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의 약속> - 밤낮 (@nightiday)
오랜만에 맞이하는 휴일이었다. 알람을 맞춰 두었는데도 피곤에 잠겨 듣지 못한 모양인지, 히카와 히나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히나는 계속 새어 나오는 하품을 멈추지 못한 채로 엉기적거리며 방을 벗어났다.
고등학교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겨울방학이 시작된 이후로 늘어나기 시작한 스케쥴은 연말을 맞아 급격하게 증가해 파스파레 멤버들을 쉴 틈 없이 일터로 내몰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생활은 1월이 되고 개학을 앞두고 나서야 겨우 쉼표를 찍었다.
“조금 더 잘까?”
물을 마시며 중얼거리던 히나는 문득 시야 한구석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아무도 없던 거실 소파에 어느새 제 언니인 히카와 사요가 앉아 있었다. 아직 꿈을 꾸는 중일까? 히나는 몇 번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다가 저를 흘깃거리는 사요의 눈과 마주치고 나서야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다음 행동은 재빨랐다. 히나는 방으로 들���가려던 걸음을 옮겨 눈치껏 거실로 왔다. 사요의 표정에는 대놓고 안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히나는 정답을 고른 스스로가 대견스러웠지만 들뜨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사요는 그런 히나를 금방 파악한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웃어?”
“응? 우, 웃고 있지 않은데.”
히나는 손을 들어 볼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표정을 바꿨다. 사요는 그런 히나를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다정한 음색이었다. 말에 온도가 있다고 한다면 겨울의 추위를 녹일 정도로 무척 따스했을 것 같았다. 이 말을 건네기 위해 사요가 굳이 방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더 그랬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질 않고. 요즘 많이 바빠서 힘들었잖니.”
“그치만 언니랑 얘기하고 싶은걸. 이렇게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실은 사요가 말한 것처럼 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푹 쉬어 휴식에 전념할 예정이었지만, 히나는 천연덕스럽게 둘러댔다. 걱정과 의심을 섞어 바라보는 사요의 눈빛도 능청스레 넘겼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사요였다. 좀 더 편히 있으라는 듯 사요가 건네는 쿠션을 받아 히나는 품에 꽉 안았다. 싱글벙글 웃으며 발을 동동 구르자 사요가 손으로 허벅지를 지그시 눌러왔다. 사요가 꾸짖기도 전에 히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헤헤, 미안! 이렇게 언니랑 있으니까 너무 신나서.”
“신날 게 뭐가 있니.”
사요는 한숨을 내쉬곤 도로 팔을 가져가 팔짱을 꼈다. 기분 좋은 무게감이 사라져 히나가 잠시 낙담하는 사이 사요가 검지로 팔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바쁜 건 마무리가 된 거야? 최근엔 집에 일찍 들어오지도 못했잖아.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으응. 당분간은 계속 바쁠 것 같아.”
“곧 개학하는데도?”
히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일정을 떠올렸다.
“라디오 게스트 출연, 콘서트 연습, 광고 촬영, 예능 출연, 치사토쨩 드라마에 특별 출연도 해야 하고….”
“잠깐, 히나. 그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치만 지금 파스파레 멤버들도 다 이렇게 일하고 있는 걸.”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일하고 있다니, 그런 이야길 하는 게 아니잖아. 나는 네가….”
“나?”
“네가 걱정되어서 이러는 거잖아.”
히나는 말을 잃었다. 노골적인 사요의 관심과 걱정이 온통 히나를 어루만졌다. 왠지 목이 말라 애꿎은 침만 삼키다가 점점 더 어두워지는 사요의 얼굴을 깨닫고 히나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나도 안 힘들어! 정말이야. 매일 매일 룽하고, 엄청나게 재밌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사요는 불만 어린 어투로 중얼거리곤 입을 닫아버렸다. 말만 그렇게 하지 하나도 믿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어떤 말을 더 하면 좋을지 몰라 히나가 망설이는 사이 사요가 그럼, 하고 말문을 다시 열었다.
“3월에도 많이 바쁠 예정이니?”
3월? 히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제 막 1월 초순을 지나기 시작했으니 3월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3월 초에 졸업식이 있으니 그 뒤에 바빠질 수는 있지만….
“조정해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야. 괜찮아. 안 바빠!”
생각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지만 히나는 호언장담했다. 밴드 스케쥴이 아닌 개인 스케쥴이라면 소속사 사람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사요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히나는 할 수 있는 힘껏 신뢰감이 넘치는 미소를 내보이며 저를 믿으라는 듯 몇 번이나 가슴을 두드렸다. 과장된 행동이 다소 우스웠는지 사요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응. 절대 무리하지 않을게! 근데 3월은 왜?”
은근한 기대감이 담긴 히나의 물음에 사요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볼이 점점 붉어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20일.”
3월 20일. 그 날짜가 어떤 날짜인지 히카와 히나가 모를 리 없었다.
“3월 20일에 바쁜지 알고 싶어서.”
히나는 멍하니 있다가 불안하게 떨리는 사요의 눈빛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허겁지겁 근처 탁자에 놓여있는 달력을 집어 들었다. 두 장을 더 넘겨 별표가 되어 있는 날짜를 확인하고 히나는 바로 대답했다.
“토, 토요일이고, 아무 일도 없을 걸?!”
“그래. 너만 괜찮으면. 그날은 같이 있자.”
“정말?!”
“그래, 정말.”
“약속하는 거야.”
“응.”
3월 20일은 히카와 히나와 히카와 사요의 생일.
사랑해 마지않는 언니로부터 생일 데이트 신청을 받고, 히나는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건 아닐까 의심스러워 제 볼을 쭉 잡아당겼다. 사요는 그런 히나를 보면서 언제나 그랬듯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곤 웃었다.
“룽하지 않아!”
히나의 입에서 나온 건 거절의 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치사토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아야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마야와 이브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스태프는 곤란하다는 듯 웃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히나씨,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3월 20일에는 예정대로 콘서트를 진행할 겁니다. 분명 이전에 콘서트에 대해 말씀을 드렸었죠? 파스파레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납득해주신 걸로 알았는데요.”
“그게 3월 20일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히나씨의 생일이어서 더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3월 20일은 나만의 생일이 아니란 말이야.”
히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스태프는 히나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제 할 말을 무뚝뚝하게 이어갔다.
“스케쥴이 맞는 날이 3월 20일 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공연장 대관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날 공연하기에 실력이, 연습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콘서트 연습은 쭉 해와서 공연에 무리가 가지도 않을 테니 말이죠.”
치사토는 점점 어두워지는 히나의 표정을 보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히나가 풀이 죽은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가 않았다.
“우선 회사 측의 입장은 알았어요. 하지만 콘서트 날짜는 좀 더 미리 알려주셨으면, 아니, 우선 물어보기라도 하셨더라면 히나쨩도 이렇게 반발하진 않았을 거예요. 생일 같은 중요한 날이라면요.”
“치사토씨. 지금이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 콘서트는 진행한다고 분명 말씀드렸었고, 멤버들 모두가 동의했었어요. 갑자기 이렇게 나오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날짜 변경을 하게 되면 너무 많은 것들을 다시 진행해야 해요. 회사 전체가 3월 20일 파스파레 첫 단독 콘서트를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그 점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스태프는 자기가 할 말만 늘어놓고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것마냥 책상 위에 널브러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스태프가 방을 빠져나간 뒤 멤버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히나에게 쏟아졌다.
“히나쨩….”
“공연장이 가깝지도 않은데…. 콘서트가 끝나도 당일날 집에 돌아올 수도 없고 그러면 아예 언니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거잖아.”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는 히나의 모습에 이브가 다가서서는 손을 꼭 잡았다.
“히나씨, 포기하지 말아요! 제가 같이 가서 날짜를 바꿔달라고 말씀 드려 볼게요!”
“그렇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히나씨! 분명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래. 다같이 가서 제대로 사정을 말하면 알아줄 거야!
이어지는 마야와 아야의 말에 고개를 치켜든 히나의 시선은 그대로 치사토에게 향했다. 곤란한 듯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본 히나는 더욱 의기소침해져서는 힘없이 물었다.
“많이 어려울 거 같아?”
“아마도.”
히나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을 본 치사토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도 히나쨩이 정말 원한다면, 나도 같이 가줄게.”
스태프의 강경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쉽게 꺾을 수 있을 결정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도 발 벗고 나서주는 멤버들이 고마웠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제 주변에 가까이 다가선 멤버들의 얼굴을 히나는 하나하나 마음에 담았다. 누구보다도 콘서트를 기대하고 있었던 그 면면을 새기며 짙은 괴로움을 애써 외면했다. 한참의 침묵이 사무실을 휩쓸고 난 다음에야 히나는 작게 고개를 저어 멤버들에게 답할 수 있었다.
히나는 머그잔을 꽉 쥐고 옆에 앉아 있는 사요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3월 20일…. 생일에 함께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흘린 것이 방금 전이었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히나는 죄 없는 컵만 매만지다가 사요의 낮은 한숨에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어쩔 수 없잖니.”
고개를 들어 사요를 바라보자 이번에는 사요가 시선을 피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자연스레 표정을 가렸다.
“일을 우선으로 해야지.”
“괜찮아?”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모처럼 언니가 먼저 말한 거잖아.”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어, 히나. 때로는 약속보다 일을 우선시해야 할 때도 있는 거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요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맞지 않는 시선이 자꾸만 히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조금씩 언성이 높아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히나는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언니랑 내가 한 약속이 우선이잖아.”
“회사에서 날짜를 바꿀 수 없다고 했다면서. 사정은 다 알았으니까,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해.”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요의 왼팔을 히나가 다급하게 잡았다. 그 반동으로 반대쪽 손으로 잡고 있던 머그잔의 물이 넘쳐 바닥을 적셨지만 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요만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화도 안 나?”
“왜 말을 그렇게 해.”
“약속한 것도 어기고, 생일날 같이 있지도 못하는데, 왜 화를 안 내는 건데?”
그제야 사요가 휙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왔다.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히나. 지금 내가 화를 내면. 그러면 네 기분이 나아지겠어?”
정답이었지만 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려다보는 사요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서운해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만해. 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잖아. 이해하려고 하잖아. 나는…. 하아.”
사요는 거칠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호흡을 가다듬고는 팔을 잡고 있는 히나의 손을 떼어 냈다. 잠시 살피는 듯한 시선이 히나를 쭉 훑었다. 이윽고 바닥에 흘린 물로 푹 젖은 히나의 양말까지 눈에 담은 사요는 잠깐 눈썹을 찡그렸지만 별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생일은 내년에도 또 오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요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히나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사요의 방문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그치만 언니가 함께 있자고 말한 생일은 이번이 처음인걸.”
히나의 목소리에선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이번 생일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먼저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히나 자신이었고, 일이 이렇게 된 데엔 전적으로 히나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러니 화도 내지 않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사요를 보면서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 건지. 히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은 척도 할 수 없었다.
사요는 정말 함께 생일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생일에 함께 있는 게, 별 것 아닌 약속이어서?
생일은 어차피 매년 돌아오는 거니까?
히카와 사요에겐, 언니에겐, 히카와 히나의 생일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아니, 아니다. 사요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히나는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다정한 히카와 사요를 잘 알았다. 어렵게 콘서트 이야기를 꺼낸 자신을 배려해서 괜찮다고 답한 사요의 마음을 싫을 정도로 알았다.
그런데도 히나는 자꾸만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고개를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약속을 했는데 왜 어긴 거냐며 화를 내도 괜찮다. 지금이라도 일정을 바꿀 순 없는 거냐며 칭얼거리는 것도 좋다. 그도 아니면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며 아쉬운 티라도 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은, 사요는 저 굳게 닫힌 방문 너머에 있다.
언제 이렇게 바라는 게 많아진 걸까.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번뜩 정신이 들었다. 히나는 욕심쟁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깨달았다. 이전과 같은 언니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걸 알아버리고 말았다.
린코가 흔쾌히 허락해준 덕분에 사요는 점심시간에 학생회실을 빌릴 수 있었다. 학생회실이 낯선 것인지 두리번거리는 아야와 그런 아야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 있는 치사토에게, 사요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이, 너무 딱딱하다, 사요쨩.”
“아야쨩의 말이 ��아. 같이 밥을 먹는 걸로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
세 사람은 우선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풀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모이자고 제안했으니 무슨 말이라도 꺼내는 게 맞을 텐데, 사요의 머릿속은 얼마 전부터 히나에 대한 생각으로 엉망인 채였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사요를 금방 알아차린 치사토가 입을 열었다.
“히나쨩 관련된 일이지?”
“네?”
“사요쨩이 이렇게까지 어쩔 줄 몰라 하고, 또 우리한테 말을 걸어온 걸 보면 말이야.”
조금은 놀리는 것 같기도 한 말투였다. 사요는 잠시 망설이다가 히나와 있었던 일을 두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히나와도 가깝고, 다툼의 원인이 된 콘서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만든 것이 사실이었다.
다툼 아닌 다툼이 있었던 그날 이후, 사요는 히나의 얼굴을 도통 마주할 수 없었다. 사요가 히나를 피하는 것은 아니니 히나가 사요를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처음으로 히나가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깨닫고 사요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과거 자신의 행동까지 겹쳐 보여 이따금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로젤리아 밴드 연습에서는 유키나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개학을 한 이후에도 다를 건 없었다. 정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히나쨩, 사요쨩과 다퉈서 그렇게 기운이 없었던 거구나.”
아야는 기운 없는 히나의 모습을 곧바로 떠올린 것인지 괴로운 표정을 짓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퉜다…. 사요는 아야의 말을 한 번 곱씹고 눈을 내리깔았다.
“후회되는 건 제 스스로 감정 조절을 못한 거예요. 히나에게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가장 속상한 건 히나란 걸 알면서도 그 앨 달래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요. 사실 저도…. 히나의 말에 실망했었거든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당시엔 어른스럽지 못했어요.”
사요는 두 사람에게 고해 성사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늘어놓았다. 마음이 가벼워지자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용서를 구할 사람은, 이 말을 직접 건네야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하지만 히나가 저를 피한다는 확신을 얻으면 얻을수록, 사요는 점점 더 히나에게 다가갈 용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먼저 다가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게 어렵고 어려워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생각이 닿은 것이 같은 학교의 파스파레 멤버들이었다. 사요는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치사토와 아야는 서로를 바라보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히나쨩이 너무 낙담해서 파스파레 멤버들끼리도 고민이 많았어. 회사에서 날짜 변경은 도저히 안 된다고 하고…. 그렇다면 차라리 히나쨩에게 특별한 생일날을 만들어 주자는 얘기를 했거든.”
“그래서 우리도 때마침 사요쨩에게 도와달라 부탁하려던 참이었어.”
“부탁이요?”
“생일 축하 영상을 만들 생각이야.”
아야는 쥐고 있던 수저를 더 꽉 쥐며 야심차게 말했다.
“히나쨩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인터뷰를 여럿 따서 영상 편지를 만드는 거지. 아, 다른 사람들 것도 찍어서 편집할 거니까 너무 부담가지지 않아도 돼!”
“혹시 불편하면 거절해도 괜찮아.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아뇨, 불편하다기보다는.”
사요는 잠깐 말을 망설였다 작게 중얼거렸다.
“이걸로 그 아이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작은 목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치사토가 미소를 짓고 말했다.
“사요쨩은 히나쨩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네? 가, 갑자기 무슨.”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한 것뿐이야.”
장난기 어린 치사토의 말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사요를 본 아야는 키득거리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히나쨩이 알면 정말 기뻐할 텐데.”
“그 애는 제 동생이고 저는 그저 언니로서….”
치사토와 아야는 부정하는 사요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은근한 미소를 걸치고 저를 응시하는 시선을 피하지 못한 사요는 어느새 발갛게 물든 볼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촬영은 사요가 고민을 털어놓은 방과 후 3학년 A반에서 진행되었다. 때마침 아야가 캠코더를 가지고 등교한 덕분이었다. 먼저 촬영한 팝핀파의 영상을 보겠냐는 물음에 사요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을 참고하고 싶지 않았다. 히카와 사요의 마음은 히카와 사요의 말로 전하고 싶었다.
책상과 의자를 모두 교실 앞쪽으로 밀고, 빈 자리에 의자 하나만을 두었다. 사요는 그 자리에 앉아 분주해 보이는 아야와 치사토를 바라보았다. 렌즈를 보자 그제야 조금 긴장이 되었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긴장을 달랜 사요는 시선을 곧게 앞으로 향했다.
“지금 말하면 되는 건가요?”
간이삼각대에 캠코더를 고정시킨 치사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빨간불이 켜져 있었다.
“히나, 안녕.”
사요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수업시간 내내 집중도 못하고 계속 생각만 했는데도 이렇다. 아야가 건너편에서 수신호를 보내는 것을 치사토가 손을 저어 말렸다. 계속해도 괜찮은 걸까? 잠시 두 사람을 살핀 후 별다른 반응이 없자 사요는 천천히 마음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생일 축하해.”
가장 먼저 축하의 말, 그 다음은 사죄의 말.
“그날 신경질적으로 굴어서 미안해. 변명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파스파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까, 그 장소가 네게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까. 내 욕심을 앞세우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사실은, 히나.”
사요는 꽉 주먹을 쥐었다.
“나도 너와 같이 생일을 보내고 싶어. 잊은 건 아니지? 먼저 같이 있자고 한 건 나라는 걸.”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네 마음을 먼저 살피지 못한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난 항상 네게 미안한 일만 하는 것 같아. 그래도 이런 나를 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는 거겠지.”
“고마워, 히나. 네 옆에 나란히 설 수 있도록 나도 더 노력할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오늘 하루가 너에게 즐거운 날이 되었기를.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히나."
이내 빨간불이 꺼졌다. 사요는 후우,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런 사요를 보고 치사토가 입을 열었다.
“솔직한 마음이 담긴 멋진 편지라고 생각해.”
“으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히나쨩도 보면 정말 기뻐할 거야. 그런데….”
“아, 녹화가 잘 안 됐나요?”
사요가 걱정스럽게 묻자 치사토가 빙긋 웃고는 아야를 바라보았다. 나, 나?! 아야가 잠시 당황하더니만 눈썹을 모으곤 손을 만지작거렸다. 눈치를 보는 듯한 그 행동에 사요는 어쩐지 불길해져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그게 사실, 있잖아, 사요쨩…. 찍기 전에 전하는 걸 깜빡했지 뭐야. 이 영상은 콘서트에서 틀 거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봐도 괜찮은 생일 축하 영상을 찍어야 해. 방금 전에 한 말들은 팬들이 들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런. 미리 말을 해줄 걸 그랬나봐.”
녹화를 시작하고 나서 아야가 다급하게 보내던 수신호는 그런 의미였던 걸까. 다 알면서 촬영을 그대로 진행한 치사토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다시 캠코더를 조작했다. 사요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게 하고는 벌떡 일어나 치사토를 쏘아봤다.
“시라사기씨…!”
“너무 걱정하지 마. 다시 찍을 거니까. 후훗. 사요쨩도 히나쨩의 일이 되면 이렇게 되는구나.”
“이렇게는, 어떻게인 건가요….”
“자아, 시간이 없어. 얼른 다시 찍자.”
“방금 전 찍은 건.”
“콘서트 땐 제대로 된 영상을 내보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방금 전에 한 말들은 영상으로 전하는 것보다는 히나쨩에게 직접 들려주는 게 좋지 않겠어?”
치사토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사요는 불편한 심기를 누르고 다시 자리에 앉아 렌즈를 바라보았다.
히나는 성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요와는 여전히 서먹한 상태로 3월 20일을 맞이하고 말았다. 19일인 어제, 금요일에 리허설을 위해 공연장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으니 정말로 올해 생일은 사요와 함께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어떤 얼굴로 사요를 보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어디까지 사요에게 제 욕심을 내비쳐도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욕심을 깨닫기 전엔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던 모든 것들이 새로웠다. 히나는 계속 마음이 어지럽기만 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졸업식도 온통 엉망인 상태로 보냈다. 졸업식만큼은 사요를 피할 수 없었다. 제 마음을 어떻게 갈무리하면 좋을지 몰라 방황하는 게 바보같이 보일 정도로 사요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요가 다가와 졸업을 축하한다고 했을 때는 혼을 빼놓고 사요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 얼굴. 좋아. 좋은데. 좋지만. 언니….
나중에 부모님에게 건네받은 사진의 히나는 웃고 있었다.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기억력에는 자신이 있는데 제 얼굴이어서 그런 건지 잘 기억이 나진 않았다. 그래도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요의 얼굴은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좀 더 즐거운 졸업식일 수 있었는데. 하네오카의 졸업식도 하나사키가와의 졸업식도 모두 끝났다. 사요는 눈에 띄게 말수가 없어진 히나를 보고도 다 이해한다는 듯 굴었다. 히나는 또 그게 불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은 자꾸만 꼬리를 물고 물어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히카와씨!”
“히나쨩, 생일 축하해!”
“히나씨, 축하드림다!”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지고 박수가 쏟아졌다. 오전 최종 리허설을 앞두고 스태프와 멤버들을 모아 간단한 생일파티를 했다. 히나는 방긋 웃으며 크게 고마워, 인사를 돌렸다. 모두가 웃는 얼굴로 히나의 생일을 축하하고 건강을 빌었다. 즐거운 일만 가득하기를 빈다고, 행복한 한 해를 보내라고 덕담�� 건넨다. 히나는 웃었다. 열심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누가 보아도 오늘의 주인공인 히나는 행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딱 한 사람만 더 있었더라면.
정말로 생일을 축하 받고 싶었고, 축하해주고 싶었던 그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 완벽했을 텐데. 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렇게 사무치도록 외롭지 않았을 텐데.
“와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봐.”
저도 모르게 툭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히나가 뒤늦게 탄식했다. 평소처럼 우기고, 조르고, 애원하고, 뭐라도 좋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같이 있자고 할 걸 그랬다.
“그럼 이쯤에서 주변 정리하고, 파스파레 분들은 최종 리허설 들어가겠습니다!”
히나는 순식간에 혼잡해진 방 안에서 사람을 헤치고 가방이 있는 곳으로 향해 핸드폰을 찾았다. 사요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공연이 끝나면 무리해서라도 돌아갈 테니까, 자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사요가 밤이 늦어 위험하다고 꾸짖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멋대로 굴지 말라고 혼내더라도 다 괜찮았다.
“히카와씨?”
스태프에 부름에 가방을 뒤지던 히나는 고개를 들었다. 파스파레 멤버들과 스태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히나를 보고 있었다. 히나는 잠시 시끄러워진 머리를 잠재웠다. 아무리 찾아도 핸드폰이 보이질 않는다. 괜찮아. 기억할 수 있어.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숙소에 핸드폰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낭패였다.
“무슨 일 있어, 히나쨩?”
“아니야, 갈게.”
최종 리허설이 우선이었다. 기대감과 긴장감이 어우러진 멤버들의 얼굴을 보고 히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모든 게 다 끝나면 언니를 보러 가자.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아야가 중간 MC에서 두 번 정도 혀를 깨물어 버벅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식적인 마지막 노래를 끝내고 멤버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후다닥 무대 안쪽으로 뛰어든 상태였다. 밖에서는 온통 앵콜 콜이 울리고 있었다.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말없이 무대의상을 갈아입고 있었다. 가장 먼저 스테이지로 올라간 것은 발을 동동 구르며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아야였다. 아야쨩! 깜짝 놀란 치사토가 급하게 따라 나갔고, 이브와 마야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키득거리곤 그 뒤를 이었다. 히나는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 시계를 찾아내 시간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스테이지로 올라갔다.
무대 구석구석을 비추는 조명에 눈이 부셨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객석이 보였다. 무대 가운데에선 치사토가 마이크에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흥분한 아야를 타이르는 게 보였다. 히나는 큐시트를 떠올리며 자리로 향했다. 첫 앵콜곡은 데뷔곡인 슈와링 드리밍이었다.
“여러분, 앵콜 고마워요!!”
앵콜 첫 곡 다음 순서는 아야의 MC 였다. 히나는 잠시 숨을 돌리며 물병을 집어 들었다. 앞으로 두 곡만 더 연주하면 끝이 난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까, 히나가 루트를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전광판이 번쩍였다.
“어?”
히나가 고개를 올려 화면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영화관에 온 것처럼 전광판만이 존재감을 빛냈다. 화면에서는 곧 히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팝핀파티입니다! 파스파레 첫 단독 콘서트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그리고, 3월 20일이라고 하면~?! 히카와 히나씨의 생일이죠! 생일 축하드립니다!!>
와아아아-
뒤늦게 객석에서도 함성이 올랐다. 히나는 아직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해서 눈만 깜빡거리다 어느새 다가와 옆에 선 멤버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아야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때?”
“우리가 준비한 선물인데.”
“헤헷. 꽤 힘냈지 말입니다.”
“히나씨가 웃어준다면, 이 정도는 해내는 것이 무사의 도리입니다!”
스크린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멤버들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저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에 히나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이런 걸 다 언제 준비한 거야.”
화면에는 계속해서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애프터 글로우, 헬로해피, 라스 그리고… 로젤리아. 히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4명뿐이었다. 순간 팬들의 함성이 고요해지더니 곧바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히나를 파스파레 멤버 누구랄 것 없이 부드럽게 지탱했다. 히나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 어깨를 잡은 아야를 바라봤다. 아야는 웃으며 말했다.
“끝까지 보는 거야, 히나쨩.”
그와 동시에 화면이 반짝였고, 객석에서 가장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파스파레 팬 여러분. 공연은 즐겁게 즐기고 계신가요?>
낯익은 목소리.
모를 수가 없는.
평생을 들어온.
<저는 히카와 사요라고 합니다. 알고 계시는 분이 있으실 지도 모르겠지만, 히카와 히나의 언니입니다.>
언니.
<히나는, 제 쌍둥이 동생입니다. 기타를 정말 잘 치고, 기타 뿐만이 아닌 뭐든지 금방 잘 해내는 아이예요. 조금은 엉뚱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서투른 부분도 있지만. 그것도 그 아이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파스파레의 팬 여러분이라면 그런 히나의 매력도 이미 알고 계시겠죠.>
영상 속 사요가 작게 미소지었다.
<오늘은 히나의 생일입니다. 소중한 휴일에 시간을 내서 파스파레의 공연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많은 분들이 오셨겠죠. 파스파레를, 히카와 히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히나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히나야-! 사랑해-! 히나!
멀리서 여러 목소리가 들렸다. 히나는 뒤를 돌아봤다. 빼곡하게 채워진 공연장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풍경인데도 새로워 보였다. 흔들리는 민트색 블레이드가 끊임없이 시야에서 일렁였다.
<팬 여러분,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도 파스파레를, 파스파레의 기타리스트 히카와 히나를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이 히나의 곁에서 파스파레와 히나를 지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히나는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운 사요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히카와 히나의 편이 되어 달라 청하는 제 하나뿐인 쌍둥이 언니를.
<마지막으로… 히나.>
그리고 그 입에서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렸을 때, 히나는.
<내 동생으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히나는 더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숙소인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히나는 계속해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눈은 여전히 퉁퉁 부은 채였다. 콘서트를 마친 후부터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냉찜질팩을 대고 있었건만 붓기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얼굴로 사요를 찾아갈 순 없었다.
“룽하지 않아….”
사요를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볼에 바람이 들어갔다. 다람쥐 마냥 볼을 잔뜩 부풀리던 히나는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히히 웃었다. 언니가 그런 영상을 찍었다니! 여기저기서 들린 팬들의 목소리, 멤버들의 따스한 손, 다정한 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말. 히나는 그 모든 것들을 평생 잊지 않을 셈이었다.
“히나쨩…, 좋은 건 알겠지만 잠 좀 자자….”
“치사토쨩, 어떻게 그런 걸 찍을 생각을 했어? 응? 찍을 때 언니는 어땠어? 자지 말고 일어나 봐-! 아야쨩도, 이브쨩도, 마야쨩도!!”
콘서트가 끝나 기력이 빠진 멤버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자고 있었기 때문에 히나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히나와 가장 가까이 앉은 치사토가 눈을 반쯤 뜨고서 극성맞은 히나를 애써 견디고 있었다.
“계속 잘 거야!?”
“계속 잘 거야.”
“말 안 해줄 거야!?”
“말 안 해줄 거야.”
치사토는 건성으로 히나의 장단을 맞춰준 후 가방을 뒤적거려 아이패드를 꺼내 히나에게 건넸다.
“아이패드는 왜?”
“이따 방에 들어가서 보고 자. 사진 앱에 들어가서 SY로 검색해. 마지막 생일선물.”
그렇게 말하고선 치사토는 아예 이브쪽으로 돌아누웠다. 분명 자고 있는 게 분명할 텐데, 치사토가 다가온 걸 알아차린 것처럼 이브는 자연스럽게 치사토를 제 품에 꽉 안았다. 치사토의 감긴 눈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며 히나는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호텔에 도착해 좀비처럼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는 멤버들에게 인사를 하고 히나는 재빨리 제 방 입구에 있는 욕실로 뛰어들었다. 아침에 급하게 머리를 말리고 나서느라 놓고 간 핸드폰은 역시나 기억 그대로 세면대 위에 놓여 있었다.
“휴. 정말.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영상을 보기 전에 사요에게 전화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히나는 잠깐 상상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어쨌든 중요한 건 3월 20일, 아직 12시가 지나지 않아 오늘은 여전히 생일이라는 점이었다. 사요에게 전화를 걸어서 생일을 축하해줄 수 있다. 히나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키패드를 열어 1번을 꾹 눌렀다. 자주 들어 곧잘 흥얼거리곤 했던 컬러링과 함께 어디선가 익숙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어?”
아무리 들어도 욕실 밖에서 들리는 게 맞았다. 말도 안 돼. 설마. 히나는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면 급하게 들어오느라 카드키를 따로 키홀더에 넣지 않았는데도 방에는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달칵,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짧은 복도 너머 넓은 침대 위.
“늦었네, 히나.”
여상한 목소리로 사요는 히나를 맞이했다.
“제대로 약속 지키러 왔어.”
히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자리에 멈춰 섰다가 천천히 사요에게로 다가갔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이 방에는 어떻게 들어온 건지, 왜 말을 하지 않고 온 건지, 어쩌다 영상을 찍을 마음이 생긴 건지, 멋대로 피해 다닌 자신이 밉지는 않았는지…. 수많은 질문이 입안에서 서로 나가겠다 아우성쳤지만 결국 어느 것도 입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히나를 사요가 살짝 허리를 기울이며 올려다보았다.
“눈이 왜 그래?”
“너무 울어서…. 못생겼으니까 보지 마….”
히나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사요는 피식 웃고는 도로 팔을 잡아 내렸다. 사요의 손이 닿은 팔이 화끈거렸다.
“벌써 다 봤어. 못생기지도 않았고.”
“아닌데.”
“고집은.”
“완전 눈 많이 커졌는데. 엄청, 엄청 통통해졌는데.”
투덜거리며 말하니 사요가 황당한지 허탈하게 웃고는 제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히나는 못 이기는 척 사요의 옆에 앉았다. 침대가 푹신해서 잠시 휘청거리자 방황하는 손을 사요가 끌어당겼다. 히나는 은근슬쩍 사요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아직 바깥의 추위가 옷에 남아있었는지 사요가 작게 몸을 떨었다. 많이 추울까? 히나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사요를 올려다보았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딱 붙은 채로, 잠시동안 히나도 사요도 말이 없었다.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가 두 사람의 숨소리와 차분하게 어우러질 무렵 히나가 조심스럽게 사요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오늘이 끝나기 전에 언니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 12시는 얼마 남지 않았다. 3월 20일, 약속의 날이 곧 끝난다. 그 전에 히나는 사요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이 말을,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닿고 싶어서, 곁에 있고 싶어서, 그게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기를 원하고 원해서….
히나는 사요의 손에 깍지를 꼈다. 사요는 말없이 그런 히나의 손을 조금은 아플 정도로 쥐었다. 언니가 언제라도 이 손을 놓지 않기를. 놓는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먼저 손을 내밀겠다고 다짐하면서, 히나는 고개를 들어 사요에게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언니.”
사요는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답했다.
“생일 축하해, 히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3월 20일, 어느 약속이 이뤄지던 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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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밤낮
-트위터 아이디 : @nightiday
-코멘트 :
전 세계에서 히카와 자매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획에 참여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히카와가 영원히 행복하기를.
사요, 히나,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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