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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jollygood21 · 11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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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워커(Gen.Walton H. Walker)의 대성황
프랑스의 소설가 알폰소 도데는 [꼬마철학자], [마지막 수업], [퀴퀴니앙의 신부]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쓴 작품이 공연될 때 그는 언제나 아무도 모르게 극장에 갔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현장에서 느끼는 한편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년전 워커장군진혼제(2022.5.17/부경대학교 워커하우스)를 참관했던 박창화감독(극단 창)으로부터 워커장군 연극을 제작하고 싶다는 의견을 받고서 정말 기뻤다. 왜냐하면 영화각본 '워커스토리'를 작성한 이래 영화나 다큐 뿐 아니라 연극, 만화, 오페라(뮤지컬) 등 종합적 문화컨텐츠로 확산되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연극 프로젝트는 작년 정권교체가 되고 국가보훈처로 부터 지원을 받게되었다. 문재인정권하에서 자행된 종북좌파의 기나긴 어두운 그림자가 마침내 비켜간 것이다. 실지로 필자가 문산당(문재인+공산당)과 코로나에도 워커장군 기념사업에 매달린 것은 '도전과 응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6.25의 또 다른 이름은 잊혀진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선 안되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6.25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었으나 오늘의 한국을 있게한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한국은 기적의 나라이다. 절대빈곤과 문맹에서 해방을 맞이했고 건국에 뒤이은 참혹한 전쟁을 겪었으나 불과 한세대만(30년)에 산업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천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 시대를 살았던 불행한 세대가 있었다.
흔히 식민시대와 두번에 걸친 전쟁(태평양전쟁, 6.25)을 겪은 세대이다. 대표적으로 이병철(1910), 정주영(1914), 박정희(1917), 신격호(1921), 최형섭(1921), 박태준(1927), 장기려(1911) 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식민시대에 태어나 수모를 당했고 젊은 시절 두번에 걸친 대전쟁을 겪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게으름과 거짓을 국민성으로 하는 조선인이 아니라 결사와 애국을 가진 새로운 인종이었다. 이들의 분투는 20세기의 경이(한강의 기적)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인으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경제기적을 만드는데 워커장군은 하나의 초석이었다. 6.25 개전초 불과 한달여만에 한국은 국토의 80%를 적에게 유린당한 절체절명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워커장군은 부하 장병들에게 "나는 한국을 죽음으로 지키기위해 왔다"는 선언과 함께 "결사항전(stand or die)"을 최후명령으로 내린다. 워커장군은 남북 190km, 동서 90km 에 이르는 낙동강라인(워커라인)을 구축하고 진지전(국군, 미육군)과 기동전(미공군, 해병대)을 결합했다. 결국 그의 대승리로 한국은 자유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워커장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신임속에 백선엽장군, 박정희소령 등 국군과 함께 전선을 지켜 한미동맹의 초석이 된다. 낙동강전선의 승리는 미군이 아시아 공산주의와 싸워이긴 최초이자 최후의 대승리였던 것이다. 워커장군과 함께 싸웠던 국군들은 20년후 월남전에서 미군과 함께 싸웠으며, 1970년대 이후엔 중동의 열사를 누빈다. '한강의 기적'은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전 참전으로 시작된 드라마였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내전으로 불리우는 한국의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것은 역사와 영웅들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영웅이 위대한 것은 역사를 압축하고 미래의 지침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워커장군은 한국을 구한 남자, 구세주로 불리운다. 우리가 워커장군에감사하고 기려야하는 연유이다.
연극 워커가 끝났을 때 우뢰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3층을 메운 객석에는 눈시울을 적시는 관객들의 진한 감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고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의 젊은이들이 보아야 합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원작가로 행복하기 그지없는 밤이다.
2023.7.8
하봉규교수(부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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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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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나가사키 가고시마 구마모토 미야자키 / 가고시마(사쓰마) /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나리아키라 / 사이고 다카모리(라스트 사무라이 정한론) / 사쓰마야키 박평의 / 도고 시게모리(박평의의 후손) 태평양전쟁 외무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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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ymovingsblog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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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 of the Japanese Empire The Pacific War, III #太平洋戰爭 #태평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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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ancaramelblr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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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자연여행] 송악산 둘레길▶ 바다 멀리 형제섬과 가파도 조망, 분화구 쪽 푸르름 함께하는 힐링 산책 2022년 5월 19일 서귀포 사계해안에서 놀다가(?) 자연스레 송악산으로 드라이브~ 송악산 제주 최남단 위치한 오름 화산활동으로 인해 분화구가 생기고 그리고 작은 분화구와 주봉이 생기고 따라서 이중화산체로 주위 다양한 기생화산이 발달 한 번 걸어야지. 전망대까지 아니면 둘레길 한 바퀴 주변 바다풍경을 꼭 한 번 보고 싶다! 설렘과 기대감으로~ 도중에 만난 일제강점기 때 동굴진지 외부 능선 해안에 있는 일본군 군사시설 1943~1945년 사이 만들어진.. 송악산 곳곳에 이같은 크고작은 동굴들이 60여 개나 된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군의 발악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저항기지를 제주에서 볼 수 있다. 송악산을 오를수록 해변 풍경은 더욱 넓게 펼쳐진다. 산방산 그리고 형제섬이 눈앞 그 가운데 한라산도 어렴풋 바다 위 나아가는 여객선은 그저 여유롭기만 ㅎㅎ 능선을 올랐더니 사방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풍경을 만나고 아래 고요한 바다물결 응시하며 전망대로 곧장 나아간다. 우측 정상의 분화구도 들르고 싶었지만! 좌측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웅대한 절벽 우측 나무와 풀이 평화롭게 자라는 평지 그리고 피부에 닿는 상쾌한 바람과 공기 송악산 둘레길은 지루함이 없다! 형제섬은 이곳에서 1.8km 거리 큰 섬은 본섬, 작은 섬을 옷섬이라 본섬엔 작은 모래사장도 있다네. 옷섬은 주상절리층이 일품이라고 보는 방향에 따라 3~8개의 섬으로 일출/일몰시 사진찍기 넘 멋진 곳 바다에서 솟구쳐 오른 듯 산방산의 위용이 웅장하고 장엄하게 다가서고! 성산일출봉 그 이상이다. ㅋㅋ 바다와 맞닿은 절벽이 있고 하늘 아래 풀과 나무의 푸르름 어느덧 가파도가 보이는 곳 송악산 첫번째 전망대에 이르고 아무쪼록 송악산 둘레길 최고의 풍경은 계속된다. 바다를 응시하다 고개 돌려 또 다른 풍경이 흥미롭다! ㅎㅎ 즉 송악산 내부 분화구 쪽은 푸르름으로 가득하니 가파도가 가장 가깝게 보이는 송악산 두번 째 전망대에 이르고 그렇게 쉬엄쉬엄 거닐다보니, 모슬포항 방향 널따란 평지가 눈앞 드러난다. 특히 화산송이를 만날테면 이곳이 분화구가 있는 화산지대임을 실감한다. 송악산 두번 째 전망대에서 세번 째 전망대까지 거리 580m 솔숲 사이 널따란 데크길은 표정(?)과 달리 상쾌하고 즐거워 송악산 세번 째 전망대를 앞두고 내려다본 바다는 반월형의 검은 절벽 아래 고요한 푸른 물결을 간직하고 있다. 이 또한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풍경일진대.. 송악산 세번 째 전망대에 이르고 이곳에서 가파도는 더욱 가까이 가파도는 이곳에서 5.4km 남쪽에 있는 섬 모슬포와 마라도 중간 쯤 위치 19세기 중엽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하멜표류기에는 '케파트(Quelpart)'로 소개 그리고 뒷편 어렴풋이 보이는 건 마라도 마라도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 1883년 이후 사람들이 거주했다. 지금은 잔듸 가득한 섬이다. 90분 정도면 섬을 둘러볼 수 있고 가장 높은 곳엔 등대주택이 있다. 세번 째 전망대를 지나면 원점회귀 내리막길 솔숲 맑은 공기 함께하며 넓고 평탄한 멋진 오솔길 도착점까지는 470m 정도 그렇게 송악산 둘레길 한 바퀴 다시 저 멀리 산방산과 한라산을 앞 쪽 넓은 평지는 유채꽃이 만발했겠지. #송악산#제주송악산#송악산둘레길#형제섬#제주형제섬#제주서귀포여행#송악산둘레길#제주송악산둘레길#제주가볼만한곳#제주여행#송악산트래킹#송악산분화구#송악산동굴진지#송악산걷기#제주가파도#마라도#가파도#송악산둘레길🌲🌳#송악산진지동굴#송악산전망대#송악산둘레길코스#송악산산책로#송악산둘레길🌳#송악산근처#송악산올레길#송악산올레길걷기#송악산솔숲#송악산뷰#송악산에서#송악산전망#송악산조망 (at 송악산 둘레길) https://www.instagram.com/p/Cff_QJYLhU1/?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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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yup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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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끓는 애국심 때문에 참전한 용사더라도 포탄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바로 옆에서 죽은 시체가 썩어문드러져 가고 있는, 그러는 와중에 결국 자기는 소모품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는 전장에서는 오로지 살고 싶다. 무사히 집에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이건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디가 올바른 방향인지 알고 싶어서 나의 인생과 삶을 조감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생존해나갈 뿐이다. 그러다 오로지 (물질적으로 보다 나은) 생존만이 목표가 되는 괴물이 되기도 한다. 마치 아직 죽지 않은 일본군의 금니를 빼내기 위해 산채로 잇몸을 자르는 미국 병사처럼....
한가지 위안이 될만한 사실은,  설령 우리가 우리의 삶을 조망할 수 있다고 한들 우리는 올바른 방향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기에 뭐 별로 달라질 것도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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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xboy76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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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일본 대학을 졸업하고 도미하여 러시아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태평양전쟁 에서 일본 항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련 인물의 심리나 행동을 일본,미국, 러시아 등의 방대한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여 분석하고 있다 この本の著者は日本の大���を卒業して渡米してロシア史で博士号をもらった日系#アメリカ 人として太平洋戦争から日本降伏に至るまで、数多くの関連人物の心理や行動を、日本、米国、#ロシア などの膨大な文献や資料を参考にして分析している 저자는 전쟁의 연장, #원자폭탄 의 투하, #소련 의 참전,전쟁의 종결 등은 각국의 전쟁 지도자들의 욕망과 공포, 허영심, 분노, 편견 등이 만들어 낸 결과이며 태평양 전쟁에서는 영웅도 악인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著者は戦争の延長、#原子爆弾 の投下、#ソ連 の参戦、#戦争 の終結などは、各国の戦争指導者の欲望や恐怖、虚栄心、怒り、偏見などが作った結果であって、太平洋戦争では#英雄 も悪人もなかったと話す 이 책을 통해 종전을 위해 원자 폭탄을 사용했다는 미국의 입장, #파시즘 과 군국주의에 대항하려는 대의 때문에 태평양 전쟁에 참여했다는 소련의 입장,원자 폭탄과 남쿠릴 영토의 상실 때문에 전쟁 #가해자 라는 인식을 잊은 일본의 입장이 왜 정의롭지 못한지를 알 수 있다 この本を通して、終戦のために原子爆弾を使用したという米国の立場、#ファシズム と軍国主義に対抗しようとする大義のために太平洋戦争に参加したというソ連の立場、原子爆弾と南クリル領土の喪失のために戦争の加害者との認識を忘れてしまった日本の立場がなぜ#正義 ではないか分かる 21/6/24-7/16 #하세가와쓰요시 #長谷川毅 #racingtheenemy translated #暗闘 #종전의설계자들 #한승동 #메디치미디어 #독서그램 #japan #life #세줄평 #얄타조약 #国体 #ポツダム宣言 #thanksnursesanddoctors #savemyanmar (en 矢田川) https://www.instagram.com/p/CRWfYLFrkZV/?utm_medium=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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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hwa-kim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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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정부의 위안부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와 관련된 New york times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한국인들도 베트남 여성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한국인들이 사과를 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Don’t forget South Koreans did the same to Vietnamese woman, and I have not hear them apologizing!)“
물론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한 게 아니고, 돌려 돌려 사과의 마음(?) 정도를 표시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베트남에서의 민간이 학살과 강간에 대한 수많은 증언이 있음에도 한국 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며, 법적인 책임을 지고자 한 적도 결코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도 한국인이라 한국을 변호하고 싶어지긴 했지만 안 한걸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한 사과라는 건
[김대중 :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노무현 : 우리 국민이 마음의 빚이 있다.] [문재인 :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정도로, 이걸 정부의 공식 사과라고 볼 수는 없다. 일본도 우리에게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들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의 념’을 금할 수 없다.]
어쩌고 하며 돌려돌려 예전부터 사과를 했었고, 박근혜 때의 합의문에도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 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여러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고 했으니, 수준과 표현으로만 보면 우리보다 일본이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명확하게 사과를 하지 않았을까?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이나 강간같은 건 교과서에서 다루지도 않고 공식적인 사과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일본에게는 당당히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까?
베트남 관련 이슈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이미 사과를 했어!”, “베트남이 요구를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과를 하니?”같은 소리만 하고 있으려면 다른 외국인들이 “그럼 니네도 일본이랑 별반 다를 거 없네.”라고 비아냥거리더라도 그냥 듣고 있을 수밖에.
https://mobile.nytimes.com/2017/12/27/world/asia/comfort-women-south-korea-japan.html?referer=http://m.facebook.com/
http://m.koreatimes.co.kr/phone/news/view.jsp?req_newsidx=239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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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y005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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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하와이 시간) . 오후 역사 투어.. 진주만 국립 기념관 . #하와이여행 #호놀룰루 #진주만국립기념관 #전쟁 #2차세계대전 #태평양전쟁 #진주만 #여행사진 #풍경사진(진주만에서) https://www.instagram.com/p/B5ryksah6VZ/?igshid=18pe1t938jy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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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xtrip-blo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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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소릿지 (헥소고지, 前田高地, Hacksaw ridge) 바로 뒷편에 있는 종유석 동굴인 디그가마 (ディーグガマ, Deeg gama) 전쟁 중에 희생된 사람들의 납골당이 있었다고 한다 유골들은 모두 이전되었으나 붕괴위험이 있어서 출입은 통제되고 있다 분위기가 너무 으시시해서 금방 자리를 떴다 #일본 #오키나와 #우라소에 #태평양전쟁 #2차세계대전 #헥소고지 #헥소릿지 #렉스트립_일본 #렉스트립#세계여행 #디그가마 #해외여행 #세계일주#오키나와여행 #japan#okinawa #urasoe #deeggama #okinawatrip #hacksawridge #wwii #日本 #沖縄 #浦添 #ディーグカマ #前田高地 #国内旅行 #世界一周 #沖縄旅行 (at Hacksaw Ridge) https://www.instagram.com/p/BvIthkKgCww/?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1s0rs686ohbm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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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soul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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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樂善齋]의 돌멩이 가을이라.. 낙선재 장락문 앞에는 소담하게 익어가는 감이 주렁주렁 메달려 있다. 감히 하나 쯤 따보려는 동남아 관광객 한 명은 눈치를 보다가 과일의 이름을 묻는다. 갑자기 묻는 감[Persimmon]의 발음이 떠오르지 않아 번역기를 보쳐보며 가르쳐 주었다.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듯 웃어 주더니 갑자기 멀쩡한 감을 따려 했다. 누구라도 공겅장소의 상황에서는 함부로 따면 안된다는 것 쯤은 알지 않았을까.. 창덕궁 안 낙선재 뜰에서 탐스러운 감을 감히 외국인이 따려는것을 보는 일이 흔하지는 않겠지만 순간 당황해 하며 그에게 간단하고 명확하게 'stop!'이라 제지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멋쩍게 자리를 뜨면서도 아쉬운 미련이 남아 보였다. 사방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서로가 노리는 이곳은 외부에서 지정학적인 면으로 보더라도 무척 입맛을 다실만한 곳이다. 동북아시아 뿐만 아니라 대륙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간과할 수 없다. 열강의 틈바구니속 바람 앞에 등불이 되어 버렸던 조선. 1910년 한일합방에 오백년 왕조는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황세자는 이국 일본땅에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광복 후 나라는 되찾았어도 더 이상 반길 곳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 고종의 서출로 7남이며 귀빈 엄씨의 아들이다.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이복동생이기도 하다. 고종이 늦게 본 유일한 딸인 덕혜공주도 배 다른 남매이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합방 후 11살의 나이로 이등박문에게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가 이방자여사와 결혼, 일본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임관후 승진하다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내 군관으로 활동해 중장까지 올랐다. 해방후 두 차례 귀국을 모색했지만 연합군사령부(GHQ)의 조치와 이승만 정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4.19혁명 후 1963년에서야 병중으로 귀국해 요양하다 1970년에 뇌졸증으로 별세했다. 낙선재는 이들 부부의 말년 거처이자 영친왕 사망 후 이방자여사가 마지막 까지 머문 곳이기도 하다. 일설로 영친왕이 어릴적 일본에서 조국이 너무 그리워 이곳 낙선재의 돌을 부탁해 편지로 받아 평생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다른 왕궁은 처분하고 한남동 사택과 창덕궁 낙선재만 남았다 하니 결국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이 되었다 나라 잃은 황태자로 적지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40여년을 살았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일것이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폭압속에서 왜 죽지 않았냐며 스스로 자결을 요구 했다지만 오갈곳 없는 타국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실망을 했었을까. 영화로도 나왔던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역시 그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컨데 왕조의 운명과 종묘사직은 개인적인 목숨보다도 중요한 생존의 문제다. 자신이 사라 지는것 보다는 궁극적인 과업인 왕정 복귀를 바랐을테고 영친왕 자신도 그 역할의 중요성을 늘 인지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마지막 황실의 흔적은 몇몇 가구와 집기, 선돌등이 남아 햇빛이 사라진 스산한 바람과 함께 차갑게 다가온다. 낙선재 곳곳에서 느껴지는 우울한 감정 이입은 10월 중순, 희뿌연 회색 구름에 얹여진 궁의 모습.. 녹슨 장식이 달린 창틀과 닳고닳아 문 턱이 사라진 문지방, 촌스럽고 조악한 일식 와당과 처마에 이르기까지 오십년이 바람을 타고 지난 이곳. 어느덧 조용하고 신중했던 황세자 이은의 슬픔이 한층 을씨년스럽게 다가온다. 과거의 역사를 잊은 국가는 기억을 잃은 사람보다 나을게 없다.(낙선재에서) https://www.instagram.com/p/CVLUjmdP9-K/?utm_medium=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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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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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2(1589) 『友道』의 저자는 책이 나오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사람을 어떻게 사귀느냐는 문제는 누구나 부닥치는 문제 가운데 가장 큰 문제다. 무슨 직업이든지 생활의 성공이 되고 안 됨은 거의 이 문제 해결에 달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사람과 교제하는 기술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불행이도 전문학교 과정 중에는 교제에 대한 기술을 기를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기술인지 재주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과 사귀는 문제는 성공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 저자가 나섰다. 책을 쓴 것이다. 저자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 교육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태아교육도 있다지만 그것은 그만 두고, 사람은 나서부터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서 배운다.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일본 육군대장이던 야마시다 도모유키(山下奉文)의 일화를 소개한다. 야마시다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필리핀주재 일본군 총사령관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그는 9월 3일(1945년)에서야 바기오(Baguio)에서 항복 조인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포로로서 체포되어 마닐라로 호송되었다. 수용소에 갇혔다. 전쟁범죄용의자로 기소된 것은 10월 9일. 기소사유는 부하 장병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임무에 태만하였다는 것이다. (민간인의 살상이 있었다는 이유였음.) 공교롭게도 판결 선고일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2월 8일이었다.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다음 해 2월 22일, 형장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동반한 효오고 현(兵庫縣)세이까꾸 사(正覺寺)의 주지(住持)인 모리다(森田) 중위가 물었다. “남기실 말씀은?” “인간의 성품의 밑뿌리는 학교에 다니기 전에 자기 집 어머니의 교육으로 이루어진다. 나의 유언은 부인들의 교육을 좀 더 높여서 좋은 어머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국에 바랄 뿐이라고 전해 주기 바라네.” 조용히 그렇게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교수대에 올랐다. “생사를 초탈한 그의 가슴 속에는 일본의 재흥은 어머니의 어깨에 달렸다는 신념뿐”임을 토로했다.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 지음, 朴在姬 역, 『太平洋戰爭』(동서문화사, 1973) 제6권, 103-104쪽. 나는 이 일화를 다른 곳에서도 소개하였다. 『술의 반란』, 252-253쪽.)] 야마시다의 말이 반드시 옳은 것인지, 또 그가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교육이 매우 중요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사람 사귀는” 기술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은 있다. 미국 제35대 대통령인 케네디(John F. Kennedy)집안의 교육이다. 상대방의 제의를 거절할 적에 영어권에서는 흔히 “No, thank you!”라고 말한다. 그러나 케네디 집안의 교육은 “Thank you!”라고 먼저 말하고, 이어서 “But, no, thank you!”라고 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일단 고맙다고 하고 그 다음에 거절의 의사를 말하라는 것이다. 거절의 의사를 먼저 말하면 상대방이 언짢게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는 상대방의 제의에 대하여 “Thank you!” 등 어쩌고 자시고는 그만 두고, 거절을 잘 한다. 무슨 짐을 들 적에 누가 옆에서, “도와드릴까요?”라고 하면, 나는 으레 “아뇨! 괜찮습니다!”라고 말해버린다.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의 호의를 무시한 행동이나, 나의 입장에서는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안 하겠다는 심리다. 일종의 결벽증일 수도 있다. 도와줘도 될 만한 형편이니 도와주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싫다. 상대는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다. 내가 잘 아는 어떤 교수 이야기다. 나는 그가 “No!”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그래 그런지 그는 동료와 제자를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인기가 좋다. 『友道』를 읽고 배웠나? 천성을 그렇게 타고 난 것인가? 그러면 “No!”소리를 잘 하는 나도 그게 천성인가? 나는 오래 전에 『友道』를 읽었지만, 그걸 소화하지 못하고 그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도대체 그 가르침이 무엇인가? 20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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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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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케이프 혼의 디에라 델 푸에고 섬 남미의 끝
안데스 산맥 아콩카과산 6960m(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산 아르헨티나 멘도사) 서쪽 / 동쪽은 브라질과 나일강 다음으로 긴 아마존강
남미 원뿔꼴 지역 southern cone(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남미 하부 온화 개발에 유리 수익성이 높은 지역
토르데시야스 조약 1494 스페인 포르투갈
1800년대 초반 시몬 볼리바르(베네주엘라) 호세 데 산 마르틴(아르헨티나) 독립운동 볼리바르주의(반식민주의 친사회주의)
칠레 볼리비아 사이가 안좋음 1879 태평양전쟁 / 에콰도르 페루 1995 충돌 포함 지난 75년간 세번의 국경전쟁
멕시코 시에라 마드레 산맥 멕시코시티 마약 카르텔 남미 여러 지역
파나마(친미) 니카라과 대운하 거대 중국자본 왕징 홍콩사업가 / 1513 바스코 누네스 데 발보아 스페인 탐험가 파나마 발견 / 다니엘 오르테가(니카라과 대통령)
포클랜드(라스 말비나스 아르헨티나명) 전쟁 1982 아르헨티나 영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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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xboy76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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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일본 대학을 졸업하고 도미하여 러시아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일본계 미국인으로 #태평양전쟁 에서 일본 항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련 인물의 심리나 행동을 일본,미국, 러시아 등의 방대한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여 분석하고 있다 この本の著者は日本の大学を卒業して渡米してロシア史で博士号をもらった日系#アメリカ 人として太平洋戦争から日本降伏に至るまで、数多くの関連人物の心理や行動を、日本、米国、#ロシア などの膨大な文献や資料を参考にして分析している 저자는 전쟁의 연장, #원자폭탄 의 투하, #소련 의 참전,전쟁의 종결 등은 각국의 전쟁 지도자들의 욕망과 공포, 허영심, 분노, 편견 등이 만들어 낸 결과이며 태평양 전쟁에서는 영웅도 악인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著者は戦争の延長、#原子爆弾 の投下、#ソ連 の参戦、#戦争 の終結などは、各国の戦争指導者の欲望や恐怖、虚栄心、怒り、偏見などが作った結果であって、太平洋戦争では#英雄 も悪人もなかったと話す 이 책을 통해 종전을 위해 원자 폭탄을 사용했다는 미국의 입장, #파시즘 과 군국주의에 대항하려는 대의 때문에 태평양 전쟁에 참여했다는 소련의 입장,원자 폭탄과 남쿠릴 영토의 상실 때문에 전쟁 #가해자 라는 인식을 잊은 일본의 입장이 왜 정의롭지 못한지를 알 수 있다 この本を通して、終戦のために原子爆弾を使用したという米国の立場、#ファシズム と軍国主義に対抗しようとする大義のために太平洋戦争に参加したというソ連の立場、原子爆弾と南クリル領土の喪失のために戦争の加害者との認識を忘れてしまった日本の立場がなぜ#正義 ではないか分かる 21/6/24-7/16 #하세가와쓰요시 #長谷川毅 #racingtheenemy translated #暗闘 #종전의설계자들 #한승동 #메디치미디어 #독서그램 #japan #life #세줄평 #얄타조약 #国体 #ポツダム宣言 #thanksnursesanddoctors #savemyanmar (en 矢田川) https://www.instagram.com/p/CRWfMsgglL3/?utm_medium=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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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happyrhin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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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4일)은 #베이징_동계올림픽 개막일 입니다. . 지난 #평창_동계올림픽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공식 SNS에 욱일기 패턴 모자를 쓴 일본 선수 사진이 게재돼 논란이 됐었습니다. . 또한 지난해 #도쿄_하계올림픽 때는 무관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이클 남자 도로 경기중에 욱일기 응원이 등장해 큰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 이처럼 최근 올림픽이 개최될 때 마다 #전쟁범죄 에 사용된 욱일기가 등장해 논란이 됐었는데, 이번 베이징 올림픽때도 예의주시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 그리하여 TV 및 모바일로 경기를 시청하실때 욱일기 문양이 등장하면, DM으로 바로 제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 후에는 저희 측에서 IOC와 올림픽조직위원회측에 즉각 항의를 할 계획입니다. . 특히 전 세계 외신에 제보를 하여 기사화를 통해 '욱일기=전범기'임을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릴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을 예정입니다. . 그럼 '전 세계 욱일기 퇴치 캠페인'은 여러분들과 늘 함께 하겠습니다~^^ . #중국 #베이징 #동계 #올림픽 #일본 #욱일기 #전범기 #전세계 #퇴출 #캠페인 #서경덕 #서경덕교수 Reposted from @seokyoungduk #욱일기는_일본의_폭력과_침략전쟁의_상징이다 #욱일기는전범의상징 #욱일기반대 #욱일기out #욱일기근절캠페인 #욱일기반대캠페인 #군국주의 #일제시대 #일제만행 #일제잔재 #태평양전쟁 https://www.instagram.com/p/CZlFb76pARP/?utm_medium=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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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apesblog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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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史)제2편, 관동군의 폭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ft. 황고둔사건, 쇼와천황, 히로히토, 일본 육군, 관동군,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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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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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디커플시대, 한국의 생존법
김환식 장로 미중 무역전쟁이 21개월 만에 1단계 합의라는 이름으로 봉합됐다. 서로 승리를 말하지만 현재로선 의미가 없다. 이번 합의는 장기전을 향한 탐색전이자 전초전에 불과하다. 미중은 현재 구조적 갈등을 넘어 패권전쟁의 단계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지속됐던 ‘협력과 경쟁’의 이중주가 막을 내리고 오로지 ‘죽여야 사는’ 제로섬 게임에 접어든 것이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은 “향후 미중 협상은 해법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이혼(decouple) 수속을 밟는 과정”이라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40년 동안 대중 포용정책에 지지를 보냈던 미 학계와 친중 노선의 핵심이었던 비즈니스 그룹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승인했던 워싱턴 주류들도 이제 윈윈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대중 압박정책이 지속될 것이란 의미다. 미중 무역전쟁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그 기류가 감지됐다. 학계를 중심으로 중국 위협론이 퍼져나갔다. 국제정치학을 대표하는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오래전부터 “경제발전을 이룩한 중국은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추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중국 위협론은 대다수 미국인에게 하나의 상식이 됐다. 미국의 패권유지 전략은 내공이 있다. 먼저 잠재적 도전국을 면밀히 살핀다. 그 기준은 대략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40% 수준이다. 1970~80년대 욱일승천하던 일본에 일격을 가한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이 그랬다. 미국 내에서 먼저 재팬 배싱(일본 때리기)이 광풍처럼 번졌고 일부 전문가들은 ‘제2차 태평양전쟁’ 가능성까지 운운했다. 1989년 부동산 버블이 무너지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2018년 기준 일본의 GDP는 4조 9709억달러로 미국(20조 4941억 달러)의 24%로 떨어졌다. 소련의 경우 1980년대 초반 미 GDP의 40%까지 쫓아왔지만, 결국 1989년 체제 붕괴로 이어졌다. 이런 미국도 실수(?)를 했다. 중국이 미국 GDP 40% 근처에 도달한 시점은 대략 2008년 금융위기 전후였다. 경제살리기에 바쁜 미국이 한눈파는 사이 중국 경제는 2010년 G2로 우뚝 섰다. 2018년 중국의 명목GDP는 미국의 66%에 달했다. 실질구매력으로 따지면 수년 내 제1위 경제대국이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미국으로선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3월 무역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배경이다. 2011년 미국이 아시아 회귀전략(대중 포위전략)을 선언한 이유다. 이희옥 성균관대 중국연구소장은 현 상황을 ‘냉전 2.0’이라고 명명했다. 5G시대도 미중 사이에 전면전을 예고하는 변수다. 승자독식인 기술전쟁의 속성상 한 번 뒤처지면 만회가 어렵다. 미국이 총력전을 통해 ‘화웨이 죽이기’에 나서는 이유다. 문제는 무역전쟁이 체제·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비화될 것이란 예측이다. 미 국방부는 이미 중국을 주적으로 삼았고 미 의회는 ‘장기적인 전략적 경쟁’으로 명시했다. 이념이 개입되면 싸움의 스케일은 커진다. 국가 존망이 걸린 군사적 충돌로 이어진 역사가 많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다. 센카쿠, 남중국해, 대만 해협 등을 둘러싸고 벌써 화약냄새를 풍기며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있다. 미중 패권전쟁은 갈등과 봉합이 반복되는 장기전이 불가피하다. 현재로선 경험이 풍부한 미국이 우세하지만 중국도 반전을 노리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개혁개방 40주년 기념식’을 통해 ‘상상하기도 힘든 위험’(難以想象的驚濤駭浪)이라고 했다. ‘시간은 중국 편’이라는 전략 속에 다양한 지구전에 착수했다. 공산당 체제 강화를 통해 내부 단속을 시작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희토류 등의 광물자원 무기화와 기술 자주화 등을 통해 미국의 분리정책에 대응할 것이다. 북핵 문제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는 시기 미중 패권전쟁까지 겹쳤다. 우리로선 아찔한 상황이다. 한국전쟁 이후 초유의 사태가 분명하다. 과거의 사고틀은 모두 버려야 한다. 미중 모두에게 ‘명확하고 단호하게’ 할 말을 해야 한다. 어설픈 모호성은 미중 모두에게 외면당하고 방기될 위험성이 크다. 고정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기존의 판단에 정착하지 않는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이 센터장의 지적대로 ‘생각의 노마드화’(Nomadization of thinking)’가 절실한 시기다.(끝) 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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