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금요비언
7yobian · 4 years
Text
거스러미 1
“소정쌤. 원장실로 잠깐 와 줄래요?”
“아, 네. 이제 채색해볼까? 물감 가져와서 하고 있어.”
아구구... 갈수록 더워지네. 소정은 허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스케치를 봐주느라 한참 구부렸던 오금이 저리자 겹겹이 구겨진 바지 주름을 털면서 다리를 꾹꾹 눌러 폈다. 올해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거라고 했다. 일기예보에서 이맘때면 늘 같은 소리를 하긴 하지만. 온갖 여름 꽃들이 담장과 뜰과 언덕에 피고, 마트에 가면 수박이 들어와 있고, 티비를 틀면 에어컨 광고가 자주 나오는 이 계절. 그는 여름이면 힘이 쭉 빠져 맥을 못 추다가, 벌떡 일어나 찬물 샤워를 하며 올해도 잘 지나가자며 자신을 다독이는 하루를 자주 보냈다.
소정이 맥없이 손부채질을 하며 원장실로 들어가자 벽에 걸린 선풍기 바람이 때마침 볼에 붙은 잔머리를 떼어주었다. 일주일 전 이 학원에 있는 유일한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무슨 영문인지 아직도 수리기사가 오지 않았다. 원장은 긴급처방으로 창고와 집에서 선풍기를 하나씩 끌고 왔고 오늘까지 나흘째 선풍기 두 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중이다. 어휴, 저거라도 없었으면 여름 내내 문 닫을 뻔했지 뭐야. 다행히 꼬박꼬박 출석 도장을 찍어주는 아이들을 반기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막 붓에 물감을 묻힌 예림이는 내내 종이가 바람에 날아갈까 손으로 꾹 누르곤 진지하게 눈썹을 모으며 그림을 그렸다. 축축한 손마디가 문지른 귀퉁이가 눅눅하게 말려들었다.
냉장고에서 유리병을 꺼내 컵에 따르던 원장이 소정의 땀 밴 이마를 보고 눈썹을 내려뜨리며 미안한 표시를 했다. 그가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많이 덥지. 내가 어제 단단히 혼냈으니깐, 다음주엔 에어컨 틀 수 있을 거야.”
“아녜요. 저보단 애들이 더울 텐데.”
“그러게 말야. 이따 아이스크림 사오려고. 매실청 어때? 내가 직접 담갔어.”
“맛있어요. 더운 게 확 가시는데?”
“여기 냉장고에 있으니까 아끼지 말고 타 마셔, 알았지? 얼음이랑 같이.”
“네. 근데...이모 어디 가세요?”
“응. 그 얘기 하려고 불렀지.”
소정의 친이모이자 그의 고향에서 미술학원을 하고 있는 원장 태영은 반쯤 마신 컵을 내려놓고 탁상달력을 꺼내 들었다. 6월 마지막 주 금요일. 한 장 넘기자 금방 7월이 나온다. 이제 겨우 여름인데 한 해의 반이 다 갔다고 생각하니 사계절이 뭐 그리 좋은 지도 잘 모르겠다. 단기 알바로 하겠다고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6개월을 훌쩍 넘겼다. 태영이 빨간색 볼펜으로 네모칸 두 개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초등학교 방학도 곧 하잖아. 바로 다음주 7월 2일 오전에 출발해서 30일에 들어오는 비행기까지 예매했거든. 딱 한 달만 쉬기로 했다. 우리 딸 2년 만에 얼굴 보러.”
소정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고 태영은 의외로 놀란 표정의 조카를 보며 프랑스는커녕 유럽 땅을 난생 처음 가본다며 하하 웃었다. 어쩐지 갈증이 이는 것 같아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 마실 때 유리컵 너머로도 보이는 이모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비쳤다. 물방울 맺힌 컵을 볼에 대자 시원해서 좀 나았다.
“진짜 잘됐다. 잘 하셨어요, 이모. 그동안 계속 간다고 말만 하고 안 온다고 언니도 좀 서운해 했잖아요. 이렇게 한창 더울 때 휴가 가시면 좋죠.”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학원은 어린 애들이 많이 다니잖아. 오후에 집 가면 아무도 없는 애들 돌봐주는 게 오래 하던 일이다 보니 그동안 걔네는 어쩌나 걱정도 좀 돼. 그래서 너만 괜찮으면 일주일에 세 번만 시간 단축해서 열까 싶은데.”
물어보고 결정하려 했으니 너 좋을 대로 해. 쉬고 싶으면 같이 쉬어야지. 뱃속으로 시원한 물을 붓고 찬 것을 살에 대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니 몸이 금방 차가워지는 듯 마른 등으로 얕게 소름이 돋아 허리를 바로 세웠다. 
사실은, 소정은 이모가 그렇게 조심스레 묻지 않았어도 자기가 먼저 물어볼 참이었다. 학원을 열어두는 게 낫지 않겠냐고. 나는 가급적 계속 나오고 싶으니까. 이 일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쉬고 있는 것 같아서 그만둘 타이밍도 여러 번 놓쳤고 자꾸 붙들고 있게 된다는 이야기는... 이번에도 목구멍 밑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직감한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신호’ 같다고. 그는 태영을 똑바로 보면서 시선 밖으로 몰래 손톱 옆구리를 튕기고 긁었다. ‘신호’를 알아차려도 이미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나서는 멈추기가 어렵다.
“저는 좋아요. 맡겨주시면 그렇게 할래요.”
태영이 그래주면 고맙지,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선물 사올게. 라고 들뜬 목소리로 손을 꼭 잡는 바람에 소정은 기어이 살이 까진 손톱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Birthday
Birthday    르미
         안녕하세요. 다른 등장인물 없이 저 스스로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푸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겠네요. 사실 오늘은 안식일로 잡고 하루를 온전히 쉬고자 했어요. 그래서 매번 금요일이 되고 몇 시간 되지 않아 글을 올리던 습관을 잠시 멈추고 있었지요. 시험을 끝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오늘은 제 생일이거든요. 친한 친구나 몇몇 아는 이에게 오늘이 본인의 생일임을 밝히는 일보다 익명의 다수에게 제 생일을 밝히는 것이 더 쉽게 여겨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어요. 아마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생일임을 밝히는 일은 제게 왠지 쑥스러운 일이에요. 제가 생일에 깊은 의미를 두고 있지 않거나, 혹은 너무 깊은 의미를 두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어릴 적에는 생일을 마냥 행복한 날로 여기고 무슨 선물을 받을지 한참 고민했어요. 언젠가는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던 게임기를 3년치 선물로 앞당겨 받고서 3년 간 아주 쓴 기다림을 맛본 적도 있었어요. 혹은 인형 같은 것들을 받고 침대 한 편에 와락 쌓아둔 적도 있었지요. 언젠가는 생일 케이크로 떡케이크를 받고 싶었고, 언젠가는 생일 케이크로 아이스크림 산을 가지고 싶었어요. 개중에서 언제나 빵 케이크는 뒷전이었는데 성인이 되고 시간이 흐르니 빵 케이크를 가장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누구나 다 먹을 수 있는 일반 케이크보다 여러 특별한 케이크를 받고 저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점차 생일에 대한 압박을 버리다보니 가장 일반적인 케이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요.
중학생이 되고 여러 문제를 겪으며 저는 어른으로 나아갔지요. 어른이라는 단어는 왠지 풍파를 거치고서야 획득되는 언어 같아요. 어른이 풍파의 횟수를 따지어 될 수 있는 거라면 저는 아마 고등학생 때 이미 어른이었을 거예요. 저는 자주 친구들과 문제를 겪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유구하게 겪었던 문제들은 제게 언제나 스트레스였지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단 한 번도 조용히 일 년을 보낸 적이 없어요. 그 뒤로도 종종 시끄럽게 한 해를 보냈지요. 저는 아마 그때부터 인간관계를 쉽게 포기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슬퍼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나의 마음을 거두기를 반복했던 거예요. 그렇지만 언제나 가까운 친구들에게 상처 입었고 자주 울었지요. 인간관계는 점차 좁아지고 낯을 가리던 성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졌어요. 그러면서 사과를 받기도 하고 어떻게든 관계를 풀어나가서 그들과 어떻게든 일반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저는 사실 제가 그때 그들의 용서를 다 받지 않았어야 더 건강했으리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진정한 의미로 그들을 많이 용서했고 잊었어요.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싫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기뻐서 자주 눈을 감고 웃었어요.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면서요.
다행히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친한 친구들을 몇 얻었지만 저는 그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기 위해 애썼어요. 언제고 믿음을 배반당하고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요. 그렇게 되면서 생일이 싫어졌어요. 친구가 많은 아이들은 생일마다 케이크를 받고 얼굴에 잔뜩 생크림을 묻히고 와하하 웃거나 생일 선물로 손을 가득 채웠어요. 그리고 가장 가깝게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언니였어요. 저는 언니와 생일이 얼마 차이 나지 않아요. 그리고 언니는 항상 방 한편을 가득 채울 정도로 케이크와 선물을 가져왔지요. 언니 덕에 우리는 케이크를 살 필요도 없이 2주 정도 계속 케이크를 먹었어요. 저는 그 케이크를 먹을 때마다 언니와 나를 비교했고, 결국엔 슬펐어요. 나쁜 습관이었죠. 제게 온 친구들의 선물을 양으로 비교해서 더 좋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으니까요. 그때는 선물을 받는 것이 어쩐지 그의 능력 같고 나는 그 능력에서 뒤처진 사람 같았어요.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친구들에게 생일을 굳이 알려주지 않았어요. 누군가가 묻는다면 대답해주긴 했지만 부러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지요. 언니의 선물과 내 선물의 개수를 비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남에게는 나는 생일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어요. 나의 꼬인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뒤늦게 누군가가 내 생일을 알고 축하해줄 때에도 원래 생일을 잘 알리지 않는다고 웃었지요. 그래서 저는 생일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 척했고, 결국엔 생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어요.
어느 순간은 축하를 받을수록 외로워졌어요. 아마 그 축하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 때문이었을 거예요. 행복하지 않은 마음에 오는 축하는 방화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생일이라는 게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어요. 축하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차라리 그 누구도 축하를 받지 않아서 내 마음이 평온해졌으면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지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아주 신기하게도 작년부터 올해까지 생일에 대한 억하심정이 줄었어요. 누군가가 나를 축하해주는 일이 좋았어요. 언니와 비교해서 많은 선물을 받지 않더라도, 축하의 개수가 남에 비해 적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기억한다는 일 자체가 누구나에게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제가 제게 상당 부분 너그러워졌기 때문이에요. 저는 물론 여전히 제가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에 조금 더 힘을 들일 ��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맞지 않는 한 조각을 이유로 거리 두는 일을 그만해야 한다고요. 물수제비를 떠서 제 돌이 나아가는 만큼은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좁고 깊게 쌓아온 저의 인간관게의 담을 비난하지 않기로 했어요. 저는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주는 친구들을 가지고 있고, 당장 제 생일을 까먹더라도 몇 주고 몇 달이고 뒤에라도 나를 챙겨주는 마음들을 알고 있어요. 제가 비난하던 지난날에 내게 축하를 보내주던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걸 인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평온해졌어요. 생일이 의미 없어져야 평온해지는 게 아니라 생일이 의미가 있든 없든 평온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요.
이 사회에서 생일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거창해 보이고, 누구나 행복한 날처럼 그려져요. 사회가 그리는 모습이 거대하다는 것은 나를 재단하기도 쉽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모두에게 그렇듯 어떤 날들은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사람마다 그 범위도 그 규모도 달라질 수 있어요. 획일화된 크기와 범위를 가지고 누구나 축하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일 파티를 열어서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소규모의 모임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생일에는 온전히 스스로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저는 저의 방식과 친구들의 방식을 합쳐 모아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편지를 주고받고 근황을 나누면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인사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어요.
어쨌든, 오늘은 저의 생일이고 마치는 데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어요. 저는 오늘도 저의 방식으로 친구들을 인사를 주고받고 소소한 마음을 전해 받았어요. 더 이상은 크기나 범위를 재고 따져서 우울해하는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고 있어요. 이렇게 점차 사람이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것이겠지요. 오늘은 저의 생일이었으니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이 좋은 하루를 보내셨기를 바라요. 저도 멀리서나마, 어떤 날이 여러분의 생일일지는 모르지만 생일마다 작고 소소한 축하를 보낼게요. 앞으로 남은 반년이 속상한 일이 적은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해요.
4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teabag 4
시험이 다 끝나고 나면 할 말이 있다던 약속을 꼭 지키기라도 하듯이 정말로 희은은 3일간 치러진 중간고사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지영에게 딱히 말을 걸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애처럼 데면데면했다는 건 아니고, 등교해서 교실에서 마주치면 안녕 인사하거나 쉬는 시간이 끝났다고 알려주거나 시험 잘 보라고 초콜릿 따위를 건네줄 때 외에는 붙잡고 대화할 일이 없었다. 시험기간 특유의 긴장감과는 다른 색깔로 이따금씩 마음이 떨렸던 둘에게 주어진 이 침묵의 유예는 전혀 섭섭한 일이 되지 않았다. 지영은 유성펜으로 ‘드디어 마지막! 파이팅!’이 적힌 뚱뚱한 바나나우유를 다 마시고 빈 몸통을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마지막 과목이 수학이라 다행이다. 수학은 풀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나 오늘 병원 가려고]
[엉 그럼 주말에 놀까?]
[ㅇㅋ 시험은 잘봄?ㅋㅋ]
[응 잘봄~~묻지 마셈~~~]
담임이 “드디어 너희들의 수학 시험지를 채점할 생각에 얼마나 설레는지 내 맘을 알겠냐”고 너스레를 떨었다가 아이들의 웃음 섞인 야유가 터지는 동안 지영은 재빠르게 문자를 주고받았다. 공교롭게도 시험이 끝난 오늘, 희은이 전학생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서로 당번을 맡았고 마침 전교생이 후련한 얼굴로 학교를 우르르 빠져나가고 나면 그를 기다리기 좋은 타이밍이 될 것 같았다. 주말 동안 잘 놀고, 월요일 수학시간은 바로 문제풀이 할 테니까 시험지 까먹지 마라. 종례 끝!
지영이 재빠르게 멀지 않은 자리에 앉은 희은을 넘겨보았다. 시험지를 반듯하게 반으로 접고 스프링노트 사이에 끼워 가방에 집어넣고 지퍼를 잠근 다음 책상 위에 턱 내려놓고는 일어선다. 나도 저렇게 했는데. 별로 특별할 거리 없는 행동이 괜히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금방 비워진 교실을 한 번 돌아보는 희은이 남아있는 지영을 발견하곤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반 짝수지 않아?”
“응? 맞는데. 32명.”
“두 명씩 당번 아니야?”
“아. 시험기간에는 한 명씩이야. 할 일이 별로 없어서.”
“맞다. 쉬는 시간에 안 하니까 그렇구나.”
내가 도와줄게! 책상만 원위치하고 가면 돼. 뿔뿔이 흩어진 책상들을 차례대로 둘씩 붙이고 바닥에 그인 줄을 자로 삼아 일정한 간격으로 차곡차곡 열을 세운다. 서랍이 비워 가벼운 책상이 힘을 주지 않아도 쭉쭉 잘 밀리니 빠르게 배열이 바뀐다. 각자의 책상을 마지막으로 서로의 대각선 방향에 놓고 나서 가방을 매고 교실을 나섰다.
너 운동화 끈 풀렸다. 어, 잠깐만. 지영은 리본 매듭 위에 고리를 한 번 더 묶는 사이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채점한 점수가 꽤 괜찮았는데 엄마한테 운동화 사달라고 할까? 그리고 내가 먼저 물어볼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 뭐냐고.
“있잖아.”
어라. 방금 누가 말했지? 지영과 희은은 거의 동시에 거의 같은 속도로 그 세 글자를 뱉어놓고 둘 다 깜짝 놀랐다. 우리 동시에 말한 거 맞지? 갑자기 목소리가 겹쳐서 속으로 말한 줄 알았네. 나도 나도. 별안간 웃음이 터지고 나서야 둘은 확신을 공유했다. 할 말이 있던 걸 잊어버리지 않았구나.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구나.
‘있잖아’는 애매하고 애태우는 말이다. 있긴 뭐가 있어? 그런데 한편으로는 운을 떼는 데 이만큼 기막힌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이상한 서두는 어쨌든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뭐가 있다는 건지 이어가면 애매했던 거리는 금방 사라진다.
“이제 집에 가?”
희은이 먼저 웃음의 꼬리를 잡고 말머리를 끌어온다.
“아니. 저번에 말했던 할머니 병문안, 오늘 가려고.”
지영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희은의 얼굴이 묘하게 변하는 모양을 눈에 담았다. 눈썹이 올라가면서 쌍꺼풀 없는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왜 놀랐지?
“나도 같이 가도 돼?”
“그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승낙이었다. 정말로 동행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는 어떤 의외성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반응 같은 것. 그리하여 우연한 동행인과 나란한 방향으로 제 발을 뗄 때서야 퍼뜩 놀라고 만다. 막 중간고사를 마친 중학생이 보통 친구네 할머니 병문안을 같이 갈까. 그것도 말을 제대로 붙여본지 일주일도 채 안 된 친구의.
가만 머리를 굴리는 동안 희은이 혹시 음료수라도 사가야 하는지 묻자 지영은 손사래를 치며 거기 먹을 거 많아! 중학생이 무슨 돈으로 사왔냐고 혼내실걸. 라고 답해주었다. 그리고는 그건 그렇네, 하고 웃는 볼을 보면서 생각했다. 좋은 애다. 신기하게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냐고 물어보려던 마음이 슬쩍 비켜났다. 그것 말고도 말을 걸 수 있는 얘기가 더 많을 거라는 여유감이 들었다.
우리 담임이 한 말 기억나? 수학은 잘 봐야 된다고 그랬지. 응, 수학 좋아해 싫어해? 싫어하진 않는데 좀 어려워...너는? 나는 제일 좋아하거든. 진짜? 나 좀 가르쳐줘.
여름 볕에 데워진 아스팔트 위를 걷는 걸음이 가뿐하다. 무더운 날씨 탓에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 만에 내리곤 했던 거리를 오랜만에 걸어서 훌쩍 지나쳤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정수기로 누가 더 빨리 달리나 장난을 칠 기운이 남을 정도로.
“할머니, 나 왔...어.”
세 자리가 비어있는 6인실의 오른쪽 창가가 지영의 할머니 자리였다. 병실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던 환자가 열린 문을 돌아보곤 얼굴을 아는 지영에게 묵음으로 알은 체를 하며 할머니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뜻으로 보이는 몸짓을 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지영을 따라 희은이 들고 있던 종이컵에 남은 물을 털어 마시고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창가의 침대로 다가갔다. 요양원이 아닌 아픈 곳이 있어서 입원한 일반병원에 노인의 병문안을 오는 건 아마 지영이 생각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실은 희은에게는 그랬다. 당연히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하루 빨리 불편한 병상을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시길 쾌유를 바라 마지않지만. 빳빳하고 희끗하게 샌 머리카락과 주름진 뺨과 손등 그리고 손에 쥔 소일거리가 없어져 속절없이 꼬박꼬박 감기고 마는 얇은 눈꺼풀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형용할 수 없이 어렵고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살아온 세월의 격차가 문제라기보다 그냥, 나이가 많이 들어 한없이 어린 제게 잘해주려는 사람들 앞에서는 뭘 하면 좋을지 머릿속이 깜깜할 따름이었다.
“퇴원은 언제 하신대?”
“원래는 저번 주 예정이었는데 아주 푹 쉬었다 가시는 게 좋겠다고...”
혹여나 잠에서 깨실까 소곤대는 목소리가 살금살금 이불 위를 걷는다. 우리 할머니가 집에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거든.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 한다고. 지영이 킥킥거리며 웃다가 이불 위로 누운 볕살을 쫓으려 커튼을 바로 쳤다. 시험도 끝났는데 나가 놀라고 막 잠이 드셨나. 더 할 일이 없으니 이만 가자고 할까 하던 차였다.
“손톱 깎아드려야겠다.”
“응?”
“할머니 손톱이 좀 길어서. 다음에 오면 깎아드려.”
“어, 그러네. 엄마한테 말해놔야겠네.”
같이 가도 되냐고 따라온 것치고는 쭈뼛대는 듯했던 그의 낯이 어쩐지 아까보다 편안해보였다. 희은이 둥글고 두꺼운 손톱을 가만히 매만져보다가 일어나자 지영도 걸음을 옮기며 다음에 또 올게요, 꾸벅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별안간 등 뒤에서 코로 숨을 짧게 들이마시는 킁킁 소리가 났다. 일어선 채로 할머니 옆에 있던 희은이 무언가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뭐지? 아무 냄새도 안 났는데.
‘나한테서 무슨 냄새 나?’ 의문을 느끼자마자 제 목소리로 방금 제가 하려던 말이 들렸다. 그 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좋은 냄새야!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이거 냄새였나 봐.’ 지영은 생각했다. 희은이는 무슨 냄새를 맡은 걸까. 참 이상하게도, 왜 우리는 자꾸 강아지마냥 어떤 냄새를 찾고 궁금해하고 쫓아가려고 하지? 지금 무슨 냄새 나냐고 물어보면 저 애는 뭐라고 답할지. 어떤 표정으로 질문을 돌아볼지.
“역시 아무 냄새도 안 난다니까.”
“뭐가?”
바로 되물으면 놀랄 줄 알았는데 별로 그래보이진 않았다. 놀라게 하려고 물은 것도 아니었으니. 사실 지영은 그냥 던져볼까도 했다. 아주 이상하지만 명확한 의문을 담은 질문을. 너 방금 우리 할머니 냄새 맡은 거야? 내가 어디서 녹차 티백 냄새 난다며 네 근처에서 며칠 킁킁댔다고 너도 한 번 똑같이 해본 건가.
별 것도 아닌데 말을 자꾸 삼키느라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이 모빌처럼 빙그르르 제 주위를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미닫이문을 조심히 닫고 나와 복도를 걸으면서 지영은 당이 떨어져서 머리가 안 돌아가나 싶어 나가기 전에 병원 출입구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셔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갑에 동전이 많이 모였던 것 같은데. 두 개는 뽑을 수 있겠지? 지영이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아 꺼내느라 속도를 늦추자 희은도 그에 맞춰 같은 속도로 계단을 내려갔다. 오! 오백 원이 두 개, 그리고 백 원짜리가... 짤랑거리는 동전을 양 손바닥에 펴놓고 세는 양을 지켜보던 희은은 평소보다 느릿하게 들리는 말투로 돌연 말을 꺼냈다.
“지영아. 지갑이나 가방에 티백 넣어본 적 있어?”
도합 천 사백 원이니까 충분하겠다. 이프로나 포카리 마시면서 걸으면 시원할 거야. 병문안 같이 와준 거 고마우니까 음료수 사줄게. 뭐 마실래... 지영은 그런 얘기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얘가 자신에게 정말로 화가 난 것이 아닌지 처음부터 정확히 물어봤어야 했나 하는 황망한 생각에 잠겨 동전을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아니. 안 그래봤는데... 티백을 지갑이나 가방에 넣으면...뭔가 좋은 게 있어?”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된 지영이 모로 돌렸던 고개를 불쑥 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마침내, 희은이 파하! 마치 물속에서 참았던 숨을 뱉는 듯 개운한 소릴 내며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 그와 거의 동시에 자판기도 차가운 캔 두 개를 툭 툭 뱉어낸다.    
2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거짓말
거짓말   르미
사실 보고 싶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나의 감정은 보고 싶다는 말보다 한층 복잡한데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잘 몰라서 사회의 기호를 가져다가 붙여. 나는 내 감정을 어떤 언어로 포장해내야 하는지에 대해 종종 고민하고 있어. 다른 의미의 사탕을 발라서 감정을 이야기하는 데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내가 너나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만 그걸 보고 싶다고 ���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나는 네 집 앞에 가서 당장 너를 보고 싶지는 않아. 수일 내에 반드시 너의 얼굴을 봐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아. 다만 언젠가 너를 만났을 때 너의 표정이 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네가 건강한 모습으로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으면 해.
미이야 보고 싶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잘 몰라. 미안해,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이 많지. 너의 마음에는 기호가 붙어 있는 것인지, 그래서 너도 네 감정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래. 네게 나도 보고 싶다는 말로 답을 해나가면서도, 너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너를 평생 못 보게 되는 것은 싫지만 몇 년 동안 보지 못한다고 해도 마음이 무겁지는 않아. 너의 안부를 전해 듣거나 너의 얼굴을 보는 일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바심을 내어 네게 찾아가고 싶지는 않아. 나는 실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년 간 보지도 못했지만 안부를 전하는 친한 친구가 있어. 나는 그 애가 잘 살고 있다는 표시를 듣기만 하면 마음이 충족되어서 보고 싶다는 마음을 잊어.
연극에 서 있는 나는 우스꽝스러워. 나는 연기를 잘 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일을 잘 하지 못해. 그러면서도 평상의 얼굴과 언어는 온갖 거짓이지. 사탕이 줄줄 발려 있어. 사회에서는 이를 아부의 한 종류인 사탕발림이라고 부른다지. 나는 이게 받는 사람에게 달콤함을 줌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끈끈이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끈적끈적하다는 것은 거슬린다는 것이고 원래의 감촉을 알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야.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이 너무 끈적하다고 느껴. 끈적해서 내 원래 언어와 얼굴을 잘 알지 못해.
최근에 책에서 통속학적 심리학이라는 것에 대해 읽은 적이 있어. 사람들은 얼굴과 언어의 뉘앙스 등으로 그 사람의 감정을 판단한다는 거야. 그 사람의 실제 감정이 어떻든 내가 그 표정을 하기만 하면 내 표정을 기쁘거나 슬프거나 경계하는 것으로 누군가가 받아들인다는 거야. 이때 나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고 겉의 기호만이 중요해져. 나는 통속학적 심리학이라는 것을 거기서 처음 들어봤는데, 이미 그 심리학을 체득하고 있었어. 누군가의 말이 재밌지 않은데도 웃어주고 관심이 없는데도 호응하고. 사람들은 내가 재미있거나 관심 있다고 느꼈겠지. 
그런데 이름도 어려운 먼 부족에서는 경계심을 표하는 표정이 우리와 다르대. 내가 아무리 어떤 표정과 제스처를 취해도 그 사람들은 내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야. 내가 아무리 사탕을 발라내도 그 사람들에게 그 사탕은 알파값을 가진 투명 png 파일 같은 거야. 그렇게 되면 나도 끈적임을 알 수 없게 되어서 일순간 발가벗게 되지. 자주 화두에 오르곤 하는 독특한 독일어 단어들도 있잖아. 우리는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들을 어떤 언어에서는 한 단어로 묶어서 그 복잡한 뉘앙스를 표하기도 해. 
어떤 다른 문화권이나 언어권에 들어가게 되면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아니면 거기서도 사탕발림을 배워서 끈적끈적하게 평상시를 연기하며 지낼까? 아마 후자겠지.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문화권의 영향도 중요하겠지만 내 내면의 문제니까. 언어의 문화권은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두느냐에 따라서도 변화해. 굳이 외국에 나가서 유토피아를 찾지 않더라도 내면과 주변 사람을 살피기 시작하면 나의 생활은 변화할 거야.
당장 보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고 평안했으면 좋겠고 언젠가는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을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해. 누군가는 이름을 붙여 형용사를 만들더라. 예를 들어서 일을 많이 벌려서 언제나 바쁜 지혜에게는 지혜 친구가 지혜하다라는 단어를 만들어줬대. 지혜가 어제도 오늘도 지혜했다고. 처음엔 그런 단어들이 우습고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멋진 것으로 보여. 지혜 본인도 아닌 누군가가 지혜의 특성을 이해하고 한 단어로 표시해줬다는 거니까. 그걸 스스로가 만들어 누군가에게 이해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해를 요구하기 전에 이해가 되었다는 의미잖아. 지혜만의, 그리고 지혜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말이 된 거지. 당장에 내 언니인 미은이 지혜하다, 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지혜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듣는 거야.
언젠가는 내 마음을 미이하다,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될까? 사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 마음을 친구들에게 표하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일이겠지. 내 마음을 친구들도 알고 언젠가는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대강 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저절로 어떤 단어가 생겨날 거야. 나는 속내를 감추고 연기하는 데에 특화된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조금 더 솔직해져 보려고 해. 네가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야. 나는 언제나 네 얼굴이 안온하기를 바라고 있어. 내게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니. 수개월, 수년을 보지 못한 너의 얼굴이 우울한 기색 없이 편평하였다면 좋겠다는 생각. 나는 이게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해. 누군가는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미은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미은은 부쩍 내게 전화를 자주 걸고 내 목소리를 살피고 있어. 은아, 나는 네가 내게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다시 달콤한 말로 너를 속이고 있어. 네가 나를 걱정할 때마다 나는 부담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괜찮다고 이야기하지. 나는 은이 네가 나를 차분하고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대해줬으면 좋겠어. 요즘 많이 올라오는 경험담들처럼 말이야. 누군가는 사촌언니에게 꾸미지 않는다고 타박을 주거나, 친구를 별 것 아닌 일로 무척이나 미워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 그렇지만 그런 여자들은 새롭게 마음을 먹은 뒤에 사과하고 그 기억이 없는 것처럼 잘 지내잖아. 물론 서로의 마음속에는 그 기억이 존재하겠지만 새로운 여자들의 마음에는 과거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다짐은 없어. 나는 미은이 다시는 내게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나는 미은을 아주 오래전에 용서했어.
나는 어릴 적의 기억으로 아주 예민하고 예민함을 통해 무던함을 연기하는 사람이야. 그에 미은의 탓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아. 미은은 내게 사과를 했고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나야. 그게 내게는 사과 하나로 끝나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미은이 나에게 덜한 마음을 가지더라도 괜찮아. 나는 미은과 아주 오래 뒤에 만나거나 전화하게 되더라도, 그 사이에 미은이 내게 미안한 기색을 비치지 않더라도 미은의 얼굴이 환하기를 바랄 거야. 나를 생각하기보다도 기민한 미은을 먼저 생각해주었으면 해.
친구, 혹은 미은아. 나는 너를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 너희의 존재는 내게 너무 무거워서 직접 이야기하거나 만나지 않아도 묵직한 마음으로 너희를 생각할 수 있어. 나는 솔직한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힘들면 병원을 가고 나아졌을 때 즈음 너와 미은에게 이야기하며 나의 가시를 덜어나갈게. 끈적한 가면을 벗고 나의 언어로 나의 마음을 전하게 되는 날에는 보고 싶다는 말 대신에 다른 언어를 전할게. 사랑한다는 말에 다른 의미를 담아갈게. 나는 우리가 서로를 당장 보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자주 행복했으면 좋겠어.
4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뒤로걷기 1
엄마. 나 예전에 A시 U아파트에 살았다? 유인은 수건을 개다가 단을 쳐다본다. 우리 단이가 엄마 없이 언제 혼자 살았대?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단은 뜬금없이 가본 적 없는 지역의 여러 정보를 읊는다. U아파트 4동 앞에 있는 놀이터 그네에 자주 앉아 있었다고. 체크무늬 치마 아래에 체육복 바지를 덧대서. 반팔 블라우스를 입고 그네에 앉아서 자주 하늘을 봤댔다. 그 앞에서 학교를 다녔어. 광흥중학교……. 유인은 단의 정면으로 몸을 돌리고 앉는다. 꿈을 엄청 자세하게 꿨나 보네. 아니야, 진짜 기억나는데. 나 진짜 거기 살았어. 그럼 어떻게 다시 여덟 살이 됐을까? 단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그건… 모르는데. 유인은 단이 어딘가에서 본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거나 꿈을 꿨다고 믿었다. 그래도 단을 믿는 시늉을 했다. 우리 단이가 엄마한테 오기 전에는 중학생이었나 보네. 단은 끊긴 기억 더미를 곱씹느라 대답이 없었다.
  뒤로걷기 1    르미
 아무도 없는 집에 요란한 종소리가 울리고 단과 단의 친구 규진이 들어선다. 실례합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린다. 규진은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아무도 없다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규진은 학교에서부터 질질 끌고 온 낡은 삼선 슬리퍼를 가지런히 벗는다. 단의 슬리퍼는 들쭉날쭉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규진은 손을 씻고 단은 냉장고부터 열었다. 김단, 손 씻어. 규진이 턱으로 화장실을 가리킨다. 단은 주방세제를 대충 제 손에 덜어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단은 방금 꺼낸 사과를 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닦곤 잘라서 그릇에 내놓는다. 너 사과 껍질 째로 먹어? 엉, 원래는 걍 베어먹어. 김단답다. 규진도 다시 껍질을 깎아 먹기는 귀찮은지 사과를 껍질 째로 입에 넣는다.
단이 소파 아래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목을 이리저리 굴렸다. 규진은 단의 방 어느 구석에서 찾은 일기더미와 사진첩을 가져온다. 나 이거 봐도 돼? 고리로 연결된 유치한 무늬의 노트들이 규진의 손에서 흔들거린다. 단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리모컨을 내려놓는다. 규진은 사진첩을, 단은 저의 일기장을 우선 둘러봤다. 규진은 사진첩을 보다가 단의 일기장 더미를 쳐다본다. 근데 너 어릴 때 일기 존나 열심히 썼다. 초3 담임이 안 쓰면 손바닥 때렸거든. 초4 되자 마자 방학 때 빼곤 안 쓴 듯. 난 초딩 땐 안 썼는데 지금은 꼬박꼬박 써. 일기 맨날 쓴다고? 어. 어떻게 그러냐. 습관 돼서 별로 안 귀찮아. 규진은 어깨를 으쓱거린다. 나도 다시 일기 써볼까? 엉, 쓰니까 좋더라. 오키, 그럼 다이어리부터 사야지. 야, 집에 굴러다니는 거 먼저 써. 아. 단은 소리없이 저가 사기만 하고 남겨둔 다이어리의 수를 세고 있다. 규진은 단 아래에 쌓여 있는 일기장 하나를 집어 든다. 대화도 없이 텔레비전 광고 소리만 거실에 웅웅거렸다.
김단, 이게 뭐야? 규진은 한 페이지를 가리키며 단에게 일기장을 민다. 이거 초딩 때 일기 아냐? 갑자기 웬 광흥중? 단은 눈을 한참 끔뻑거린다. 어, 그거. 꿈 얘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규진아. 어? 너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믿을 거야? 들어봐야지 그건. 야박하네. 너처럼 제대로 듣기도 전에 덥석덥석 믿는다고 하면 안돼. 내가 뭘. 너는 아무거나 다 믿잖냐. 내가 언제. 여튼, 뭔데 이거? 규진의 검지 끝에는 ‘광흥중’이 걸려있다. 단은 한참 생각을 정리하느라 침묵 중이다. 규진은 글자만 쳐다보는 단에게 갸웃댄다. 단이 말이 없다니 별일이라고 생각한다. 뭐라고 말해야 되지. 단이 정적을 깬다. 뭐라도 말해봐, 찰떡 같이 알아먹어보게. 그니까, 내 머릿속에 기억이 있는데. 엉. 그게 내가 직접 경험한 건 아냐. 엥? 꼭… 전생을 기억하는 것 같아. 전생? 응, 너무 생생해.
 꿈이 너무 생생해서 기억하는 건 아니고?
근데 이상한 건 비슷한 일을 하면 생각나. 데자뷰처럼. 그네에 타면 치마에 체육복 덧대 입은 내가 밤에 그네 타던 게 기억나고. 교복 맞추는 날엔 교복 입은 내가 친구들이랑 떠들던 게 기억나고. 내 얼굴은 몰라, 거울을 본 적은 없어서…….
 그럼 U아파트가, 진짜 있대? 응. 와. 내 말 믿어? 음… 아마도? 왜 아마도야? 단이 규진의 멱을 살포시 잡고 흔든다. 아니, 흔한 일은 아니니까. 규진은 눈알을 이리저리로 굴린다. 어머님도 아셔? 어릴 때 말해봤는데 엄만 안 믿어. 야 근데… 진짜 생생한 꿈이 여러 날에 거쳐 생각나는 건 아니야? 단은 규진을 쳐다본다. 그래, 꿈은 몇 초만 꿔도 대서사시 같으니까. 그게 천천히 기억나는 거겠지. 단은 탁자에 엎드리며 중얼거린다. 규진은 단의 옆에 바투 앉는다. 못 믿는 거 아냐. 알아, 나도 전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그래, 그게 전생이면… 난 불교 믿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단과 규진은 합장하듯 손을 모은다. 미친놈. 단이 선수를 친다. 저도 해놓곤. 규진은 단을 째려본다.
근데 신기하긴 하다, 그게 뭔진 몰라도. 그래, 거기서 그게 뭔지 모른다는 게 문제야. 그래? 당연하지, 이름을 붙여야 마음이 시원해지잖아. 이름? 엉, 이름을 안 붙여도 되면… 예를 들어서 굳이 기분을 설명할 이유도 없잖아. 기쁘고 슬프고 그런 거? 응, 기분에다가 죄다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하긴 눈물 나는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면 답답하긴 하겠다. 그지? 그래서 나는 10년 넘게 이 기억이 답답해. 단은 규진을 곁눈질하며 중얼거린다. 규진은 양팔을 뻗어서 단의 어깨를 감싸곤 그 위에 저의 이마를 가져다 댄다. 뭐하는 거야. 위로해주는 거. … 고마워.
이름이라는 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사라지는 순간 사람에게 갈증을 쥐여줬다. 어쩌면 모든 건 모두에게 이름을 붙이기 위한 작업일지도 몰랐다. 현상에다가 이름을 붙이고 새에다가 학명이나 별명을 붙이고 기억에 인덱스를 붙이는 일. 어느 순간에도 그것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의 특징을 알아서 그에 지배당하거나 겁먹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단은 저에게만 느껴지는 다른 자의 기억이 언젠가는 신기했고, 언젠가는 당연했고, 언젠가는 두려웠다. 세상에서 가장 유별난 것은 이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무엇이냐는 기초적인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자가 있다. 그게 단이었고 단은 언제나 얼버무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이름 없음을 숨겼다. 가장 무서운 독은 이름 없는 독*. 가장 무서운 것은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기억.
단아, 그럼 여기에 네가 이름 붙이기에 달린 거 아닐까? 근데 나는 정답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 응. 그러면 나도 정답이 있었으면 좋겠다. 감동이네. 저기요, 영혼 좀. 단은 규진의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나 사실 배고픈데. 나도. 단은 곧장 주방으로 가선 콩나물국을 덥힌다. 계란후라이 드실 분. 저요. 규진은 손을 들며 주방으로 걸어온다. 규진이 밥을 푸고, 단은 반찬 두어 개를 꺼낸다. 규진아, 걍 자고 가라. 그래, 잠옷 빌려줘. 그래. 숟가락과 젓가락이 밥그릇과 국그릇 옆에 나란히 놓인다. 전생인지 꿈인지 모를 것은 일단 뒤에 두고 둘은 당장의 허기를 줄이는 데에 매진한다. 밥. 콩나물국. 열무김치. 고추된장무침. 계란후라이. 이름 있는 자와 이름 있는 것들.
 * * *
 단은 이따금씩 어떤 기억들을 마주했다. 규진에게 말하지 않은 기억도 상당수 있었다. 그 기억들은 분명하지 않게 단의 머릿속에 부유했다. 선명하지도 않고 흐릿하게, 데자뷰처럼 기억 속을 돌아다녀서 환생이거나 전생이거나 하는 이야기를 믿기가 어려웠다. 인도의 어떤 아이는 단처럼 가본 적도 없는 곳의 이야기를 늘어놨고, 죽는 순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국의 어떤 사람은 전생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그의 아이들의 이름까지 줄줄 외워 전생의 모친이 맞음을 인증했다고 했다. 하지만 단이 기억하는 것은 파편이었고, 신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광흥중학교와 A시, U아파트. 이 세 가지만이 기억의 그를 추측하는 전부였다.
단은 그러면서도 U아파트, 아니 A시에도 가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단은 굳이 밝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모를 것인 기억을 그저 묻고 싶었다. 언젠가부터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려기 보다는 지우거나 묻는 방법을 택하고 싶었다. 더 쉬운 선택지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고 살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졸업을 유예하고 공시생 신분으로 독서실만 오가는 중에는 새로이 떠오르는 기억도 없었다.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시점부터 신기하게도 어떤 이상한 기억도 단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기억의 끝은 언제나 광흥중이었다. 그래서 단은 이 기억을 묻고 살 수 있었다.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굳이 들추어 기억하지 않으면 성가시게 머리를 휘감지 않았다.
단은 여느 날과 같이 두꺼운 문제집 하나와 아이패드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선다. 다녀오겠습니다. 규진의 성정이 옮은 것인지 아무도 없는 집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엘레베이터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도중에 규진에게 전화가 왔다. 야, 나 드디어 집 간다. 피곤에 절은 목소리가 아침 댓바람부터 울려 퍼진다. 규진은 고3 말 뜬금없이 미디어학과를 가서는 동기들과 독립잡지를 출간한다고 용을 쓰는 중이었다. 그래도 마냥 힘들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인지 목소리가 죽을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래도 팀원이 괜찮아. 조별과제 수준이었음 내가 다 죽여 버렸어……. 규진의 진지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흐른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냐는 잔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공부는 밥심이다, 김단. 밥을 잘 챙겨 먹어야 뭐라도 되는 거야. 엉? 공부는 해도 티가 안 나지만 밥은 먹은 티가 나잖냐. 말씀 자알 알겠다고요 선생님. 단은 횡단보도를 건너며 비꼰다. 단아, 선생님이 다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거라니까. 그리곤 같이 웃는다. 있잖아, 규진아. 나 내일 너네 집에서 잘까? 단은 묻는다. 뭐 그래라, 올 때 뭐 사올 건데?
규진의 말과 동시에 우회전을 해서 들어오던 차가 급정거를 한다. 차는 앞을 대충 보고 바로 우회전을 하려다 단을 칠 뻔했다. 단은 놀라 소리지르며 뒷걸음질 친다. 뻣뻣한 목으로 하얀 중형차와 마주친다. 선팅된 차 안의 차주가 고개를 꾸벅 숙여 미안함을 표한다. 평소대로라면 사과가 그게 다냐고 욕이라도 했을 텐데 단은 여전히 멍하다. 규진은 스마트폰 너머로 계속 단의 이름을 불렀다. 김단, 신고할까? 신고? 무슨 일 있는 거야? 계속 중얼거리는 규진에게 단이 아니라고 답한다.
단은 우선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멍하니 선다. 교통사고의 기억이 머릿속을 왕왕 채운다. 하얀 중형차, 인적 없고 어두운 밤, 도로 위에서. 급정거하는 소리. 둔탁한 소리. 내리지도 사과하지도 않고 옆으로 지나치는 자동차. 그리고 순간 낮아진 시야가 암전하는 기억. 단은 데자뷰처럼 떠오른 오랜만의 기억에 정신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규진은 단의 침묵에다가 여러 질문을 낸다. 소리는 왜 지른 거야? 개깜짝 놀랐잖아. 아니, 아니, 차가. 차? 교통사고 났어? 아니, 부딪히진 않았는데. 부딪히진 않았는데? 그 새끼가 적반하장으로 뭐라고 해? 아니, 아니, 규진아. 어? 너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믿을 거야? 들어봐야지 그건. 오늘도 야박하네. 야, 김단, 설마. 단은 숨을 깊게 들이 마신다. 규진은 길게 숨을 내뱉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기지국을 넘는다.
* 언내추럴 1화
2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고래에게
안녕? 오늘은 또 어디만치를 분주히 헤엄치고 있는지.
날씨가 무덥다. 공기가 머금은 물의 양이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 이제 장마철이 코앞까지 왔거든. 그래도 오늘 낮에 본 하늘이 참 파랗고 맑아서 한참을 올려다보았어. 그런 파랑은 점�� 드물어지는 것 같지. 지나가는 빛깔이 아까워서 그때그때 오랫동안 눈에 담아두려고 해. 그런데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그런 근사한 하늘을 보면서 왜 바다 생각이 불쑥 났을까? 더구나 요즘은 내가 사람인지 아가미 달린 물고기인지 어느 때보다도 바다 생물처럼 사는 와중인데도. 하늘은 어디서든 고개를 들면 있지만 바다는 육지 끝으로 가야 나오니 몸이 멀어 더 자주 그리워하게 되나. 아니면 하늘은 매 순간 변하느라 잠시도 그대로 붙들지 못하는데 바다는 언제나 보아온 그 자리에서 영원히 이어질 파도를 보내고 거두고 또 보내서인가. 문득, 변화무쌍한 것과 영원불변한 것을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이란 참 사람다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드네.
실은 바로 얼마 전에 바다를 짧게나마 만나고 올 수 있었어. 아침은 지나치게 북적였던 밤과 달리 기꺼운 낯으로 넘겨들을 만한 소음과, 볕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무른 햇살과, 선글라스를 벗고 본 세상처럼 모든 사물이 제 색을 내는 풍경으로 가득했어. 상투적인 표현대로 한 폭의 그림이라기엔 미처 정리되지 못한 지난밤의 흔적들이 모래 위 잡동사니로 남아있고 오롯이 바다만 담긴 사진 한 장 찍을라치면 자꾸만 프레임 밖에서 쏙 튀어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과히 그렇지도 않았지.
돌이켜보니 나는 그 무한한 물웅덩이 앞에 서면 늘 그랬다. 무어라고 표현해야 내가 보고 느낀 감각이 시 한 편처럼 근사해질까 고민하게 되는 것. 감상을 남기는 일에 집착할 정도로 매사 열의가 넘치지는 못하지만 이게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욕심이구나, 어설프게나마 그런 열정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긴 했어. 바다가 아니라 그걸 보는 나의 눈이 궁금했다니. 얼마나 지나서야 언어로 완성될지 모를 그 막연한 심상이 그리웠다니. 그리운 줄 몰라서 기다리지 않았던 사람을 마주치고 나서야 그 만남을 고대해왔음을 깨닫는 것처럼. 알던 모양과 다르고 상상하던 모양과는 더욱 다른 진짜를 경험하고 나면 뭉뚱그려 붙여둔 조각들이 다 떨어지고 물보라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고요한 원형만이 남아. 비로소 아무 수식어도 필요치 않은 낱낱의 면면을 받아들이고 공연히 머리만 굴리느라 쓴 인상을 펴. 나는 그걸 원했나 봐.
우리는 그래서 바다를 찾고 첨벙 뛰어들어도 보고 멀리 또 깊이 유영하나 봐.
그러니까 고래야. 유일하고 근사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서 줄곧 물가를 맴돌던 나 보라고 숨을 높이 뿜어주어 고마워. 유리병에 담겨 물결을 타고 백사장에 실려 온 편지를 발견한 최초의 수신자가 된 듯한 기분이 어떤지 아마 너도 잘 알겠지. 하지만 귀퉁이 하나 젖지 않고 도착한 초대장을 받아들고 내가 몇 달 만에 그렇게 가뿐하고 신이 났던지는 아마 몰랐겠지. 이제 알게 해주고 나니 마음이 더없이 가볍다.
7월생 문어가.
...
...
안녕? 요즘은 어떤 멋진 고래들과 함께 물결을 가르고 있는지.
물이 찬 숨을 뱉으러 수면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가끔은 그냥 계속 잠영만 하고 싶은 날이 있지 않니? 그런 날에는 숨이 차기 전까지 어떻게 버티는지, 숨이 차면 얼른 밖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당연히 아는 줄 알았던 걸 실은 몰랐다고 말하기는 정말 어렵고 부끄러운 일이네. 그래도 무지와 미지를 발견한 그대로만 두지 않으리라는 다짐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덜 초조해서 다행이다.
글을 쓰는 건, 나로서는 머릿속에서 제자리를 못 찾고 어수선하게 굴러다니는 번잡한 생각 더미를 두 팔 걷어붙이고 치워보겠다는 마음먹음에서 시작되곤 했어. 밀린 설거지나 쓰레기통 비우기처럼 더는 미룰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는 건 다시 말해 미룰 만큼 미룸이 선행했다는 뜻이지. 자발적인 동기일 경우엔 대개 그랬어. 생각난 대로 바로 옮기는 글을 어떻게 썼는지 써보긴 했는지 기억도 안 나. 이러다가 냅다 고막이 멍멍해지도록 잠수를 해버리는데, 그동안 하는 생각이 두 가지가 있어.
나는 글쓰기가 좋아서 하는 사람인데 열렬하게 쓰고 싶은 만큼이나 열렬하게 쓰기 싫은 마음을 그대로 두어도 되는가. 끝을 내지 못하고 서랍 속에 미봉해둔 이야기들이나 날아가는 글씨로 끄적거리듯 쓰인 이야기들을 뒤져보는 건 어릴 적부터 모아둔 편지 꾸러미를 펼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익숙한 향수보다는 미묘한 긴장감이 손끝을 주무르는 기분이야. 제법 잘 썼네, 재밌네, 이런 것도 썼네? 내 손으로 썼으니 재미가 더한 게 당연한 글들을 읽으면서 왜 긴장하는지 이유를 알아. 버리는 글은 아닌데 다시 쓸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생각이 들면 가끔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거든. 갑자기 손이 안 가서 남겨둔 미완은 스스로 용납을 못하면서, 쓰지 않고는 안 되겠다면서, 쓰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밖에 못 한다면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두 번째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에 대한 생각이야. 얼핏 서글프게 읽히는 말이지만 의외로 나한테는 첫 번째 생각을 갈무리하는 나름의 답이 되어서 거의 귀신 쫓는 주문 외듯이 꾸준히 상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 모든 글의 디폴트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을 계속 쓰는 사람은 언제든 뭐든 쓸 수 있다. 이미 다 아는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처음으로 써낸 글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글이었겠지. 누군가 읽기 시작하면서 어서 다음을 보여주고 싶어 손을 재촉했던 순간들은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쓰기를 그만두지 말아야지 마음먹게 만들지만, 그런 순간들보다 더 자주 잊어버렸던 건 오직 나만이 결말을 기다리고 지켜보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일말의 두려움도 실망도 느끼지 않았던 시간이더라. 처음의 불꽃같던 열정이 식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글을 시작하고 이어가고 끝을 맺는 모든 순간들이 열정의 소산임을 기억해.
고래가 만든 둥글고 널따란 고리 안에서 쓰고 생각하며 여러모로 배우고 있어 늘 고맙고 또 즐거운 마음 아낌없이 적어 보았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을 쓰기로 결심한 우리들이 모여 언제나 오래도록 이야기를 기다리고 기대하기를.
9월에도 문어가. 
1 note · View note
7yobian · 4 years
Text
5시 50분의 알람
5시 50분의 알람    르미
올해에 진짜 세상이 망할까?
수하는 책가방을 챙기며 물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흔들어 부정을 표했다. 그런 얘긴 1999년에도 있었는데 안 망했다잖아. 그래도.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나는 책가방에 챙겨야 할 노트만 넣고 일어섰다. 수하는 아직도 책가방을 다 챙기지 못하고 서 있다. 나는 수하가 펼쳐둔 노트들과 필기구를 대충 정리해 대신 수하의 가방에 넣는다. 수하는 원래 공상이 많은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시간이 꽤 길었다. 나는 부추김 없이 수하의 앞 자리에 앉았다.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수하는 곧 공상을 끝내고 책가방을 잠갔다. 다 챙겼어? 응. 근데 진짜 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눈 깜짝할 새에.
수하는 자주 같은 꿈을 꾼다고 했다. 지구가 망하는 꿈이야. 그렇게 덧붙였다. 매번 다르게 망한다면 그게 저의 공상에 뿌리를 둔 개꿈이라고 넘겨버리겠는데, 항상 같은 모습으로 망한다고 했다. 빅뱅을 본 적은 없지만 빅뱅이 눈앞에서 일어났다면 이런 모습으로 이루어졌을 것처럼 갑자기 빛이 튀어 오르더니 그 뒤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그건 지구가 망한 건지 뭐가 망한 건지는 모르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주변이 싹 사라져. 빛 터지고 아무것도 못 봤다며? 아씨, 네가 꿈을 꾸면 알아, 느낌이 그래. 뭐야, 이거 다 뻥이지? 나 이것저것 잘 믿으니까 속이려고. 아니야. 사기꾼. 안 믿으려면 믿지 마라.
수하의 얼굴은 큰 변화가 없어서 거짓말을 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더라도 수하는 반신반의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꿈이니까. 수하가 무의식적으로 계속 생각한 세상의 종말이 꿈에 그냥 나타난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멸망 같은 일이 현실처럼 느껴질 리가 없었다. 손가락을 몇십 개 모아도 셀 수 없는 지구가 보내온 햇수가 당장 올해에 끝난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었다.
수하는 그 이후로 종말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았다. 요즘은 그 꿈 꿔? 물으면 아니, 요즘은 안 나와. 개꿈이었나 봐. 그랬다. 일정한 주기로 꼬박 꿈에 나오던 것이 내게 털어놓은 뒤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사기 칠 레퍼토리 없어서 이러는 거 아냐? 나는 수하의 옆구리를 마구 찌르며 추궁했다. 수하는 푸하하 웃으면서 내가 그런 뻥을 왜 쳐! 그랬다. 그래? 그럼 됐고. 나는 뒤돌아서 수하에게 멀어진다. 수하는 곧 뛰어와서 나를 더 간지럽힌다. 와학 웃는 척을 하다가, 나는 간지럼 안 타지롱. 놀리고 튀었다. 수하는 책가방을 내려두고 막 뛰어왔다. 매년 계주로 뽑히는 수하에게 나는 금세 덜미를 잡혔고, 하는 수 없이 수하의 책가방을 들어주는 벌칙을 받았다. 우리는 학원으로 향하면서 지구라거나 은하계 같이 거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주변이 사라지는 광경이 더이상 꿈에 나오지도 않고, 어떤 자연의 징조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지구 멸망론은 우리에게 음모론 중 하나로 치부되었다.
/
그날도 여느 때처럼 수하와 하교했다. 노을이 지고 있는 풍경 아래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계단 내려가기 대회를 했다. 나는 순전히 운에 달린 이 게임에서 한 번도 제대로 승리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가위바위보에서 내는 패턴이 있나 싶어서 여러 가지로 다시 생각해봤지만 그 전에 냈던 것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수하의 승리였다. 수하는 승리의 브이를 양손으로 내보였다. 승패에 어떤 보상도 손해도 없는 게임에서 우리는 항상 필사적이었다. 학원 가기 전에 삼김 먹자. 나는 터덜터덜 남은 계단을 내려온다.
수학학원 아래의 편의점에서 이것저것을 집었다. 성장기의 고등학생은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았지만 용돈은 한정되어 있었다. 고르고 골라 최적의 선택을 했다. 내 손에는 참치마요와 참치김치가, 수하의 손에는 전주비빔과 소불고기가 들려 있다. 음료는 원 플러스 원을 하는 이프로를 하나씩 나누어 먹기로 했다. 봉투에 서로의 것을 모두 담고 편의점 문을 열었다. 앞사람이 문을 넉넉히 열지 않아 머리를 문에 박을 뻔한 것을 수하가 막았다. 수하는 내가 봉투를 들지 않은 쪽의 손을 잡아 뒤로 끌었다. 나는 깜짝 놀라 수하를 바라봤다. 수학학원 시작 10분 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수하의 눈에 하얀 빛이 튀어 오른다.
나는 벌떡 잠에서 일어난다. 수하의 눈에 튀어 오르는 빛을 생각한다. 빅뱅이 일어난다면 이렇게 일어날 것 같은 모습으로 사라지는 주변부. 수하가 묘사한 꿈에 대해 생각했다. 내 손을 잡았던 수하의 손이 순간 사라져버리는 감촉을 떠올렸다. 뭔지 몰라도 주변이 싹 사라진다던 말. 손바닥을 잼잼하듯 다섯 번 쥐었다 편다.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텔레비전으로 아무 예능이나 틀었다. 이번에 컴백한 아이돌이 춤을 추고 있었다. 다시 꿈에 대해 생각한다. 꿈은 그새 희미해진다. 내게 남은 이미지는 수하의 눈에 튀어 오르는 빛뿐이었다.
/
당장에 수하에게 이 꿈을 이야기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험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학교가 끝나면 간단한 게임도 하지 못하고 수학학원에 가서 문제를 풀거나 자습했다. 수하의 집은 옆 지역으로 조금 멀었으므로 학원이 끝나면 매번 여사님이 수하를 데리러 오셨다. 안녕하세요. 여사님에게 대차게 인사하고 수하에게도 크게 손바닥을 몇 번 휘적이는 사이에 꿈에 대한 것은 휘발되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꿈은 그날 이후로 다시 내게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그렇게 시험을 치르고 여름방학이 됐다.
그 꿈이 다시 내게 떠오르기 시작한 건 수하가 가족들과 블라디보스톡으로 여행을 간 날이었다. 수하는 로밍 서비스를 이용하지도 않았고, 듣기로는 와이파이 도시락 같은 서비스도 신청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수하와 연락할 길은 거의 없었다. 수하가 없는 동안 나는 격일 주기로 같은 꿈을 꿨고, 그 내용은 언제나 같았다. 가위바위보 게임을 필사적으로 해냈고, 게임에서 내가 졌고, 편의점에 가서 같은 삼각김밥과 같은 음료를 골랐다.
이때 매번 꾸는 꿈에서 차이가 있었다면 내가 꿈에서 점점 자각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수하가 없는 동안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간의 흐름을 그렸고, 그 뒤에는 수하가 내는 가위바위보 순서를 복기했고, 지군지 인류인지 내가 사는 이 B시인지는 몰라도 수하와 내가 사라지는 그 시간을 알기 위해 편의점 직원에게 시간을 물었다. 꿈은 기억하기가 어렵고, 기억한다고 해도 그 기억은 곧잘 사라졌기 때문에 이를 모두 알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그리고 수하가 긴 여행에서 돌아왔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꿈을 꿨거든.
그렇게 운을 뗐다. 무슨 꿈? 빛이 번쩍하고 다 사라지는 꿈. 그걸 너도 꿨어? 어, 편의점 앞에서 지군지 뭔지 몰라도 다 사라지는 꿈. 수하와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게 흔한 일인가? 내가 수하에게 물었다. 검색해볼까? 응. 친구랑 같은 꿈. 지구가 멸망하는 꿈. 각자 하나의 키워드를 맡아 검색했다. 친구와 같은 꿈을 꾸는 건 궁합이 좋다는 거다,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계속 똑같은 꿈을 꾸는 건 그 꿈을 계속해서 생각해서다, 뇌가 같은 꿈이라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해몽이 터져 나왔다. 지구가 멸망하는 꿈은 사람들과 논쟁하게 될 꿈이거나 스트레스나 불안이 표출된 거다, 그런 해몽이 나왔다. 어떻게 봐도 우리가 꾼 꿈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냥 내가 불안해서 그랬나? 우연히 같은 꿈을 꾼 건데 괜히 의미부여하고 생각해서. 수하는 어깨를 으쓱인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꿈을 겪는 게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어쩌면 꿈에서 멸망의 실마리를 찾아서 그걸 막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은 몇 번 반복하는 꿈을 단번에 알아채고 그걸 진실로 곧잘 받아들였으니까. 내가 처음에 괜한 의심으로 멸망하는 시간을 물었던 것처럼. 멸망하는 날짜는 넉 달 뒤의 초겨울, 시간은 알람이 울리는 5시 50분. 그런 것을 노트에 적어두었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딘가에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나는 그런 주인공과는 달라서 그 꿈을 절실히 믿거나 예지몽이 아닐까 의심하지 않았다.
있잖아, 만약에 이게 진짜면 어떡하지? 수하가 묻는다. 뭐, 우연이겠지. 근데 이게 진짜면 넌 어떻게 할 건데? 나는 되묻는다. 수하는 에어컨 아래에 누워 배에만 담요를 덮는다. 일단 더우니까, 좀 이따가 생각하자. 너도 누울래? 아니, 난 빈백에 앉을래.
이게 진짜면 우리가 바꿀 수 있을까? 땀을 식힌 수하가 물었다. 글쎄, 우린 그냥 고등학생인데. 그러니까. 수하는 눈을 감고 덧붙인다. 하얀 빛이 어디서 터지는 건지 알면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무릎을 접어 웅크리며 답한다. 글쎄. 수하는 여러 가지를 더 질문하고 혼자 그에 답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더 웅크린다. 근데 이거 우리 같이 꾸는 거면, 꿈에서도 이런 얘길 나눌 수 있을까? 가위바위보도 안 하고, 수학학원도 안 가고. 편의점도 안 가고. 같이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수하가 벌떡 일어나 묻는다. 꿈이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소리야? 실험해볼까? 지금? 응, 여기 누워봐.
나는 네 옆에 눕기 싫은데. 나는 수하에게 멀찍이 떨어지며 말한다. 수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자면 땀 나잖아. 난 소파에서 잘게. 수하는 그게 이유의 다냐며 웃었다. 근데 밤도 아닌데 되나? 모르지. 만약 꿈꾸면 가위바위보 첫 번째 판에서 가위 내자. 굳이 그래야 해? 혹시 모르잖아. 평행세계라서 그런 걸 얘기하면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 행동을 다르게 하는 건 괜찮고? 아, 그런가? 뭐, 그래도 가위 낼게. 그래.
나는 소파 위에서, 수하는 여름 이불을 깐 대나무 장판 위에서 눈을 감았다. 30분을 그렇게 누워있었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지루한 마음에 핸드폰이라도 하기 위해 눈을 뜨니 수하도 핸드폰을 보고 있다. 핸드폰 찾기를 그만두고 수하에게 괜히 말을 붙인다. 야, 잠 안 온다. 나도. 지루해 보이는 영화 아무거나 보다가 잘까? 내가 제안했다.
수하는 말없이 소파 위로 올라온다. 나와 수하는 에어컨 바람이 통하는 집안에서 여름 이불을 다리에만 덮고 아무 VOD나 틀었다. 남자만 줄창 나오는 지루한 영화였다. 와 대박 재미없어. 구려. 우리는 그 영화가 흘러나오는 중간부터 그 영화가 끝난 뒤까지 그것이 왜 구리고 지루하고 별로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우리만의 로튼 토마토 지수를 내어 혹평하고 욕하다가 곧 다른 이야기를 했다. 수하가 본 블라디보스톡의 이야기나 내가 방학 동안 시작한 뜨개질 같은 것들. 너는 무슨, 여름에 뜨개질을 시작하냐. 에어컨 틀고 집에서 뜨개질하면 부자 된 것 같잖아. 음. 그치? 그렇네. 러시아는 시원하지? 응, 선선해. 근데 특산품? 거기서만 먹을 수 있는 거? 그런 게 없어. 곰새우 있잖아. 우리 가족은 이상한 거 먹었나 봐, 개 비렸어.
우리는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튜브를 탐방하고, 노래 모음집을 틀고 구리거나 좋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면 저녁이 왔고, 수하가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됐다. 수하가 집에 가기 전에 대충 컵라면을 두 개 끓여 먹었다. 수하가 진짜 나가야 할 시간이 되면 나도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밖에 더워, 안 나와도 돼. 수하가 그렇게 사양해도 나는 굳이 짐을 챙겼다. 나 너 데려다주러 가는 게 아니라 마운틴듀 사러 가는 거야. 아, 그러시구나. 수하는 눈을 이상하게 뜨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수하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린다. 수하는 엄살을 부리며 웃었다. 현관문을 열면 뜨겁고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에어컨에 익숙해진 몸을 감돌았다. 나간 그 순간은 따뜻하다가 1층으로 나가는 순간부터는 더웠다.
아직 버스가 오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수하를 바깥에 두고 편의점에 혼자 들어갔다. 마운틴듀 두 개와 얼음 컵 두 개를 사서 하나씩을 수하에게 내민다. 오, 이유안. 그러면서 수하는 그걸 받아 가방에 넣는다. 요즘은 음료 들고 타면 내리라고 하더라. 그럼 내 거 나눠 마셔.
우리는 얼음 컵에 음료를 담고 그걸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음료를 다 마시고 나서는 얼음을 와그작 깨 먹었다. 그러다 보면 버스가 금세 신호등 너머에서 기척을 보였다. 나 이제 갈게. 잘가, 너 오늘 밤에 꿈꾸면 가위 내. 아 맞다, 오키. 수하는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찾아 핸드폰에 연결한다. 버스가 도착하고 승차한 수하가 좌석에 앉을 때까지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수하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면 나도 뒤를 돌아 샛길로 향했다. 여름이라 날벌레가 얼굴을 자주 가로막았다. 아직 꿈을 꾸지도 않는데 괜히 가위를 내본다. 답이 오지 않는 가위에 머쓱해 손을 내려놨다.
/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의 꿈은 서로 도킹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의 꿈과는 달리 가위를 냈지만, 수하는 똑같이 보자기를 냈다. 꿈의 가위바위보에서 처음으로 내가 수하를 이겼다. 그 이후론 내용이 똑같았다. 번갈아서 게임 했고, 수하는 계속 나와 하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겼다. 편의점에 가고 같은 것을 사고 빛이 번쩍. 잠에서 깨고 수하에게 메시지를 남기니 저도 가위를 냈는데 내가 똑같은 것을 냈댔다. 연결되지는 않았나 봐. 그럼 진짜 개꿈인가? 모르겠네.
수하와 나는 같은 날 혹은 다른 날에 종종 그 꿈을 다시 꾸었다. 내용은 똑같았다. 가위바위보, 편의점, 빛. 수하는 그 꿈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지식인에서 말한 것처럼 진짜 우리가 이 꿈을 계속 신경 써서 다시 꾸는 건지도 몰라.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의식하고 생각 안 하려고 하면 더 꾸지 않을까? 그렇게 반문했는데 수하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수하의 망각을 돕기 위해서 그 이후로 수하에게 꿈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도 수하도 한 달 정도는 그 꿈을 꾸지 않았다. 한 달 뒤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오직 나뿐이었다.
나는 그 꿈을 되풀이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해보기 시작했다. 소설 주인공처럼 히어로가 되겠다는 사명감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나는 이게 현실이라고 믿지도 않았고 평행세계의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게임 퀘스트처럼 매번 반복되는 뇌 속 가상현실의 저 빛이 무엇인지, 이게 그냥 섬광인지 멸망인지 핵무기인지 대강 알아보자 싶었다. 자각몽을 꾸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 반복되는 꿈의 끝은 이 빛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게임처럼 꿈을 대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거쳐 수하의 가위바위보 순서를 다 외웠다. 다 외운 날에는 수하에게 단 한 판의 승리도 내주지 않고 가위바위보에서 승리했다. 수하는 자신이 나에게 진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발을 쿵쿵 굴렀다. 두 번째로는 학원 아래 편의점이 아닌, 학교 근처의 편의점으로 갔다. 여기에만 나오는 망고빵이 먹고 싶다고 핑계를 댔다. 그래도 같은 시간에 빛이 생길까? 5시 50분의 알람이 울리고, 편의점에서 나가지 않은 순간에 빛이 들이쳤다. 그 직전에 수하가 내 손을 잡았다.
또 다른 꿈들에서는 가위바위보 게임도 하지 않고 무작정 수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었다. 나와 나에게 밀리고 있는 수하는 빛에 가까워지기 위해 걸었다. 수학학원 땡땡이치자. 갑자기? 응, 갈 데가 있어. 어딘데? 번개 치는 곳. 이렇게 화창한데 번개 치는 데가 어딨어. 따라와 봐. 걸어도 자전거를 타도 택시를 타고 향해도 빛은 여전히 멀었다. 5시 50분의 알람. 같은 시간에 빛이 들이쳤다.
다른 꿈에서는 반대로 빛에서 멀어지려고 애썼다. 수하를 또 끌고 가선 걷고 자전거를 타고 택시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광역버스를 탔다. 그때마다 수하는 자전거를 세우기 위해서든 택시가 흔들려서든 걷다가 넘어질 뻔해서든 번개 같은 빛이 튀어 오르기 전에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놀라서 수하를 쳐다봤다. 빛은 수하의 눈을 통해서 내게 들어왔다. 나는 알 수 없는 간격으로 여러 번 꿈을 꾸는 동안에 단 한 번도 수하의 눈이 아닌 스스로의 눈으로 빛을 쳐다본 적이 없었다. 수하의 눈은 미상의 빛을 보는 창문이었고 나는 손과 손으로 수하와 연결되어 있다. 수하의 손을 만지는 감각이 흐려졌다. 나는 또 일어난다.
그 꿈에서 일어나면 괜히 감각이 묘했다. 수하가 매번 손을 잡고, 그 감각이 흐려졌다. 손을 잡는 감각이 사라지는 게 이렇게 불안한 일인가? 싶었다. 이후론 수하의 손목을 잡을 일이 있으면 괜히 더 세게 잡기도 했다. 수하는 그럴 때마다 의문을 담아 그 손을 쳐다봤다. 얼마 정도 동안은 계속 자주 손 근처를 잡고 세게 잡고 수하의 존재를 확인했다. 수하는 언제나 거기 있었고 누군가 밤중에 휴대폰 플래시를 켜도 수하의 손은 사라지지 않았다.
꿈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한 이후부터는 관심이 자연히 식었다. 수하의 손이 사라지는 감촉을 현실의 감각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불안도 점차 줄어들었고, 그와 동시에 꿈의 빈도가 줄었다. 아예 꿈을 꾸지 않는 날이 그 꿈을 꾸는 날보다 훨씬 잦아졌다. 꿈을 꾸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꿈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메모장에 이것저것 적어둔 것을 봐도 소설을 보는 느낌이었다. 초반을 제외하고는 꿈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 번이나 꿈을 꿨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났다. 빛이 번쩍. 손이 사라지던 감촉. 그 두 가지의 공감각도 사라져갔다.
/
교복 자켓 위에 얇은 겉옷까지 껴입고 집을 나섰다. 내가 엘레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수하는 동 앞에서 늦다, 늦어! 라며 잔소리했다. 수하는 일주일 전에 옆 지역에서 B시로 이사를 왔다. 나는 사과의 의미로 수하에게 빨대를 꼽은 야쿠르트를 내밀었고, 수하는 그걸 받아든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대략 15분 정도였다. 밀려있는 수행평가와 각종 숙제에 대해 한참 욕하다 보면 금방 학교 앞이었다.
어스름한 새벽, 학교 앞 신호등에는 신호를 기다리는 차가 너다섯 대 정도 서 있었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퍼런 새벽을 밝힌다. 수하는 그걸 멍하니 쳐다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우리 그런 꿈 꿨었는데, 기억나?
수하가 운을 뗐다. 그리곤 다시 생각해도 진짜 신기해, 덧붙였다.
무슨 꿈?
하얀 빛 터지면서 멸망 비슷한 거 하는 꿈.
아, 맞다.
그거 진짜 뭐였을까? 평행세계?
평행세계는 무슨. 그냥 개꿈이지.
곧이어 신호등이 켜지고 수하와 ���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우리는 곧장 학교로 들어가 계단을 오른다. 나는 1반이었고 수하는 8반이었다. 우리는 복도 끝과 끝 반이라서 중앙 계단 앞에서 인사를 하고 반으로 갈라져 걸었다. 바깥은 그새 아침이 와서 퍼런 빛이 사라진 뒤였다.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는다. 오늘 날짜가, 날짜가, 11월 9일. 나는 날짜를 노트 위쪽에다가 적고 그 옆에 국어라고 덧붙였다. 헐 이유안 벌써 공부해? 유나가 노트를 들여다 보며 묻는다. 아니 걍 기분 내는 거야. 나는 하품하며 답했다.
학교가 끝나면 수하와 평소처럼 가위바위보 게임을 했다. 승패에 어떤 것도 걸려 있지 않았는데 우리는 (특히 내가) 한 판 한 판에 필사적이었다. 나는 수하에게 두 판정도 지다가 이후부터는 수하를 죄다 이겼다. 미쳤다. 나 이제 가위바위보 잘하는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자랑했다. 승리의 브이 표시를 수하의 얼굴에다가 가져다 댄다. 수하는 자신이 가위바위보에서 진 게 분한지 땅바닥에 발을 쿵쿵 굴렀다. 학원 가기 전에 삼김 먹자. 수하는 남은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온다.
우리는 평소대로 학원 아래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나는 참치마요와 참치김치, 수하는 소불고기와 전주비빔을 골랐다. 음료는 원플러스원을 하는 이프로를 골랐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나는 시간을 다시 확인한다. 11월 9일 5시 45분. 어딘가로 멀리 가기에도 가까이 가기에도 늦은 시간이었다. 가위바위보와 편의점과 빛. 나는 시간의 흐름을 기억해낸다. 아르바이트생에게 몇 시예요? 묻는다. 수하는 핸드폰이 있는데 왜 묻느냐며 속삭였다. 5시 47분이요. 편의점의 2분 빠른 시계. 그날과 같았다.
나는 수하를 쳐다본다. 내가 집은 삼김을 다 내려놓고 햄버거를 들었다. 이프로도 내려놓고 마운틴 듀 두 개를 집어든다. 너 왜 그래? 수하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대답도 못하고 급하게 계산을 마치니 50분까지는 2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어떡하지? 나는 이것이 꿈일 확률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의 꿈이 어쩌다 도킹되어서 자각하지 못하고 같은 꿈을 꿨던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수하야. 수하야. 우리의 꿈은 우연이었을 거야. 꿈은 잇따라 하는 여러 상상에 겹쳐 오염되고 왜곡되고는 하니까. 우리가 집은 삼각김밥의 종류는 내 기억의 오류일 거야. 내가 네게 한 번도 이길 수 없었던 가위바위보를 오늘 내리 이긴 것도 행운일 뿐이야.
문을 열고 알람이 울렸을 때 내 앞에 빛이 켜질지 켜지지 않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의 꿈이 우연히 도킹되었는지도 모르고 꿈이 개꿈이거나 평행세계의 일이었을지도 모르고 그저 착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먼저 수하의 손을 잡는다. 수하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수하의 창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앞을 바라본다. 손으로 연결된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수하의 손을 아주 꽉 붙든다. 편의점의 유리문을 연다. 5시 50분의 알람이 울린다.
3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teabag 3
“우리 2반, 오늘도 공부 많이 했어?”
“쌤! 셤 끝나면 아이스크림 사주는 거 진짜죠.”
“3일 동안 맨날 사줘요?”
[지영아 나 오늘 학원보충땜시 바로 가야댐ㅠㅠ열라 뛰어서ㅠㅠㅠ]
“이것들 좀 보게, 말을 돌리네. 내일 얼마나 잘 하는지 보자고.”
“맛없는 거 사오지 마요!”
[ㅋㅋㅋ갠차나 별로 할것도 없으~ 먼저 가]
“딴 건 몰라도 수학은 잘 해야 돼. 알지? 쌤 존심 지켜줘라~”
“얘들아, 우리 꼴등만 하지 말자. 쌤 존심을 위해.”
[땡큐ㅠㅠㅠ낼 맛있는거 사줄게 머 조아함?]  
“2반이 수학 1등 아니면 아이스크림이고 뭐고 포상 없음이야.”
“와, 갑자기 말 바꾸는 거 봐!”
“조용~ 이제 집 가서 공부해야지. 당번은 열 맞춰놓고 나와라. 내일 보자!”
[걍 뚱바 하나? 낼 봐~~~]
번호 순으로 두 명씩 돌아가는 당번은 조회 전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쉬는 시간마다 칠판을 닦고 지우개를 털고 종례 후 책상을 정돈하거나 문단속을 하는 등 잡다한 일거리들을 맡는다. 기말고사 하루 전 보충수업을 들으러 제일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간 다음 번호 친구 대신 오늘은 지영 혼자 파한 교실에 남았다. 종례가 늦는 다른 반 친구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복도 창에 기대 서있고, 빈 교실에는 지영이 시험 대형으로 책상들을 하나씩 떼어놓으며 격자 사이를 오갔다.
대걸레가 밀고 쓸며 지나간 자국이 덜 마른 물기를 입고 오후의 볕을 받아 희미하게 반들거렸다. 문자로 보낸 ‘별로 할 것도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기에 지영은 일부러 느긋하게 빈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여유를 부렸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나가는 학생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복도에서 웅성이거나 소곤대는 목소리들을 흘리듯 듣기도 하며 슬리퍼 걸친 발을 끄덕끄덕 흔들었다. 끽- 앉은 자리서 일어나려다 옆에 붙은 책상이 같이 밀린 모양인지 위에 올려져있던 누군가의 가방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아직 안 간 애가 또 있었나? 주위를 돌아보며 가방을 들어 올려 조심히 제자리에 올려두었더니, 어라, 여기는 내 뒷자리.
희은이 자리다. 지영은 그걸 알아차리자마자 한 발짝 떨어져서 한 번 더 주변을 살폈다. 사실 희은이 전학 오고부터 그는 줄곧 이랬다. 뭔가 잘못을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몰라서 제 발만 저리는 사람마냥. 아마도 희은이 제 뒷자리로 온 뒤로 자꾸만 바람에 먼지에 실려 왔다 흩어지는 이름 모를 냄새를 모른 척 넘기지 못하고 반응했던 것이 발단이지 않을까. 그래, 바로 이 냄새 말이야...
“어. 티백이다.”
가방이 떨어졌던 자리에 하얀 네모 모양의 무언가가 덩그러니 놓여있기에 가방에서 빠져나온 지우개인 줄 알고 지영이 손을 뻗어 집어든 것은 지우개가 아니라 티백이었다. 이게 어디서 튀어나왔지? 전혀 낯선 사물은 아니지만 이 장소에서 일상적으로 보던 사물도 아닌지라 그는 누가 봐도 티백이 맞는 물건을 들고 진짜 티백이 맞는지 얼마간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감상적이게도 무슨 동화책에 나올 법한 차의 요정이 흘리고 간 소지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차 냄새 나네...”
음? 그러고 보니 익숙하네. 엥? 진짜 이 냄새 맞는데. 어라, 그러면.
“앉아서 뭐 해?”
지영은 튕기듯이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었던 모양인지 희은이 축축한 손을 교복 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교실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지영의 구부린 등을 보며 말을 걸었던 시선이 급하게 핀 무릎과 함께 올라가 그 손에 들린 티백에서 멈추었다.
그 때 백희은의 촘촘한 눈썹 아래 깜빡 감았다 뜬 눈에 스친 것은 뭐랄까. 지영의 콧등에 닿았다 사라지던 냄새만큼이나 빠르게 증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추적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혹감. 그리고 호기심. 어색하고 사소해서 다음으로 미뤄왔던 질문을 지금 꺼내리라는 직감. ‘언제, 어떻게 물어볼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 오늘이 될 줄은 둘 다 정말로 몰랐겠지만.
“미안. 근데 이거 가방에서 떨어진 거야, 내가 꺼낸 게 아니고. 아. 가방은 내가 실수로 떨어뜨린 거 맞아. 미안.”
“아냐, 괜찮아. 별 것도 아닌데 미안하긴.”
그러게. 지영은 자기가 말해놓고 왜 미안한지 정확히 몰랐다. 녹차 티백이 어떻게 하면 중학생의 엄청난 비밀이나 약점이 될 수 있을까. 진짜 요정이 아닌 이상. 요정일 리가 없는 희은은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물기 없는 손바닥을 계속 닦아내고, 마찬가지인 지영도 뭔가를 들춘 사람처럼 마음이 초조해져서 하던 일을 잊어버렸다.
“저기,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한테서 나는 것 같은 냄새가 있거든. 혹시 네가 알고 있으면... 뭐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예전부터.”
“나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
“좋은 냄새야! 진짜로. 실은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희은은 곧 가방 지퍼를 잠그고 어깨에 맨 가방끈을 양손으로 당겨 잡고 지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앞으로 지영의 손 안에 잠시 머물렀던 티백이 척 내밀어진다.
“이 냄새였나 봐. 아까 알았어.”
지영은 희은이 집에 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아 조금 서둘러 말을 마쳤다. 모든 의문이 풀렸으므로 저를 더는 불편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길 전하고 싶었다. 웬일이니, 내 후각이 그렇게 예민한지는 나도 오늘 처음 알았다니까. 그저 오해만 안 샀으면 했다. 그 애에게서 뭔가 불쾌한 냄새가 났던 게 아니라, 그냥 근처에 있으면 맡아지는 냄새가 착각이 아니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라고. 희은은 티백을 받아들지 않고 말했다.
“사실 나도 물어보려고 했었어. 네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궁금해서.”
‘지영이 네가 하도 킁킁대서 모른 척할 수가 없더라고.’ 이런 말은 한 적 없다. 희은이 그렇게 덧붙이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이런 가정을 멋대로 해놓고 안심하는 자신이 좀 치사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티백을 그냥 제 주머니에 집어넣기로 했다.
“너 녹차 되게 좋아하나 봐.”
“아. 별로 그런 건 아닌데...”
“차지! 우리 반 드디어 끝났어. 진심 반 바꾸고 싶다. 지겨워~”
말이 너무 많은 담임 때문에 매번 종례가 가장 늦게 끝난다는 3반 학생들이 잔뜩 지친 얼굴로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오기 시작하면서 복도가 소란스럽게 붐볐다.
“오늘 당번? 도와줄까?”
“아냐. 다 했어. 그리고 나 오늘은 병원 가는 날.”
“아, 맞네. 그럼 이따 문자할게. 내일 시험 잘 봐!”
차례로 얼굴을 내보이는 친구들에게 손을 잔뜩 흔들어주고 나서 지영은 마침내 창문을 닫고 잠근다. 소등을 하고 나와 문을 잠근 후 마지막 순서로 열쇠를 복도 쪽 창틀에 쏙 끼워 넣으면 끝난다. 뒤를 돌자 희은이 아직 가지 않고 지영이 하는 양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는지 흥미로운 거라도 본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당번 일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아직 내 차례가 안 돌아와서 몰랐거든.”
“그래? 별 거 없어. 둘이 같이 하니까 나눠서 해도 되고.”
두 층을 내려가면서 대화는 조금씩 살을 붙이듯 이어졌다. 그나마 오늘 마주치지 않았다면 시험이 끝나고 자리를 바꾸면서 멀어져 여름방학이 시작할 때까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영은 오늘처럼 친구들을 먼저 보낸 날이면 이런 장면을 자주 상상하곤 했었다. 같은 반 친구와 학교 밖으로 나가는 과정을 공유하는 2학년 2반 차지영을. 꼭 지금과 같이 나란히 걷는 그림을.
“물어봐도 되나. 병원은 네가 아파서 다니는 거야?”
“병원? 아아. 아니, 우리 할머니가 입원하셔서. 일주일에 한 번 병문안 가고 있어.”
“할머니랑 같이 살아?”
“응. 태어날 때부터. 나는 거의 할머니가 키웠지.”
실내화를 넣고 운동화를 꺼내 신는 동안 나누는 이야기까지 그린 듯이 이어졌다. 지영은 대개 질문을 먼저 던지는 희은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다음에는 내가 먼저 인사하고 시시콜콜한 얘깃거리들을 꺼내야겠다. 원래 어느 지역에서 살다가 왔다고 했더라? 가족은 몇 명이야, 이런 건 실례인가. 강아지나 고양이 키우는지 물어볼까. 맞다. 제일 먼저 우리 반에서 누구랑 제일 친하냐고 물어보자. 음. 너무 속보이나.
“아까 교실에서 네가 뭐라고 말하다가 끊기지 않았나?”
“어떤 얘기?”
“내가 너 녹차 되게 좋아하는가 보다고 했어. 티백 갖고 다니는 거 보면.”
지영은 최근 발이 조금 자랐는지 부쩍 꼭 죄는 운동화 뒤축을 대충 밟고 걷다가 불편함을 못 이기고 멈춰 서서 발을 어떻게든 욱여넣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허리를 숙여 낮아진 시야로 두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착시가 일었다. 운동장 모래에 가둔 열기가 아주 천천히 식어간다는 건, 여름방학이 정말로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 별로 안 좋아해. 아니. 안 좋아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렇구나...”
운동화 앞코를 쿡쿡 박으며 허리를 피고 보니 희은이 지영보다 키가 약간 더 컸다. 그리고 가리지 않은 이마 위로 슬슬 따가워진 햇볕이 내리쬐어도 굳이 손차양을 대지 않고 대신 살짝 인상을 썼다. 지영이 그를 보며 실없는 부러움에 빠질 때쯤, 희은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번호 찍어줄래?
지영은 이상하게 시험을 앞두고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을 하며 냉큼 폰을 받아들었다. 졸다가 들켰던 조례시간에 했던 버릇대로 입술을 말아 미소를 반쯤 숨기며 번호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런 지영을 보며 여태 알던 것보다 훨씬 맑은 낯으로 마주 웃던 희은은 그 날 저녁 그에게 첫 문자를 보냈다.
[시험 다 끝나면 나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2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발송된 기억
발송된 기억    르미
   연아 안녕. 나 경아야. 언제나 편지의 시작은 어색한 것 같아. 어제까지 안녕하고 인사하고 놀고 게임 하고 웃었던 사이에서도 편지로 만나는 건 유독 간지러워. 처음 고양이를 만나 그 혓바닥의 까끌함을 느꼈을 때처럼. 같은 인사이고 같은 혓바닥인데도 느낌이 다른 거야. 싫은 건 아니고, 이걸 어떻게 대해야 할지 흠칫하게 돼. 이것도 곧 익숙해지겠지. 많은 인사를 종이로 건네고 답을 받는 시간 동안 말이야. 앞으로는 자주 편지를 쓰고 우리를 기록해보려고. 일기는 분명 소소하게 시작된 것인데 나한테는 곧 거창해져서 일상을 담지 못하고 거대한 일들만 담게 돼.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게 되고. 그렇지만 편지는 이미 발송해버린 것이라서 지울 수 없잖아. 좀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내 기억을 네게 위탁하는 거야. 가끔 나를 대신 기억하고 웃으면서 나를 이야기해주라. 이거 부담 주는 거 맞아.
연아 너와 저번에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어. 너는 평소에도 생각이 많아서 화제가 휙휙 바뀌는 동안에도 네 생각을 곧잘 정리해서 내게 나눠주잖아. 반대로 나는 공상은 많은데 온갖 데에 떠버린 생각을 잘 정리하지 못해서 바로 대화하지 못하게 돼. 정보의 홍수에 걸맞지 않은 인간이지. 그래서 나는 너랑 대화하고 방에 들어오면 뒤늦게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해. 그래야 생각을 정리해서 말로 꺼낼 수 있어. 네가 말한 나의 신중함은 나의 부족한 점에서 비롯된 거야. 누군가는 내게 자주 뒷북친다고 말하더라.
어쨌든 그때 얘기했던 도미노 이론 말이야. 하나가 잘 되면 잇달아 잘 되고 하나가 잘못되면 잇달아 잘못된다는 믿음. 누군가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 신념도 어쩌면 과도하게 긍정적인지 모른다고 말했었지. 현실에서는 첫 단추를 잘 끼운다고 해도 뒤 단추를 잘 끼운다는 보장이 없는데,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뒤의 단추도 거의 제대로 끼울 수 없게 되는 거라고. 결국엔 지금의 실패가 이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내가 앞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이 실패의 연장선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아닌지를 생각하게 돼.
너는 그 실패의 기억이 너를 가끔 묶는다고 했잖아. 그게 너의 속에 결함처럼 남아있는 것 같다고. 그렇지만 내 눈의 너는 항상 그 실패를 보고 아플 정도로 씹어내서 삼키는 사람이었어. 네가 소화할 수 없는 실패나 우울은 그것이 너무 비대해서였겠지. 누구나 한계치가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건 네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는 거야. 유당불내증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소화할 수 없는 물질이나 기억이 있다는 거지. 아니면 글루텐처럼 소화가 잘 안 되거나 오래 걸리는 것들도 있을 거야.
실패와 관련해서 집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요즘은 다양한 패션의 시대잖아. 내가 어쩌다 패션 유튜브를 봤는데 요즘은 일부러 단추를 어긋나게 채워 입기도 하더라.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입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내가 잘못 끼운 단추도 내가 의도한 대로 해석해서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리고 사실 옷은 너무 많잖아. 요즘은 심지어 패스트패션이라고, 환경에 도움이 안 되는 산업이 되었다고 욕을 먹기도 하고. 물론 환경에는 패스트패션이 좋지 않은 거지만 내 실패에 대해서는 패스트패션을 추구해보는 게 어떤가 싶었어. 단추를 잘못 끼워도 나의 의도대로 해석해보고, 잘못 끼운 게 영 이상하면 다른 옷을 찾아 입어보는 거야.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나의 실패를 실패로 남지 않게 하는 거야. 나는 분명 실패했지만 그게 나의 영원의 실패는 아닌 거야. 우리도 그럴 거야. 우리는 어딘가에서 실패하겠지만 그게 우리의 평생은 아니겠지. 그게 나와 너의 결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리를 영원히 얽지는 않을 거야.
이제 나는 가끔 큰 실패나 결함이 생기면 과감하게 리폼하거나 버려보려고. 물론 어렵겠지, 나 패션 감각이 완전 꽝이잖아. 그래도 해보려고. 나의 것과 너의 것을 합쳐도 보고. 잘라도 보고, 카라를 덧대보고, 단추를 여러 개 달아보고, 그것도 안 되면 다른 옷을 찾아볼 거야. 나는 그렇게 우리가 그것들을 입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어.
이런 말들을 네게 바로바로 이야기하고 너와 핑퐁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 내게 예지 능력이 있어서 너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뭐 예지 능력이 없으니까 너와의 대화가 더욱 의미 있는 거겠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네가 상상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서로가 말하고 싸우고 웃고 우는 중이니까.
첫 번째 편지라서 그런지 너무 딱딱하고 뒤죽박죽인 것 같아. 편지 쓰는 연습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해보지 못해서인가 봐. 글 쓰는 것도 습관이라던데 습관을 좀 들여봐야겠어. 과하게 진지한 편지를 받아줘서 고마워. 본가에서 얼른 출발할게. 주말에 보자. 내가 자켓의 단추를 잘못 끼우고 가도 웃으면 안 돼.
   언젠가는 패피가 될 수 있겠지?
경아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아 안녕. 나 경아. 사실 나 저번 편지를 보고 네가 웃거나 진지하다고 놀릴 줄 알고 잔뜩 쫄아 있었어. 물론 네가 누군가의 진심을 우스워할 사람은 아니지만, 저번 편지는 좀 심했잖아. 분명 종이에 편지를 썼는데 뚝딱뚝딱 목각 소리가 나더라고. 네가 내 앞에서 편지를 뜯으려고 들 때는 마음의 레고가 잔뜩 쏟아지는 것 같았어. 네가 내가 쓴 문장을 하나하나 낭독했다면 나는 그 레고를 다 맨발로 밟고 울었을지도 몰라.
너는 지금쯤 주은 언니랑 경유지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나 사실 조금은 부러웠어. 유럽에 가서 맛있는 걸 먹거나 돌아다니는 것보다도 여행을 친언니랑 간다는 게. 고등학생 때 너는 외동인 나를 부러워했잖아. 언니가 있어 봤자 싸우기만 한다고. 먹는 거로 싸우고 생활패턴이 달라서 싸우고 집안일로 싸우고. 친구를 데려오는 일도 멋대로 하지 못한다고. 나는 그때도 네가 언니와 여러 가지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부러워했는데. 너는 언니와 싸우면서도 영화를 자주 같이 보러 가고 둘이서 외식하고 친구처럼 지냈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언니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네가 언니와 티격태격하는 친구처럼 지내는 게 부러웠던 것 같아. 역시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해 잔뜩 궁금해하고 일반화하고 바라게 되나 봐. 연아 너는 아직도 외동이 부러워? 나는 여전히 네가 부러워.
너는 지금 유럽에 있고 네 숙소는 매번 바뀔 테니까 나는 그동안 여러 장의 편지를 써놓을 거야. 기왕이면 네가 간 각 나라의 엽서에다가 답장을 써줬으면 좋겠다. 나 진심이야. 웃으면서 넘길 생각하지 마.
여행을 간 동안 유럽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고, 납작 복숭아를 사 먹고, 네가 좋아하는 빈티지 필름 카메라를 잔뜩 구경하고 왔으면 좋겠다. 나는 너의 평안과 일상을 기도하고 있을게.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뭣도 아니지만 여러 신에다가 내 바람을 이야기해볼게. 너와 언니에게 교통 지연도 차별도 맛없는 음식도 없기를.
   필름 인화하면 꼭 자랑해줘,
경아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아, 좋은 오후! 나 경아야. 이렇게 편지 앞에 내 이름을 밝히는 게 반복되니까 괜히 생략해도 될 것처럼 느껴져. 그래도 내 이름을 꼭꼭 써다가 붙여야 다른 편지와 뒤섞이지 않겠지? 편지는 그 순간에도 물론 의미 있지만 아주 먼 훗날에 상자에 뒤섞인 것을 다시 볼 때 의미가 더 크잖아. 나도 가끔 중고등학교 때 애들이 써준 롤링페이퍼나 편지를 다시 보거든. 솔직히 그때만 썼던 유행어나 그때라서 쓸 수 있었던 날 것의 애정표현을 보면 웃기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해. 편지는 시절을 포착해서 담아두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귀여운 편지를 발견하면 종일 웃기고 좋더라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연아 유럽에서 돌아오면 신발장에서 다섯 걸음을 걷고 왼쪽으로 돌아 열 걸음을 더 걸어. 그러면 오른쪽에 네 옷을 담아두는 장롱이 보일 거야. 장롱의 네 번째 서랍을 열고 찢어진 청바지를 들어서 그 밑을 보렴. 거기에 네가 좋아하는 그림 작가의 포스터를 넣어뒀어. 네 방 빈 벽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왔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너는 그분의 그림 모두를 사랑하니까 아마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해.
어제는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그리고 오랜만에 싸웠어. 뭐 크게 싸운 건 아닌데. 연아 나는 엄마를 습관처럼 사랑하고 있어. 나는 이게 너무 오래된 습관이라, 아마 평생 지울 수 없을 거라고 여겼어. 근데 엄마랑 떨어져 사는 5년간 습관이 어느 정도 사라졌나 봐. 엄마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돼. 엄마가 가진 생각이나 미련 같은 것들. 내게 투영해서 바라고 있는 도 넘은 기대 같은 것들. 그런 게 하나씩 보이고 명확해져.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아예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아마 평생 나는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 이건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진 숙명인 것 같기도 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사랑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게 됐어. 습관적 사랑은 습기 같은 게 아닐까 하고. 비가 오면 그 순간은 옷이랑 몸이 다 젖잖아. 근데 비가 평생 오는 곳은 없으니까, 결국엔 젖은 몸이나 옷은 마르게 될 거야. 나는 엄마 옆에 서서, 젖은 수건을 방 안에 매달고 있어. 특별히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내 옷이 눅눅하게 남아서 내가 그걸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게 하는 거야. 눅눅한 옷은 사람을 괜히 신경 쓰이게 하잖아. 옷에 어떤 냄새가 나는지 자주 맡게 되고. 원래대로라면 비가 그치고 언젠가는 맑아져서 하늘이 개고 건조해질 텐데. 그게 계절의 숙명인 건데. 나는 억지로 가습기를 틀고 젖은 수건을 걸고 방에 물을 뿌리고 있어. 습관적으로 엄마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비단 엄마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옷이 말라야 하는 것 같아. 옷이 더이상 눅눅하지 않고 다 말랐는데도 내가 그걸 신경 쓴다는 게 진짜 관심이고 사랑인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마음이 메말랐다거나 사람이 건조하다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져. 마음이 축축하고 사람이 눅눅해지면 사랑은 금방 곪고 곰팡이 피는데. 곰팡이는 금세 전이되어서 다른 사랑도 쓰지 못하게 만드는데. 나는 사막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그래서 거실에 제습제를 하나 놔뒀어. 물먹는 하마 말이야. 여름이기도 하고. 가을이나 겨울에는 포장지를 뜯지 않은 제습제를 놔두려고. 연아 우리는 서로를 건조하게 사랑해보자. 누군가에겐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말이야.
나는 이제 밥을 먹을 거야. 오늘은 귀찮아도 든든히 챙겨 먹고 싶어서 닭고기를 우유랑 카레에 재우고 양념을 만들고 채소를 썰었어. 뭐 만드는 것 같아?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까 내가 답할게. 닭갈비야. 내일은 남은 닭갈비로 볶음밥을 해 먹으려고. 네가 없으니까 닭갈비가 왕창 남아서 볶음밥을 두 번 해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닭갈비 맛있겠지?
경아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아 안녕. 나 경아야. 내일이면 네가 유럽에서, 정확히 말하면 네덜란드에서 돌아오는 날이야. 너는 미피 세상이라면서 여러 사진을 보내줬지. 네덜란드의 특산품은 풍차와 튤립과 미피인 걸까? 그렇다면 한국의 특산품은 뭘까? 찍어다가 정말 많다고 자랑할 수 있는 건 뭘까? 나는 그게 아몬드랑 김 같아. 여러 가지 맛 아몬드랑 김이 명동에 한가득 진열되어 있더라. 네가 한국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뭐야? 나는 네 답이 열무국수나 냉면일 거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질래.
한국은 완전 찜통이야. 그래도 조금은 더 선선한 곳에서 찜기로 이동하는 네 심정에 대해서 생각해.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네가 덥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네가 얼른 한국에 도착했으면 좋겠어. 이중적이지.
이때까지 메시지로는 전하지 못한 것들을 편지에도 마음에도 머리에도 가득 저장해뒀어. 나는 성정이 느리니까 아주 천천히 이야기해볼게. 그러다가 용량이 가득 차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을지도 몰라. 그래도 언젠가는 다 이야기할 수 있겠지? 우리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내일 네가 먹을 수 있도록 열무김치랑 낙지 젓갈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뒀어. 내일은 순두부찌개를 넉넉히 끓여서 남겨두고 갈게. 일하러 가야 해서 너를 마중하거나 같이 점심을 먹을 수는 없겠지만 저녁은 같이 먹자. 양식 먹으러 가자고는 안 할게. 메시지로 양식 먹자고 한 장난의 답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웃겼어. 그 장난으로 너한테서 들을 일년치 욕을 다 들은 것 같아.
나는 자기 전에 조금씩 글을 써보고 있어. 연이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생긴 습관이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적는다는 건 언제나 어려워. 모든 세계관을 촘촘히 짠 뒤에도 글을 쓰는 건 여전히 힘들어. 나의 시선이 그에 대한 연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야. 내 치졸한 마음이 나를 그보다 상위에 두고 그를 동정해버리면 안 되니까. 나는 내 궁색한 마음을 다듬고 줄이는 중이야. 언젠가 좋은 글을 쓰게 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언제는 글도 써지지 않고 인물을 보는 내 시선도 옹졸해서 글을 그만둘까 싶기도 했어. 그런데 사실 어디에라도 있을 사람처럼 그 인물을 꾸며내서 살아 숨 쉬게 하는 게 쉬울 리가 없지.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일도 마찬가지야. 종교가 탄탄해지는데도 수천 년이 걸렸는데 뭐. 지구가 태어난지 몇억 년이 지났는데도 평등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내가 며칠 만에 신처럼 모든 것을 꾸미고 직조하고 만들어내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언젠가 내 글이 부끄럽지 않을 때 즈음에 네게 내 글을 보여줄게. 지금 당장 글을 보여준다고 해도 너는 나를 비웃지 않을 테지만, 나의 열등한 마음이 네 이야기를 꼬아 들을 것 같거든. 언젠가는 네 글도 보고 싶다. 네가 그리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인지, 네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 시각과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
연아, 나는 이제 자야겠어. 내일 일찍 일어나서 찌개를 끓여야 하니까. 찌개를 끓인 김에 나도 아침을 챙겨 먹고 가려고. 내가 유럽에서 맛보지 못했던 최고의 한식을 선사해볼게. 주은언니도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내일 집에서 보자. 일 끝나자마자 달려갈게. 언니도 너도 멀미 없이 도착하기를 바라.
   냉동실에 아이스크림도 있어,
경아가.
3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teabag 1
“지영쌤, 사골국 좋아해?”
“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왜요?”
“왜긴. 그거 몇 잔째야?”
누가 들으면 술자리에서 한창 들이키다가 이왕지사 해장까지 하고 집에 들어가려는 회식꾼들의 대화인 줄 알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 막 3시를 넘긴 한낮이고, 이곳은 얼큰하게 벌게진 얼굴들이 연신 건배사를 외치는 포차가 아니라 대체로 부은 얼굴을 한 말없는 사람들이 링거액을 달고 돌아다니는 입원병동이다. 무엇보다도, 지영의 손에 들린 것은 작고 투명한 소주잔이 아니라 아무 무늬 없는 흰색 머그컵이다.
지영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 머그컵을 퍽 싫어했다. ‘걔가 내 컵더러 개업수건 같대.’ 라고 토로했더니 다들 맞네, 그거네, 맞장구쳤다. 동네에 뭐 새로 생기면 무료로 주는 판촉용 생활용품 있잖아. 거기서 아직 문구를 안 집어넣은, 공장에서 막 나온 그런 버전 같이 생겼다니까. 그 때 지영은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네 신장개업한 치킨집에서 받았다고 할 걸. 다시는 얘네랑 돈 주고 산 물건 얘기 안 한다. 그러다보니 이 머그컵은 지영의 집을 떠나 직장으로, 정확히는 그가 근무하는 병동의 간호사 탈의실 내 개인사물함에 자리 잡게 되었다. 협소한 탕비실 겸 휴게실에 두었다가는 주인도 모르는 새 공용이 돼버릴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지영은 자기 물건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사골국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관심 없어도 제 개인용 머그에 담아 마시는 뜨거운 차는 분명히 좋아했다. 흰 컵에 비치는 녹차의 옅은 녹색도 좋고. 물때 안 끼게 잘 씻어 말리면 된다.
“이리 줘. 그거 버려야 퇴근한다. 얼른! 나 퇴근해야 돼.”
“두 잔짼데요. 아깝게.”
“하나도 안 아까워. 한 잔에 한 개 알맞게 만든 걸 왜 계속 우려먹어?”
“수쌤 아직 안 가셨네? 오늘 딸램 생일이라며. 같이 나가요.”
“따님 생일이구나. 축하드려요. 빨리 가셔야겠네.”
“사골은 끓일수록 더 뽀얗게 우러나기라도 하지...”
“그냥 취향인가 보다 해요! 자기가 좋다는데 참견 말고.”
우리 갈게. 지영쌤 수고해~ 네, 안녕히 가세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갈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자 그제야 지영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 뒤로 병동의 오후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분주했다. 몇 번의 콜을 받고 차트를 적고 몇 명의 환자들에게 주사를 놓고 수액을 갈고 드레싱을 확인해주는 동안 해가 내려갔다.
지영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기 전 다시 머그를 들었다. 수쌤이 뺏지 못한 그것 위로 뜨거운 물을 가득 붓고 작은 스푼으로 그것을 꾹꾹 누르다가 찻물을 휘휘 젓다가 하품도 한 번 늘어지게 한다. 퇴근이 임박하니 세 잔째.
이쯤 되면 알겠지. 지영은 녹차 티백 하나를 세 번 우려먹는 버릇이 있다. 머그 손잡이에 티백 줄을 묶고 세 번 다 마실 때까지 빼지 않는다. 동네 슈퍼에서 팔지 않는 비싸고 유명한 차는 티백을 담갔다가 2분이면 빼라고 권장한다던데, 그는 어느 날부터 다이소에서 티스푼을 하나 사서 머그와 세트로 가지고 다니며 티백을 눌러 짜는 용도로 잘 쓰고 있다. 아껴먹으려는 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생일에 친한 동료들로부터 차 선물을 여럿 받았지만 전부 버릇대로 먹어치웠다.
차는 향으로 먹는 음식인데 자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어. 쓰고 떫거나 밍밍한 게 취향이야? 그냥 취향인가 보다 해요. 자기가 좋다는데 참견 말고. 지영은 그런 말들이 의문스러웠다. 취향이 다 뭔지. 설명하기 귀찮고 그럴 필요도 의무도 없을 때 편리한 핑계가 되어주지만 그것이 자신이라는 인간을 풀이하는 하나의 단서로써 타인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어딘가 거북했다. 조금 억울한 기분인가.
딱히 취향이라 부를 만한 기호가 떠오르지 않는다. 애당초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고집할 거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편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 같기도 해. 언젠가 그렇게 말한 지인이 있었는데 무슨 뜻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낮보다 한산한 밤의 병동은 복도로 나와 왔다갔다 걷는 환자들과 교대타임에 인계할 일을 정리하는 간호사들만이 깨어있다. 링거대 바퀴 끄는 소리가 조용히 복도를 울린다. 혀가 데지 않을 만큼 식은 녹차를 한 모금 넘긴 지영은 오늘따라 급하게 몰려오는 잠기운에 멍때리다가 처치실에서 드르륵 카트를 밀고 나온 가영쌤을 보고 얼른 고개를 털었다. 카페인이 잘 안 먹히는 체질인지 뭘 마셔도 잠을 못 쫓는다.
“9시 다 돼가네. 한 번 돌고 올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쫌만 힘내요, 가영쌤.”
교대까지 약 두 시간이 남자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도 슬쩍 여유감이 나는 듯 저마다 기지개를 펴기도 하고 그동안 핸드폰을 들썩거린 연락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잔을 말끔히 비웠다. 그리곤 갑자기 동그란 컵 동굴 속으로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말린 찻잎의 냄새는 이제 거의 나지 않는다. 콧속이 촉촉해지는 감각에 콧잔등을 찡그린 지영은 불현듯 자신이 방금 무언가 반사적인 행동을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흐리고 옅어 곧 아무데도 남지 않고 사라질 이 냄새가 어느 날의 기억과 닿아있는지 알 듯 말 듯 헷갈렸다.
내가 언제부터 녹차 마시길 즐겼지? 티백을 끝장나게 우려먹는 버릇도 분명 어디선가 보고 따라하다 굳은 걸 텐데. 아, 뭐지... 냄새를 쫓으면 가물가물한 기억 끄트머리를 잡아챌 수 있을 것처럼 지영은 끈질기게 머리를 굴렸다.
“저기 트레이 하나 깜빡했네. 지영쌤, 좀 갖다주...어디서 무슨 냄새 나요?”
‘있잖아. 너한테 항상 나는 냄새가 있는데, 왜 나는지 혹시 알아?’
‘나 무슨...냄새 나?’
‘아니, 나쁜 거 아니고. 좋은 냄새야!’
“와... 걔한테서 나던 냄새였지, 참.”
“뭐예요? 뭐 잊어버린 거 있어요?”
“아...아뇨. 딴 생각하다가. 트레이 갖다줄게요. 잠깐만.”
2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낯   르미
    언니, 왜 여자애들은 둔하지를 못할까요?
미이가 침대에 누워 거꾸로 머리를 늘어뜨린다. 은수는 그런 미이의 뒤통수를 밀어 침대 위에 온전히 올려놓는다. 피 쏠려요. 언니, 왜 여자애들은 그럴까요? 바보처럼. 미이씨도 그렇잖아요. 그러니까요, 나도 바보 같아. 여자애들의 세상은 하루라도 잠잠하게 흐르지를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멀리서 보고 다른 사람처럼 보고, 다른 사람의 코멘트에 귀를 기울여요. 그래서 현대 소설가 중에는 여자가 많은 건가? 여자가 더 많아요? 젊은 작가상은 거의 다 여자던데. 아. 여자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통찰력이 좋을 수밖에 없는 거죠. 자신 자체를 너무 많은 각도에서 바라보잖아요.
근데 언니 왜 또 존댓말 써요. 미이씨가 말을 안 놓으니까. 그냥 놔요. 싫어요. 왜요, 우리 같이 산 지도 벌써 두 달째인데. 나는 놨는데 미이씨가 매번 존댓말 썼잖아요. 휴, 알겠어요. 그럼 지금부터 반말 쓸게. 뭐야. 왜요, 반말 써도 뭐라고 그러고. 아니, 진작에 썼으면 됐을 거를 이제야? 은수언니. 그냥 이름 불러요. 응, 은수야. 그래. 내 이름도 불러봐. 왜, 미이야. 어색해. 나도. 지금은 언니랑 은수 두 개 섞어 써도 돼요? 아니 돼? 그래 그럼. 두 달 만에 말을 튼 은수와 미이가 동시에 킥킥 웃는다. 말을 트는 과정도 같이 살게 된 것만큼이나 뜬금없었다.
은수와 미이는 친구의 친구로 서로를 만났다. 학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둘 다 서울에 있어야 했는데, 방을 혼자 구하기엔 금액이 부담스러웠고 학년이 높아 기숙사를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 처지를 알던 친구가 둘을 연결해주게 되면서 둘은 급작스럽게 룸메이트가 됐다. 기본 원룸을 살아도 기본 40은 줬어야 했는데, 룸메이트를 구하니 투룸에 살고도 25씩만 내면 되었다. 보증금을 높이니 월세가 낮아졌고, 그마저도 나눠 내니 부담이 훨씬 줄었다. 그렇다고 해서 룸메가 되는 과정이 아주 순탄하지는 않았다. 은수는 잘 모르는 사람과 산다는 것이 마지막까지 영 미심쩍었다. 친구 윤지가 미이를 칭찬해도 그건 윤지와 잘 맞는 것이지 본인과 잘 맞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당장 한 달에 40을 낼 여력은 없었기 때문에 기숙사에 들어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생각을 비웠다.
미이와 은수는 생각보다 잘 맞았다. 가장 중요한 생활패턴부터 잘 맞았다. 미이와 은수 둘 모두 아침잠이 많았고, 잠을 꽤 깊게 자 웬만한 소리에는 잘 깨지 않았다. 새벽 늦게까지 과제나 레포트를 쓰다가 늦게 잠들어서는 수업 시작 한 시간 전에야 일어났다. 식사 당번인 사람은 그보다 삼십 분 먼저 일어나서 아침을 차렸다. 은수는 대체로 빨간 찌개를, 미이는 뽀얀 국을 끓였다. 은수도 미이도 가리는 음식은 따로 없었기 때문에 각자의 요리를 잘 먹었다. 그게 귀찮은 날에는 근처 콩나물국밥 집에 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각자의 수업으로 흩어졌다.
미이는 은수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항상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요? 조금 있다가 가도 돼요? 바쁘면 안 들어가구요. 미이는 은수와 붙어있기를 좋아하면서도 은수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은수는 혼자 있고 싶은 날에는 미이의 방문을 거절하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날에는 미이를 들였다. 미이는 땅바닥에 자주 드러눕다가, 언젠가 은수가 침대 위로 미이를 끌어올린 다음부터는 은수의 침대에 올라왔다. 미이는 은수의 침대에 올라갈 때마다 언제나 저가 발을 씻었음을 알렸다. 은수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고, 미이는 침대에 엎드려 누워 은수가 앉은 책상에서 하는 것들을 구경한다.
그리곤 아까의 상황이다. 여자들은 왜 둔하지를 못한지 묻고. 급작스럽게 말을 놓았다. 이후 몇 차례 어색한 반말이 오갔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기민할까? 미이는 은수에게 빌린 책을 돌려주며 다시 물었다. 반말로 끝나는 질문이 묘하게 어색했다. 눈치를 많이 보니까. 눈치를 왜 많이 보게 될까? 착한 가족 구성원이고 싶으니까? 난 언제나 못되고 정 없는 여자애였는데.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는데? 나는 내 걸 잘 양보를 안 했으니까. 아니, 양보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노력해서 받은 걸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뿐이야. 우연히 길 한복판에 떨어져 있던 게 아니라 내가 노력한 거였는데. 은수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동생 있다고 했나? 응. 김미은. 내가 걔 엄마였지 뭐. 내 동생은 너무 물러. 저가 노력해서 얻은 거라도 다 양보하고 경쟁을 피해. 가위바위보로 설거지하자고 하면 자기가 한다고 해. 진짜 웃기는 애야. 동생을 많이 좋아해? 뭐 인정하긴 좀 그렇지만, 그렇지? 속죄의 의미도 있구. 내가 진짜 못 해줘서.
미이는 저의 이야기를 자주, 그리고 잘 했다. 그러면서도 미이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아주 단편적인 것이라서 그 깊이까지 알 수는 없었다. 은수가 저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는 편이라면 미이는 그 껍데기까지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책 읽고 생각한 거야? 여자애들이 기민하다는 거. 미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진희가 행복했으면 했는데. 결말이 너무 구리고. 미이는 결말이 다시 생각해도 우스운지 푸하하 웃는다. 은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흔든다. 구리지. 엄청엄청. 미이가 덧붙인다. 과제 많이 남았어? 아니. 오키, 기다려야지. 미이는 은수의 침대에 정자세로 누워서 은수가 과제를 마저 끝낼 때까지 기다린다. 그는 핸드폰에 에어팟을 연결하고 노래를 틀었다.
미이는 새의 선물의 진희와 본인을 생각한다. 미이는 아주 예민했다. 어릴 적에 아주 많은 반항을 하면서 자랐다. 미이의 동생인 미은도 아주 예민했는데 그 발현 성질이 달랐다. 미이는 아주 격렬하게 격문을 품고 터뜨리고 지냈다면 미은은 그 기민함으로 누군가의 비위를 맞췄다. 미이가 가족과 싸우면 그 가족의 분위기를 풀어내는 것은 미은이었다. 미이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힘겨워서 울며 저항할 때에 미은은 죄송합니다, 그랬다. 사실 미이도 미은처럼 굴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을 양보하고 누가 저를 지적하면 그게 뭔지는 몰라도 일단 시인하고 사과하던 때가 있었다. 미이는 사과와 자기검열을 하다못해 아주 문드러진 때부터 어른들에게 자주 반항하고 다녔다. 반대로 미은은 그걸 성인이 될 때까지 수용만 했다. 역설적이게도 타인과 본인의 시선을 수용하면 할수록 미은의 기민함이 강해졌고, 그건 미은을 자주 갉아 먹었다. 미이는 미은에게 하루에 한 번씩 꼭 전화했다. 그의 기민함이 미은을 갉아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진희는 외려 미은에 가까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미은이 기민하기는 하지만 저보다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미은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저 비위 맞추기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어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일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도 일단 미안하다고 굽히고 들어가게 되면 미이의 가족은 자주 그 화를 줄여주었다. 미은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자주 머리를 굽혔다. 그건 미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은은 미이의 화풀이성 분노에도 자주 사과했다. 미이는 그게 미은의 습관이 되었다는 게 슬프고 미안해서 가끔 울었다. 근래의 미은은 미이의 지도 아래에 나쁜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은수가 노트북을 닫는다. 미이는 여전히 노래를 들으며 미은을 생각하고 있다. 미이의 눈에 약간의 눈물이 고여있다. 은수가 미이를 툭툭 치면 미이는 괜히 하품하며 눈물을 닦았다. 은수는 미이의 눈물이 하품 때문이 아님을 알았지만, 굳이 그걸 추궁하지 않았다. 은수는 미이가 저의 공간을 존중해주는 것처럼 미이의 감정 공간을 지켜야 함을 알고 있었다. 무슨 노래 들어? 다린 노래. 노래 하나만 추천해줘. 음, 저 별은 외로움의 얼굴. 은수는 블루투스 스피커에 핸드폰을 연결하고 미이가 추천한 노래를 튼다. 은수가 미이를 흘깃 쳐다보자 미이는 이 노래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미이는 냉장고에서 썰어둔 멜론을 가져와 은수의 앉은 책상 위에 올린다. 이번 멜론 맛있던데. 그렇게 코멘트를 달았다. 은수는 대답 대신 한 입 베어 물고 오, 추임새를 넣었다. 미이는 메마른 은수의 감정 표현이 우스운지 한참을 웃었다. 은수는 요리조리 몸을 흔들며 웃는 미이의 몸을 살짝 민다. 그만 웃지? 옙.
그 부분 좋지 않아? 은수는 말이 줄은 미이를 대신해 이야기를 꺼낸다. 누군가가 나를 어떤 부속의 이름으로 사랑해주기보다는 나 자체로 미운 자체로 사랑해줬으면 좋겠다는 부분. 할머니가 진희를 손녀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진희로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거. 미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도 어릴 때 생각했는데. 특히 엄마가 나를 딸로만 사랑하는 게 싫어서. 그냥 인간으로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떤 책무와 이름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근데 요즘은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도 하고. 엄마한테? 미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엄마랑 많이 멀어졌거든요. 아니, 멀어졌거든. 미은이랑 가까워지고. 지금 우리처럼 미은이도 나한테 언니라고 안 부르고 그냥 친구처럼 지내. 좋겠다, 나도 동생이나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호호, 나는 동생 있는데.
미이와 은수는 멜론을 한 조각 더 집어 먹는다. 은수는 책에 저가 책갈피를 남긴 것들을 하나씩 살피고 미이는 은수의 어깨에 얼굴을 올리고 그걸 구경한다. 나 여기 좋았어. 미이는 은수가 넘기는 책장에 손가락을 댄다. 은수가 자를 대고 밑줄 친 부분이었다. 우리 책 취향이 잘 맞는 것 같아. 밑줄 친 부분 나도 다 좋았거든. 미이는 웃으면서 말한다. 근데 엔딩은 구려. 맞아. 진희는 어딜 봐도 혼자서 잘 살 애인데. 여자애들은 기민하고 천재 같은데 남자 앞에선 바보 연기를 해. 자신을 관조하고 바라볼 줄은 알면서 남자한테는 그렇게 못하지. 맞아, 그러면서 잘 간파하고 있다고 착각을 해. 남자는 다 구린데.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본 모든 남자는 구렸어. 근데 그게 지나고 나서 보일 때도 있잖아. 그치, 여자애들은 바보인 척을 하다가 진짜 바보가 돼, 나도 그랬지만. 근데 뭔가 언니는 안 그랬을 것 같아. 나도 그랬어. 어떻게? 눈물 한 번에 용서해주고 그랬지 뭐. 미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슬픈 낯으로 오는 사람을 쳐내지 못한다면 그냥 호구겠지만 슬픈 낯으로 오는 남자만을 쳐내지 못했다는 것에 관하여. 은수는 말을 뱉고 나서 생각한다. 은수는 무던하게 상처받았다. 겉으로는 무던했어도 많은 여자들의 특성답게 아주 예민해서 상처는 곧이곧대로 받으면서 잘 티를 못 냈다. 상처와 분노가 슬슬 티를 내며 분출될 때에 어이없는 눈물을 마주했다. 우는 모습이 할머니랑 똑 닮았어. 자조하며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은수는 결국 그를 용서했으나 그와 회복되지는 않았다. 은수는 용서를 통해 집 밖으로 나왔다. 용서는 회복이 아니고 다만 나아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은수는 슬픈 낯의 여자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슬픈 낯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지. 미이의 눈물을 보고도 앞서나가거나 뒤처지지 않고 그 감정의 옆에 설 수 있는 법이 무엇인지. 은수는 지금 추궁하지 않음을 택했고, 언젠가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었다.
미이는 미은을 생각하고 은수는 본인과 미이를 생각한다. 미이는 날로 예민해진 마음을 끌어안고 살았던 미은을, 은수는 표피를 이야기하고 자주 슬픈 얼굴을 하는 미이를. 남자를 뒤에 두고 걸어온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슬픈 얼굴의 예민한 여자들이었다. 속에 칼을 갈고 담아와서 저의 몸 안을 자꾸 찔리는 여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몸을 긋는 소녀에서 나오는 엠마와는 다르게. 우리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며 연민하고 사랑하고 삐뚤어지는 방법이 아니라 같은 ���처를 회복하는 방법을 공유하고 그를 치유할 방법을 찾았다.
은수는 미이가 추천한 노래의 볼륨을 약간 키우고 미이에게 멜론 하나를 더 건넨다. 옆구리 모양이 딱 들어맞는 멜론 조각이 하나씩 은수와 미이의 입으로 들어간다. 악. 잘못 혀를 깨문 은수의 머리통을 미이가 안으며 괜찮냐고 묻는다. 은수는 미이가 준 휴지로 눈 근처에 매인 눈물을 닦았다. 괜찮아. 은수는 혀를 괜히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언니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좀 칠칠이 같아. 은수가 웃는다. 맞아. 역시. 미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린다. 이번에는 언니가 추천하는 노래 틀자. 그래. 두구두구두구. 스피커의 노래가 다른 것으로 바뀌고. 닫힌 창문 밖으로는 웃는 낯의 목소리만이 빠져나온다.
2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초면
유은을 알게 된 건 몇 년 되었다. 정확한 햇수는 굳이 손가락을 펴 세보지 않는 이상 외우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애를 만났던 게 가을 학기 즈음이라는 것은 안다. 2학기 개강 2주 차에 갑자기 정해준 팀플의 팀원으로. 그러다가 야식을 자주 같이 먹었고 술도 가끔 같이 마셨다.
유은은 술을 잘 마시기는 했지만 쓴 맛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그 애와 술을 마실 때에는 요구르트 막걸리처럼 술맛이 잘 나지 않는 것을 마셨다. 쓴 게 싫으면 술 말고 음료를 마시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음료수는 안 취하잖아, 유은은 그렇게 말했다.
/
유은은 언제나 기분이 평이해 보였다. 팀원이 한 명 잠적했을 때에도 화를 내기는 냈지만, 진심을 다해 화내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누군가를 싫어하는 일에 힘을 쏟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오래 볼 사이 아니면 화 안 내, 나는.”
유은은 알고 지낸 몇 년 동안 내게 화를 잘 내지 않았는데, 나는 그게 내가 유은을 잘 파악한 덕인지 아니면 내가 그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탓인지는 잘 몰랐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그냥 내가 유은과 퍽 잘 맞는 사이라고 여겼다. 언젠가 유은이 내게 화를 낼 때 나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함께 화를 내야 할까.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습관을 고쳐야 했다. 사안에 따라 다르지 않겠나. 그 사안이 어떤가에 따라서.......
     /
내가 유은의 다른 얼굴을 본 적은 드물었다. 유은의 감정에 기복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기껏해야 유은의 기쁜 얼굴, 무표정, 배고픈 얼굴 이 세 가지 안팎의 얼굴만 볼 수 있었다. 나는 유은의 앞에서 기쁜 티도 내고 우울한 티도 내고 잠수한 팀원에 대한 짜증도 냈었는데 유은은 그런 나를 위로해주거나, 맞장구치거나, 웃어주었다. 통쾌해서 그런가? 네가 대신 욕해주니까 화가 잘 안 나네.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불과 한두 달 전에야 유은에게서 초면(初面)을 봤다. 유은은 눈이 퉁퉁 부어서 어디가 눈이고 볼인지 알 수 없게 울고 있었다. 유은의 집 근처에서, 다르게 말하면 내가 사는 집 근처에서 유은은 친하고 나는 친하지 않은 유은의 같은 과 동기가 유은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향해 가까이 걸어오자 유은은 얼굴을 돌려 나를 봤다. 유은의 친구가 내가 걸어오고 있음을 알려준 것 같았다.
유은은 그 얼굴을 손으로나 옷으로도 가리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유은의 얼굴이 무슨 얼굴인지를 바로 알지 못했다. 처음 보는 얼굴.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얼굴. 울고 있는 얼굴. 결국엔 슬픈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를 걱정하면서도 유은이 울 만한 일들을 머리에 나열하느라 바빴다. 유은은 나의 거의 모든 표정을 봤으니, 나의 곤란함과 혼란함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나만 나의 얼굴을 잔뜩 드러내고 밝히고 살아왔던 것이 난처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유은의 옆에 있는 친구에게 유은은 이런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는 것인지, 화를 내본 적도 있는 것인지 신경 쓰였다. 최악의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유은의 친구 옆에 또 다른 유은의 친구로 앉아서 거스러미를 뜯었다. 자세한 건 듣지 못했지만 가까운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사람인지 동물인지도 모르고 그저 유은의 감정을 죽은 듯이 느끼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부어 있었지만 유은의 얼굴은 점차 건조해졌다. 유은은 코가 막힌 목소리로 너네는 죽지 마라, 나보다 늦게 죽어, 으름장을 놨다.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그저 상황을 환기하기 위한 장난이었다. 나는 그에 대한 답을 내지 않고 입속에 물어 감췄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 같이 일어나서 유은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유은은 다시 원래대로의 말투와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전 감정의 흔적이 목소리나 얼굴에 묻어 있어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유은이 빌라 1층의 현관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간다. 유은의 동기와 나는 그 뒷모습을 본다. 언제나처럼 등은 판판하게 펴져 있다. 그 모습에서 뒤돌면서, 나는 어렵게 그리고 치졸하게 물었다. 유은이, 가끔 저렇게 우나요? 아뇨, 저도 처음 봤어요. 차마 유은이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은 하지 못했다. 내가 고작 이런 것으로 안도한다는 것이 우스웠다.
/    
집에 와서는 유은에게 긴 문자를 보냈다. 네 처음 보는 얼굴에 당황해 아무 위로도 포옹도 해주지 못했다고. 그렇게 적었다가 다 지우고는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길게 길게 보냈다. 나중에 네가 좋아하는 한식집에 가자고도 덧붙였다. 유은은 무한히 웃었다. 그럼에도 내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을 사귀고 친해지고 때때로는 좋아하거나 진심으로 앞날을 함께 기대해주는 일은 나의 이기심과 줄다리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관계에 대해 쿨하지 못했다. 어떤 것들이 반드시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보다 나를 생각해주었으면 할 때도 있었다.
그저 내가 태생이 이기적인 사람이라 사랑도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가 싶었다. 이기적인 마음에서는 이기적인 사랑이 오는가, 좋은 몸에 좋은 영혼이 깃드는 것처럼. 그렇다면 나는 사랑에 젬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구를 사랑하는 일도 애인을 사랑하는 일도 가족을 사랑하는 일도 내게는 죄책감이 이는 일이었다. 나는 어디까지 바랄 수 있고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가. 나는 그걸 잘 몰랐다. 그래서 모든 관계에 조심스럽고 탐욕스러웠다.
유은의 장난과 같은 말을 꼭꼭 입속에 담아 왔다가 이제야 삼킨다. 혼자 방 안에 앉아서 먼저 죽지 말라는 말을 소화했다. 평소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잘 하진 않았다. 물론 우울할 때도 있었고 죽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도 있었으나 실천의 의미로 이야기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홀로 약속을 맺고 나니 정말 죽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내 이기심에 대한 속죄이자 유은의 앞날을 밝히는 일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새삼스레 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홧김에 계좌에 남은 여윳돈을 자유적금에 넣어버렸다. 유은 옆에서 오래 죽지 않고 있으려면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3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멀미
멀미    르미
    민희야. 이건 네가 나와 연락이 잘 닿지 않던 작년 말의 기록이야. 내용이 암울해 보일 수는 있지만,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온종일 쓰기로 했다는 건 내가 지금은 괜찮아졌다는 증거야. 나를 많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즘은 돈을 모아. 주식도 하고. 내가 어떤 이유로든 죽게 되면 이만큼 모은 돈이 다 쓸모없는 거잖아. 나는 자식도 안 낳을 건데. 결혼도 안 할 거고. 그럼 이 돈을 다 쓸 때까지는 살아야겠지. 그리고 요즘은 틈틈이 책상을 치우고 바닥을 쓸고 이불을 털어. 청소를 잘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나아진다는 게, 나는 아주 신기한 일인 것 같아. 작년 말 내 방을 보면 무슨 뜻인지 알 거야. 내가 그때 바닥이라도 열심히 쓸었다면, 배달음식의 잔해를 아래에 가득 담아두지 않았다면 나는 더 빨리 괜찮아졌을 거야.
있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다는 건 남들과 같은 만큼을 하고 싶다는 뜻인 것 같아. 모두가 출발한 자리에서 뒤늦게 출발하면서, 앞에서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내놓은 감상을 따라야만 할 것 같지. 누가 이 영화가 너무 좋았다고 하면 나도 좋아야 할 것 같고, 누가 이 가수의 공연이 환상이었다고 하면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았어. 누군가가 좋다고 한 것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의무감에 눈을 번뜩 열고 두리번거렸어. 나도 그들이 내뱉은 만큼의 감상을 주고 싶어서. 나도 이 영화가 좋았다고, 나도 이 콘서트가 좋았다고 많은 감상을 덜컥 쏟아내고 같은 색으로 섞이고 싶었어. 그런데 그거 아니, 부담감을 가지면 모든 것은 보이지 않아. 외려 좋은 것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그 무엇도 찾아낼 수 없게 만들어. 좋은 것을 찾아내려고 무언가를 한 겹 한 겹 떼어나가면 어느 순간 내가 모르고 살던 기억들이 찾아와서 앞에서 중얼거려. 나는 무방비 상태로 모든 기억을 만나고 잔뜩 울고 싶은 상태가 돼.
내게는 작년이 유독 그런 해였어. 작년 초겨울에는 한 영화를 봤고, 작년 겨울에는 오랫동안 즐겨 듣던 인디 가수의 콘서트에 갔어. 둘 다 내가 사랑하는 모두가 칭찬한 거였어. 그런데 나는 한참을 미뤘거든. 괜찮다고. 나는 영화에 집중을 잘못한다고. 시간이 없다고. 여러 말로 많은 것을 미뤄왔어. 나마저도 그 말에 속아서 정말 그렇다고 믿었어. 근데 사실 나는 무서웠던 것 같아, 좋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사실 감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누군가에게 엄청 웃긴 개그가 나한테는 안 웃길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잔잔한 노래가 누군가에겐 시시할 수도 있잖아. 누군가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프라푸치노를 좋아하는 건데. 나는 근데 그걸 나에게 인정해주기를 어려워해. 나는 모두에게 관대하고 나에게는 야박하지. 근데 나에게 야박하다는 사실이 모두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더라고.
첫 번째로 접한 건 그 영화였어. 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 영화가 좋은 이유 15가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감상을 알려주고 웃고 이해받고 싶어서. 나는 그렇게 눈을 뜬 30분 동안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어. 아, 담담하게 고통을 이야기하는구나. 그런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지. 나는 사실 좋은 점을 찾아내는 30분 동안 지루했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집중도 할 수 없었거든. 옆에 친구가 있어서 겨우 졸지 않았어.
그러다가 나와 마주하는 지점이 생긴 거야. 주인공이 도둑질을 했다가 걸리는 장면이었어. 나는 내가 잊고 있던 내가 생각났어. 내게 꽤 큰 일이었는데도 나는 그걸 쉽게 망각해. 마치 내가 그런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기억 속에는 매일 슈퍼에서 환타를 도둑질하던 내가 있어. 그 수법은 점차 대담해지고 아이스크림으로까지 확대됐지. 근데 그게 안 걸릴 리가 없잖아. 게다가 나는 나가자마자 환타를 따서 마셨거든. 슈퍼 사장님이 나를 쫓아 나와서 나는 한참을 혼났어. 나는 그 모든 짓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어. 나도 알고 있었는데, 그걸 정확히 알려주는 사람은 따로 없었어. 나는 매번 집에서 혼자였고 학교에서도 혼자였으니까. 처음엔 막 변명을 하다가 뒤에서는 시인하고 울면서 죄송하다고 했어. 사장님의 용서와 함께 나의 범죄 행각은 끝났어. 그 이후론 사장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매일 돌아서 집에 갔지. 언젠가 사장님이 바뀌었고 나는 결국 그에게 그 어떤 선물도 보답도 사죄도 주지 못했어. 나는 그때부터 이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어. 그 이후로는 주인공의 모든 행위가 나였어. 우스운 남자애와 내가 사랑한다고 착각하거나, 내가 아주 대담한 신여성이라고 마음속으로 우쭐대거나, 가족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하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울음을 맞닥뜨리고 어안이 벙벙하고 아팠던 나날들이 다 나였어. 그때의 나에게는 의지할 한문 선생님이 없었다는 게 아주 큰 차이였겠지.
그 이후로는 자주 내 과거에 대해 생각했어. 있는지도 몰랐던,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 사람은 왜 모조리 잊지 못하고 마음속에 기억을 감춰두기만 하는 걸까? 휴지통에 넣고 그걸 비워버리기까지 했는데 외부의 복구 프로그램 하나로 다시 그 기억은 돌아오는 걸까? 그렇게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라면 차라리 정말 지워버리는 게 편한데도. 인간의 뇌는 생각보다 뛰어나. 아무리 잊어보려고 해도 어릴 적의 트라우마를 오래오래 기억하잖아. 기억은 나지 않아도 내게는 어떤 것들이 적처럼 느껴질 거야. 그러니까 나는 이상한 부분에서 특출난 뇌를 가지고 나의 과거와 화해해야 해. 그래야 무엇을 적처럼 느끼지 않고 그저 패스해버릴 수 있어. 화해라는 건 악수를 하고 미안해,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단지 그게 나를 찌르지 않을 때까지 기억을 바라보는 거야. 그 속의 나를 동정하지 않고 이해하고 안아주는 거야. 나를 동정하는 순간 나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나는 이걸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어.
두 번째로는 오랫동안 즐겨 듣던 가수의 공연에 간 일이야. 나는 일어나자마자 그 공연을 취소할 궁리를 했어. 그런데 당일 취소는 안 된다는 거야. 돈을 주지 않는다는 거야. 그게 너무 아까워서 그냥 씻고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했어. 내가 정말 좋아하던 노래 하나가 있거든. 그거 하나 듣고 싶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가서 그 자리에 앉아있었어. 뭐 결국 그노래는 셋리스트에 없었지만. 그날 나는 첫 번째 곡에서 혼자 아주 많이 울었어. 기차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의 눈물을 구슬에 꿰는 이야기였어. 한 명은 지나는 풍경을 한 명은 다가올 풍경을 보면서. 나는 내가 운 이유를 아직도 잘 몰라. 다만 내가 운 이후로 내가 나의 욺에 심취해서 내가 그 공연을 마음을 다해 들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 집에 올 때부터는 그게 무척 부끄러웠어.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나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우울함은 왜 역설적이게도 나를 나르시스트로 만드는 걸까? 나를 한없이 동정하고 내게 심취해서, 이 감정을 그 무엇도 나조차도 모르게 만들어. 그때의 나는 나를 그냥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 이게 나를 존중하는 방법처럼 보여. 그 순간에는 말이야. 그걸 나를 좀먹고 있는 것도 모르고. 지금은 나의 자기연민이 그 어떤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오히려 내 우울에 돈을 넣고 바닥을 쓰는 일이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고. 그렇지만 가끔 그 속에 있으면 그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더라고. 나를 연민하지 않아야 타인도 연민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완전히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 같아.
작년 말에는 정신과 더불어 육체도 아팠어. 이틀을 내리 끙끙 앓았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잠에 깨면 불덩이 같은 육체를 붙잡고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있었어.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내 고통에만 집중하는 시간이어서 내겐 더 나았는지도 몰라. 나는 내가 힘들다는 걸 그때야 실감했어. 나는 내 우울이 내 나약함에서 온다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주 마음을 회피해버리거든. 몸이 아프니까 그제야 안 거야, 힘들다는 걸. 몸이 아픈 건 직시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냥 아픈 거잖아. 부정할 수 없이 그냥 몸이 아프고 열이 나고 발이 식는 거니까.
앓는 동안 나는 내 힘듦을 보고 과거를 마주하고 그것과 화해해보기로 결심했던 것 같아. 몸이 서서히 낫는 중에 엄마랑 멀리 멀리 산책하면서 나의 과거를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지 말라고 말했어. 내가 언니에게 맞고 자랐다는 사실을 엄마의 부재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 나한테는 그게 안 좋은 기억이라고. 엄마는 알겠다고 했어. 그게 나의 나아짐의 시작이었어. 이후부터는 일기 같은 글을 많이 썼어. 솔직하게 내가 바라보는 것들에 대해서 마구잡이로 적었어.
내가 나아지고 나와 화해한다는 건 결국 여자들과 화해하는 일인 것 같아. 나는 자주 여자들을 미워했어. 내가 과거부터 여자들에게 깊은 미움을 받아왔기 때문이야. 그건 학창시절의 따돌림으로 나타났고 나는 매일 울었거든. 여자애들에게 욕을 들은 적도 많았고 배신당한 적도 많았어. 그걸 치유해준 것도 나를 받아준 것도 여자들이었는데 나는 남자애들과 노는 게 훨씬 편하고 좋다고 생각했었어. 그러다 보면 남자들의 잘못은 내가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져. 아빠의 일에서도 그랬어. 나는 당연히 아빠의 잘못인데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를 더 미워해왔어. 언니에게 옮은 아빠의 폭력을 미워한 건 뒤늦게부터였어. 여자애들을 미워하는 순간 나는 나도 사랑할 수가 없었어. 내가 싫어하는 속성들을 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사실 그건 남자애들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그게 보였을 리가 없지.
나는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도 다 내가 나아짐에 있는 것이라고 믿어. 내가 차멀미를 해서 중간중간에 잠깐씩 아픈 거겠지. 나와 화해하는 과정이 멀미 같은 거겠지. 언젠가는 괜찮아지는 거야. 잠들고 안고 바라보는 과정에서 나는 익숙해지겠지. 그때는 오히려 머무른 상태에서 멀미를 하게 될 거야. 배를 자주 타는 사람은 육지 멀미를 한다잖아. 오랫동안 수평 에스컬레이터에서 걷다 보면 평범한 땅이 오히려 이상해지는 것처럼.
민희야. 나는 앞으로도 많은 멀미를 할지도 몰라. 가끔은 또 연락이 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겠지. 그렇지만 나를 너무 걱정하진 마. 나 매달 적금도 넣어야 하고 강아지 밥도 줘야 하거든. 주식 가격도 매일 확인해야 하고. 강아지가 뭘 먹지 않게 바닥도 매일 쓸고 닦아야 해. 나는 작은 성취를 해가면서 다시 또 나아짐에 익숙해질 거야. 나는 나를 용서하고 너를 용서하고 여자를 용서하는 중이야. 아직도 그 과정은 무섭고 두렵고 멀미 나고 아픈 일이지만. 무언가를 직시하게 되면 아픈 게 당연한 거겠지. 회피한다는 건 아픔을 피한다는 것이지만 다시 말해 돌파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해. 나는 앞으로 2보 뒷걸음질 친다면, 다시 3보 돌파해보려고 해. 가끔은 그 길에 나랑 같이 걸어주라.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나를 언제나 신경 써주어서 고마워. 사랑해. 몇 년 뒤에도 이런 인사를 네게 꼭 다시 전할게. 곧 만나서 밥 먹자.
2 notes · View notes
7yobian · 4 years
Text
바다의 끝에서
바다의 끝에서     르미
  수영은 바닥에 두유를 뱉는다. 가끔 그렇게 뱉고 싶을 때가 있어. 하하 웃으면서 수영이 말했다. 수영은 담배도 피우질 않으면서 터보 라이터의 버튼을 꾹꾹 누르며 불을 피웠다. 그 불은 어디에도 번지지 않았는데 민수의 눈에 자주 피었다. 민수는 수영의 손가락이 어디를 향하는지 자주 지켜보았다. 초코맛 두유가 땅바닥에 퍼지고, 수영의 손가락이 불을 피우고. 그러다가 수영이 바닥을 가리키면 바닥을 봤다. 미안하네, 내가 개미 앞길을 막았어. 수영이 뱉은 두유를 피해 개미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행이네, 두유 뱉은 거에 안 맞아서. 민수는 개미가 움직이는 걸 잠시 바라본다. 수영은 민수의 어깨에 기대서는 저의 무릎을 몇 번 손가락으로 친다. 속초로 향하는 버스가 20분 남았을 때였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왜인진 몰라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누군가에게 여행을 가자고 제안할 때에도, 그를 준비할 때에도 어떤 마음이든 그 마음이 잔뜩 커져서는 동요된 얼굴을 했다. 동요되고 격앙된 얼굴로 여행을 이야기하고 준비하고 출발했다. 민수와 수영의 근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름 성수기가 다가오고 있고, 바닷가로 향하는 버스는 대체로 놀러 가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었다. 그와 달리 민수와 수영은 아주 담백한 얼굴이었다. 1박을 다녀오는 여행의 짐은 잠옷으로 입을 편한 옷과 로션이 담긴 작은 배낭 하나였다. 숙소에 칫솔 있대? 가서 보고 없으면 사면 되지. 그래. 작은 대화가 오갔다.
여행의 발단도 그들의 표정만큼이나 여상했다. 수영은 민수의 침대에 엎드려 누워서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고, 민수는 가자, 그런 답을 내놨다. 수영의 바람들을 민수에게 내놓으면 민수는 자주 그것을 이루었다. 다시 말해 민수는 수영의 게으른 욕구를 채우는 역役이었다. 민수는 수영이 내팽겨친 여름 이불을 그의 배꼽까지 채워 올려준다. 나 에어비앤비 쿠폰 있어. 그럼 그거로 예약하자. 내가 속초나 강릉으로 알아볼게. 그래. 너도 볼래? 난 네 취향을 믿어. 바다가 보이면 좋겠지? 응. 수영은 엎드려 누웠던 자세를 고쳐 제대로 눕곤 눈을 감는다. 눈 뜨면 일몰 보이는 곳이면 좋겠다. 수영이 중얼거린다. 민수는 수영의 뻗친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한다. 일출은? 너 다섯 시에 일어날 수 있어? 아니. 그러면서 뭘 물어. 그래도. 여전히 수영은 민수의 어깨에 기대 있다. 어깨 아파? 아니. 다리는? 괜찮아, 내가 마실 거 사올까? 너 아파서 도망가는 거지. 아니라니까. 수영은 기댄 어깨에서 얼굴을 떼며 킥킥 웃는다. 민수는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사실 수영도 민수도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누군가 놀러 가자고 하는 말에 그래, 그런 말을 쉽게 내주기는 했지만 새로운 곳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둘 모두가 공유하는 여행의 성격은 여행이 잠시 무언가를 점유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가서 묵는 곳도 발 아래로 첨벙이는 물도 일몰이 일어 누구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하는 시간도 저의 것이 아닌데 그 순간에는 모두 본인의 것 같아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쉽게 소유할 수 없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깔끔하게 정리해둔 숙소에 들어서고 누군가가 차린 식사를 마주하고 밤바다의 물을 첨벙이는 것은 순간의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좋은 여행일수록 더욱 환상 같고 그 시간은 어딘가에 떼다 놓은 남의 것 같았다. 여행은 어째서 현실의 연장이 아니라 도피 같은지. 수영과 민수가 살아가는 현실이 지독해서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둘은 그 감상까지 공유하진 않는다.
사실 실감 안 나. 수영은 일어나 대충 엉덩이를 털었다. 나도. 민수는 맞장구친다. 가면 실감이 나나? 수영은 웃는다. 민수는 어깨를 으쓱인다. 승차장으로 들어서는 버스를 보면서 민수와 수영은 각자 단신으로 우뚝 서 있다. 버스표를 예매한 수영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수영이 두 개의 QR코드를 찍는 동안 민수는 수영의 등에 한 손을 댄다. 우뚝 서 있는 모양에서 층계가 생기고 연결점이 생긴다. 민수는 수영이 올라서는 계단 뒤에서 버티다가 수영이 걸어가기 시작하면 그를 따라갔다. 버스의 좌석이 눈에 보이니 그제야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은 헤드폰을 끼고 민수는 에어팟을 꼈다. 민수가 버튼을 눌러 발판을 올린다. 이거 하나 있다고 버스비가 그렇게까지 비싸지다니. 수영이 중얼거린다. 민수는 웃으면서 발판을 올리려고 이리저리 힘쓰는 수영에게 버튼을 가리킨다. 아. 외마디와 함께 수영은 저의 버튼을 눌러 발판을 올린다. 편하긴 편하네, 수영이 혼자 중얼거린다. 수영은 민수에게 손을 흔들어 잘자, 입 모양으로 말했다. 민수는 웃으면서 너도, 답한다. 아직 출발하지도 않은 버스에서 민수와 수영은 잘 준비를 했다. 어제까지 둘 모두 해야 할 일에 잠을 설쳤기 때문에 곧장 눈을 감았다. 민수는 30분 정도 자다가 깨어나 눈을 떴고, 수영은 곯아 떨어져서는 고개를 뚝뚝 떨어뜨렸다. 민수는 뒤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안전벨트를 풀어 수영의 등받이를 뒤로 기울였다. 뚝뚝 떨어지던 고개가 뒤로 젖히고 입이 벌어진다. 민수는 익숙한 듯 수영의 턱을 위로 올려 입을 닫았다.
민수는 어느덧 고속도로로 진입한 버스의 창가를 바라본다. 빠르게 움직이는 버스 바깥의 풍경을 동영상으로도 찍어두었다. 민수는 이번 여행을 대강 그리면서 다리를 주무른다. 어쩌면 걸을 일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계속 비슷한 곳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기만 할지도 모르고. 민수는 원래 계획을 수도 없이 하는 타입이었으나 어느 기점부터는 수영의 기질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움직였다. 수영이 민수의 계획을 버거워한 것은 아니고, 민수의 몸이 계획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밤 수영은 민수의 다리를 안마하고 민수는 초반에만 가끔 울었다. 수영은 그 울음에 대해 일언도 붙이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자주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민수는 그러자고 답한다. 그런 날들이 수도 없이 스치고 가는 동안 민수는 울지 않게 되었고 이룬 것들이 많아졌다. 계획하지 않는 성향에 성실을 붙이면 완전한 계획 없이도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영과 민수는 그런 면에서 상성이 좋았다. 민수는 다리를 쭉 펴고 허리를 곧게 편다. 수영은 깊은 꿈 속이다.
도착하고 나서는 곧장 유명하다는 횟집에 가서 멍게비빔밥과 전복물회를 시켰다. 어쩌다 보니 숙소 근처에 유명한 횟집이 있어서였다. 둘은 횟집 창가의 2인 식탁에서 보이는 석호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 가게에는 음식을 실은 작은 로봇이 돌아다녔고, 로봇이 식탁 앞에 멈추면 종업원이 걸어와 그것을 식탁에 내려다 주었다. 처음 먹어보는 전복 회는 아주 꼬독거렸고 신기하게도 물회에는 연어회도 들어있었다. 기대했던 물회보다 비빔밥이 나았다. 물회 안의 멍게에서는 바다향이 아주 짙게 나서 민수는 몇 번 뱉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수영과 민수는 생각보다 얼마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렸다. 나 해산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수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린다. 민수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니까. 3만원 어치는 남았네. 그렇게 덧붙인다. 절반은 남긴 채로 자리를 떴다. 수영도 민수도 크게 아까운 기색은 없었다. 돈을 모아둔 카드로 결제하면서 그릇을 싹싹 비운 테이블을 구경한다. 맛있는 집은 맞나 보다. 수영은 구경한다.
잠옷과 로션이 든 가방을 숙소에 가볍게 내려두고는 돗자리를 들고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석호라고 매번 이야기하기는 번거로워서 민수와 수영은 영랑호를 그저 바다라고 불렀다. 파도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민수는 밀려오는 물에 발을 담그는 상상을 한다. 그때 수영은 이미 발목까지 물을 적신 뒤였다. 샌들에 모래가 가득 차서 따가웠고, 파도는 차가웠다. 수영은 그저 그 물이 차가워서 좋았다. 비가 내내 온다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바닷가는 선선하고 태양열은 푸근하다.
민수는 곧바로 수영을 따라오지 않고 저가 들고 온 필름카메라로 수영을 찍었다. 민수가 사진을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수영은 찍히는 데에 어색한 사람이었다. 몇 번 브이를 보이고 나면 고갈되어 뒤를 돌거나 어색해! 외치며 웃어버렸다. 수영의 웃음은 언제나 자연스러워서 포즈를 취한 것보다 와락 웃을 때 사진이 가장 잘 나왔다. 민수는 스트랩을 목에 걸고 수영을 따라 바다로 들어간다. 수영은 민수의 목에 걸린 카메라를 빼 민수를 찍는다. 수영의 사진은 번번이 초점이 나가고 조리개 조절이 잘못되어 사진이 날아갔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추억이 됐다. 수영은 제 사진 실력에 만족한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민수를 찍었다. 민수는 바닷물을 손으로 만지며 이리저리 쳐다본다. 민수가 카메라를 보고 은은하게 웃는다. 수영은 처음으로 사진을 잘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민수의 손에 어깨를 내어준 수영은 기차처럼 바닷물을 활보한다. 민수는 삼부 반바지를 입고 있고 수영은 오부 반바지를 접어 올렸다. 파도는 계속해서 민수와 수영의 다리를 차갑게 건드리고 샌들과 발 사이에는 자갈과 모래가 잔뜩이다. 모래는 털어내도 파도와 함께 다시 쓸려왔기 때문에 그 따가움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민수는 두 손을 수영의 어깨에 올리고 칙칙폭폭 소리를 낸다. 수영은 유치하다며 웃는다. 저녁은 뭐 먹지? 시장에 갈까? 묻는 수영과 눈알을 데룩 굴리는 민수. 민수가 한참 말이 없자 수영이 고개를 뒤로 돌린다. 민수는 수영에게 보이게 다시 눈알을 굴린다. 수영은 그런 민수를 보고 웃다가 수산물 시장에서 오징어 같은 걸 사다가 라면을 끓여 먹자고 제안한다. 민수는 좋다고 대답한다.
기차처럼 모래사장을 빙빙 돌고 있다. 어릴 적 많이 했던 기차 모양을 하고 있으면 서로의 비언어적 표현은 보이지 않았다. 표정이라든지, 눈알을 굴리는 모양이라든지, 입 모양 같은 것들. 한숨이나 웃음 같은 건 들려도 몸짓이나 표정이나 어떤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아서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일러주어야 했다. 앞의 사람은 뒤의 사람의 비언어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되었지만 뒤의 사람은 앞의 사람의 것을 보려면 조금 더 노력해야 했다. 팔 길이만큼의 거리를 극복해 고개를 앞으로 디밀거나 성큼 걸어가야만 했으니까. 수영이 민수의 손을 내리고 뒤를 돈다. 자연스럽게 수영과 민수는 앞과 뒤를 바꾼다. 이제는 민수가 앞이고 수영이 뒤다. 기차는 다시 출발한다. 수영은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고 민수는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랑호에는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바깥에 발을 씻을 수 있는 수돗가 같은 건 없었다. 숙소가 가까웠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따가운 발로 수없이 걸어야만 했을 것이다. 수영과 민수는 절뚝거리며 따가움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우습게 움직였다. 수영은 다리로 O자를 그리며 뒤뚱뒤뚱 걸었고, 민수는 이내 따가움을 피하는 것을 그만두고 평소대로 걸었다. 샌들째로 숙소의 화장실에 들어가서 물장난을 쳤다. 젖은 다리를 씻고 샌들의 물기를 턴다. 샌들을 신발장에 비스듬히 말려두고 아까 제대로 보지 못한 숙소를 구경한다. 부엌과 침실이 큼지막하게 자리한 숙소였다. 가장 먼저는 큼지막한 식탁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영랑호가 보이는 네모난 창이 있었다. 그 앞에는 하얀 침구의 침대가 있고, 더 가까운 쪽에는 라탄 느낌의 소파가 있다.
숙소 한 편에 마련된 마샬 스피커에 블루투스로 핸드폰을 연결하고 인디 밴드의 노래를 튼다. 민수는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스트레칭을 하고, 수영은 그런 민수의 등을 꾹꾹 누른다. 유연하지 못한 민수가 곡소리를 내면 수영은 와락 웃으면서 일어난다. 수영은 곧 민수의 옆에 앉아서 민수가 하는 스트레칭을 따라 한다. 민수가 누우면 수영은 침대 위에 일어나서 민수의 다리를 잡고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도왔다. 그러면서 수영과 민수는 바다를 쳐다본다. 이동식 에어컨에 달린 환풍구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음악 볼륨을 줄이니 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소라고둥 속에 들어온 것 같지 않아? 수영은 묻고 민수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수영과 민수의 신장은 비슷하다. 수영은 키가 비슷한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시선이 비슷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수가 바라보는 것을 수영도 볼 수 있고, 수영이 가리키는 것을 민수도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러니 이렇게 한 명은 누워서 한 명은 누워서 바라보는 풍경은 평소의 시선과는 완전히 다른 구도였다. 수영은 모래사장과 그 옆 건물까지 보이는 풍경을, 민수는 바다의 수평선과 하늘을 봤다. 위에서 보면 바다만 보이진 않네. 수영은 말한다. 나는 바다랑 하늘밖에 안 보이는데. 민수는 눈을 크게 뜨며 답한다. 수영과 민수의 시선을 합치면 창에서 바라볼 수 있는 모든 풍경을 담을 수 있다. 감상이 일상적으로 공유되는 사이에서는 시선의 높이가 달라도 그걸 합하면 되었다. 물리적인 수평과 전적인 수평에 대해 생각한다. 수영은 민수의 옆자리로 풍덩 뛰어든다. 민수와 비슷한 풍경을 바라본다. 수영은 어떤 풍경이든 좋다고 생각한다.
민수와 수영은 잠시 낮잠을 잤다. 이동식 에어컨이 큰 소리를 내며 찬 바람을 뿜었다. 민수는 수영의 배꼽까지 이불을 덮어주곤 눈을 감는다. 한 시간 뒤 수영의 알람이 요란히 울리면 민수가 먼저 일어났다. 수영의 알람을 끄곤 수영의 어깨를 가볍게 친다. 재료 사러 가자. 수영은 느린 새우처럼 천천히 펄떡거리며 잠에서 깨어나려고 한다. 여름의 해는 길어서 5시가 되도록 밝았다. 앉은 민수의 시야에 얼룩진 에메랄드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언제나 그 끝을 예상할 수 없었다. 민수는 바다 위를 계속계속 걸어 어느 국가의 모래사장에 도착하는 상상을 한다. 바다 위를 걸어 어느 육지에 도착한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바다의 끝을 보고 왔습니다, 이야기하는 일일까. 민수는 그렇지 않고 다시 뒤를 돌아볼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일은 끝이 너무 멀게 느껴지고 어쩌면 끝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느 순간 어느 방향으로든 마무리에 닿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며 끝에 당도했다는 사실에 대해 안도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나서는 또 끝없는 바다를 바라볼 것이라고 상상한다. 혹여 다시 같은 육지에 돌아오게 되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같은 육지가 아니고. 도착점이자 다른 출발점이 될 것이다.
민수가 운동을 그만두고 재활을 하는 이 순간도 언젠가는 그럴 것이다. 수영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은 모터보트를 탄 것만 같고. 그래서 기름을 채워야 하는 새로운 퀘스트를 얻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혼자보다는 빠른 속도로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또 새로운 바다로 나아갈 것이라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수영은 겨우 뜬 눈으로 등받이에 등을 대고 앉아서 민수의 시선을 좇아 바다를 바라본다. 숙소 선택 쩔지. 그런 문장을 갈라지는 목소리로 낸다. 민수는 푸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수영의 손에는 생수 하나가 건네진다.
중앙시장에 가서는 대게를 사고 근처 수산물 시장에서는 오징어를 샀다. 걷다 본 어느 가게 앞엔 대게를 사려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시장에는 어느 집이 유명한 집인지 명확히 드러났다. 다른 곳은 사람이 없거나 하나둘뿐인데 블로그나 유튜브 여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가게들 앞에는 기본 열 명 이상이 서 있다. 홍게를 살 생각은 없었는데 줄이 기니 한 번 사보기로 했다. 다수가 기다린다면 보통 이상은 되리라는 것이 둘의 결론이었다. 줄이 길게 이어져 있는 닭강정도 사보려다가, 컵으로는 팔지 않는다는 말에 사지 않고 돌아왔다. 둘 다 배가 크지도 않은데 이미 홍게까지 사버린 마당에 닭강정 한 판을 다 먹을 자신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깔끔한 카페에 잠시 앉아 호지차와 말차를 마셨다. 오징어를 산 탓에 혹시 바다 냄새가 날까 오래 앉아 있지는 않았다. 카페에서 나섰을 때에는 조금씩 해가 지고 있었다.
숙소에 와서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민수는 수영을 찍었다. 수영은 아무 생각 없이 라면을 들이키다가 민수의 필름카메라 소리에 민수를 쳐다본다. 나 사레 걸릴 뻔했어. 수영은 후우 ��을 뱉는다. 민수는 웃는다. 먹어, 안 찍을게. 수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저 면을 먹는다. 수영이 라면을 끓였고, 민수가 그릇 정리와 설거지를 맡았다. 수영은 의자를 끌고 와선 싱크대 옆에 앉아 민수를 지켜본다. 민수의 카메라도 들고 와서 민수의 뒷모습을 찍으려고 노력한다. 찰칵. 지잉. 필름이 감긴다. 민수는 카메라를 보지 않고 마저 설거지를 마무리한다. 수영은 저의 핸드폰으로도 민수를 몇 장 찍는다. 결과물은 어떻게 보아도 잘 찍은 사진이 아니었지만 민수는 수영이 저를 찍는 것을 좋아했다. 저를 찍으려고 이리저리 핸드폰이나 필름카메라를 대는 순간이나 찍은 결과물을 함께 확인하는 순간 모두를. 수영은 번번이 저의 결과물에 실망했지만 민수는 수영이 찍어준 사진으로 프로필 사진을 곧잘 바꿨다.
밤에는 노래를 틀지 않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수영은 씻은 민수의 다리나 발을 주무르고, 민수는 고맙다고 한다. 수영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럼, 고마워야지, 너스레를 떤다. 민수는 감사합니다, 이수영씨. 그런 말을 덧붙인다. 제대로 누워서는 발가락을 당기고 민다. 수영은 민수의 옆에 앉아서 민수의 발과 엇갈리게 발가락을 밀고 당겼다. 너랑은 아무것도 안 해도 안 심심해. 수영은 발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나도. 민수는 수영을 쳐다본다. 나 요즘 스쿼시가 해보고 싶어. 나 다리 괜찮아지면 해보자. 그래. 언제나처럼 수영이 뱉고 민수가 이룬다. 근데 그땐 다른 운동이 하고 싶을지도 몰라. 그럼 다른 운동하면 되지.
밤바다를 나가볼 걸 그랬나? 그러게. 근데 여기 11시 이후로는 엘리베이터 안 된댔어. 내가 널 업고 갈까? 여기 9층인데? 나 천하장사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도 그건 무리야. 그럼 내일 아침 바다를 나가자. 그래. 일어날 수 있겠지? 나 알람 잘 듣잖아. 맞지, 나는 내가 아니라 너를 믿어. 나도 그래. ...
해가 완전히 져 버린 네모난 창에는 바다도 보이지 않는데 파도 소리만 한참이었다. 가끔 강아지가 짖었고, 가끔 술을 마신 행인의 소리가 들렸다. 밤이 되고 노래도 없으니 소리는 아주 크고 예민하게 들렸다. 민수는 눈을 감고 수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을 쳐다본다. 수영은 숙소에 있는 빔프로젝터를 연결해서 영화를 소리 없이 틀어놓는다. 흐릿한 자막이 주인공들 아래에서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민수와 수영은 따뜻한 하얀 침구와 파도 소리와 색감이 아름다운 영화의 순간들을 사용한다. 오컴이 주장했던 것처럼 소유 이전에는 사용이 있어서 어떤 순간에는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었다. 포근하고 널따란 원룸이나 빔프로젝터나 바다로 난 큰 창을 현실에서는 가질 수 없어도 여행에서는 잠시나마 사용할 수 있었다. 이래서 여행을 가나 봐. 수영은 그런 마음을 잠시 가진다. 민수는 가끔씩 눈을 떠서 영상을 보고 수영을 살폈다.
그래도 사람은 사람을 가지거나 사용할 수는 없어서 오감을 이용해서 번번이 사람을 살펴야 했다. 소유한 것들도 관심을 필요로 하지만, 가진다는 것 자체의 안정감은 관심을 매번 주지 않아도 존재했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은 계속 눈을 떠서 살펴야 했고 눈을 감으면 느껴지지 않았다. 가지지 못했더라도 사람을 믿을 수는 있었지만, 그가 거기에 있음은 언제나 믿음에 기대어 있을 뿐 기정사실은 아니었다. 수영은 민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민수의 팔목에 저의 팔목을 붙여 눕는다. 그때부터 민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지 않아도 수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팔목에 붙은 일정한 온도와 파도 소리, 숨소리, 번쩍거리며 바뀌는 영화 장면들. 내가 안 일어나면 아침 바다 혼자 다녀와도 돼. 수영은 작게 속삭인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대신 사진 많이 찍어 와. 그냥 깨울 때 잘 일어나면 안될까? 그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닌데. 그래도. 음, 노력해볼게. 민수는 입꼬리만 올려 웃는다.
눈을 내내 감고 있던 민수보다 수영이 더 빨리 잠에 든다. 민수는 발을 당기고 밀고를 혼자 조금 더 반복하다가 빔프로젝터를 끄고 수영과 저의 몸에 이불을 덮는다. 잘자라는 말 없이도 곤히 자는 수영을 잠깐 쳐다보고. 민수는 침대 옆의 등마저 끈다. 아주 까맣게 방이 덮인다. 정적을 깨는 파도 소리. 수영의 작은 몸부림. 민수는 알람을 맞추고 잠든다. 강아지가 짖는다. 강아지도 잠든 새벽에는 아주 긴 시간 동안 파도 소리가 울렸다. 누구도 깨지 않는 밤이었다.
1 note · View note
7yobian · 4 years
Text
거스러미 2
무슨 이유인지 두 시간 정도 출발이 지연되는 바람에 새벽부터 공항에 가서 수속을 진작 마치고도 한참을 더 기다린 태영이 방금 드디어 비행기에 탔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갑자기 운 나쁘게 기상악화나 비행기 결함으로 아예 운항이 취소되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여행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진을 다 뺐다는 이모의 목소리에서 긴장을 걷어내고 안도감이 자리 잡았음을 소정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핸드폰 너머로는 전송되지 않을 미소를 지으며 프랑스 여행길이 아주 순탄하려고 미리 고생을 하는가보다고, 미신 중에서 제일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라는 액땜 이야기로 열심히 거들었더니 크게 티는 안 내도 내심 안도하는 것 같았다.
“네 덕분에 마음 놓고 간다. 수영이도 고맙다고 전해 달래.”
“안부 전해주세요. 저도 보고 싶다고.”
“참. 에어컨은 이제 되니?”
“네. 아침에 기사가 왔었어요.”
“벌써 가 있었어? 늦잠 자고 문 열면 오라고 하지.”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요. 청소도 좀 하고.”
“쉬엄쉬엄해. 애들은 점심 먹고 나서야 올 테니까.”
‘쉬엄쉬엄하지.’ 아주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임을 안다. 그도 살면서 그 말을 여러 번 건넸을 것이다. 성실한 타인에게 여유를 가져도 된다고 하는 말. 화자에 따라 더러는 공허하고 악의적인 빈말이 되곤 하지만 태영은 소정에게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저,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그러지 못해서. 환기를 위해 열어둔 문이 바람을 타고 쾅 닫히듯 말문이 막힌 기분이었다. 초침 없이 숫자만 바뀌는 통화 시간이 마치 점점 올라가는 심박수처럼 귓가에 째깍거린다. 하는 수없이 또 검지가 엄지를 긁어댄다.
“한가해지니까 심심해서 그런가 봐요. 지금도 쉬고 있는데요, 뭐.”
소정은 조금 서두른 투로 답한 내용이 무난했는지 점검하지 않아도 되었다. 태영이 곧 이륙한다며 끊어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항에 도착하면 또 통화하자고 대답하며 그제야 종료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1 note · View note
7yobian · 4 years
Text
파열음
파열음    르미
유정은 문득 바다가 가고 싶었다. 바다에는 무엇도 없고 모래와 파도와 모래바람이 있었을 것인데도. 바다에 발을 담고 첨벙이고 목까지 물을 채우고 있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유정은 활동적이지 않은 성격이었다. 가끔은 몸에 물을 가득 적시기도 했지만 수영에도 자신이 없고 물이 무서워서 금세 나왔다. 수영을 배우려고. 그런 다짐은 코로나 시대에 파묻혀서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생활 방역으로 시국이 변한 뒤에는 유정의 집 근처 공립 수영장은 오직 그 시에 거주하는 사람만을 받았다. 유정은 아주 찰나의 거리로 그 시의 시민이 아니라 접경 시의 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수영장에 갈 수는 없었다. 사실 가능하더라도 사람들이 탈의실에서 옷을 수도 없이 벗고 입고 침을 뱉고 같은 물을 공유하는 수영장은 어쩐지 무서웠다. 수영장 물엔 약이 들어 있어서 그 물로 감염될 확률이 희박하다는 전문가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유정은 바다 앞 숙소에 묵고 싶었다. 통창 유리 앞에서 철썩이는 바다를 보면서 공상을 하고 누워 있고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숙소에는 유정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기를 바랐다. 혼자 그 통창 앞에서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바다에 소리를 부여하고 눈을 감고 싶었다. 바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째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걸까. 바다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바다의 시원함 때문에? 시원한 곳을 찾으려면 계곡도 있는데 단 한 번도 계곡에는 가고 싶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탁 트이고 끝을 알 수 없는 물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게 아니라면 파도치는 투명한 바다의 거품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감상들은 모두 가정일 뿐이다. 유정은 왜 때마다 바다가 가고 싶은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충 바다를 좋아한다고 둘러댔다.
유정은 하루에 한 번씩 ‘강원도 오션뷰 숙소’ 따위를 포털사이트에 쳐보고 그 후기를 지켜봤다. 어떤 숙소는 오션뷰지만 일부가 건물에 가려져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한쪽 창을 커튼으로 가리고 있었다. 어떤 숙소들은 멋진 통창으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지만, 묵을 수 있는 날짜가 없었다. SNS에서 인기가 많은 숙소랬다. 유정은 숙소 사진과 예약 시스템을 와리가리하다가 이번 달의 일정을 알기가 어렵다는 핑계로 핸드폰을 뒤집는다. 돈도 있었고 시간도 조정할 수 있었지만 바다에는 가기가 어려웠다. 바다는 때마다 가고 싶었고, 때마다 핑계가 생겨났다. 차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핑계는 매년 있었다.
이번 해에는 코로나로 계속 집에만 머물렀다. 유정은 자타공인 집순이였다. 집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바깥에 나가는 순간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런 유정도 오�� 칩거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3개월은 집에만 있어도 즐거웠고, 뒤의 3개월은 답답했다. 유정은 코로나 시대의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선호한다는 것은 반드시 대비가 필요한 일이라고 느낀다. 집을 사랑했던 것은 바깥과의 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깥 자체를 잘 나가지 못하게 되니 그 대비가 옅어져서 바깥이 궁금해졌다. 사람을 만나고 싶기도 했고, 어딘가로 놀러 가고 싶기도 했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여행을 가고 싶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야 다시 집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유정은 핑계를 대면서도 번번이 숙소를 찾았다.
그러다가 한 가지 기억을 찾는다. 유정의 바다에 아주 깊게 자리한 기억. 유정은 중학교 3학년 즈음에 시에서 하는 글쓰기 대회를 나간 적이 있다. 친구와 함께 옆에 앉아서 공통 주제를 받아들고선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주제로는 서너 개 정도가 주어졌고, 유정이 개중에서 택한 것은 ‘다리’였다. 그 키워드 옆에 유정은 사람의 다리 하나와 떨어진 육지를 잇는 다리를 그린다. 아마 어린 유정은 사람의 다리를 가지고 산문을 적었을 것이다. 유정이 시에는 소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과 행에다가 짧고 의미 있고 운율감이 있는 시를 적는 것은 어른 유정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유정은 오죽했을까. 유정은 처음엔 시를 적으려고 노력하다가 정 되지 않자 산문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아마 장려상을 받았다. 같이 갔던 친구는 시로 우수상을 받았다. 교복을 입고 친구와 시립 센터로 가서 상을 받았고, 거기에는 수상자들의 작품이 모인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유정은 그 책을 훑었다. 최우수상과 우수상에 실린 작품은 꼭꼭 읽어봤다. 같이 갔던 친구의 시도 봤다. 그렇지만 어른 유정은 그 시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유정이 기억하는 글은 자신의 글도 아니고, 시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중등부의 한 여자애의 것이었다. 물론 아주 오래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마저도 정확히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의 핵심 주제가 바다였음은 선명하다. 바다의 비읍과 디귿은 파열음이라던 시. 내가 알던 누군가는 바다가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바다는 파열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지. 게다가 바다에서 나오는 파도도 온통 파열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유정은 이처럼 두서없이 조각조각 시의 내용을 기억한다. 유정은 그 시를 읽고 나서 바다와 파도를 번갈아 중얼거렸다. 입속에서 소리가 터진다.
유정은 오랜만에 그 시를 떠올렸고, 다시 시의 전문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수상집은 이사를 오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기억은 좋은 것은 더 좋고 나쁜 것은 더 나쁘게 바꾸어버리기 때문에 어쩌면 그 시는 유정의 기억보다 좋지 않을지도 몰랐다. 유정은 어린 유정처럼 다시 바다와 파도를 번갈아서 중얼거린다. 입속에서 소리가 터진다. 소리가 터지면서 바다와 파도가 흘러나온다. 발음기관이 막혔다가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건 바다의 소리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발아래로 밀려 나오는 파도. 바다의 파열음.
그때는 국어 시간에 한글의 언어 구조를 배우고 있을 때여서 바다를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맞다 이건 파열음이다. 하는 정도의 국어적 감상을 내뱉었더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시가 좋아서 국어적 감상 외에도 많은 감상을 시와 함께 마음에 묻어뒀다. 자신의 글도 친구의 시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와중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애의 시가 떠오르다니. 기억은 지나치게 솔직하다. 어떤 의미로든 마음에 묻어두면 언젠가 그 기억이 지층처럼 떠오른다.
유정은 이제 그 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는 모든 것이 모이고 살아가고 시작되는 곳일 거라고. 태양이 바다의 지평선 너머에서 떠오르고, 시간이 되면 해가 모이는 장소도 바다라고. 상류부터 시작된 강줄기가 중류와 하류를 거쳐서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고 가장 큰 공간이 탄생하는 곳이기도 하다고. 이런 탄생을 위해서는 무언가가 파열되고 깨지는 것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했다. 알을 깨고 태어나는 새처럼. 모든 것은 겉이 깨져야만 태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바다도 파도도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허연 거품도 죄다 파열음인 거라고. 언어로도 깨지고 속으로도 깨져서 온갖 것을 태어나게 한다고.
그렇다면 왜 바다로 많은 것이 모이는 걸까. 파열음인데. 모든 게 파열되어서 이전의 보금자리는 없고 새로운 자리를 찾아서 연결되어야 하는데. 새로운 것은 새로운 집을 필요로 하는 것일 텐데. 유정은 자꾸자꾸 과거로 모이는 자신을 기억한다. 지금도 그랬다. 유정은 집에서 독립도 했고 그때 입었던 옷을 입지 못할 정도로 컸다. 옷을 찢고 집을 찢고 새롭게 나타난 자신에게 계속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유정은 최근에 문득 무서워져서 어린 날의 유정처럼 침대 아래를 살핀 적이 있다. 유정이 아주 어렸을 적에는 악명 높았던 연쇄살인마의 일담이 공포실화처럼 떠돌아다녔다. 그 연쇄살인마가 침대 아래에 숨어있다가 한 명을 죽였다는 얘기였다. 유정은 집에 그 누구도 없고, 자신의 손을 잡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유정은 본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그곳에서 나오고 싶어했지만, 그때만큼은 손을 잡을 누군가가 절실했다. 계속해서 커지려고 하는 의존 욕구가 유정의 마음에 넘실거렸다.
그러니까 많은 것은 깨고 나온 기억과 과거를 자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깨고 나온 곳으로 돌아가서 머물다가 다시 터져 나온다. 성장한 이상, 그곳이 내게는 너무나도 좁거나 이상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과거의 관성이 나를 그리로 데려간다. 과거의 그 집 전체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그 파편이 그리워서 그것만을 가지러 돌아가는 것이다.
이게 아니라면 다시 태어나기 위해 가는 것이다. 깨져 나온 곳이 나를 자꾸 찌르고 흠집을 내기 때문에 그 파편을 치우고 다시 한 번 터져 나오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 과거로 모인다. 과거로 모여서 그 파편을 다 심해의 바닥에 묻어두고 다시 터져 나오기 위해서. 유정은 파편을 가지러 가는 사람이 아니라 적절한 곳에 묻고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란 유정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꾸 유정을 흠집 내는 것들을 좋은 곳에 묻고 이제는 어떻더라도 괜찮은 기억들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는 일. 그런 일이 필요하니까. 유정은 일기를 ���는 버릇을 들이고 있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그 일들을 제대로 묻어두기 위해 기억이 최대한 왜곡하지 않고 적어두는 것이다.
유정은 핑계를 접어두고 바다 앞의 숙소를 예매한다. 바다, 파도, 거품. 그런 것들을 한 자 한 자 터져 나오는 소리에 집중해 내뱉는다. 유정의 단어들이 막혔다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유정도 그랬다. 유정의 과거 파편들을 토해내면서 유정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계속계속. 유정은 바다에 모인 기억들을 양지 바른 모래에 묻어두기로 한다. 어릴 적 바다에서 들고 왔던 커다란 소라고둥 하나를 들고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몇 주 뒤엔 그 소라고둥이 모래사장 한 바닥에 묻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파도에 휩쓸려서 심해로 떨어질 것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상처 내지 못하는 곳으로 가선 멀리서 멀리서 유정의 탈피를 반길 것이다. 얼마 안 가 숙소의 예약 확인 문자가 온다. 유정은 핸드폰을 뒤집는다. 탁. 파열음이 들린다.
1 note · View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