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at-break-of-day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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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여자라면 나는 커피를 향수로 뿌리고 다닐 것이다" 같은 커피와 관련된 명언뿐 아니라 꽤 어려운 책에서 발췌한(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 부분도 나와 있었다. 그 긴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의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中 <사랑은 모자를 쓰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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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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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 그 망원경이라는 거 막 벽을 뚫고 보이는 거야?" "아냐, 아냐. 평범하게 길거리 정도가 보일 뿐이야. 너희 가게 유리창이 크니까 작업하는 걸 볼 수 있었고......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래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  한아는 다정한 지구인이었으므로, 거기까지 듣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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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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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정은영, <한지와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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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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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정은영, <씬짜오, 씬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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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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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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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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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에 묻어온 벌레를 털어내었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렇게 털어낸 적이 있었다 털리면서도 나의 바짓단을 누군가는 무작정 붙잡았다 나는 더 모질게 털어내었다 서늘하고 아팠다 벌레여 이 바지까지 온 네 삶은 외로웠나 이렇게 말하는 건 나, 중심적임을 안다네, 사라져가는 생물들이 쉬는 마지막 숨을 적어본 적이 없고 모든 살았던 것들의 눈동자 역사를 적어본 적도 나는 없었으므로 벌레가 떨어져나간 자책의 자리 오늘은 뭘 먹을까 흰밥에 붉은 기러기발 같은 무말랭이의 오후를 먹을까 내 바지에서 떨어져나간 날개 달린 벌레가 아직 날지 못할 때 내가 한사코 털어내던 그날의 발길을 잡던 당신과 한 상 같이 먹고 싶다 푸른 벌레가 점심 걱정을 하는 오후가 되어 들판이 점심 걱정을 하면서 푸르러지는 오후가 되어 벌레가 나를 벌레적으로 생각하며 푸르러지는 오후가 되어
허수경, <푸른 들판에서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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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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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허수경,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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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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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잊는 꿈을 꾼 날은 새벽에 꼭 잠을 깬다 어떤 틈이 밤과 새벽 사이에 있다 오늘은 무엇일까 저 열매들의 얼굴에 어린 빛이 너무 짧다, 싶을 만큼 지독한 날이다 너를 잊다가 안는 꿈을 꾼다 그 새벽에 깬다 잎의 손금을 부시도록 비추던 빛이 공중에서 짐짓 길을 잃는 척할 때 열매들이 올 거다 네가 잊힌 빛을 몰고 먼 처음처럼 올 거다 그래서 깬다 너를 잊고 세계가 다 저물어버린 꿈여관 여기는 포도가 익어가는 밤과 새벽의 틈새
허수경,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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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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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얼굴 아릿하네, 미안하다 네 얼굴의 눈썹은 밀물과 썰물 무늬, 하릴없이 달은 몸자국을 안았구나 달눈썹에 얽힌 거미는 어스름한 잎맥을 그냥, 세월이라고 했다 어설픈 연인아 얼마나 오랫동안 이 달, 이 어린 비, 이 어린 밤동안 어제의 흉터 같은 당신은 이불을 폈는지 어미별의 손은 너를 배웅했다 그 저녁, 울던 태양은 깊었네 그 마음 맺힌 한 모금 속 한 사람의 꽃흉터에 비추어진 편지는 오래된 잠의 눈썹 시작 없어 끝 없던 다정한 사람아 네가 나에게는 울 일이었나 나는 물었다 아니, 라고 그대 눈썹은 떨렸다 네 눈썹의 사람아, 어릿하네, 미안하다
허수경, <네 잠의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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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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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허수경 <농담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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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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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지나고 나자 하룻밤 사이에 잎사귀 다 잃고 가죽만 남은 가죽나무 한 그루 살아서 제 이름은 남겼으니 그거 참 다행한 나무 아닌가 내게도 아직 당신이 부를 이름은 남겨져 있다
류근 <가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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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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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는 일 사랑 때문에 서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일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슬픔을 슬픔답게 껴안을 수 있는 일 아픔을 아픔답게 앓아낼 수 있는 일 먼 길의 별이여 우리 너무 오래 떠돌았다 우리 한 번 눈 맞춘 그 순간에 지상의 모든 봄의 꽃 피었느니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푸른 종 흔들어 헹구는 저녁답 안개마저 물빛처럼 씻어 해맑게 갈무리할 줄 아는 일 사랑 때문에 사랑 아닌 것마저 부드럽게 감싸 안을 줄 아는 일 이제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류근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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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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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류근 <祝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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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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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운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류근 <나에게 주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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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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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람이 없는 욕망만 갖고 ��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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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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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였다. 그들은 엉뚱하게도 계획을 내세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많은 계획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설혹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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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break-of-day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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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앞길은 벚꽃이 좋았다. 일제시대에 심은 그 벚나무 터널 아래로 봄이면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나는 부러 그 길을 에돌아 다녔다. 벚꽃을 오래 보고 있으면 무서웠다. 사나운 개는 작대기로 좇지만 꽃은 그럴 수가 없었다. 꽃은 맹렬하고 적나라하다. 그 벚꽃길, 자꾸 생각난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그저 꽃인 것을.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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