 안에 있어!”
라에와 진규가 가루루를 쫓으며 같은 편인 모든 고양이와 개들에게 생각을 전하는 사이, 가루루가 상자를 물고 강으로 집어던지자, 빈사상태인 강아지 세 마리가 상자 밖으로 튀어나왔다. 상자와 강아지들이 강물에 빠졌고 통통이와 백돌 씨가 내지른 사념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에가 물로 뛰어들었다.
가루루도 물로 뛰어들었다.
강가에 선 진규가 강을 내려다보며 주저했다. 수영을 하지 못하지만 강아지를 구해야 한다. 진규가 눈을 감고 물로 뛰어들었다. 몸에 힘을 빼, 라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규는 몸에 힘을 뺐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지만 분명 물 위로 떠올랐다. 손과 발을 휘저으며 진규는 강아지들을 향했고, 그 사이 라에가 먼저 강아지 두 마리를 입에 물고 강둑으로 향했다.
가루루가 남은 강아지 한 마리의 목덜미를 물었다.
‘리스야!’ 통통이가 울부짖었다.
라에가 강아지 두 마리를 강둑 위로 올려놓았다. 백돌 씨가 아들 진돌이를 끌어안고 열심히 혀로 핥아 체온을 높이려 했다.
물을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진규가 가루루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높이 든 손에 통통이의 손자 리스를 들고 있었다.
“라에야!” 진규가 소리치며 리스를 던졌다. 리스가 강둑 쪽 물 위로 떨어지자 라에가 다가와 건져내는 사이 진규는 가루루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물을 먹으며 강물 안으로 가라앉았다 올라오면서 필사적으로 가루루의 목에 매달렸다. 가루루의 주변으로 핏물이 배어나왔다. 진규는 발버둥 치는 가루루의 가슴에 박힌 목도를 찾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가루루가 컹,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이겼다, 진규가 생각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진규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라에였다. 라에가 볼을 핥아주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그 다음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이슬이가 보였다.
이슬이는 곧바로 마을 사람들을 불렀고 남은 들개 떼들을 쫓아내주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곳을 알고 오게 되었는지는 이야기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 뻔해 진규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는 가루루가 누워있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유기견 센터로 가게 된다면 분명 안락사가 될 것이다. 진규는 가루루가 불쌍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괜찮아?’ 진규가 라에에게 생각을 전했다. 라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진규가 집중해 주변의 사념을 찾았다. 아무 사념도 느껴지지 않았다. 없어졌구나, 진규가 생각했다. 한 순간 오버스탠더가 된 진규는 이제 보통의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이슬이가 다가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니?”
“같이 영화보고 난 다음 이야기해 줄게. 아마 영화보다 더 재미있을 거야.” 진규가 말했다.
이슬이가 웃었다.
    다음 날 일요일, 진규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 이슬이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도 볼일이 있다고 집을 비운 상태였다. 정원에는 통통이와 통통이의 손자, 그리고 라에가 있었다.
‘이제 그 꼬마랑 사념전달은 안 된다고?’ 통통이가 말했다.
‘할 수 없지. 나대신 좋은 사람이 생겨버렸으니까.’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그래도 빚이 있으니까. 잘 부탁하네, 사돈.’
‘이쪽이야 말로 잘 부탁해요, 사돈.’
—내가 죽더라도 진규는 날 잊지 않겠지. 그러니 댁네 따님이 마음에 안 들어도 용서해 주는 거야.
라에가 통통이의 손자를 혀로 핥아주며 생각했다.
<끝>
2013년 10월 29일 21:39 초고 시작
2013년 11월 01일 18:20 초고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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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kharaas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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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장기자랑 (단편소설)  2014-06-03
천사의 장기자랑
손지상
1. 천사는 채찍질을 좋아해
“감사합니다아.”
천사 같은 인공적인 외모와 귀여운 행동으로 남학생과 군인을 자신의 노예로 삼은 아이돌 가수 스위티는 말끝을 길게 늘려가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 손목을 팬이 붙잡았다.
“스위티님,” 팬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흥분으로 젖은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저기, (헉헉), 사진, (헉헉), 한 장만, (헉헉), 찍을 수, (헉헉), 있을까요?”
“사진요오?”
구겨지려는 얼굴을 천사보다 강한 의사선생님이 주신 안면근육의 힘으로 붙잡으며, 그녀는 영업용 미소와 냉정함을 유지했다.
“죄송해요오,” 손목을 빼내며 그녀가 말했다. “그건 조금 곤란해요오. 다음 스케줄로 바로 가야해서요오.”
그녀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며, 천사 같이 인공적인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외설적인 욕설을 내뱉었다. 이 말을 들은 구현승은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씨름 선수라고 해도 믿을 만한 커다란 체격이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며, 스위티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턱짓을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구현승은 알아서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 커다란 덩치를 웅크려 그녀 앞에 대령했고, 바로 마시게끔 뚜껑도 어느 새 따놓았다.
스위티가 음료수를 받아 마시는 동안, 구현승은 뒷짐을 쥐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체격 차이는 거의 네 배에 달했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스위트는 시선으로 구현승을 훑어보며 호색한 미소를 지었고, 다 마신 음료수 병을 건네면서 통굽 구두로 정강이를 찼다. 얻어맞은 구현승이 절룩거리며 흥분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앞으로 올 더 큰 환희의 고통을 기대하고 있었다.
스위티가 한 번 더 정강이를 차자, 구현승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신음소리를 냈다.
“누가 느끼래? 누가 마음대로 느끼래?” 스위티가 넥타이를 휘어잡았다. “사장이면 마음대로 느껴도 돼? 응? 잠깐,” 냄새를 맡는 그녀의 성형한 코는 제대로 벌름거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냄새야?”
타락한 천사처럼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카우걸처럼 그를 끌고 구석에 있는 작은 모니터 앞 파이프 의자로 온 그녀는 파이프 의자를 손으로 대보더니, 주변 공기를 킁킁거렸다. 그 동안 그는 계속해서 안절부절 못해했다.
혀로 이를 핥으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본 그녀가 뺨을 후려치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 여기 앉아서 딸 쳤어, 안 쳤어?”
큰 덩치가 부끄러워하며 몸을 꼬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입술을 핥았다. 흥분으로 몸이 떨려왔고, 점차 가열되기 시작했다.
조인트.
“……네.”
조인트.
“제, 지저분한, 덩어리를 꺼내, 손으로 훑어 제 멋대로 즐거움을 느끼려 했습니다. 여왕님.”
그 말을 듣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옳지, 잘했어, 우리 승현이. 잘못했지? 그지?”
“네.”
돌연 그녀가 뺨을 후려쳤다. “벌 받아야하지?”
관능적인 애무라도 받은 양 급격한 혈액순환으로 신체의 특정한 기관으로 혈액이 몰려 화색이 돌았다. 이를 알아챈 그녀가 말했다. “변태새끼. 나한테 맞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그지? 그래, 안 그래? 나한테 얻어맞고 싶어서 나 노래하고 춤추고 딴 놈들한테 애교 부리는 거 보고 여기 앉아서 딸 친 거잖아. 응? 대답 안 해? 안 그래도 오늘 녹화하는 데 병신 같은 놈들이 앞에 와서 직찍하고 치마 속 찍고 지랄해서 짜증났었는데. 응? 맞아 안 맞아?”
조인트.
“흐음!”
“이 변태새끼. 안되겠네?” 다시 부드럽게 꾸민 목소리로 말하며, 스위티가 목소리처럼 부드럽게 내압으로 팽창한 가랑이 사이를 더듬었다. “얻어맞으면서 여기 단단해지는 버릇 나쁜 새끼는 단단히 맞아야지. 그렇지?”
하얗고 긴 그녀의 손가락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출 때처럼 상대방의 팽창을 촉진시켰다. 그녀의 춤과 노래를 보며 자극받았던 관중들의 마음처럼 그의 마음도 관능의 기대로 자극받았다.
조인트를 차며 그녀가 말했다. “가서 회초리 가져와.”
그녀의 말이 종교적 구원이라도 되는 양, 그는 대기실 한쪽 구석의 가방으로 달려가 채찍을 꺼내 돌아왔다. 말에게 더 빨리 달리라 재촉할 때 쓰는 가느다란 회초리 같은 채찍이 아니라, 굵직한 손잡이 끝에 빗자루처럼 열 세 가닥의 짧은 가죽 끈이 달린 흉악한 물건이었다. 채찍을 손에 들자, 그녀는 오르가즘을 음미하듯 채찍을 쓰다듬었다.
“엎드려. 돼지.” 그 말에 그는 열락에 들뜬 돼지처럼 엎드렸다. “엉덩이 까고.” 그녀의 통굽이 항문을 찔렀다. 꼬리뼈를 맞은 그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더 이상 천사 같지 않았다.
그가 벨트를 풀고 엉덩이를 드러내자 곧바로 채찍질을 가했다. 고양이 발톱처럼 날카롭게 공기를 찢으며 날아든 가죽 끈이 엉덩이를 할퀴자, 고통을 참으려 꾹 다문 입에서 새어나온 쾌락에 찬 돼지 울음소리가 대기실에 흘렀다.
두 사람 모두가 즐거웠다.
    스위티의 속내는 전혀 천사 같지도 귀엽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귀엽게 생겼다는 철저히 연출하고 이용할 만큼 인생경험을 쌓았다. 대외적인 프로필에는 나이가 19살이었지만 사실은 26살이었고, 4년 간 일본에서 최고급 SM클럽의 여왕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욕망 그 자체였다.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 하는 그녀의 욕망은 올바른 환경에서라면 곧바로 자랐을 나무가 험난한 세상에서는 뒤틀려 자라듯, 뒤틀려 자랐다. 욕망의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수컷의 세계였다. 욕망은 힘이고, 암컷은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수컷 세계의 룰이다.
그럼에도 강한 수컷일수록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면서 자기를 지배해줄 암컷——그녀는 이 진정한 암컷을 엄마라고 불렀다——을 원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15살 때 처음으로 남자에게 강제로 당하던 때 깨달았다.
자기 몸 위에서 몇 번 헉헉대다 뻗어버린 남자가 귀여워 보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무기가 무엇인지 알았다.
줄듯 말듯, 절대 주지 않는 것.
안달 나게 만들수록 내가 더 강해진다. 진정한 암컷은 수컷의 세계를 빼앗으려 하지 않는다. 수컷보다 강하면서도 동시에 수컷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조종한다.
기분 나쁜 팬에게도 그녀는 귀엽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속마음으로는 나이프로 배때기를 쑤셔 휘휘 저어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설령 직접 사람을 죽여 법정으로 끌려와도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계집아이고 외려 죽은 사람의 잘못이 더 크다고, 눈물을 글썽이고 곱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시에 속으로 어느 판사랑 자야 무죄가 쉽게 나올 지를 계산한다.
    추소진도 룰을 잘 알고 있었다. 스위티의 코디네이터인 그녀는 스위티와 구현승이 채찍으로 즐거운 시간을 지내는 소리를 들으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옆방에서 들었다거나 혹은 천장에서 환기구를 통해 들은 게 아니라, 녹음된 테이프를 통해 더러운 욕망이 서로 뒤엉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구현승의 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달아놓았고, 그 일이 있은 지 이틀 후가 돼서야 대기실에서 일어난 일을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소리는 적나라했다. 구현승이 자위하면서 스위티의 본명을 외치던 소리, 스위티가 구현승에게 채찍질하며 퍼부은 폭언, 구현승의 쾌락에 찬 비명소리,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그녀의 아름다운 엄지발톱에 맹세하며 통굽구두에 묻은 먼지를 혀로 핥는 소리까지 전부 녹음되어 있었다.
“어쩐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며칠 전 부터 그가 샤워하고 나서 평소에는 잘 두르지 않던 배스 타월을 두르고 나온 이유를 이해했다. 엉덩이에 난 채찍질 자국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옆방에서 코를 골고 있는 남편의 목을 조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자기가 몰래 녹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만다.
구현승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인 그와는 코디네이터 일을 하다 만나 결혼했다. 그는 연예인 기획사 사장이라, 아이돌 가수 로드 매니저 같은 최하급 카스트 신분이나 할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진해서 일본에서 발굴해온 정체모를 여자의 매니저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그녀만이 아니라 회사의 모든 사람이 두 사람 간의 관계를 수상하게 여겼다.
함부로 움직일 수 는 없었다. 그는 본래 조직 폭력배였고, 지금도 인맥을 유지하고 있는데다가, 스위치는 회사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어오는 주력 상품이라 폭력조직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하고 싶은 데 하지 못하게 막으면 욕망은 팽창하고, 팽창할 데로 팽창한 욕망은 언젠가 폭발하고 만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스위티의 안티카페로 접속했다.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다. 카페에 잔뜩 욕하는 글을 올리고, 그녀가 몰래 촬영한 스위티가 담배를 피우고 천박한 표정으로 욕을 하는 사진을 올렸다. 덧붙여 그녀가 변태고, 사람 채찍질하기를 좋아하며 증거도 있다고 글을 올렸다. 게시판이 달아올랐다.
기분이 조금 풀린 그녀가 샤워를 하고 온 사이 쪽지가 하나 도착해, 돈을 줄 테니 그 증거를 살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닉네임을 알아보았다. 카페에 가끔씩 이상한 시체사진이나 여자 아이돌이 엉망으로 얻어맞는 장면을 어설프게 그린 그림을 올리던 강제로 탈퇴시켜버릴까 고민했던 적도 있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녀는 무시하려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변태 썅년’에게 한방 먹일 기회다. 벌써부터 그 여자가 변태 같은 남자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회사가 절대 이 일을 공표할 리가 없다. 그런 소문이 돌았다가는 경찰 조사를 해야 하고, 나이를 포함한 많은 거짓 경력이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성형수술로 얼굴은 바꿀 수 있어도 주민등록번호와 지문은 변하지 않기에, 기록은 남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어떠한 피도 묻지 않는다.
설령 장난이었다 하더라도, 리스크는 없다. 그녀는 먼저 돈을 요구하며 계좌번호를 보냈다. 원하는 정보는 돈을 받으면 주겠다고 했다. 요구한 돈은 오백만원이었다. 너무 많은 돈은 한꺼번에 계좌이체가 되지 않고, 의심받을 수 도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돈 보다는 복수다.
다음 날 계좌에 돈이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변태 같은 시체나 내장 사진 게시물을 올리던 자에게 비밀리에 계획된 스위티의 화보집 촬영장소와 날짜, 그리고 시간을 알려주었다.
         2. 사생팬은 뼛속까지 안다
친구 마이크에게 전화를 받은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마이크는 <형제정육점>에 모습을 나타냈다. 밖으로 나가기를 무엇보다 싫어하는 그는 커다란 몸을 후드 티로, 얼굴을 마스크, 선글라스로 가리고 있었다.
가게는 이면지에 어설프게 쓴 임시휴업이라는 글자가 붙어있었다. 마이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직접 만든 가면을 쓴 소가죽가면이 곱창, 대창, 간, 허파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마구 두들겨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처럼 내장기관들이 엉망으로 찢기고 너덜거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 입을 가린 마스크를 벗으며, 마이크가 말했다.
“호! 호! 호!” 짧고 흥분된 소리로 박자에 맞춰가며 망치질을 하던 소가죽가면이 말했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덕삼리! 하마칸펜션!”
“뭐라고?”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덕삼리! 덕삼해안로! 하마칸펜션!”
“진정하고 말 해봐.” 마이크가 가면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영화 <할로윈>의 연쇄살인마 마이크 마이어스가 쓰고 나오는 생기 없는 하얀색 얼굴에 무표정한 지푸라기 같은 가발이 붙은 가면이다.
인터넷 스플래터 호러 영화 동호회에서 알게 된 두 사람은 호러 영화의 주인공에게서 닉네임을 따왔다.
소가죽가면은 <텍사스 전기톱 학살(Texas Chainsaw Massacre)>의 등장인물 레더페이스(Leatherface)가 되고 싶어 했다.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 가족 중 둘째 아들인 레더페이스, 버바는 지능이 낮고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정육점에서 일을 해와 이제는 나이 든 주인 부부 대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던 소가죽가면은 버바와 공통점이 많았다. 버바도 자신처럼 남들과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동질감을 느꼈다. 말을 던지려 하면 기계적이고 이상한 리듬에 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와 콤플렉스였다.
소가죽가면과 버바가 차이가 있다면, 버바가 커다란 덩치에 전기톱을 휘두르며 여자를 살해한다는 점이었다. 소가죽가면은 왜소했고, 버바의 힘에 매료되었다. 소가죽가면의 눈에는 버바가 강한 남성의 상징으로 보였고, 그가 되고 싶었다. 소가죽가면은 그를 흉내 내, 가죽을 이어 붙이고 얼굴과 입에 구멍을 뚫어 가면을 만들었다. 원작에 나오는 사람얼굴가죽으로 만든 가면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비슷했다. 전기톱은 구할 수 없었다. 구한다 하더라고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만큼 소가죽가면은 마르고 연약했다. 대신 소가죽가면은 그림으로 욕구를 해결했다. 엉망으로 망가지고 얻어맞은 여자의 그림을 그리며 연필과 샤프를 전기톱 삼아 학살을 계속했다.
한편, 마이크는 접근하는 방법이 달랐다. 본래부터 나르시시스트이자 영화광이었던 그는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얼굴이 되려고 20번이 넘는 성형수술로 얼굴을 만들고, 성장호르몬과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며 괴물같이 몸을 부풀렸다.
자신과 똑같은 짓을 했다가, 파멸에 이른 제이슨이라는 살인마가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에 등장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제이슨처럼 마이크도 나락에 떨어졌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으로 여성형 유방증에 고환이 줄어들었고, 성장호르몬의 부작용으로 눈썹뼈와 광대뼈와 턱뼈와 내장기관이 부풀어 올랐으며, 성형수술의 부작용으로 얼굴이 추하게 변해버렸다. 가슴과 배가 튀어나왔고,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얻어맞은 다음 날의 얼굴 같았다. 이후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고, 머리를 길러 얼굴을 가리고 지냈다.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되고, 친하게 지내게 된 데에는 서로 공포영화를 좋아하고, 가면을 만들어 쓴다는 공통점 말고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으깨져 걸레처럼 변한 돼지 내장을 들어올리며, 소가죽가면이 자신이 구입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마이크가 정말이냐고 흥분하자, 소가죽가면도 흥분해서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호! 호! 호!”
그러자 마이크도 옆에 놓인 커다란 돼지고기 덩어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외쳤다. “호! 호! 호!” 고깃덩어리가 마이크의 주먹에 뭉개지고 깨졌다. 거대한 그의 근육은 <할로윈>의 마이크 마이어스 보다는 <13일의 금요일>에 나오는 제이슨이 더 어울려 보였다. 마이크 마이어스는 분명 큰 키에 괴력의 소유자이지만 근육질이지는 않았고,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소가죽가면이 으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진 돼지몸통에 대고 정육점 식칼을 쑤셔 박았다. “호! 호! 호!”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찔렀다.
“비켜봐.” 마이크 마이어스가 두 주먹을 망치삼아 내리쳤다. “호! 호! 호!”
소가죽이 박자에 맞추어 스위티의 노래를 불렀다.
둘은 스위티의 팬이었다. 아무리 강한 남자라도 노예로 만들며, 미소 짓고 춤추고 노래하는 그녀의 손짓과 몸짓과 눈짓에 어쩌지를 못하는 자신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팬으로 활동했다. 비밀을 알고 싶었다.
평소에는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두 사람도 스위티의 콘서트와 공개녹화만은 꼬박꼬박 참석했었다. 그들은 그들답게 행동하다가 영원히 콘서트장이나 공개 녹화장에 출입금지를 당했다. 다른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출입금지이유를 그들만큼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소문이 퍼져 팬 카페나 게시판에서도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들이 자료를 찾아 가게 된 곳은 스위티 안티 카페였고, 안티 카페에 올라오는 그녀를 비방하는 자료가 소위 ‘직찍’이니 하는 팬들이 만드는 자료보다 연출되지 않은 그녀 본연의 모습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원한 것은 ‘아이돌 스위티’가 아니라, 아름다운 얼굴의 피부 아래 감추어진 ‘인간 스위티’의 솔직하고 적나라한 내부의 힘이었고, 안티 카페의 자료야 말로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둘은 안티 카페에 터를 잡고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소가죽가면이 빚을 내서 만든 오백만원으로 그 정보를 샀다고 말해주자, 마이크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안티 카페 시삽이라는 말을 듣고 같이 흥분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게 된 두 사람은 스위티를 만날 생각에 흥분에 젖었다.
강림한 여신을 만나 직접 숭배할 것이다.
여신과 합일을 이루고,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진실을 그녀의 가죽 아래의 근육 하나하나 피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창자로 채찍질하는 피투성이여신을 떠올리며 그들은 계획을 세웠다.
“호! 호! 호!”
    ——3일 뒤, 주말.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덕삼리 덕삼 해변의 하마칸펜션에서 비키니 수영복 차림에 메이크업을 한 스위티가 짜증을 부리며 밴에 올라탔다.
“당장 안 와!”
그녀의 호령에 뒤이어 구현승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밴은 동해안 외곽도로를 달렸다. 평일이라 차량은 없었고 강원도 명물인 산과 나무만이 검은 색으로 몸을 감춘 차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창문 밖의 아름다운 해안 풍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가 말했다. “그 새끼 뭐야? 왜 씨발 더듬는데?”
“아무리 그래도 때리면 어떻게 해. 계약금을 물어주게 생겼잖아. 촬영 다 끝내지도 못했는데.” 운전을 하는 구현승이 말했다.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그의 말에 발끈한 그녀가 아이돌 가수답게 차 안에서 유연하게 몸을 틀어 운전석의 머리받침 부분을 발로 걷어찼다.
“……차 세워.”
“응?”
“차 세우라고!”
밴이 멈췄다.
“왜 그래?” 그가 말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가 운전석을 발로 찼다.
“그만해.”
발길질.
“사진작가라는 새끼가 나한테 그런 짓을 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어?”
발길질.
“그만해.”
발길질.
“그만하라고!”
차가 멈추었다. 그녀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그도 따라 내렸다.
“감히 나한테 소리를 질러?” 그녀는 정강이를 걷어찼다.
화가 난 그가 뺨을 때렸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아?”
“너 지금 쳤어? 이 돼지가, 감히 여왕님을 쳐?”
“자그마치 천만 원이야!”
“씹새끼야!” 그녀가 그의 가랑이 사이의 급소를 발로 걷어찼다. 큰 덩치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무릎이 바닥을 찧자, 이번에는 그녀가 턱을 걷어찼다. 입에서 피가 튀고 이가 깨지며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그의 가랑이를 짓밟으며,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 이 더러운 걸 평생 못 집어넣을 줄 알아. 차라리 내장을 다 꺼내서 찢어버리고 말지. 내가 너 말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아?”
그 말을 들은 그의 얼굴이 자��를 버리고 떠나겠다고 협박하는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아이의 얼굴로 변했다.
“천만 원?” 그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웃기지마, 그까짓 돈 순식간에 벌 수 있어. 니네 회사랑은 끝이야. 알았어!?” 분해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좋지? 나한테 얻어맞으니까 좋지? 응? 이 더러운 돼지 새끼야,” 담배를 끌 때처럼 발을 비볐다. “이 더러운 고깃덩어리를 내 안에 집어넣고 싶어서 난리 났잖아, 지금. 그렇지? 이거 봐, 커졌잖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너는 나 못 잊어,” 그녀가 말했다. “너는 내 노예거든. 내 손길을 머리로는 잊으려고 해도, 몸이 잊지를 못해. 왠지 알아? 이미 그런 몸이 되어버렸거든. 넌 이미 돼지새끼야. 그렇지?” 분한 얼굴로 얼굴을 구기던 그의 가랑이를 그녀가 한 번 더 짓밟았다.
“흐음!”
“이거 봐. 맞지? 말해. 잘못했다고 말해.”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여왕님.”
“잘했어. 그 사진작가 새끼는 어떻게 할 거야?”
“애들 시켜서 손보겠습니다.”
“손.”
“네?”
“손 잘라 와.”
“손……, 이요……?”
“그래. 다시는 일 못하게 오른손을 잘라 와.”
침묵.
“안 들려, 돼지. 대답 안 해?”
“네…… 알겠습니다.”
“뭘 알겠다고?”
“잘라……, 오겠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발을 떼더니, 비키니 수영복 상의를 위로 들어 올려 가슴을 노출시켰다. 땀에 젖은 하얀 피부가 여름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자, 하반신으로 혈액이 몰리기 시작했고,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충격을 받은 탓에 부풀어 오르자 고통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의 고통을 확인한 그녀는 더없이 즐거워보였다.
“망가졌나 아닌 가 확인해야 하니까, 제대로 뽑아줄게.” 그녀의 말에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명령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있는 그녀는 승리자의 위엄을 담아 명령했다. “일어나.”
그는 명령에 따랐다. 극도의 즐거움과 함께.
    들썩거리는 밴을 향해, 렌터카가 다가오고 있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세단에는 소가죽가면과 마이크가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밴과의 거리가 가까워오는 데도 렌터카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오히려 속력을 높여갔다. 밴은 이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충격.
계속해서 들썩거리던 밴이 크게 렌터카와 부딪혀 흔들렸다.
마이크와 소가죽가면이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어도 충돌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 몸이 왜소한 소가죽가면은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로프처럼 다리가 흐느적거렸다.
마이크가 먼저 움직였다. 손에 든 망치를 휘둘러 검게 선팅된 유리창을 깼다. 유리조각이 안으로 흩어지며 빛이 들어와, 구현승의 뱃구레가 난 배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던 스위티의 분노한 얼굴을 비추었다.
“뭐야, 이 새끼야!” 구현승이 나오며 말했다.
자기보다 덩치가 더 크고, 이상한 가면을 쓴데다가, 망치까지 들고 있는 마이크를 본 구현승은 당황해 몸의 여러 부분이 움츠러들었다. 창백해진 엉덩이에 남은 채찍질 흉터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변태새끼들!” 스위티가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밖으로 나왔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여왕처럼 당당했다. “당장 안 꺼져? 너네 그 새끼들이지? 싸인 받으러 왔다가 머리카락 달라고 지랄하던?”
“스, 스위티, 진짜 스위티——호! 호! 호!”
흔들리는 다리로 다가온 소가죽가면이 로프를 양손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듯 잡아당겼다. 대답하듯 마이크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망치를 들어올렸다.
“호, 호, 호.”
둘은 스위티의 노래를 합창하며 달려들었다.
         3. 장기자랑
고속도로 휴게소에 앞 범퍼가 망가진 자동차가 들어왔다. 휴게소에 주차하는 차는 최대한 휴게소에 가깝게 주차하는 반면, 이 자동차는 일부러 한적하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주차했다. 차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주차장은 텅 비어있었다.
마이크는 긴 머리카락과 황사방지용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고, 소가죽가면은 자기 머리만큼 큰 비니를 눈썹을 가릴 만큼 깊게 쓰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는 마이크 대신 소가죽가면이 휴게실로 향했다.
여름날의 날카로운 햇빛이 강원도의 깨끗하고 투명한 대기를 뚫고 사물의 윤곽을 날카롭게 갈아내어, 산마다 가득한 초록 숲의 꿈틀거림이 생생하게 보였다. 마찰열로 공기는 후덥지근했고, 바다를 거쳐 산을 넘어 불어 내려오는 바람마저 습기는 날아가고 소금기만 남아 건조했다. 마른 바람이 최대한 스스로를 가린 소가죽가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가죽가면은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여신에게 공양할 제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흥분으로 인한 과도한 각성상태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목이 말라, 스포츠 드링크만 샀다. 여신이 먹을 음식은 비록 편의점에서 고른 것이어도 모두 고급이었다.
그들이 공양 준비하는 동안 트렁크에 갇힌 여신은 조용히 힘을 모으고 있었다. 정신이 가진 힘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머리가 깨진 채로 식어가는 커다란 남자의 시체가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여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현재고, 미래다. 물론, 그녀의 미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트렁크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일은 요새 만드는 차에서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설령 몰랐다 하더라도 트렁크 안에는 미세한 빛이 이 버튼을 누르면 안에서 트렁크를 열 수 있다고 알려주고 있음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네 개였다. 1) 그녀의 팔이 뒤로 묶여있고, 2) 변태 하나는 차 안에 남아있고, 3) 그 버튼을 이 덩치 크고 차갑게 식은 시체가 가리고 있으며, 4) 언제 이 시체를 치워 밖으로 나가냐.
내릴 때 차가 별로 흔들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변태는 덩치가 작은 놈 만 나갔다. 그녀를 묶었던 놈이다. 놈이 떠난 지, 대략 47초. 남자의 걸음으로 미루어보면 건물에 들어갔을 것이다. 47초의 시간동안 그녀는 뒤로 묶인 팔을 풀어냈다. SM클럽 여왕 출신인 그녀에게 매듭은 밥벌이 수단이다. 아마추어가 묶은 매듭 따위 쳐다만 봐도 풀어낼 자신이 있었다. 주변에 귀를 기울여 봐도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간간히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도움을 줄 사람은 주차장에 없다. 휴게소로 가서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만일 주차장에 차가 있었더라면 전라로 휴게소를 내달리는 미녀가 단번에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신문에 몇 번 스캔들로 기사가 나기는 해도, 비극의 히로인을 연출하면 오히려 동정표를 얻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귀여운 아이돌 콘셉트는 무리겠지만 섹시 콘셉트로 변신하면 인기는 더 얻을 수 있다.
좁은 트렁크 안에서 몸을 움직여 시체를 겨우 비뚜름하게 어긋나게 하고, 품 안 가득 차가운 덩어리를 안으며 손을 뻗은 끝에 탈출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예리한 햇빛이 구현승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었다. 죽어서 보아도 추한 얼굴이다. 서둘러야 한다. 트렁크가 열리면 차 안에 알림등이 켜진다. 그 덩치 큰 덩치도 알아차린다. 전라인 채로, 그녀는 달렸다.
“살려주세요!” 그녀는 맨발로 달궈진 콘크리트 바닥을 달리며 외쳤다. “살려주세요!”
소리를 들은 마이크가 튀어나가 그녀의 머리칼을 잡았다. 그녀가 주먹질과 발길질로 저항하는 모습을 멀리서 본 소가죽가면이 달렸다. 허약한 다리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마이크가 두꺼운 손으로 입을 막자 그녀가 물어뜯으려 들었다. 그녀는 거칠고, 강했다. 탄복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마이크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두꺼운 팔이 가는 목에 감기자, 그녀가 팔뚝을 할퀴며 버둥거렸다.
“쉬이……, 쉬이…….” 마이크가 말했다.
마이크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머리가 차가워지더니, 몸이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들었다.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 사형수처럼 공중에 떠 버둥거리던 그녀의 다리가 얌전해지고, 축 늘어졌다.
바닥에 그녀를 눕히는 사이 급히 달려온 소가죽가면이 도착했고, 마이크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똑바로 묶었어야지. 안에 누구 있었어.”
“아줌마 셋, 아저씨 하나.”
“직원?”
겁먹은 소가죽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렌터카가 떠났다. 그 사이 휴게실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차린 직원은 아무도 없었고, 그날은 손님이 하나도 없는 심심하고 평범한 하루였다.
    뱃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움과 거북함을 느낀 스위티가 정신을 차렸다. 온 몸은 밧줄로 묶여있었고, 목에는 목줄이,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몸 안으로 고무호스를 통해 차가운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부풀어 오른 배가 아팠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항문에 삽입된 호스를 빼려고 했다. 재갈 문 입에서는 비명과 욕설이 뭉개져 새어나왔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음을 안 마이크가 다가와 호스를 뽑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기를 달아놓는 창고 같은 방이었다. 그녀는 영화에서 이런 방을 본 적이 있었고, 소름끼치는 상상으로 몸을 떨었다.
한쪽 구석에는 편의점이나 해변에서 볼 수 있는 접이식 동그란 파라솔 테이블과 원색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다. 소가죽가면이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살인을 한 자는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긴 수면을 취하거나 영양분을 섭취하려 든다고 한다. 그만큼 살인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행위다. 게다가 그들은 평소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강원도까지 나가 사람을 한 명 죽이고, 여신을 납치해왔다. 긴 휴식이 필요하다.
그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사실은 지금 그녀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공포로 굳어버렸다.
도살된 돼지를 거는 행거에 구현승이 걸려있었다.
굳어버린 몸이 충격으로 풀어지고, 뱃속에 가득 찬 차가운 물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려 했다. 화장실로 데려가라고 명령하려고 했다. 할 수 없었다. 재갈이 입을 막았고,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차가운 물과 함께, 창자 안에 들어있던 배설물이 빠져나왔다. 치욕스러운 소리와 함께.
분한 나머지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비명을 질렀다. 악을 쓰고 몸을 뒤흔들었다. 그럴 때 마다 냄새나고 역겨운 액체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배설의 치욕이 더 강해질 뿐이었다.
“신성한 육체에 이런 더러운 것이 있어서는 안 되지요. 깨끗이 비우셔야 합니다.” 기도를 올리는 듯 조곤조곤하게 말하며 엉덩이에 물세례를 퍼부은 마이크가 이번에는 호스를 그녀의 입에 강제로 집어넣어 물을 먹였다. 강제로 목을 채우는 물 때문에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그녀의 배를 눌러 강제로 토하게 만든 그는 다시 바닥을 물청소했다. “당신은 이제 영원한 여신이 될 겁니다.”
“호! 호! 호!” 테이블 위에 예리한 날붙이며 내장을 담을 병을 정리했다. 드디어 진짜 레더페이스 버바처럼 여자의 얼굴가죽으로 가면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얼굴을. 여신과 하나가 될 날이 왔다.
“당신의 강함이 우리의 일부가 되고, 우리는 평생 당신을 숭배하며 살게 되겠지요.” 마이크가 그녀의 온 몸에 물을 뿌려 씻겼다. “그리고 당신의 신성한 내장으로 만든 채찍이 우리를 벌 줄 것입니다.”
미친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과도한 관장에 구토로 그녀는 완전히 탈진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당신의 몸을 풀고, 내장을 가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름다울 테니까.”
하고 마이크가 가볍게 그녀를 들어 올려 안았다. 그녀는 마이크라는 벽에 붙박여 버렸다. 마이크는 뒤에서 그녀의 목과 허리를 두꺼운 팔로 감아 고정시켰다. 그녀의 두 팔은 뒤로 묶여있어 저항하지 못했고, 두 다리는 바로 앞에 매달린 구현승의 시체처럼 발목이 묶인 채 공중에 떠서 천천히 흔들렸다.
“호! 호! 호!” 소가죽가면이 커다란 식칼을 들고 구현승 앞에 갔다. “예행연습! 예행연습!”
“여신의 몸에 불필요한 상처를 줘선 안 되니까.” 성스러운 선향의 향기로 몸을 정화하는 요가 수행자처럼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며 마이크가 말했다. “연습해. 사람이랑 돼지랑은 또 다를 테니까.”
“호!”
날이 천장으로 향하게 식칼을 쥔 소가죽가면이 구현승의 털 난 아랫배에 찔러 넣고, 단숨에 그어 올렸다. 상처가 벌어지고, 복막이 찢어지고, 그 틈으로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호! 호! 호!”
“호! 호! 호!”
두 사람의 기괴한 소리와 함께,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재갈에 뭉개져, 구현승의 피비린내와 함께 밀폐된 공간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비명을 반주삼아 스위티의 히트곡 <딥 인사이드 러브>를 불렀다.
그녀는 배에 무엇보다 차갑고 날카로운 이물감이 뱃속으로 파고들어오더니, 격통과 함께 관장을 하며 느꼈던 뱃속이 시원하게 비는 감각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끝>
작성기간: 2014년 4월 22일 화요일 오후 5:45:13~2014년 6월 3일 화요일 오후 9:19:56
분량: 200매 X 84매 = 151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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