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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나무일기
삼각지 배롱나무의 일기
  어제 저녁은 몇 달 만에 선선했다. 비가 많이 온 탓도 있겠지만, 귀신같이 입추가 지나면 이렇게 선선하곤 했다. 물론 사람들은 올 여름도 변함없이 더워했다. 도대체 그들의 겨울은 어떻길래? 여름에만 피는 나는 당췌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삼각지 교차로 횡단보도 앞에 자리잡은 지 이제 16년. 건너편의 소나무는 나와 같은 시기에 이 곳에 왔는데, 삼각지는 어딘가로 가고자 하는 사람만 많이 지나다니는 동네라 벗을 만들 수가 없다며, 산을 그리워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삼각지가 꽤나 재밌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친다. 아침에는 반쯤 눈이 감긴 상태로 길을 건너고, 점심 때는 대부분 한가로우며, 저녁에는 피곤에 절어있거나 술에 절어 다소 즐거운 모습. 인간들은 항상 같은 곳에만 있어야 하는 우리 나무들이 한결같다고 표현하곤 하던데, 사실 내가 보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한결같았다. 무표정, 한가로운, 즐거운 얼굴의 반복. 그래서 나는 사람에게 일말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사시사철 인간과 함께 있으면서도 불평만하는 소나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어리석게도 소나무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여운 지 모른다. 이번 여름, 어떤 여자는 나만 보면 자꾸 걷다가 고장이 났다. 손에 선풍기를 들고도 멈칫, 우산을 들고도 멈칫 멈춰서 그 바쁜 사람들 틈에서 내 사진을 찍는데 그 꼴이 꽤 우스웠다. 그녀는 주로 나와 하늘의 색 대비를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진 분홍색인 나와, 봄보다 푸르른 하늘. 물론 낮에만 나를 좋아한 건 아니라, 하루는 먹구름 밑의 나를 보더니 몸의 방향을 틀어 와인을 마시러 가더라. 핑계도 참. 나는 그런 그녀가 고맙고 귀여워서 그녀가 영상을 찍기 시작하면 줄곧 가지를 더 흔들곤 했다.
  새벽에만 나를 찾아오는 아저씨는 내 밑에 앉아 종종 노래를 불렀다. 저편에서 건너와 버스정류장을 한 번 들리고, 내쪽으로 와서 바닥을 쓸었다. 스윽 스윽, 삼각지 로타리에, 스윽 스윽, 굳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람을 헤메도는 이 발길, 스윽 스윽, 머무는 사람 없이 지나는 사람이 있는 곳. 가끔 쿵자작 쿵작을 입으로 외치는 아저씨도 그녀 만큼이나 귀여웠다. 그도 종종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주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바람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은 다 한 포대에 넣어 가져갔지만, 내 떨어진 잎만은 잘 모아서 다시 뿌리 밑에 넣어주었다. 내년에도 또 이렇게 예쁜 색으로 피어야 할 거 아니냐. 꽃잎이 다시 꽃잎으로 태어나기라도 할 것 처럼 예쁘게 모아주던 손길. 
  내가 소나무였으면 그녀도, 그도 겨울까지 계속 사랑해줄텐데. 나는 여름꽃이고, 지난 간밤의 비는 여름의 끝을 전했다. 내가 없어도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사진을 찍으려나. 매일 덥다고 얘기하던 그들의 겨울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다시 돌아가서 다시 태어날때까지의 많은 시간동안, 그녀는, 그리고 그 아저씨는 어떤 모습일까. 그녀가 나를 들렀다 갔으면 좋겠다. 비를 실컷 먹은 만큼, 남은 여름을 더 찬란하게 꽃피울거니까. 
나는 아직 삼각지가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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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고 외치다가 써본 글
정말 덥다. 
  누군가로부터 쓰여지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있다. 토이스토리의 장난감처럼. 하지만 그 정도의 맹목적인 행복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우리 모두 누군가 우리를 찾아주는 것 만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 의미라면 요즈음은 ‘더워’가 참 행복해하고 있을 것 같다. 아. 덥다. 정말 덥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덥다고 되뇌인다. 너나 할 것 없이 덥다고 계속 내뱉는다. 많이 쓰이는 단어 대회가 있다면 ‘더워’가 1등이다. 내뱉으면 조금 시원해지기라도 할 듯이 ‘덥다’고 외친다.
 하지만 모두가 알 듯이 이것도 한 때다. ’더워’는 그렇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입에서 쓰여지다가, 겨울이 되면 아무도 찾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선 다음 여름을 친구들과 함께 기다릴 것이다. 새빨간 능소화나 아니면 열심히 울어댈 매미들과 함께 ‘추워’의 활약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덥다고 내뱉는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즐겁게 자주 외쳐줘야겠다. 더워.
(더워서 맛 간거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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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만 피는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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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어떡하죠, 사랑하는 방법을 잊은 것 같아요. 무엇에 사랑을 표현할지 고민하다가, 정말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아. 어떻게 사랑했더라. 머리가 하얘진 채로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쉽게 글을 적을 수 없었습니다. 저 좋아하는 건 많아요. 술집도, 설레는 순간들도, 실없지만 재치 있는 이야기들도. 그런데 왜 ‘사랑하기’가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요?
 언젠가까진 저도 분명 산처럼 사랑한 적이 있었어요. 찰나의 순간까지 눈으로 담고, 감사하며, 곱씹었습니다. 수분 말고 사랑이 몸을 가득 채워 흘러넘치겠다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놓칠 수 없었던 사람 앞에선 당신 주변의 모든 공기까지 사랑하고 있다 고백을 전할 용기도 있었고요. 처음 본 상대에게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전하기도 했었습니다. 메신저에 이모티콘들 있잖아요. 있는 힘껏 고개와 허리를 흔들어 사랑을 발사하고, 심지어 입에서도 하트가 나오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일까요. 힘든데 아무도 없었던 순간부터 일까요. 그렇게 힘들 때 돌아서서 간 사람이 있거든요. 그때부터였을까 지금의 저는 마침표가 된 것 같았어요. 작은 표현에도 줄곧 겁이 나곤 했습니다. 저는 꼭 표현해야 하는 곳에만, 꼭 찍어야 하는 곳에만 존재했습니다. 때때로 나의 사랑을 숨겨야 할 때도 있구나. 입을 벌려 하트가 쏟아져 나온다면, 다물어야 할 때도 있구나. 내가 조금 사랑하는 것쯤은 감춰두어도 모두가 지내는 데 큰 문제가 없구나. 어쩌면 나만 몰랐지만 어른이 되는 건 그런건가 싶어서, 한 발씩 사랑과 멀어지기 시작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입을 꼭꼭 닫아왔기에 차라리 큰 사랑을 모아온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수취인 미상에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더는 이렇게 저를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일주일 동안 생각한 많은 것 중 어느 하나도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무엇으로 시작해도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반성문이 되곤 했습니다. 그간 사랑을 잊고 있었던 것들에게도 미안하고, 입을 다물게 한 저에게도 미안합니다. 저 사실 러브레터 하나 쓰지 못할 정도로 건조하지 않은데. 사랑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사실은 너무나도 다시 사랑하고 싶거든요! 심지어 사랑하고 싶다는 말도 겁이 나서 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주일간 스쳐 지나간 수많은 글감 중 하나가 답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래의 편지는 제가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쓰려고 했던 글입니다. 지난 주도, 이번 주도, 사실 이분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빠질 것 같아서 썼다 지워버리곤 했습니다. 글쓰기 수업과는 무관하게 어렴풋이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그 사람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운 편지를 쓰는 게 제가 저에게 주는 과제입니다. 이번 주에는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만 오랜 시간 사랑을 잊었던 만큼 가을이 오기 전까지 써보면 어떨까요? 아마 그래야 이번 글은 완성이 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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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만날 그대에게
19.7.27  
  나의 짝사랑 당신. 몇 번을 건너야 버스를 탈 수 있는 서울역 교차로에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직 당신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어디선가 당신도 퇴근하는 길인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당신도 건너편의 저 무덤덤한 얼굴들처럼 지친 상태로 이 길을 지나고 있는 건 아닐까 지레 걱정도 되더라고요. 혹시 오늘 당신도 힘들었나요. 
 이런 이야기 들어봤나요? 미국의 한 부부는 서로의 어릴 적 사진에서 우연히 서로가 찍혀있는 걸 발견했대요. 그 어린 나이에 서로 부부가 될 줄 꿈에도 몰랐겠지만 이미 그날은 한 사진 안에 있었던 거죠. 아,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만났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저 역시 그들처럼 당신을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거라면 차라리 당신이 아예 지구 반대편에서 이제 막 아침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고, 차라리 그랬으면 덜 억울하겠다 생각했습니다. 마주치기만 하면 당신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쓸데없이 믿고 있었거든요.
 하루는 샐러드를 먹으면서 친구와 당신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혹시 나처럼 점심을 먹고 있다면 무엇을 먹고 있을까요? 만약 오늘의 날짜를 콕 집어서 무슨 생각을 하며 점심을 먹었��고 묻는다면 너무 허무맹랑한가요? 그래도 나의 사람은 능청스럽게 ‘나도 샐러드를 씹으며 네가 뭘 먹는지 궁금해했다’ 답해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야채를 먹으면서도 고기를 올려 먹는 사람인지라 맛없이 파프리카를 씹으며 당신의 취향을 궁금해했거든요.
  그 후론 당신의 하루가 궁금한 날이 많아졌습니다. 마음이 다친 날이면 행여나 당신도 어딘가에서 다친 하루는 아니었을까 걱정도 많이 했었지요. 당신도 나처럼 혼자라면 힘들 텐데, 약간은 질투가 나겠지만 차라리 지금 당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아마 꿈에도 모르시겠지만 저는 이렇게 당신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안위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까요? 당신 때문에 하루 몇백 명씩 마주치는 얼굴도 괜히 한 번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거 알아요? 혹시 저 사람인데 내가 지금 놓치고 지나가는 건 아닌지 너무도 걱정되는데 어쩌겠어요. 차라리 얼굴을 모르고 만나는 사람들처럼 갈색 코트를 입고 어딘가에 서있다고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다간 숨어있을 당신 하나를 찾기 위해 박애주의자가 되겠다 싶어 웃고 말았어요.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릴게요. 그냥 저는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당신을 위해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살고, 당신을 만났다고 확신이 드는 날이면 많은 궁금증은 접어두고, 저 멀리 먼 곳에서 전속력으로 달려 안길게요. 줄곧 사랑해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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