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7일 월요일이다. 비가 보슬보슬 왔다.
#1
그러니까 이건 다 술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아니, 사실 나는 마음 한켠에 H를 보물처럼 안고 살았으니 술 탓으로 돌리기엔 좀 애매하긴 하다. 그래도 술이 없었다면 우리가 그날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다.
#2
첫 책을 펴냈을 때 난 H의 인스타그램을 알아냈다. 프로필 사진은 흐릿했고 바이오엔 이름도 없었지만 난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H라는 걸.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H에게 DM을 보냈다. 함께했던 시간들 덕분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주소를 알려주고 싶지 않으면 근처 편의점으로 받아도 되니 이 책을 꼭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어쩌고저쩌고. 난 H에게 그 책으로 내가 이런 일을 하는, 이런 걸 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1퍼센트의 확률로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난 언제나처럼 그 1퍼센트에 지독한 희망을 걸었다. 아니야, 안 올 거야, 라고 하면서도 1퍼센트를 절박하게 붙들었다.
#3
여느 때처럼 확률은 나를 단박에 무너뜨렸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H에게서는 답이 오지 않았다. 친구가 아니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물론 확률상 그가 읽었지만 ?뭐라고? 하면서 씹었을 거였다. 난 며칠간 H가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면 나오는 안줏거리가 됐을 게 틀림없었다. 어차피 안줏거리 된 거��아?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난 또 어느 술 마신 밤에 인스타그램 메시지 창에 있는 통화 버튼까지 눌러봤다. 물론 그는 받지 않았고 물론 나는 다음 날부터 내내 벽을 찼다. 합리화도 했다. 아니, 이게 그렇게까지 피할 일이야? 내가 널 죽여? 널 찾아가?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냥 책 한 권이잖아! 세상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책 한 권이란 말이야! 물론 내 소리 없는 아우성은 H에게 닿을 리 없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4
문제는 내가 그 사이에 옛 동네로 이사를 왔다는 거였다. 이 동네는 내가 떠나 있던 8년간 아주 많이 변했지만 또 아주 그대로이기도 했다. 난 따릉이를 타고 10년도 더 전에 H와 함께 걷거나 머물렀던 곳을 돌았다. 그러니 계속 H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대체 왜?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지만 난 나를 이해할 수 있었던 적이 그리 많지 않기도 했다.
#5
내게 남은 동네 친구는 K 하나뿐이었다. 원래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만 다시 집이 꽤 가까워진 우리는 전보다 더 자주 만났다. 번개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H 얘기를 했다. (아니, 제발 그런 건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K는 진절머리를 쳤지만 어느 날은 내 얘기를 듣더니 “네가 왜 그렇게까지 맨날 얘기하는지 이제 좀 알겠다. 야, 나 희생해서 내가 한번 만나게 해줄게”라는 얘기를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확률상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6
여기에도 썼지만 한 달 전 K는 H에게 인스타 팔로우 신청을 했고 맞팔까지 하게 됐다. 난 그것도 이해가 안 됐지만 H는 K에게 DM을 보내기까지 했다. 아래는 H와 K의 대화다. 괄호는 모두 내 어이 없음과 분노다.
“혹시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아는 사이인지도 모르면서 뭐 팔로우까지 받아줘?)
“아, 근데 너무 오래 돼서 기억 못하실 거예요..”(대체 왜 이렇게 아련하게 보내는데? 누가 보면 구애인인 줄 안다고..)
“아,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지고 싶니..? 내 친구가 예뻐 보였어..?)
“..근데 그렇게 좋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어서..”(야, 내가 뭐가 그렇게 안 좋은 기억이라고.. 어차피 10년도 더 전인데 뭐..)
“아, 알려주시면 안 돼요?”(스무고개 하니?)
“아.. 조은혜라고.. 저 걔 친구예요.”
“아..! 안 좋은 기억은 아닌 것 같아요. ㅎㅎ”
“저랑 은혜랑 늘 잘되길 바라고 있어요!”(침은 뱉고 거짓말 했지..?)
대화는 좀 더 이어졌던 것 같은데 사실 더 기억이 안 난다.
#7
어쨌든 나는 K의 흥분한 전화를 받으며 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 DM은 씹어놓고 자기가 먼저 DM을 보내서 아는 사인지 뭔지 물어본다고? 내 DM은 왜 씹는대? 안 좋은 기억은 아니라면서? 왜? 하지만 이것도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다. 난 그 며칠 동안 울분을 토했지만 H를 팔로우 한다거나 H에게 다시 DM을 보낸다거나 하는 짓을 하지는 않았다. 이러다 벽이고 천장이고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동생도 진절머리를 쳤다. “아우, 진짜 제발 그만 좀 해. 걔가 뭐라고 언니는 계속 그래? 아우 아우!” 보통 나는 동생에게 이런저런 말을 잘 쏘아붙이지만 이때는 흘겨보기만 했다. 그 말은 나 스스로에게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이었다. 아우, 진짜 제발 그만 좀 해! 걔가 뭐라고 계속 이러니? 아우 아우!!
#8
그사이 나는 매출이 바닥을 쳤고 굉장히 슬픈 일도 있었다. 3일을 내리 울고도 도저히 수습이 안 되어 집도, 일도 모두 엉망이기까지 했다. 그나마 좀 추슬러가던 중 K를 만났다. 그게 지난 주 금요일의 일이다. 닭발 노래를 부르던 K와 함께 닭발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최근에 있었던 슬픈 일 얘기를 하다 또 살짝 울고 따릉이 타고 지나다니다 봤던 괜찮은 술집에 갔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동네 술집인데도 웨이팅을 해야 했다. 시간을 때우려 근처에 아무 맥주집이나 가서 먹태에 맥주를 마셨다. 2병째쯤 마셨을 때 전화가 왔고 우리는 미련 없이 남은 먹태를 두고 떠났다. 그 술집은 간판도 없어서 뭐라 부르는지도 모르는 곳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마셔보고 싶어 했던 고흥 유자가 있었고 바지락술찜이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술이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9
K가 하이볼을 두 잔째 마시고 있고 내가 고흥 유자를 반 병쯤 마셨을 때 다시 그 슬픈 얘기를 하게 됐다.
“진짜 이제 혼자란 생각에 너무 너무 슬프더라. 운동 가면서도 울었다니까?”
“그랬을 것 같아.”
“아, 진짜 심지어 너무 웃긴 게 내가 버스 타고 예전에 H 살던 데 지나가거든? 거길 지나면서도 또 울었어. 아, 내가 이거 말하면 걔는 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남들처럼 받아들이는 게 아니지 않을까? 하면서.”
“나도 S라면 다 이해해줄 것 같아, 그런 생각해. 도저히 감당 안 되는 일 있고 그러면.”
“다 그런 거겠지?”
여기까지 얘기를 한 건 기억이 나는데 사실 다음은 내가 이미 조금 취해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K가 H에게 DM을 보냈다고 말해서 내가 그 작은 술집에서 조금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 K가 H에게 아직도 거기 사냐고 물어봤다고, 기다려보라고,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는 것 등만 기억난다. 난 내가 하도 말해서 K도 미쳐버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10
그래도 괜찮았다. H에게 DM을 보낸 건 내가 아닌 K고(걔는 내가 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실은 그게 아니니까 난 괜찮다. 진짜로) 어차피 걔는 이쯤 되면 DM을 씹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K가 내 친구인 걸 알았으니 이제 확률상 DM을 씹을 타이밍이었다. 물론 나는 또 0.01퍼센트의 어떤 기적 같은 확률을 기대하긴 했다. 아주 혹시 답장이 오면.. 근데 뭐? 와서 뭐? 산다고 하면 뭐? 안 산다고 하면 뭐? 답도 없었다.
#11
그다음 날 K는 내게 돌아오는 주 금요일에 뭐 하냐고 물어봤다. 금요일은 오랫동안 못 본 후배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기로 한 날이었다. K에게 그렇게 말하니 약속이 다 중요하긴 한데 중요한 약속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냐고, 너 급한 일이면 애들한테 물어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미뤄두었던 집안일을 신나게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저곳을 닦고 쓸고 했다. 그러던 중에 K에게 전화가 왔다.
“야, 금요일에 안 된다고?”
“아니, 후배들 온다니까.”
“그럼 언제 돼?”
“이번 주?”
“응.”
“아, 무슨 일인지 말을 해봐. 일단 캘린더 좀 볼게.”
“아니, 그게 아니라······”
“뭐”
“아니······”
난 이때부터 얘가 설마? 진짜 미쳤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뭐..? 너..?”
“아니, H······ 답장 왔어.”
“뭐라고?”
“거기 산다고 해서 내가 그냥 씹었는데 걔가 나한테 아직 거기 사냐고 물어보는 거야.”
“네가 걔 메시지를 씹었는데 걔가 너한테 다시 보냈다고?”
“어. 그래서 내가 그렇다고······ 혹시 시간 되면 너랑 같이 셋이 저녁에 보면 어떠냐고······”
“??뭐? 너 미쳤어? 아니, 걔가 그러겠냐?”
“그런다는데?”
“뭐?”
“알겠다도 아니고 네, 좋아요, 라고 왔어.”
난 한동안 말이 안 나왔고 K는 입틀막이니..? 라고 물었다. 난 정말 두 번에 걸쳐 소름이 돋았고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싶은 마음이었다. 근데 솔직히 어른들 약속이란 게 뭐 시간 될 때 봐요~ 네, 좋아요~ 하고 약속을 안 잡는 게 얼마나 많은가. H도 그냥 예의상 한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재차 물었다.
“걔가 진짜 본대? 그냥 거기서 대화 끝난 거 아니고?”
“아니 그래서 내가 너한테 물어보기 전에 이번 주 금요일 어떠냐고 했거든? 근데 네가 안 된다고 해서······ 어, 근데 지금 보니까 걔가 수, 목은 안 되냐고 왔는데?”
#12
지금 쓰면서도 약간 어이가 없지만 어쨌든 나는 K가 목요일 안 되냐고 해서 일단 알겠다고 한 상태다. 알겠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 지금 별 생각을 다 하고 있다. 사실 걔가 뭘 팔아야 하는 거 아닐까? 보험? 정수기? 공기청정기? 청소기? 카드? 아니면 갑자기 종교가 생긴 건 아닐까? 그리고 난 하필 또 아주 최근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었기에 걔가 사실은 내게 엄청난 회한을 줄 뭔가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복수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기도 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라 나는 이 상황을 모두 아는 K에게 계속 물음표만 던졌다.
“야, 진짜 이상하지 않아? 몇 달 전에 내 DM은 씹어놓고 너한테 DM하고 셋이 만나자는데 알겠다고 한다고??”
“만나서 물어봐.”
“아니, 나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혹시 걔가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사진 봤는데 괜찮으니까 한 번 보고 싶어서?”
“ㅋㅋㅋㅋ야 그런 낌새는 진짜 없는데 만약에 그런 거면 지금이라도 파투 내자..”
“그걸 어떻게 알고 파투를 내.. 혹시 저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신 거예요? 라고 물어볼 수도 없잖아..”
“아, 네가 계속 이러니까 좀 무섭네.. 어떻게 지금이라도 물러?”
“아니.. 또 그런 건 아닌데..”
그러니까 나는 무서운데 한번 보고는 싶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설레는 중이다. 근데 정말 M자 탈모에 갑자기 살이 엄청 쪄버린 H가 나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니, 그런 걔를 알아볼 수는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 상태가 아니어도 내가 10년도 훨씬 넘어 처음 보는 애를 알아볼 수 있는 걸까..? 아니.. 이게 정말 진짜일까? 정말 목요일에 걔를 보는 걸까..? 진짜로..?
#13
난 이 모든 게 정말 꿈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하루 종일 정말 별별 상상을 다 하고 전전긍긍했는데 와중에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다.
왜 내 DM엔 답장 안 했어? 답장도 안 해놓고 만나자는데 왜 알겠다고 했어? 너 그때 면허 없었는데 어떻게 오토바이 끌고 다녔어? 너 생일 0월 00일이야?(진짜 몇 년 전부터 머릿속에 맴도는 날짜가 있는데 내 주변 누구도 이 생일이 아니고 그날 정말 아무 일도 없는 날이다. 그래서 좀 친한데 생일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고 다녔는데 전부 이날이 아니었다. 그래서 꼭 물어보고 싶다) 뭐 하고 지냈어? 가장 기뻤던 일은 뭐였어? 너무 힘들고 슬펐던 적도 있어? 부모님은 잘 계셔? 누나는 결혼하셨어? 아니, 너는 결혼했어? (혹시 한 번 갔다 왔니? 도 물어보고 싶은데 예의가 아니겠지?)
잠깐만.. 근데 정말 이게 진짜라고? 아, 지척에서 훔쳐보다 그냥 도망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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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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