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살때부터 앓았던 질병과의 다툼. 부모님이 너무 쉴드를 잘해주셨는지 별로 피해망상같은건 한번도 안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드디어 내 두발로 꿋꿋하게 정신차리고 돌진할 준비가 될무렵 뇌에 종양같이 생긴 혹을 발견했다.
이틀만에 왼쪽 팔다리에 마비가 오고 중환자실에서 좀비처럼 나흘을보내고 수술만을 기다렸다. 사연들을 읽었다. 딴생각하게? 어떤사람은 6개월의 시간이주어지고 어떤사람은 15년.
온갖생각을 다했다. 맨날 입으로만 살기싫다고 말한 내가 너무 창피했다. 정말로 끝이 코앞에 다가오면 한번도 그게 진심이 아니였다는걸 깨달으니깐. 다 무효화되며 허무해질 겨를도 없었다.
이대로 갈수도있겠다는게 무서운게 아니였다. 다만 다시는 내가 아무 감정을 못느끼고 기억도 못아껴주고 사랑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영영 못보겠다는 사실이 너무 소름끼치도록 두려웠다. 누가 안그렇겠나
하여튼 수술은 잘마치고 거기까지 온거처럼 오늘도 여기까지 잘왔다. 종양 크기가 줄고있다고 오늘 알아서 여기에 지금 얼마나 기쁜지. 얼마나 더 그릇이 커진거 같고 세계관이 회전해 마음이 어쩔줄모르는지 여기에 적어본다. 정말 내가 조금 우습거나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Cliche 들을 지난 7주간 살고 통과해왔다.... 너무 슬프고 기쁘고 안타깝고 감사한. 모든게 한번에와서 멍해. 사람이 사람이 되려면 한두번쯤은 급소에 약한 훅을 맞아봐야한다고본다.
이럴때일수록 글을 더 이쁘게 쓸수있었으면 한다. 몸이 다시돌아온다니 말도안된다. 여기까지 읽어준 당신에게는 너무 고맙다는말밖에 없다. 어쩌면 한번도 안마주칠 사람도 사랑할수있는 마음이다.
도꾜돔이 내 코앞에→스타디움이 내 발밑에
악스에서 체조→악스에서 스타디움에
수만명들의 고개→수천만명의 고개
Show me the money 못한게 아니라 안한거라고
→너네가 말하던건 못한게 아니라 안한거라고
Tokyo dome is right in front of my nose → Stadium now underneath my feet
From Ax to Gymnastics → from AX to Stadium
Tens of thousands of heads → With a single hand gesture, tens of millions of people’s heads nod
It's not that I couldn't do show me the money but it's that I didn't → it's not that I couldn't do the things you people told me/said I needed do but that I didn't do / chosen not to do/to listen, shit.
여태 안 하고 너무 쉬었던 탓일까 투 두 리스트가 빽빽하다 남은 날짜는 정해져있는데 성격이 진짜 완벽주의 .. 날 너무 괴롭혀서 미치겠다 그냥 그냥 대충대충 이렇게 살면 내 스스로 얼마나 편해
낭비도 계획해서 낭비해야 낭비답고 꼭 무계획 막무가내로 일단 저지르고 나면 허무한 느낌? 그래서 그냥 뭐라도 했다.라는 느낌이 들려면 그 뭐라도를 계획해야 해. 잠 패턴이나 좀 바꿔야 하는데 쓸데없는 투 두 리스트 때문에 더 스트레스 받는 이게 무슨 상황이고 어이가 없네
뭘 위한 거니 자신아 ..
너무 쉬었다 머리가 안 돌아가 순서를 못 정하고 계속 겉만 빙빙 돌고 해야 할걸 못 하고 있어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싫기만 해 싫으면 당장이라도 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쉰 내 몸이 안 따라줘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 처한 나는 곧잘 적응할 거니 그걸 또 너무 믿고 있는 거지 나는 또.
사실 얻은 것보다도 아쉬운 것들이 많게만 느껴지지만 이 환경이 아니면 느끼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던 순간순간이 있기에 후회로 떠올리지는 않을 시간이었다.
그래도 행복하게만 포장하기는 싫으니... 지금의 솔직한 마음으로는 여행을 좀 더 다녀올걸! 물론 금전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어떻게라도 가보려는 시도도 없었던 것이 아쉽다. 여행을 다니며 찍어둔 영상을 한 반년동안 계속 조금씩 편집하고 있는데 '완벽히' 만족스러운 영상을 만들어내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
여행에 대한 마음이 커져갈수록 현실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커지기에 오늘은 한번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매력을 찾아보려고 했다. 화창한 날씨와 줄줄이 세워져있는 따릉이는 여행자의 시선에서 충분히 매력적이겠다 느껴졌고, 공연 진행 중 마주한 외국인 관객과의 대화도 충분히 이국적인 상황이었다! 여행은 낮선 곳으로 향하는 것만이라는 정답도 없으니까!
오늘 하루도 꽤나 즐거운 여행이었다 ~
좀 가볍게 포스팅을 하고 싶은데 타자에 손을 올리는 순간 글은 더 깊숙한 속의 생각을 꺼내 가져온다... 그래도 가벼운 오늘의 발견을 적어보면!
홍삼을 먹으면 재채기가 난다. (천천히 먹으면 괜찮은 것 같기도?)
맵슐랭 치킨은 생각보다 더 맵슐랭~
통화 중에 길어지는 침묵은 불안보다도 대화의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더 정확하고 중요한 사안을 꺼내오기도!)
영어로 대화를 할 때 능숙하게 보이려고 말을 빠르게 하는 것보다는 느려도 정확히 전달하려고 하는 연습이 필요하겠다.
걱정했던 순간들은 오히려 막상 그때가 되었을때 더 큰 재미와 발견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것 같다!
년 12월 31일에서 2023년 1월 1일로 넘어가면서. 할머니 생신으로 모였는데 대가족 모여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주무실 분들은 내려가고 회포 풀 사람들은 남고. 나도 줄곧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니, 김씨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한이 많나요. 다양한 생각이 든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다가, 돈이 많은 사람을 많이들 부러워하지만 그 돈이 발목을 잡아 자유를 망칠 수 있게 한다는 것도 안다거나, 공감해주지만 해결책을 줄 순 없는 사연도 있다는 걸 알거나.
장장 5대에 걸친 이야기를 나눴다. 증조 할머니 -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 우리 아버지랑 고모들 세대 - 우리 세대 - 조카 얘기까지. 대서사시를 다뤘다.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고. 그런데 그런 사실을 들어도 기쁜 것보단 마음이 무거워지는 게 컸고. 가족 가운데서도 다르게 생각하는 면이 있다는 것도 알고. (예를 들어 할머니가 증조 할머니(할아버지의 어머니) 때문에 엄청 시집살이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고모들 기억엔 할머니한테 엄청 잘해주셨던 분이라고. 아니면, 생전 친할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은 '정은 많지만 할머니 속을 썩이신 분'이었는데 고모들에겐 '자상하고 용돈 잘 주시고 터프하셨던' 분이었다고. 음?) 똑같은 사연이 있어도 입장마다 다르게 서운한 면이 있고. 아무리 미워도 핏줄이라 용서해야만 하는 것도 있고. 아무리 자식과 가까워도 걱정시킬까봐 전하지 못하는 말도 있고. 오늘은 고모들한테 "넌 진짜 ~한테 잘 혀야 혀"라는 말을 겁나 들었다. 어릴 때 둘째 고모 집에 맡겨졌을 땐 내가 오지게도 까탈스러워서 고모가 하도 고생해서 그 당시 엄마가 가스레인지 장만해주셨다고 한다. 그것도 처음 들음. 난 많이 울기만 한 줄 알았지. 다 맺힌 게 많으시더라. 할머니에게도 맺힌 게 많고. 그래도 자기 남매한테 잘 하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고모들은 예뻐 보이신다더라. 어릴 땐 잘 몰랐던 속사정도 듣고. 남매에 대한 평가도 시시각각 바뀐다. (나보고 "너희 아빠 같은 사람 없어" 하시더니 몇 시간 뒤엔 "그래도 너희 아빠가 우리한테 그럼 안 되는 거여"라는 말이 나오다가. 흠? 시시각각 재평가가 되네)
여러모로 마음이 무겁다. 즐거운 얘기보단 맺힌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니. 답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연도 있고. 얼마나 말할 곳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에 짠해지고 같이 울컥하고. (근데 뭐, 내 인생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말을 하는 거다)
사실 즐거운 얘기는 평상시에 나누고 이럴 때 한 잔씩 나누니 더 깊은 얘기가 나온 거겠지. 가족이란 뭘까 생각해본다. 사실 김 씨 집안도 우애 좋은 건 인정하고 많이들 부러워하지만 그만큼 가깝게 지내니 애증이 넘치는 것도 있다. 서로의 사생활을 다 공유하니. 전주 사시는 고모만 세 분 계십니다. 큰 고모는 전남. (역시 가족과는 어느 정도 떨어져 살아야...) 뭐랄까. 코앞에 살아 모든 비밀도 공유하고, 금전 거래가 오고 갈 때면 민감해지고,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도 자주 되는 것 같고. 장단점이 있겠지.
아까 웃긴 거 딱 하나 있었다. '환혼' 보고 있던 고모한테 고모부가 '시대가 어디냐'고 하고, 고모는 '실제로 없는 시대'라고 하고, 그래도 끝까지 '조선 어느 시대냐'고 고모부가 물어서 고모가 진심으로 짜증냈던 거. 겁나 웃기네.
월요일. 이번 학기는 지도교수님과의 정기 미팅이 월요일이므로 학교에 갔다.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주차 장소도 같다.)롤 통해 이루어지지만 어딘지 매번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이것들 이외에도 내 하루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더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 날씨가 가장 크게 와닿았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여름은 어느샌가 코앞에 있었다.
오늘 미팅으로 할일이 약간은 더 정리된 느낌이다. 이제는 나만 게을러지지 않으면 졸업논문에 한정해서는 한동안 지체될 것들이 없다.
소비의 총합이란게 있는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늘 가계부를 쓰면서 어디에 얼마를 쓰는지 체크하는데, 요즘은 환율도 오르고 돈을 좀 아껴야겠다 싶어서 더 꼼꼼하게 보고 있었다. 주로 식비와 주류에 많이 썼던 작년에 비해 올해는 절주하고 (금주에서 바뀌었다.), 식비도 외식 비중을 줄이면서 나름 조절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두 부분에서는 지출이 꽤 많이 줄었긴 했는데 가만보니 그만큼 다른 곳에 쓰고 있었다. 아낀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안도감이 커서인지 굳이 안써도 될 곳에 쓰는 나를 보면서 결국 지출 총액은 정해져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과연 나는 소비를 줄일 수 있을까.
그 그림자가 천천히 바깥을 향해, 정태의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을 때 정태의는 내심 혀를 찼다. 그러나 정태의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 그림자는 발을 훌쩍 걷어올렸다. 그리고 실내의 전경과 함께 정태의는 그 남자를 바로 코앞에 두게 되었다.
“이거야 원, 대단히 수상쩍은 손님인데.”
나직이 중얼거리며 정태의를 노려보는 그 독일 남자는, 여태 정태의가 보았던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아보였다. 허기를 채우고 적당히 배가 부른 맹수처럼, 눈가에는 웃음마저 감도는 것 같다. 그래봐야 그 웃음이 정태의를 향한 웃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
정태의의 낯빛은 삽시에 질려버렸다.
실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당당하게도 드러내고 앞에 선 그 독일 남자와, 엉망으로 구겨지고 뭔가 흥건하게 흠뻑 젖어 있는 침구 속에 역시나 알몸으로 파묻혀 기절하다시피 늘어져 있는 저 남자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죽은 시체 같은 저 가엾은 남자의 전염병자 같이 울긋불긋한 온몸이며, 아랫도리를 흥건하게 적시며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끊임없이 몸속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희뿌옇고 끈끈한 물기 따위도, 도대체 얼마나 채워넣었길래 저 꼴인지 경악스러웠지만 어떻게든 애써 못 본 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충격적이고 마음 아픈 사실은.
“…….”
“대단히 수상쩍을 뿐 아니라 노골적이기까지 한 손님이군.”
독일 남자가 약간 싸늘해진 투로 말해도, 정태의는 도무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여전히 반쯤 일어서서 딱딱한 부피감을 드러내고 있는 독일 남자의 사타구니를, 믿어지지 않는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나는 내 한 몸 희생해서, 세상에서 가장 가엾어질 어느 누군가의 아랫도리를 구원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저런 악랄한 크기는 볼 일도, 볼 수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여왔는데.
눈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남자는, 정태의가 종종 침대에서―욕실에서도 거실에서도 뜰에서도 차에서도―구경하는 악독한 물건과 비등했다.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아까 대충 말을 들은 바로 종합해보면 저 가엾은 남자는 저 흉악한 물건과 사흘을, 앞으로 나흘은 더 뒹굴어야 한다는 말인데……까지 생각하던 정태의는 문득 번뜩 정신을 차렸다. 홱 고개를 돌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박준우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죽은 거 아냐……?”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하루 쉬면 괜찮아지니, 듣기 거북한 소리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거짓말 마! 하루 쉬고 괜찮아질 리가 없잖아!”
“괜찮아져. 저놈은 타고났으니까. 게다가 평소에 나는 대단히 힘들여 자제하면서 저 몸이 상처 없이 내게 익숙해지도록 공을 들이고 있거든. ……네 성생활이 어떤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저놈과 나는 이렇게 몇 년을 불편 없이 지내왔으니 쓸데없는 참견은 사양하고 싶군.”
아니면 동양인은 다 저놈 같은 정신적 문제가 있는 건가……? 하고 뭔가 인종 차별적인 말을 하는 독일남자였지만, 정태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 가엾은 남자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 걸 두고 뭐라고 하더라, 동병상……. 아니다, 저 남자에 비하면 그나마 내 처지가 낫지 않은가. 적어도 일레이는 인종차별은 하지 않았고, 빚을 들먹이지도 않았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아무리 그래도 빚을 미끼로 몸을 요구하는 건 아주 부도덕하지 않은가 싶은데.”
정태의의 이 말에는 독일남자도 찔리는 데가 있는지 움찔했다. 순식간에 눈매가 싸늘해진다.
“서로 합의가 된 개인적인 문제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려는 거지?”
이번엔 정태의가 대답하기 어려워졌다.
인종차별이든 빚쟁이든, 어쨌건 저 남자는 박준우의 상관이었고 또한 그의 말대로 그들 사이에서는 명백하게 합의가 이루어졌을 터였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지만, 정태의가 판단하는 한 박준우는 단순히 돈에 몸을 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 흉악한 걸 계속 눈앞에 두고 있자니 박준우가 그저 가엾어질 따름이다. 그래서, 뭔가 이 남자가 반성이란 걸 하도록 일침을 놓긴 놔야 할 텐데, 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좀처럼 그럴 듯한 말이 생각나지 않던 그때.
왜 그런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까 박준우가 ‘기왕 애인 삼을 바엔 차라리 당신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애인 후보로 거론된 사람이라면, 자격이 있겠지.”
정태의가 독일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쩐지 몹시 뒤가 켕겼지만, 그래도 아예 거짓말은 아니다.
정태의의 입에서 말이 떨어진 순간, 독일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듯싶었다. 정태의가 그 표정을 속속들이 바라보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려는 찰나.
거짓말처럼 그 표정이 다시 잠잠해졌다. 여느 때와 같이 냉랭하고 침착한 얼굴로, 독일남자는 무표정하게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뭐 좋아…….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나흘은 시간이 남았으니 그 동안 준우에게 캐물어보면 되겠지. 아마 몇 시간도 안 돼서 절대로 아니라는 말이 그 입에서 나오겠지만. ……그보다 말이지, 그쪽은 그런 말을 해도 괜찮나?”
“뭐?”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린 정태의가 “뭐가 괜찮아?”라고 막 물어보려던 찰나.
턱…….
어깨 위에 뭔가 얹혔다.
그리고 그 순간, 씻은 듯이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진 정태의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참 이상도 하지……’였다.
정말로, 참 이상도 하다. 어째서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아니 시선조차 옆으로 흘끔 돌리지도 않았는데, 어깨 위에 놓인 것이 매우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걸까.
“어느 구석에 박혀 있나 했더니,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본데, 태이.”
미묘한 웃음이 섞인 그 나직한 목소리에 등줄기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정태의의 뒤에 서 있던 새로운 난입자는, 다른 손으로 천천히 정태의의 뺨에서 목까지를 쓸어내렸다. 언제 사람 목을 꺾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하얀 손은, 이윽고 정태의의 몸을 훑어 금세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곧 정태의의 사타구니를 꽉 움켜쥔다.
“덧붙여 형은 막 방금 베를린으로 돌아갔어. 제임스가 입원을 했거든. ……순순히 행선지를 털어놓았더라면 입원까지는 안 했을 텐데. 그래도 심하게 다치진 않았으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늑골 몇 대쯤 나가고 만 모양이다……라고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카일이 돌아갔으면 이제 이곳에는 그야말로 자신과 일레이 둘만 남았다. 말려줄 사람도 없다. 난 죽었다.
“아무래도 좋지만.”
그때, 눈앞에 서 있던 독일남자가 성가신 듯 눈살을 찌푸리며 쌀쌀하게 입을 열었다.
“그쪽도 동행이 찾으러 온 모양이니 그만 돌아가줬으면 좋겠군. 나도 시간이 별로 넉넉하지 않아서 말이지.”
그러자 정태의의 등 뒤에 서서 정태의를 바싹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던 남자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 독일남자를, 이어 침대에 늘어져 있는 박준우를 차례로 보았다.
“이 녀석의 애인 후보라는 게, 저기 누워 있는 저 남자인가……?”
“천만에. 박준우는 요 몇 년간 나 외에는 아무와도 몸을 섞지 않았어. 앞으로도 물론이고. ……글쎄, 하지만 모르겠군. 박준우가 아닌 건 확실하지만 달리 그 남자에게 애인이 따로 있을지는.”
독일남자는 턱짓으로 정태의를 가리키며 미묘하게 말을 맺었다. 정태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없어!!”
저 빌어먹을 인간이 날 죽이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망할, 제 애인만 챙기면 나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단 거냐?!
정태의가 길길이 날뛰자 “찔리는 데가 없으면 그렇게 과민반응할 필요도 없을 텐데.”라고 모른 척 못까지 박아버린다.
저 남자는, 정태의가 불법침입을 한 데에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왠지 몰라도 정태의가 대단히 마음에 안 들었든가. 혹은 아까부터 알몸으로 누워 있는 박준우를 자꾸 흘끔거린 게 마음에 안 들었거나. 혹은―그럴 리 없다는 걸 뻔히 알아도―애인 운운한 말에 몹시 심사가 뒤틀렸거나.
순식간에 눈앞이 노래지는 정태의를 사이에 두고, 앞 뒤로 선 두 남자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크게 험악하지는 않으나 과히 달갑지도 않은 싸늘한 시선이 몇 초쯤 오갔다.
“뭐 좋아. 이놈과 상관이 없다면. 어차피 이쪽도 시간이 별로 없어. 예약이 원래 일주일이었으니 앞으로 나흘……. 100시간도 안 남았잖아.”
정태의는 등 뒤의 남자가 중얼거리는 말에, 노래진 시야가 이번에는 캄캄해졌다. 나흘. 박준우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나흘이라. 같은 날 나가게 되겠군. 그 전에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독일남자는 그렇게 대꾸하곤, 이내 선뜻 걸음을 돌렸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발을 내려버렸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다는 듯.
기절해 있는 박준우에게 다가가 그 위에 겹쳐 엎드리더니 그의 다리를 벌리는, 저 성격 고약한 그림자를 더 이상 탓할 겨를도 없었다. 정태의의 등 뒤에 있던 남자 역시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는 듯 정태의를 덜렁 안아들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그에게 붙들린 정태의는, 저만치서 다가오는 자신들의 별채를 보며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
그 뒤로 두 남자가 얼굴을 마주한 것은 딱 한 번,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상대가 체크아웃을 하는 동안 퀭한 얼굴로 로비의 소파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한 남자와, 비슷한 처지로 그 건너편 소파에 애매하게 앉아 있는 한 남자는, 고작해야 몇 미터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에 앉아 서로를 멀거니 쳐다보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저 남자도 간밤에 잠을 못 잤구나. 어디 간밤뿐일까.
인사라도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말조차 할 기운이 나지 않아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지만, 그 시선만으로도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 갈까.”
이윽고 먼저 체크아웃을 끝낸 한 남자가 돌아와 그들 중 하나를 훌쩍 안아들고 걸음을 옮겼고, 점점 멀어지는 거리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올해의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크리스마스 날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자리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에 대한 기억은 항상 따뜻하게 남아 있다.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 탄생일은 아니라는 오류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아무튼 크리스마스는 성금을 모으거나 선물을 기대하고 행운과 행복을 기원하고, 또 새해를 앞두고 약속하고 비워내고 계획하는 등 갖가지 인간적 행위와 나눔의 실천이 얽혀 있는 스페셜한 날이다.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도 여전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것에 설렌다.
그동안 음악 블로그에서 닐스 란드그렌(Nils Landgren)의 크리스마스 앨범, 빈스 과랄디 트리오(Vince Guaraldi Trio)의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 앨범,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의 곡들이 테마가 된 로맨스 영화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통해 그 해의 크리스마스들을 소박하게 기념했다. 서양 음악이 교회나 종교적 의식으로서 비롯된 것인 만큼,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크리스마스와 맞물리면 틀림없이 거기에 더 가까워지도록 한다. 그러니까 음악 블로그를 하기 전에는, 올해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고르는 데 그다지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다. 2023년 올해는 홀리데이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인 11월, 아니 어쩌면 가을의 초입부터 크리스마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를 위해서는 혼성 듀오 She & Him(쉬앤힘)의 <A Very She & Him Christmas>를 준비했다.
쉬앤힘은, 말하자면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밴드를 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룹은 아니다. 그런 그룹 결성의 배경부터 고려하면 이들의 음악이 덜 전문적이거나 진중함이 부족할 거란 선입견부터 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필드 바깥’에서 온 구성원이 불어넣는 천진난만한 자유와 쉽게 틀을 깨는 담대함이 어쩐지 쇄신되기 불투명해보이는 메인 필드를 유연하게 팽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바깥’이라 함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창의적 혜안과도 연결된다. 남성 멤버 M. Ward는 블루스에 기반을 둔 인디 포크 계열 음악을 선보이며 솔로로 활동해 온 베테랑 뮤지션이지만 보컬을 맡은 주이 데셔넬(Zooey Deschanel)은 배우로 활동해 오고 있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의 SF 코미디 원작을 영화화 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아닐까. 주이는 음악에도 뜻을 두어 유년기부터 곡을 만들고 밴드에서 노래를 하는 등 음악 활동을 해왔고 결국 그녀는 쉬앤힘의 멤버가 되어 본격적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노래를 들어 보면 그녀의 보컬 능력을 배우의 그림자 뒤에 가둬 두기는 아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의 앨범은 2008년 발표된 <Volume One>을 시작으로 <Volume Two>로 이어지고 이 크리스마스 앨범은 2011년 이들의 3집 앨범이자 첫 번째 크리스마스 레코드로 모습을 드러냈다. 쉬앤힘은 이후 크리스마스 앨범을 하나 더 냈는데, 그것보단 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 앨범에 더 손이 간다. 이 앨범은 그룹의 음악성이 무르익은 세 번째 결실이기도 하지만, 크리스마스 앨범으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작이었다. 대단한 음악성이나 획기적인 발명은 없는지 몰라도 해마다 크리스마스 앨범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목록을 추가시킨 것, 대체로 실패할 리 없이 무난하리란 예측을 동반한 것. 그것이 이 앨범이 내적으로 품은 전략이자 생존 법칙이 아니었을까.
캐럴이라는 불변의 원형을 공유하면서 크리스마스 앨범들은 뮤지션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물든다. 대략적으로 분위기 별로 분류했을 때, 업비트로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부류, 품격 있는 재즈 분위기를 연출하는 부류 혹은 기타리스트의 재즈, 로큰롤이나 올드 팝 스타일, 독보적 기량을 가진 보컬의 명품 캐럴, 록 밴드들의 제법 삐딱하지만 진솔한 크리스마스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한때 Low의 <Christmas>와 The Beach Boys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즐겨 들었다. 쉬앤힘의 <A Very She & Him Christmas>는 위에 언급한 앨범들에 비하면,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다운되고 차분한 편이지만, 한층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기반을 둔다. 보컬 주이의 목소리는 드라이하면서도 온화한 편이고 비교적 낮은 음역을 개성적으로 지녔다. 반쯤 우울하고 반쯤 밝은 그런 캐럴 음악 모음이라 할까. 전주 없이 노래로 불쑥 시작되는 첫 곡 Christmas Waltz부터 쉬앤힘의 색깔에 몰입하게 만든다. 기타와 건반만으로 완성된 심플함이 미덕인 오프닝 트랙. 이를테면 이 캐럴 모음은 수많은 크리스마스 앨범들 사이를 헤매다 지친 청자들에게 쉬앤힘만의 젊고 세심하고 캐주얼한 힘으로 북돋워줄 수 있다.
2022년 쉬앤힘은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에 헌정하는 앨범 <Melt Away: A Tribute to Brian Wilson>를 내놓았다. 그러니 이 크리스마스 앨범에 브라이언 윌슨의 캐럴이 두 곡 포함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치 보이즈의 우울에 빠진 연약한 허밍, 멜랑콜리 무드가 살아 있는 Christmas Day. 그리고 Little Saint Nick의 원곡에서는 탬버린과 트라이앵글, 실로폰 등의 악기 소리로 유희적인 분위기를 그렸는데 쉬앤힘은 심플함을 미학으로 삼은 만큼, 우쿨렐레와 코러스 오버더빙 등으로 재해석을 일구어 냈다.
Blue Christmas는 1948년 처음 발표되었고, 1957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Elvis’ Christmas Album>에 수록되며 대중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역사 깊은 캐럴이다. 이 곡은 우울한 크리스마스의 표본과도 같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만인이 기대하는 행복한 크리스마스의 표상이리면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어 쓸쓸히 보내야 하는 블루 크리스마스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애절함의 기록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가족들 틈에 둘러싸여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하더라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크리스마스의 소란에서 한 걸음 물러나 혼자인 사람들을 ��상하듯 떠올릴 것이다.
쉬앤힘의 <A Very She & Him Christmas>는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캐럴과 멜랑콜리한 것 모두를 아우르는 중간 지점에 철저히 속해 우리에게 정든 인사를 건넨다. 이 앨범에 관한 인상은 과장된 기쁨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들을 일일이 제거하고 목소리와 마음의 순수성으로 거기에 닿고자 한 시도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