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mium-novel · 5 years
Text
흰색 드래곤, 그녀 - [1] 흰색의 그녀(5)
"죽겠네…"
망치로 때리는 듯한 두통과 목 위까지 올라오는 구토감을 참으려 머리와 배를 쓰다듬으며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한숨을 내뱉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 맥주 몇 캔을 샀는데, 해가 중천에 뜬 아침에 일어났을 때 더 많은 맥주 캔들이 널브러져 있던 것과 가람이가 보낸 살아있냐는 문자를 보자니 아무래도 잔뜩 취해서 밤새도록 맥주를 마신 듯 했다.
여러모로 최악인 몸 상태지만, 그 보단 선화누나와 오늘도 만나야 한다는 게 더 걱정이다. 점심시간마다 누나와 만났던 것 때문에 혹시나 내가 안 나오면 기다릴까 걱정이 돼서 나오긴 했지만, 막상 누나가 나온다고 해도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누나가 날 불편해한다면, 난 어제의 일을 크게 후회 할테니까.
스윽ㅡ
나무에 기댄 채 웅웅 울려대는 머리골을 붙잡고 누나를 어떻게 봐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때, 나무 뒤에서 가녀린 손 두 개가 쑥 나와 내 눈을 가렸다. 선화누나예요? 짧은 내 대답과 함께 시야를 가리던 두 손이 빠지고, 곧 뾰로통한 표정의 누나가 도시락 통을 든 채 내 앞에 앉았다.
'진짜 낭만이란 게 없어. 이럴 땐 한번은 모른 척 해주는 게 예의 아니야?'
"미안해요. 제가 이런 거에는 재주가 별로 없어서…"
'흥! 진환이는 나를 보는 것보다 내 도시락을 더 좋아하는게 맞다니까!'
"매 번 말하지만, 아니라는 거 누나도 잘 아시죠?"
잔뜩 약이 오른 표정으로 투덜대는 누나를 달래려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하자, 누나는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도시락을 풀었다. 내 걱정과는 다르게 누나는 평소와 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제 진환이가 만든 소세지. 아침에 살짝 맛보다가 혼자서 홀랑 다 먹어버릴 뻔 했다니까? 잘 만들던데?'
"칭찬이 너무 과하세요. 소세지를 구운 것 뿐 인걸요."
젓가락과 함께 밥을 넘겨주며 곧바로 공책으로 나를 놀려대는 누나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곤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지않은 식사시간 이었다. 수업시간 내내 지루했던 이야기나, 어딘가로 놀러가고 싶다는 누나의 이야기. 영양가는 없었지만 재미를 느낄만한 대화들이 오갔다.
밥을 반절 정도 비웠을 때, 누나는 별안간 도시락을 내려놓고 잠시 시선을 저 멀리 산으로 돌렸다. 밥을 먹던 중 흘깃 훔쳐본 누나의 얼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복잡함이 묻어나왔다. 겉으로 내색은 안하고 있었지만, 누나도 어제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듯 했다.
"저기...누나."
누나와 마찬가지로 도시락을 내려놓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누나는 곧바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제 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내뱉은 내 말에 누나는 곧바로 얼굴을 어둡게 바꿨다. 곧바로 공책을 들었지만, 한 동안 할 말을 고민하는 듯 볼펜만 만지작대던 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오늘 끝나고 시간 괜찮아?'
무언가 어려운 결심을 한 듯 누나는 공책에 평소보다 작은 글씨를 적어 내게 내보였다. 공책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보며 누나는 또 다시 공책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늘은 평일 아르바이트 하루를 쉬는 날이었고, 집에 들어가 봤자 할 일도 없었다.
'그러면 오늘 잠깐 나랑 어디 좀 다녀오자. 괜찮다면 저녁에 밥도 같이 먹고 반찬도 만들고 말이야.'
"알았어요. 끝나고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생각보다 가볍게 대답하는 내 모습에 누나는 안심이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과 후 약속을 잡은 누나는 다시 식사를 하자는 말을 쓰고 나서 다시 도시락을 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저 미소는...
. . .
"아직 멀었어요?"
일과 후 누나의 손길에 이끌려 집 근처 산 깊은 곳까지 끌려가던 도중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묻는 내게로 누나는 곧 도착 해. 라는 글을 내보이곤 다시 숲 속 안으로 들어갔다. 원체 올 일이 없어서 몰랐지만, 산은 생각보다 깊고 높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학교와 아르바이트 생활만 번갈아 가며 한다지만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누나는 거리낌없이 풀을 헤치고 지나가고 있었지만 내 숨은 턱턱 막혀 올 정도였다.
'도착했다. 저기야. 예쁘지?'
얼마나 더 숲 속 안으로 들어갔을까. 누나는 내게 공책을 내보임과 동시에 저 멀리 어느새 떠오른 달을 머금고 있는 작은 연못을 손으로 가리켰다.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물고기들이 뛰어노는 그 곳은 달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신비롭고, 사람의 손이 타지않은 깨끗함을 가지고 있었다.
"와…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연못가 근처까지 걸어가 물장구를 치고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던 누나는 이내 손을 떼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풀을 헤치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누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내게 공책을 내보였다.
'진환이는...내 모습 그대로 사랑 할 수 있다고 했었지?'
"…왜 갑자기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나의 있는 그대로를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누나의 물음에 따라 내 얼굴도 자연스럽게 어두워졌다. 왜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닌 듯 하다. 서로 복잡한 걸 알고있을 텐데, 여기까지 와서 물어보는 건…
"그럼...이런 모습도 괜찮을까?"
고개를 돌린 채 복잡한 마음을 곱씹고 있었을 때, 등 뒤에서 나른하고 부드럽지만, 뼈 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우연인지 아닌지, 누나가 서있던 자리에 비추던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 한 순간 어두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다시 달빛이 비춰졌을 때, 그 곳에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흰 털과 비늘이 뒤덮여 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선화누나가 자리에 서서 슬픈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공책에 무언가를 적으려 볼펜을 들었지만, 이내 공책과 볼펜을 내던지고 내 얼굴을 바라봤다.
"이게 내 본 모습… 난 인간이 아냐."
그녀의 목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질 때, 또 다시 뼈가 시리고 온 몸의 털들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머리로는 느끼지 못했지만 본능은 말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눈 앞에 서있는 그녀는 선화누나가 아니다. 도망쳐야 해.
자리에 얼어 붙은 채 잔뜩 커다래진 눈으로 바라보며 바들바들 떨고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게 손을 뻗으며 한 발자국 움직였지만, 머리보다 먼저 내 다리는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역시나…"
그녀는 겁을 먹은 듯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내 모습에 작게 중얼거리곤, 얼마 안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씩 흘러내리던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르기 시작해 금새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미안해… 내가 너에게 괜한 말을 했나 봐."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를 달래려는 듯 말을 꺼내던 그녀는 울음을 참지 못하는 듯 자리에 주저앉아 커다란 목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몸은 충격으로 인해 굳어버린 듯 했지만, 곧바로 다리를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는 아직 후들거렸지만, 한 발자국 씩 힘겹게 그녀에게로 옮겼다.
저 모습. 살아가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인데다가 알 수 없는 겁도 몰려왔지만, 마냥 자리에 겁 먹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 선화누나가 나 때문에 울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다리를 억지로 이끌며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작고 날카로운 뿔이 만져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안아주자 마자 화들짝 놀란 듯 누나는 고개를 들어 몸을 빼려고 했지만, 흰 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몸을 더욱 꼭 껴안았다. 누나는 몇 차례 내 몸을 밀며 입을 열어 말을 했지만, 더 이상 공포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적응이 되어갔다.
"미안해요. 누나의 모습이… 그리고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당황해서 그랬어요. 울지 말아요."
그녀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가는 내 목소리에 선화누나는 끅끅 소리를 내며 울음을 참으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터져버린 울음에 내 품에 안긴 채 엉엉 울어댔다.
미안해요… 내가 더 미안해요…
--------------------------------------------------------------
1. 텀블러는 취미로 올리는 곳이라 제가 생각날 때마다 올립니다.
2. 자유연재를 하고있는 다른 사이트에서 찾아보신다면 더 많은 화를 보실 수 있습니다.
3. 연재중인 사이트는 조아라, 블라이스, 네이버 웹소설 3곳 입니다.
4. 게을러서 연재량이 별로 없다는 게 함정.
2 notes · View notes
mium-novel · 5 years
Text
흰색 드래곤, 그녀 - [1] 흰색의 그녀(4)
'맛있게 먹었어? 우리 이제 슬슬 반찬 만들까?'
백숙에 닭죽까지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싹싹 비우고 나서야 노트를 꺼내 글씨를 써 내보이는 선화누나. 저녁으로 배 속까지 꽉꽉 채운 터라 부담스러운 숨을 내뱉고 있다 그릇들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거지는 자신이 한다며 그냥 싱크대에 올려놓으라고는 했지만, 어찌 저녁을 얻어먹었는데 가만히 있을까. 누나에게 키친타월을 받아 기름을 싹 닦아내곤,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뿌려 설거지를 시작했다. 곧 말리려던 누나도 내가 손에 물을 묻히자마자 못 말려...라는 표정을 짓곤 사온 식재료들을 꺼내 싱크대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계란 판에서 계란 몇 개를 꺼내 능숙하게 그릇에 풀던 선화누나는 계란을 젓는 와중에도 공책에 글씨를 적어 내게 내보였다.
'계란 반찬 괜찮아? 진환이 저번에 계란말이 엄청 잘 먹었잖아.'
조심스레 공책을 내보이는 누나에게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식재료인 계란인 것도 모자라, 누나의 음식솜씨까지 더해진다면 거부 할 이유가 없다. 부끄럽지만 처음 누나가 계란말이를 싸왔을 때 계란말이 하나로만 밥 두 공기를 비웠었다. 그 정도로 누나의 계란말이는 맛도 있고 배도 든든했다.
"누나가 해 준 계란말이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공기는 뚝딱 해치우니까요."
'그렇게 칭찬해주니 부끄럽네. 그렇게 맛있어?'
"정말 정신 쏙 빼놓고 먹었어요."
설거지를 끝마치고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나를 바라보던 선화누나는 이내 풋..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입을 가린 채로 한참이나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곁으로 다가와 미니 소세지에 칼집을 내고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트리던 누나는 이내 '우리 진환이는 잘 먹어서 보기 좋다니까. 만든 보람이 있어서 기분이 좋아.'라고 공책에 적어 내보였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걸 끝으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않고 반찬준비에 들어갔다. 누나는 젓가락으로 풀고있던 계란물을 프라이팬에 붓고 요리를 시작했고, 나 또한 칼집을 낸 소세지를 다른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익히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오가진 않았지만, 요리를 하는 내내 내 눈길은 프라이팬과 누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려고 움직이느라 바빴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곤 있지만, 기름과 음식 냄새를 전부 덮어버리고 풍겨오는 누나의 달콤한 향기와 살랑거리는 누나의 머리카락은 나를 자극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힐끗힐끗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던건지 계란말이를 말던 누나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쳐다봤고, 간발의 차이로 시선을 돌린 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소세지를 볶았다. 하지만 누나는 다 알고있다는 듯 내 볼을 한번 꼬집곤 공책을 내보였다.
'왜 자꾸 내 얼굴을 보는거야? 뭐 묻었어?'
"아뇨. 그런 적 없는데요?"
'거짓말 마. 계속 힐끗힐끗 쳐다본 거 알고 있으니까. 왜?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시치미를 뚝 떼는 내 모습에 재빠르게 글씨를 적어 내보이곤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보이는 선화누나. 부드러우면서도 나를 추궁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버티면서 소세지를 굴려대다 이내 한숨을 푹 쉬며 쳐다봤던 사실을 시인했다. 누나는 내심 뿌듯한 듯 미소를 지으면서 이유를 물었지만, 쉽사리 대답 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섣불리 사실을 말했다가 누나와의 ���이가 멀어진다면, 다시는 이런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너무도 무서웠다.
이대로…
이대로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는걸까… 난?
"저기...누나."
한 동안 반응이 없는 내 모습에 김이 빠진 듯 다시 프라이팬에 고개를 돌렸단 선화누나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고, 잠시동안 고민에 망설이다 깊은 한숨을 내뱉곤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다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누나 좋아하면 안될까요?"
내가 어렵사리 내놓은 물음에 미소를 짓고있던 누나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눈에 띌 정도로 떨리며 혼란스러운 누나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줬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스레인지에 불을 끄고, 뒤집개를 내려놓곤 잠시 한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을 때, 전자레인지 옆 싱크대에 몸을 기댄 채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선화누나가 공책에 글씨를 적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내보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까 조금은 당황스럽네. 내가 요즘 짓궂은 장난을 너무 많이 쳤었나?'
"아니에요 누나. 난 정말 누나를…"
'알아. 네가 가끔씩 나를 보면서 부끄러워 하던 것도 다 봤었고, 어쩌다가 손을 스치기만 해도 정말 부끄러워 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네가 날 진심으로 좋아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야.'
"어떤 것 때문에 그래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냐… 그런게 아냐. 우리 진환이가 얼마나 착한데…'
누나는 그 말을 끝으로 노트를 싱크대에 올려놓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슬픔이 담겨있는 누나의 얼굴에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얼어버렸다.
그 동안 내가 너무 앓는 소리만 해서 내가 못 미더운걸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는 아닐꺼야. 굳이 말하자면, 네가 내 모습을 보고도 사랑 할 수 있을까?라고 해야할까.'
"그게 무슨… 저는 누나 모습 그대로 다 좋아해요."
'...우리 진환이 오늘은 너무 피곤하겠다. 반찬은 내가 만들어서 갈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 볼까? 그 동안 잘 생각해 봐. 내일도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보여줄게.'
그 말을 끝으로 누나는 공책을 내려두고, 내 손에서 뒤집개를 떼어냈다.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던 손을 올려 내 볼을 매만지며 미소를 짓던 선화누나는 내 팔을 잡고 현관문 앞으로 안내해줬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있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보인 누나는 신발을 신은 내 등을 밀어 현관문 밖으로 밀어냈다.
조용히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슬픈 표정을 짓고있는 누나의 얼굴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 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줄 수 있냐니...그런…
아무리 서있어도 열리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내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아무래도 내가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내는 듯 싶었다.
"젠장...괜한 말을 했나…"
고백 같은 거, 하지 말아야 했나…
0 notes
mium-novel · 5 years
Text
흰색 드래곤, 그녀 - [1] 흰색의 그녀(3)
'뭐 해? 어서 짐 들지않고, 누나 어깨 아파 죽겠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가람이도 적지않게 당황 한 듯 계산을 멈추고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공책이 가르키고 있는 내 얼굴과 그녀의 얼굴을 몇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왔다. 아, 정말 도망치고 싶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날아가 없어져버리고 싶다. 이 순간 만큼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누나가 또 화를 낼 지도 모르고, 가람이 녀석도 계산 할 생각을 안할테니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로 걸음을 옮겨 가람이의 손에 들려있던 바코드를 뺏어들어 물건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곤 재빨리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고는 봉투에 담아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하자 선화누나가 공책을 다시 내게 내밀어보였다.
'어머나, 계산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됐어요. 얼른 가기나 해요."
내가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숙인 채로 속삭이자 누나 또한 알겠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 온 듯 눈을 깜빡이던 가람이가 이내 누나의 미소를 보곤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야. 저 사람은 누구냐? 설마.."
"그런거 아냐 인마. 나 이만 갈테니까 수고해라."
"야..야! 그래도 말은 해주고..."
괜히 가람이와 있다가 일이 귀찮아질까 그의 물음에 대충 대답하곤 자리를 옮기자 가람이가 아쉬운 말투로 내게 손을 뻗었고, 문 앞에 서서 뒤돌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와 가람이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쳐다보던 선화누나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공책에 무언가를 쓱쓱 적어 그에게 내보였다.
'안녕하세요. 진환이 친구신가봐요?'
"아 네! 안녕하세요. 한가람이라고 합니다. 성���이...?"
'이선화라고 합니다. 우리 진환이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인사에 아까보다 훨씬 활기차진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그에게 다시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는 선화누나. 저 녀석, 가람이의 까만 속이 눈에 훤하다. 저렇게 대놓고 누나가 먼저 인사를 해 줬으니, 꺼리낌없이 누나한테 물어보겠지. 그 전에 얼른 누나를 데리고 나가는 게 좋을 듯 싶다. 좀 더 귀찮은 일이 생길까 자리를 뜨려고 누나를 부르려던 때, 역시나 한가람 이녀석도 내 생각을 읽은 듯 재빨리 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초면에 죄송한데 우리 진환이와는 어떤 사이이신가요?"
정말 저 아가리가 문제라니까.
점점 일그러져가는 내 표정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에게 묻는 가람이녀석을 무뚝뚝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선화누나가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 잠시 고개를 숙여 공책에 작게 글씨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내 생각이 마무리 됐다는 듯 다시한번 공책에 무언가를 적더니 가람이의 앞에 내밀어보였다.
'우리 진환이 여자친구예요. 참고로 제가 연상이구요.'
"누나!"
'그리고 지금은 현모양처가 되기위해 열심히 노력...'
정말로 오해가 생길만한 장난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는 누나를 제지하기 위해 재빨리 소리치곤 팔목을 붙잡고 끌어냈지만, 선화누나는 내게 끌려가는 순간까지 공책에 적어 가람이에게 내보이다 이내 더 이상 글씨를 쓰는 것을 포기 한 듯 공책에서 손을 떼고는 가람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이며 인사로 대신했다. 정말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누나는 이런 장난에 도가 텄다는 것을. 내일 저녁에는 가람이녀석을 어떻게 볼까. 아니, 그것보다 연락 오는 게 더 문제겠지.
누나의 손을 이끌고 얼마나 뛰었을까,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날 멈춰 세운 누나는 아직도 방금 전 장난에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미소를 지어보이다 공책에 '그렇게 급하게 갈 필요는 없잖아? 오늘 밤은 아직도 길어. 조급해하지마.' 라고 적어보였다. 아무래도 누나는 내가 부끄러워하거나 난처한 모습을 즐기는 듯 하다. 그녀의 짓궂은 장난에 다시 얼굴이 빨개져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내 누나는 내 손을 붙잡고 억지로 끌어내려 또 다시 내 얼굴을 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순수한 얼굴로 손 버릇 나쁜 사람들이나 할 만한 진득한 장난을 해대니 아무리 당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계속되는 그녀의 장난에 내가 고개를 푹 숙인채로 얼굴을 매만지자, 그제서야 선화누나는 장난을 끝낼 때라는 걸 알았는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평소의 편안한 표정으로 한 골목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음 같아선 기분 상했다는 핑계로 오늘은 약속을 빼볼까 했지만, 내 손을 잡아 이끄는 그녀의 손길에 내 몸은 정직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내 모습이 누나는 조금은 마음에 걸렸던건지 이내 내 옆으로 다가와 미소를 지어보이며 공책을 내밀었다.
'내 장난이 너무 짓궂었나? 그렇게 화 내지 마.'
"화가 난 건 아니예요. 그치만 내 입장이 난처해진단 말이예요. 내 친구는 장난이였다고 말해도 내가 대답하기 싫은 것이라고 생각 할 꺼구요."
'미안해. 내가 우리 진환이 생각을 안했네.'
언제나 그렇듯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은 선화누나를 향해 사실은 미안하지도 않은거죠?라고 물었지만, 누나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손을 이끌고 멀지 않은 주택가의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다지 좋은 동네에 자리잡고있지 않은 내 집과는 다르게 어느정도 잘 정돈 되어있고 거주자의 경제수준을 어느정도 보여주는 주택가였다. 그 중 한 다세대주택 앞으로 걸음을 옮기던 누나는 이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건물 안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사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던 건물 안의 정적을 깨고 계단을 오르던 중 3층 쯤 한 집앞에서 다시 한번 비밀번호를 입력한 누나는 먼저 나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사실 건물 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긴장이 된 상태였다. 난생 처음으로 여성의 집에, 그것도 내가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서 봉투들을 받아 든 누나는 수고했다며 음료수 한 잔 내줄테니 쇼파에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과 함게 부엌으로 향했다.
정말 부끄러운 상황이었지만, 생각했던대로 누나의 집은 무척이나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방 안 곳곳에는 손수 만든 듯 한 접시들과 장식들로 둘러 쌓여있었고, 따뜻한 느낌의 목재가구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티비라던가 컴퓨터같은 가전제품은 보이질 않았다.
뭐라고 해야할까. 집 자체는 무척이나 사람이 살기 좋은 분위기였지만, 막상 살고 있으면 무척이나 외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안 이곳저곳을 한창 둘러보던 중, 오렌지주스 두 잔을 들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 선화누나의 모습에 서둘러 시선을 거둬 누나가 들고있는 음료수 잔을 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게 음료수를 건네준 누나는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생글생글 미소를 지어보이다, 이내 내게 공책에 글씨를 적어 내보였다.
'어때? 우리 집. 어떤 느낌이야?'
"평소 누나 스타일대로... 아기자기하고, 깨끗하고...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예뻐요."
'어머나 우리 진환이가 아부 할 줄도 알았네? 이 누나 기분이 너무 좋은 걸?'
아직까지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상평을 남기는 내게로 누나가 감격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며 공책을 내보이더니 이내 음료수를 다 마시고 내려놓는 내게로 서둘러 무언가를 적더니 이내 시선을 돌린 내게로 공책을 내보였다.
'반찬은 나중에 만들고 저녁부터 먹자. 아직 안먹었지? 닭 삶아놨는데 혹시 닭 못 먹거나 그런 것 있어?'
"누나 그러실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괜히 저 때문에 힘들게.."
누나가 내보인 공책의 내용에 곧바로 난처한 표정과 함께 손사래를 치자 누나의 얼굴이 금새 어두워지더니 이내 뚱한 표정과 함께 내 앞의 비워진 음료수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한 쪽에 벌써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삼계탕을 접시에 옮겨 탁자 앞에 가져다 두더니 다시 한번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보였다.
'뭐 어쩔 수 없지. 진환이는 먹기 싫다고하니 나 혼자 다 먹어야겠다. 진환이는 거기에 앉아서 기다려. 나 혼자 다 먹고 치운 다음에 반찬 만들자. 알았지?'
"아...아녜요! 저도 같이 먹어요."
누나의 단호하고 실망이 가득 찬 얼굴에 금새 꼬리를 내리곤 식탁으로 달려가 앉았다. 내가 화들짝 놀라 달려오는 모습이 썩 즐거웠던 듯 누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곤 앞 접시와 젓가락을 내 앞에 내주고 다리를 하나 떼어내 앞 접시에 올려줬다. 젓가락으로 먹을까 하다 이내 닭다리를 들어 누나에게 보여주듯 그녀를 바라 본 채로 통째로 뜯어먹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은 듯 턱을 괸 채로 미소를 지어 보이던 누나도 다리를 하나 뜯어 나와 마찬가지로 통째로 든 채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뜯어먹기 시작했다.
누나와 마주앉아 식사를 한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누나의 집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나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혹시나 먹는 모습이 이상해보이지 않을까 좀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자꾸만 누나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눈길이 갔다. 혹시라도 누나에게 들킬까 곧바로 눈을 닭다리로 돌리곤 혹시나 다시 눈길이 가지 않게 일부러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식사 하다간 체하고 말꺼야…
1 note · View note
mium-novel · 5 years
Text
흰색 드래곤, 그녀 - [1]흰색의 그녀(2)
"어이~ 수고가 많구만 그래~"
"어. 왔냐."
창고 깊숙히 숨어있던 박스들을 정리하고 카운터로 나오던 도중 가게 안으로 들어오며 내게 손을 흔들어보이는 남자. 곧바로 익숙 한 듯 내가 나왔던 창고로 들어가 아르바이트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와 내 옆에서 히죽히죽 미소를 짓고있는 이 녀석의 이름은 한가람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질긴 인연을 가진 친구로 대학에 진학한 나와는 다르게 곧바로 녀석은 사회로 나섰다.
현재 그의 직업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및 소설가. 무슨 소설가가 아르바이트를 하겠냐고 하겠다만, 이미 책을 출판한 경험이 있는 엄연히 자기 몫을 하고 있는 소설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책은 그다지 많이 팔리진 않았다. 나 또한 그의 글을 읽어보았고, 가람이의 글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구성이라던가 캐릭터 하나하나의 존재감 또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굳이 성적이 부진한 이유를 뽑자면 그다지 대중적이지 못한 소재 때문 인 듯 싶다. 하지만 그의 필력과 소설의 소재, 이야기의 구성에 빠져들어 소수 매니아들에게는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니 아직 실패했다고 하기에는 이른 듯 싶다. 그렇게 그는 나와 교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히, 그리고 퇴근 후 자기 전 3시간 정도 시간을 내 자신의 꿈을 이뤄나갔다.
어떻게보면 내 주위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바로 한가람 이 녀석이였다. 넉넉한 사정은 아니였지만 자신의 꿈을 이뤄가며 살아가는 그는 하루하루 행복해 보였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서 힘들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후회는 없다고 말하며 다녔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좇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내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해보였다.
언제나 시간과 돈에 쫓겨 살아가며, 내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도 이제는 알지 못 하는,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지어지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옆에 다가온 가람이는 뭔가 대단한 것을 숨기고 있는 듯 등 뒤로 손을 숨긴 채로 미소만 지어보이다 이내 내 앞으로 책 한 권을 쑥 내밀었다. 2개월 전 쯤에 책을 냈었던 것 같은데, 벌써 다음 권을 써서 내놓은 듯 했다. 미련한 친구 같으니라고. 그렇게 몸을 생각하면서 출판하라고 했었는데도…
애써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얼굴에서 피곤함이 느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잠시동안 안쓰러운 마음에 한숨을 내뱉었다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받아들었다. 그가 소설가 생활을 시작했었던 때 부터 난 항상 그의 첫 번째 고객이였다. 출판을 하지 않았었던 때에도 항상 그의 소설을 읽고 감상평을 들려주곤 했고, 그가 처음으로 책을 냈을 때도 처음으로 책을 산 사람도 나였다. 그것이 버릇이라도 된 듯 가람이는 항상 책을 찍어내면 처음으로 나온 책을 내게 선물 해 주곤 했다. 책 값을 지불한다고 해도 항상 만류를 해 미안하긴 하지만, 그의 책은 하루에 쉬는 시간이 별로 없는 내게 몇 없는 쉬는 시간이다. 아르바이트나 막노동을 다녀와 피곤한 상태여도,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몸이 편안해지고 정신이 맑아지곤 했다. 상당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의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그 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상상에 빠지거나 그에게 이야기를 먼저 들려달라고 조른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의 책은 나의 인생에 몇 없는 큰 의미이기도 했다. 내게 책을 건낸 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던 가람은 이윽고 내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이윽고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어때? 이 형님이 밥을 사고 싶은데 말이야."
"뭐래. 그나저나 좋은 일 있나 봐?"
"이번에 수익이 꽤 났거든! 간만에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너랑 밥 한 끼 먹을려고 하지."
"그럴 때 일수록 아껴라. 지금 나가는 돈 한 푼이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니까."
"어이구...이 늙은이 같으니라고.. 이 정도는 괜찮거든! 친구랑 밥도 못 먹겠냐."
잔뜩 신나있는 모습으로 내 손을 잡고 흔들어대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떼어내곤 딱 잘라 말하자, 가림이 또한 한심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한 소리 내뱉었다. 솔직히 나도 그의 말에 동의 하긴 한다. 밥 한 끼 먹는다고 당장에 파산 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멸망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만 난 그에게 밥을 얻어 먹는다는 것이 미안했다. 그는 항상 소설가 활동을 하며 수익이 있을 때마다 나와 밥을 먹곤 했는데, 한 끼라고는 하지만 얻어 먹는 것도 한두 번이다. 항상 이렇게 얻어먹는 건 밥을 사는 그의 입장에서는 가벼운 일 일수도 있지만, 내겐 무척이나 무겁고 꺼려지는 일이다. 그래서 얼마 전 부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와의 식사를 피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또한 작정을 하고 온 것일까, 그는 지갑에서 종이표 두 장을 꺼내 내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나~ 이미 식사권을 사버렸네? 환불도 안된다는데!"
"....여자친구랑 가."
"갈 수 있는 여자친구가 있었더라면 너에게 밥 먹자는 이야기도 안했을꺼야."
그의 말을 단칼에 잘라내며 거절하는 내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콧물을 훌쩍이며 슬픈 표정을 지어보이는 한가람. 그의 뼈가 담긴 말에 한 동안 서로를 쳐다보다 이윽고 동시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렇지... 난 모태��로였고, 이 녀석도 솔로가 된 지 오래였지..
딸랑ㅡ
가슴 깊이 파고드는 고통에 서로의 어깨만 부여 잡은 채 아픔을 참아내기 위해 노력 중일 때, 작은 종소리와 함께 모자를 깊숙히 눌러 쓴 한 여성손님이 가게안으로 들어왔다. 가람이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새 자리에 서서 손님을 맞이했고, 나 또한 인수인계 사항은 전부 쪽지에 적어두었기에 더 이상 통로에 서있다간 폐가 될까 재빨리 창고 안으로 들어가 아르바이트 복장을 벗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끝나 갈 때쯤 선화누나가 찾아온다고 했었지. 그런데 내가 일이 끝나는 시간을 누나가 어떻게 아는거지.
어디쯤 오고 있는 중인지 누나에게 전화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누나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있어봤자 귀찮기만하고 연락 할 ���람도 없다면서 나에게 적지않게 당황스러움을 안겨주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곤란했던 적은 없었다. 학교생활이 거의 나와 같은 시간표로 이루어져서 식사시간에 서로 못 만나는 일이 없었고, 설사 서로 못 만났더라도 항상 식사하는 곳에서 서로를 기다리다보면 만나곤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학교가 끝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서로를 찾을 방도가 없다. 뭐 누나는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지라 기다리다보면 오기야 하겠지만 오고 있는 중이라면 바깥에서 나가서 누나를 기다리고 싶은게 내 마음이다. 사실, 얼마나 기다리는 건 상관이 없다. 다만, 누나가 오고 있는 중이거나 이제야 출발했다면, 나가서 기다리고 싶은 게 현재 내 마음이다. 누나와 함께 가게를 나가는 장면을 가람이에게는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다. 별로 사귀지도 않는 사이라면서 같이 나가면 괜한 오해만 생기겠지. 또 괜히 가람이녀석 엄한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다. 녀석은 항상 내게 여자 소개 시켜달라고 노래를 불러댔으니까.
한참을 어차피 걸지도 못하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지작 대다가 결국은 편의점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릴 생각으로 창고 바깥으로 나갔을 때, 이런저런 물건을 들고 계산대 앞에서 물건을 내려놓던 여성손님이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정체를 숨기는 듯이 겉 모습을 꼭꼭 숨겨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이 드러나자 당장에 몸이 꽁꽁 굳어 그 자리에 멈춰섰다. 내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을 자리에 서 있던 여성은 금새 장바구니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 무언가를 쓱쓱 적더니 내 쪽으로 내밀어보였다.
'뭐 해? 어서 짐 들지않고, 누나 어깨 아파 죽겠다.'
0 notes
mium-novel · 5 years
Text
흰색 드래곤, 그녀 - [1]흰색의 그녀(1)
어느 덧 따뜻했던 봄은 지나가고 그저 푹푹 찌기만 한 여름이 다가왔다. 모든 사람이 그러겠지만, 난 봄과 가을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라 이런 날이면 그저 몸이 축 늘어지기만 한다. 이런 고통스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르게 자란 풀밭에는 연인들이 가득 차 더워 죽겠는데도 서로 꼭 붙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해는 더욱 내 위에서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최악인 날이다. 물론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난 어차피 아르바이트 행이다. 오히려 이렇게 학교에 있을 수 있는 날이 더 나한테는 편하달까. 이래나저래나 고통받는 것은 매한가지다.
몸만 겨우 가려주는 나무 그늘 아래서 얼마나 불평을 하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 내 어깨위로 자그마한 손 하나가 쑥 올라왔고 그대로 내 볼을 쿡 찔렀다. 더위에 지쳐 점점 익어가는 몸을 겨우겨우 돌려 뒤를 돌아보자 시원한 옷차림으로 내게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있는 한 여성이 보였다. 그녀의 인사에 피곤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어보이자 여느 때와는 다르게 지쳐있는 내 모습에 여성이 고개를 갸웃 움직이고는 내 옆자리에 앉아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게 내보였다.
'오늘 피곤해보이네? 어디 아파?'
"아뇨...그냥 더워서요. 누나는 괜찮아요?"
'나는 이상하게 그다지 덥지도 않고 괜찮네. 우리 진환이 이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냐?'
"무서운 말 하지마세요 누나... 쓰러지는 것도 돈이란 말이예요."
'몸 건강보다 돈을 더 챙기는 건 너 밖에 없을꺼야. 네 말대로 쓰러지는 것도 돈이야. 그러니까 쓰러지기 전에 몸 잘 챙겨. 아니면 백숙 먹으러 갈래? 나 백숙 잘 하는 집 알아.'
"사양할게요. 누나가 해주는 밥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거든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런저런 말을 적어서 내보이는 그녀를 향해 내가 질린다는 듯 손사래를 쳐보이자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내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꽁 쥐어박았다. 마치 친 누나처럼 내 이것저것을 걱정하는 이 사람의 이름은 이선화. 바쁜 일상 때문에 필요이상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시간을 들여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올 해 26살. 1학년을 다니고나서 사정이 생겨 휴학을 했다 이번 학기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이라고 한다면 거의 없다고 표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녀는 올 해 학기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단아한 모습과 흰 색의 긴 생머리 등 매력적인 모습으로 학교에서 유명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한 마디도 섞은 적이 없고, 학교 행사에 참여 한 적도 없었다. 겨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교수님과의 대화 뿐. 덕분에 그녀는 소위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렸고, 학교에서 존재감도 없어져 버렸다.
한 학년 선배들한테 물어봐도 그녀는 그 때에도 거의 단절에 가까운 인간관계를 가졌던 것 같다. 실례를 무릅쓰고 그녀에게 물어봤을 때, 그녀는 다른 이들과의 교류는 쓸떼없는 짐만 늘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쌓다보면, 어느 순간에 사이가 벌어 질 수도 있고, 그러면 마음에 짐만 늘어나는 것이라며 그녀는 혼자 있는 게 좋다고 했다.
또 그녀는 선천적으로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말 뿐만이 아니라 어느 소리도 그녀는 내지 못 했다. 무언가에 찔려 아파 할 때도, 즐거운 상황에 웃음이 나올 때도 그녀는 때에 맞는 모습과 입에서 나오는 바람소리만 내 보일 뿐 목소리는 일체 내질 않았다. 덕분에 필기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는 글씨를 적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고, 글씨체 또한 예뻤다. 한번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의 글씨체가 예쁘다고 칭찬을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곤 엉뚱한 소리를 한다며 어물쩍 넘어 간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봤더라도 충분히 예쁘다고 했을 법한 글씨체였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 했다.
내 옆으로 다가와 보자기를 깔고는 차곡차곡 채워뒀던 반찬통을 꺼내던 선화누나가 무언가 생각 난 것인지 내게 '아.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될까?'라고 공책에 적어 내보였다. 그녀에게 지금까지 점심을 얻어먹은 것이 있어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소를 지어보인 선화누나가 무언가를 공책에 적어 내게 내보였다.
'나 무릎베게 해 줘!'
"네?"
'지금은 배고픈 것보다 졸려. 조금만 자다가 점심 먹고 싶은데?'
"...그런 건 나한테 부탁하지 말아요. 남이 보면 오해 할 수도 있잖아요."
'남자가 쪼잔하긴. 아까는 부탁 들어준다며!'
베시시 미소를 지어보이며 내게 엉뚱한 부탁을 청하는 그녀의 모습에 약간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돌리곤 중얼거리자, 잔뜩 고집이 붙은 얼굴로 엄청난 속도로 글씨를 휘갈겨 내게 내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꼭 이 고집을 이룰 생각 인 듯 싶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었다. 아니, 많다고 해야할까. 그녀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붙인 것도 그녀가 고집을 부려 부르기 시작 한 것이였고, 어떤 날은 날이 덥다며 분수대 안에 들어가자고 하질 않나, 또 어떤 날은 자기가 먹고싶은 음식이 있다며 30분 동안 걸어서 점심을 먹고 온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날 난 강의에 지각을 하지 않기위해 그녀를 업고 뛰다시피 했다. 이번엔 무릎베게를 해달라니. 저절로 얼굴을 벌개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괜히 주위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집은 꼭 이루어야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한쪽 무릎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제서야 드디어 목표를 이뤘다는 긋 그녀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만세를 부르곤 곧바로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 편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평소에는 이러지 ��았는데, 더운 날이라 그랬는지 그녀도 꽤나 피곤했던 듯 싶다.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 볼 수는 없어 괜시리 붉어진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을 때, 처음 선화누나와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었던 것이 떠올라 고개를 돌린 채로 내 무릎에 앉아 토끼풀을 뜯어 뱅글뱅글 돌리며 놀고있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현재 남자친구 없음. 진환이의 대쉬라면 언제나 OK'
"....그런게 아니라... 그게...누나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걸 별로 안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근데 난 왜 꾸준히 만나주는거예요?"
또 다시 엉뚱한 말을 적어 내게 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또 다시 붉어진 얼굴을 문지르며 질문을 이어가자 가만히 앉아서 내 얼굴을 쳐다보던 누나가 무언가를 쓱쓱 적어 내게 내보였다.
'글쎄. 처음에는 짜증 났었어. 근데 진환이가 왠지 안쓰러워보이기도 했고...너랑 같이 있으면 편안하거든. 평소에는 못 해봤던 장난도 쳐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보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 하시는지는 몰랐네요."
'그러는 너야말로 왜 처음에 나한테 온거야? 내 소문 알 거 아냐?'
"누나가 너무 쓸쓸해 보여서요. 재미있는 학교 생활에서 혼자서만 있으면 재미 없잖아요?"
'헤에...역시 진환이는 자상하네? 안그래?'
"그런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말해봤자 소용 없어요. 그나저나..이제 슬슬 일어나면 안돼요 누나? 주위에 보는 눈도 있는데..."
거슴츠레 뜬 눈으로 올려다보며 노트를 내보이는 누나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어보이다 이내  무시 할 수 없는 주위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누나에게 입을 열자 아직 성에 덜 찬 듯 누나가 삐죽 삐져나온 입술을 한 채로 날 올려다봤다.
사람들이 없는 곳이였다면 만족 할 때까지 무릎을 내 줄 수 있지만, 이 곳은 학교이고, 점심시간 중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나무그늘 아래 앉아있다. 신경을 안 쓸수 없는 상황. 괜히 쓸떼없는 소문이 퍼져봤자 누나한테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가뜩이나 선, 후배는 물론이고 동기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않은 누나인데 사귀지도 않는 남자의 무릎을 베고 있는 모습을 봤다는 소문이 퍼지는 날엔 쉬운 여자로 소문이 날 수도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간절한 내 마음이 전해졌던건지 선화누나도 얼마안가 삐죽 튀어나왔던 입을 집어넣곤 자리에서 일어나 '흥'하곤 콧방귀를 뀌며 내게 공책을 내밀었다.
'진환이는 이 누나보다 밥이 좋은거지? 그러니까 이러는 것 일꺼야.'
"아니라는 거, 누나가 더 잘 아시죠?"
그녀가 건넨 밥을 받아들고 미소를 지어보이자, 누나 또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누나가 더 잘 알 것이다. 이렇게 점심을 얻어먹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누나의 말대로라면, 그저 밥 하나를 더 싸오는 것 뿐이라고 하지만, 확실히 두 명이 먹을 양의 반찬을 준비하려면 누나에게 많이 무리가 될 것이다. 나도 자꾸 얻어 먹는 것이 미안해서 밥을 몇 번 싸왔었지만, 첫 날 누나에게 했던 '학식이나 식당은 내게 비싸거든요.'라는 말 때문인지 누나는 자기가 계속 싸오겠다며 내가 밥을 준비하는 것을 자꾸만 말렸다.
누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즐거웠지만, 자꾸만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누나와의 점심시간을 멀리하고 편의점에서의 점심시간으로 이동하려 했었지만, 그럴 때 마다 누나는 내 마음을 읽은 듯'내일도 밥 싸올테니까 안나오면 알아서 해.'라며 엄포를 놓곤 했다. 내가 매 번 미안한 마음에 부담감을 갖는 것을 누나도 알고 있는 것 일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담감 갖을 필요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누나에게서 받은 밥을 들고 또 씁쓸한 표정으로 반찬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본 것인지 누나가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안쓰러운 눈 빛으로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곧바로 반찬을 내려놓고 공책에 글을 적어내려가던 누나는 곧바로 내게 공책을 내보였다.
'내가 밥 싸오는 게 그렇게 부담스러워?'
아니요. 라고는 말 못하겠어서 미소만 지어 보일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보며 누나가 또 다시 공책에 의견을 담아 내게 내보였다.
'그러면 저녁마다 우리 집에 와서 점심 준비하는 걸 도와줘. 그러면 괜찮잖아?'
뭔가 엄청난 대 발견을 한 듯 누나는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난 영 아니올시다라는 의견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나 혼자 사는 듯 하는데, 다 큰 사내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 가는 게 뭐 좋은 일이랴. 설사 백보 양보해서 누나가 날 유혹하는 말이라고 해도, 난 갈 생각이 없다. 나 또한 누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쉬운 사이가 되고 싶진 않다. 누군가와 만남을 가진다면 천천히 그리고 진지하게 관계를 가지고 싶다.
그런 결론 끝에 누나에게 딱 감은 눈을 한 채로 고개를 흔들어보이자 결국은 누나가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어 넣은 채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누나도 답답 할 것이란 걸 잘 알고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고 하니, 어찌보면 나 또한 황소고집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 보다 더 고집에 있어선 한 수 위인 누나가 곧바로 공책에 무언가를 적더니 내게 척 내밀어 보였다.
'너 원룸촌 근처 마일즈시즌 편의점에서 일하지? 12시까지 일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있어. 난 오늘 그 시간에 맞춰서 편의점으로 가서 점심 재료들을 살테니까 알아서 해. 네가 날 지나쳐 간다면 그 재료들 싹 다 버려서 둘이서 쫄쫄 점심을 굶던지, 아니면 네 집까지 쫓아가서 만들고 집에 갈테니까!'
"누나 그래도 그건.."
'네가 항상 부담스러워하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부담을 덜어줘야지. 난 말했으니까 알아서 해. 얼른 밥 먹어. 배고프겠다.'
한 층 더 거칠어진 그녀의 엄포에 쩔쩔매며 말리려하자, 누나는 곧바로 내 의견을 기각시키곤 식사나 하자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밀었다. 이번 것도 어쩔 수 없다보다. 누나 고집은 확고하니 애써 산 재료들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우리 집에 초대하기엔 아직 집안 꼴이 부끄럽다. 차라리 누나네 집에 가서 후딱 만들고 돌아오는 것이 훨씬 편 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내가 더 이상 거부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걸 느낀건지 그제서야 누나도 평소의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누나의 고집을 어떻게 하면 꺾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고 누나가 싸온 반찬을 맛 보고 있었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궁금증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누나가 싸온 반찬은 하루하루 메뉴가 달랐는데 (메뉴가 겹치긴 했지만) 누나는 저녁마다 반찬을 새로 만든다고 했었다. 피곤하지 않을까? 한번에 많은 량을 만들어두고 먹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고 간편한 방법 일 것이다. 그렇게 궁금한 건 아니였지만, 딱히 대화의 주제거리도 없었기에 누나에게 물어봤지만, 내 궁금증과 달리 누나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그러고보니 누나는 저녁마다 반찬을 새로 만든다고 하셨었죠?"
'그렇지. 그 날 저녁, 아침, 점심 이렇게 세 끼니를 먹을만큼 만들어. 그런데 그건 왜?'
"그건 너무 피곤하지 않아요? 차라리 한번 많이 만들어두고 덜어먹는 편이..."
'난 학교가는 거랑 집에서 공부 빼고는 하는 게 없으니까. 이렇게 음식 만드는 게 취미야. 새로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밥 그릇을 내려 놓으며 질문을 건네는 내게로 누나 또한 밥을 내려놓고 공책을 들어 대답을 해주었다. 역시 누나답다. 라고 해야하나. 누나는 무언가를 만들어서 쓰는 것을 좋아하는 듯 하다. 누나가 들고다니는 공책도 앞 표지 그림부터 스프링을 끼워 마무리 하는 것까지 누나가 손수 작업해서 만든 공책이었고, 자신이 입는 옷 몇 개도 자신이 디자인하고 만든 옷이라고 했었다. 누나는 완제품을 사서 사용 하는 것 보다 손수 만들어서 사용 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듯 했다. 누나의 말에 '그런가..'라고 중얼거리며 미소를 짓고있는 내게로 누나가 흘깃 눈 길을 보내곤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게 내 보였다.
'결론적으론 누나는 왜 귀찮게 반찬 만드는 데에 날 끌어들이고 그러냐. 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아..아니예요 그런 거! 저도 뭐 만들어서 먹는 거 좋아해요. 그러니까.."
'그러면 진짜 오늘은 우리 집에서 같이 반찬 만들고 가는거다? 약속이야?'
누나의 말에 적지않게 당황해하며 손사래를 치는 내게로 활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곧바로 억지 아닌 억지로 약속을 확정 시켜버리는 선화누나. 이 전의 말도 충분히 당황스러웠고, 지금 이 말도 충분히 당황스러웠지만, 처음으로 보는 활짝 핀 누나의 얼굴에 어째선지 내 얼굴이 벌개져 서둘러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반대 편으로 돌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누나 또한 '고집에 장단 맞춰줘서 고마워.'라고 글을 내보였지만, 눈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역시 누나의 얼굴은 무척이나 위험 한 듯 싶다. 미소를 짓거나, 무언가 고집을 부리거나, 토라져 있을 때도 괜시리 내 얼굴을 붉어지게 만드니까. 그런 누나하고 단 둘이서 반찬을 만들 생각을 하니..
단 둘이....
누나랑...누나 집에서...단 둘이....?
"저..저기 누나! 나 역시 오늘은 안될 것 같아요!"
'에?! 왜! 또 무슨 이유 때문에!'
괜히 머릿 속을 비집고 들어온 정말 쓸떼없는 생각들 때문에 서둘러 누나에게 소리를 치곤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누나 또한 적지않게 당황해하며 내게 노트를 내밀어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엄청나게 위험한 계획이다. 누나의 표정변화는 무척이나 치명적이라(적어도 내게는) 그것 하나에도 얼굴을 붉히는 나인데 둘이서 그것도 누나 혼자서 사는 집에 가서 같이 반찬을 만든다는 것은 큰 사고를 칠 계획이라는 것 밖에 안된다.
물론, 그렇게 심각한 사고가 아닌 주체를 하지 못 하는 내 표정 변화이다. 만에 하나라도 누나에게 내 헤벌쭉한 표정변화를 들키고 싶진 않다. 들키지 않는 것도 한두 번일테고, 들켰다간 이상한 생각이나 하는 놈으로 찍혀서 괜히 사이가 서먹해 질 것이 뻔하다. 더군더러 이렇게 남을 의식한 차림새가 아닌 편한 복장의 누나의 모습은 더욱 치명 적 일 것이라는 걸 자부 할 수 있겠다. 괜히 오해를 만들고 싶지도, 누나와 거리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되는 누나의 질문에도 말을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하는 내 모습에 누나 또한 적지않게 화가 났던 것인지 누나가 분노에 찬 손놀림으로 글을 적어 날카로운 눈 빛으로 날 노려보더니 거친 손길로 내게 공책을 내보였다.
'빨리 이유를 말해. 아니면 정말 점심은 둘 다 쫄쫄 굶는 수가 있어.'
"그..그게.. 좀 그렇잖아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찾아 간다는 것도 그렇고 누나랑 단 둘이 뭘 한다는 것도 난 좀...솔직히 나도 남자니까.."
계속되는 그녀의 재촉에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내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선화누나는 얼마안가 웃음을 터트리곤 한참을 웃느라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그리곤 얼마안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말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평소의 모습대로인 누나의 모습이 적지않게 당황스럽지만, 내가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누나의 표정변화 하나하나에도 이렇게 얼굴이 붉어지는데 누나의 집 안에서는 어떻게 버티라는 말인가. 공부하느라 바쁘고, 등록금 버느라 바쁜 몸이지만, 엄연히 나 또한 건강한 남성이다. 내 몸이 그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 할 지 장담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심각한 내 현재 상황과는 다르게 선화누나의 눈에는 귀엽기만 한 듯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곤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미소를 지은 얼굴 앞에 댄 채로 내게 보여줬다.
'그래서 우리 진환이는 누나랑 단 둘이서 이런 거 저런 거 할 상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우리 진환이도 남자 였어요~ 그랬어요~?'
"아..아니 그러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누나의 장난스런 말투에 오해가 생길까 재빨리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자 그제서야 누나 또한 웃음을 멈추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나 친 누나가 있었으면 이런 느낌이었을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따뜻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던 누나는 얼마안가 손을 떼어내곤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게 미소를 지은 채 내용을 보여줬다.
'그렇지? 우리 진환이는 안그럴꺼지?'
"....네...안그럴꺼예요."
바보같이.. 가족같이 날 챙겨주는 사람한테 내가 무슨 몹쓸 말을…
방금 전까지 정말 어리석은 망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해 고개를 푹 숙인채로 누나에게 사과를 하자 괜찮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누나가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그리곤 다시 내게 밥 그릇을 쥐어주고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보였다.
'그러면 오늘은 같이 반찬 만드는거다? 약속!'
"알았어요..같이 만들어요."
----------------------------------
1. 소설을 적는 건 즐겁네요.
2. 하지만 실력이 모자르다는 게 팩트
0 notes
mium-novel · 5 years
Text
흰색 드래곤, 그녀 - 그녀와의 첫 만남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흥미없는 강의를 들으며 강의실에 앉아있는 것은 정말 시간을 낭비하는 짓이다. 특히 오늘처럼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봄 날에는 말이다. 정말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내 머리는 이미 저 푸르게 펼쳐진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있건만, 내 몸은 이렇게 족쇄가 채워진 채 강의실에만 앉아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잠만 솔솔 몰려오고, 비단 나 만의 문제가 아닌지 주위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학생들을 보고있자니 저 앞에서 열정적으로 강의를 이어나가고 계시는 교수님만 불쌍하게 보일 뿐이다. 엄연히 말하자면 날씨 탓이라고 하기도 뭐한게, 지금 강의를 듣고있는 과목은 우리 대학을 통틀어 가장 인기가 없기로 소문난 과목이었다. 뛰어다녀도 모자를 학생들이, 그것도 이런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듣고있으니 오죽했으랴. 그래도 지적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몇몇 학생들은 이미 강의실에서 퇴실조치 되어버리기도 했고, 교수님이 학생들의 평가에 무척이나 엄격하기 때문이다. 재수강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허리를 졸라메고 생활하며 내는 대학등록금인데 겨우 이런 것 때문에 한번 더 뜯기긴 싫다. 또, 교수님 또한 자신의 강의가 지루하다는 걸 알고 있으신지 졸지않고 강의를 듣는 것 만으로도 이뻐해주시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끼이익ㅡ
마치 자장가 같았던 교수님의 강의소리와 작은 필기소리,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만 들려오던 강의실에 울려퍼지는 나무 문을 여는 소리. 그와 동시에 교수님을 포함한 강의실에서 일어나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강의실의 뒷 부분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곳에는 흰 색의 신기한 머리색을 가진 한 차분한 모습의 여자가 서 있었다. 자신을 향해 시선이 몰린 것을 느낀 듯 곧 강의실 맨 뒤 쪽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손에 꼭 쥐고있던 공책에 커다랗게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라는 글자를 적어 교수님께 보였고, 교수님 또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강의를 이어갔다.
교수님의 강의가 시작되자 과목책과 공책을 펼쳐들고 전혀 졸린 기색 없이 그녀는 금새 교수님의 강의에 빠져들었다. 1학년 내내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어떠한 사정 때문인지 이번 학년부터 합류하게 된 그녀의 첫 등장은 아주 강렬했다.
왠만한 사람들이라면 소화하지 못하는 흰 색의 긴 생머리에, 노출을 꺼리는 듯 보통 또래의 여자들과는 다르게 오직 길다란 옷만 선호하는 경향 덕분에 단아한 이미지를 풍기는 그녀는 첫 날부터 남자들에게 인기가 폭발했다. 여자들 또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며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지만, 그녀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혼자 있기를 원했다. 또한 그녀는 한번도 입을 연 적이 없다. 대화는 오직 공책에 쓴 글씨로만하고 심지어 교수님들과도 대화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며 교수님들은 이해하고 넘어 간 듯 싶었지만, 여자애들은 재수가 없다고, 남자애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흥미를 잃어 자연스럽게 소통이 끊겼다. 요즘 말로 말하자면 아웃사이더라고나 할까. 덕분에 그녀는 아무런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강의만 듣고 모습을 감추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관심을 끊었지만, 난 그녀에게 계속해서 관심이 갔다.
물론 외형적인 것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그녀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 일까. 이렇게 학교에 나와서 강의를 듣고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꺼리는 것은 아닐텐데, 웃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울 것 같은 그녀가 저렇게 무표정만 지으며 강의만 듣고 사라진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더욱 강의에 빠져드는 듯 주위의 시선은 신경쓰지도 않고 교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강의가 끝나 갈 때 쯤 교수님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척 펴보이며 그녀를 칭찬했고, 그녀 또한 노트를 통해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모두가 점심식사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을 때, 자신의 짐을 챙기고 어디론가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따라 나 또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점심시간을 날리는 것은 아쉬웠지만, 난 학식이나 음식점을 다니는 것도 아니였고, 그냥 대충 편의점음식으로 때우는 스타일이였기에 이 기회에 그녀와 한번 친해져볼까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 또한 학식을 먹지 않는 듯 건물을 나와 해가 잘 쬐는 잔디밭 한 구석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도착과 동시에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공책에 글씨를 써내려가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뒤돌아 내게 귀찮다는 표정으로 공책을 내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그저 날이 따뜻해서 나온 것 뿐이예요."
'그러신가요. 알겠습니다.'
능청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어나가는 내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공책을 내보인 그녀는 그대로 내려놓았던 자신의 짐들을 챙겨 자리를 피하려는 듯 움직였다. 딱히,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지 그녀를 귀찮게 하고싶지 않았기에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마자 손사래를 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그녀를 불편하게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사람과의 교류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괜히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내가 걸음을 옮기고 얼마 지나지않아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오고, 내 어깨 위로 작은 손이 올라와 툭툭 두드렸다. 그 손의 부름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내 앞에 서서 꿈뻑이는 눈으로 내게 공책을 내보이는 그녀가 보였다.
'그러고보니 식사는 안하시는건가요.'
"학식이랑 식당은 나한테는 비싸거든요. 그런 쪽보다 난 편의점을 좋아해요."
부끄러운 대답이였지만,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하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한순간 불쌍하다는 감정이 느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곧이어 다시 평상시의 눈빛으로 돌아왔고, 계속해서 내 눈을 쳐다보던 그녀는 또 다시 공책에 무언가를 써내려가더니 내게 내보였다.
'같이 식사하실래요? 도시락을 싸왔는데 혼자서 먹기엔 양이 많아서요.'
"저야 좋지만, 그 쪽이 불편하다면 사양할게요."
'이미 충분히 불편해졌는데, 이 이상 불편해진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이미 불편해졌다니. 그거 많이 미안한걸요."
사정없이 까내리는 그녀의 말투에 잔뜩 미안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자, '쿡'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보자기를 꺼내 깔고앉아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녀와 처음으로 말을 한 날부터 그녀에게 점심을 얻어먹는다는 건 정말 미안한 일이였지만, 그녀와 조금은 친해 진 듯한 느낌에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민망한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꺼내보인 음식들은 정말로 수준급들이었다. 학식이나 근처 식당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이랄까. 내게로 밥을 건내주는 그녀에게 밥을 받아들고 반찬을 꺼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 그녀와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었던건지 나도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그러고보니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내 이름은 유진환이예요. 그 쪽은요?"
상황에 안어울리는 말은 아니였지만, 너무나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와서인지 한 동안 멍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작게 다시 웃음을 터트리더니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게 내보였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전 이선화예요. 반가워요 유진환씨.'
"아..그..그러니까...아 네 반가워요 이선화씨."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이미 당황했지만,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모습에 얼굴이 더욱 빨개져 고개를 푹 숙인채 그녀와의 통성명을 끝내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물론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 듯 게속 식사를 이어나갔지만, 방금 전 창피한 상황 때문인지 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내가 식사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느낀건지 곧 그녀는 가방에서 페트병을 꺼내 내게 물 한잔을 권했다. 그녀에게서 물을 받아 들었을 때, 그녀는 공책에 '저하고 식사 하는 게 불편하신가요?'라고 적어 내게 내보였다. 난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순전히 내가 한 바보같은 짓에 대해 부끄러워 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녀와 식사를 하는 건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내게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곤 그녀는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녀에게 받아든 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다시 식사에 들어갔다.
그녀는 말을 안하는 대신 글씨를 쓰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글씨체 또한 무척이나 예쁘고 단정했다. 전혀 관련없는 이야기였지만, 이런 예쁜 글씨체를 가진 그녀의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라는 생각이 잠시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이내 무척이나 실례가 되는 생각이였기에 이내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워냈다.
밥을 먹다말고 자꾸만 딴 짓을 하는 내 모습이 썩 웃겼던건지 밥을 우물거리며 내 모습을 쳐다보던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진환씨는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활동적이네요.'라고 공책에 적어 내게 보였다. 순간 그녀에게 또 엉뚱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라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공책을 꼭 쥔 채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미안해요. 저 때문에 자꾸 신경이 쓰이셔서 식사를 제대로 못 하시는 것 같네요."
'아뇨. 오히려 즐거운걸요. 이렇게 타인과 오랫동안 대화를 하는 건 오래간만이예요.'
미안한 마음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내게 오히려 즐겁다는 듯 재빠르게 공책에 적어 미소와 함께 내보이는 그녀를 보며 문득 어째서 이렇게 활기차고 남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하는데 어째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걸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 또한 실례가 되는 질문이였기에 그저 생각으로만 남기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느정도 식사를 마치고 그녀에게 차까지 얻어마시고 있었을 때, 반찬통을 정리하는 내 손을 도와 함께 정리를 하던 그녀가 자리를 떠나기 전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게 내보였다.
'괜찮으시다면, 내일도 같이 식사 하실까요?'
"아닙니다. 오늘 얻어먹은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선화씨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죠."
'아까 말했잖아요. 난 이미 충분히 불편해졌다고. 아니 진환씨와 식사하는데 엄청 즐거웠어요. 한 사람 분 밥을 더 챙겨오는 것 뿐이예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난 이미 더 챙겨오기로 결정했어요. 안오면 난 괜히 무겁게 점심을 더 챙겨 온 것이고, 그 밥은 버리게 되겠죠? 진환씨 알아서 판단하세요. 내일 뵈요.'
"어..어! 선화씨!"
엄청난 속도로 글씨를 적어 내게 내보이곤 휑하니 자리를 피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재빨리 손을 뻗으며 그녀를 멈춰세우려 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게 손만 흔들어보였다. 그래. 이 때 느꼈었다. 그녀는 엄청나게 고집이 강하다는 걸. 그렇게 우리 둘의 첫 식사시간 겸 인사시간은 끝이났고,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우리의 점심식사는 이어졌다. 이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였다.
----
1. 텀블러 관리를 한 동안 못했었는데, 오래간만에 생각나서 들어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팔로잉 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유가 어떻든, 팔로잉 감사합니다.
2. 당초에 연재하던 여우야여우야는 잠시 쉬고 있습니다. 아예 관둔 건 아니고, 짬짬이 시간내서 적어내려가고 있습니다. 만족할 수 있을때까지 찼을 때, 다시 연재 시작하겠습니다.
3. 한 동안 일상생활에 열중하다가, 다시 한 편 적어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정말 완결 내보고 싶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0 notes
mium-novel · 7 years
Text
얼마 전까지 지독한 하수구 냄새와 비바람, 흙 냄새가 난다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어제부터 무자비하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여름이 다 지나가서 비가 멈출 법도 하지만, 하늘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여름 때 보다 더 지독한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뉴스에서 나온 바로는 앞으로 3일 정도 비가 내린다고 했었지만, 지금까지 느꼈던 냄새로 판명한 바로는 족히 5일은 넘을 것 같은 비의 냄새이다. 덕분에 이번 주 일은 허탕을 쳐서 다른 팀원들은 오래간만에 얻은 긴 쉬는 기간이라며 푹 쉴 생각이니 부르지 말라며 엄포를 놓고는 정말 연락 한 통 없이 이틀을 보냈다.  불렀다간 해외로 휴가 겸 도망가버린다고 하니 이번 주는 그 녀석을 얼굴 보기는 틀린 듯 하다.
아침부터 주야장천 틀어놓은 티비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이미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움직이질 않으니 허기도 느껴지지 않아 아침도 거른 채 쇼파에 앉아 작게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목을 뒤롤 젖혔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힘겹게 넘어 간 목의 방향에 따라 텅 빈 천장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의 쉬는 날 같았으면 식재료라도 사러 갈 겸 산책을 나갔겠지만, 비 오는 날에 외출 하는 것은 사양이다. 이제 의미없이 티비를 바라보는 것도 질렸던 터라 잠이라도 청할까 티비를 껐을 때 였다.
콰앙ㅡ!
비가 내리는 소리 외엔 조용했던 방 안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문이 심하게 흔들렸고, 그와 동시에 바람을 타고 흐릿한 피 냄새가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술주정뱅이가 드러누워있나 당장 나가서 내쫓았겠지만, 이번에는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본능이 괜한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것을 말리려는 듯 머리로는 확인하려고 하고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희미한 여자의 신음소리에 더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으면 나가서 확인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바깥으로 향했다.
대문 한 구석에 웅크린 채로 검은색 그림자를 내보이던 그 물체는 가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구급대원을 부르더라도 일단은 상태라도 알아 놓을까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내 검은 그림자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물체에 움직임을 멈추곤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신경쓰지마세요. 금방 갈꺼예요.”
“…당돌한 아이구나. 엄마가 아픈거니? 쉽게 움직 일 수는 없겠구나.”
“괜찮아요. 신경 끄시고 들어가세요.”
꽤나 당찬 목소리를 가진 아이의 목소리에 귀찮음을 숨기고 최대한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하려 했지만 뒤이어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을 내뱉는 아이의 목소리에 다시 귀찮음이 몰려왔다. 더 이상 말해봤자 변할게 없을꺼라 느껴져 손사래를 치곤 다시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고맙겠구나. 하지만 죽으려거든 저 멀리가서 죽어라. 꽤 피를 흘린 모양인데, 내 집 앞에서 사람이 죽어서 엮이는 건 딱 질색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단칼에 내칠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그랬더라면 당장에 문을 열어 내쫓았을테니까. 하지만 이 정도 말했으니 영리한 아이라면 도움을 청할꺼라 생각했다. 구급대원을 불러주는 정도라면 못 할 것도 없으니 말이다.
아니나다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문 너머로 보이던 작은 그림자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방금 전과는 다른 작게 흐느끼는 목소리로 아이가 말했다.
“도와…주세요…엄마가 아파요…”
아이의 도움요청에 자리에 멈춰서 작게 한숨을 내쉬곤 대문을 열어 문 앞에 서 있는 아이와 여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곤 눈 앞의 그들의 모습에 움직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문 옆에는 아이와 똑 닮은 노란색 긴 곱슬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창백해진 모습으로 쓰러져있었다. 그들은 오래된 한복과도 같은 차림새와 밝은 노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전혀 놀라울 것이 없는 것들이였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위에 솟아나있는 개과동물의 커다란 귀와 허리 뒤로 축 늘어져있는 뭉뚝한 꼬리들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모습을 보였다간 좋을 것이 없었기에 구급대원은 고사하고 재빨리 쓰러져있는 여자를 안아올리곤 꼬마아이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어째서 타르시안이 이 곳까지 내려 온 것이지? 물론 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고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이 타르시안에 대해 난 잘 알고있었다. 이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한번도 발견 된 적이 없는 희귀한 부족이였다. 그런 그들이 비가 온다고는 하지만 벌건 대낮에 상처를 입은 채로 인간의 집 앞에 쓰러져있다? 그것은 단 한가지의 이유 밖에 없었다.
이들은 사냥당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신매매를 당했다는 것이다. 부족별로 다르지만 보통의 타르시안은 인간보다 노화로 인한 변화가 늦게 찾아온다. 당연히 나이를 먹어도 젊은 모습을 가진 여성이라면 좋은 물건임이 틀림없고, 저절로 인신매매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모자 또한 그들에게 당해서 이 곳까지 도망쳐 왔을 것이 분명하다. 방금 전 대문 앞에 쓰러져 있었을 때 신경쓰지 않았더라면 이런 복잡한 일에 엮이지도 않았을텐데.
방 안에 들어와 흐르는 피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여자를 침대에 눕힌 채로 허리 쪽의 옷을 걷어올려 상처를 확인했다. 꽤나 예리한 칼날에 베인 듯 깊게 파인 상처에선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상처는 그다지 문제가 될만한 상태는 아니였다. 그것보단 비까지 맞은 상태에서 피를 흘려서인지 얼굴은 이미 창백해졌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이대로 뒀다간 금방이라도 숨을 멈출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서랍장 안에서 재빨리 소독용 알콜과 지혈제를 꺼내 그녀의 상처부위에 바르곤 두꺼운 붕대를 상처부위를 압박하며 허리에 감았다. 지혈제를 바르며 아이에게 물어본 바로는 이렇게 피가 흐른지는 얼마 안된 듯 해 떨어진 체온만 올려준다면 별다른 걱정은 없을 듯 했다. 꽤 독한 지혈제를 썼음에도 미동조차 하지않고 가늘게 숨만 내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꽤나 깊게 정신을 잃은 듯 했다.
여자의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야 눈에 들어온 무수한 핏자국과 피에 젖어버린 침대시트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위에 이불을 덮어주곤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게 그 둘만 방에 놔둔 채로 방 밖으로 나왔다. 내게서 수건과 두꺼운 외투를 받아든 아이는 자신도 비에 젖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어머니가 걱정되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막 5살 정도나 됐을 법한 모습임에도 당찬 모습에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아 사연을 묻고 싶었지만, 안그래도 복잡 할 것 같은 아이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하고 싶지가 않아 거실에 흐른 피를 걸레로 대충 닦아내곤 쇼파에 앉은 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 주일도 좋게 보내기는 그른 것 같다. 오늘은 당연히 저 여자의 상처를 꿰매러 병원을 다녀와야하고, 상처가 다 낫고 마을에 데려다 줄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동안 이 모자에게 꼬일 들개녀석들도 상당할테고, 이 둘을 두고 어디 나갈 생각은 관둬야 하기에 일이 꼬일대로 단단히 꼬였다.
쇼파에 앉아 앞으로의 겪게 될 수고에 대해 한숨을 내뱉고 있었을 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여자의 옆에 앉아 그녀를 지키고 있던 아이가 조심스레 문틈 사이에 숨은 채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최대한 숨기려고는 했지만 조용한 방 안에서 들려오는 조그마한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와 눈을 마주친 아이는 천천히 몸을 드러내 거리를 둔 채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아이 나름대로는 티는 안내려고 하고 있지만, 별안간 알지도 못하는 놈들에게 쫓겨와 자신의 어머니는 상처를 입은채로 정신을 잃었고, 오늘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게 무척이나 두려울 것이다. 얼굴로는 열심히 두려움을 숨기려 하고 있었지만, 노란색의 털로 뒤덮힌 머리 위의 두 귀와 허리위로 말라 올려진 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내게 감사인사는 했지만 계속해서 경계를 풀지 않은채로 내게서 눈을 떼지않는 아이의 모습에 조금은 긴장을 풀어줄까 아이의 옆에 있는 작은 쇼파 쪽에 손가락질을 했다. 내 행동의 의미를 이해 한 듯 쇼파 위에 앉는 아이를 보며 따뜻한 차가 이 어색한 분위기에 조금은 도움이 될까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생각 같아선 따뜻한 유자차나 모과차였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난 차를 즐겨 마시는 편도 아니였고, 있는 것이라곤 손님용으로 사다둔 커피들 뿐이였다. 다행히 식사용으로 사둔 우유가 있었기에 전자레인지로 따뜻하게 데워 쇼파위에 앉아 자신의 꼬리를 껴안은채로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고 있는 아이의 앞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내게서 우유를 받아든 아이는 조심스레 고개를 올려 내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컵을 들여올려 조심스레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았다. 이윽고 컵 안의 우유를 한모금 마셔보곤 입맞에 맞은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이 귀찮다는 말은 했지만, 나 또한 충분히 그들에게서 안쓰러움을 느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 두 모녀에게 이런 힘든 시련을 내렸을까. 물론 살아가는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느정도 긴장이 풀린 얼굴로 우유를 마시고 있는 아이를 턱을 괸 채로 쳐다보다 이내 몸을 세운 채로 아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집으로 가는 방법을 알면 데려다 줄 수는 있는데 말이야.”
“…엄마가 일어나면 저희 알아서 갈게요.”
“글쎄, 난 내가 너와 너희 엄마를 데려다 주는게 나을꺼라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건 엄마가 일어나시면 다시 이야기 해보는게 낫겠다.”
경계는 풀었지만, 아직까지도 나를 믿지 못하는 말투로 딱 잘라 말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체온은 어느정도 돌아오는 듯 새하얗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내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아이는 여자의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우리 엄마 괜찮을까요?”
“그래. 괜찮을꺼야.”
일단 급한대로 지혈제를 사용했으니 피는 멎겠지만, 확실한 치료를 받을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정신을 잃어서 귀와 꼬리를 숨기지도 못하는 타르시안을 일반 병원에 데려 갈 수도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업무용으로 알고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데려가고 싶지만, 이 작은 아이가 그녀의 몸을 감당 할 수 있을리가 없었고 그렇다고 외간여자의 옷을 내가 갈아 입힐 수도 없었기에 차가운 물기만 어느정도 마른 옷차림 그대로 들어올려 아이를 향해 따라 오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를 안고 자리를 움직이는 내 모습에 당황한 듯 여자의 손을 잡은 채로 쫄래쫄래 내 옆을 따라오던 아이는 차 뒷자석에 여자를 눕혀놓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한 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뒤이어 보조석에 차 문을 열어주고 운전석에 앉아 자신이 차에 타기를 기다리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안돼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뒷자석에 누워있는 여자를 두고 갈 수는 없는 듯 차에 올라타 불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걱정하지마.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것 뿐이야.”
차 시동을 걸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며 진정시키려는 내 말에 아이는 계속해서 경계의 눈빛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뒷자석으로 자리를 옮겨 여자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잘 알고 있었다. 별안간 자신의 어머니를 안고 난생 처음 보는 움직이는 물체에 태워서는 어디론가로 이동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이 혼자서는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긴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또, 괜한 말로 인해 서로간의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아침부터 멈출기미가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던 비가 더욱 거세지고, 평일의 이른 오전시간대라 그런지 한산한 거리위로 달리던 중 이윽고 높은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비교적 작은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곤 여자를 안아올린채로 아이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의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내 옆을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아이가 더욱 내 쪽으로 붙어선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래도 기분 나쁜 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듯 싶었다. 아이의 불안함도 풀어줄겸 앞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해야했기 때문에 여자를 오른손으로 옮겨 안고는 나머지 한쪽 손으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별안간 자신을 안아올리는 내 행동에 적지않게 놀란 듯 작게 비명을 지른 아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지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 목을 꼭 껴안은채로 자신의 몸을 의지했다.
“아래 버튼  두 개 좀 눌러주지 않을래?”
양 손으로 두 모녀를 안고있어 전혀 사용 할 수가 없는 내 부탁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버튼 두 개를 눌렀다. 얼마안가 움직이기 시작한 엘리베이터는 금새 움직임을 멈췄고, 이내 환하게 열린 문 사이로 사방이 온통 새하얀 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 쥐 죽은 듯 조용한 건물 안과는 다르게 복도 이리저리로 이동하는 환자들 덕에 시끌시끌한 병원 중앙을 가로질러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 여자를 눕혀두곤 아이에게 이 곳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함께 밖으로 빠져 나왔다.
분주한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사무실의 창문 앞에서서 몇 번 노크를 하자, 방 안 책상앞에 앉아 서류들을 늘어놓고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갈색 긴 곱슬머리의 여자가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기곤 반가운 표정으로 빠져나와 곧바로 내게 안겨왔다.
“정말이지 우리 호철씨 얼굴을 잊어버릴 뻔 했다니까~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다치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게 당신의 입버릇 아니였어? 오래간만이야. 셜리반.”
“흐흥~ 그래도 가끔씩 놀러 올 수도 있잖아? 그것보다 무슨 일?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봐줬으면 하는 환자가 있어서. 괜찮지?”
내게 안겨 반가운 표정으로 안부를 묻던 셜리반은 어차피 할 일도 끝났었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내 옆을 따라 수술실로 걸음을 옮겼다.
수술실 안으로 들어와 수술대에 누워있는 여자와 그 옆에 딱 붙어서 그녀를 지키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흐응~'하고 작게 콧소리를 내던 셜리반은 이내 여자의 옆구리에 감겨있는 붕대를 풀어내더니 지혈제 덕분인지 금새 피가 멈춰 벌어진 안쪽 살이 보이는 상처부위를 확인하곤 내게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당신 미쳤어?! 설마 내가 준 지혈제를 이 여자한테 사용한거야? 그건 당신같은 미친 남자나 사용하는 독한 약이라고!”
“응급처치 하느라 어쩔 수가 없었어. 어차피 정신도 잃은 상태였고.”
“으이구…정말로 미쳤다니까. 지혈제 덕분에 출혈은 멈춘 것 같고, 체온이 내려가있는데 심한 정도는 아닌 것 같네. 벌어진 상처 먼저 해결하고 영양제 한 대 놔줄테니까 깨어난 다음에 바로 퇴원해도 될꺼야.”
“다행이네. 언제나 고마워.”
벼락과 같은 그녀의 꾸지람에 뒷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당장이라도 잡아 먹을 듯한 표정을 짓던 셜리반이 얼른 나가라는 듯 손사래를 치는 통에 치료를 준비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아이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이는 처음보는 이상한 방에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가는 것이 불안 한 듯 했지만, 수술실 밖 의자에 주저 앉자마자 내 옆에 다가와 앉고는 잔뜩 고개를 수그린 채 울기 직전의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의젓해도, 아이는 아이라는 걸까. 조금씩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하는 아이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몸 쪽으로 끌고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도움이 되지 않을꺼라는 건 잘 알고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여자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이런 사소한 것 밖에 해 줄 수가 없었다.
서러 울 것이다. 이제 막 5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당장에 이런 지옥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길에 조금씩 울음을 그쳐나가던 아이가 이내 눈물을 닦아내며 내게서 떨어져선 얼굴을 올려다보며 해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마음 속에 있던 두려움과 압박감이 울음을 터트리면서 조금은 털어 낸 듯 싶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실컷 울었어요.”
“아저씨보단 오빠 쪽이 나은데 말이야.”
“으응~! 우리 마을 오빠들은 어른이 아닌 걸.”
“그럼 삼촌으로 하자 꼬마아가씨.”
“알았어요 삼촌.”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극도로 경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방실방실 미소를 지으며 내 말에 바로 답 해주는 아이의 모습에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경계가 어느정도 풀린 지금에야 무언가를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꼬마아가씨.'라는 말로 말문을 떼었을 때 아이는 단번에 '묘령.'이라는 말로 곧바로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이 아이는 자신을 꼬마아가씨라 부르는 것이 별로 탐탁치 않은 듯 했다. 방금 전 울음을 터트리고, 금새 방실 미소를 띄우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아닌 처음 봤을 때의 단호하고 냉정을 되찾은 얼굴을 한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묘령아. 궁금한 게 있는데, 가족들은 다 집에 계신거니? 아빠가 계신다면 오늘 바로 집에 데려다 줄 수도 있을텐데.”
“으응. 할아버지 밖에 없어요. 아빠는 묘령이가 태어나기 전에 저 멀리 떠났대요.”
아차. 괜한 이야기를 꺼낸 듯 하구나.
“그래? 그러면 엄마가 일어나시면 집에 갈지 함께 생각해보자.”
태어나서 한번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는 아이의 말에 괜히 아이의 아픈 곳을 건드린 걸까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화제를 돌리자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쳐다보던 아이가 작게 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리곤 자신의 등 뒤에서 꼬리를 꺼내 껴안곤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경쓰지마세요. 할아버지도 있고 엄마도 있고, 마을 사람들도 친절하니까요. 제가 다 크기 전에 아빠가 보러 올꺼라고 생각도 하구요.”
“…참 의젓하구나. 묘령이는.”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세요. 도대체 누굴 닮았길래 이렇게 의젓하다면서 많이 예뻐해주세요.”
자신의 꼬리를 꼭 껴안은채로 내게 미소를 보내는 묘령이에게로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이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언제 나와있던건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수술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셜리반의 손짓에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상처의 봉합을 끝낸 듯 허리에 감겨있는 붕대와 영양제 주사를 팔뚝에 꽂은 채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을 내 옆에 서서 내 다리를 붙잡은 채 올려다보고 있는 묘령이를 안아 올려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수술대 위에 앉힌 채로 셜리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수술실 한 켠 서랍을 뒤적이던 셜리반은 이윽고 소독용 솜이 들어있는 작은 봉지를 잔뜩 종이봉투에 담아 내게 안겨 주곤 팔짱을 낀 채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걱정할만한 상처는 아니야. 상처는 의료용 본드로 붙여놨으니까 다시 병원에 올 필요는 없고, 혹시 모르니까 소독용 솜 좀 챙겨줄테니까 아침, 점심, 저녁으로 3일 정도만 소독 해.”
“고마워. 그나저나… 치료비용은 현금으로 하고 싶은데. 큰 걸로 여덟 장이면 되려나?”
“왠만하면 카드로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흔적 남기기 싫은가봐? 하긴. 이런 매구족 카닐 타르시안은 흔하지 않으니 조심하지 않았다간 금방 들키겠지. 그나저나, 누구야? 손님용? 아니면 호철의 여자인거야?”
“둘 다 아냐. 그저…아는 사람이야.”
내 팔에 안겨 가느다란 손으로 내 볼을 쿡쿡 찔러가며 장난을 해대던 셜리반은 복잡한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며 대답을 하는 내 모습에 금새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면 영양제를 다 맞을거라며 여자와 묘령이를 안아올린 날 안내하던 셜리반은 치료 비용과 입막음 비용을 두둑히 받았으니 방세는 따로 받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병실 한 켠 침대를 내주곤 금새 자신의 사무실로 사라졌다. 아무리 단골이라고는 하지만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와 도움을 청했음에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도움을 내준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밥이라도 사야겠다 생각했다.
여자를 침대에 눕혀두고 둘러본 병실 안에는 여자와 묘령이 외에도 여러 타르시안들이 즐비했다. 만다린 카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중상을 입은 듯 몸 곳곳을 붕대로 감아놓은 그들은 자신들 또한 타르시안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모녀가 신기한 듯 힐끗힐끗 쳐다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매구족 카닐 타르시안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흔하지 않다. 보통 그들은 인간세계는 커녕 타르시안의 사회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금방 집으로 돌려보내고 안 볼 사이이기에 두 모녀와 그들을 지키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사냥꾼으로 오해를 해도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혹시나 지나칠 사냥꾼들이나 그들의 수군거림이 묘령이의 귓가에 들어갈까 신경이 쓰였다. 안그래도 불안해하고 있는 아이를 더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침대 너머의 자리에서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타르시안들에게 슬쩍 눈길을 옮겼다 이내 커텐으로 침대 주위를 가려버리곤 내 옆에 서서 여자의 손을 잡고있는 묘령이를 침대에 눕혀줬다. 신발은 신고 있었지만 이제 어느정도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빨갛게 물든 차가운 발을 이불 속에 집어 넣어주곤 아직 퇴원하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엄마와 함께 자두라는 말과 함께 그들이 안심 할 수 있게 커텐 바깥으로 나왔다.
아주 짧은 시간이였지만, 커텐 밖 병실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였다. 그새를 못 참고 궁금했던건지 주위로 몰려든 타르시안들이 냄새를 맡는 바람소리를 제외하곤 숨을 죽인 채 커텐 너머로 대화소리를 엿듣다 이내 커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나와 눈을 마주치곤 흠칫 놀라며 서둘러 자신들의 침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한번만 더 그랬다간 눈알을 뽑아버린다. 한번 시험 해봐도 좋아. 아주 시원하게 파줄테니까.”
낮게 깔린 으르렁소리와 한껏 올라온 짜증으로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경고를 날리는 내 모습에 병실 안 타르시안들은 잠 자는 척 침대에 눕거나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피해 바깥으로 향했다. 보통이라면 몇 몇 놈들과 싸움이 붙을만도 했지만, 잘못 한 것은 자신들이고 일단은 환자들이기에 쉬쉬하고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타르시안들이 주위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손님용으로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주저 앉아선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혹시나 모르니 3일 정도 소독을 하라는 걸 보면 상처가 감염 될 수도 있다거나, 다시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 집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냥꾼들에게 쫓겼고, 또 그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거기에 몸까지 성치않은 여자를 그들의 집으로 데려다주고 싶지는 않다. 그녀들을 지킬 자신은 있었지만, 만약이란게 있으니 말이다. 괜히 심한 부상을 입거나 죽어버렸다간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버리니까.
어차피 몇 일간 비는 계속 내릴테고, 집에도 빈 방이 있으니 상처가 다 낫거나 비가 그치기 전까지만이라도 데리고 있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게 내 생각이였다. 물론 그들이 원치 않는다면 강제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 뜻에 따라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도 걱정안해서 좋고, 그들도 안전하게 집을 갈 수가 있으니 서로에게 그 편이 좋지 않은가.
…그나저나 내가 왜 그녀들을 걱정하고 있는거야. 한시라도 빨리 이런 귀찮은 일에선 발을 빼고 싶을텐데.
그녀들을 어느정도에나 집에 보내면 괜찮을까라는 고민을 하던 도중 어째서 내가 이런 귀찮은 일에 고생하고 있는건지라는 생각이 떠올라 금새 한숨을 내쉬곤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생각에 빠졌다.
지금 내가 끼어든 이 일은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다. 괜시리 힘을 뺄 수도 있고 사냥꾼들과 대치하면서 상처를 입거나 최악의 경우 내 목숨이 위험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사실 현관문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정말 저 여자가 죽게 내버려둘까라고 생각 할 만큼 신경쓰기 싫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선 왠지모르게 도와줘야겠다고 결심을 서게 만들정도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느껴졌다라기 보다는,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맡았다’. 그 냄새는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 어딘가에서 맡아본 냄새였는데, 무척이나 그립고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그런 냄새였다. 그리고 저 여자에게서 특별히 그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녀를 침대로 옮기고, 이 곳까지 데리고 오면서도 자꾸만 날 자극하고 하여금 그들을 불쌍하게 보도록 만들었다. 도저히 그녀들에게 냉정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겨우 그런 냄새에 동정심을 느끼다니, 천하의 호철도 다 죽었구나.
생각을 이어 나갈수록 짜증만 몰려와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바람이라도 쐴겸 바깥으로 나가려던 때 입원실 입구로 머리에 붕대를 감은 혼혈 타르시안이 들어왔다. 흑발의 머리위로 솟아있는 날카로운 개 귀와 꾹 다문 입 사이로 뾰족 튀어 나와있는 어금니가 인상적인 그는 방 안에 들어와 무언가 냄새를 맡듯이 코를 움직이다 이내 내가 앉아있는 침대 앞으로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인지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에 어금니를 내보이며 미소를 지어보이던 남성은 이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그래도 짜증이 난 상태였기에 적당히 위협을 주고 돌려보낼 생각이였지만, 저 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 내게 말을 걸어왔다.
“병원에 특별한 카닐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정말 엄청난 냄새가 나는 걸? 구경 좀 해도 될까?”
“구경거리 따위가 아니야. 꺼져.”
짜증이 묻어나오는 내 경고에도 아예 관심을 빼앗겨 버린 듯 내 말을 무시 한 채로 남성이 커텐 가까이 움직였지만, 곧바로 손을 뻗으며 낮게 으르렁거리는 내 모습에 방금 전과 같이 미소를 띄우며 내게 시선을 옮겼다. 뒤이어 마찬가지로 낮은 으르렁소리를 내며 남성이 날카로운 발톱이 솟은 손을 내게 뻗으며 입을 열었다.
“피차 마찬가지인 입장인데 너무 깐깐하게 구시네. 너무 애지중지 하니까 죽여서라도 보고 싶어지잖아?”
철컥ㅡ
금방이라도 내게로 손을 휘두르려던 남성은 자신의 복부에 맞닿은 차가운 금속에 금새 몸을 멈췄다 이내 그것이 권총이라는 것을 인지 한 듯 한번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에 총구를 가져다대고 있는 내 손을 확인하곤 손을 거둬드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헤헤. 형씨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있네. 장난이였어. 장난이였다구.”
“꽤 재미있네. 그나저나 내가 침대에 가까이 오면 눈알을 뽑아버린다고 했는데 귀에 안들렸나봐? 아니면 그냥 씹은건가?”
“어이어이. 너무하잖아. 그냥 장난 한 것 뿐인데 눈알을 뽑아버린다니?”
자신은 손을 거둬드렸음에도 총구를 치우지않는 내 모습에 적지않게 당황한 듯 남성이 베실베실 미소를 지으며 몸을 피하려 뒤로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곧바로 자신의 이마를 타고 눈가에 멈춘 내 손에 입을 다문 채로 얼어버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내 손을 바라봤다.
원래는 괜히 귀찮게 일을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본보기 정도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 주위에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리던 손가락을 천천히 그의 눈 한 가운데로 고정시키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눈알을 뽑는 건 좀 너무하지?”
푸욱ㅡ
“끄아아아악!”
별다른 힘을 주진 않았지만 손쉽게 손가락에 뚫려버린 눈알을 감싼채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남성. 곧바로 총구를 그의 입에 집어 넣은 채로 미소를 지어버린 채로 엄지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쉬이…조용해. 옆에 환자가 자고 있잖아. 그녀가 깨어나버린다면, 이번에는 네 입안에 총을 갈겨버릴지도 몰라.”
방금 전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닌 정말로 실천 할 생각이 있는 위협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과 입 안에 퍼지는 금속의 맛과 희미하게 느껴지는 화약의 냄새 때문인지 남성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적지않은 피가 흘러내리는 눈을 감싼 채로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얼마안가 복도에서 뛰는 소리와 함께 입원실 안으로 들어온 한 남성은 자리에 쓰러져 눈을 감싸고 있는 남성을 부축하려 재빨리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곧이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호…철이형…”
“…..오, 설마 문영이냐? 이야~ 오래간만이다? 잘 살고 있지?”
“네…자..잘 살고 있어요..그런데…지..지금 이건…”
“글쎄. 알다시피 내가 그다지 참을성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그런데 이 사람이 멋대로 와서는…그나저나…”
남성은 무척이나 겁에 질린 얼굴이였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얼굴에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그가 감싸고있는 타르시안 남성을 한번 바라보고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때의 일은 잊었나 봐? 내가 다시 한번 사냥꾼과 해결사의 입장에서 만나게 된다면…그 때는 정말로 죽여버릴 꺼라고 말했었을텐데?”
“아…아니예요! 그냥 아는 형이예요! 절때 사냥꾼이 된 게 아니예요!”
“그 아는 형이라는 사람이 타르시안에다가 사냥꾼과 해결사만이 이용하는 이 병원에 어떻게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마는….얼른 그 사람 데리고 꺼져. 진짜로 짜증나니까.”
내 입이 떨어지기 무섭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있던 사내가 타르시안을 부축하곤 재빨리 병실 밖으로 달아났다. 안그래도 썰렁하던 병실에 방금 전 일어난 일 때문인지 하나 둘 씩 환자들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래서 타르시안을 데리고 병원같은 곳에 오기 싫었던 것 이다. 조금이라도 특이한 부분이 눈에 띄면 금새 파리들이 꼬여들고, 이런 식으로 사고가 일어나니까. 더 이상 누군가가 주위에 몰려들지는 않을 것 같고, 커텐 안에서 억지로 숨을 참고 있는 듯 이따금씩 묘령이의 끅끅 소리가 들렸기에 달래라도 줄까 커튼 안 쪽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방금 전 상황 때문인지 두 손으로 입만 꾹 막은 채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묘령이의 모습에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엄지 손가락에 묻어있는 피가 눈에 띄어 얼른 거둬드리곤 반대쪽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은 없을꺼야..”
“삼..촌…정말 나쁜 사람 아니죠…?”
“글쎄. 그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다른거지만, 적어도 너한테 해를 끼치진 않을꺼야.”
머리 위의 내 손길이 느껴지고 있을 이 와중에도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있는 묘령이의 모습에 마음이 바뀌어 당장이라도 그 녀석들을 찾아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더 이상 사고를 칠 생각도, 묘령이가 겁을 먹게 할 생각도 없었다.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찍어 누르며 아이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바깥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때,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여성의 손이 움찔거리더니 새근새근 숨만 내쉬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까지도 창백함이 남아있는 얼굴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두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며 갈색의 아몬드 눈동자가 힘겨운 듯 천천히 움직여 자신의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있는 묘령이를 쳐다봤다. 정작 다친 자신의 몸이 어디에 누워있는지도 신경쓰지 않은 채 겨우겨우 기어나오는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던 여자는 아이가 미소를 짓고 나서야 천천히 돌려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게로 시선을 돌린 여성은 방금 전 아이를 달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자리에 얼어붙어 안그래도 핏기가 없던 얼굴에서 더욱 창백해진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건드릴 생각 없으니까 겁 먹지 마. 네가 다쳐서 병원에 온 것 뿐이야.”
“당신은…누구…?”
“글쎄. 비슷한 일은 하고 있지만, 사냥꾼은 아냐. 타르시안을 납치하는 행동은 더욱 하지 않고, 네가 불편해 하는 것 같으니까 자리를 피해주겠다만, 혹시나 도망 갈 생각은 하지마. 너희를 다시 데려오는 것도 짜증나고, 네 상처가 벌어지면 더 귀찮아지니까. 일단은 푹 쉬어.”
정신을 차린지 얼마 안된 몸으로 부들부들 떨고있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도망가지 말라는 말만 남겨둔 채 다시 커튼 밖으로 몸을 꺼냈다.  어차피 내가 밖에서 버티고 있는 한 그녀들은 도망 갈 수 없었고, 도망가봤자 좋을 것 하나도 없거니와 가만히 치료만 끝난다면 집으로 보내주겠다라고 묘령이에게 말했었으니 적당히 알아먹었을 꺼라 생각했다.
방금 전 그녀석들을 만난 것이 몇 분 지나지도 않았지만, 바깥은 벌써 요란스러워졌다. 급하게 의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셜리반은 뚱한 표정으로 병실 밖을 바라보던 내게 시선을 옮기더니 잔뜩 곤란한 표정으로 내가 달려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또…! 당신이 저지른 일이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제발 병원에서는 환자도, 일도 만들지 말라고 말이야!”
“걔네가 잘못한거야. 나도 몇 번이고 말했어. 근처에 다가오면 눈알을 뽑아버리겠다고. 그래도 안 뽑은게 어디야? 구멍만 난거니 다행이지.”
“아으…진짜 성질머리 하고는…! 계속 이랬다간 더 이상 나도 덮어주기 곤란하다구! 병원장인 내 입장도 생각해 줘 제발!”
“미안미안..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부턴 꼭 대화로 풀게. 약속한다니까?”
“으이구… 정말 내가 못살아!”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능글맞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내 모습에 처리 불가능한 골칫덩이를 안은 표정으로 짜증을 내뱉곤 곧바로 바깥으로 달려나가는 셜리반. 그녀가 사라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미소를 짓다 이내 병실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길게 하품을 뱉어내곤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빗방울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안그래도 어두웠던 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어두워져갔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병원에서 지내도 좋을 듯 싶다. 어차피 집에 가 봤자 어두컴컴한 ��� 안에 재미없는 티비만 이야기를 떠들어 댈 것이 뻔하니까.
“저기….”
“호철이다.”
“호철…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한 동안 아무런 말 없이 숨소리만 이어지던 커튼너머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바깥상황과 셜리반에게 관심이 돌아간 사이에 묘령이와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처음 나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다시 커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어느정도 생기가 돌아온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지긋이 미소를 짓고있는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돌보던 묘령이는 어느새 침대위에 올라가 긴장감이 풀어진 것인지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천천히 자신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여성은 이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곤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아이에게 들었습니다. 저희를 구해주셨다고..”
“너희가 우리 집 앞에서 죽었다간 괜히 흉흉한 소문만 도니까. 이미 꼬맹이에게 다 들었겠지만 몸이 낫는대로 집으로 데려다줄테니 걱정하지마.”
“묘령이…”
그녀와의 대화 중 튀어나온 꼬맹이라는 말이 거슬렸던건지 금방 잠에 빠져 들 것 같은 표정으로 여성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묘령이가 귀를 움찔 움직이며 실눈을 뜬 채 중얼거리곤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그런 묘령이의 모습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던 여성이 다시 고개를 들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다. 도대체 왜 매구족 카닐이 인간세계에 내려왔으며, 왜 우리집 앞에 쓰러져 있었는지까지. 하지만 방금 막 정신을 차린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작게 한숨을 내쉬곤 턱을 괸 채로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해야하나. 이렇게 생판 남인 타인과 이야기를 나눠 본 것도 오래간만이라…
“그나저나.. 이름은?”
“묘향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래…묘향… 그 상처, 몇 일정도는 관리가 필요해.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려나?”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 강제로라도 묶어두실꺼잖아요?”
그녀의 의사를 물을 의미로 내뱉은 내 말을, 이미 예상이라도 있었다는 듯 자신의 처지에 대해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와 '풋..'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금새 입을 막아버렸다.
이 여자, 보통이 아니다. 방금 전 부들부들 떨고있는 모습에 약간은 골려줄까 했지만, 말하는 솜씨를 보니 왠만한 사람은 말로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다. 갑작스런 그녀의 공격에 당황스러움을 느껴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고 있었을 때,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켜보던 묘향이 이내 시선을 바깥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바깥이 상당히 소란스럽네요? 급한 환자라도 온 건가요?”
“….눈을 뚫어버렸어.”
“네…?”
계속해서 진정시키려고 해도 안절부절 못하던 몸이 귓가에 들어온 그녀의 말소리에 안정감을 되찾았고, 곧바로 머릿 속에 떠오른 그 놈들의 모습에 약간의 짜증과 분노가 올라왔다. 그녀의 모습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턱을 괸 채로 툭 내뱉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가 되물어왔다.
사실, 그녀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썩 좋은 상황은 아니였다. 아직도 그 놈들은 이 곳에 머물고 있고, 내 짜증은 아직도 남아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앞에서 그 짜증을 내보일 수도 없었기에 억지로 분노를 참으며 능글맞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녀석이 자꾸 커튼 안 쪽을 넘어보려고 하길래 말이야. 눈을 뽑아버릴려고 했는데 그냥 손가락으로 뚫어버렸지.”
“그…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글쎄, 이게 잔인할까 아니면 그녀석들이 너를 보며 가졌을 생각이 잔인할까.”
예상했던대로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몸서리를 치는 그녀를 향해 작게 콧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역시나 잔인하다고 생각하는구만. 딴에는 자기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 말까지 했으면 적당히 알아먹고 입 다물겠..
“그래도 안돼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적당히 꼬리 내리겠거니 했던 내 생각을 산산히 박살내며 묘향은 방금 전 가녀린 모습이 아닌 단호한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솔직히 놀라웠다. 지금까지 많은 타르시안을 구조하면서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한 두번이 아니였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을 해하려 했던 사람들이라는 생각 때문에 금새 입을 다물곤 오히려 내가 그들의 씨를 말려주길 바라며 저주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고개를 저으며 내게 타이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들이 저에게 악한 감정으로 다가왔더라도, 이야기로 해결 할 수 있었다면 그랬어야만 했어요.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생명은 중요한거니까요.”
“….어지간히 꼬인 아가씨로군. 이봐. 내가 그 순간 한 수 물러섰더라면, 그들에게 너희가 넘어갔더라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삶을 살게 되었을꺼라고.”
사냥꾼들에게 잡혀간 타르시안들의 운명은 뻔하다. 돈 많은 변태놈들에게 팔려가 성노예로 전락해 하루하루 지옥에서 살아가다가 결국 나이가 차면 죽음을 당하거나, 내장이 산채로 뽑혀서 사방팔방으로 팔려나가니까. 그래서 난 그들을 경계하고, 때로는 피를 봐서라도 그들에게 경고를 해왔던 것이다.
돈이 세상의 전부인 그들에게 대화로써 상황을 풀어가라고? 차라리 그들이 자살을 하길 바라는 편이 빠를 듯 싶다.
“아무리 네 신념이 중요하더라도 조금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행동해. 그 신념이 언제 네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릴지 모르니까 말이야.”
방금 전보다 진지해진 모습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내 모습때문인지 아무런 말도 없이 이야기만 듣고있는 묘향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일어난 그녀에게 이런 식의 무거운 이야기는 전혀 도움 될 게 없으니까.
하지만 뒤이어 자리를 뜨려는 내 손목을 묘향이 꼭 잡으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했다. 괜히 자기 때문에 이야기가 무거워 진 것 같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은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나저나…저희가 호철님의 집에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가족분들이..”
“괜찮아. 가족들 없이 혼자 살고있어.”
“아…”
마치 내가 묘령이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차 싶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듯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묘향. 대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있지만, 당황한 표정을 보고있자니 꽤 재미있네.
“너와 꼬맹이가 지낼만한 방은 많이 남았으니까. 미안해 할 필요없어.”
 "그렇다면…호철님의 호의 감사히 받겠습니다.“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그녀 또한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감사인사를 했다.
1 note · View note
mium-novel · 9 years
Text
여우야뭐하니 - 1화 첫 만남(4) -
“죽 다 끓였다. 엄마 모셔 와.”
“응. 알았어요!”
내 뒤 식탁 앞에 앉아 꼬리를 껴 안은 채로 쓰다듬고 있던 묘령이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리더니 묘향이 잠들어있는 방 쪽으로 뛰어 나갔다.
…확실히 어린 애가 있으니 집 안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구나. 부하 놈들이 아무리 집안을 헤집고 다녀도 분위기가 살아 날 생각이 없었는데 꼬맹이 하나가 뛰어 다닌다고 이렇게 달라지는 걸 보면...
한 층 집 안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는 묘령이의 발걸음 소리에 잠시 미소를 지어 보이다 이내 죽을 그릇에 담아 옮기기 시작했다. 지난 7년 간 집에서 나와 살아오면서 혼자서 밥을 만들어 먹다 보니 일 인분 이상의 음식은 만들 수 없는 이상한 요리 실력이 되어버렸지만, 어찌어찌 이번 죽은 만족스럽게 만들어졌다. 이게 그 아가씨와 꼬맹이의 입 맛에 맞냐가 문제이긴 한데, 전적으로 내 입맛에 맞게 약간 짭짤하고 야채가 씹 힐 정도로 조금 큼지막하게 썰어 넣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거 싫다고 해도 줄 수 있는 다른 음식이 부추 죽 밖에 없어서 안타깝게도 선택권은 없지만, 이왕이면 잘 먹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아가씬 억지로 부추 죽을 먹지 않아도 되고, 나 또한 음식을 버릴 일이 없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묘령이가 사라지고 얼마안가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감기 때문인 건지 잠에 취해 있어서 그런 건지 잔뜩 물을 먹은 솜 마냥 축 늘어진 묘향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천천히 부엌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나타난 묘향의 모습은 방금 전 보다 훨씬 안 좋아 보이는 모습 이였다. 이럴 땐 참 난감하다. 나 같은 경우는 일반 병원에 다녀도 괜찮지만, 이 여자처럼 아픈 상태 일 때는 요괴의 흔적을 지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숨겼다고 해도 기침을 하면 튀어 나온다 거나, 긴장을 풀면 제어가 전혀 안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직업이 직업 인지라 요괴가 출입 가능 한 병원을 몇 군데 알고 있지만, 이런 빗 속에서 데려가기란 쉽지 않은 문제고, 더군더러 지금은 휴가 철 이다. 몇 일 전부터 휴가 철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통에 지금 진료를 부탁 하는 게 미안해 질 정도다.(요괴까지 도맡아 하는 그 의사는 평소에 잠을 자지 못 할 정도로 환자를 받는다. 사연은 여러가지로, 인간과 결혼 한 요괴가 오기도 하고 해결사에게 포획 당한 요괴가 오기도 한다.)
부엌 안으로 들어와 한참을 코를 훌쩍이다 입술을 깨문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 하고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는 묘향. 그리곤 ‘죄송합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이내 내가 차려 놓은 상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지금의 모습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안쓰러웠지만, 더 이상 내가 도와 줄 것은 없었기에 냉장고에서 반찬이라도 꺼내 줄까 하고 냉장고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을 때 였다.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올려 죽을 떠 입으로 가져다 대는 묘향. 문제는 그녀가 든 죽은 야채 죽이 아닌 부추 죽 이였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발견해 재빨리 그녀의 손을 막아 세우고는 죽을 묘령이 것과 바꾸며 가볍게 혀를 찼다. 냄새를 못 맡을 정도로 감기가 심한가 보구만..
“병을 더 악화 시키고 싶은 건가? 이건 부추 죽이야. 부추 냄새도 못 맡는 거야?”
“부추...라구요...?!”
마치 소름 돋는 괴담을 들은 듯 꼬리 털과 머리카락을 쭈뻣 세우고 커다래진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묘향. 아무래도 부추를 싫어한다는 묘령이의 말은 사실 인 듯 싶다. 부추가 감기에는 좋은데...먹일 수가 없으니...
“네 앞에 있는 건 부추만 뺀 야채 죽이야. 묘령이가 말해줘서 급하게 뺐으니까 괜찮을 꺼다.”
“가..감사합니다..”
가볍게 혀를 차며 입을 여는 내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부끄러웠던 건지 얼굴을 붉히곤 고개를 숙인 채로 죽을 먹기 시작하는 묘향. 세상 사는 모든 동물들이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듯이 하나 씩은 싫어 하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라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까 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기도 귀찮았고 식사를 하는 그녀를 괴롭히기도 싫었기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나도 늦게 나마 밥을 먹을까 했지만, 생각을 해보니 해결사 이기 전에 사람이라는 이유 만으로 도망가려 했던 그녀였기에 내가 상에 껴서 밥을 먹었다가는 괜히 신경만 곤두서 체하기라도 한다면 더 고생이다. 그녀들이 식사를 끝마치고 나서 먹어도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에 몇 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쇼파에 앉아 또 의미없이 티비를 틀고 화면 속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나에게 무척 이나 귀찮은 일이다. 8년 전 혼자 살기 시작한 날부터, 우리 집에는 부하 녀석들이 가끔 씩 들려서(물론 맨 정신이 아닌 술에 잔뜩 절어있는 모습으로) 잠드는 일 외에는 누구도 함께 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들이 내 집에 들어와 있는 풍경은 그다지 낯설지가 않다. 마치 단 몇 시간 있었던 것 뿐이지만,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걸까. 무척이나 낯 간지럽고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왠지 지금 그런 기분이 들어오는 건 한 순간의 착각 일 뿐인 건가.
....내 지금의 기분이 어떻든, 그저 그녀들의 상태가 나아져서 원래의 마을로 돌려보내고 싶은 것이 내 지금의 생각이다. 아무리 집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고 그녀들이 불편하지 않더라도 모르는 여자와 한 집에서 사는 건 사양이다. 그 보다 불편한 것은 나에게 없으니까.
“저기...”
“무슨 일이야.”
티비를 보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느정도 사색에 잠겨 다른 걸 잊을 수 있었던 때에 또 다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한 껏 들어있던 긴장의 끈이 또 다시 풀어지고 맥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부엌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기운만으로도 잔뜩 긴장해 안절부절 못 하는 묘향의 모습이 눈 앞에 훤했다. 그다지 이런 상황을 질질 끌고 싶지 않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내 움직임이 반가운 듯 환하게 웃은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내게 입을 열었다.
“저기... 호철님..아니 호철씨는 식사..안하시나요..?”
“글쎄, 아직은 생각도 없고. 너희들이 끝난 다음에나 할 생각이야.”
“저희들이..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지..”
“알면 됐어. 얼른 먹고 잠이나 자. 몸이 낫는 대로 내가 마을로 데려다 줄 테니까.”
“그렇...군요..”
한 치의 관심도 느껴지지 않는 내 목소리에 잔뜩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축 늘어진 모습으로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묘향. 그대로 다시 돌아가서 식사를 해 줬으면 좋겠지만, 마치 내가 같이 들어가서 같이 식사를 할 때까지 있을 생각인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손가락만 만지작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부하들과의 식사 외에는 모든지 혼자서 하는 나에게 그런 어려운 문제를 내밀다니.. 저 여자도 착한 여자는 아니로군...
“알았어. 같이 식사 할테니까 그렇게 꼼지락거리지 말고 어서 들어가.”
“아..아니 그런 뜻은 아니였는데...”
“행동과 말을 다르게 하는 군. 그렇게 미안하다면 어서 들어가서 하던 식사나 마저 해. 나도 갈테니까.”
“네...알겠어요.”
내가 귀찮은 듯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서야 미소를 지어보이곤 다시 부엌 안으로 들어가는 묘향. 여러모로 귀찮은 여자를 집 안으로 끌어온 모양이다. 물론 도움을 받고도 주인을 내쫓고 자기들끼리 식사를 하는 게 마음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의 배려는 정말로 사양이다.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여자로군..”
0 notes
mium-novel · 9 years
Text
여우야뭐하니 - 1화 첫 만남(3) -
재미있는..인간이다라…
마치 날 처음보는 신기한 동물을 보는 것 마냥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어보이곤 다시 식사준비에 들어갔다. 아까 묘향도 그렇고, 이 녀석 때문에도 시간이 많이 지났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거니까 늦어도 상관없지만, 추운 빗 속을 뚫고 오느라 그녀들은 많이 허기가 질 테니까.
어 느정도 다듬어진 양파를 놓아두고 부추를 씻으려 들어 올렸을 때, 등 뒤에서 조용히 꼬리를 껴 안은 채로 나를 지켜보던 묘령이가 ‘으응..‘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식재료를 꺼내든 모양인가보다. 하긴 저 나이에 야채 한 종류 정도는 싫어하는게 이상하지 않으니까..
“엄마가 부추 엄청 싫어하는데.”
“…네가 싫어하는게 아니고?”
“아뇨. 할아버지가 음식 싫어하면 안된다고 했거든요. 근데 엄마는 부추를 거미보다 더 싫어해요.”
“참 특이하네.”
애 얼굴로 봐선 거짓말 하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뭐 모든 생물은 자기가 싫어하는 게 있고 좋아하는 게 있는 법이고, 어차피 부추를 뺀 야채 죽도 만들 꺼니까 상관 없지만. 상관은 없지만…
“저기 묘령아. 엄마 부추 먹는다고 어디 아프거나 그런 건 없지?”
“네. 근데 묘령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어렸을 때 부추 먹다가 체해서 그 다음부터는 부추를 못 먹겠대요.”
“으응…그렇구나…”
내 물음에 아무런 의심없이 ��진무구한 얼굴로 하나하나 다 말해주는 묘령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씻던 부추를 한번 바라봤다. 어차피 냄새가 날 테니 만들어놔도 안 먹겠지?
“걱정 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부추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거든요.”
“그거 참 고마운 말이구나.”
나 참..말 하는 폼이나 눈치 채는 속도로 봐선 꼬맹이가 아닌데 아까 보통 꼬맹이들처럼 행동 하는 걸 봐선…
참 몇 번이나 감탄 하는 거지만, 이 아이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어른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어린 아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니, 어설프게 어른을 흉내 내는 게 귀엽다고 해야 할까. 어설프게 행동 하는 엄마 쪽 보다는 아이 쪽이 훨씬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맹맹이 엄마를 닮은 것 같진 않고, 아빠를 닮은 건가.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많이 걱정하시겠네. 어머니가 다 나으시면 같이 찾으러 마을로 가자.”
“......아빠는 같이 안 살아요.”
“아..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뇨. 죽은 건 아니예요. 아빠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먼 곳으로 떠났다고 엄마한테 들었어요.”
내가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잔뜩 어두워진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사과의 말을 꺼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무 표정으로 돌아가 입을 여는 묘령. 그리곤 다시 자신의 꼬리를 꼭 껴안고는 얼굴을 부비더니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준비하다 말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와 한동안 눈을 마주치던 묘령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 움직이고는 꼬리를 껴안은 채로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입을 열었다.
“아빠랑 있는 느낌은 어떤 느낌 이예요?”
“..글쎄다. 나도 아버지와 함께 안 산지 오래 됐거든. 같이 살았을 때도 별로 좋았던 적도 별로 없었고...”
“삼촌도 묘령이랑 똑같네?”
“똑같다 해야 하나. 뭐 얼른 묘령이 아버지께서 돌아 오시길 기도 해 줄게.”
이윽고 그녀와의 대화를 뒤로 한 채 다시 마저 다듬던 야채를 들어 올리자 ‘흐응~?’ 하고 콧 소리를 내는 묘령. 그와 동시에 내가 다시 야채를 내려 놓고 그녀를 내려다보자 귀엽게 코웃음 소리를 내고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입을 열었다.
“역시 삼촌은 착한 사람이야. 맞죠?”
“글쎄.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착하다고 생각 해 본 적도 없어.”
“으응~ 삼촌은 착한 사람 이예요. 나쁜 사람 이였으면 진작에 내 쫓았거나 이렇게 대화를 안 해 주거든요.”
“네 기준에 그게 착한 거라면 위험한 생각이야. 세상에는 믿을 만한 생물이 별로 없어요. 알았어요 아가씨?”
“삼촌은 믿을래요. 그냥 그러고 싶어요.”
장난스럽게 숟가락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 앞에 흔들며 마치 선생님이 아이에게 가르치듯이 말하는 내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드는 묘령. 손에 묻은 야채들을 물로 씻어내고 손을 닦은 다음 묘령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냄비를 꺼냈다.
제발 이 순수함이 오래가길... 잃지 않기를 바라마 꼬마야.
0 notes
mium-novel · 10 years
Text
여우야뭐하니 - 1화 첫 만남(2) -
“죄송합니다..부탁..드립니다..”
그래…이렇게 까지 말하는데 덜컥 나갈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잔뜩 힘이 빠진 모습으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여자의 모습에 작게 콧방귀를 뀌고는 그대로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겁을 주면서 붙잡아 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이지 않는가. 저 두 모녀가 지금 밖으로 나갔다간 저체온증으로 죽던가, 아니면 다른 해결사들에게 잡혀 생각하기도 싫은 마지막을 맛 보게 될 것이다. 이래뵈도 난 평화주의자라 애꿎은 살상은 피하고 싶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 집에 오랫동안 머물게 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다친 사람이라지만, 남자랑도 같이 사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내가 여자와 생활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그저 빨리 나아서 다른 해결사들에게 안 잡히고 무사히 빠져나가길 바랄 뿐이다.
“저기…뭔가 도와 드릴 일이 없을까요..?”
“너. 방금까지 고열로 시달렸던 사람이란 거 알아? 지금도 열 있으니까 당장 가서 누워있어.”
집에서 유일하게 먹을만한 당근과 호박, 양파 등을 꺼내 다듬고있는 내 뒤로 부엌 입구에 서서 뭐가 그렇게 불안한건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도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여자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귀찮은 벌레를 내 쫓 듯이 손사래를 쳤다. 도대체 저 여자는 감기 나을 생각이 없는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죽을 듯이 거친 숨을 내뱉던 사람이 겨우 정신 차렸더니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나 하고…
하지만 내 귀찮은 벌레를 쫓는 듯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로 날 올려다보더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말했다.
“하지만…그래도..이렇게 도움을 받는데 저 혼자 누워있을 수는…”
“….그러면 묻고 싶은 게 있거든. 저기에 좀 앉아볼래?”
“아. 네!”
솔직히 궁금한 것도 있었고, 아픈 사람을 계속해서 세워 둘 수만은 없었기에 식탁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 하고는 다듬던 야채들을 물로 깨끗이 씼었다. 그리곤 잠시 그릇에 담아 싱크대에 올려두곤 뒤로 돌아 의자에 앉아 이제서야 약간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호철. 네 이름은?”
“묘향…입니다.”
“묘향…그래. 넌 해결사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사는 곳은 이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야?”
“이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있던 곳에서 저녁에 아이와 함께 산책을 하다 잡혀와 반나절 쯤…이동해서 이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들에게서 도망쳐 왔던 것이 이렇게..”
“흠. 그렇군. 혹시 너희를 납치한 해결사들 중 얼굴이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
“그게…갈색의 짧은 머리에 은색의 목걸이를 했다는 것 밖에는…”
“…혹시 목걸이가 이런 모양이였어?”
젓가락 두개를 들어올려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 그녀에게 보여주자,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게 싫었던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묘향이 십자가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내 얼굴을 바라보곤 말했다.
“어..어떻게 아셨어요?! 그 사람 알아요?!”
“알긴 하는데. 친하지는 않아.”
역시나..이런 일을 할 녀석들은 딱 정해져 있지. 요 근래에는 조용해서 납치나 그런 비 인간적인 행동은 안 할 줄 알았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는데, 썩 좋은 대화 주제는 아니였던 듯 싶다. 묘향의 얼굴이 방금보다 더 어두워졌고, 무엇보다 손을 떨기 시작했다. 이렇게 까지 겁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이것 참…
“아 그나저나, 내 옷이라 좀 미안한데 옷은 입을 만 해?”
“네? 아..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옷까지 빌려주시고…”
“아냐 아냐. 어차피 작은 옷들이라 못 입는 거였거든.”
“그런데…제가 어떻게 옷을 갈아입고 있는 거죠?”
간신히 돌린 대화 주제에 금새 표정을 풀고는 웃는 얼굴로 나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묘향. 하지만 얼마 안가 자신이 어떻게 옷을 갈아입었는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 거리는 그녀를 향해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얼마 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던 묘향이 화들짝 놀라고는 자신의 몸을 감싼 채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서..설마…”
“오해 하지 마. 묘령이가 많이 고생했다.”
“아..그..그런가요..죄송합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딱 자르고 말을 이어가는 내 모습에 멋쩍은 듯 자신의 몸을 감쌌던 손을 풀고 붉어진 얼굴로 사과를 하는 묘향. 얼마 안가 내 얼굴을 슬쩍 올려다 보더니 양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꼼지락 대며 내게 말했다.
“저…호철..님..?”
“호철이라 불러.”
“아..그..호철씨..는..해결사라고 했는데..”
“그래. 지금은 휴가 중인데 해결사가 맞긴 해. 하지만 사람이나 요괴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안 해.”
“그렇군요..하지만…보통 해결사들은 요괴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나요..?”
“그래서, 내가 당장 너희 모녀를 팔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리야?”
“아..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불쾌하셨더라면 죄송해요.”
“불쾌한 건 아니지만, 난 인간이나 요괴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보니까. 인간은 같은 동족이고 요괴는 조상이 똑같은 생물이잖아?”
예상 외의 대답이였던건지 야채를 써는 내 뒤에서 커다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는 묘향. 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칼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이제 양파 썰거라 눈 아플텐데..가서 묘령이랑 잠 좀 청 하는게 어때?”
“아..불편하시면 피해 드릴게요. 죄송해요.”
“아냐. 자고 있어. 내가 깨워 줄테니까.”
연신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던 묘향이 이내 내가 불편해 하는 걸 느낀 건지 조심스레 부엌에서 빠져 나갔다.
여러가지로 귀찮은 여자로군. 꼬맹이가 말하기 꺼려하던 걸 알아내서 궁금증은 사라졌다만…요 몇 일 간은 귀찮아 질 지도 모르겠군…
묘향이 부엌에서 떠나고 몇 시간만에 조용한 분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그녀들을 끌고 온 문제도 있지만, 역시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생활하는게 제일이라니까.
나 외에는 생물의 기척이 사라진 부엌에서 한층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요리에 열중하려던 때 등 뒤에서 느껴진 시선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칼을 내려놓았다.
“꼬맹이냐.”
“묘령이.”
무덤덤하게 자신의 이름을 한번 더 강조하고는 문 옆에 붙어 뚫어져라 내 얼굴을 쳐다보는 묘령. 결국 요리는 나중에로 미뤄두고 고개를 돌려 묘령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그냥. 아저씨가 신기해서요.”
“오빠.”
“아저씨.”
문 옆에 붙어 나와 눈을 맞춘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도중 튀어나온 나에 대한 호칭이 약간 맘에 들지 않아 정정하여 말했지만, 묘령은 고칠 생각이 없다는 듯 의지를 꺾지않고 내게 미소를 지은채 입을 열었다.
이 나이에 아저씨라니.. 하긴 이제 나도 곧 서른이구나..
“그렇담 삼촌.”
“응. 삼촌.”
정말 100보 양보해서 호칭을 바꾸어 말하자, 그제서야 묘령은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내 옆 식탁으로 다가왔다. 자신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식탁 의자에 힘겹게 올라 앉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묘령. 다른 때 이렇게 아이가 날 올려다 보았더라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줬겠지만, 방금 전 양파를 만진 상태라 만졌다가 만의 하나라도 생길 비상사태를 피하기위해 미소만 씩 짓고는 손을 뒤로 한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이나 의자에 앉아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묘령은 얼마안가 옷 아래 엉덩이 부분을 만지작대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갈색의 여우꼬리를 꺼내들고는 베시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한테 꼬리가 없다는 게 신기한거야?”
“네. 엄마랑 우리 마을 요괴들은 다 있거든요. 인간을 본 건 삼촌이 처음이예요.”
자신의 꼬리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미소를 지어보이던 묘령은 꼬리를 앞으로 꺼내 꼬리의  끝 부분의 털들을 핥아 정리를 하더니 이내 가지런히 정리 된 꼬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며 꼬리를 꼭 껴안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젓해서 아이가 맞는지 헷갈렸지만..역시 아이는 아이라는 건가..
“근데 왜 인간들은 꼬리가 없어요?”
“글쎄? 불편해서 없애버렸을까?”
“거짓말! 이렇게 귀엽고 소중한 꼬리를 불편해서 없앤다구요?”
나이에 꼭 맞는 모습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놓는 묘령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려보이며 말하자, 묘령이 자신의 꼬리를 꼭 껴안고는 얼굴을 비벼대며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글쎄, 솔직히 내가 없앤 것도 아니니까. 별로 지금까지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이 아이가 이렇게나 놀라는 걸 보니 한번쯤은 생각해봐도 될 듯 싶다. 인간에게 꼬리뼈가 있다는 소리는 꼬리도 존재 했었다는 건데 필요 없었으니 퇴화하지 않았을까?
“인간은 꼬리의 소중함을 몰랐나 봐.”
“삼촌은 꼬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있으면 좋은거지? 난 꼬리가 무척이나 좋거든.”
“그쵸~ 삼촌은 역시 재미있는 인간 같아요!”
“글쎄.. 재미있는 인간이려나..”
자신의 꼬리를 꼭 껴안은 채로 내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묘령이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어보이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있는..인간이다라…
1 note · View note
mium-novel · 10 years
Text
여우야뭐하니 - 1화 첫 만남(1) -
어제 아침부터 였던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일을 하러 나가기는 커녕 바깥 ��출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장마가 일 주일 정도 지속 될 예정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이번 주는 일하기는 그른 듯 싶다. 이미 장마 소식을 접했던 건지 다른 팀원들은 일 주일 간 일도 못 할꺼 휴가나 간다고 뿔뿔이 흩어진 상태여서, 나 혼자 한국에 남아 집에 쳐박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나만 쏙 빼놓고 자기들까리 여행을 떠나버린 나쁜 놈들이지만 평소에 다니는 나들이도 억지로 끌려다니다시피 해서 팀원들이 나를 배려했거니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수그러들 기미는 보이지않고 더 굵어진 장마비를 쏟아내는 하늘. 잠시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겨 하늘을 보며 짧게 ‘쯧’하고 혀를 차고는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괸 채로 하늘에 시선을 뒀다.
아무래도 오늘 장 보러 가는 것은 글러먹은 듯 싶다. 식재료가 다 떨어져서 사러 나가야 하는데 굳이 비를 맞으면서까지 사러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주문이라도 시킬까 했지만 식재료 주문은 꽤 많은 양을 주문해야 배달을 해주고, 그렇다고 주문음식을 먹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금새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우곤 창문에서 걸음을 옮겨 티비 앞 쇼파 쪽으로 걸어갔다.
콰앙ㅡ
내가 창문에서 멀어졌을 때 쯤 들려온 커다란 충돌음. 그와 동시에 틈이 좁은 대문 구멍 사이사이로 작은 체구의 그림자가 비춰지더니 이내 문 아래로 몸을 기대 듯 쓰러졌다. 도대체 누구의 개수작 인지는 몰라도, 정말 사람이 쓰러진거라면 정말 귀찮은 일이 될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바깥에 쓰러져 있으면 저체온증으로 사망 할 게 뻔하니까. 우리 집 앞에서 사망사건이 일어나 뉴스에 뜨는 등의 일은 절대 사양이다.
정말 이 방안에서 한발자국도 바깥으로 나가기 싫은 그런 눅눅하고 기분 나쁜 날씨였지만. 가만히 둘 수도 없었기에 잔뜩 귀찮은 얼굴로 마당으로 나가 대문에 손을 얹었다. 내가 대문에 손을 얹자마자 작은 그림자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분리되어 나오더니 문 앞에 일어섰다. 지금까지 뛰어온 듯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 그와 동시에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오지 마세요.”
얻다 대고 집 주인에게 명령질이야. 나이가 짐작 될 만큼 어린 목소리로 무척이나 건방진 말을 내뱉는 문 너머의 여자아이의 말에 작게 콧 웃음을 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건방진 건 확실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화를 냈다간 그건 어른의 모습이 아니겠지. 나를 경계 하 듯 아직까지도 문 너머에 서서 숨 소리를 내뱉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작게 웃음 소리를 내보이고는 그 아이의 옆에 쓰러져 있는 또 다른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쪽은 무척이나 위험해 보이는데 말이야.”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아무런 해도 안 끼칠게요. 금방 돌아 갈테니 들어가셔도 좋아요.”
“그래? 숨 소리로 들어선 심하게 아픈 듯 하다만.”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터트려보이곤 입을 열자, 방금까지 자신을 방어하는 고슴도치마냥 날카로운 기세를 보이며 말을 하던 여자아이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 여자아이의 숨 소리보다 저 옆에 쓰러져있는 여자의 숨 소리가 먼저 귀에 들려 왔는데, 숨 쉬는 것도 불규칙하고 여자아이보다 훨씬 거친 숨을 내뱉고있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무척이나 위험한 상태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계속되는 내 말 소리에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여자아이가 조그맣게 대문에 노크를 하더니, 내가 대문을 열자마자 자그마한 연한 노란색의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비에 젖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예쁘게 정리되어 있었을 노란 개나리색의 긴 머리카락에 조그맣지만 당찬 얼굴로 날 올려다보던 여자아이가 작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더니 자신의 옆에 쓰러져있는 그 아이의 미래 모습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꼭 닮은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가..많이 아파요..”
“…잠시만 기다려 봐.”
말은 그렇게 했다만, 이때까지 완고한 태도를 보이던 애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심각한 게 확실한 듯 싶어 서둘러 여자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뜨겁지는 않지만 열이 나는 건 확실한 여자의 이마.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보아하니 여기까지 비를 맞고 온 듯 한데, 아무리 무식한 몸을 가진 나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감기에 안 걸릴 수가 없기에 재빨리 손을 거둬드리고는 여자아이의 이마에도 손을 올렸다.
“에…?”
내가 이마에 손을 올리자마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여자아이. 비를 맞은 것 같기는 했지만 그다지 열이 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손을 거둬드리고는 그대로 여자를 안아 올려 고개를 안쪽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들어가. 들어가서 옷 줄테니까 너희 엄마 옷 갈아입히고 너도 갈아입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내 옆에 붙어 여자의 손을 꼭 붙잡는 여자아이. 먼저 들어가라는 내 이야기를 한참 잘못 이해 한 듯 싶지만, 아무래도 좋으니 집 안으로 들어가 이 집안에 하나뿐인 침대에 여자를 눕히곤 내 잠자리가 물에 젖어버린 씁쓸한 마음을 안고 옷장 안에서 내가 어릴 적 입었던 바지와 셔츠 몇 벌을 꺼내 아이에게 건냈다.
솔직히 생각해서, 내 옷은 그녀들에게 맞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성의 평균 키와 몸무게를 가진 내 몸에 맞춰 입은 옷들인데, 나보다 훨씬 몸이 작은 여자에게 맞을리가 만무하다. 여자아이에게는… 더 이상 말 하기도 싫다. 이 여자야 내가 어릴 때 가끔 집에서 나와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버리지 않은 옛날 옷들도 있었고, 꼬맹이는 이걸 입나 다른 걸 입나 원피스가 될 것이 뻔해 상관없기에 아이에게 옷을 건내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수건 가져다 줄테니까 너랑 너희 엄마 물기 닦고, 차 끓여 놓을테니 마셔라. 너희 엄마도 일어나면 좀 주고.”
“감사합니다..”
잔뜩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여자아이. 그녀의 모습에 작게나마 동정심이 생겨 한숨을 내쉬고는 거실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푹 쉬어. 너도 너희 엄마도.”
.
.
.
.
차도 끓여놓고, 혹시나 몰라 목욕물도 체크해두고, 옷을 갈아입은(그녀들도 속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깜빡해 바깥에서 사왔다. 최악의 날이다.) 그녀들이 내놓은 옷을 말리기 위해 건조대에 널어놓기까지 한, 아주 최상의 서비스를 마치고 나서 쇼파에 앉아 전혀 관심없는 내용을 떠들어대고 있는 티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녀들이 입고 있던 옷은 보통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과는 다른, 전혀 못 입을 옷은 아니였지만 시대에 맞지않은 옷 이였다. 더군더러 후각이 예민한 나야 느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인간과는 조금 다른 냄새가 났었다.
..아무래도 집에 들이지 말아야 할 ‘생물’을 들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직 다 안정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을 쫓아낼 수는 없었기에 ���런 저런 고민으로 복잡해진 머리를 털어내곤 다시 티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복잡한 머리 속과 심심하던 터에 때 맞춰 방 밖으로 나와 말을 거는 여자아이. 몸에 맞지않은 옷을 입은 터라 축 늘어진 모습이였지만 어느정도 정리를 한 것인지 조금 깔끔해진 모습을 한 여자아이가 천천히 내 곁으로 걸어오더니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곳에 서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집 앞에서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면 나만 손해야.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선뜻 도와주신 건 감사합니다.”
….이 아이 정말 꼬마 맞아? 나이대에 맞지 않게 의젓한 모습으로 감사를 표하는 아이의 모습에 잠시 할말을 잃어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집 앞에 쓰러져있던 이유는?”
내 질문과 동시에 정곡을 찌른 것인지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인채로 서 있는 여자아이. 솔직히 이유나 알고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아직 어린 애를 난감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자리를 살짝 비켜 쇼파에 자리를 내주곤 말했다.
“더 이야기 하고 싶으면 앉아. 들어가서 엄마랑 잠 좀 자도 좋고..”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채로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하곤 쇼파 앞으로 걸어와 조심스레 앉는 여자아이. 아직까지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호철. 네 이름은 뭐냐?”
“묘령…이예요..”
“묘령… 그래. 묘령. 배 고프면 말해. 밥 차려 줄께.”
“아뇨..엄마는 아픈데 저 혼자 밥을 먹을 순 없으니까 괜찮아요.”
정말 어린 애가 맞는지 궁금하구만
갑자기 우중충해진 집안 분위기를 풀어보려 묘령이란 이 꼬맹이에게 이야기를 걸어 본 것이였지만, 나이 또래와는 다른 묘령이의 모습에 안그래도 어색한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이래서 난 남과 있는게 싫어.. 아무 것도 신경 안 써도 되니 혼자 있는게 훨씬 편하단 말이야..
어떻게 하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 수 있을까 머릿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방 안에서 들려온 자그마한 앓는 소리에 묘령이 스프링처럼 튕겨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갔고,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준 고마운 목소리의 주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
“으응…응…묘령아..괜찮아..근데..여긴…”
그녀가 일어났음을 확인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그녀에게 묻는 묘령이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고는 그제서야 자신이 누워있는 곳을 확인하는 듯 말하는 여자. 두 모녀의 눈물나는 장면을 방해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몸 상태는 체크해야하기 때문에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이. 감기는 괜찮냐?”
“에…?”
내 물음과 동시에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방금 전까지 맹한 얼굴이 아닌 놀란 듯한 커다란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여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머릿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서둘러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내 노력을 무시하는 듯 여자는 옆에 있던 플라스틱 컵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꺄아아악ㅡ!”
“정말 죄송합니다! 은혜도 모르고 제가 멍청한 짓을..!”
“괜찮아 괜찮아. 네 몸 상태가 괜찮으면 그걸로 됐어.”
방금 전 내 눈 앞으로 날라온 플라스틱 컵의 모습과 지금 빨갛게 부어있는 내 오른 쪽 눈의 모습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차마 화를 낼 순 없어 얼음을 담은 수건으로 눈을 문지르며 손 사래를 쳤다.
내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내게 컵을 내 던진 중대한 실수가 미안했던건지 연신 사과를 하던 여성은 그제서야 금새 울 것 같은 얼굴을 들어올려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입을 꾹 깨물곤 묘령이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그리고 감사합니다…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으니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상태로 바깥에 나갔다간 또 금새 쓰러질꺼야. 잠자코 쉬다가 몸이 좋아지면 나가.”
“아닙니다. 더 이상 폐를..”
“너희, 요괴지?”
계속해서 내 호의를 사양하다 이내 얼음을 담은 수건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짓는 내 모습에 몸을 움찔 하곤 금새 얼굴에 울음기를 싹 지운 얼굴로 날 올려다보는 여자. 이윽고 묘령이를 자신의 뒤로 숨기더니 당장 자리에서 뛰어 나가려는 듯 현관문 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움직이지마.”
그녀와 마찬가지로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입을 열자마자 얼어버린 듯 자리에 딱 달라붙는 여자. 그와 동시에 내가 손을 올리자마자 묘령이를 꼭 감싸 안은 채로 눈을 꾹 감았다.
“거 봐. 아직 열이 남아 있잖아.”
자신보다 훨씬 침착한 모습으로 날 멀뚱멀뚱 올려다보고 있는 묘령이를 안은채로 눈을 꾹 감고있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리곤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며 말했다.
“미안하게도 반찬은 별로 없지만, 야채죽 정도면 괜찮겠어?”
“네…?”
“배고플 꺼 아냐? 그렇다고 밥을 먹자니 몸에서 잘 안받아 줄 것 같고, 죽이 제일 낫겠지?”
“다..당신..”
“해결사 맞아. 하지만 지금은 휴가 중이라 일 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요괴를 잡는 일을 한다는 건 아냐.”
단호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가는 내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로 날 쳐다보는 여자. 하지만 얼마안가 고개를 털어내더니 아직까지도 의심이 남아있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말씀은 감사하지만…말씀하시는 걸 전부 믿을 수는..”
“그럼 이 빗 속에 또 뛰쳐 나가겠다고? 난 안 말려. 꼴을 보아하니 해결사에게 쫓기는 모양인데, 너나 저 꼬맹이나 내가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너희를 쫓는 놈들에게 잡혔을 꺼란 걸 잘 생각해 둬.”
내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나에 대한 의심과 자신의 아이에 대한 걱정, 그리고 자신을 찾아 이 곳, 저 곳을 뒤지고 있을 해결사에 대한 두려움이 섞인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짓던 여자가 이내 포기 했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경계심을 푼 미안한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부탁..드립니다..”
1 note · View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