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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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이슬아
연애가 끝나서 자꾸 눈물이 났던 작년 어느 날에 남동생이 내게 말했다.
누나, 슬플 땐 많이 걸어. 그럼 길 여기저기에 슬픔을 두고 올 수 있거든.
나는 원래 많이 걷는 사람이었지만 그날 이후 더 많이 걸었다. 많이 슬픈 날엔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매일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러 나갔다. 장마철에도 쉬기 싫어서 방수 재질의 러닝복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수압이 너무 센 샤워기 밑에서 달리는 느낌이었다. 다음날 몸살을 앓으며 비 오는 날엔 뛰지 않기로 다짐했다.
누구나 스스로에게 다른 방식으로 엄격할 텐데 나는 이 부분에서 나를 잘 봐주지 않는다. 게으르게 보낸 하루일수록, 연재하는 글과 만화가 창피할수록, 연애가 어렵고 외로울수록 더욱더 열심히 뛰고 온다. 내가 사는 서교동에서 출발해 망원동을 지나 합정동을 지나 상수동을 지나 서강대교를 찍고 돌아오는 코스다.
대체로 아무 생각 없이 뛰지만 길 어디쯤 물웅덩이가 있는지 오르막과 내리막이 언제 끝나는지 내 다리가 외우고 있어서 넘어지지도 삐끗하지도 않는다. 집에 와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손빨래를 하고 나면 체력이 기분 좋게 소진되어 있다. 그 상태에서는 애인에게 괜히 투정을 부리거나 과민하게 질투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청승을 떨다가 싸울 확률이 줄어든다. 내가 ‘혼자를기르는 방법'이다. 엄마는 가슴속에 꽃밭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나는 꽃밭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서 우선 다리 근육부터 길렀다. 오래 달리는 호흡도 익혔다. 입을 다물고 가볍게 숨을 쉬며 뛰는 법 말이다.
이렇게 애쓰는 이유는 우아해지고 싶어서다. 나는 애인이 바빠서 나에게 무심한 날에도 꼬이지 않은 마음으로 그 애가 하는 일을 응원하고 싶다. 그 애 주변에 있는 매력적인 애들에 대해 조바심을 느끼지 않은 채 연애를 이어가고 싶다. 별다른 연락이 없는 밤에도 기분 좋게 내 할 일을 잘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누구를 너무 좋아하는 동안 그 사람에 대해 의연해지는 법을 모른다. 누군가와 같이 잘 지내는 것에도 실패하고 혼자 잘 지내는 것에도 실패하는 날이 있다. 그런 실패뿐인 날에는 열심히 뛰어서 땀을 내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오는 수밖에 없다.
내가 혼자 걷고 있단 걸 믿을 수 없어서 괜히 뒤를 돌아볼 때도 있다. 그럴 땐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지는 것만 같다. 나는 그 애를 모르고도 잘 살았던 시간을 상기해본다. 나의 근사한 친구들과 스승들의 얼굴도 떠올려본다. 연애 말고도 중요한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고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서 일해야 하며 월세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그 애를 그리워하느라, 더 사랑받길 원하느라 시간과 마음을 흘려보내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다가 전화가 걸려온다. 근처에 있다고 그 애가 말한다. 그럼 나는 방금 막 뛰기 시작한 사람처럼 빠르게 그 애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규칙적으로 달려온 덕분에 뱃살이 줄고 다리 근육이 늘어서 예전보다 더욱 빠르게 그 애한테 갈 수 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자주 실패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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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언제까지나 나에게 낯설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서투름은 나의 진심을 증명하는 것임을 믿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모든 익숙함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나의 삶임을,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순간, 꽃처럼 시들어버릴지도 모를 것이 또한 진실임을, 한없이 차오르는 것과 한없이 비어가는 것의 동일한 무게를, 희미하고도 선명한 시간의 직선과 곡선들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투성이의, 그 친밀하고도 낯선 엉망진창의 뒤엉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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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 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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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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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 이라고 발음할 때 굴러가려고 둥글게 말린 혀가 입천장을 차고 나간다 나가서 너에게 굴러간다
둥긂은 아름답고 둥긂을 그립고 둥긂은 입맞추고 싶고 둥긂을 안고 뒹굴고 싶고 둥긂은 들어가 눕고 싶다
구르고 구르다가 모서리를 지우고 사람은 둥글어져 사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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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만 안달이 난 적도 있었잖아. 보고 싶고 쓰다듬고 싶고 온종일 네 가슴과 내 등을 찰싹 붙인 채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날들이. 그날들의 햇살은 참 밀했고 내리는 빗방울들은 다정했고 불어오는 바람은 상냥했지. 커피를 식히려고 리드를 열어놓고 붙잡을 형체 없는 열기들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때 그 꿈같은 날씨들이 자꾸만 생각나. 나는 그날들을 자꾸만 이렇게 적어 놓았더라. 안녕, 오늘은 햇살이 깊고 날씨가 너무 좋아, 안녕, 오늘은 비오는 희끄무레한 하늘과 침착한 소리들이 너무 좋아, 안녕, 오늘은 어디서 불어오는지, 내 머리카락을 헤집는 네 손끝 같은 바람이 너무 좋아. 사실은 네가 너무 좋았던 것임을 모르고. 모든 계절들을 어린 봄날 처럼 느끼게 해 준 것은 햇살도 비도 바람도 아니고 모두 너였단 것을 모르고. 어리석고 부족한 사랑들을 용서해. 어엿븐 우리들을 용서해. 맨발과 맨다리처럼 연약하고 눈부신 것들을 용서해. 이 아름다운 것들이 모두 슬퍼진 것을 용서해. 한동안 네 생각을 할거야, 내 마음엔 흠뻑 비 내린 숲이 으레 그렇듯이 어린 풀같은 네 생각들이 돋아날거야. 순진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것들 뿐이겠지. 나는 그때에 슬퍼질까, 그것들은 너처럼 우아하게 정원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것들에 나의 벗은 몸을 부비면서 만족스럽고 정당한 슬픔에 내 마음을 모두 묻어버릴 수가 있을거야. 나는 콩알만큼 작고 단단한 사색들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면서 허영 가득한 치유와 회복을 기대하고 있어. 미안해, 하지만 그토록 도취하고 싶을 만큼 너와 나의 날들은 아름다웠어.
다른 사랑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기억이 그리 쉬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사소한 단어나 사물에서도 쉽게 생각이 났으면 좋겠고, 내가 사랑했던 너와 나의 풍경들이 영상처럼 떠올라서 좀 울었으면 좋겠어. 이건 너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야. 나에게 바라는 거야. 나는 너를 좀 그리워하고 싶어. 우리의, 아직 신선하고 빨간 마음들을 도리 칠 때, 아직도 그 존재를 잊지 못한 마음과 미움들이 환상통에 시달렸으면 좋겠어. 알잖아 넌, 내가 만족과 쾌감을 느끼는 방식을. 그 괴이하고 불건전하게 자라난 육종 같은 나의 기형을.
사랑해, 사랑이 다하는 순간이 언제일지는 아직 모르므로. 나는 이 사랑이 끝났다는 것도 모른 채 너를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될거야. 그 때, 너는 먼 곳에 있어도 그런 내 마음의 변화를 알게 될 것 같아. 나조차도 모르는 나의 변화를, 너는 귀가 크고 눈이 큰, 목이 긴, 상처 받기 쉽게 생긴 초식 동물처럼 기민하게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아. 그 때 네 곁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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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기분이 목까지 차오르는 밤에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네가 활자 사이에서 무얼 찾느냐 물었던 그 밤으로 돌아가 본다. 어떤 날엔가 네게 몰입해서 나는 내가 아주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다는 것도 몰랐더랬다. 한동안 허리가 아플 때마다 네 생각이 났다. 세상엔 차마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지난날의 나를 원망하지 않기로 한다. 어떤 새벽 어스름이었다. 하늘을 짙은 색으로 물들이는 감각으로 사랑하자고 말한다. 나는 오래 고르고 고른 단어로 네 머리칼 사이의 공기를 담고자 한다. 아침이 아득하게 멀어 네가 희미한 삶을 산대도 괜찮다. 잔무늬로 흔들리는 별 하나를 새겨 넣고 마주하는 것이 나는 좋다. 축적된 시간으로 너를 부유하다가 이내 잠식되었다. 사랑은 흐릿하지 않아서 뚜렷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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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관심은 오직 잘 늙는 것 뿐이다. 늙는 것을 준비하기에는 꽤 이른 나이일지도 모르지만 생물학적으로 어쨌든 나는 매일 늙고 있다. 늙었을 때 무엇이 필요 할 지, 무엇을 후회할 지, 이 젊은 날의 기억 중에서 무엇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간직할 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나의 오늘들을 무척 좋아하지만 어제가 된 오늘들을 그리워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늘, 멋진 오늘들만 살고 싶으니까. 욕심인가, 그렇다면 엄청 욕심쟁이가 되어도 상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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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끝이 그것의 처음과 많이 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면 더욱이. 가장 단편적 예를 들자면, 우리가 그렇다. 그렇게도 이해하기 어렵던 우리의 끝은 우리의 처음을 생각해보면 간단했다. 내가 말을 걸었고, 네가 대답을 했었다. 지금 네 대답을 들을 수 없는건 내가 네게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지금은 필연. 예외는 없다. 있다면 우연, 그리고 그 우연은 운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아주 잠깐 우연히 너랑 닿아있었던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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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될 수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던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트위터 @wevebeenhere (via giwonc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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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시 청춘을 돌아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제발’이라는 단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너를 만나기 전의 사랑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관용보다 그 과거에도 질투의 눈빛을 반짝이는 사람을 사랑할 것이고,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는 냉정의 논리보다 너는 내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이를 사랑할 것이다. 사랑은 변할 수도 있다는 말보다 사랑이 변하면 죽어버릴 것 이라는 그의 열정을 사랑할 것이고, 하루의 정해진 규칙 속에 사랑도 묶어버리는 질서보다 사랑으로 인해 하루를 망가뜨릴 수 있는 자유로움을 사랑할 것이다. 사랑으로 다치지 않기 위해 슬그머니 붕대를 미리 챙기는 사람보다 상처가 나서 죽더라도 사랑을 움켜잡는 용기 가진 그를 사랑할 것이며 밀고 당김의 계산보다 가슴이 탄식하는 대로 제발, 제발이라 신음하는 사람을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다. 어른의 발견,윤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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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짓
네가 자주 실수하는 부분들, 아주 조그맣고 사소한 것들 말이야. 한번의 손길로 바로 잡을 수 있지만 꽤 눈에 띄고 너는 자주 잊는 부분. 그런덴 개선되지 않았으면 해. 평소엔 티나지 않게 내가 해주다가 내가 없는 어떤 순간에 너는 그 실수를 발견하고 나의 부재를 깨닫게 되겠지.
나는 그런 나쁜짓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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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소멸해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해.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있어도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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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한겨레 허지웅의 설거지) 첫사랑
무언가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없이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기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대개의 경우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을 때 특히 더 그렇다. 누구나 이별을 겪는다. 그리고 내가 없으면 안될 거라 생각했던 그 사람의 SNS에 꿀 발라놓은 엿같이 달콤한 사진이 올라오는 걸 보며 위산이 역류해 티셔츠를 흥건히 적시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내 생각과 현실 사이의 어마어마한 고도 차이에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내 첫사랑의 경우에는 홀로코스트에 가까웠다. 첫사랑 이후 내 감수성은 씨가 말랐다.
첫사랑이란 이상한 것이다. 모두에게 서로 다른 정의를 갖는다. 말 그대로 처음 연애한 걸 첫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사랑이었다고 말하게 되는 경험을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내 경우는 후자다.
그녀를 만난 건 첫번째 직장에서 였다. 이제 막 내가 지금 코를 흘리고 있는지 묻히고 있는지 알아가고 있던 즈음 처음으로 6페이지짜리 긴 기사를 쓰고 나는 거의 나라를 구한 듯한 공명심에 부풀어 있었다. 허생전을 빗대어서 디지털 2차 컨텐츠 시장(이제 막 그런 개념이 생기던 시절이었다)을 풀어낸 것이었는데 괜찮은 기사였다.
아침에 출근해서 새로운 한주를 준비하며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못보던 누군가가 등을 보이고 자료실 앞에서 낑낑대고 있었다. 뭐 찾으세요, 하고 물어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정말 말 그대로 얼어 붙었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내가 얼마나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애 쓰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장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정말 미친듯이 예뻤다. 진짜 말도 안되게 예뻤다. 명치에 니킥을 맞은 것처럼 예뻤던 것이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녀는 온라인팀에서 일하는 기자였다. 자료를 찾으러 내려왔다가 헤매는 모양이었다. 나는 같이 자료를 찾아 주었다. 내 소개를 하는데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 기사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다고 말하고는 다시 올라갔다. 나는 그녀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나는 부산영화제 취재팀으로 다시 만났다. 아침에 호텔에서 나와서 팀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녀는 빨간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팀장이 오늘 취재할 내용들을 미리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를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가 별안간 펜을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머리를 묶기 위해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쳐든 면적만큼 햇빛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햇빛 반 사람 반. <블레이드 러너> 도입부도 이렇지는 않았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그 장면은 십수년이 지나도 좀체 잊혀지지를 않는다. 나는 그 순간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녀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넘쳐 흘러 민중에 베풀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만한 크기의 호감을 들킬 까봐 나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혹시나 잘못 풀리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같이 부산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영화를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하루 종일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인터뷰가 길어졌다. 답변을 정말이지 오랫동안 하는 스웨덴 감독님이었다. 원고지에 궁서체로 받아 적어도 여유가 남을만한 빠르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펜을 들고 있는 내 손은 파르르 떨렸다. 결국 영화 상영이 시작되고 나서야 인터뷰가 끝났다.
극장에 들어갔더니 초만석이었다. 계단에 앉아서 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그녀를 찾기를 포기하고 저 뒤쪽으로 가서 영화를 보았다. 서럽고 슬펐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에서 그녀와 만났다. 그녀는 옆자리에 자리를 비워두고 나를 기다렸다고 말했다. 분명히 눈총을 받았을 텐데 어쩌나 싶어 나는 너무나 미안했다. 우리는 숙소까지 밤거리를 나란히 걸어갔다. 십오분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오분 처럼, 한시간 삼십분 같이 걸었다.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그녀와 고궁으로 데이트를 갔다. 그렇다. 나도 한때는 고궁에, 데이트를, 갈 줄 아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두번째 데이트 때 비디오방에서 <박수칠 때 떠나라>를 보았다. 감독님께는 죄송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고 다른 걸 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왜 이제야 왔냐고 대답했다.
몇 년이 흘러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가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어느 괴로운 밤 무작정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파트 앞의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하늘만 바라 보았다. 그저께 꾸었던 꿈을 계속 생각했다.
꿈 속에서 그녀는 내게 장을 봐오라며 쪽지에 이것저것 살 것을 적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도중에 쪽지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헤어졌다는 걸 생각해냈다. 쪽지를 잃어버린 것이 너무 서러워서 나는 펑펑 울었다. 그러다 깼는데 그녀가 옆에 있었다. 니가 쪽지를 적어주었는데 내가 그걸 잃어버렸고 우리는 헤어졌다고 말하면서 품에 안겼다. 바보 그럴리가 없잖아, 라면서 그녀가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서 깨어났다. 모두 다 꿈이었다. 나는 쪽지를 잃어버린 것이 못내 아쉬워 가슴을 쥐어짰다.
5시간 쯤 지났을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파트로 올라오는 언덕 끝자락으로 불빛이 퍼지더니 택시가 나타났다. 그녀가 택시에서 내렸다. 화장을 짙게 해서 다른 사람 같았다. “나보다 널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아니 있어.” 우리는 몇 마디를 더 나누었고 헤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냉소적인 사람으로 돌변했다. 나도 내가 놀라울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조금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소식을 들은 건 몇 년 후였다.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여기 내 사진이 있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일단 가보았다. 그녀에게 주었던 내 어린시절 사진들과 편지 한 장이 맡겨져 있었다. 그녀가 내가 사는 동네를 알아내 동사무소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이름으로 찾아달라고 부탁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아까 전화를 할 때 옆에 그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잠시 그녀가 지금쯤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았다. 편지에는 내 결혼소식을 들었고 축하한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무표정하게 사진과 편지를 집어 들고 동사무소를 나섰다. 세상은 평온했고 햇볕은 눈이 부셨다. 마침 차가워진 바람이 불어 닥치다 눈에 들어가 눈물이 조금 났다.
무언가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없이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기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그것이 나 없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게 되는 이유는 어느 순간 그것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 없이 상대가 살 수 없기를 바라는 종류의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걸 깨달으면서 사람은 늙어가는 모양이다.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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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를 누리는 일
혼자 잠을 자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나를 친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외롭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나는 친구의 질문을 곱씹는다. 외로운지 그렇지 않은지. 그러곤 대답한다. 외롭다고. 외롭지만 참 좋다고. 친구는 그게 말이 되냐는 눈빛이다. 괴짜를 바라보듯 씨익 웃으며 나를 본다. 그리고 연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얼마나 활기를 주는지를 설파하며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바로 그때. 나는 즐거운 토론을 시작할 마음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어쩌면 친구에게 외롭지 않다는 대답을 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도식에 의해서라면, 나의 면면은 외롭지 않은 쪽에 가까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한 대답을 하고 싶어서 나는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에 긍정을 할 수밖에는 없다. 외롭다. 하지만 그게 좋다. 이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건, 외로운 상태는 좋지 않은 상태라고 흔히들 믿어온 탓이다. 가난하다는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라고 흔히들 믿고 있듯이. 하지만 나는 외롭고 가난하지만 그게 참 좋다. 홀홀함이 좋고, 단촐함이 좋고, 홀홀함과 단촐함이 빚어내는 씩씩함이 좋고 표표함이 좋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외로우려 하고 되도록 가난하려 한다. 그게 좋아서 그렇게 한다. 내게 외롭지 않은 상태는 오히려 번잡하다. 약속들로 점철된 나날들. 말을 뱉고 난 헛헛함을 감당해야 하는 나날들. 조율하고 양보하고 희생도 감내하는 나날들의 꽉참이 나에겐 가난함과 더 가깝기만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알람을 굳이 맞춰놓지 않고 실컷 자고 일어나는 아침, 조금더 이불 속에서 뭉그적대며 꿈을 우물우물 음미하는 아침, 서서히 잠에서 벗어나는 육체를 감지하며 느릿느릿 침대를 벗어나는 아침이다. 찬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사과 한 알을 깎아 아삭아삭 씹어 과즙을 입안 가득 머금고, 찻물을 데우고 커피콩을 갈아 까만 커피를 내려서 책상에 앉는 그런 아침이 좋다. 오늘은 무얼 할까. 영화를 보러 나갈까. 책을 읽다가 요리를 해볼까. 내가 나와 상의를 하는 일. 뭐가 보고 싶은지, 뭐가 먹고 싶은지를 궁금해 하는 일. 그러면서, 나는 소소한 마음과 소소한 육체의 욕망을 독대하고 돌본다. 외롭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매만진 돌멩이처럼, 그런 외로움은 윤기가 돈다.
외로움이 윤기나는 상태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외로울 때면 쉽게 손을 뻗어 아무나에 가까운 사람을 애인으로 만들었던 시절도 있었고, 외롭다는 사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전화로든 채팅으로든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아무 말이든 나누어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고, 혼자서 식당에 찾아가 밥을 먹는 일이 도무지 어색해서 차라리 끼니를 굶는 시절도 있었다. 연락처 목록을 뒤져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지만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나날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히는 게 두려워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확인을 해야 안도가 되는 나날도 분명 있었다. 누군가와 연결이 되어야만 겨우 안심이 되는 그 시절들에 나는, 사람을 소비했고 사랑을 속였고 나를 마모시켰다. 사랑을 할수록, 누더기를 걸친 채로 구걸을 하는 거지의 몰골이 되어갔다. 사랑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나의 허접하고 경박한 외로움이 사랑을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를 필요로 하며 부르고 달려오고 사랑을 속삭였던 시간들은 무언가를 잔뜩 잃고 놓치고 박탈당한 기분을 남기고 종결됐다. 그래서 지나간 사랑을 들춰보면 서럽거나 화가 났고, 서럽거나 화가 난다는 사실에 대해 수치스러워졌다. 어째서 사랑했던 시간의 뒷끝이 수치심이어야 하는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지금 나는 사랑의 숭고함보다 혼자의 숭고함을 바라보고 지낸다. 혼자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가끔 거짓말조차 꾸며댄다. 선약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약속을 잡지 않는다. 아니,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나와 놀아주기로, 나에게 신중하게 오래 생각할 하루를 주기로 약속을 했으므로 선약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와 놀아주기로 한 날이라서 시간이 없어요’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타인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허용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하다하다 지치면 두어 달을 잡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 하는 것을 두고 나는 가끔 농담처럼 ‘회식자리에 도시락을 싸들고 가는 경우’와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관광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간관계로부터 언플러그드하러 떠나는 것이므로. 오롯하게 혼자가 되어서, 깊은 외로움의 가장 텅빈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므로. 감정 없이 텅빈, 대화 없이 텅빈. 백지처럼 텅빈, 악기처럼 텅빈. 그래야 내가 좋은 그림이 배어나오는 종이처럼, 좋은 소리가 배어나오는 악기처럼 될 수 있으므로.
외롭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을 나는 경계한다. 잠깐의 어색함과 헛헛함을 통과한 이후에 찾아올 더없는 평화와 더없는 씩씩함을 만나볼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아서이다. 슬프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슬픔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 또한 나는 경계한다. 역시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기만 하다. 외로움에 깃든 낮은 온도와 슬픔에 깃든 약간의 습기는 그저, 생물로서의 한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조건이라는 걸 잊지 않고 싶다.
요즘은 외로울 시간이 없다. 바쁘다. 탁상달력엔 하루에 두 가지 이상씩의 해야 할 일이 적혀 있다. 어쩌다가 달력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지 않는 날짜를 만나면, 그 날짜가 무언가로 채워지게 될까봐 조금쯤 조바심도 난다. 바쁠수록 나는 얼얼해진다. 얼음 위에 한참동안 손을 대고 있었던 사람처럼 무감각해진다. 무엇을 만져도 무엇을 만나도 살갑게 감각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좀 질 나쁜 상태가 되어 있다. 쉽게 지치고 쉽게 피로하다. 느긋함을 잃고 허겁지겁거린다. 신중함을 잃고 자주 경솔해진다. 그런 내게 불만이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다린다. 오롯이 외로워질 수 있는 시간을. 오롯이 외로워져서 감각들이 살아나고 눈앞의 것들이 투명하게 보이고 지나가는 바람의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나의 시간을.
외로워질 때에야 이웃집의 바이올린 연습 소리와 그애를 꾸짖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에 빙그레 웃기 시작한다. 외로워질 때에야 내가 누군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떤 연결은 불길하고 어떤 연결은 미더운지에 대해 신중해지기 시작한다. 안 보이는 연결에서 든든함을 발견하고 어깨를 펴기 시작한다. 골목에 버려진 가구들, 골목을 횡단하는 길고양이들, 망가진 가로등,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들에 담긴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좋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이런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걸 수도 있다. 사랑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의식을 오래토록 행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경박한 외로움이 사랑을 망치게 하지 않으려고, 사랑을 망쳐서 사람을 망가뜨리고 나또한 망가지는 일을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무공을 연마하는 무예가처럼 무언가를 연마하는 중일 수도 있다. 집착하고 깨작대고 아둔하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든든하고 온전하고 예민하고 독립적인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게 되는 게 지금은 나의 유일한 장래희망이다.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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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숲 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숲의 일부가 되고
네가 빗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쏟아지는 비의 일부가 되지 네가 아침 속에 있을 때 너는 온전히 아침의 일부가 되고
네가 내 앞에 있을 때 너는 내 일부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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