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timeoutath · 3 years
Text
장률 여행기
Tumblr media
2021.10.10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일상의 공간을 떠나 오롯이 나 혼자만의 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 때다. 대개 그런 경우는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찾아온다. 내 삶이 내 생각과 달리 흘러갈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일이 생길 것만 같고,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좋은 생각들이 떠오를 것만 같다.
장률의 영화 '경주'는 세상을 떠난 친한 형의 장례식장에 간 최현(박해일 분)이 문득 그와 함께 차를 마시던 공간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경주로 떠난 여정을 그린다. 그곳에서 최현은 이방인이다. 유부남이지만 마치 늘 혼자였던 사람 같고, 사람들과 섞이지만 동떨어져있는 어떠한 아우라가 있다. 마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죽은 왕들이 묻힌 능이 우뚝 솟아있는 것처럼 이질적이다.
'경주'에 이어 개봉한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역시 술자리에서 불현듯 군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곳으로 떠난 윤영(박해일 분)이 송현(문소리 분)과 함께 여행을 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곳에서 윤영은 자신의 일상과 닮았지만 다른, 꿈속과 같은 현실을 여행한다. 여행을 왔지만 여전히 일상의 끈을 놓지 못한 인물의 상황은 씁쓸한 유머를 자아내게 한다.
또 하나의 영화 '후쿠오카'도 마찬가지다. 소담(박소담 분)의 제안과, 오래전 인연을 끊은 선배 해효(권해요 분)의 목소리로 들리는 환청을 들은 제문(윤제문 분)은 후쿠오카로 갑작스럽게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제문은 긴 시간 동안 자신이 잊지 못했던 사랑을 다시 떠올린다. 여행을 떠나서야 제문은 더욱 명확하게 자신의 상황을 인식한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묻어두고 살았던 슬픔이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장률이 그리는 여행들은 항상 훌쩍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다. 일상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그곳에서도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이방인으로서만 존재하며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장률의 영화는 관객들이 극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마력까지 가졌다. 떠나면 더욱 씁쓸해지지만 그렇기에 한 번 떠나보면 어떨까라고 회유한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나의 일상, 결국 나와 멀어지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렵다. 여행은 결국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만나는 나는 일상에서 보다 더 객관적인 시선에 놓여있다. 그렇기에 여행 뒤에 찾아오는 건 내 주변을 변화시켜야 하겠다라는 생각이 아닌, 나의 일상 속 내가 했던 행동과 생각에 대한 후회다. 여행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든 이유 역시, 후회했던 삶들로 다시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후회했던 삶으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것만으로 여행은 가치를 가진다.
계획하고 떠나는 여행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떠나는 여행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계획을 하고 떠난 여행에서는 그저 계획을 채우려고만 하지, 그 속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에 대해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훌쩍 떠난 곳에서 나는 덩그러니 놓인 연약한 존재다. 우리는 연약해질수록 과거를 떠올린다. 미련일 수도, 집착일 수도, 애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연약해지지 않으면 일상에서 나는 더 미련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의 변화뿐이다.
가끔씩 정말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쉽사리 마음이 서지 않을 때 장률의 영화를 찾는다. 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보폭에 맞춰 걷다 보면 어느새 일상 속 내 모습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지난 장률 영화와의 여행 후 바뀌지 않은 모습도 있지만, 바뀐 모습도 있다. 그렇다면 다음 여행을 기약하면 된다. 이번에는 '경주'를 여행했으니 다음에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를 여행하면서 나와 멀어지면 되는 거다. 그러다 보면 '후쿠오카'처럼 내가 묻고 살았던 것들을 마주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며 이번에도 장률과 함께한 여행을 정리한다. 장률의 다음 여행지는 이번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야나가와'라고 하니, 미리 훌쩍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참, 계획을 세우고 떠나면 안 되는 건데. 바뀌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다시 되새긴다.
(사진) 영화 ‘경주’ 스틸컷
1 note · View note
timeoutath · 3 years
Text
가장 아름다운 이별
Tumblr media
2021.10.04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안녕'이다. 한자로 풀이하자면 '편안 안'에 '편안할 녕'이다. 어떻게든 편안하라는 뜻이다. 특히나 이별과 시작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만나도 안녕, 헤어져도 안녕이다. 그저 '안녕'은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뜻만 남는다.
물론 누군가와 이별을 한다는 건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이 영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나누어진 존재라는 것을 마음속에 되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건 '우리가 만든 하나의 시대'가 저문다는 슬픔이다. 시대를 함께 보내며 우리는 세대가 됐지만, 함께는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나에게 하나의 시대였다. '007' 시리즈에 별 흥미가 없던 내게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거 보면 좋아할걸?'이라는 유혹을 심어주고, 끝내 '봐, 내가 말했지'라는 말을 꺼내며 거들먹거리는 존재였다. 그런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와 이별을 했다. 그의 마지막 코드네임 007 작전, '노 타임 투 다이'를 통해서다.
숀 코너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등의 '007'은 나에게는 '공공칠'로 읽히는 작품들이었다. 발터 PPK를 손에 들고 보드카 마티니를 젓지 않고 흔들어서 마시는 그들은 그야말로 간지나는 '바람둥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공공칠'이 아닌 '더블 오 세븐'(Double O Seven)이었다. 사랑했던 베스퍼(에바 그린)를 잊지 못하는, 그녀의 이름을 딴 마티니만을 마시는 순정파의 남자였다.
사실 '노 타임 투 다이' 속 제임스 본드는 기존 시리즈에서 봐왔던 '더블 오 세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짙어졌고, 탄탄했던 근육질 몸매도 광택을 잃었더라. 항상 윗옷을 벗고 등장했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꾸준하게 상체를 가렸다. 영원한 섹시함을 간직할 것 같았던 그 역시도 세월 앞에서 시들해가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제임스 본드는 이번 작품에서도 열심히 뛰고, 쏘고, 사랑한다. 가장 아팠던 사랑을 떠난 보낸 탓이었을까. 그는 여전히 사랑을 의심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더블 오 세븐'의 숙명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칠흑 같은 공허함이 존재한다. 빠져버리면 못 헤엄쳐 나올 것 같은 깊숙함. 그래서 많은 여성이 제임스 본드에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가.
어쨌든 그런 제임스 본드는 이제 떠났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끝이 났다'라는 의미이니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언제나 그랬듯 'JAMES BOND WILL RETURN'(제임스 본드는 돌아온다).
하지만 한 시대를 보낸다는 건 언제나 마음이 아프다. 그만큼 나의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어벤져스'라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한 페이즈가 끝나던 시점도 그러했고, 20대가 끝이 나고 30대로 접어들면서도 그러했다. 길면 20년, 짧아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는 건 다시 그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과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고백하건대,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보러 갈 때 정장이라도 입고 갈까 생각을 했다. 내게 한 시대를 선물해준 다니엘 크레이그에 대한 헌사를 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맞는 도리였다. 하지만 나는 남들의 시선을 고려하여 강호의 도리를 져버렸다. 그런데도 다니엘 크레이그는 나에게 온화한 미소로 '안녕'을 전했다. 더욱 마음이 씁쓸해졌다.
나는 이렇게 당신에 대한 도리도 지키지 않은 채, 시대에 작별하는데도 그는 편안하라고 웃음을 짓는다. 결국 아름다운 안녕을 하지 못하는 건 나뿐이었던 거다. 언제나 이별 앞에서 찌질해지는 것이 숙명인 것일까. 하지만 그의 미소는 내게 '그건 쿨하지 않아'라고 메시지를 던졌다. 아직도 전 여자친구에게 '자니?'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 해도 다니엘 크레이그의 굿바이 인사를 본다면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본드는 그의 방식대로 안녕을 전한다. 쿨하고, 섹시하며, 결연하다. 그가 베스퍼를 아름답게 마음속에 묻고, 또 다른 사랑에게도 안녕을 고하고, 한 시대에도 작별을 전하듯, 나 역시도 그에게 '아름다운 안녕'의 방법을 배웠다.
지나간 20대의 발목을 붙잡지 않고 이제는 30대의 시작점을 새롭게 시작하려 한다. 지나간 인연들에 매달리지 않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려 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 그것을 추억할 수 있다는 자체로도 그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다니엘 크레이그 표 제임스 본드의 시대는 저물었고, 이제 새로운 제임스 본드의 시대가 올 터다. 세대들이 계속해서 시대를 붙잡으면 꼰대가 되고 미련에만 가득 차 보인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세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여러모로 가장 아름다운 안녕이다. 이제 나의 지나간 시대 속 모든 순간은 모두 편안하기를. 특히 나의 '더블 오 세븐'도 굿바이. 안녕, 다니엘 크레이그. 다가올 새로운 '더블 오 세븐'에게 안녕.
(사진) ‘007 노 타임 투 다이’
1 note · View note
timeoutath · 3 years
Text
사는 것의 의미
Tumblr media
2021.08.22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월간 집'에서는 집에 사는 여자와 집을 사는 남자가 등장했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집을 사는 것'으로만 여겼던 남자는 '집에서 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달으면서 해피엔딩을 맞았다. 아름다운 둘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건 내가 사는 '월세 집'의 초라함과 동시에 언젠가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강북의 내로라하던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되고, 강남 개발이 촉진되면서 강남 아파트가 화두에 오른 때가 있었다. 여전히 지금도 강남 아파트는 부의 상징으로 통하지만, 그때도 계속해서 천정부지로 치솟는 아파트 가격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서초구에 위치한 삼풍아파트도 그중 하나였다. 삼풍아파트 완공 1년 뒤 지어진 삼풍백화점은 6년 만에 무너졌지만, 삼풍아파트는 여전히 원래 자리에 남아 최근 약 38억원의 실거래가에 매매가 됐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의 최근 실거래가는 약 34억원이었다.
34억원, 38억원이라는 돈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통장에 과연 그 정도의 금액이 들어올 수 있을까부터 생각한다. 저 집에 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저 집을 살 수 있을까부터 걱정한다. 청약통장에는 꾸준하게 돈이 들어가고 있다. 허나 과연 당첨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단은 서울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어쨌든 떠밀려 나가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위태로움이 더 현실에 가깝다.
영화 '싱크홀'은 서울 아파트는 아니지만, 빌라에서나마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동원(김성균)이 하루아침에 거대한 구멍 속으로 빌라와 함께 떨어져 버리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집값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싱크홀 속에 빌라가 통째로 빠져버리는 것이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아이러니다.
'내 집'에서 한 번 양보해 전세라도 구해봤자 전쟁이다. 임대주택에 대한 차별의 시선을 견딘다는 건 참으로 혹독한 일임이 틀림없다. 당장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집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 차별을 당한다면 나라도 부끄러움에 땅을 파고 싶을 거다. 그렇게 다 같이 싱크홀에 빠지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보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나는 타이핑을 치는 손가락을 잠시 멈췄다.
결국, 이 글은 아직 집을 사지 못한 사람의 푸념일 뿐이다. 언젠가 집을 산다면 똑같이 임대 아파트 주민을 차별하는 사람이 될까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두려움은 너무 멀리 있다. 당장 나는 언제든 이 글을 쓰고 있는 방에서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이 방을 감싸고 있는 콘크리트 벽은 단단하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너무나 무르다.
하지만 나는 꼬박꼬박 월세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어떻게든 집에 살기 위해 노력한다. 아프리카에서 미어캣이 살아가면서 느낄 감정은 당장 두려움보다는 하루 하루 먹고 살기 위한 절박함일 테다. 반지하에서 살아봤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1층 이하로는 내려가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강하다. 그런 절박함은 매일 아침 침대에 누워있는 내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계약서상으로 내가 사는 집의 전용면적은 75㎡ 중 일부다. 한 층을 네 가구가 나눠 살고 있으니 18㎡ 정도가 오롯이 내가 지내는 곳의 넓이일 터다. 혼자 살기에는 딱 안성맞춤의 넓이다. 청소도 오래 걸리지 않으며, 좁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단 산다. 언제 집을 살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사는 것'(buy)에 목적을 두지 않고 '사는 것'(live)에 의미를 둬야겠다. 사지 못한다고 해서 살지 못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사진) 영화 ‘싱크홀’
0 notes
timeoutath · 3 years
Text
자취방이라는 성(城)
Tumblr media
2021.05.08.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새 9년 차에 접어들었다. 몇몇 기간 동안은 본가에 들어가 산 적도 있었고, 친누나와 함께 자취방을 구해 산 적도 있었지만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4년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생활을 지내왔다. 그 기간 동안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제는 21세기 자취생으로 해야 할 역할을 어엿하게 수행하고 있다.
자취의 첫 출발은 당연히 두렵고 막연하다. 공과금은 어떻게 내야 하며, 어떻게 해야 지출을 최대한 줄이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혼자 사는 삶'에 대한 로망까지 실현해야 하다 보니 통장은 항상 배가 고프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자취, 최대한 나만의 삶을 화려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는 게 당연하다.
나는 통장이 배고프지 않은 삶과 행복한 공간을 꾸미는 것에 대한 고민을 수없이 이어오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그런 과정에서 꽤 좋은 규칙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특별한 멘토가 있었다면 내게 청소의 즐거움을 알려준 허지웅이 있다. 멘토에게 감사함을 전하면서 내 자취 생활의 규칙을 이 글을 통해 소개할 생각이다.
첫 번째, 자취방은 나만의 성(城)이 아니다.
내가 사는 공간이 생겼을 때 중요한 것은 관리다. 월세를 내 거나 전세를 내서 들어온 이 방에서의 결정권은 완전히 내 소유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곳이 '완전한 내 성'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나기 십상이다. 막무가내로 벽지를 뜯어서 페인트칠을 한다거나 옵션으로 있는 가구를 버리거나 등의 행동을 하는 순간 임대인은 당신의 통장에 상당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우리가 임차인으로 있는 한, 성에서 가질 수 있는 권리는 배치, 정비, 정리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 가지 권리를 가지고 최대한 성을 공고하게 만들어야 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두 번째, 성을 정비하자.
성주(城主)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성을 어떻게 나만의 요새로 만들까'하는 구상이다. 다들 자신만의 인테리어 방식이 있을 테니 왈가왈부하지 않고, 바로 요새의 규칙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요새의 사전적인 정의는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방어 시설'이다. 자취방은 힘든 사회생활이 쏘고 있는 화살과 돌들을 피해 도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하지만 도피해 들어온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일단 성 내부의 규칙을 만들자. 필요한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정비하고, 피곤함에 찌들어 방에 들어왔을 때 항상 정돈되어 있는 모습으로 힐링을 얻을 수 있게 하자.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나, 싱크대에 쌓여서 악취를 내풍기고 있는 그릇들을 만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기 싫다면 일상생활에서 빨리빨리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세 번째, 성문을 너무 굳게 닫지 말자.
자취방은 누군가를 항상 초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말 친한 친구만 초대하는 공간이어도 되고, 아니면 적어도 가끔 놀러 오는 친구를 만들어도 된다. 그렇다고 완전히 방문을 열고 생활해서는 안 된다. 자취방이 동네 복덕방이 되는 순간, 성주의 권한이 박탈당함과 동시에 나만의 요새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자기만의 공간에 처박히는 순간, 당신은 우울과 외로움이라는 친구들을 대신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잘 곳이 필요하다는 친구에게 기꺼이 방문을 열고, '어서 오라'라고 말한다면 이 성은 오히려 더욱 탄탄한 요새가 된다. 굳게 닫힌 성문은 무너지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들끓게 한다. 반면 열려 있는 요새는 평화를 상징한다.
물론, 초대한 인물들에게 성에서의 규칙은 지키도록 하게 하자. 그렇지 않으면 주객전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마지막, 규칙을 정하되 적절한 때에 규칙을 배반하자.
언제나 깔끔하게 사는 일이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캉스를 떠난다. 호텔에서는 내가 아무렇게나 어질러도 다음날 누군가가 정리를 해준다. 정리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루 정도는 '내가 주인인데'라는 마음으로 옷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배달음식을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놓고 정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틀은 넘기지 말자. 고삐를 너무 오래 풀어놓으면 그게 삶이 된다. 다시 태초의 야생마로 돌아가 정리 없이 살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영화 '파이트클럽' 속 잭(에드워드 노턴)의 삶을 들여다 보자. 잭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산 이케아 가구와 자신만의 규칙이 가득한 집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가스 폭발로 집이 파괴되고 나서 그는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 만들어 놓은 무질서 속으로 속절없이 빠지게 된다. 잭은 자신의 성이 무너지자 끝없는 파멸로 빠지고 세상의 모든 질서와 규칙을 무너뜨리는 아나키스트가 된다. 우리는 잭과 같은 아나키스트가 될 수 없다. 규칙은 우리 삶을 굉장히 안전하고 공고하게 만들며 갑작스러운 파괴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기틀이 된다. 그런 것을 두고 '보험'이라고 말하지 않나.
가장 중요한 건 '혼자'의 공간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너무 자기만을 생각해서 성벽을 높게 쌓아 올리면 그 안에서 독수공방할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충분히 방어할 만한 성벽은 필요하고, 성안을 항상 정비해야한다는 생각도 꼭 필요하다. 튼튼한 성이 있어야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고, 성 밖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다. 그럼 글을 마무리하며, 나 역시 알렉산더 대왕이 검을 빼 들듯이 청소기를 꺼내 들겠다. 위이잉.
(글) 안태현 (사진) 진짜 자취방
0 notes
timeoutath · 3 years
Text
저기 왜 싸우세요?
Tumblr media
2021.05.05
분명 결과는 있는데, 원인은 오리무중이다. 고장이 난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하나에 대한 난제에 부딪힐 때가 부지기수다. 내게는 그것이 바로 '분노'다.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서로에게 마구 욕을 하고 싸우고 있는데 도대체 왜 싸우는 건지를 물어보면 누군가는 A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누군가는 결국 B가 문제라고 말한다. 이러다 Z까지 알파벳을 다 써버리고도 모자라서 아라비아 숫자까지 끌고 들어올 모양새다.
그러다 뻗친 생각, 바로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다. 나는 원래 화가 별로 없는 성격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화를 안 내는 사람이냐고 하면 부정한다. 별로 없다는 아예 없다와 동일한 문장이 아니다. 화를 낼 때도 있지만 별로 화가 많은 성격은 아니라는 거다. 타인에게 싫은 말을 하는 것도 별로고, 내가 그럴만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결국 화를 낼 일에서 문제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사람들이 싸워대고 있을 때도 '왜 싸우나' 싶어서 그 근원에 대한 질문이나 하고 있는 거다.
물론 나 역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을 때가 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위 현장에서 물대포 맞아가면서 목소리 쉴 때까지 투쟁이란 것을 외쳤지만 결국 내 성격이랑 맞지 않아서 그만 뒀다. 그 이후에 좀 더 '왜 싸우나'라는 질문에 집착을 하게 됐다.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한 글을 쓰려고 몇 번 도전을 해봤지만 '분노'라는 단어만 써놓으면 머리가 하얘지는 것이 다음 문장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 영화 '레 미제라블'을 만나게 된 것. 울버린 아저씨와 캣우먼이 나와서 노래 부르는 '레미제라블'이 아니다. 덕분에 실망할 사람도 있겠지만, 꼭 이 영화는 시간 내서 보시라고 말하고 싶다. 나도 104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손에 땀이 마르지 않았으니, 프랑스어라는 '장벽을 뛰어 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음을 확신한다.'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이 영화에도 등장하고 빅토르 위고의 원작 '레 미제라블'에도 등장하는 문장만 가지고 오겠다. '여러분, 이걸 잘 기억해 두시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다.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결국에는 환경의 문제라는 말이다. 나쁜 농부가 만들어낸 최악의 환경이 나쁜 풀과 나쁜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과연 '나쁜 농부'는 누구인가다.
싸움의 원인이 드디어 밝혀지는 클라이맥스에서 던지는 내 생각은 '나쁜 농부는 바로 나다'라는 문장이다. 관객들이 다 떠나가는 소리가 들리지만, 텅 빈 객석을 바라보고 설명을 첨언하자면 '나쁜 환경을 만들어내는 나쁜 농부는 결국 우리 스스로입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프랑스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유교로 넘어와보자면 주희가 쓴 '대학'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문장이 나온다. 몸을 닦고 집을 안정시킨 후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이다. 나 스스로를 잘 수행하고 닦아야지만 사회가 그만큼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여기에서 나올 법한 반론은 '아니 애초에 물이 흙탕물인데 어떻게 몸을 깨끗이 씻냐'라는 핀잔이다.
이때 내가 바로 '정수기도 없음?'이라고 반론하면 싸움이 시작된다. 그렇게 싸움은 흙탕물과 정수기의 대립이 되고 흙탕물을 써야 하는 계층과 정수기를 쓰는 계층의 싸움이 되어서 나중에는 생수를 먹는 인물이 등장해서 '생수 그거 얼마나 한다고 이렇게 싸우냐'라는 망언을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 불보듯 뻔하다.
지금의 온라인에서 혹은 사회에서 싸우고 있는 형국이 이것과 다를 바 없다. 누군가는 정말 이념과 신념의 문제로 첨예하고 다투고 있다고 하지만 뜯어보면 흙탕물과 정수기의 싸움 밖에 되지 않는 것들이 다수다.
다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깨끗이 몸을 닦으라는 말이 목욕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나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해나가자는 뜻이다. '아니, 환경이 안 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한다면 '농부들이 애초부터 돌 하나 없는 땅에서 농사 짓겠냐'라고 반문하고 싶다. '노오력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노력은 했냐'라고 말해야 하겠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로빈 윌리엄스)이 윌(맷 데이먼)에게 '너는 잘못이 없어'라고 말한 것을 곧이 곧대로 '그래 나는 잘못이 없다'라고 받아들인 뒤 책임을 면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적어도 윌은 변화하고자하는 노력을 한다. 그러면서 윌은 분노에 쏟아냈던 에너지를 변화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왜 싸우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살펴보면 사실 그냥 '싸우고 싶어서'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싸우고 싶은 이유는 자신의 환경을 이렇게 만들어 낸 정치인, 가정 환경, 교육 환경, 윗세대들이 귀를 막고 있어서라고 한다. 그러면 왜 싸우는가.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고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인데. 나 스스로라도 성실한 농부가 되려면 싸울 시간은 없다. 분노를 씨앗 삼고 물을 주면 먹을 것이라도 생긴다. 싸울 시간에 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글) 안태현 (사진) 영화 ‘레 미제라블’
0 notes
timeoutath · 3 years
Text
꼰대영웅
Tumblr media
2021.03.22
'열혈남아'가 덕질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유덕화가 부른 영화의 OST '치심착부'를 무한 반복 스트리밍 중이다. 조금만 더 화력이 더해지면 브레이브걸스의 '롤린'도 이길 수 있을 텐데, 아직 나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열혈남아'에서 유덕화는 꼰대 그 자체다. 촌스럽게 흰 티셔츠를 배바지로 넣어 입고, 담배를 길빵으로 뻑뻑 피워댄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동생 장학우에게는 "휴, 너희들은 이런 거 피우지 마라" 식의 회유만 한다. 세상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다.
하지만 잘 생기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고 했던가. 꼰대에게도 스톡홀름 증후군을 느낄 수 있음을 오늘에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그대의 아재파탈에 허우적대며 나는 왓챠의 바다를 헤엄쳤다. 그리고서 만난 또 다른 역작, '천장지구'다. 원제는 '천약유정'인데 나는 원제보다는 한국에서 아무렇게나 끼워맞춘 '천장지구'라는 제목이 더 좋다.
유덕화 아저씨, 여기서는 말보로 레드를 태우신다. 칼스버그 맥주도 맘껏 마시신다. 취해서 토도 하시는데 그건 그냥 비밀로 부쳐두자. 나도 덕분에 어제 밤 편의점에서 칼스버그 맥주를 사와서 맛있게 마셨으니 몰랐던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가장 화룡점정은 스즈키 오토바이를 타시면서 멋있게 청재킷을 휘날려주시는 장면이다. 난 '다크나이트' 속 배트맨의 휘날리는 망토보다 이게 더 멋있었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내 무신사 쇼핑리스트에도 일찌감치 청재킷을 담아뒀다.
글을 쓰다 보니 유덕화의 팬심 간증 시간이 된 듯하지만 원래 글을 쓴 목적은 이게 아니었다. ��렇기에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왜 나는 '유덕화의 아재파탈'에 빠지게 된 것일까에 대한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유덕화의 잘생긴 얼굴도 한몫했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의 불안한 분위기에 매력을 느낀 점이 더 크다. 홍콩이 중국령으로 반환되는 시점을 앞두고 있던 시대이다 보니, 그 불안함이 영화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여기에다 주인공의 위태로운 사랑과 우정, 삶까지 그려지니 불안감이 제대로 높아진다.
불안은 사랑이 불타오르기 딱 좋은 발화점이다. 고백을 하더라도 번지점프대에서 하면 더 효과가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나. 사실 이것도 로맨스라는 것을 아예 배제해버린 이과생들의 연구 결과이기에 곧이곧대로 믿지는 말자.
하여튼 불안할 때 우리는 더욱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지고,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사랑은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감을 더욱 극대화할 뿐이다.
사랑은 사람의 감정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롭다. 나 하나의 감정도 다루기 힘든데 두 사람이 하는 사랑은 얼마나 더 힘들겠나.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불안해하고,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것이다.
'열혈남아'와 '천장지구' 속 유덕화의 모습은 마치 아찔한 고공에서 안전 장치 하나 없이 줄타기 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만든다. 불안한 청춘의 불안한 사랑을 바라보는 내 감정은 더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 시대의 유덕화는 그렇게나 뭇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단다. 하지만 남자들이란, 오토바이에 매달려 폭주족이 되는 볼썽사나운 일탈로 유덕화 덕질을 시작하셨다. 어쨌든 그들도 자신들이 가진 청춘의 불안감을 유덕화처럼 해소하려 한 것일 터다.
하지만 그것도 운 좋으면 '비트' 속 정우성이었고, 운 나쁘면 그냥 정우성 따라다니는 임창정에 불가했다. 그러나 그 시대, 차라리 그렇게 불안하다고 말할 수나 있었지 않나. 탈선하면 '쟤들이 불안하구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도 있었지. 아니면 유덕화 형님처럼 아이콘이라도 되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의 '탈선'은 그냥 사연 없는 잘못이 됐다. 불안함은 숨겨야 했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주인공들은 대중문화 속에서 사라졌다. 완벽함을 향해 달려 나가는 사회는 개인의 불안함을 신경 써 줄 여력이 없다. 이제는 완벽한 어벤져스 히어로들이 더 인기다. 불안에 공감하기보다 숨기기 급급하다.
그 시대 불안의 청춘 유덕화는 이제 60살의 중년이 됐다. 하지만 영화로라도 남아 불안하다고 말하는 우리를 여전히 위로해준다. 꼰대처럼 "야, 다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데 정말 "다 그런 것 같다"고 고개 끄덕이게 된다. 근데, 오토바이는 안 탈 거다. 불안함을 표출하기 위해 목숨은 내던지기 싫다. 그러고 보니 그럼 청재킷이 무슨 의미인가 싶다. 글을 마무리하며 무신사 쇼핑리스트에 넣어둔 청재킷을 삭제하러 간다.
(글) 안태현 (사진) ‘천장지구’ 스틸
2 notes · View notes
timeoutath · 3 years
Text
행복한 후회
Tumblr media
21.03.16
선글라스를 끼고 필름을 들여다보고 있는 한 남성이 있다. 당연히 왕가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게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미지 속 남자는 장 뤽 고다르다. 두 분 다 참 선글라스와 담배를 좋아하는구나. 그래서일까, 내게 영화감독은 촬영장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로 강렬하게 각인돼 있다.
이 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를 입에 문 두 명의 감독 중 한 명이 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그의 데뷔작 '열혈남아'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난 항상 왕가위의 영화를 모두 봤다고 자랑했지만 '열혈남아'는 보지 못했다. 그건 누군가 콕 찌르면 바로 쓰러질 내 급소 중 하나였다. 그래도 완벽한 것보다는 미완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나. 난 아킬레우스처럼 그 약점을 굳이 보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왕가위 영화가 디지털 리마스터링되어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됐고, 왓챠에서도 그의 영화를 다시 만나게 해주는 기회를 마련했다고 하여 '정주행'을 위해 기꺼이 '열혈남아'를 보게 됐다. 이제 미완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왕가위의 차기작을 차차기작이 나올 때까지 보지 말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기냐고 물어본다면 본문에는 딱히 그럴싸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사실 "왕가위 영화 좀 봤다"고 하면, 대충 기억나는 '아비정전' '중경삼림'의 대사를 읊조리거나 "그 뭐냐, 'California Dreamin' 좋지 않냐" 등의 이야기가 오갈 뿐이다. 굳이 자랑하겠다고 "왕가위 영화의 구조가 이렇고 저렇고" 이야기를 풀어놨다가는 평생 선글라스에 멍 자국을 숨기고 살아야 할 것이 뻔하지 않나. 지금도 그런 불상사는 피하고 싶다.
굳이 내 눈덩이를 붓게 해주고 싶은 이들이라면 조금만 더 읽어주기를 바란다. 하고 싶은 얘기는 그냥 '찰나'에 대한 주제 뿐이다.
왕가위의 영화하면 항상 나오는 기법들이 있다. 슬로우모션과 스텝프린팅이다. 과거 '일대종사'에 대한 글을 쓸 적에 나는 그가 그렇게라도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어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했었다. 하지만 그가 붙잡고 싶어하는 건 단순히 '시간'이 아닌 '순간'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찰나의 순간'이다. ‘열혈남아’를 보고 확실해졌다.
물리적 시간으로 따지면 '1찰나'는 약 0.013초가 된다고 한다. 엄청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은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화양연화' 속 계단에서 주모운(양조위)과 소려진(장만옥)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처럼 말이다.
'열혈남아'에는 소화(유덕화)와 아화(장만옥)의 찰나들이 담겼다.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영원한 만남이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들이다. 어쩌면 이미 그들이 첫 만남을 가지는 '찰나의 순간'에서 많은 관객들은 그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을 것임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그러니깐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믿는다. 그렇지만 '운명대로 살아가기는 싫다'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운명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조차 운명이다'라는 말장난을 할지도 모른다. 그럼 정말 '운명'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왕가위의 영화는 내게 '시간이 곧 운명'이라고 꾸준히 이야기해왔다. '찰나'의 선택들과, '찰나'의 기억들이 티끌처럼 계속 모여 태산 같은 운명을 만든다고 말해왔다. 
소화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 아화와의 가장 행복했던 짧은 시간을 떠올린다. 자신의 시간이 만들어낸 운명의 마지막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런 비참한 후회 뿐이다.
왕가위가 시간을 붙잡고 얘기했던 건 결국 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해 계속해 짧은 사랑들을 붙잡고('아비정전'), 굳이 사랑에 유통기한을 매기면서까지 미련을 가지는 것('중경삼림')들이다. 하지만 후회와 미련이 남는다는 건 그만큼 기억하는 그 '찰나'가 가장 아름다웠다는 반증(’화양연화’)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 기억을 놓지 못하는 것('동사서독')일 테니깐 말이다.
덕분에 나는 내일도 기꺼이 후회하기 위해 살 작정을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열혈남아'를 보지 않았던 게 오늘의 가장 큰 후회였던 만큼. (글) 안태현 (사진) 영화 ‘열혈남아’ 포스터
1 note · View note
timeoutath · 5 years
Text
청소의 시작
Tumblr media
19.06.16
청소의 기본은 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먼지를 털어내고 닦아낸 다음 청소기로 흡착먼지들을 닦아내는 것은 비우는 것 다음의 일이다. 비운다는 게 거창한 일은 아니다. 안 입는 옷을 버리고, 집에서 쓰지 않는 집기들을 버린다. 냉장고 속에 오래된 식재료들을 버리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려면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놓게 되고 먼지 쌓인 오래된 물건들을 마주해야 한다.
오래된 물건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이 물건과 연관된 기억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것은 오래된 연인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전 직장, 친구들과의 추억, 가족들과의 추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이별이 있어야 한다. 물건들 또한 결국 버려져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담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단 하나 뿐, 과감함이다.
미련은 집착을 만들고, 집착은 혼란을 만든다. 먼지가 쌓여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물건에 내가 평소 관심이 덜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내 일상에서 이 물건은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당장 쓸모가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라는 잡념도 털어서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언젠가 쓸모가 있으려면 매일 닦고 기름칠해야 제때가 돼서 쓸모가 있어진다. 당장 먼지가 쌓이고 나면 쓸모가 있을 시점에는 이미 다른 쓸모 있는 물건에 마음이 가있게 되는 게 당연한 이치다.
과감함 다음 우리가 먹어야 할 마음은 겸허함이다. 버린 물건에 마음을 신경 쓰는 순간 청소는 엉망진창이 된다. 우선 비었다면 비운 채로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비워야지 또 다른 기억도, 추억도 쌓이게 된다. 그리고 물건을 버리면서 함께 묻은 추억은 그저 기억의 한 편으로 치워버려야 한다. 언젠가 떠오르게 된다면 정말 소중한 추억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정말 필요치 않은 추억일 테다. 아둔하게 붙잡고 있는 것보다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비우고 나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테이블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고 닦아낸 다음, 바닥의 먼지를 닦아낸다. 그리고 청소기로 마무리를 짓는다. 걸레는 깨끗이 빨고, 청소기의 먼지통을 비워낸 다음 필터들을 청소해둔다. 다음 청소를 위해 이번 청소의 마무리 역시 깔끔해야 한다.
온몸이 흠뻑 땀에 젖게 되면 곧바로 욕실 청소를 시작한다. 락스를 물에 희석해 거울, 세면대, 바닥, 변기 순으로 닦아낸 다음 전체적으로 물을 뿌려 락스와 곰팡이를 씻어낸다. 아직 변기의 물을 내리기에는 아쉽다. 배수구를 열어 각질과 함께 엉켜있는 머리카락들을 끄집어낸다. 휴지에 돌돌 말아 변기의 물을 내린다. 내내 나와 함께 했던 지저분함들이 변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진다.
이제 청소의 마지막 단계.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몸을 깨끗하게 씻어낸다. 이전에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샤워를 마치고 난 후 시원하게 맞는 바람은 당장 버린 것에 대한 후회를 날려버릴 만큼의 상쾌함이다. 자, 이제 주위를 돌아보자. 지저분한 것들이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게 되면 그제야 정말 필요한 것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렇게 필요한 것들의 순번을 매겨 차례대로 채워나가는 것. 이제 정말 청소의 끝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청소의 끝과 시작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점. 일상이 시작되면 다시 주변에 시달리고, 관심이 소홀하게 되고, 포기하게 되고, 좌절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렇다면 다시 청소다. 집, 사무실 책상, 인간관계 등에서 처절하게 내가 붙잡고 있던, 정말 쓸모없었던 것들을 비워내자. 다시 말하지만 청소의 기본은 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글) 안태현 (사진) 영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스틸
0 notes
timeoutath · 5 years
Text
난 영화가 좋아
Tumblr media
18.11.12
영화를 만든다는 건 꽤나 값진 일이다. 현장을 로케이션하고 제작부는 현장을 매끄럽게 만들기 위해 프로듀서와 논의해 스태프들의 식단부터 예산, 배우들의 스케쥴 등을 조율한다. 촬영부는 촬영감독과 함께 혹은 조명 감독, 조명부와 함께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동시녹음 감독은 배우들의 소리와 공간의 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음악감독은 그 위에 영화만을 위한 음악을 선곡한다. 연출부는 슬레이트를 치고 스크립트를 작성하며 감독의 연출을 보조한다. 그리고 배우들은 미친듯이 인생의 연기를 펼쳐낸다. 마지막, 감독은 이 모든 것을 선택하며 연출한다.
길다면 12년(<보이후드>(리처드 링클레이터)), 짧다면 1일만의 촬영이 이어진다. 밤샘 촬영이 될수도 있고 한 번의 테이크로 완성될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필름 혹은 디지털 원본들은 편집 작업으로 넘어간다. 컷을 세분화하고 후시 녹음과 보정이 이어지고, 색보정까지 겹쳐진다. 최종 프린트가 나올 때까지도 지루한 싸움이 지속된다. 투자자들과 제작사의 압박까지 겹쳐진다. 감독은 결국 그 압박에 못 이겨 영화의 사랑스러운 장면들을 삭제해야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모든 건 선택의 연속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우에다 신이치로)처럼 감독의 고뇌와 모든 스태프, 배우들의 열정이 녹아든 장면이 사라지는 건 감독으로서 마음 아픈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완성되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제 최종 프린트가 완성되면 시사가 이어진다. 홍보팀은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영화기자, 평론가들에게 메일을 작성하고, 일반 시사객들에게 좋은 영화평을 부탁한다. 여기서부터 선택의 권한은 관객에게 넘어간다. 선택과 선택을 이어온 감독은 이제 자신이 선택한 결과물이 누군가에게 선택되어지기를 바란다. 평론가들과 영화기자들, 시사회에서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평들이 쏟아진다. 누군가는 호평을 누군가는 혹평을 이어간다. 그리고 오랜 시간의 영화에는 고기의 등급표와 같은 별점이 매겨진다.
여기까지만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배급사와 극장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당연히 메이저 제작사가 배급을 하고 자신들의 극장을 가졌을 때에는 수월하다. 상영관의 50% 이상을 독점한다. 나머지는 이제 타 제작사의 영화들의 격전이다. 국내 영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해외영화와도 맞붙어야한다. 이것도 상업영화만의 이야기다. 독립영화의 경우, 영화제에서 수상을 받지 못하거나 좋은 제작사를 만나지 못한 경우 혹은 최악의 상황인 영화제 초청까지 받지 못하면 관객들을 만나는 기회가 완전히 박탈 당한다. 물론, 이 역시 영화의 숙명이다. 대중들은 한 해 동안 쏟아지는 수백, 수천 편의 영화들을 소화할만큼의 ��식가가 아니다.
그렇게 상영관에 올라간 영화들은 서로 각축전을 벌인다.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수월하게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영화들도 있는가하면 겨우 1만 관객을 채우는 영화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건 소수고 대다수의 영화들은 1만 관객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관객들을 만나지 못한 영화는 사라지거나 후에 IPTV의 VOD나 DVD, 블루레이로 관객들을 만난다. 여기서도 대다수의 관객들은 토렌트와 웹하드 사이트를 통해 부당이득을 취한다. 그렇다고 이 글은 이들을 비판하는 글이 아니다. 영화가 얼마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뤄지는 사투와 같은 일인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수익이 분배된다. 수익을 내지 못해 완전히 적자를 낸 영화가 있는가하면 천만 관객을 돌파해 부자가 된 투자자, 제작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영화 한 편이 제작된다. 지루한 반복이다. 이 순간에도 수 십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누군가는 선택하고 누군가는 압박한다. 누군가는 영화를 평하고, 누군가는 영화를 사랑한다. 또 누군가는 영화를 그저 소비하고, 누군가는 영화를 두고 설전을 벌인다. 확실한 것은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100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왔다.
일을 마치고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뤼미에르 형제)들은 이제 하늘을 날아다니고, 눈물 짓고, 웃음 짓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영화를 하는 것이 아무리 지옥 같다 하더라도 <지옥이 뭐가 나빠>(소노 시온)라고 반문하며 영화를 찍는 이들도 이날 수없이 꿈을 꾼다. 그러니 영화는 너무나 값진 것이다. 괴랄하다고 하더라도, 지루하다고 하더라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값지다. 물론 그게 10,000원의 표값을 보장해주는 어떠한 사명감이 아닐지언정 영화가 값지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은 없다.
오늘 또 다시 한 편의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를 찍기 위해 선택하는 이들의 역사. 수없이 반복된 이들의 역사. 이들을 위해 ‘존나 큰 엄지’를 치켜들고 “난 영화가 좋아”하고 외친다.
(글) 안태현 (사진) 영화 <춘몽>(장률)
0 notes
timeoutath · 5 years
Text
문호를 보내며
Tumblr media
18.11.05
이만희 감독의 첫 작품을 봤던 기억이 남는다. ‘태양 닮은 소녀’라는 영화였는데 처음 봤던 18살의 나는 이전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받았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이라 그리 큰 감명을 받지 못했다. 이후 23살, 운명적인 영화를 만나게 됐다. 바로 ‘삼포 가는 길’이었다. 아마 이 순간부터 내게 이만희라는 이름은 지워질 수 없는 문신이 되어버렸다. ‘삼포 가는 길’은 ‘달콤한 인생’으로 깨달은 N차 관람의 진정한 기쁨이 사랑으로 발전하게 해주는 작품이었고, 그렇게 이만희 감독의 영화는 내게 그리스 신전과 같은 곳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태양 닮은 소녀’를 다시 봤다. 내가 온종일 짝사랑했던 문숙의 첫 데뷔작. 그 영화에서 어떠한 동경을 가지게 된 사나이가 있었으니 바로 동수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신성일이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물론, 이전 ‘맨발의 청춘’에서 이미 신성일의 존재감은 익히 알았지만 ‘태양 닮은 소녀’에서 나는 신성일의 진정한 진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문숙을 향한 사랑 보다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연유에는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때 그가 자신의 회고록을 발표했고 이후 한차례 논란이 형성된 이후였기에 그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을 가지게 된 것이 강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출연했던 작품 중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별들의 고향’이었다.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이 대사가 나올 때면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이장희의 목소리가 담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또한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노래다.
그러한 도중 신성일이 내가 살던 영천에 별장을 세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집에는 단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 금방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무언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집에 영화박물관을 짓겠다고 했으니 그것이 완공되면 찾아가볼 심산이었다. 그렇게 나는 신성일을 지척에 두고도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이미 그의 이름이 강신성일이 된 이후였지만, 그럼에도 신성일이었으나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때 그를 찾아갔더라면, ‘별들의 고향’에 대해 얘기하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만희 감독에 대한 나의 어떠한 동경을 표현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깐 신성일을 떠나보내는 것이 나는 못내 아쉬웠다. 슬픔은 없었다. 그가 떠난 어제 하루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고 일어나 영화를 봤다. ‘별들의 고향’이었다. 마침 겨울이 오고 있다. 눈발 날릴 때, 나도 한 번 그를 다시 생각해보련다. 물론 슬픔은 아니다. 그건 거짓이다. 그저 아쉬움 뿐. 문호는 이제 정말 보낼 때가 됐다.
(글) 안태현 (사진) 영화 ‘별들의 고향’
0 notes
timeoutath · 6 years
Text
사랑의 기한
Tumblr media
“만년은 너무 길어요. 이 순간 만이라도 사랑해줘요.”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에는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경찰223(금성무)가 파인애플 통조림을 보며 읊어대는 이 말이 주성치는 퍽 마음에 들었나보다. ‘서유기-선리기연’에서 “사랑에 기한이 있다면 난 만년으로 하겠소”라고 말하며 지존보의 후회를 표현해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이 대사의 원조를 주성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이 대사의 원조가 ‘중경삼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 소중했던 건 지존보와 함께 흘렸던 그 순간의 눈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존보가 자하(주인)에게 남긴 후회 가득한 말은 나에게 어떠한 사랑의 교본이 됐고, 그 이유에서인지 나는 아직까지 만년의 봉인을 풀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놓여버리게 된 것이었다. 통조림 뚜껑을 여는 것이 참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추석 연휴 ‘서유기-모험의 시작’을 보게 됐다. 주성치 키드였던 나에게 그의 신작은 여전히 ‘쿵푸허슬’에 남아있던 상황에서였다. 아마도 그가 출연하지 않는 작품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아서였다고 변명을 해본다.
가타부타 변명을 치우고 다시 ‘서유기-모험의 시작’을 보게된 때로 돌아와보자면 친구의 한산한 가게에서 IPTV의 무료영화에 나와있는 주성치 감독이라는 텍스트가 마음을 홀렸다. ‘역시 주성치는 케이블TV 아니면 무료영화지’라는 심보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으나 그 감정은 숨기고 다시 한번 우리들 동아시아 루저의 왕을 영접하는 신성한 마음 가짐을 가지려 애를 썼다.
언젠가부터 주성치도 거대 중국 자본에 눈을 뜬 것인지 온갖 CG로 점철된 화면은 내게 큰 이질감을 선물했고, 더욱이 주성치가 출연하지 않는 영화에서 그 특유의 유머코드가 발현되는 것이 영 마음에 거슬렸던 영화였다. 저 무지막지한 대사가 나의 마음에 사소한 깨달음을 선물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참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서기의 입에서 저 대사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만년은 너무 길어요. 이 순간 만이라도 사랑해줘요”라니. 이건 나에게 또 다른 메시아였다. 깨달음을 얻고 나니 왓챠 평점 2.5를 예상했던 ‘서유기-모험의 시작’에는 어느새 4.0의 별점이 달려있었다.
오래전 내게 사랑의 교본을 선물해줬던 1타 강사가 이제야 해답본을 들고 찾아온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만이라도 사랑해달라니. 이제까지 후회만 간직하고 살던 내 인생에 어떠한 길이 열리는 것일까. 누워있던 여래가 가부좌를 틀더니 하늘로 승천했다.
내 머리 위 씌어져있던 긴고아가 풀어졌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지금 그 순간 만이라도 사랑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저 만년의 기한을 두고 그 기한을 바라보고 살았던 내 자신을 다시 후회한다. 후회로 가득 찬 인생이라도 지쳐있지 말라는 옛 주성치의 교시가 다시금 다가온다. 진정한 로맨티스트 주성치. 잊고 살았던 그가 다시금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이제 후회는 열반에 들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이다. 주성치가 등장하지 않는 주성치 영화도, ‘선리기연’ 에 갇혀 있던 내 자신의 사랑도, ‘서유기’와 함께 모험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알쓸신잡3’에서 ‘무한은 숫자가 아닌 과정’이라고 말한 물리학자 김상욱 박사에게 수긍이 간다. 누군가 내게 사랑의 기한이 있느냐고 말하면 이렇게 말하련다. ‘지금 이 순간 만이라도 사랑하겠다’라고. ‘그건 무한’이라고.
(글) 안태현 (사진) 영화 ‘서유기-모험의 시작’
0 notes
timeoutath · 7 years
Text
늦은 후회만
Tumblr media
아침에 눈을 떴을 때다.
반지하의 창문은 의외의 채광을 자랑하며 내 눈을 강타하고 스프링이 망가진 침대는 어서 일어나라고 내 등을 떠민다. 시끄러운 알람은 그제서야 울린다. 어쩌면 알람시계는 보험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는.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입 속에 칫솔부터 집어넣는다. 입 안에서 까끌한 거품들이 요동치고 다음은 세수부터 할까 머리부터 감을까를 고민한다. 대개의 경우는 세수부터다. 하지만 머리를 감을 때쯤이면 머리에 묻은 먼지가 다시 얼굴에 묻는 것은 아닐까라며 후회를 한다.
늦은 후회다.
그렇게 만차의 버스에 몸을 싣고 또 하루.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가 없는 방은 10시간 넘게 텅 비어있다. 문을 열 때 그 식은 온기란. 창문엔 광채는 없고 어둠뿐이다. 외로움이 잠식해온다. 영화를 볼까 생각했지만 일단 샤워부터. 샤워 후 간단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누우면 뭘 했다고 또 하루가 이렇게 끝나버리지 후회하며 눈을 감는다. 결국 오늘도 영화를 보지 못했다. 주말이 올 때까지 참아야하나. 주말이 온대도 영화를 보지 않을 걸 알지만 일단 눈을 감아야한다.
늦은 후회라도.
그렇게 영화를 보지 못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결제해둔 왓챠 플레이의 요금이 아깝다고 생각 들 때쯤 영화를 한 편 봤다. <키즈 리턴>이다. 약 두 달 전 본 영화였지만 다시 보고 싶은 그런 마음 누구라도 한 번쯤 하지 않나. 두 달이 지나도 신지와 마사루는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학교 운동장을 돌고 있다. 언제까지 돌겠지 이 자식들은. 싸움이 일어나고 신지와 마사루는 복싱을 시작하고 마사루는 야쿠자가 된다. 그리고 또 다시 운동장. 마사루의 입에서 나오는 유명한 명대사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했어”.
영화를 보고 나서 혼자 편의점에 가 맥주 한 캔을 샀다. 혼자서 그 대사를 따라하려 했지만 부끄러움에 맥주와 함께 목소리를 삼켰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취기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몰랐다. 부끄러움도 대사를 따라하려해서 그랬던 건지 “아직 시작도 안했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시작도 안하려는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물음표만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 다음 이야기는,
그러니깐 다시 아침에 눈을 떴을 때다.
(글) 안태현 (사진) 영화 <키즈리턴>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